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사회적 배경
세도(勢道)정치
순조, 헌종, 철종 시기를 주로 말하고, 고종, 순종의 대한제국 말기까지로 지칭하는 경우도 많다. 왕의 권력이 약해지고, 외척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
정조가 어린 아들을 위해서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순원왕후)을 세자빈으로 선택하였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왕이된다. 당시 순조의 나이는 11살, 1804년까지 영조의 2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노론 벽파들과 뜻이 같은 정순왕후는 시파 숙청에 주력하고, 정조의 치적에 역행하는 정치를 하게 된다.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게 되자, 시파였던 김조순은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는다. 김조순은 병조판서(국방부장관), 판중추부사(중추부는 방위사업청과 유사) 등 고위직을 거치며 국가의 주요 결정을 하는 직을 유지했다. 김조순은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순조를 돕는 일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의 인품과는 다르게, 경제를 관장하는 실질적인 관직을 거쳐 상권을 장악했다. 김조순의 의도였든 아니든, 친족과 가문 사람들을 주요 관직에 배치되어 안동김씨의 세도기, 조선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비변사로 집중된 권력
비변사는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임시로 만들어졌다가, 1555년 을묘왜변을 통해 상설기구화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이후 권한이 강화되었다. 군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설치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국가 행정 전반을 관장하는 핵심기관이 되었다. 현재 기준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비슷한 기구로 볼 수 있다.
군사 문제뿐 아니라, 행정, 재정, 외교, 사법까지 국가 운영의 전반에 걸쳐 의사결정을 하게 되므로 기존 제도인 의정부와 6조의 기능이 약화되고, 비변사쪽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세도정치와 맞물리면서 특정 가문이 비변사를 장악하게 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도 비변사 주교사 당상을 지냈다. 배의 이동을 관할하는 직책이었으나 상인들의 이동을 통제하여 상권을 장악할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한다.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한 직위도 비변사 제조(현재로 경찰의 치안총감)였다.
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오히려 군사 체제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행정과 정치업무가 추가되기 시작하면서,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대응보다는 관료들의 이해관계를 논의하게 되었다. 비변사를 주로 문신으로 구성하여 실제 문제를 해결위한 전문성과 겸험이 없었다. 세계적으로 발전한 화포, 조총 등의 기술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전통적인 방어체계에만 의존하는 결정을 했으며, 외세의 위협에 소극적인 대응을 했고, 군포 실행과 맞물린 중앙과 지방의 병력 감소, 매관매직으로 등용한 부패한 관리들이 낭비한 예산 등으로 인해 오히려 군사 문제를 만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국가의 의사결정이 한 기관, 세도정치와 맞물려 한 가문에 집중되어 전문성이 떨어지고, 비효율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신기술에 적응하지 못하여 국방력이 감소하였으나 이를 평가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매관매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국방비와 복구비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이 발생했고, 공명첩을 발행하는 관직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했다. 화폐경제가 정착되기 시작한 후, 상업이 발달하면서 형성된 상인 계층은 축적된 자본을 사용하여 신분을 상승시키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세도가문이 이용하여 관직을 판매했다. 지방 수령직은 권한이 강해 인기가 많았다. 이를 당시 매관매직으로 관찰사는 약 10~20만 냥, 수령은 약 3~5만 냥에 팔렸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1800년 조선 인부의 하루 품삯은 대략 2전으로, 월급으로 치면 6냥이었다. 1846년 서울의 18칸 기와집이 1000냥에 거래된 기록이 있다.
더 높은 금액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관직을 제공하고, 지방의 경우 먼저 매수한 관리가 부임하기도 전에 다음 관리가 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인맥을 만들어 관직을 돈으로 사고 팔기 때문에, 국가 차원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사람들을 관리로 임용하기 보다는 '아는 사람'을 임명하게 된다. 돈으로 관직을 샀으니, 들어간 돈 이상을 벌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세금과 부역을 과중하게 시켜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했다. 양민들이 부담하는 전정, 군, 환곡을 이용하여 수익을 내게 되었다.
상인들이 관리로 진출하게 되었으니, 관리들이 본래 기관의 기능을 무시하고, 사사로이 재물을 늘렸다. 국가로 들어가는 세금이 더 줄어들어 재정의 문제가 계속 되었다.
