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고종실록4권, 고종4년 1867년 1월

싸라리리 2025. 1. 8.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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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병진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4권】 대왕대비전의 보령이 육순이 된 것을 경하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히 치사(致詞),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리고 진하를 받고 사면(赦免)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월 초하룻날에 나라의 비결(祕訣)을 맞이하니 하늘이 상도(常道)의 순수한 복을 주셨도다. 육순에다 나이를 더 보탰으니 자전께서 늙지 않게 될 것이다. 이 큰 복을 받은 것은 모두가 떳떳한 법인 것이다.  생각건대 효유 헌성 선경 정인 자혜 홍덕 순화 문광 대왕대비전하(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大王大妃殿下)께서는 집안을 교화하고 나라에 공로를 세워 성인으로서 성인의 배필이 되어 헌원성(軒轅星)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았고, 태모(太母)의 뒤를 이어서 태모의 자리에 올라 여자 요순(堯舜)으로 칭송이 높으셨도다.  선방궁(宣房宮)에서 밝게 다스림에 문채가 그 가운데 있으니 지극히 고요하고 지극히 유순하며, 왕실에서 이어받음에 덕이 끊어짐이 없어서 지극히 인자하고 효성스러웠다. 이에 옥책문(玉冊文)으로 그 큰 공렬을 여러 번 천명하고 여사(女史)가 쓰는 글에 좋게 칭송하여 더욱 드러내었다. 교화를 가만히 펴나간 것은 어떻게 그림으로 그리고 역사서에 쓰고서야 알릴 수 있겠으며, 교화가 멀리까지 미친 것은 대개 관직에 맞게 어진 인재를 등용하였기 때문이로다. 닭의 울음소리를 경계하여 선왕 때 복잡한 정사를 대신하였고, 어질고 후한 덕으로 후세 백대의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을 번창시켰도다. 지난번에 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태롭게 되었을 때 대왕대비께서는 내가 대를 잇도록 하여 주셨다.  큰소리를 치거나 낯빛을 달리하지 않고 묵묵히 신령스러운 계책을 부지하셨고 홀로 신령들과 함께 계책을 세워 큰 계책을 빛나게 결정하셨다. 우리 왕조가 감당할 수 없는 많은 곤란을 당해 마치 깊은 못가에 다다르고 얇은 얼음 위를 밟는 것과 같았을 때 왕업의 터전을 길이 아름답게 하여 태산 반석 위에 올려놓으셨다. 아, 보호하고 가르치는 데에서 그 도를 다하여 들고나는 일상생활에 공경하게 받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큰 은택을 받듦에 마치 하늘과 같이 덮어주었고 훌륭한 계책을 이어받음에 우러러 성과를 이룰 수가 있었다. 제사 절차와 수레, 복식 제도를 정하면서는 간략하게 하면서도 훌륭하게 하였고, 군사 제도와 법령을 시행하면서는 청렴하지 못한 자를 징벌하였고 직책을 잘 수행하지 못하는 자를 경계시켰다. 진휼에 있어서는 홍수와 가뭄을 구제하는 데 급하여 정사를 폄에 있어서 어짊을 베푸는 것을 앞세웠다. 의리에 있어서는 해와 별보다 더 엄하여 바른 도를 지키는 것은 이단을 물리친 다음에 하였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을 3년 만에 용단을 내려거두어 임금의 은택이 팔도에 크게 미치게 하였다. 그 밝은 빛은 해와 달이 비치는 듯하여 이룬 것이 원대하였고 신령스런 공은 때맞추어 오는 비가 만물을 기르는 것 같았으나 사양하고 내세우지 않으셨다. 겸손하고 사심이 없어서 높이 팔짱을 끼고 있어도 대궐이 태평하고 화목하였고 내조자로서의 두터운 덕이 있어 만물이 크게 이루어졌다. 지극히 화락함은 원기(元氣)를 주는 어머니가 되어 한 가지 덕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었고, 지극히 인자함은 온 나라의 신하들을 덮어주어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간절히 사랑하고 떠받들었다.  한(漢) 나라의 장락궁(長樂宮)과 같이 보양을 받는 날을 당하여서 노(魯) 나라의 선성 왕후(宣聖王后)와 같은 나이가 되었다. 옥체가 건강한 것은 우리나라 열세 왕후의 대대로 내려온 덕을 이은 것이고 보령이 육순에 차게 된 것은 오늘날 억만년토록 장수할 터전이다. 아침 햇살이 처음으로 풀의 가운데에 퍼지니 장차 어떻게 해야 그 은혜를 보답할 수 있으며, 봄빛은 나무 그늘 뒤에서도 쇠해지지 않으니 이로 인하여 정성을 펼 수가 있을 것이다. 공덕을 칭송하는 빛나는 의식을 장차 치르려 함에 철이 든 나의 작은 정성이 더욱 간절하다. 아름다운 운수가 다시금 이 봄철에 돌아옴을 맞았기에 성대한 의식을 대궐 뜰에서 먼저 거행한다. 술 단지에 가득 찬 따사로운 말씀을 공손히 듦에 많은 의식을 성대하게 치른 것 같고 올리는 술잔에 오래 살기를 비는 마음을 담았음에 해와 달이 떠오르는 것처럼 오래 사시기를 축원한다. 정월 초하룻날에 전문(箋文)을 올리면서 춤추고 기뻐하며 더욱더 장수하고 더욱더 늙지 말기를 보말(寶帕)을 받들어 엄숙하게 새긴다. 이처럼 성대하고 큰 경사에는 응당 다른 사람에게도 크게 은택을 베푸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법전을 쳐들어 어진 마음으로 이끌어서 따르고, 경사를 만나 은혜를 베푸는 예법을 드러냄에 시기를 상고해 보니 옳은 것이다. 이달 초하루 날이 새기 전에 범한 각종 범죄 가운데에서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를 모두 용서하라. 아!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성명(性命)을 바로 하여 온 나라가 길하고 상서로운 복 속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나 한 사람이 여러 사람들의 같은 마음을 대신하여 올리매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이 크게 응하여 감동하게 되었다. 하늘이 법을 세워 다섯 가지 복을 크게 내렸으니 영원히 하늘의 명에 맞게 하는 것을 스스로 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니, 다 잘 알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신석희(申錫禧)가 지었다.】



