순조실록17권, 순조 14년 1814년 9월
9월 1일 무자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9월 5일 임진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의관에게 다리를 진찰하라고 명하였다. 의관이 진찰을 마치고 아뢰기를, 다리에 약간 부기(浮氣)가 있는 듯한데 습담(濕痰)이 경락(經絡)에 흘러 들어가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인동차(忍冬茶)를 올리고, 외부에는 총과병(蔥瓜餠)을 붙였다. 이날부터 날마다 입진하였다.
예조에서 각각 식년마다 경외에서 의정부에 장보(狀報)한 충신·효자·열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등(分等)하여 초계(抄啓)하였다.
충신 정려질(忠臣旌閭秩) 【서울에 살던 고(故) 학생 이흥식(李興植)은 신미년에 서도에서 적변이 났을 때 그의 형 이호식(李祜植)의 곽산(郭山) 임소에 따라갔었는데, 적이 돌입하자 분노해 꾸짖다가 살해를 당하였다.】 효자 정려질(孝子旌閭秩) 【서울의 고 부사 심양지(沈養之)·고 서윤(庶尹) 정지덕(丁志德)·고 양인 지도영(池道榮)·고 부정(副正) 신영(申韺)·고 도정 황운조(黃運祚)·증 교관 이복운(李復運)·고 학생 한광익(韓光益)·고 동몽 신근수(愼根秀), 수원부의 고 정언 최도문(崔道文)·고 진사 최수복(崔受復), 적성(積城)의 서인 이후손(李厚孫), 진잠(鎭岑)의 고 사인 유동혁(柳東爀), 전주의 고 사인 조대수(趙大壽), 연안(延安)의 고 관노 이창매(李昌梅), 안변(安邊)의 고 학생 유인청(柳仁淸), 함흥(咸興)의 고 학생 주흠렬(朱欽烈)이다.】 효부 정려질(孝婦旌閭秩) 【풍천의 한량 박진표(朴震杓)의 모(母) 최성(崔姓), 원주의 고 엄유 이동석(李童錫)의 처 김씨(金氏)이다.】 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 【서울에 사는 고 사인 신석은(申錫殷)의 처 신씨(愼氏)·고 사인 심택모(沈宅模)의 처 이씨(李氏)·고 장사랑 박경식(朴敬植)의 처 곽씨(郭氏)·고 학생 이명성(李明誠)의 처 한씨(韓氏)·고 학생 조욱영(趙旭永)의 처 홍씨(洪氏)·고 출신 서명준(徐命俊)의 처 김성(金姓)·고 학생 이희귀(李羲龜)의 처 유씨(兪氏)·고 학생 남병헌(南秉憲)의 처 서씨(徐氏)·고 통덕랑 정승환(鄭昇煥)의 처 이씨(李氏)·사인 신사일(愼師一)의 처 원씨(元氏)·고 학생 허만(許晩)의 처 이씨(李氏)·사인 권인수(權仁壽)의 처 이씨(李氏)·고 학생 윤좌열(尹佐烈)의 처 이씨(李氏)·개성부의 고 사인 임경립(林景立)의 처 박씨(朴氏)·고 부사과 유순룡(劉順龍)의 처 장씨(張氏)·수원부의 고 하리 나계술(羅繼述)의 처 박성(朴姓)·고 기패관(旗牌官) 박규연(朴奎淵)의 처 유성(兪姓), 시흥(始興)의 고 학생 유최인(柳最寅)의 처 김씨(金氏), 영평(永平)의 고 학생 김학례(金學禮)의 처 성씨(成氏), 양천(陽川)의 고 사인 권유(權攸)의 처 정씨(丁氏), 공주의 증 참판 최상규(崔相奎)의 처 문씨(文氏), 청안(淸案)의 고 사인 홍재범(洪在範)의 처 김씨(金氏), 천안의 고 양인 백동제(白東齊)의 처 최성(崔姓), 임피(臨陂)의 고 사인 조익순(趙益淳)의 처 김씨(金氏), 김제(金堤)의 고 사인 이만득(李晩得)의 처 박씨(朴氏), 광주(光州)의 고 한량 오차배(吳次培)의 처 백성(白姓), 법성(法聖)의 고 한량 송윤지(宋允之)의 처 박성(朴姓), 고부(古阜)의 고 사인 이시채(李始采)의 처 유씨(柳氏), 대구의 고 사인 이함후(李咸厚)의 처 윤씨(尹氏), 영천(永川)의 고 양인 박천억(朴千億)의 처 최성(崔姓), 문경의 고 사인 정위(鄭謂)의 처 신씨(申氏), 영양(英陽)의 고 사인 이수연(李壽延)의 처 이씨(李氏), 거창(居昌)의 고 사인 변동현(卞東賢)의 처 이씨(李氏), 영산(靈山)의 고 학생 배윤휘(裵允徽)의 처 권씨(權氏), 창원(昌原)의 고 업유 박경천(朴擎天)의 처 배씨(裵氏), 경주의 고 사인 최종백(崔宗白)의 처 정씨(鄭氏), 양구(楊口)의 고 학생 정운하(鄭橒厦)의 처 박씨(朴氏), 홍천(洪川)의 고 사인 민건수(閔建洙)의 첩 이성(李姓), 안협의 고 학생 이제(李㫼)의 처 이씨(李氏), 춘천의 고 사인 최서(崔瑞)의 처 이씨(李氏), 해주의 고 사인 이상조(李尙祖)의 처 양씨(梁氏), 황주(黃州)의 고 사인 안득제(安得濟)의 처 김씨(金氏), 서흥(瑞興)의 고 한량 엄동연(嚴東延)의 처 오성(吳姓), 의주의 고 사인 백윤희(白允希)의 처 조씨(趙氏), 성천(成川)의 고 학생 김대백(金大白)의 처 김씨(金氏)·고 학생 홍상일(洪尙一)의 처 박씨(朴氏), 순천의 고 학생 이창국(李昌國)의 처 김씨(金氏), 가산(嘉山)의 고 학생 김인식(金仁識)의 처 오씨(吳氏), 안북(安北)의 병영리(兵營吏) 김석리(金錫履)의 처 김씨(金氏), 후주(厚州)의 향인 원광하(元光華)의 처 강씨(姜氏), 경성(鏡城)의 고 학생 현상설(玄商枻)의 처 정씨(鄭氏)이다.】 