농업 생산성 증가와 농업구조의 변경
농업생산성 증가로 지주와 소작농 분화
이앙법이 시작되면서 농업 생산성이 올랐다. 논에 모를 옮겨 심는 이앙법은 벼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은 더 들지, 생산량은 기존 직파법에 비해 2배로 늘릴 수 있었다. 수확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땅이 더 많은 지주들은 더 많은 쌀을 남길 수 있었고, 그 쌀로 땅을 더 늘리게 되어, 지주간의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
세도정치와 매관매직에 이은 삼정의 문란으로 세금 부담을 과하게 지는 농민들은 토지를 팔고, 소작농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2모작과 담배, 인삼 등 상업용 작물의 재배가 시작되면서 지주들은 남는 재화로 인해 점점 많은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관직을 사서 지방 관리가 되어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관리와 결탁한 지주들은 전정를 면세받는 경우도 생겨,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소작농의 경우 소작료가 점점 늘어 수확량의 절반에서 70%에 달하는 소작료를 지불하기도 했다. 물론 노동에 필요한 비용과 물을 대는데 필요한 모든 비용도 소작농이 지불했다. 흉년이 들거나 재해로 수확이 없는 경우에도 소작료를 받거나 빚으로 전환해서 고리대를 놓는 경우도 생겼다. 국가의 환곡 제도가 있었지만, 관직을 사서 내려온 부패한 관리들이 높은 이자를 붙여 환곡을 적용하여 과도한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렇게 땅을 빼앗기거나 소작농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하거나 도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생산성의 증가는 사회 구조를 바꾼다.
화폐 경제와 상업의 발전
조선 전기와는 다르게 조선 후기에는 상평통보가 발행되어 사용되었다. 동전의 유통으로 물물교환에서 화폐경제로 전환이 되었다. 화폐의 사용으로 대부업이 늘났다. 부유한 상인들은 곡물과 화폐를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점점 많은 자본을 축적하게 되었다.
요즘 시골의 5일장과 같은 장시가 생겨나고, 물자와 정보를 유통하는 장이 되었다. 물자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모이게 되는 포구가 발전했다. 포구를 중심으로 여각과 객주 등이 생겨나고, 상인집단이 만들어졌다.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상인인 사상(私商)이 발생했다. 송상, 만상, 경강상인 등이 사상이다. 상인과 보부상들이 중앙정부의 세금을 운송하기도했고,인삼 등의 상품들은 일본, 중국등으로 무역이 되기도 했다.
수로나 해로를 이용한 운송이 주된 운송 수단이었고, 육로의 운송은 보부상들이 등짐을 지고 걸어서 이동하거나 가축을 이용했다. 상업활동에 의해 도로망이 생겨났다. 한양(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가 확대되었다. 조선 초기의 6대로가 후기에 10대로로 발전했다.
농촌에서 몰락한 농민들은 생계를 위해 한양(서울), 개성, 의주, 동래 등 주요 도시로 몰려들었다. 강경포, 마포, 노량진 등은 쌀, 소금, 어물 유통의 거점이 되었다.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민과 중인이 도시로 진출하며 전통적 신분제가 흔들렸다. 몰락 양반과 부유 상인이 경제적 위치를 바꾸며 사회적 유동성이 증가했다.
삼정의 문란과 농민 수탈
매관매직을 통한 관리들의 부패는 화폐경제로 전환되는 상황에서 조선의 기본 세금 제도인 삼정(전정, 군정, 환곡) 시스템을 무너뜨렸다. 관직을 산 지방관리들은 죽은 사람이나 아이에게도 토지세를 물리고, 세금을 낼 수 없으면 이웃이나 친척들에게까지 세금을 가져가기도 했다.
한양으로 세금을 보내는 과정에서도 관리들이 착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후기에는 세금 운송 과정에서 관리들이 세금을 빼돌리는 행위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부당한 행위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청원서가 여러 차례 제출되었다. 1895년, 개성에 거주하는 김진사댁의 노비 돌쇠는 토지세인 결세전(結稅錢)을 중간에서 횡령한 관리 3명을 처벌하고, 과잉 납부한 120냥의 반환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행정사법 모든 기능을 포괄하게 된 비변사는 군사적 대응을 신속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로 농민들의 고충을 상세히 파악하거나 해결하는 것은 주요 업무가 아니었다. 의사결정을 위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매관매직으로 인해 발생하는 지방 행정을 감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방 관리들은 삼정의 문란 문제를 축소 보고하거나, 농민들의 봉기와 불만을 단순히 폭력으로 진압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농민의 몰락과 봉기
삼정의 문란과 부패한 관리들의 수탈로 인해 농민들의 빈곤은 지속되었다. 몰락한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하거나 도적이되는 경우가 많았다. 생존의 위기에 처한 농민들은 지방 관아 습격, 소작료 납부 거부, 환곡 창고 약탈 등 자연 발생적으로 저항을 시작했다. 몰락한 양반, 중소 상공업자, 또는 유능한 농민이 지도자로 등장하여 점차 조직화된 집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농민이 조직화되는 데에 동학과 천주교 같은 종교의 영향도 있었다. 조직화된 농민들은 반란의 형태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1811년 홍경래의 난
평안도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었으나, 조선 정부는 평안도 사람들을 주요 관직에서 배제했다. 서민과 중소 상공업자들이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낮은 사회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탐관오리들이 농민들을 착취하며 봉기의 원인을 제공했다. 1811년,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에서 봉기를 일으켜 부패한 관리와 지주들을 처벌하고,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눠주며 민심을 얻었다. 봉기군은 가산을 중심으로 정주, 철산, 구성, 의주 등 평안도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정부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고, 1812년 정주성 전투에서 패하면서 진압되었다.