대왕대비전의 보령이 육순이 된 것을 경하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히 치사(致詞),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리고 진하를 받고 사면(赦免)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월 초하룻날에 나라의 비결(祕訣)을 맞이하니 하늘이 상도(常道)의 순수한 복을 주셨도다. 육순에다 나이를 더 보탰으니 자전께서 늙지 않게 될 것이다. 이 큰 복을 받은 것은 모두가 떳떳한 법인 것이다.
생각건대 효유 헌성 선경 정인 자혜 홍덕 순화 문광 대왕대비전하(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大王大妃殿下)께서는 집안을 교화하고 나라에 공로를 세워 성인으로서 성인의 배필이 되어 헌원성(軒轅星)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았고, 태모(太母)의 뒤를 이어서 태모의 자리에 올라 여자 요순(堯舜)으로 칭송이 높으셨도다.
선방궁(宣房宮)에서 밝게 다스림에 문채가 그 가운데 있으니 지극히 고요하고 지극히 유순하며, 왕실에서 이어받음에 덕이 끊어짐이 없어서 지극히 인자하고 효성스러웠다. 이에 옥책문(玉冊文)으로 그 큰 공렬을 여러 번 천명하고 여사(女史)가 쓰는 글에 좋게 칭송하여 더욱 드러내었다. 교화를 가만히 펴나간 것은 어떻게 그림으로 그리고 역사서에 쓰고서야 알릴 수 있겠으며, 교화가 멀리까지 미친 것은 대개 관직에 맞게 어진 인재를 등용하였기 때문이로다. 닭의 울음소리를 경계하여 선왕 때 복잡한 정사를 대신하였고, 어질고 후한 덕으로 후세 백대의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을 번창시켰도다. 지난번에 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태롭게 되었을 때 대왕대비께서는 내가 대를 잇도록 하여 주셨다.
큰소리를 치거나 낯빛을 달리하지 않고 묵묵히 신령스러운 계책을 부지하셨고 홀로 신령들과 함께 계책을 세워 큰 계책을 빛나게 결정하셨다. 우리 왕조가 감당할 수 없는 많은 곤란을 당해 마치 깊은 못가에 다다르고 얇은 얼음 위를 밟는 것과 같았을 때 왕업의 터전을 길이 아름답게 하여 태산 반석 위에 올려놓으셨다.
아, 보호하고 가르치는 데에서 그 도를 다하여 들고나는 일상생활에 공경하게 받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큰 은택을 받듦에 마치 하늘과 같이 덮어주었고 훌륭한 계책을 이어받음에 우러러 성과를 이룰 수가 있었다. 제사 절차와 수레, 복식 제도를 정하면서는 간략하게 하면서도 훌륭하게 하였고, 군사 제도와 법령을 시행하면서는 청렴하지 못한 자를 징벌하였고 직책을 잘 수행하지 못하는 자를 경계시켰다. 진휼에 있어서는 홍수와 가뭄을 구제하는 데 급하여 정사를 폄에 있어서 어짊을 베푸는 것을 앞세웠다. 의리에 있어서는 해와 별보다 더 엄하여 바른 도를 지키는 것은 이단을 물리친 다음에 하였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을 3년 만에 용단을 내려거두어 임금의 은택이 팔도에 크게 미치게 하였다. 그 밝은 빛은 해와 달이 비치는 듯하여 이룬 것이 원대하였고 신령스런 공은 때맞추어 오는 비가 만물을 기르는 것 같았으나 사양하고 내세우지 않으셨다. 겸손하고 사심이 없어서 높이 팔짱을 끼고 있어도 대궐이 태평하고 화목하였고 내조자로서의 두터운 덕이 있어 만물이 크게 이루어졌다. 지극히 화락함은 원기(元氣)를 주는 어머니가 되어 한 가지 덕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었고, 지극히 인자함은 온 나라의 신하들을 덮어주어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간절히 사랑하고 떠받들었다.
한(漢) 나라의 장락궁(長樂宮)과 같이 보양을 받는 날을 당하여서 노(魯) 나라의 선성 왕후(宣聖王后)와 같은 나이가 되었다. 옥체가 건강한 것은 우리나라 열세 왕후의 대대로 내려온 덕을 이은 것이고 보령이 육순에 차게 된 것은 오늘날 억만년토록 장수할 터전이다. 아침 햇살이 처음으로 풀의 가운데에 퍼지니 장차 어떻게 해야 그 은혜를 보답할 수 있으며, 봄빛은 나무 그늘 뒤에서도 쇠해지지 않으니 이로 인하여 정성을 펼 수가 있을 것이다.
공덕을 칭송하는 빛나는 의식을 장차 치르려 함에 철이 든 나의 작은 정성이 더욱 간절하다. 아름다운 운수가 다시금 이 봄철에 돌아옴을 맞았기에 성대한 의식을 대궐 뜰에서 먼저 거행한다. 술 단지에 가득 찬 따사로운 말씀을 공손히 듦에 많은 의식을 성대하게 치른 것 같고 올리는 술잔에 오래 살기를 비는 마음을 담았음에 해와 달이 떠오르는 것처럼 오래 사시기를 축원한다. 정월 초하룻날에 전문(箋文)을 올리면서 춤추고 기뻐하며 더욱더 장수하고 더욱더 늙지 말기를 보말(寶帕)을 받들어 엄숙하게 새긴다.
이처럼 성대하고 큰 경사에는 응당 다른 사람에게도 크게 은택을 베푸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법전을 쳐들어 어진 마음으로 이끌어서 따르고, 경사를 만나 은혜를 베푸는 예법을 드러냄에 시기를 상고해 보니 옳은 것이다. 이달 초하루 날이 새기 전에 범한 각종 범죄 가운데에서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를 모두 용서하라.
아!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성명(性命)을 바로 하여 온 나라가 길하고 상서로운 복 속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나 한 사람이 여러 사람들의 같은 마음을 대신하여 올리매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이 크게 응하여 감동하게 되었다. 하늘이 법을 세워 다섯 가지 복을 크게 내렸으니 영원히 하늘의 명에 맞게 하는 것을 스스로 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니, 다 잘 알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신석희(申錫禧)가 지었다.】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내렸다.