효녀 정려질(孝女旌閭秩) 【대구의 고 사인 이함후(李咸厚)의 두 여아(女兒)이다.】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 【거창의 고 감무 이지활(李智活)로,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조용히 지낸 자. 온양의 고 사인 강대(姜玳)로, 무신년 역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친 자. 진주의 고 의병장 허국주(許國柱)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양성에 들어가 지킨 자. 경주의 고 봉사 백이소(白以昭)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정유 재란 때 전사한 자. 경산(慶山)의 고 참의 장몽기(張夢紀)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당교(唐橋)의 전투에서 순절한 자이다.】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에 사는 고 통덕랑 김의집(金義集)과 고 학생 윤항동(尹恒東)·이희귀(李羲龜)·남숙(南鏽), 수원부의 고 사인 김성렬(金星烈), 개성부의 고 사인 한도혁(韓道奕)·우득룡(禹得龍), 부평(富平)의 고 위솔 남연(南淵), 홍양(興陽)의 고 진사 이표(李彪), 남포(藍浦)의 고 통덕랑 이기상(李基商), 보은의 고 첨지 황우하(黃遇河)·고 사인 송보상(宋保相), 옥천의 고 사인 정이제(鄭利濟), 진잠(鎭岑)의 고 사인 이승(李乘), 아산(牙山)의 고 사인 박이화(朴履和), 장흥(長興)의 고 사인 조석태(趙碩泰), 전주의 고 군수 이여충(李汝忠), 흥양의 고 사인 진성하(秦聖夏), 나주의 고 사인 나상기(羅尙紀), 언양(彦陽)의 고 진사 서석린(徐錫麟), 금산(金山)의 고 사인 조세룡(曹世龍), 안의의 고 학생 신수침(愼守沈), 지례(知禮)의 고 학생 이윤적(李胤績), 진주의 고 학생 정현의(鄭鉉毅), 안동의 고 생원 신광집(申光集), 평해(平海)의 고 사인 황명규(黃命圭), 홍천(洪川)의 고 사인 민광로(閔光魯)·민백진(閔百珍), 춘천의 고 학생 한덕조(韓德祚), 해주의 고 사인 김백원(金百源), 장연(長淵)의 고 사인 백홍의(白鴻儀).】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71면
【분류】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
효자 정려질(孝子旌閭秩) 【서울의 고 부사 심양지(沈養之)·고 서윤(庶尹) 정지덕(丁志德)·고 양인 지도영(池道榮)·고 부정(副正) 신영(申韺)·고 도정 황운조(黃運祚)·증 교관 이복운(李復運)·고 학생 한광익(韓光益)·고 동몽 신근수(愼根秀), 수원부의 고 정언 최도문(崔道文)·고 진사 최수복(崔受復), 적성(積城)의 서인 이후손(李厚孫), 진잠(鎭岑)의 고 사인 유동혁(柳東爀), 전주의 고 사인 조대수(趙大壽), 연안(延安)의 고 관노 이창매(李昌梅), 안변(安邊)의 고 학생 유인청(柳仁淸), 함흥(咸興)의 고 학생 주흠렬(朱欽烈)이다.】 효부 정려질(孝婦旌閭秩) 【풍천의 한량 박진표(朴震杓)의 모(母) 최성(崔姓), 원주의 고 엄유 이동석(李童錫)의 처 김씨(金氏)이다.】 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 【서울에 사는 고 사인 신석은(申錫殷)의 처 신씨(愼氏)·고 사인 심택모(沈宅模)의 처 이씨(李氏)·고 장사랑 박경식(朴敬植)의 처 곽씨(郭氏)·고 학생 이명성(李明誠)의 처 한씨(韓氏)·고 학생 조욱영(趙旭永)의 처 홍씨(洪氏)·고 출신 서명준(徐命俊)의 처 김성(金姓)·고 학생 이희귀(李羲龜)의 처 유씨(兪氏)·고 학생 남병헌(南秉憲)의 처 서씨(徐氏)·고 통덕랑 정승환(鄭昇煥)의 처 이씨(李氏)·사인 신사일(愼師一)의 처 원씨(元氏)·고 학생 허만(許晩)의 처 이씨(李氏)·사인 권인수(權仁壽)의 처 이씨(李氏)·고 학생 윤좌열(尹佐烈)의 처 이씨(李氏)·개성부의 고 사인 임경립(林景立)의 처 박씨(朴氏)·고 부사과 유순룡(劉順龍)의 처 장씨(張氏)·수원부의 고 하리 나계술(羅繼述)의 처 박성(朴姓)·고 