1862년 진주민란
진주의 관찰사 백낙신은 과도한 세금과 부당한 환곡 징수로 농민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백낙신의 부정부패와 폭압적인 정책은 농민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1862년, 경상도 진주의 농민들이 관아로 몰려가 백낙신의 부패와 착취에 항의하며 봉기했다. 농민들은 관아를 점령하고 곡물 창고를 열어 분배했으며, 탐관오리를 처벌했다. 조선 정부는 민란 진압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봉기 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처형했다. 백낙신은 이후 파면되어 고금도로 유배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새로운 종교의 유행
조선 후기 천주교와 동학은 사회적, 경제적 위기 속에서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천주교는 내세 구원과 평등을 강조하며 신분제를 비판했고, 동학은 현실 개혁과 인간 존엄성을 내세우며 반봉건·반외세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천주교의 유행
17세기 후반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학은 이수광, 이익 등 유학자들의 지적 호기심과 맞물려 소개되었다. 이벽, 정약용, 정약전 등 남인 계열 유학자들이 서학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천주교가 확산되었다. 평등과 구원의 메시지가 전해지며 백성들은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과 대안으로 천주교를 선택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적극적으로 박해했다. 이는 천주교가 단순히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전통적인 사회 질서와 통치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조상 숭배와 제사를 우상 숭배로 간주하며 거부했다. 약화된 왕권과 정당성이 없는 세도 정치로 인해 자신들의 권력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한 집권세력들에의해, 천주교는 유교와 성리학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으로 박해했다.
천주교 박해
오가작통법을 활용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신고하고 감시했다. 오가작통법은 다섯 가구를 한 작통으로 설정하고, 농가들끼리 서로 협력하고 감시할 수 있게 한 제도로, 세조로 세도때부터 시행되었다. 작통수는 천주교 집회나 신자들을 정부에 보고해야 했다. 보고하지 않는 경우 작통수도 처벌되는 연좌제를 적용했다고 한다.
1801년 신유박해, 순조의 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금지하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했다. 정약용, 정약전 등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외국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처형당했다.
1866년 병인박해 서울시 합정동에는 병인박해에 잘린 사람들을 기리는 절두산 성지가 있다.
이런 박해는 역설적으로 순교자를 만들면서 더 널리 전파되게 되고, 외국인을 처형하여 외세가 개입할 빌미를 주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면 지도층 간의 이슈는 있었을 지언정 오히려 백성들에게 천주교의 전파는 더 느렸을 것 같다. 권력을 유지하는 세력들이 사회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거부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부작용으로 해석하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동학의 유행
1860년 몰락한 양반가문의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했다.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사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해 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동학은 민족 종교로, 평등 사상, 반외세, 반봉건 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급속한 전파
내세 구원을 강조하는 천주교와는 달리 동학은 현실의 고통을 해소하고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탐관오리들에게 지속적으로 수탈을 당하던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현실구원과 평등에 대한 의식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외세와 서구적 요소를 배척하면서 민족주의적 성격도 동학을 전파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접주 체계와 비밀 결사 형태로 조직화 되었다. 동학은 창시한지 4년만에 교조 최제우가 처형되고(1864), 30 여 년 만에 동학농민운동(1894)이 일어날 정도로 빠르게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동학농민운동
1894년 농민들이 동학(東學) 사상을 바탕으로 반봉건·반외세 운동을 전개한 사건이다. 이 운동은 조선 사회의 봉건적 모순과 외세 침탈에 대한 저항으로, 한국 근대사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독립운동과 민족 해방운동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다.
1차봉기 전라도 고부 관아 점령 후 전주성 입성과 전주 화약까지
2차봉기 청일전쟁으로 재봉기한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기 까지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포스팅 할 생각이다.
동학의 평등사상, 참여적 정치의식은 현대적 민주제(민주주의)와 관련하여 해석이 가능한 것 같다. 선거의 개념과 대의제와 같은 현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고, 국가체계를 이루어내지는 못했지만, 봉건적 사회질서와 모순을 비판하면서, 백성들이 직접 참여하고 조직화되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