 

진하(陳賀)할 때의 차비관(差備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호준(李鎬俊), 대거 승지(對擧承旨) 조인섭(趙寅燮), 선교관(宣敎官) 정겸식(鄭謙植), 좌통례(左通禮) 김종태(金宗泰), 우통례(右通禮) 이응진(李應辰)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고, 도승지(都承旨) 심승택(沈承澤), 호조 참판(戶曹參判) 엄석정(嚴錫鼎)에게는 백관가(百官加)를 친수(親授)하였다.

 

노인과 유신(儒臣)에게 세찬(歲饌)을 내렸다. 이어 존문(存問)하도록 하였다.

 

박신규(朴臣圭)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월 2일 정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과 북병사(北兵使) 정기원(鄭岐源)의 장계(狀啓)를 보니, ‘러시아 사람 5명이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귀국 사람 정재욱(鄭才旭)의 집의 소 2척(隻)을 우리 쪽 사람들이 빼앗아 갔기 때문에 이제 찾아와서 돌려준다.」라고 하면서 해당 부사에게 글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글을 뜯어서 보니 바로 저쪽 땅에 넘어간 우리나라 사람이 쓴 글이었는데 그 내용에, 「정재욱에게 꾸어준 것으로 돈 4냥 6전과 송아지 1척이 있었기 때문에, 소 1척을 팔아서 본전(本錢)을 찾고 남은 돈과 소 1척을 이제 돌려보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글의 내용과 물건이 틀리니 일이 매우 괴이하고 의아스럽습니다. 이에 우선 받아두고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막사를 치고 있는 것이 이미 속셈을 헤아릴 수 없는 데, 국경을 넘어와서 글을 보내면서 또 이렇게 어렵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멋대로 왔다갔다하고 있어 변경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졌으니, 변방에 대한 정사로 헤아려 볼 때 차라리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대체로 경계를 엄하게 할 것에 대해 신칙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막을 수 있으면 막고 효유(曉諭)할 만하면 효유하며, 소의 숫자가 서로 틀리는 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조사하여 조처(措處)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중희당(重熙堂)에 나아갔다. 약원(藥院)이 입진(入診)을 행하였다. 살쩍에 부스럼이 나서 청진(請診)하였기 때문이다. 의관(醫官) 이경년(李慶年)이 아뢰기를,
"맥박이 좌우 삼부(三部)가 고르게 뛰었습니다."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유후조(柳厚祚)가 의관에게 말하기를,
"무슨 약을 붙여서 치료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경년이 아뢰기를,
"당귀고(當歸膏)와 납지고(臘脂膏)가 가장 긴요합니다."
하자, 유후조가 아뢰기를,
"이 두 약을 붙여서 치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대내(大內)에서 치료할 것이니, 굳이 다시 청진할 것 없다."
하였다.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추상(追上)하는 의식은 좌의정(左議政)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하고, 제사 지내는 의절(儀節)은 직접 제사 지내는 예에 의거하여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살쩍에 난 부스럼이 낫지 않아서 자전의 하교를 받들었기 때문이다.

 

병조(兵曹)에서, ‘진도방어영(珍島防禦營)의 진관(鎭管)을 개치(改置)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올린 별단(別單)에 계하(啓下)한 대로 해남(海南)·영암(靈巖)·함평(咸平)·영광(靈光)의 네 고을과 임자도(荏子島)·다경포(多慶浦)·목포(木浦)·지도(智島)·남도포(南桃浦)·어란포(於蘭浦)·금갑도(金甲島)·이진(梨津)·마도(馬島) 등 아홉 진을 모두 진도진(珍島鎭) 관할로 고치도록 계하(啓下)하여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1월 3일 무오

약원(藥院)에서 구두로 아뢰니 비답하기를,
"어제에 비하여 조금 나았으니 경 등은 입시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1월 5일 경신

전교하기를,
"종기 난 곳이 거의 아물어 차도가 있으니 약원(藥院)에서 구두로 문안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라."
하였다.

