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3권, 고종3년 1866년 11월
11월 1일 병진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의 동향 대제(冬享大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강화도(江華島)의 지휘 체계는 통영(統營)의 규례에 따라 규정을 정해 시행하고 있습니다. 진무사(鎭撫使)가 으레 겸직하고 있는 본부 당상(堂上)의 직함과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띠고 있는 겸 강화 유수(兼江華留守)의 직함을 다같이 감하(減下)하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일 정사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11월 3일 무오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11월 4일 기미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이연응(李沇應)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풍덕(豐德)은 두 능(陵)을 모신 곳이고,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본향이므로 그 중요함이 다른 곳과는 저절로 구별된다. 그리고 심영(沁營)의 후원이기도 하다. 비록 지도상으로 보더라도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을 환히 알 수 있다. 복읍(復邑)할 것에 대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에게 하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수현(金壽鉉)은 백성들을 안착시키려고 힘써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서양 오랑캐들이 이웃 고을에 쳐들어 왔었지만 모든 백성들을 안정시킴으로써 온 고을 안이 편안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오랫동안 유임시켜 줄 것을 청하니, 임기가 차면 다시 한 번 잉임(仍任)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이 수령(守令)은 그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정사를 잘한다는 소문이 많이 보고 되어 왔는데, 지금은 백성들을 잘 돌보고 어루만져주어 온 경내가 편안히 지내고 있으며 백성들은 혹 그를 잃을까봐 걱정하고 있다. 이것은 한 차례 임기만 잉임 시키고 말 수 없으니 특별히 한 자급을 더하여 우수한 공적을 표창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매번 나라의 경비가 부족할 때마다 원래 있는 포삼(包蔘) 외에 추가로 수량을 더 배정하여 보충해 썼습니다. 현재 사변에 대처할 준비를 하는 것이 한시가 급하니, 1만 5,000근(斤)을 내년부터 다시 더 부과하여 심영(沁營)에서 1만 근, 송영(松營)에서 3,000근, 옹영(甕營)에서 2,000근을 세(稅)로 받아서 구획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방어 준비를 시행하는 방도는 각 해당 진영으로 하여금 강구하여 계문(啓聞)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갑곶진(甲串津)과 조강진(祖江津)에서 오는 물고기, 소금, 곡식은 통영(統營)의 규례대로 진무영(鎭撫營)에서 주관하여 수세(收稅)해서 지방(支放)에 보태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5일 경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이재원(李載元)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민승호(閔升鎬)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정지현(鄭志鉉)을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오하영(吳夏泳)을 공충도 병마절도사(公忠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중국 예부(禮部)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을 보니, ‘동치(同治) 5년(1866) 10월 8일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에서 아뢴 것에 준거(準據)한 것이다. 신 등이 조선국에서 예부에 보내온 자문 원본을 보니, 대개 영국인 모리슨〔馬力勝〕 등이 강제로 해국(該國)과 통상을 하려고 중국에서 자문이 있었다고 빙자하고, 교민(敎民)과 선교사들을 살해하고 예수교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국의 장병들은 영국 배에 포로로 잡히고, 영국 배가 포를 쏘아댔기 때문에 마침내 또한 포를 쏘아 반격을 가하여 사람들과 배가 모두 불에 타고 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배 안에 중국의 북경(北京), 성경(盛京), 광동(廣東), 하문(廈門) 등지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스스로 깊이 뉘우친다고 하였다. 또, 서양인들이 해마다 바다를 건너와서는 백성들을 살해하니, 잘 타일러서 물리쳐주며 교역을 하자는 말도 막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신 등이 조사해 본 데 의하면, 지난해 프랑스의 사신(使臣) 박이덕밀〔拍爾德蜜〕이 해국의 선교사로서 조선에 가서 선교하려고 하여 미리 공문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것을 신 등이 거절하고 아울러 가지 말도록 권고하니 곧 의견을 철회하였다.
금년 여름에 영국 사신(使臣) 아례국〔阿禮國〕이 화륜선 1척을 파견하여 조선의 해변 일대에 이르러 계속 점령하고 있겠다고 공문을 보내왔으며, 프랑스 사신 백락내〔伯洛內〕도 조선이 자신들의 주교와 선교사들을 살해하였으니 프랑스의 병선(兵船)을 일제히 조선으로 집결시켜 얼마동안 그 나라를 점령하고 있겠다는 조회를 보내왔다. 6월 7일에 신의 아문(衙門)에서 두 나라에 회답 공문을 보내 이해시키고 저지하였다.
7월 이후에 영국 사람 모리슨〔馬力勝〕 등이 번갈아 가면서 조선에 정박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통상을 하자는 의도로서 그런 모략을 꾸며온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신의 아문에서〗 그때그때 저지하여, 실로 조선과 통상해도 좋다는 허가를 하지 않았다. 영국 사람이 중국의 자문이 곧 올 것이라고 한 말은 분명히 날조해 낸 것인 만큼 해국의 왕은 염려할 것이 없다.