기패관(旗牌官) 박규연(朴奎淵)의 처 유성(兪姓), 시흥(始興)의 고 학생 유최인(柳最寅)의 처 김씨(金氏), 영평(永平)의 고 학생 김학례(金學禮)의 처 성씨(成氏), 양천(陽川)의 고 사인 권유(權攸)의 처 정씨(丁氏), 공주의 증 참판 최상규(崔相奎)의 처 문씨(文氏), 청안(淸案)의 고 사인 홍재범(洪在範)의 처 김씨(金氏), 천안의 고 양인 백동제(白東齊)의 처 최성(崔姓), 임피(臨陂)의 고 사인 조익순(趙益淳)의 처 김씨(金氏), 김제(金堤)의 고 사인 이만득(李晩得)의 처 박씨(朴氏), 광주(光州)의 고 한량 오차배(吳次培)의 처 백성(白姓), 법성(法聖)의 고 한량 송윤지(宋允之)의 처 박성(朴姓), 고부(古阜)의 고 사인 이시채(李始采)의 처 유씨(柳氏), 대구의 고 사인 이함후(李咸厚)의 처 윤씨(尹氏), 영천(永川)의 고 양인 박천억(朴千億)의 처 최성(崔姓), 문경의 고 사인 정위(鄭謂)의 처 신씨(申氏), 영양(英陽)의 고 사인 이수연(李壽延)의 처 이씨(李氏), 거창(居昌)의 고 사인 변동현(卞東賢)의 처 이씨(李氏), 영산(靈山)의 고 학생 배윤휘(裵允徽)의 처 권씨(權氏), 창원(昌原)의 고 업유 박경천(朴擎天)의 처 배씨(裵氏), 경주의 고 사인 최종백(崔宗白)의 처 정씨(鄭氏), 양구(楊口)의 고 학생 정운하(鄭橒厦)의 처 박씨(朴氏), 홍천(洪川)의 고 사인 민건수(閔建洙)의 첩 이성(李姓), 안협의 고 학생 이제(李㫼)의 처 이씨(李氏), 춘천의 고 사인 최서(崔瑞)의 처 이씨(李氏), 해주의 고 사인 이상조(李尙祖)의 처 양씨(梁氏), 황주(黃州)의 고 사인 안득제(安得濟)의 처 김씨(金氏), 서흥(瑞興)의 고 한량 엄동연(嚴東延)의 처 오성(吳姓), 의주의 고 사인 백윤희(白允希)의 처 조씨(趙氏), 성천(成川)의 고 학생 김대백(金大白)의 처 김씨(金氏)·고 학생 홍상일(洪尙一)의 처 박씨(朴氏), 순천의 고 학생 이창국(李昌國)의 처 김씨(金氏), 가산(嘉山)의 고 학생 김인식(金仁識)의 처 오씨(吳氏), 안북(安北)의 병영리(兵營吏) 김석리(金錫履)의 처 김씨(金氏), 후주(厚州)의 향인 원광하(元光華)의 처 강씨(姜氏), 경성(鏡城)의 고 학생 현상설(玄商枻)의 처 정씨(鄭氏)이다.】 효녀 정려질(孝女旌閭秩) 【대구의 고 사인 이함후(李咸厚)의 두 여아(女兒)이다.】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 【거창의 고 감무 이지활(李智活)로,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조용히 지낸 자. 온양의 고 사인 강대(姜玳)로, 무신년 역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친 자. 진주의 고 의병장 허국주(許國柱)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양성에 들어가 지킨 자. 경주의 고 봉사 백이소(白以昭)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정유 재란 때 전사한 자. 경산(慶山)의 고 참의 장몽기(張夢紀)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당교(唐橋)의 전투에서 순절한 자이다.】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에 사는 고 통덕랑 김의집(金義集)과 고 학생 윤항동(尹恒東)·이희귀(李羲龜)·남숙(南鏽), 수원부의 고 사인 김성렬(金星烈), 개성부의 고 사인 한도혁(韓道奕)·우득룡(禹得龍), 부평(富平)의 고 위솔 남연(南淵), 홍양(興陽)의 고 진사 이표(李彪), 남포(藍浦)의 고 통덕랑 이기상(李基商), 보은의 고 첨지 황우하(黃遇河)·고 사인 송보상(宋保相), 옥천의 고 사인 정이제(鄭利濟), 진잠(鎭岑)의 고 사인 이승(李乘), 아산(牙山)의 고 사인 박이화(朴履和), 장흥(長興)의 고 사인 조석태(趙碩泰), 전주의 고 군수 이여충(李汝忠), 흥양의 고 사인 진성하(秦聖夏), 나주의 고 사인 나상기(羅尙紀), 언양(彦陽)의 고 진사 서석린(徐錫麟), 금산(金山)의 고 사인 조세룡(曹世龍), 안의의 고 학생 신수침(愼守沈), 지례(知禮)의 고 학생 이윤적(李胤績), 진주의 고 학생 정현의(鄭鉉毅), 안동의 고 생원 신광집(申光集), 평해(平海)의 고 사인 황명규(黃命圭), 홍천(洪川)의 고 사인 민광로(閔光魯)·민백진(閔百珍), 춘천의 고 학생 한덕조(韓德祚), 해주의 고 사인 김백원(金百源), 장연(長淵)의 고 사인 백홍의(白鴻儀).】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71면
