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33권, 순조 33년 1833년 6월

싸라리리 2025. 7. 1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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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경자

일식(日食)이 있었다. 【신시(申時) 초부터 유시(酉時) 초까지 있었는데 4분 17초(秒)를 먹었으며, 서북쪽에서 처음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정북쪽이 심히 먹었고, 동북쪽에서 다시 둥그래졌다.】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397면
【분류】과학(科學)

 

전 대호군 김교근(金敎根)과 전 호군 김병조(金炳朝)에게 직첩(職牒)을 도로 주었다.

 

박대규(朴大圭)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6월 2일 신축

평안 감사 심능악(沈能岳)이 아뢰기를,
"초산(楚山)의 전 부사(府使) 서만수(徐萬修)의 장안(贓案)에 대하여 사관(査官)을 차출하여 함께 입회해서 조사를 행하였더니, 탐오한 짓을 한 자취가 낭자하다는 것은 실정보다 너무나 지나친 것이고, 공사(供辭)073)  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도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 많았습니다. 인명을 원통하게 죽였다고 말한 것은 안시헌(安時憲) 등 세 놈을 열흘 간격으로 곤장을 쳤으니 반드시 죽이려는 형장이 아니었고, 윤기옥(尹基玉) 등 4명이 속을 태운 것은 죽을 만한 사건의 실마리가 아니었으며, 노병(老病)이 더해져서 마침내 죽게 되었으니 곧바로 원통하게 죽었다고 단정한 것은 부적당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금(金)·은(銀)·삼(蔘)·녹용·초서(貂鼠)·명주·무명 등의 물건에 대하여 말하면 수백여명이나 되는 많은 백성들을 일일이 직접 만나 사문(査問)할 수도 없으니, 많고 적은 허실(虛實)을 진실로 끝까지 바로 밝힐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향리(鄕吏)의 공술을 가지고 본다면, 각종 무역을 할 즈음에 본전보다 손해를 보는 것이 형세인데도 물건 값을 주지 않고 해당 창고에 거저 들였다고 혼동하여 일컬었으며, 물품을 진배(進排)할 때에 장부의 기록이 줄어드는 것은 예사로운 일인데 아울러 억지로 징수하였다고 일렀습니다. 물건의 수량이 불어난 것은 점점 늘어서 털끝 만한 차이가 천(千)으로 어긋나는 데 이르렀으니, 사정이 허투로 과장된 것은 거의 한 가지를 들어 도리어 세 가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징수한 곡식을 조사하면 또 모곡조(耗穀條)로 별달리 남기는 것은 고을에 으레이 있는 그릇된 폐단인데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며, 사곡(私穀)을 조사하여 징수한 것은 창고를 맡은 간사한 아전이 농간을 부린 것이니 실로 적발함이 합당합니다. 5천 냥으로 전토를 사서 폐단을 구한 처치는 매우 마땅하였으며, 7천여 냥을 유리(由吏)에게 넘겨준 것은 비록 지레 체차됨으로 인하여 미처 조처를 취하지 못하였지만 처음부터 범용(犯用)한 자취는 없었습니다. 대저 잠상(潛商)들의 물건을 관청에 소속시키는 것은 비록 이것이 법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그 비방을 받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으며, 창고의 곡식을 조사해 낸 것은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을 징계하기 위함인데 마침 원망을 살 만한 일이었습니다. 난민(亂民)으로서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난 자와 원통함을 품은 무리들이 내통하여 혹은 작은 것을 쌓아서 크게 이루고, 혹은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그 실상을 구명하면 참작하여 용서할 만한 단서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도(道)에서 조사한 것이 이미 이와 같으니, 장안(贓案)은 효주(爻周)074)  하고, 죄명(罪名)을 깨끗이 씻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6월 3일 임인

예조에서 아뢰기를,
"한 달이 넘도록 극심하게 가물어 모내는 철이 점점 늦어지고 있습니다. 첫번째 기우제(祈雨祭)는 날을 가릴 것 없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서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할 것이라고 명하였는데, 이날 밤에 비가 내렸으니, 수심(水深)이 2촌(寸) 2푼이었다.

 

6월 4일 계묘

비가 내렸으니, 수심(水深)이 4촌 7푼이었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첫번째 기우제(祈雨祭)에 쓸 향과 축문은 친히 전한다는 하교가 내리었는데 어제 단비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단비가 흡족하게 내렸으니, 농사를 위해서 천만 다행이다. 기우제는 정지하게 하라."
하였다.

