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 1권 1864년 5월 11일~20일
1864년 5월 11일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12일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정시(庭試)를 행하였다. 허식(許栻) 등 10인을 뽑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르기를,
"방금 공충 감사(公忠監司) 이병문(李秉文)의 보고를 보니, ‘서원현(西原縣)의 군정(軍政)과 환정(還政)은 모두 결세(結稅, 토지 1결당 세금 징수)로 귀결되는데, 지난 신유년(1861)에 도결(都結)을 혁파한 후로 삼세(三稅)를 봉상하는 절차를 천안(天安)의 예를 써서 시행하고 있으나 작부(作夫)에 따라 세금을 내는 것은 두 고을이 같지 않습니다. 천안에서는 매 결마다 선가(船價)와 잡비를 아울러 마련하지만 본읍(本邑)에서는 단지 원래 납부량에 따라 세금을 내고 있어서 2년 동안에 삼세의 부족분이 자그마치 2,000여 석(石)이나 됩니다. 그래서 해마다 나이(挪移)하다 보니 고갈이 되었습니다. 지금 1년이 지난 뒤에 본 읍에 책임을 지우니, 백성들의 힘이 황급하고 강제로 독촉하기가 어렵습니다. 각 아문에서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쌀 도합 2,090석 남짓과 콩 370여 석과 병조(兵曹)에서 받아들이는 무명 5동(同) 15필(疋)을 특별히 대전(代錢)하여 상납하도록 허락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작부에 세금을 내는 것은 이미 천안의 예를 한 번 썼으니, 유독 잡비에 대해서만은 마련하지 않아 이처럼 안에서 축난 것을 나이하는 사태를 초래하였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현(本縣)의 누적된 폐단은 충주(忠州)와 비교해 보면 거의 차이가 없으니, 널리 사면해 주는 은전을 어떻게 한 곳에는 허락하면서 한 곳에는 아낄 수 있겠습니까? 각 아문에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쌀, 콩, 무명을 모두 청한 바대로 대전(代錢)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 13일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행하였다.
춘당대(春塘臺)의 백련지(白蓮池)를 금위영(禁衛營)에서 전관(專管)하여 빠른 시일 내에 수축하라고 명하였다.
임백경(任百經)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서대순(徐戴淳)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동현(李東鉉)을 공충도 병마절도사(公忠道兵馬節度使)로, 신익(申榏)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이면희(李冕熙)를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5월 14일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날을 받지 말고 기우제(祈雨祭)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공충 감사(公忠監司) 이병문(李秉文)의 보고를 보니, ‘서원현(西原縣)의 전세는 지난 신유년(1861)에 조운(漕運)을 파하고 돈으로 바치게 한 뒤로 선가(船價)를 마련하지 못하여 원래 배정된 납부량에 흠축이 생겨 나이(挪移)하여 미봉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지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세(田稅)로 바치는 쌀과 콩 및 선가는 대동법(大同法)의 규례대로 계산해서 제할 것은 제하고서 상납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안에서 축난 것을 나이하는 문제를 가지고 이제 막 품복(稟覆)하였고 전세로 납부하는 쌀과 콩 및 선가는 애초에 마련하지 않았으니, 실로 이것은 절반가량 하다가 만 것과 같은 정사입니다. 일체 대동법의 예에 의하여 계산해서 제할 것은 제하라는 뜻으로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지평(持平) 신재우(愼㘽祐)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금 우리 성상께서 왕위에 오른 첫 해에 경과(慶科)를 새로 설행하니 팔도의 많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전교하신 내용에 ‘각기 도명(道名)을 쓰고, 또 〖제주(濟州) 출신은〗 제주라고 쓰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제주에 살고 있는 선비들은 누구나 춤추며 기뻐서 손뼉 쳤습니다. 그런데 삼가 방안(榜眼)을 보니, 이른바 구성희(具星喜)란 이름을 가진 자가 감히 제주 유학(幼學)이라고 일컬어 방목에 오를 것을 도모하여 차지하였으니, 어찌 이처럼 무엄한 버릇이 있겠습니까? 옛날의 유명한 신하는 나이를 늘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고 관향(貫鄕)을 고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명색이 선비라는 자가 벼슬에 처음 오를 때 거주지를 거짓으로 말하여 감히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하였으니, 이런 짓을 차마 한다면 무슨 짓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구성희를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속히 해당 형률을 적시행하여 불충한 죄를 징계하여 여러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정에서는 먼 지방의 사람을 진념(軫念)하는 것은 다른 것과는 저절로 구별된다. 