【분류】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
효부 정려질(孝婦旌閭秩) 【풍천의 한량 박진표(朴震杓)의 모(母) 최성(崔姓), 원주의 고 엄유 이동석(李童錫)의 처 김씨(金氏)이다.】 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 【서울에 사는 고 사인 신석은(申錫殷)의 처 신씨(愼氏)·고 사인 심택모(沈宅模)의 처 이씨(李氏)·고 장사랑 박경식(朴敬植)의 처 곽씨(郭氏)·고 학생 이명성(李明誠)의 처 한씨(韓氏)·고 학생 조욱영(趙旭永)의 처 홍씨(洪氏)·고 출신 서명준(徐命俊)의 처 김성(金姓)·고 학생 이희귀(李羲龜)의 처 유씨(兪氏)·고 학생 남병헌(南秉憲)의 처 서씨(徐氏)·고 통덕랑 정승환(鄭昇煥)의 처 이씨(李氏)·사인 신사일(愼師一)의 처 원씨(元氏)·고 학생 허만(許晩)의 처 이씨(李氏)·사인 권인수(權仁壽)의 처 이씨(李氏)·고 학생 윤좌열(尹佐烈)의 처 이씨(李氏)·개성부의 고 사인 임경립(林景立)의 처 박씨(朴氏)·고 부사과 유순룡(劉順龍)의 처 장씨(張氏)·수원부의 고 하리 나계술(羅繼述)의 처 박성(朴姓)·고 기패관(旗牌官) 박규연(朴奎淵)의 처 유성(兪姓), 시흥(始興)의 고 학생 유최인(柳最寅)의 처 김씨(金氏), 영평(永平)의 고 학생 김학례(金學禮)의 처 성씨(成氏), 양천(陽川)의 고 사인 권유(權攸)의 처 정씨(丁氏), 공주의 증 참판 최상규(崔相奎)의 처 문씨(文氏), 청안(淸案)의 고 사인 홍재범(洪在範)의 처 김씨(金氏), 천안의 고 양인 백동제(白東齊)의 처 최성(崔姓), 임피(臨陂)의 고 사인 조익순(趙益淳)의 처 김씨(金氏), 김제(金堤)의 고 사인 이만득(李晩得)의 처 박씨(朴氏), 광주(光州)의 고 한량 오차배(吳次培)의 처 백성(白姓), 법성(法聖)의 고 한량 송윤지(宋允之)의 처 박성(朴姓), 고부(古阜)의 고 사인 이시채(李始采)의 처 유씨(柳氏), 대구의 고 사인 이함후(李咸厚)의 처 윤씨(尹氏), 영천(永川)의 고 양인 박천억(朴千億)의 처 최성(崔姓), 문경의 고 사인 정위(鄭謂)의 처 신씨(申氏), 영양(英陽)의 고 사인 이수연(李壽延)의 처 이씨(李氏), 거창(居昌)의 고 사인 변동현(卞東賢)의 처 이씨(李氏), 영산(靈山)의 고 학생 배윤휘(裵允徽)의 처 권씨(權氏), 창원(昌原)의 고 업유 박경천(朴擎天)의 처 배씨(裵氏), 경주의 고 사인 최종백(崔宗白)의 처 정씨(鄭氏), 양구(楊口)의 고 학생 정운하(鄭橒厦)의 처 박씨(朴氏), 홍천(洪川)의 고 사인 민건수(閔建洙)의 첩 이성(李姓), 안협의 고 학생 이제(李㫼)의 처 이씨(李氏), 춘천의 고 사인 최서(崔瑞)의 처 이씨(李氏), 해주의 고 사인 이상조(李尙祖)의 처 양씨(梁氏), 황주(黃州)의 고 사인 안득제(安得濟)의 처 김씨(金氏), 서흥(瑞興)의 고 한량 엄동연(嚴東延)의 처 오성(吳姓), 의주의 고 사인 백윤희(白允希)의 처 조씨(趙氏), 성천(成川)의 고 학생 김대백(金大白)의 처 김씨(金氏)·고 학생 홍상일(洪尙一)의 처 박씨(朴氏), 순천의 고 학생 이창국(李昌國)의 처 김씨(金氏), 가산(嘉山)의 고 학생 김인식(金仁識)의 처 오씨(吳氏), 안북(安北)의 병영리(兵營吏) 김석리(金錫履)의 처 김씨(金氏), 후주(厚州)의 향인 원광하(元光華)의 처 강씨(姜氏), 경성(鏡城)의 고 학생 현상설(玄商枻)의 처 정씨(鄭氏)이다.】 효녀 정려질(孝女旌閭秩) 【대구의 고 사인 이함후(李咸厚)의 두 여아(女兒)이다.】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 【거창의 고 감무 이지활(李智活)로,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조용히 지낸 자. 온양의 고 사인 강대(姜玳)로, 무신년 역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친 자. 진주의 고 의병장 허국주(許國柱)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양성에 들어가 지킨 자. 경주의 고 봉사 백이소(白以昭)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정유 재란 때 전사한 자. 경산(慶山)의 고 참의 장몽기(張夢紀)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당교(唐橋)의 전투에서 순절한 자이다.】