어제 미국 사신 윌리엄스〔衛廉士 : Williams, S. W.〕의 편지에 의하면, 8월에 두 개의 돛을 단 1척의 배가 고려국에 갔다가 좌초되었는데 고려국의 장선(將船)들이 불사르고 선주와 선원 24인을 붙잡아갔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고려에서 혹시 그들을 중국으로 보내줄지 모르니, 봉천부(奉天府)의 관리에게 신칙하여 잘 보살펴 달라고 청하였다.
지금 조선에서 배를 공격해 불태웠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단지 한 가지 일로 풍문(風聞)을 판단할 길이 없다. 프랑스가 군사를 일으켜 조선으로 나가려는 것을 일찍이 영국과 미국 두 나라가 저지하였으나, 프랑스는 듣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에서도 분별 있게 처리해야 많은 적을 만드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자문(咨文)에서 영국 배를 공격하여 죽인 20명 중에서 중국 사람으로 이름이 불리는 사람이 13명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중국 백성은 사사로이 국경을 나가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극히 엄함에도 불구하고 적의 배에 가 붙어서 속국을 위협하다가 창과 포에 맞아 죽었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며 조선에서는 잘못이 없으니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시끄럽게 되지 않도록 타일러 이해시켜 달라고 한 것은 프랑스가 군사 행동을 하겠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만큼 신의 아문에서 그때그때 사건에 따라 힘을 다해 이해를 시켰다. 이 때문에 프랑스 사신이 조선의 바다를 막아버리겠다고 한 조회에 대해서도 갑자기 싸움을 벌이지 말아 두 나라의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군사 행동을 한 이후부터는 전에 선교나 하겠다고 요구하던 분위기와는 같지 않을 것이며 영국과 미국도 전번에는 권고하여 저지시켰지만, 지난번에 또 조선과 불화를 일으켰으니 통상을 하자는 말이 더욱더 강하게 나올 형편일 뿐만 아니라 이미 군사 행동을 했으니 화해를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배상금 문제가 나올 것이다.
세 나라가 점점 협력하려는 형세로서 반드시 통상과 선교 및 배상하는 일로 서로 따지고 들 것인데, 지금 조선에서는 통상과 선교(宣敎)를 전연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배상 등의 절차에 미리 생각해두어 타결되도록 힘쓰고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해국은 마음을 다해서 대책을 세워서 분별 있게 처리하여 만전을 기하고, 조금도 허술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자문과는 다르니, 회답 자문을 지어 내어 파발 편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중국 예부(禮部)에 회답한 자문(咨文)에,
"영국 배가 불에 타 침몰된 일과 프랑스의 격문이 패만(悖慢)했던 이야기와 프랑스 군사가 물러간 이유는 이전 자문에서 상세히 진술하였습니다.
그런데 올해 2월 7일에 해미현(海美縣)과 강화부(江華府)에 다시 와서 통상을 하자고 청하기에 상국(上國)의 공문이 없어서 감히 임의로 허락할 수 없다고 하자, 대청국(大淸國)에 가서 공문과 화물을 가지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배를 띄워 멀리 가버린 다음 그림자도 볼 수 없었으니, 곧 자칭 영국인이라 한 모리슨〔馬力勝〕과 오페르트〔戴拔 : Oppert, Ernest Jacob〕 등입니다. 또 7월에 평양부(平壤府)에 와서 정박하고는 장변(將弁)을 붙잡아가고, 백성들을 살해하며, 재물을 약탈해가고, 총포를 마구 쏘아대다가 얕은 물에 걸려 불에 타 침몰된 것은 곧 자칭 영국인 토마스〔崔蘭軒 : Tomas, Robert Jermain〕, 덴마크인 리바항〔李八行〕과 오귀자〔吳鬼子〕 등입니다.
원래 미국인과 돛을 두 개 단 배 1척이 얕은 물에 걸려서 불에 타버렸거나 선주와 배군 24인이 붙잡힌 일은 없는데, 이번에 윌리엄스〔衛廉士 : Williams, S. W.〕로부터 온 편지는 평양부에서 영국 배가 침몰된 사실이 와전된 것을 근본을 잘 따져보지 못한데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영국, 프랑스 양국과 본래 교섭도 없었는데 어찌 화의를 잃을 수 있겠습니까? 통상과 선교의 문제는 나라의 법에 의하여 거절하였고, 선교사의 문제는 다른 나라의 나쁜 사람이 변복하고 사람들을 현혹시켰기 때문에 배척하고 제거한 것일 뿐입니다.