그런데 이런 간악한 폐단이 있게 되었으니 너무나 놀랍다.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제주(濟州)의 응시자들은 바다를 건너 멀리서 응시하기 때문에 노고가 하도 딱하여 그들로 하여금 시권(試券) 첫머리에 고을 이름을 쓰게 하였는데, 이것은 특별히 진념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속임수로 차지하는 폐단이 있게 되어 본주(本州)의 유생(儒生)들로 하여금 마침내 낙방하는 탄식이 있게 하였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구성희(具星喜)를 원래의 방목에서 빼 버린 뒤에 제주목(濟州牧)에 충군(充軍)하여 그 지방 선비들의 마음에 사과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黃海監司) 홍순목(洪淳穆)의 장계(狀啓)를 보니, ‘장산(長山) 이북의 11개 고을에서 조세로 바치는 콩을 상정(詳定)하여 대납(代納)해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본색(本色)으로 징수하기 때문에 백성과 고을이 모두 곤궁하고, 또 경차인(京差人)의 무리들이 높은 값으로 멋대로 책정하여 시가(市價)에 비해서 몇 곱절나마 된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매년마다 연분(年分)을 풍년인가 흉년인가를 살펴서 혹은 상정하거가 혹은 본색으로 할 때에 등급을 나누어 구별해서 품지(稟旨)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본색으로 할 때에 봄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가 호조(戶曹)에 바치더라도, 만약 타사(他司)로 이획(移劃)한다면 즉시 정박한 곳으로 뒤쫓아 가서 이른바 경차인의 명색을 분정(分定)하여 금지시킬 것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각영(各營), 각사(各司)의 경차인의 명색을 지난번 특별히 판하를 받들었던 것으로 엄금하소서. 11개의 고을에서 조세로 바치는 콩은 이따금 본색으로 납부할 것을 독촉하였으나 비록 호조에서 형편상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라고 하더라도 농사 형편을 참고하여 수시로 조절해 주는 것은 매우 편리한 논의입니다. 봄이 시작되면 배를 세내어 바치는 것은 종전부터 이와 같았고, 경차인을 혁파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 막 엄금한다는 조정의 명령이 내렸으니, 지금 거듭 번거롭게 품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 15일
권강(勸講)하였다.
효문전(孝文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애당초 주전소를 설치한 것은 부득이해서였다. 그런데 여러 가지의 폐단을 끼치게 되어 오랫동안 주민들의 고통이 되어 왔다. 지금 영원히 철폐하고 나니 매우 시원하다. 전소에 남은 돈 1만 냥(兩)을 특별히 감영(監營) 부근에 사는 민호에 골고루 분배해서 나누어 주게 하여 수년 동안 노고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라고 도신(道臣)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함경 감영(咸鏡監營)에서 전소를 폐지한 뒤이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유원(李裕元)이 사계(査啓)하기를,
"러시아 사람이 투서할 때에 앞잡이 노릇을 한 김홍순(金鴻順)과 최수학(崔壽學)은 응당 해당 형률에 처해야 하며, 김해성(金海成)과 강군보(姜君甫)는 공모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지방관(地方官)인 전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석영(李錫永)도 이미 체차되었다고 하여 그 죄상을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 사계를 보니 변금(邊禁)이 점차로 변하여 없어져 버린 듯한데 참으로 조그마한 걱정거리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럭저럭 안일하게 덮어둔 채 지내 온 것은 바로 감영(監營)과 고을에서 편리함만을 찾고 변경의 방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은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니 나라에 법이 있고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은 심상하게 용서할 수 없으니, 묘당(廟堂)에서 품처토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유원(李裕元)의 사계(査啓)에서 김홍순(金鴻順) 등이 러시아 사람과 함께 투서(投書)한 일에 대한 비지에 묘당(廟堂)에서 품처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변경의 방어가 이 지경으로 무너졌으니, 법의(法意)를 생각하면 너무나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왕래한 사실을 그가 이미 자복하였으니 국경을 넘나든 죄인 김홍순(金鴻順)과 최수학(崔壽學)은 강가에서 효수(梟首)하여 군사와 백성들을 경계시킬 것이며, 중간에서 교통한 사람 김문흡(金文洽)은 각기 해당 진영(鎭營)에 기한을 정하여 체포하게 한 뒤에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그 밖의 은장(銀匠) 및 방찰 향장(防察鄕將) 등에 대해서는 도신(道臣)에게 등급을 나누어 참작해서 처결하라고 하되 도신과 수신(帥臣)이 현고(現告)를 바쳐 법대로 감단(勘斷)하도록 하소서.