 

1월 7일 임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관북(關北)의 무과(武科)를 설행(設行)하려고 하는 데 경흥(慶興)과 경원(慶源)에 지금 경계를 엄하게 하고 있는데, 무사들이 병영으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올 경우 방수(防守)가 허술하게 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방어영(防禦營)에서 도시(都試)를 치는 예에 의거하여 해당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각각 10명씩을 뽑아 병영에 보고하여 방목(榜目)에 붙이게 함으로써 원래의 인원수를 채우게 해야 합니다. 포과(砲科)도 강화도(江華道)를 회복한 뒤에 시상(施賞)한 전례에 의하여 원하는 바에 따라 방목 끝에 붙이도록 하라는 뜻으로 빨리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8일 계해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공충 감사(公忠監司) 신억(申檍)이 장계(狀啓)하기를, ‘서원(西原)의 삼세(三稅)가 부족한 것을 더 마련하는 조항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보고한 절목에 의거하여 혁파하고 각면(各面)에서 보충한 300여 결(結)을 가지고 대신 채워 넣었다. 그러나 오히려 결가(結價)가 부족한 것이 거의 7,000석에 가까워서 세납(稅納)과 군납(軍納) 및 각 조항의 임시 비용을 배비(排比)할 길이 없다. 그러나 암행어사가 올린 절목을 갑자기 변통할 수 없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암행어사가 아직 복명(復命)하지 않았으니 절목에 비록 무슨 속사정이 있는지 속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도신이 계문(啓聞)한 것도 반드시 잘 헤아려 보고서 그렇게 하였을 것이며, 또 작년에 복계(覆啓)한 데에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사유가 자세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고을의 모양이 회복되기 전에는 우선 그대로 준행하라고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9일 갑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직접 익종 대왕(翼宗大王)에게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고, 대왕대비전에 존호를 가상(加上)하고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올렸다. 진하를 받고 사면(赦免)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 명을 받고 신령스러운 계책을 어루만지니 큰 혜택이 더욱 두터워지고, 선대의 공렬을 천양하고 자전의 장수를 송축하니 아름다운 존호가 동시에 함께 드날린다. 이에 규례에 따라 예를 올리고 이를 널리 반포하노라.
삼가 생각건대, 큰 일을 한 사람은 순(舜) 임금이며, 근심이 없었던 사람은 문왕(文王)이다. 해서는 안 될 네 가지 충고〔四勿〕와 아홉 가지 법도〔九經〕는 선왕(先王)의 큰 훈계이고, 한 집안에서 세 분의 성인이 있는 것은 우리 왕실이 융성하는 때이다.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는 학문을 부지런히 힘써 날로 달로 진보하였고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이룰 것을 기대함에 바다가 윤택해지고 별이 빛났다. 세자로서의 아름다운 소문이 일찍부터 드러났고 복잡한 정사를 대리하면서 걱정하며 부지런히 힘썼다.
구슬과 옥으로 장식한 술잔은 표식을 제(題)한 데에서 여덟 가지 빛깔이 빛났고, 대모(玳瑁)로 장식하고 금칠을 한 것은 장수를 칭송하는 데에서 아홉 개의 술잔을 올렸다. 높은 제단에 어진(御眞)을 모심에 한숨을 쉬고 탄식하면서 두루 할 것을 생각하고, 태실(太室)에 집을 나올 것 같은 모습이 아련하매 환하게 서로 대한다. 의로운 훈계는 모든 사물을 대하는 데에서 이어받고, 어진 소문은 사람마다 듣는 데에서 넘쳐흘렀다.
정령(政令)은 모두 옛 규례를 따라 만대토록 태평시대를 열어 백성을 위하여 명(命)을 세웠고, 의리는 물려받은 곳이 있어서 성인을 기다려 여쭈어 봐도 의혹하지 않고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었다. 지나가기만 해도 교화되고 마음속에 간직하기만 해도 신묘해 졌으니 총명과 예지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행하는 것은 법이 되고 말한 것은 법칙이 되었으니 오직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이익을 좋아하였기에 잊지를 못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대왕대비께서는 영명하기가 참으로 옛날의 명철한 왕비의 훌륭한 모범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문충공(文忠公)과 충경공(忠敬公)이 시집올 때 일러준 말에서 아름다운 훈계를 이어받았고, 정순 왕후(貞純王后)와 순원 왕후(純元王后)가 왕후로 있으면서 편 교화에서 아름다운 규범을 상고하였다. 선대 임금을 대신하여 정사를 볼 때에는 부인에게 잘 다스리는 신하가 있었고, 후손이 영묘하고 길이 번성할 기초를 열매 여사(女士)에게 손자(孫子)가 따랐다.
아련히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소문은 끝없이 퍼져나갔고 아름다운 하늘의 명은 새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손자며느리를 맞이함에 그 시기는 나라의 안위가 경각에 달린 때였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과감하게 철거함에 그 거조는 광명정대한 것이었다. 옥책(玉冊)에 아름다움을 드날림에 아름다운 덕과 그윽한 광채가 함께 실려 있고, 역사서에 사실을 기록함에 우뚝한 공과 크나큰 공렬을 이루 다 쓸 수가 없다. 40년 동안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엄하게 하였고, 팔도에서 보살펴 준 은택을 우러렀다. 이미 편안해지고 이미 다스려져 모든 사물이 각기 온 하늘의 은택 가운데에 들게 되니, 저도 모르게 사람들이 저절로 천리 호산(千里湖山)의 밖에 있게 되었다. 이 큰 은덕은 실로 부모의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니 그 이어짐은 더없이 크고 그 두터움은 더없이 중한 것이다. 높은 나이에도 길이 공양을 받으니 기운이 더욱 왕성해져 늙을수록 더 젊어졌다.
이에 어리석은 나는 선조들께서 도와서 보우해 주고 우리에게 끝없는 은혜를 내려 주기를 생각한다. 흠모하는 마음에서 간절히 뜻을 다하매 패옥 소리가 더욱 멀어지고, 음식과 잠자리를 보살피면서 정성을 다하매 옥체가 더욱 강건하다. 이에 종묘(宗廟)에서 존호를 올리는 의식 거행하였고, 대왕대비에게 장수하시기를 축원하였다. 60세 보령 되심에 이름을 돌비석에 새기노라니 기쁘고 여덟 자의 책봉문이 빛남에 음악에 싣노라니 척연해진다. 뜬구름이 자취를 거둠에 아득한 소리와 냄새를 찾기가 어렵고 무녀성(婺女星)이 떠올라 빛남에 기쁨을 형용함이 여기에 있다. 지극히 높이고 지극히 봉양하는 데에서 인정과 예문이 부합되고, 함께 공경하고 함께 사랑하는 데에서 정성이 보이는 법이다.
이에 올해 정월 3일에 익종 대왕에게 존호를 추상하기를 ‘홍운 성렬 선광 준상(洪運盛烈宣光濬祥)’이라 하고, 4일에 대왕대비전의 존호를 가상하기를 ‘원성(元成)’이라고 한다. 효도는 부모를 밝게 드러내는 것을 먼저 해야 하고, 예는 절차를 갖춘 뒤에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월 초하룻날에 은혜를 베푸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상고하여 관대하게 용서하는 교서를 내리고, 두 성인의 살리기 좋아하는 어진 마음을 미루어서 과오로 범한 죄를 사면하는 바이다. 이달 9일 날이 새기 이전에 범한 잡범(雜犯)으로 사죄 이하는 모두 용서한다.
아! 흥성하는 때에 아름다운 복을 넓히고, 경사스러운 날에 남은 은택을 흠뻑 내렸다. 한 사람의 경사에 대해 모두들 흥기함에 길이 편안하게 되었고, 여러 복이 지금부터는 상서롭게 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잘 알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신석희(申錫禧)가 지었다.】