 

6월 5일 갑진

비가 내렸는데, 수심(水深)이 1촌 6푼이었다.

 

6월 6일 을사

전 좌의정 심상규(沈象奎)의 죄를 용서하고 다시 전임(前任)을 제배하라고 명하였다.

 

6월 7일 병오

한권(翰圈)075)  을 행하였다. 【별겸춘추(別兼春秋) 김대근(金大根)·홍종응(洪鍾應)·이겸재(李謙在)이다.】  3점을 받은 사람은 홍영규(洪永圭)·조휘림(曹徽林)·서헌순(徐憲淳)·조운승(曺雲承)·홍열모(洪說謨)·서기순(徐耆淳)·김학성(金學性)·박제헌(朴齊憲)이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와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장계(狀啓)하기를,
"중국 사람이 도경(都京)076)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뜯어 보았더니, 황후(皇后)가 붕서(崩逝)하여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파견하려고 하는데, 부고를 가지고 먼저 5월 22일에 간다고 하였으며, 그날 주필(硃筆)077)  을 가지고 산질 대신(散秩大臣) 성계(盛桂)와 이번원 우시랑(理藩院右侍郞) 새상아(賽尙阿)에게 권점(圈點)을 찍어 내보냈는데, 여기에 상응하여 초록(抄錄)하고 원래의 주본(奏本)과 함께 알린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칙사가 나온다는 기별이 매우 긴요하므로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예조 판서 조만영(趙萬永),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박주수(朴周壽), 비국 유사 당상(備局有司堂上) 이지연(李止淵)·서능보(徐能輔)·조인영(趙寅永)을 소견(召見)하였다. 박종훈(朴宗薰)을 원접사(遠接使)로, 조만영을 관반(館伴)으로, 홍석주(洪奭周)를 연접 도감 제조(延接都監提調)로, 조병헌(趙秉憲)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차출하였다.

 

6월 8일 정미

비국에서 아뢰기를,
"경기(京畿)에는 칙사를 맞이하는 비용이 본래부터 넉넉하지 못한 데다 그 동안 또 주전(鑄錢)하는 일도 이루지 못하였으며 원곡(元穀)이 텅 비었는데, 더구나 지금 칙사가 나온다는 기별이 당도하였으니, 접대하는 절차가 매우 긴급합니다. 청컨대 해영(海營)078)  의 칙사를 맞이하기 위한 돈 1만 냥과 선혜청의 돈 6천 냥, 금어 양영(禁御兩營)079)  의 돈 각각 2천 냥을 빌려 주고, 마련하여 갚는 방도는 감사로 하여금 특별히 잘 다스리게 하고 다시 의견을 달아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니, 황후의 상사에 부고를 전하는 칙사가 나올 때에는 성상께서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궁궐을 나가며, 교관(郊館)에 이르러서는 참포(黲袍)와 오서대(烏犀帶)로 갈아 입었으며 백관들은 임금의 옷차림을 따랐습니다. 칙사를 맞아 전정(殿庭)에 이르면 슬픔을 표하는 절차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또한 전례대로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고를 전하는 칙사가 나왔을 때에는 흔히 비어 있는 대궐에서 칙서를 맞이한 예(例)가 있었으니, 이번에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명정전(明政殿)에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6월 9일 무신

한림 소시(翰林召試)080)  를 행하여, 박제헌(朴齊憲)·서헌순(徐憲淳)·조운승(曹雲承)·홍열모(洪說謨)를 뽑았다.

 

좌의정 심상규(沈象奎)에게 유시하기를,
"지난번의 처분은 비록 일의 대체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데서 나왔다 하더라도, 내가 어찌 즐겨서 한 것이겠는가? 경은 생각해 보라. 경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집하는 것은 곧 경의 한몸을 위하는 일에 지나지 않으나, 내가 경을 반드시 초치하려는 것은 바로 나라의 일을 위함이다. 그렇다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하고 중함은 슬기로운 사람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신이 사사로운 의리에 구애되어 자신이 벼슬에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경의 높은 식견으로 어찌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억지로 이렇게 우물쭈물 주저하는가? 더구나 지금은 칙사가 나온다는 기별이 매우 급하여 묘당의 일이 한창 많으니, 경이 올라오는 것을 더욱 한 시라도 늦출 수가 없다. 이에 정경(正卿)을 보내어 다시 지극한 뜻을 펴니, 바라건대, 경은 선뜻 깨달아 다시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즉일로 길에 올라서 옆자리를 비워 기다리는 생각에 부응하게 하라."
하였다.