대체로 천하의 각국이 서로 전쟁을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실정을 자세히 알아보고 불화의 단서를 똑똑히 잡은 다음에야 비로소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인데, 지금 프랑스인들은 우리나라의 미비함을 엿보고 강화부에 느닷없이 들어와 온 성을 모두 불사르고 허물고 재화를 약탈해갔습니다. 이것은 곧 약탈을 일삼는 포악한 도적 무리와 한가지입니다. 통상이 과연 이와 같은 것입니까? 선교라는 것이 과연 이와 같은 것입니까? 마침내 그들은 두령(頭領)이 섬멸되자 돛을 올려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종적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에 다만 의리를 잡고 준비를 갖추고 힘써 성신(誠信)을 다하고 있는데, 병비(兵費)를 배상하라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귀 예부와 총리 아문(總理衙門)에서 이해관계까지 염려해 주었으니 매우 감사합니다.
다만 프랑스인들이 우리나라에서 보관해 두었던 무기를 빼앗아간 것이 그 수량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프랑스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옳을지 모르지만, 프랑스에서 우리나라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어디 이런 법이 있을 수 있습니까?
대체로 프랑스인이 통상이니, 선교니, 배상이니 하는 여러 일들이 우리나라의 백성과 국가의 정세로는 비록 몇 해 동안 양이(洋夷)들에게서 곤란을 당할지언정 절대로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귀 예부에서 실정을 깊이 헤아리고 기미에 따라 알려주어서 말썽이 없게 하며 시종 일관한 혜택을 베풀어 준다면 천만 번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11월 6일 신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김선필(金善弼)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수집해서 글로 아뢰기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역대로 돈을 만드는 법을 통변(通變)한 것은 대부분 부득이하여 나왔던 것입니다. 무게나 크기를 갑자기 바꿀 때에 백성들이 혹 불편하게 여기거나 불신하는 것이 폐단입니다. 의심하여 통용이 막히면 그칠 수 없으니, 우선 시험 삼아 당십전(當十錢)으로 그 유통을 살펴보아야 하니 먼저 가벼운 것으로 그 무거운 것을 징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당십전이나 당백전이나를 막론하고 만드는 노력은 적게 들면서 얻는 이득은 매우 크기 때문에 놀고먹는 자들이 도주(盜鑄)한다면 장차 하루 동안에 몇 곱절의 이득을 얻으므로 주륙(誅戮)이 아니면 금할 수 없으니, 이것이 신이 심려하는 바입니다. 삼가 성상의 재처(哉處)만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는 아뢰기를, ‘국용(國用)을 통제하고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는 것은 천하고금의 상리(常理)입니다. 방금 변란을 겪고 공비(公費)가 날로 늘어 나라의 재정이 어렵고 백성들의 곤란하기가 지금 같은 때가 없는 만큼 마땅히 재정을 넉넉하게 하며 힘을 펴는 방책부터 강구해야 하지만 지금 경제가 궁핍하여 밤낮 근심스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당백전을 주조하자고 한 좌의정(左議政)의 계(啓)는 실로 옛일을 상고하고 오늘의 형편을 참작한 훌륭한 계책입니다. 다만 유포시켜 통행시키는 것은 비록 유사(有司)에 조처하는 책임이 있으나, 지출과 수입을 따지고 비용을 절약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제때에 크게 변통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역(易)》에서 이른바 재정을 다스리는 방책으로서 국용도 넉넉해지고 백성들의 재산도 풍족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은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널리 하문(下問)하여 재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판부사(判府事) 김병국(金炳國) 이하 사람들의 의견도 다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주조하는 문제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호조(戶曹)로 하여금 전적으로 맡아 거행하며 장소는 금위영(禁衛營)에서 하라."