【원본】 8책 4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53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행형(行刑)

 

상호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 이하와 축하할 때의 각 차비관(差備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오취선(吳取善), 우참찬(右參贊) 이근우(李根友), 도청(都廳) 김병익(金炳翊)·김창희(金昌熙), 독옥책관(讀玉冊官) 김영작(金永爵), 독금보관(讀金寶官) 유진오(兪鎭五),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세호(金世鎬), 대거 승지(對擧承旨) 조성교(趙性敎), 좌통례(左通禮) 조문하(趙文夏), 우통례(右通禮) 박창수(朴昌壽), 대축(大祝) 홍우창(洪祐昌), 선교관(宣敎官) 한용교(韓龍敎)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고, 행호군(行護軍) 권영수(權永秀)·김재현(金在顯), 영선군(靈善君) 박영보(朴永輔)에게는 백관가(百官加)를 친수(親授)하였다.

 

특별히 남성교(南性敎)를 발탁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조재응(趙在應)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월 10일 을축

인정전(仁政殿)에서 선파 유생(璿派儒生)에게 응제(應製)를 설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진사(進士) 이찬하(李纘夏)를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1월 11일 병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작년의 성균관(成均館) 월과(月課)의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에 대한 획수(劃數)를 계산한 것이 지금 막 본부에 보고되었습니다. 권장하는 방도를 성균관으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월 12일 정묘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민간에 마마가 아주 심하게 돈다는 이유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능원(陵園)에 친히 제사를 지내겠다는 명을 취소하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정리와 예에 있어서 비록 매우 서운하기는 하지만 경들의 말도 건강을 조심하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응당 억지로나마 따르겠다. 경들은 헤아리라."
하였다.

 