 

6월 10일 기유

금년 가을 식년081)   향시(鄕試)·한성시(漢城試), 제과(諸科)의 과거 시험을 모두 명년 봄으로 물려서 거행하라고 명하였으니, 여러 도에 진휼을 베풀고 있고, 객사(客使)가 장차 오게 되어 있어 비국에서 계청한 때문이었다.

 

6월 12일 신해

공충 좌도 암행 어사 김기만(金箕晩)이 서계(書啓)하여, 온양(溫陽)의 전 군수(郡守) 이조식(李祖植), 단양(丹陽)의 전 군수 이유(李游), 청안(淸安)의 전 현감(縣監) 신명조(申命藻), 천안(天安)의 전 군수 정동만(鄭東萬), 전전 군수(郡守) 서병순(徐秉淳), 서원 현감(西原縣監) 성긍묵(成兢默), 진천 현감(鎭川縣監) 홍익주(洪翼周), 전 현감 서유호(徐有皓), 전의 현감(全義縣監) 변상대(邊相岱), 평택(平澤)의 전 현감 구병로(具秉魯), 아산 현감(牙山縣監) 이돈명(李敦明), 연원(連原)의 전 찰방(察訪) 채홍면(蔡弘勉), 영동 현감(永同縣監) 김보근(金普根), 전 현감 조학점(趙學點), 직산(稷山)의 전 현감(縣監) 정택우(鄭澤友), 신창 현감(新昌縣監) 강이문(姜彛文), 연기 현감(燕岐縣監) 정학제(鄭鶴濟), 음성 현감(陰城縣監) 조득겸(趙得謙), 연풍 현감(延豊縣監) 정하교(丁夏敎), 직산 현감(稷山縣監) 김천서(金天敍), 서원(西原)의 전 영장(營將) 구재봉(具載鳳) 등의 잘 다스리지 못한 실상을 논하니, 아울러 경중(輕重)을 나누어 감처(勘處)하게 하였다. 또 충주 목사(忠州牧使) 김조연(金祖淵), 목천 현감(木川縣監) 성헌증(成憲曾), 보은 군수(報恩郡守) 이윤식(李允植), 문의 현령(文義縣令) 한여(韓礖)의 잘 다스린 실상을 말하니, 김조연에게는 새서 표리(璽書表裏)082)  를 내려 주고, 성헌증에게는 숙마(熟馬)를 주었으며, 이윤식과 한여는 승급시켜 주었다. 별단(別單)을 올려 각 아문(衙門)의 환곡(還穀)의 이자를 시장 가격에 따라서 돈으로 내게 하는 일과 각 고을의 소상정(小詳定)의 폐단과 군보미(軍保米)를 돈으로 대신 바치는 일과 유망호(流亡戶)의 환포(還布)083)  를 탕감하는 일과 연풍현(延豊縣)에 상정미(詳定米)를 더 떼주는 일과 역참(驛站)의 관청 건물을 철거하는 일과 같은 것을 진달하니,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점을 따라 채택해서 시행하게 하였다.

 

6월 14일 계축

서준보(徐俊輔)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평안 감사 심능악(沈能岳)이 상소하여 병의 증상을 진달하고 체직하기를 바라니, 비답하기를,
"경의 병 증상이 이와 같으니, 칙사를 맞이하는 절차는 해서(海西)에서 이미 있었던 예(例)를 따라 병사(兵使)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라."
하였다.

 

6월 15일 갑인

평안 감사(平安監司)와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장계(狀啓)하기를,
"칙사의 목패문(木牌文)084)  과 성경(盛京)085)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나온 것을 상고하여 보니, 정사(正使)는 산질 대신(散秩大臣) 신용공(信勇公) 성계(盛桂)이고, 부사(副使)는 이번원 우시랑(理藩院右侍郞) 상백기 몽고 부도통(廂白旗蒙古副都統) 새상아(賽尙阿)이며, 따라오는 사람은 6품 통관(通官) 길늑통(吉勒通)·아영상(阿英祥), 7품 통관 안태(安泰), 8품 통관 덕녹복(德菉福)·삼포정(森布定)인데, 6월 초4일에 북경(北京)에서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였다.