하였다.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풍덕(豐德)에 다시 고을을 설치하는 것이 합당한지 여부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문의한 즉,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풍덕을 이부(移付)하는 것은 전적으로 송도(松都) 진영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서 지금까지 근 50년이라는 오랜 기간 내려왔습니다. 해영(該營)의 사세(事勢)가 비록 복구했을 때에 비해서 어떠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군읍(郡邑)의 인혁(因革)에 대하여 말한다면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에 없애고 지금에 와서 다시 두는 것은 각각 그 시기에 따라 적합한 조치가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고장이 능을 모신 중요한 곳이고 지형상으로 보아 중요함은 진실로 전하께서 하문하실 때에 한 말씀과 같습니다. 신은 다시 복구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봅니다. 삼가 성상의 재처만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과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의 의견도 역시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여러 대신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고을을 복구하는 한 가지 문제는 다시 더 의논할 것이 없다. 제반 조처는 묘당(廟堂)에서 빨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7일 임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조계승(趙啓昇)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11월 8일 계해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11월 9일 갑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국(金炳國)을 강관(講官)으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0일 을축
윤정구(尹正求)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만운(李晩運)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오취선(吳取善)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재원(李載元)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이근우(李根友)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삼현(李參鉉)은 이미 정사에서 현저한 업적을 나타냈으므로 모두 그가 떠나가는 것을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년을 잉임(仍任)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파주(坡州)는 비단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도(平安道)의 요충지일 뿐 아니라 연해의 포구들에서 멀지 않는 곳이므로 이러한 때에 계엄(戒嚴)을 타읍(他邑)보다 배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래 쇠잔한 지대여서 군제(軍制)가 매우 허술합니다. 옹진 수영(瓮津水營)에 새로 떼준 삼세(蔘稅) 중 300근(斤)을 본 목(牧)에 이획(移劃)하여 방어를 위한 방책을 강구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방어곡(防禦穀)은 절대로 다른 데 유용하여 쓰지 말 것을 경기(京畿)의 감영(監營)에 분부하여 정식(定式)으로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11일 병인
김병주(金炳㴤)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밀양(密陽)과 의령(宜寧) 등 고을의 소호(燒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병조(兵曹)에서 올린 초기(草記)를 보니, 전라 감영(全羅監營)의 화포과(火砲科)에 포수(砲手) 한기현(韓基玄)은 관노(官奴)의 우두머리로서, 사제(賜第)한 것은 새로 규례를 만들어내는 것과 관계되므로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는 일에 대해 윤허하셨습니다. 공사(公私) 천인(賤人)이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것은 법전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원계본(原啓本)을 돌려 하송(下送)하고, 다시 시험을 쳐서 뽑은 다음 보고하도록 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는 전적으로 비어(備禦)를 격려하는 뜻인데 무엇 때문에 공사 천인을 논하는가? 특별히 면천(免賤)한 후 사제하라."
하였다.
11월 12일 정묘
조영하(趙寧夏)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1월 13일 무진
평안도(平安道)에서 도과(道科)를 설행하였다. 최봉명(崔鳳命) 등 5인을 뽑았다.
11월 14일 기사
거창(居昌), 경주(慶州) 등 고을의 소호(燒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11월 15일 경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진무사(鎭撫使) 이장겸(李章濂)의 보고를 보니, ‘정족 산성(鼎足山城)은 험한 요충지로서 튼튼히 지켜낼 만한 지역이나, 선두진(船頭鎭)은 산간벽지로 깊이 들어가 있는 곳이어서 요충지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이 진은 파하여 산성에 옮겨감으로써 방어를 위한 방도를 다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산성이 험한 요충지라는 것을 대체로 대강 짐작한 것이나 이번 양요(洋擾)의 때를 놓고 말하더라도 끝까지 튼튼히 지켜낼 수 있는 곳으로 이 성만 한 곳이 없습니다. 선두진은 실로 요충지로 쓸 만한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을 파하여 저쪽에다 옮기자는 것은 진실로 일리있는 의견이니 바라건대 보고 내용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진무사의 보고를 보니, ‘영종도(永宗島)는 해로(海路)의 요충지여서 승급시켜 방어영(防禦營)으로 만든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제 진(鎭)으로 낮춘다면 허술하게 될 우려가 없지 않으니, 변지과(邊地窠)를 시행하여 해안 방어에서 더욱 중요한 지대로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새 품계의 자리를 두는 것으로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화도(江華島)에 양요 이후 마땅히 사민(士民)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 주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송도 군영(松都軍營)을 놓고 말하더라도 이미 유생과 무인을 시취(試取)하는 규례가 있는 만큼 인접한 지역에서 소란한 싸움이 있은 뒤에 역시 뜻을 보이는 조치가 없을 수 없습니다. 모두 문무과 별시(文武科別試)를 설행하며 수신(守臣)에게 시험을 주관하게 하소서. 그리고 강화도의 문과 시험은 시관(試官)을 특별히 정하여 시취하소서. 함경북도(咸鏡北道)의 도과(道科)에 대해서는 이미 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차 기일을 연기하여 실로 사람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품게 하는 문제와 관계됩니다. 바라건대 택일하여 시행하는 것에 대하여 해조(該曹)와 해도(該道)에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포과(砲科)도 똑같이 설행할 것을 명하였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기정진(奇正鎭)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전후하여 외람되게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 특별히 간삭(刊削)시키신다면, 비단 신이 범하고 있는 죄를 경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국체(國體)에도 실로 천만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저번에 신이 망녕되게 한 번 상소문을 올린 것은 분격하여 올린 것으로 주안점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 비천하여 아무 것도 취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에 넘치게 전하의 너그러운 비답을 받았으며 끝에 쓰기를, ‘훌륭한 계책을 더욱더 많이 아뢰라.’라고 하셨습니다. 추요(芻蕘)에게까지 하문(下問)하시는 성의(聖意)에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의 가슴속에 올릴 만한 훌륭한 계책이 있다면 어찌 불초(不肖)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실로 전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견마(犬馬)가 주인을 생각하는 점은 현우(賢愚)의 간격이 없으며, 헌근(獻芹)함에 어찌 아름다운 맛을 기다려 감히 캐겠습니까? 촌부(村父)나 야로(野老)와 같은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아룁니다.