그 당시의 부사(府使)와 도신에 대해서는 이미 품처할 것을 청하였는데 시임 수사(時任水使)이니, 우선 대임을 차출하여 빨리 옥에 가두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유응(李裕應)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윤육(尹堉)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응식(李應植)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박승수(朴昇壽)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손양석(孫亮錫)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조희복(趙羲復)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5월 16일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삼각산(三角山)과 목멱산(木覓山)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5월 17일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공충 감사(公忠監司) 이병문(李秉文)이, ‘서원현(西原縣)에 소나기가 퍼붓고 겸하여 우박이 쏟아지는 바람에 전답의 둑이 무너지고 보리 이삭이 흔들려 떨어졌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듣고서 매우 놀라고 측은하게 여긴다. 뜻을 보이는 은전이 없을 수 없으니, 묘당(廟堂)에서 좋은 쪽으로 품처토록 하라."
하였다.
경흥 전 부사(慶興前府使) 이석영(李錫永)을 경흥부(慶興府)에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다. 연변(沿邊)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자들을 적발하지 못한 일로 도신(道臣)의 계사(啓辭)가 있었기 때문이다.
5월 18일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하늘이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도와 주상이 왕위에 올라 실오라기에 매달린 듯한 위태롭던 나라의 운명이 태산반석과 같이 편안해졌다. 이때에 밤낮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고 국운이 무궁하기를 비는 나의 마음이 의당 어떠하겠는가? 무릇 상서와 화기를 이끌어 맞이하여 만물이 모두 뜻을 이루도록 하여 국가의 운명이 영원하기를 하늘에 비는 방법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극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제 왕의 탄신이 가까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으니 왕위에 오른 후에 처음으로 맞는 경사스러운 기회이다. 처음 태어날 때 철명(哲命)을 주시어 문득 이날이 있게 하였으니 나의 마음에 기쁘고 축원함이 더욱 다른 때보다 만 배나 더하다. 그래서 사면령을 널리 내려 귀신과 사람이 서로 기쁘게 하니, 대소 신료들은 모두 나의 이러한 본심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그가 지은 죄는 이미 오래되었고 그 죄안(罪案)은 이미 깨끗한데도 백간(白簡)이 아직도 남아 있어 단서(丹書)를 씻을 수 없으니 이와 같은 사람들이 전후하여 한둘이 아니다. 사정(邪正)과 선악(善惡)은 저절로 백세의 정론(正論)이 있기 마련인데, 법과 규율을 누가 감히 하루아침에 갑자기 의논하겠는가? 간혹 남모르는 억울한 사정을 풀지 못하고 애매하여 밝히지 못하는 자가 없다고 기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종친의 계보에 속한 사람 중에도 가끔 불행한 사건이 있어 간혹 간사한 자에게 속기도 하고 간혹 흉악한 무리에게 원용(援用) 당하기도 하여 혐의스러운 처지를 분변하여 밝힐 길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은미할 때에 방지하고 조짐을 막는 의리가 당시에는 비록 엄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일이 지나가 버리면 인정이 간혹 평반(平反)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니, 하필이면 왕실의 가까운 종친에게 오래도록 간악하고 흉측한 자에게 연루 당하게 해야 하겠는가? 무릇 이렇게 전후로 이름이 죄적(罪籍)에 올라 있는 자로 의리에 크게 관계되거나 역적으로 이미 판명된 자를 제외하고는 대신과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官)이 회좌(會座)하여 상세히 심사하여 신원하고 복관하는 것이 합당한지 여부를 논의하고 결정하여 일일이 등급을 나누어 논리를 갖추었다가 7월의 탄신일에 입계(入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서울과 지방의 옥안(獄案)이 적체되었으니 민망하다. 