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에 사는 고 통덕랑 김의집(金義集)과 고 학생 윤항동(尹恒東)·이희귀(李羲龜)·남숙(南鏽), 수원부의 고 사인 김성렬(金星烈), 개성부의 고 사인 한도혁(韓道奕)·우득룡(禹得龍), 부평(富平)의 고 위솔 남연(南淵), 홍양(興陽)의 고 진사 이표(李彪), 남포(藍浦)의 고 통덕랑 이기상(李基商), 보은의 고 첨지 황우하(黃遇河)·고 사인 송보상(宋保相), 옥천의 고 사인 정이제(鄭利濟), 진잠(鎭岑)의 고 사인 이승(李乘), 아산(牙山)의 고 사인 박이화(朴履和), 장흥(長興)의 고 사인 조석태(趙碩泰), 전주의 고 군수 이여충(李汝忠), 흥양의 고 사인 진성하(秦聖夏), 나주의 고 사인 나상기(羅尙紀), 언양(彦陽)의 고 진사 서석린(徐錫麟), 금산(金山)의 고 사인 조세룡(曹世龍), 안의의 고 학생 신수침(愼守沈), 지례(知禮)의 고 학생 이윤적(李胤績), 진주의 고 학생 정현의(鄭鉉毅), 안동의 고 생원 신광집(申光集), 평해(平海)의 고 사인 황명규(黃命圭), 홍천(洪川)의 고 사인 민광로(閔光魯)·민백진(閔百珍), 춘천의 고 학생 한덕조(韓德祚), 해주의 고 사인 김백원(金百源), 장연(長淵)의 고 사인 백홍의(白鴻儀).】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71면
【분류】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
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 【서울에 사는 고 사인 신석은(申錫殷)의 처 신씨(愼氏)·고 사인 심택모(沈宅模)의 처 이씨(李氏)·고 장사랑 박경식(朴敬植)의 처 곽씨(郭氏)·고 학생 이명성(李明誠)의 처 한씨(韓氏)·고 학생 조욱영(趙旭永)의 처 홍씨(洪氏)·고 출신 서명준(徐命俊)의 처 김성(金姓)·고 학생 이희귀(李羲龜)의 처 유씨(兪氏)·고 학생 남병헌(南秉憲)의 처 서씨(徐氏)·고 통덕랑 정승환(鄭昇煥)의 처 이씨(李氏)·사인 신사일(愼師一)의 처 원씨(元氏)·고 학생 허만(許晩)의 처 이씨(李氏)·사인 권인수(權仁壽)의 처 이씨(李氏)·고 학생 윤좌열(尹佐烈)의 처 이씨(李氏)·개성부의 고 사인 임경립(林景立)의 처 박씨(朴氏)·고 부사과 유순룡(劉順龍)의 처 장씨(張氏)·수원부의 고 하리 나계술(羅繼述)의 처 박성(朴姓)·고 기패관(旗牌官) 박규연(朴奎淵)의 처 유성(兪姓), 시흥(始興)의 고 학생 유최인(柳最寅)의 처 김씨(金氏), 영평(永平)의 고 학생 김학례(金學禮)의 처 성씨(成氏), 양천(陽川)의 고 사인 권유(權攸)의 처 정씨(丁氏), 공주의 증 참판 최상규(崔相奎)의 처 문씨(文氏), 청안(淸案)의 고 사인 홍재범(洪在範)의 처 김씨(金氏), 천안의 고 양인 백동제(白東齊)의 처 최성(崔姓), 임피(臨陂)의 고 사인 조익순(趙益淳)의 처 김씨(金氏), 김제(金堤)의 고 사인 이만득(李晩得)의 처 박씨(朴氏), 광주(光州)의 고 한량 오차배(吳次培)의 처 백성(白姓), 법성(法聖)의 고 한량 송윤지(宋允之)의 처 박성(朴姓), 고부(古阜)의 고 사인 이시채(李始采)의 처 유씨(柳氏), 대구의 고 사인 이함후(李咸厚)의 처 윤씨(尹氏), 영천(永川)의 고 양인 박천억(朴千億)의 처 최성(崔姓), 문경의 고 사인 정위(鄭謂)의 처 신씨(申氏), 영양(英陽)의 고 사인 이수연(李壽延)의 처 이씨(李氏), 거창(居昌)의 고 사인 변동현(卞東賢)의 처 이씨(李氏), 영산(靈山)의 고 학생 배윤휘(裵允徽)의 처 권씨(權氏), 창원(昌原)의 고 업유 박경천(朴擎天)의 처 배씨(裵氏), 경주의 고 사인 최종백(崔宗白)의 처 정씨(鄭氏), 양구(楊口)의 고 학생 정운하(鄭橒厦)의 처 박씨(朴氏), 홍천(洪川)의 고 사인 민건수(閔建洙)의 첩 이성(李姓), 안협의 고 학생 이제(李㫼)의 처 이씨(李氏), 춘천의 고 사인 최서(崔瑞)의 처 이씨(李氏), 해주의 고 사인 이상조(李尙祖)의 처 양씨(梁氏), 황주(黃州)의 고 사인 안득제(安得濟)의 처 김씨(金氏), 서흥(瑞興)의 고 한량 엄동연(嚴東延)의 처 오성(吳姓), 의주의 고 사인 백윤희(白允希)의 처 조씨(趙氏), 성천(成川)의 고 학생 김대백(金大白)의 처 김씨(金氏)·고 학생 홍상일(洪尙一)의 처 박씨(朴氏), 순천의 고 학생 이창국(李昌國)의 처 김씨(金氏), 가산(嘉山)의 고 학생 김인식(金仁識)의 처 오씨(吳氏), 안북(安北)의 병영리(兵營吏) 김석리(金錫履)의 처 김씨(金氏), 후주(厚州)의 향인 원광하(元光華)의 처 강씨(姜氏), 경성(鏡城)의 고 학생 현상설(玄商枻)의 처 정씨(鄭氏)이다.】 효녀 정려질(孝女旌閭秩) 【대구의 고 사인 이함후(李咸厚)의 두 여아(女兒)이다.】