하나는 전하의 독서에 관한 것이며, 다음 하나는 전하의 택인(擇人)에 관한 것입니다.
이른바 독서한다는 것은 어찌 전하를 박사들처럼 공부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가장 알기 쉬운 옛 사실을 인용하여 밝히겠습니다.
당(唐) 나라 때에 간사한 내시(內侍) 구사랑(仇士良)은 그 무리에게 총애를 독점하고 권력을 튼튼히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말하기를, ‘언제나 사치한 것으로 임금의 이목(耳目)을 즐겁게 하고 책을 읽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사람의 마음과 뜻을 병들게 하는 것은 사치보다 더한 것이 없고 사람들을 더욱 지혜롭게 만드는 것으로는 경전(經典)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습니다. 임금의 마음과 뜻이 병들지 않고 지혜를 더욱더 보충해 나간다면 간사한 행동을 부릴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았습니다.
간인(奸人)이 자신을 위해 도모하는 것이 참으로 교묘한 것입니다. 그런 즉 임금만이 왜 자신을 위한 계책이 없단 말입니까? 그 계책은 멀지 않습니다. 그의 말과 반대로 사치한 것을 배척하고 멀리하며 책을 가까이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임금이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에서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이 세상을 다스린 큰 경륜과 큰 법은 《상서(尙書)》라는 한 경전에 실려 있는데, 마치 장인이 먹줄을 갖고 있고, 의사가 《소문본초(素問本草)》를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이 경서의 자자구구(字字句句)를 따져가며 환히 꿰뚫으신다면, 크게는 천지를 경위(經緯)할 수 있고 작게는 한 가지 병에 한 가지 약을 쓰듯이 하여 세상을 다스려 나갈 수 있어 큰 근본이 수립될 것입니다. 순문(詢問)하고 논란(論難)하는 것은 시강관(侍講官)을 정밀하게 잘 선택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대신 중에서 30세 이상과 40세 이하인 자와 낭청(郎廳)으로서 명망이 높은 관리 중에서 각기 한 사람씩 추천하도록 하되, 멀고 가까움을 한정하지 말고 지위와 문벌에 구애함이 없이 단지 품행이 단정하고 청백하며 학문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을 구하여 겸직을 맡지 말고 다른 관청에 옮기지도 말고 오로지 강독하는 일만 맡게 합니다. 만약 재능이 많은 경우에는 백의(白衣)로서 정식 임명하지 않고 임시로 다른 벼슬 이름을 빌려 입시(入侍)할 것입니다.
대저 실효를 구하려면 우선 일반 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군신(君臣)의 믿음이 한 집의 부자(父子) 같지 않고서 능히 치리(治理)한 사람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근일 해구(海寇)의 변에 강화도는 관리 한 사람을 잘못 선택하여 내성(內城)이 함락당하였으며, 정족 산성(鼎足山城)에서는 관리 한 사람을 잘 선택하여 강화도(江華島)를 도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니 사람을 잘 고르는가 잘못 고르는가 하는 그 효험이 아주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일을 맡기는 것이 큰 것은 비단 강화도 뿐만이 아니며 화난(禍難)이 잠복해 있는 것은 비단 외구(外寇) 뿐만이 아닌데 사람들을 잘 선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임금에게 어려운 것은 지인(知人)이니,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부화(浮華)한 자는 진실한 마음이 적으며, 그저 순종만 하는 자는 내수(內守)함이 없을까 염려되며, 자기 한 몸만을 교묘하게 꾀하는 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틀림없이 적으며, 영화만을 급급하게 추구하는 자는 의로운 일에는 틀림없이 나서기를 주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양직(諒直)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사람을 관찰하면 깨닫는 바가 많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해구들이 이미 물러갔다고 마음의 경계를 풀고 안일하게 지낸다면 나라의 걱정거리 되는 것이 어찌 한갓 해구들에게만 있겠습니까? 임술년(1862)에 민요(民擾) 때 광부(狂夫)가 한 번 소리치자 향응(響應)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나선 자가 순식간에 천 수백이나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몇 년 전부터 남방(南方)에서는 도적 무리들이 대낮에 촌락을 싸다니면서 돈과 재물을 토색(討索)하고, 밤이면 명화적(明火賊)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낌 없이 횡행하는 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북쪽 변경에 있는 백성들은 왕왕 가족들을 거느리고 강을 넘어 도망치는 사람들이 있어 수령(守令)들이 십오(什伍)로 묶어 금하였으나, 하룻밤 사이에 다섯 집이 함께 도망쳐 가는 폐단이 있으니 십오의 법도 역시 이어 폐지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신이 목격(目擊)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민정(民情)으로 보면 헛소문이 아니라고 봅니다. 