이원명(李源命)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유진오(兪鎭五)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홍우길(洪祐吉)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이병문(李秉文)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1월 13일 무진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이, ‘경흥 부사(慶興府使) 윤협(尹𣇍)이 노략질하는 비적 무리들을 장수와 군졸들을 출동시켜 온 힘을 다하여 쳐서 쫓아버리고 사람과 가축을 도로 빼앗아 찾아왔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비적 무리들을 무찔렀다는 보고를 들으매 매우 통쾌하다. 뜻을 보이는 거조가 없을 수 없으니, 방어하였거나 출정한 장수와 군졸들에게 본도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題給)하게 하라. 부상당한 두 사람에게는 내하(內下) 인삼 2근(斤)을 병영에서 나누어 주어 구료하게 하고, 쌀과 베도 넉넉하게 주어 힘쓴 데 대해 권장하는 뜻을 보이라고 묘당(廟堂)에서 말을 만들어서 행회(行會)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4일 기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북쪽 변경에서 비적 무리들이 줄곧 소란을 일으키는 것이 지금에 이르러서 극에 달했습니다. 비록 이미 저들의 경내로 쫓아내기는 했지만 변방에 일이 있을 경우에는 중국에 주문(奏聞)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자문(咨文)을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지어 내게 하고서 봉성(鳳城)으로 들여보내서 북경(北京)에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송도(松都)의 신 급제(新及第) 왕정양(王庭揚)은 듣건대, 중국 명(明) 나라의 후예라고 한다.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다행스러우며, 그의 포부도 작지 않다고 한다.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제수하여 조정에서 돌보아주고 있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경흥부(慶興府)의 범월(犯越) 죄인 이광식(李光植)을 해당 병영에서 효경(梟警)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묘당(廟堂)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1월 15일 경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올해는 바로 경사스러운 해입니다.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성스러운 덕은 백대에 이르도록 잊을 수 없고 태모(太母)의 보령이 60세가 되어 청묘(淸廟)에 옥책(玉冊)을 추증하여 올리고 장락전(長樂殿)에서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으니, 우리 전하의 뛰어난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그런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성인의 효성은 오로지 의문(儀文)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대의 뜻과 사업을 이어받아 나가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하며, 뜻과 사업을 이어받아 나가는 근본은 바로 늘 학문에 힘을 쓰는 것뿐입니다.
고금의 치란(治亂)이 그렇게 된 까닭이 모두 서책에 실려 있는 만큼, 만약 이를 체득하여 몸소 실천하고 이를 미루어서 넓혀 나간다면 멀리까지 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왕께서 맡겨 주신 훌륭한 뜻이 여기에 있을 것이며, 자전께서 기대하고 있는 두터운 마음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전하께서 효도를 할 수 있는 것이 늘 학문에 힘쓰는 것을 빼놓고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명께서 만약 이에 대해 생각이 미친다면 분발하고 격동하는 것이 반드시 신의 말이 채 끝내기 전에 있을 것입니다.
현재 진강(進講)을이 세시(歲時)로 인하여 잠깐 멈추고 계신데, 신은 진실로 한가하게 계시는 중에도 전에 배운 것을 다시 익히고 연구하고 계신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끝내 강론하는 신하를 소접(召接)하여 마음을 계발시키고 인도하는 바탕으로 삼는 것만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강연을 열도록 허락하여 만백성들이 축원하는 마음에 부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바가 매우 절실하니 명심하겠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지난날에는 강화(江華)에서 보이는 별시(別試)의 시관(試官)을 서울에서 차송(差送)했습니다. 해마다 도시(都試) 때에 중앙에서 번번이 파견하여 보낸다는 것은 매우 번잡할 것 같으니 본 감영에서 시권(試券)을 거두어 성균관(成均館)에 올려 보내어 시취(試取)하여 출방(出榜)하겠다는 내용으로 규정을 만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저번에 서북(西北)과 송도(松都)에서 특별히 인재를 천거하는 일에 대하여 여러 번 칙교(飭敎)를 내리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인재를 장려하고 선발하는 거룩한 생각이시니, 신은 흠앙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함경 감사(咸鏡監司)가 이미 음관(蔭官)과 무관(武官)으로 추천한 사람이 있는 만큼 이비(吏批)와 병비(兵批)로 하여금 상당직(相當職)에 검의(檢擬)하게 하고, 관서(關西)와 송도는 계문(啓聞)을 기다려서 일체 수용(收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각별히 수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고(故) 감사(監司) 김보택(金普澤)은 유문(儒門)의 자손으로서 청렴한 명성과 곧은 절개로 착한 사람들이 매우 추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계미년(1703)과 정유년(1717)에 올린 상소가 마침내 여러 간사한 무리들이 원수처럼 보는 바가 되어, 죽은 뒤에 관작을 삭탈 당하는 일이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이 처단 당하던 때에 있게 되었습니다. 