 

6월 16일 을묘

공충 우도 암행 어사        황협(黃䅘)이 서계(書啓)하여, 서산 군수(瑞山郡守)        이수익(李守益), 태안 군수(泰安郡守)        권달준(權達準), 청양(靑陽)의 전 현감(縣監)        정학면(丁學冕), 노성 현감(魯城縣監)        서윤보(徐胤輔), 결성 현감(結城縣監)        박상발(朴祥發), 남포 현감(藍浦縣監)        홍영모(洪泳謨), 한산(韓山)의 전 군수(郡守)        조석현(曹錫玄), 예산(禮山)의 전전 현감(縣監)        정익용(鄭翼容), 덕산(德山)의 전 현감(縣監)        한용수(韓用鏽), 해미(海美)의 전 현감        최입(崔笠), 부여(扶餘)의 전 현감        이의현(李宜鉉), 석성 현감(石城縣監)        임면수(林勉洙), 예산(禮山)의 전 현감        권재대(權載大), 이인(利仁)의 전 찰방(察訪)        이의조(李儀朝), 은진 현감(恩津縣監)        이형수(李衡秀), 해미 현감(海美縣監)        이용필(李用弼), 금정 찰방(金井察訪)        홍헌영(洪憲榮), 홍주(洪州)의 전 목사(牧使)        김재삼(金在三), 면천 군수(沔川郡守)        심의진(沈宜晉), 예산 현감(禮山縣監)        홍전(洪㙉), 청양 현감(靑陽縣監)        송흠성(宋欽成), 평신(平薪)의 전 첨사(僉使)        신위(申緯) 등의 잘 다스리지 못한 실상을 논하니, 아울러 경중을 나누어 감처(勘處)하게 하였다. 또 보령 현감(保寧縣監)        이희신(李羲臣), 공주(公州)의 전 판관(判官)        민정현(閔靖顯), 대흥 군수(大興郡守)        이정민(李鼎民)의 잘 다스린 실상을 말하니, 이희신에게는 준직(準職)086)                  을 제수하고, 민정현·이정민은 승급시켜 주었다. 별단(別單)을 올려 전세(田稅)를 함부로 기록하여 백지(白地)에 징수하는 폐단을 일체 다 자세히 조사할 일과 군정(軍政)의 여러 가지 잡다한 폐단으로 인해 함부로 핑계댄 무리들을 한결같이 다 태거(汰去)할 일과 역마(驛馬)를 함부로 타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킬 일과, 안면도(安眠島)의 소나무에 관한 정책을 거듭 엄하게 단속할 일과 어염선세(魚鹽船稅)087)                  를 조사하여 감하여 줄 일을 말하니,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점을 따라 채택해서 시행하게 하였다.

 

6월 17일 병진

조봉진(曹鳳振)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좌의정 심상규(沈象奎)가 다시 사직하겠다는 상소를 올리니, 돈면(敦勉)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6월 19일 무오

좌의정 심 상규에게 유시하기를,
"유시하는 비답이 내린 뒤로 날마다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으나 또 변동이 없으니, 울적한 마음을 어찌하겠는가? 경이 한결같이 미적미적하는 것은 혹 연전에 횡포를 당한 일로써 그러는 것이 아닌가? 그 사이에 허다하게 주고받은 글에서 모두 이 일은 밝게 변석(辨析)되었다. 더구나 이제는 때가 옮겨지고 일이 지나가서 물이 흘러가고 구름이 걷히었으니, 어찌 이것을 가지고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운 단서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특히 경이 이 일을 빌미하여 나를 멀리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경을 버릴 리가 없으며, 반드시 초치하는 정성을 소홀하지 않을 것이다. 백리의 땅을 멀다고 할 수 없다. 경이 만약 이 글을 보고서도 다시 굳건히 거절한다면, 내 마땅히 비상한 조치가 있을 것이다. 말이 이미 나왔으니, 경은 이를 양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0일 기미