소민(小民)은 나라에 있어서 초목의 가는 뿌리와 같습니다. 가는 뿌리가 번성해야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며, 가는 뿌리가 병이 들면 곧 말라버리는 것을 선 자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경전(經典)에서 이른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한인(漢人)이 이른바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소민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울부짖어도 호소할 곳이 없게 되면, 즐겁게 살아가려는 마음이 없어지고 어질고 사랑스러운 마음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구제해 주지 않는다면 세가(稅駕)할 곳이 없으니 신은 전하께서 장차 이를 어떻게 수습할지를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사륜(絲綸)을 내려 가르쳐주고 깨우쳐주려고 한다면, 사륜을 점점 더 많이 내릴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믿지 않을 것이며, 법령으로 나라의 규율을 엄격히 세우려고 한다면 법령이 점점 엄해질수록 백성은 점점 더 놀라며 배반할 것입니다. 오직 사대부들의 풍속부터 바로잡고 마음을 돌려세워 이끌어 나가게 한다면, 조정이 바르게 되고 백관(百官)이 바르게 될 것이니 백성들도 어찌 바르지 못한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일은 또한 약속을 하여 수습하거나 기회를 마련하여 바로잡을 것도 아닙니다. 그 중요한 기괄(機括)은 오직 전하의 일념(一念)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전하는 이제부터 하늘의 의사와 사람들의 마음이 오가는 것이 두려운 문제임을 뚜렷하게 보고 사사로운 마음을 쓰지 않는 것으로써 천하의 본보기가 되고, 착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몸소 앞서 시행하고, 그릇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몸소 앞서 제거하는 세 가지를 받드소서.
그리하여 위(衛) 나라의 무공(武公)처럼 옥루(屋漏)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며, 연(燕) 나라의 소왕(昭王)처럼 측신(側身)하며 착한 인재들을 구하며, 위(衛) 나라의 문공(文公)처럼 굵은 베옷에 굵은 비단으로 만든 관을 쓰며, 초(楚) 나라의 장왕(莊王)처럼 달아맨 종고(鍾鼓)를 끊어버리듯이 할 것입니다. 책을 읽고 자신을 밝게 수양하며 인재를 잘 선발함으로써 자신의 몸가짐을 잘 해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일념으로 이와 같이 성실하게 한다면 즉 지성(至誠)에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대부들이 누가 깨끗하고 순결한 한마음으로 그 아름다운 덕(德)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한다면 교령(敎令)이 대궐문 밖으로 채 나가기도 전에 천 리 밖에 있는 백성들은 벌써 고무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실지 폐단은 제거되고 실속 있는 혜택이 미치게 되면 존군(尊君) 친상(親上)의 마음이 훌륭하게 스스로 생겨날 것이니, 죄인을 다스리거나 외적들을 막는 문제가 무슨 걱정할만한 문제로 되겠습니까?
요(堯) 순(舜)이 아니면 아뢰지 말라는 것이 옛날의 명철한 훈계입니다만, 신이 든 위 나라, 연 나라, 초 나라의 네 임금에 대한 문제로 말한다면 역시 할 말이 있습니다. 요 순은 생지(生知)이지만 자취는 없으므로 이 네 임금을 본받는 것은 바로 요 순과 같은 임금으로 되는 지름길입니다.
신의 이 글은 본래 남은(濫恩)을 면해 줄 것을 빌기 위한 계책에서부터 쓴 것인데, 잡은 붓대를 멈추지 못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신은 당장 죽게 된 몸으로서 이제 살날이 얼마 없으므로 이어 이렇게 봉장(封章)을 올립니다.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도록 당돌하게 행동하였으니 스스로 죽을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해구의 변으로 말하면 통분하기 끝이 없다. 허다한 시폐(時弊)로 가는 곳마다 걱정스러운 일이 아닌 것이 없다. 책을 읽고 인재를 잘 선발하는 것은 급선무이다. 이미 이와 같이 병들었다는 것을 안 이상 과연 이와 같은 것을 약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은 사임하려 하지 말고, 문제가 있는 즉시 나에게 아뢰라."
하였다.
11월 16일 신미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예조(禮曹)의 당상(堂上)들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내년은 자성(慈聖)의 육순이 되는 경사스러운 해이다. 익종 대왕(翼宗大王)에게 존호를 추상(追上)하고,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 존호를 가상(加上)해야 하니, 응당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거행하도록 하여야 하겠는데 과연 어떠한가?"