영조(英祖) 을사년(1785)에 첩지(牒紙)를 발급하라는 명이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아직까지도 벼슬을 추증하는 특전(特典)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 이씨(李氏)는 세상에서 말하는 신축년(1721)과 임인년(1722)의 여사(女士)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세자를 세우는 문제로 옥사가 일어났을 때 친정집과 시집 두 집안이 모두 참화(慘禍)를 입어 이씨도 잡힌 몸이 되었으나 의연히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마침내 큰 절개를 세웠습니다. 그의 뛰어난 행실이 역사책에 실려 빛나고 있습니다. 다른 여사들은 모두 정려문을 세워주는 은전을 입었으나 이씨만 홀로 빠진 것은 실로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김보택에게 특별히 정경(正卿)을 추증하고 이어 봉상시(奉常寺)에 명하여 개좌(開坐)할 때를 기다려서 시호(諡號)를 의논하게 하며, 그의 아내 이씨에 대해서도 정려문을 세워 주는 은전을 베풀어서 풍속과 교화를 세우고 명분과 절의를 장려하는 방도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증 이조 참의(贈吏曹參議) 홍의인(洪義仁)과 증 지평(贈持平) 홍철인(洪哲人)은 바로 형제간인데 신축년과 임인년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참화(慘禍)를 입었습니다. 그 곧은 충성과 뛰어난 절개는 의연하여 빼앗을 수 없는 것으로 백대 뒤에도 오히려 뜻 있는 선비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모두 아경(亞卿)의 벼슬을 추증하여 높이고 장려하는 뜻을 보여 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요즘 벼슬길에 올라가는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나 경력이 있고 신망이 있는 사람은 품계를 올려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 대호군(行大護軍) 송근수(宋近洙)를 종1품으로 올려서 제수하소서. 행 호군(行護軍) 정문승(鄭文升)은 기묘년(1819)의 가례(嘉禮) 때 계방(桂坊)에 있었습니다. 지금 경사로운 때를 당하여 의당 뜻을 보여 주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이니, 특별히 한 자급을 가자(加資)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의익(李宜翼)이 보고한 바를 보니, ‘파주(坡州)의 환곡(還穀)을 옮겨 쓰지 못하게 할 데 대해 복계(覆啓)하여 규정을 만들었는데, 작년 겨울에 환곡을 구별할 때 중도에서 철회하여 특별히 방영(防營)에 전속시켜서 편의에 따라 조처(措處)하도록 허락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방영의 곡식이 이 가운데 뒤섞여 들어가는 문제는 또한 토론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에 올린 초기(草記)대로 본읍(本邑)에 획부(劃付)하여 지방(支放)하는 비용으로 쓰게 해 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故) 첨지(僉知) 이지우(李知愚)는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잘 헤아려 뜻을 따르며 봉양하였는데, 물 긷고 절구질하며 땔나무를 해다 불을 때는 등의 일을 자신이 직접 하지 않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고 마른 잣을 따왔다는 등의 특이한 소문까지 있었습니다. 훌륭한 행실과 실제 업적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이 칭송해오고 있습니다. 선비들의 의논이 일제히 터져 나오고 조정의 의논도 같으니, 세상의 교화를 도타이 하고 기풍을 세우는 방도에 있어서 효성을 표창하는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겠기에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가 아뢰기를,
"임금의 다스림이 새해를 맞이하고 임금의 교화가 만물에 널리 베풀어지니, 이때야말로 바로 하늘의 때에 맞추어서 아름다운 명을 맞이할 좋은 기회입니다. 신은 구구한 마음으로 송축하던 나머지에 임금을 돕고자 하는 정성을 조금 바치는 바입니다. 황극(皇極)은 백성에게 복을 내리고 〈무일편(無逸編)〉은 백성들이 의지하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예로부터 성왕(聖王)의 법은 백성들의 법을 만들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펴 주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사가 해마다 풍년이 든 나머지에도 백성들의 생산이 매번 일정함이 없는 것을 걱정하게 되고, 오랑캐들의 소란이 평정된 뒤에도 여러 사람의 마음은 아직도 안도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때야말로 전하께서 생각을 가다듬어 정사를 잘하기를 도모하여야 할 때입니다. 절검(節儉) 두 글자는 또 정치를 하는 데에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대개 절약을 하되 제도로써 하고 검소하게 하되 몸소 먼저 실천하면 나라에 남은 재물이 있게 되고 교화가 위아래에 미치게 되어 백성들이 넉넉하게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며, 억만 년토록 영원한 국운을 하늘에 비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하는 방도는 과연 높고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마음을 미루어 나가는 데 달려 있으며, 그 요점은 성학(聖學)을 얼마나 부지런히 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학문에 부지런하게 되면 고금의 치란으로 거울삼을 수 있고 사리의 당부를 알게 되며, 그 결과 이를 체현하여 이용하고 근본을 미루어 말단을 알게 되니 만 가지 조화가 이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이른바 학문과 치도(治道)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말이 절실하니 명심하겠다."
하였다.