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 【거창의 고 감무 이지활(李智活)로,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조용히 지낸 자. 온양의 고 사인 강대(姜玳)로, 무신년 역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친 자. 진주의 고 의병장 허국주(許國柱)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양성에 들어가 지킨 자. 경주의 고 봉사 백이소(白以昭)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정유 재란 때 전사한 자. 경산(慶山)의 고 참의 장몽기(張夢紀)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당교(唐橋)의 전투에서 순절한 자이다.】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에 사는 고 통덕랑 김의집(金義集)과 고 학생 윤항동(尹恒東)·이희귀(李羲龜)·남숙(南鏽), 수원부의 고 사인 김성렬(金星烈), 개성부의 고 사인 한도혁(韓道奕)·우득룡(禹得龍), 부평(富平)의 고 위솔 남연(南淵), 홍양(興陽)의 고 진사 이표(李彪), 남포(藍浦)의 고 통덕랑 이기상(李基商), 보은의 고 첨지 황우하(黃遇河)·고 사인 송보상(宋保相), 옥천의 고 사인 정이제(鄭利濟), 진잠(鎭岑)의 고 사인 이승(李乘), 아산(牙山)의 고 사인 박이화(朴履和), 장흥(長興)의 고 사인 조석태(趙碩泰), 전주의 고 군수 이여충(李汝忠), 흥양의 고 사인 진성하(秦聖夏), 나주의 고 사인 나상기(羅尙紀), 언양(彦陽)의 고 진사 서석린(徐錫麟), 금산(金山)의 고 사인 조세룡(曹世龍), 안의의 고 학생 신수침(愼守沈), 지례(知禮)의 고 학생 이윤적(李胤績), 진주의 고 학생 정현의(鄭鉉毅), 안동의 고 생원 신광집(申光集), 평해(平海)의 고 사인 황명규(黃命圭), 홍천(洪川)의 고 사인 민광로(閔光魯)·민백진(閔百珍), 춘천의 고 학생 한덕조(韓德祚), 해주의 고 사인 김백원(金百源), 장연(長淵)의 고 사인 백홍의(白鴻儀).】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71면
【분류】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
효녀 정려질(孝女旌閭秩) 【대구의 고 사인 이함후(李咸厚)의 두 여아(女兒)이다.】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 【거창의 고 감무 이지활(李智活)로,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조용히 지낸 자. 온양의 고 사인 강대(姜玳)로, 무신년 역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친 자. 진주의 고 의병장 허국주(許國柱)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양성에 들어가 지킨 자. 경주의 고 봉사 백이소(白以昭)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정유 재란 때 전사한 자. 경산(慶山)의 고 참의 장몽기(張夢紀)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당교(唐橋)의 전투에서 순절한 자이다.】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에 사는 고 통덕랑 김의집(金義集)과 고 학생 윤항동(尹恒東)·이희귀(李羲龜)·남숙(南鏽), 수원부의 고 사인 김성렬(金星烈), 개성부의 고 사인 한도혁(韓道奕)·우득룡(禹得龍), 부평(富平)의 고 위솔 남연(南淵), 홍양(興陽)의 고 진사 이표(李彪), 남포(藍浦)의 고 통덕랑 이기상(李基商), 보은의 고 첨지 황우하(黃遇河)·고 사인 송보상(宋保相), 옥천의 고 사인 정이제(鄭利濟), 진잠(鎭岑)의 고 사인 이승(李乘), 아산(牙山)의 고 사인 박이화(朴履和), 장흥(長興)의 고 사인 조석태(趙碩泰), 전주의 고 군수 이여충(李汝忠), 흥양의 고 사인 진성하(秦聖夏), 나주의 고 사인 나상기(羅尙紀), 언양(彦陽)의 고 진사 서석린(徐錫麟), 금산(金山)의 고 사인 조세룡(曹世龍), 안의의 고 학생 신수침(愼守沈), 지례(知禮)의 고 학생 이윤적(李胤績), 진주의 고 학생 정현의(鄭鉉毅), 안동의 고 생원 신광집(申光集), 평해(平海)의 고 사인 황명규(黃命圭), 홍천(洪川)의 고 사인 민광로(閔光魯)·민백진(閔百珍), 춘천의 고 학생 한덕조(韓德祚), 해주의 고 사인 김백원(金百源), 장연(長淵)의 고 사인 백홍의(白鴻儀).】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71면