하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지금 존호를 추상하고 가상하는 하교를 받고 보니, 아!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생각이 경사를 맞이하여 더욱더 간절해집니다. 전하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경사로이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비길 데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익종(翼宗)의 성덕(聖德)은 지극하므로 백세(百世) 이후에도 이를 우러러 사모할 것입니다. 그 공적과 덕화를 추후로 찬양하여 무궁토록 밝게 드러내는 것은 바로 대서 특필할 만한 공적에 대해서는 한 번만 쓰지 않는 의리인 것입니다. 생각건대 대왕대비의 환갑을 경축하는 일은 우리나라가 500년 동안 내려오는 기간에 보기 드문 경사입니다. 추상으로 돌아간 분을 사모하는 마음에 부합되게 하고, 가상으로 대왕대비의 공덕을 찬양하는 것은 전하의 효성을 더욱 빛나게 할 것입니다."
하니,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李景在)가 아뢰기를,
"지금 하교를 받고 경사를 축하하려는 전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므로 신 등도 역시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육순의 경사를 맞이하여 추상하고 가상하는 의식 절차에 대하여 말한다면 열성조(列聖朝)가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습니다. 예의대로 경사를 축하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간절한 소망입니다."
하니,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덕성과 신공(神功)은 백성들은 더 어떻다고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일을 맞아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크게 거행하는 것은 영원히 슬퍼하는 그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내년은 경사스러운 해인만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인자한 덕을 지닌 대왕대비께서 반드시 장수하고 반드시 이름을 얻게 하는 것으로 다같이 현책(顯冊)을 올려 전하의 효성을 더욱 빛나게 할 것입니다."
하니,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가 아뢰기를,
"생각건대 우리 익종은 큰 덕과 큰 공적을 지닌 분이므로 존호를 올리는 예식을 크게 거행하며, 또한 우리 대왕대비는 지극히 어질고 착한 분이므로 함께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면 전하의 효성은 빛날 것이므로 여러 사람들도 다같이 기뻐합니다."
하니, 김좌근이 아뢰기를,
"진연(進宴)이 경사를 축하하는 데서 가장 중대한 문제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대왕대비께서 몹시 사양한다고 하교하셨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미 시행한 예식을 놓고 헤아려보면 실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조두순이 아뢰기를,
"술을 부어 올리며 장수하기를 비는 것은 경사를 축하하는 의식 절차 중에서도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대왕대비께서 사양하시니 어찌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랫사람들의 마음으로서는 허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이경재는 아뢰기를,
"장수를 축하하여 술을 부어 올리는 것은 또한 우리나라에서 이미 시행한 떳떳한 의식입니다. 지금 내리신 명령을 보건대 대왕대비의 사양하는 덕과 전하의 그 뜻을 따르는 효성은 물론 더없이 우러러 감탄하지만, 신등의 구구한 마음으로서는 서운함과 실망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겸손하게 사양하는 대왕대비의 덕과 그 뜻을 순종하는 전하의 효성에 대하여 물론 더없이 감탄합니다만, 아랫사람의 마음은 서운함과 실망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생각건대 우리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거룩한 덕과 큰 공적은 하늘과 같이 높고 땅과 같이 두터우므로 온 나라의 백성들은 즐겁게 지내며 어진 사람들을 가까이하던 생각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공덕을 찬양하고 드러내는 것은 나의 사모하는 마음을 만 분의 일이나마 풀기 위한 것이다. 더구나 내년은 우리 자전께서 육순이 되는 경사스러운 해인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술잔을 부어 올리며 장수를 축하하는 것은 예법으로 봐서는 응당 그렇게 해야 하고, 안에서 계(啓)를 또한 여러 차례 하였지만 나라에 대역(大役)이 있다는 것으로 끝내 마지못해 따른다는 명령이 없었다. 그러니 몹시 사양하는 그 마음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마는 금으로 모형을 뜨고 옥으로 아로새기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시행한 의식인 것이다.
이번 아세(亞歲) 명절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및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을 소견(召見)하여 물어보니 모두 의견이 동일하였으며, 그리고 이미 자전에게도 품처하였다.
익종대왕 추상존호도감(翼宗大王追上尊號都監)과 대왕대비전가상존호도감(大王大妃殿加上尊號都監)을 합설(合設)하여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년에 경사를 맞이하여 장수를 축하함에 있어서 설날 아침에 교서(敎書)를 널리 반포하는 것은 근거할 만한 것을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으므로 삼가 정월 초하룻날 대왕대비에게 표리(表裏)와 치사, 전문(箋文)을 직접 올리겠다. 교서(敎書)를 널리 반포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예조(禮曹)로 하여금 전례대로 마련할 것이며, 각 도의 방물(方物)을 그만두게 하고, 단지 전문만 올리게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오취선(吳取善)이 아뢰기를,
"이전에 추상존호도감과 가상존호도감을 합설할 때에는 그 명칭을 ‘상호도감(上號都監)’이라고 불렀지만 초기(草記)나 이문(移文)은 각기 자기 도감(都監)대로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이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상호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에 김병학(金炳學)을, 제조(提調)에 김병국(金炳國)·오취선(吳取善)·이근우(李根友)를 임명하였다.