형조 당상(刑曹堂上)은 날마다 개좌(開坐)하여 곧바로 심리하되 죄인에 대해 정밀하고 깨끗하게 명을 받들어 옛사람이 애처로움과 공경으로 옥사를 처결했던 뜻을 잊지 말도록 지방 고을에 분부(分付)하라. 옥안을 미처 녹계(錄啓)하지 못한 것은 또한 각각 해도 도신으로 하여금 직접 심리하여 집행하게 해서 위임하거나 적체되며 그전대로 하는 데 이르지 않도록 즉시 처결하여 탄신일에 입계(入啓)하라고 묘당(廟堂)에서 말을 만들어 관문으로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박승휘(朴承輝)가, ‘철원 부사(鐵原府使) 신길보(申吉輔)가 간사한 아전(衙前)을 신임하여 불법을 자행하니 우선 파출(罷黜)하고 그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소서.’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방어사(防禦使)가 어떠한 직책인데 불법을 자행하기를 이와 같이 낭자하게 하단 말인가?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단 말인가? 해부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엄히 감처(勘處)토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공충 감사(公忠監司) 이병문(李秉文)이 장계(狀啓)하기를, ‘서원현(西原縣)에 소나기가 쏟아지고 얼음과 우박이 내려 둑이 무너졌다.’고 한 데 대한 비지(批旨)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품처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박의 재해가 이처럼 낭자하니 실로 놀랍고 측은합니다. 그런데 판부(判付)하여 은휼(恩恤)하는 것이 상격(常格)에서 멀리 벗어났으니 명을 받드는 데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재해를 당한 민호 중에서 가장 의지할 데가 없어 살아가기 어려운 자를 뽑아서 공곡(公穀)을 등급을 나누어 헤아려 지급하게 하고 모환(牟還)도 적당히 견감해 주어 한 명의 백성도 살 곳을 잃어버렸다는 탄식이 없게 해야 합니다. 공곡과 견감해 준 모환에 대하여 사실대로 회감(會減)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서대순(徐戴淳)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조헌영(趙獻永)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이주응(李周膺)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이중영(李重榮)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5월 19일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의익(李宜翼)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김학성(金學性)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용산강(龍山江)의 저자도(楮子島)에서 재차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5월 20일
권강(勸講)하였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신이 며칠 전에 삼가 자전의 하교를 받들었는데, ‘의금부(義禁府)의 문안(文案) 중에 신원하고 복관하기에 합당한 자를 탄신일에 논리를 갖추어 입계(入啓)하라.’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나라의 더없이 중한 은전(恩典)이고 더없이 큰 형정(刑政)입니다. 신과 같이 보잘것없고 비루한 자가 감히 제멋대로 결단할 바가 아닌 듯하니, 원임(原任)의 여러 정승들과 함께 문안을 참고하면서 자세히 상정(商訂)하는 것이 좋겠기에 앙달(仰達)합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금번의 이 일은 내가 주상에게 복이 돌아가게 하려고 왕위에 오른 첫 해의 명을 기원하는 근본을 삼으니 대신은 이를 알고서 명을 펴나가라. 대체로 시일이 오래되고 내용이 분명하지 않은 일을 자세히 살피고 의언(議讞)하여 상서와 화기를 이끌어 맞이하는 바탕이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두순이 아뢰기를,
"이번 자전의 하교에 하늘에 영명(永命)을 기원하고 상서와 화기를 이끌어 맞이하는 극진한 뜻은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누군들 손을 모아 함께 축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일은 형정(刑政)에 관계가 되니 충분히 살피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앙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죄가 가벼운데도 억울하게 죽은 자와 중죄에 해당하더라도 5대가 된 자는 모두 조사하여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어 한 사람도 원통함을 품은 자가 없게 하라."