【분류】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 【거창의 고 감무 이지활(李智活)로,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조용히 지낸 자. 온양의 고 사인 강대(姜玳)로, 무신년 역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친 자. 진주의 고 의병장 허국주(許國柱)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양성에 들어가 지킨 자. 경주의 고 봉사 백이소(白以昭)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정유 재란 때 전사한 자. 경산(慶山)의 고 참의 장몽기(張夢紀)로,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당교(唐橋)의 전투에서 순절한 자이다.】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에 사는 고 통덕랑 김의집(金義集)과 고 학생 윤항동(尹恒東)·이희귀(李羲龜)·남숙(南鏽), 수원부의 고 사인 김성렬(金星烈), 개성부의 고 사인 한도혁(韓道奕)·우득룡(禹得龍), 부평(富平)의 고 위솔 남연(南淵), 홍양(興陽)의 고 진사 이표(李彪), 남포(藍浦)의 고 통덕랑 이기상(李基商), 보은의 고 첨지 황우하(黃遇河)·고 사인 송보상(宋保相), 옥천의 고 사인 정이제(鄭利濟), 진잠(鎭岑)의 고 사인 이승(李乘), 아산(牙山)의 고 사인 박이화(朴履和), 장흥(長興)의 고 사인 조석태(趙碩泰), 전주의 고 군수 이여충(李汝忠), 흥양의 고 사인 진성하(秦聖夏), 나주의 고 사인 나상기(羅尙紀), 언양(彦陽)의 고 진사 서석린(徐錫麟), 금산(金山)의 고 사인 조세룡(曹世龍), 안의의 고 학생 신수침(愼守沈), 지례(知禮)의 고 학생 이윤적(李胤績), 진주의 고 학생 정현의(鄭鉉毅), 안동의 고 생원 신광집(申光集), 평해(平海)의 고 사인 황명규(黃命圭), 홍천(洪川)의 고 사인 민광로(閔光魯)·민백진(閔百珍), 춘천의 고 학생 한덕조(韓德祚), 해주의 고 사인 김백원(金百源), 장연(長淵)의 고 사인 백홍의(白鴻儀).】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71면
【분류】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에 사는 고 통덕랑 김의집(金義集)과 고 학생 윤항동(尹恒東)·이희귀(李羲龜)·남숙(南鏽), 수원부의 고 사인 김성렬(金星烈), 개성부의 고 사인 한도혁(韓道奕)·우득룡(禹得龍), 부평(富平)의 고 위솔 남연(南淵), 홍양(興陽)의 고 진사 이표(李彪), 남포(藍浦)의 고 통덕랑 이기상(李基商), 보은의 고 첨지 황우하(黃遇河)·고 사인 송보상(宋保相), 옥천의 고 사인 정이제(鄭利濟), 진잠(鎭岑)의 고 사인 이승(李乘), 아산(牙山)의 고 사인 박이화(朴履和), 장흥(長興)의 고 사인 조석태(趙碩泰), 전주의 고 군수 이여충(李汝忠), 흥양의 고 사인 진성하(秦聖夏), 나주의 고 사인 나상기(羅尙紀), 언양(彦陽)의 고 진사 서석린(徐錫麟), 금산(金山)의 고 사인 조세룡(曹世龍), 안의의 고 학생 신수침(愼守沈), 지례(知禮)의 고 학생 이윤적(李胤績), 진주의 고 학생 정현의(鄭鉉毅), 안동의 고 생원 신광집(申光集), 평해(平海)의 고 사인 황명규(黃命圭), 홍천(洪川)의 고 사인 민광로(閔光魯)·민백진(閔百珍), 춘천의 고 학생 한덕조(韓德祚), 해주의 고 사인 김백원(金百源), 장연(長淵)의 고 사인 백홍의(白鴻儀).】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71면
【분류】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9월 6일 계사
영남의 위유사(慰諭使)로 보냈던 승지 서춘보(徐春輔)를 불러 보았다. 임금이 영남의 민정에 대하여 묻자, 서 춘보가 말하기를,
"전도(全道)가 수해를 입은 가운데 우도(右道)가 특히 심하여 가을 농사는 다시 희망이 없어서 민정이 더욱 황급합니다. 좌도(左道) 중에 조금 덜한 곳은 4, 5개 읍에 불과하고, 그 중 혹시 매우 흉년이 든 곳은 우도의 여러 고을 보다 못한 곳도 있습니다. 현재 굶주림이 이미 매우 참혹한데, 내년 봄이면 아마도 반드시 다 죽고 말 것 같습니다."