김학성(金學性)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조연창(趙然昌)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김선필(金善弼)을 공충도 병마절도사(公忠道兵馬節度使)로, 오하영(吳夏泳)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11월 17일 임신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익종 대왕(翼宗大王) 추상 존호(追上尊號)의 망(望)에 ‘홍운 성열 선광 준상(洪運盛烈宣光濬祥)’이라 하고,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 가상 존호(加上尊號)의 망에, ‘원성(元成)’이라 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百官)이 올리는 전문(箋文)을 친히 받았다.
상호도감(上號都監)의 추상 존호 옥책문 제술관(追上尊號玉冊文製述官)에 조두순(趙斗淳)을, 서사관(書寫官)에 유후조(柳厚祚)를,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에 조석우(曺錫雨)를, 금보 전문 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에 김좌근(金左根)을, 가상 존호 옥책문 제술관(加上尊號玉冊文製述官)에 정원용(鄭元容)을, 서사관에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을, 악장문 제술관에 홍순목(洪淳穆)을, 옥보 전문 서사관(玉寶篆文書寫官)에 이경재(李景在)를 임명하였다.
11월 18일 계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11월 19일 갑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신명순(申命淳)을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이원희(李元熙)를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11월 20일 을해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1일 병자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2일 정축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신응조(申應朝)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조계승(趙啓昇)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신명순(申命淳)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11월 23일 무인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4일 기묘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원(慶源)과 후춘(厚春)은 단지 한 줄기의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얼음이 언 이후이면 저 나라와 우리나라의 비류(匪類)가 종종 범월(犯越)하는 금심이 있습니다. 변어(邊圉)가 이보다 더 허술한 데는 없으나 해당 고을 부사(府使) 박지수(朴芝壽)는 연로하고 병이 많다고 합니다. 벼슬에서 교체시키되 이력은 인정해 주도록 할 것입니다. 듣건대 고령 첨사(高嶺僉使) 민대호(閔大鎬)는 자못 성적(聲績)이 있어 변방의 일을 맡을 만하다고 하니 특별히 이차(移差)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5일 경진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특별히 이용희(李容熙)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11월 26일 신사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7일 임오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세호(金世鎬)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수현(金壽鉉)의 보고를 보니, ‘본부(本府) 탑현(塔峴)의 청석동(靑石洞)에 일찍이 진(鎭)을 설치하고 장수를 두었다가 곧 철폐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경비를 이어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복구하여 진을 설치하되 금천군(金川郡) 강남면(江南面)을 이 진에 소속시키며, 또한 대흥 중군(大興中軍)을 이주(移住)하여 양향청(糧餉廳)의 곡식을 내고 받아들이고 하는 일과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다시 설치하는 조치를 취하면 방어가 더욱 튼튼히 될 수 있을 것이며, 금천군의 강남면은 실로 이 진의 요충지로서 이곳이 없으면 진영으로서의 자기 모양을 이룰 수 없습니다. 대흥 중군을 이주할 것을 허락하여 개성부 중군(開城府中軍)이 토포사(討捕使)를 겸하도록 비준할 것입니다. 그리고 산성에도 역시 수장(守將)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므로 본부의 사람으로 자벽(自辟)하되 망(望)을 첨사(僉使)에게 보고하도록 비준할 것입니다. 그리고 과한(瓜限)을 30개월로 정하며 일찍이 오위장(五衛將) 벼슬을 지낸 자를 중군 이력으로 허용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해 순천(順天)의 영장(營將)을 없애버린 것은 실로 아주 부득이한 형편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적들을 금지시키기 위한 정사는 요즘에 와서 매우 허술하게 되었으며, 관제를 수시변통하는 문제는 이미 시행한 전례가 많이 있는 만큼 영장을 특별히 다시 세우고 각별히 신칙하여 성과를 거두도록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8일 계미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 시기 제읍(諸邑)의 진(鎭)을 변통시킨 것은 모두 중요한 요새지들과 관계되기 때문이었는데 설치할 때 과연 경비가 궁색한 폐단은 없었는가? 지금 돈을 새로 주조하여 이미 얼마간 수입이 있다. 태안(泰安), 진도(珍島), 청산도(靑山島), 동진(東津), 철도(鐵島), 풍덕(豐德) 등지에 각각 5,000냥(兩)씩 호조(戶曹)로 하여금 구획(區劃)하여 하송(下送)하라. 그 외 제반 조처는 아울러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되도록 좋은 편을 따라서 거행하는 것에 해서 묘당(廟堂)에서 말을 잘 만들어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서 감제(柑製)를 설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이원일(李源逸)과 민겸호(閔謙鎬)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11월 29일 갑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박영보(朴永輔)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정해륜(鄭海崙)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서상정(徐相鼎)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삼았다.
11월 30일 을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