하였다. 조두순이 아뢰기를,
"경강(京江)에 집주선(執籌船)을 처음으로 설치한 것은 선교(船橋)를 위해서 그렇게 하였을 뿐만이 아니고 양남(兩南)의 조운(漕運) 사례(事例)가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제는 바로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모두 성 내의 한량이나 산관(散官)으로 놀고먹는 자들이라 주즙(舟楫)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공곡(公穀)이 해마다 축이 나는 등 말하기 어려운 허다한 폐단을 감히 하나하나 모두 열거하지는 못하니, 한 차례 경장(更張)이 있지 않으면 강회(江淮)의 전운(轉運)이 이루어지게 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경연에서 물러난 뒤에 해사(該司)의 당상(堂上)과 차근차근 상의해서 다시 계품(啓稟)하겠지만 먼저 이런 사정을 진달(陳達)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세곡(稅穀)을 선적(船積)할 적에 해읍(該邑)에서 반드시 감합기(勘合記)를 도사공(都沙工)에게 바치게 하는데, 비록 한 되나 한 홉의 곡식이라도 만약 거둬들이지 못한 것이 있으면 사공인 자가 다짐을 만들어 받아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일단 감합(勘合)이 있은 이후에는 그 곡식의 허실과 영축(盈縮)을 애당초 해읍에서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근래에 사공들의 포흠(逋欠)이 서로 잇달아 징쇄(徵刷)할 수 없어서 경사(京司)에서 해읍에 관문을 보내 엄격히 독촉하므로 가끔 민간에 다시 징수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신이 몇 년 전에 이 문제를 가지고 품주(稟奏)하여 거듭 금지하도록 한 바가 있었지만 전해 듣기로는 소요가 여전하다고 합니다. 이 뒤로 감합한 선척이 있으면 절대로 해읍을 침탈하거나 책임지우지 말도록 하라고 다시 일일이 각 아문에 알리도록 하고 또한 양남에도 관문을 보내 한 사람의 백성도 몰랐다는 탄식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돈과 곡식을 다루는 아문(衙門)의 정비(情費) 명색(名色)은 그 정식(定式)이 있습니다. 그런데 서리(胥吏)의 무리들이 두려워하거나 거리낌 없이 과외로 침탈하며 징수하여 해마다 보태고 늘리는 것이 한이 없습니다. 비록 곡(斛)에 차는 쌀과 치수에 차는 무명과 베라 하더라도 정비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반드시 백방으로 퇴짜를 놓아 몇천 섬의 곡식과 몇백 필의 베가 열흘이 넘고 한 달이 넘도록 창고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관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보아 오직 장리(掌吏)의 말만 듣고 필경에 바치도록 허락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의 욕심을 채운 뒤에 달려 있습니다. 한편 지방 고을의 색리(色吏)의 경우는 촌락에서 낸 것을 사채로 놓아 10배의 이식을 적용해서 백성들에게 바치도록 독촉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팔도의 민정의 위급함이 모두 이러한 일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혹시 다시 전의 버릇을 따라 서슴없이 법을 위반하거든 낭관(郎官)은 태거(汰去)하고 해리(該吏)는 형배(刑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과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은 백세토록 사림(士林)이 숭상하여 우러러보는 바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여러 선정의 치제(致祭) 때에 미처 함께 거행하지 못했으니 아마 미처 거행하지 못해서 그런 듯합니다. 그들의 사판(祠版)이 있는 곳에 지방관(地方官)을 보내어 똑같이 제사를 지내주어 왕위에 오른 초기에 성대한 의식을 더욱 빛내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증 영의정(贈領議政) 문헌공(文獻公) 윤행임(尹行恁)은 정묘(正廟)로부터 보기 드문 지우(知遇)를 받아 경신년(1800) 이후 변함없는 충성심으로 오직 선왕의 일을 계승하는 데 두었습니다. 지금 신원하고 복관한 지 이미 오래된 뒤에도 오히려 한 차례 뜻을 보이는 일이 없었으니 실로 빠진 전례(典例)가 됩니다. 듣건대, 본가에서 장차 연시(延諡)를 행하려고 한다고 하니, 시호(諡號)를 내리는 날에 이어서 사제(賜祭)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정기세(鄭基世)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경기 감사(京畿監司) 조재응(趙在應)의 상소로 인하여 덕적(德積)과 주문(注文)의 첨사(僉使) 중에서 한 자리는 본영(本營)에서 자벽(自辟)하는 자리로 만들어 열교(列校)들을 천전(遷轉)시킬 것을 묘당(廟堂)에서 적당하게 헤아려 배정(排定)하겠다는 뜻으로 복계(覆啓)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덕적과 주문은 모두 적사(積仕)하는 금군(禁軍)과 경교(京校)들이 천전하는 자리이므로 지금 이 두 자리를 실로 섣불리 논의하기 어렵습니다. 장봉 만호(長峯萬戶)는 바로 교동 수영(喬桐水營)에서 관할하는 진영(鎭營)이니 이것으로 정하고, 임기가 차기를 기다려서 자벽하게 하며, 전최(殿最)는 종전대로 교동의 곤수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병국(金炳國)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삼았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임태영(任泰瑛)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공해(公廨)와 군물(軍物)의 보수를 위해서 수고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