하였다.
9월 7일 갑오
붙일 소담고(消痰膏)를 만들어 들이라고 명하였다.
9월 8일 을미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익위승양탕(益胃升陽湯)을 올렸다.
9월 9일 병신
의관 등이 담(痰)의 핵(核)이 전보다 조금 작아졌고 부기(浮氣)도 점점 내린다고 아뢰었다. 가미양위탕(加味養胃湯)을 올렸다.
9월 11일 무술
의관 등이 다리를 안찰(按察)하였던 바, 상당히 덜하나 아직 부기가 남아있으므로, 붙이는 약은 다시 교맥병(蕎麥餠)으로 의논하여 정하고, 드는 탕제(湯劑)는 소요산(逍遙散)으로 의논하여 정하였다.
시망(諡望)에 대한 비지를 내렸는데, 증 좌찬성 조엄(趙曮)은 문익(文翼), 판서 홍낙명(洪樂命)은 문청(文淸), 판서 황승원(黃昇源)은 문헌(文獻), 증 좌찬성 이숭호(李崇祜)는 효간(孝簡), 판서 홍의모(洪義謨)는 효헌(孝獻), 좨주 이직보(李直輔)는 문경(文敬), 판돈녕 이민보(李敏輔)는 효정(孝貞), 증 판서 허백기(許伯琦)는 정헌(正獻)이었다.
형조 판서 홍의호(洪義浩)를 삭직하고 법사(法司)의 당상들과 좌·우 포도 대장을 엄중히 추고하였다. 홍의호가 상소하여 주금(洒禁)이 실행되기 어려운 실상을 늘어놓고, 이어서 크게 빚는 것만 금하고, 되[升]나 말[斗] 정도의 항아리로 빚는 것은 모두 참작하여 용서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묘당에 비답을 내려 품처하게 하였던 바,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책임이 법을 맡은 관원에게 있습니다. 법 자체가 어찌 폐단이 있겠습니까? 이번의 주금은 곧 흉년을 구제하는 좋은 방법인데, 오로지 법관이 법을 업신여김으로써 도리어 폐단이 발생하도록 하였으니, 법에 본래 폐단이 있다고 하는 것이 될 말입니까? 대개 주금의 폐단은 전적으로 반호(班戶)들이 비밀히 빚어서 이익을 취하고 소민(小民)들만 잘못 걸려들어 억울하게 징수당하는 데 연유하는데, 만약 법사가 강어(强禦)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반호가 어떻게 이익을 챙기겠으며, 법 조문을 반드시 믿는다면 소민들만 무슨 까닭으로 치우치게 징수당하겠습니까? 법은 정당하게 집행하지 않고 도리어 법이 시행되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면서 정작 법을 늦추려 한다면 예로부터 주금이란 것이 삼금(三禁)의 하나로 기재되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주관(周官)의 훌륭한 법이라 하더라도 장차 폐단이 생기지 않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금령(禁令)을 내린 지 한달도 못되어 금령을 늦추는 청이 법관의 말에서 나온다는 것은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으로만 논할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형조 판서 홍의호를 속히 삭직 조치하고, 전후로 잘 주금하지 못한 양사의 당상들과 좌우 포도 대장을 모두 우선 엄중히 추고하고, 이 뒤로는 먼저 반호부터 철저히 법대로 시행하되, 하나라도 혹시 포착되기만 하면 일체 속전(贖錢)을 거두지 말고 곧바로 먼 곳에 정배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9월 12일 기해
이요헌(李堯憲)을 형조 판서로, 박윤수(朴崙壽)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9월 13일 경자
부첩(付貼)할 음양산(陰陽散)을 올렸다.
9월 16일 계묘
각도의 절미(折米) 2만 7천 5백 석을 호조에 나누어 보냈으니, 경용(經用)이 부족하다고 비변사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9월 18일 을사
의관들이, ‘다리 부분은 태양(太陽)에 속하는데, 담수(痰水)가 모여서 현저히 부기가 있다.’고 아뢰자, 도제조 김사목이 침의(鍼醫) 세 사람을 특별히 입직(入直)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약원에서 말로 직숙을 청하자, 윤직을 명하였다.
함경 감사 김이양(金履陽)이 다시 소를 올려 김성길(金聖吉)에게 지시하여 시킨 자를 조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9일 병오
이날 다시 탁리소독산(托裏消毒散)을 올렸다. 이어서 매일 한 첩씩 달여 들이고 가미음양산(加味陰陽散)을 붙일 것을 명하였다.
9월 23일 경술
가미십륙미유기산(加味十六味流氣散)을 들도록 올리되, 오늘부터 한 첩씩 달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9월 25일 임자
가미사령산(加味四苓散)을 들도록 올리되, 오늘부터 한 첩씩 달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9월 28일 을묘
가미충화고(加味沖和膏)를 붙였다.
9월 30일 정사
약원에서 진맥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인삼육일산(人蔘六一散)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