약원(藥院)088)  에서 일차(日次)로 인하여 진찰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내가 일간에 더위를 가실 약제를 쓰려고 하는데, 도상(都相)089)  이 청진(請診)하고 의논하여 결정한 뒤에 바야흐로 복용(服用)하겠다."
하였는데, 좌의정이 도제조를 겸직한 까닭이었다.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이상황(李相璜)이 아뢰기를,
"수령(守令)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근본이 됩니다. 이러니 신중히 뽑는 것을 혹시라도 소홀히 하면, 위에서 비록 백성의 괴로움을 애통해 하는 어진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은택이 아래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아래에서 비록 호소하지 못하는 원통함이 있다 하더라도 실정이 위에 통달할 길이 없으니, 그 백성들의 휴척(休戚)090)  에 관계됨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올해에 큰 흉년이 들어서 재해를 입어 거의 죽게 된 것은 이 지역이나 저 지역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더라도 지방의 고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장리(長吏)091)  들이 다스리고 다스리지 못함을 보고 백성들이 믿음이 있어 목숨을 보전하니, 곤궁하여 돌아갈 데가 없는 것과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의 생사가 실로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단지 기쁨과 근심만을 같이할 뿐만 아닙니다. 정월(政月)092)  을 만날 때마다 여러 차례 부지런히 타이르는 하교가 있었으나 전조(銓曹)에서 거행한 것이 실효가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혹은 잘하고 잘하지 못하는 것을 살피지도 않아, 소원하고 친근함만을 보는 결함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거의 백성들의 생명은 생각 밖에 두고서 구휼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어찌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어 마음을 다해 임금의 교화를 널리 선양(宣揚)하는 뜻이겠습니까? 근래에는 인재가 갈수록 더욱 아득하니, 옛날의 공수(龔遂)·황패(黃覇)와 두시(杜詩)·소신신(召信臣) 같은 인재는 비록 얻을 수 없더라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선비와 번거롭고 복잡한 일을 잘 다스리는 인재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구한다면 그런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이로써 특별히 전관(銓官)에게 신칙을 더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각영(各營)과 아문(衙門)에서 관장하고 있는 재물이 밑바닥까지 텅 비게 된 것은 첫째로 외방에서 받아들이는 교활한 무리들이 여러 해를 체납시키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 구실아치들이 틈을 노려서 간계를 팔고 침식(侵蝕)하여 포흠(逋欠)이 되기 때문입니다. 낭관(郞官)이 된 자는 이미 마음을 써서 법을 지키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이 범한다는 말이 있는데, 관장(官長)된 몸으로서 아래 사람들을 잘 단속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아전의 앞장에 섰다고 하니, 상리(常理)를 가지고 헤아려 볼 때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양초(梁楚)의 악평(惡評)093)  을 얻었으니, 신은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래의 관원이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 한법(漢法)에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이 뜻을 각 해당 아문(衙門)의 당상관에게 일체로 분부하여 나타나는 대로 수시로 아뢰도록 하여 각각 징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조만영(趙萬永)이 아뢰기를,
"금년 봄에 진양(晉陽)에 치제[致侑]하라는 명령은 실로 구갑(舊甲)을 맞이하여 잊지 못하는 거룩한 뜻에서 나왔습니다.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는 순절(殉節)한 것이 탁월하니, 청컨대 김천일(金千鎰)·황진(黃進)의 예(例)에 따라 부조(不祧)의 특전을 베푸소서."
하니, 대신들에게 순문(詢問)하여 그대로 따랐다. 최경회는 본도의 절도사로서〈김천일·황진과〉 동시에 순절(殉節)한 사람이었다.

 

서능보(徐能輔)를 반송사(伴送使)로 차출하였다.

 

6월 22일 신유

도정(都政)을 행하여,  【이조 판서 서준보(徐俊輔)·참판 김양순(金陽淳), 병조 판서 박주수(朴周壽)이다.】 윤성대(尹聲大)를 이조 참의(參曹參議)로, 김선(金銑)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임정상(任鼎常)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광문(李光文)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6월 23일 임술

경한 죄수를 방면하였다.

 

6월 24일 계해

좌의정 심상규(沈象奎)가 금오문(金吾門)밖에서 대명[胥命]하니, 유시하기를,
"이제 성안으로 들어온다는 보고를 듣고 나의 기뻐하는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런데 경은 과연 나를 보려는 마음이 없어서 또 이렇게 대명하는 거조를 하는 것인가? 매우 지나치도다. 나라 일은 경을 기다려서 함께 같이 할 것이고, 탕제(湯劑)도 경을 기다려서야 의논하여 정할 것이니, 경은 즉시 들어와서 숙배(肅拜)하도록 하라. 내가 누마루에 나가서 기다리겠다."
하였다.

 

6월 25일 갑자

좌의정 심상규를 소견(召見)하였다.

 

6월 26일 을축

형조 판서 조봉진(曹鳳振)이 상소하여 사정을 진달하고 체직하여 줄 것을 바라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의 일은 경에게 있어서는 무망결에 한 일로서 불행하였다. 이제는 모든 일이 이미 오래 묵은 일로 되어버린 뒤이니, 어찌 새삼스럽게 제기하여 일의 체면을 상하게 하는가? 사양하지 말고 숙배(肅拜)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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