 

1월 16일 신미

좌참찬(左參贊)        신관호(申觀浩)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외람되게 신은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 잘못 중임(重任)을 맡게 되어 밤낮으로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삼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본국(本局)의 근래의 폐단 가운데에서 빨리 변통하여야 할 것과 먼저 강구해야 할 것을 구명한 다음 여섯 조항으로 만들어 성상께 올리니 보고 결재해 주소서.
첫째, 서울의 군사를 묶어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군사는 정예로운 것을 귀중히 여기고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많으나 정예롭지 못한 것도 쓸모가 없는데, 숫자가 많지 않으면서 정예롭지도 못하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현재 군졸들은 정상적인 대오가 없어서 오합지졸과 같고, 무기는 녹슬어 못쓰게 되었으니 실로 적의 손에 군사를 넘겨준다는 한탄이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군현(郡縣)에는 군사가 없는데 서울의 군영에 있는 군사조차 이 꼴입니다. 병지(兵志)에 이르기를, ‘적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믿지 말고 내가 대비하고 있는 것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혹시라도 저들이 쳐들어온다면 무엇을 가지고 대적하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한심스럽습니다. 대체로 군사가 정예롭지 못하게 되는 것은 대오를 평소에 정해 놓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병법(兵法)에서는 대오에는 일정한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고 물러감에 반드시 함께하고 움직이고 정지할 때 서로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와 얼굴이 익숙하고 뜻과 생각이 서로 부합되게 됩니다. 이것을 미루어 올라가서 장수에게까지 미친 다음에야 비로소 지휘를 뜻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지는 것이고 갑자기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병서에 이르기를, ‘많은 군사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군사를 다스리는 것과 같은 법이니, 숫자를 나누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본국에 있는 보군(步軍)을 보면 정병(正兵)이 26초(哨)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는 협련군(挾輦軍), 별파진(別破陣), 배포수(陪砲手), 서원(書員), 고직(庫直)의 각 장수(匠手) 등 700여 명이 있고, 초관(哨官), 사후(伺候), 서자적(書字的), 패두(牌頭), 청령군(聽令軍) 등 213명이 대오를 만드는 안에 뒤섞여 충당되어 있습니다. 이에 만약 동가(動駕)를 배위(排衛)할 때를 당할 경우에는 응탈대(應頉隊)를 제외하면 일정한 대오가 없어서 세 초에서 다섯 초를 이리 저리 모아서 한 초를 만듭니다. 그러니 구차하게 그 대리를 채워 액수(額數)가 비록 완전히 갖추어지더라도 절제와 호령에 있어서 어긋나는 것이 없지 않은데, 어떻게 다시 군대의 위용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빨리 변통하여 군제(軍制)를 바로잡기를 도모해야 한다고 봅니다. 협련군과 별파진을 대오에서 제외하여 별도 장령(將領)을 정하고 그 나머지 잡색군(雜色軍) 500명을 7색(色)에 분속(分屬)시켜서 대오에 뒤섞이지 않게 한다면, 정병이 단지 20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초의 수는 비록 줄어들었더라도 거의 군사들이 정예롭게 되어 절제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본국의 보군(步軍)들이 사사로이 연습하는 것을 보니, 초순에는 기예(技藝)를, 중순에는 진치는 법을, 하순에는 총쏘는 법을 연습하는 것이 규례입니다. 그러나 총쏘는 연습을 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어 이른바 포수라고 하는 자들이 화약을 장착하는 법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중순에 시사(試射)하고 상을 줄 때에 이르러서는 한 발도 적중시키는 자가 없으면서 요식(料食)를 바라고 시상(施賞)해 줄 것을 외람되이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예가 어떻게 정교해 질 수 있겠습니까?
이제 지난날의 버릇을 통렬히 바로잡고 조문을 엄하게 세워서 기예를 연습하고 진치는 법을 익히게 하여 달마다 점수를 계산하여 우수한 자는 녹봉(祿俸)을 올려주고 그 다음가는 자는 돈이나 무명으로 시상하며 끝자리를 차지한 자에게는 등급을 나누어 벌을 준다면 용병(冗兵)은 저절로 도태되고 기예가 점차 정교해질 것입니다. 기예가 높아진 다음에야 담대해져서 적을 죽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군총(軍總)에 들어 있는 자들은 활과 쇠뇌를 오랫동안 익히지 않아서 갑작스럽게 배울 수는 없으나, 총 쏘는 법에 이르러서는 배우기가 쉽고 능숙해지기도 쉽기 때문에 현재 연습한 지 몇 달 만에 맞추는 자가 이미 많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무기를 날카롭게 하고 또 많이 만들어서 총수(銃手)가 더욱 많아지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한 번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 제때에 힘써야 할 급선무입니다.
현재 적을 무찌르는 도구로는 화기(火器)가 중요하니, 화약을 많이 만들어서 넉넉하게 비축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화약을 만드는 데에는 본래 알맞은 절기가 있어서 입동(立冬) 뒤에서 우수(雨水) 전이 아니면 염초(焰硝)를 만들 수가 없고, 입하(立夏) 전이 아니면 두드려서 화약을 만들 수 없으니, 만약 그때를 놓치면 재료가 있어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의당 염초를 굽는 새로운 방법을 적은 책을 인출(印出)하여 열읍(列邑)에 나누어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만들게 한다면 모두 다 넉넉하게 비축할 수 있고 정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걱정이 없는 날을 당하여서 응당 대비책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데, 현재 변방의 걱정이 헤아릴 수가 없는 상황에서 어찌 비용이 들고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꺼려 대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둘째, 향포수(鄕砲手)를 선발하도록 장려하는 것입니다. 지금 기예가 정밀한 자를 보면 총수만 한 자가 없고 총수 가운데에서 정예롭기로는 또 서북 지방의 총수만 한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방수하는 데에서 담이 커지고 사냥하는 데에서 기예가 정밀해진 것입니다. 변경 땅은 교화가 미치지 못하여 작록(爵祿)이 있는 자가 예로부터 드뭅니다. 이제 만약 늠료를 후하게 주고 영예로운 관직으로 얽어매어 출세할 수 있는 계제가 되게 한다면 거의 모두가 즐겨 달려올 것입니다. 그래야 설사 급한 경보가 있더라도 곧바로 징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국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도시(都試)를 설행하여 각기 몇 사람씩을 뽑으며, 또 경찰(京察)에서 본 지방에 변장(邊將)을 차송(差送)하면 그들은 성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영광이 있게 되는 동시에 방수하는 데에 있어서도 또한 반드시 크게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셋째, 민보(民堡)를 쌓도록 장려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고 외적이 왕래하는 것도 천 리밖에 안 되어서 빨리 오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경병(京兵)을 써서 외적이 쳐들어오는 데에 따라서 방비하고자 하면 아낙네나 어린이들도 불가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지금의 백성들의 실정으로 군현의 군사를 또 어찌 쉽게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나라에는 사실 군사가 없는 만큼 방비하는 것이 응당 많아야 할 것입니다.
민보를 쌓는 방법은 이목(李牧)의 입보(入保)에 상세히 나와 있고, 그에 대한 설은 조조(鼂錯)에게서 나타났으니, 군사를 징발하여 외적을 방비함에 있어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지키게 하는 것보다 더 튼튼한 것이 없어서 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실정은 누구나 보루를 설치하여 목숨을 지키고자 하면서 조정에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까 근심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연변(沿邊)의 군읍(郡邑)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실정을 따라서 보루를 쌓게 하고 미리 약속을 정하여 위급한 경보를 만나면 곧바로 모두 보루로 들어가서 험준한 데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들판을 텅 비워 놓고 적을 기다린다면 적이 그 땅에 들어오더라도 먹을 것이 없게 될 것이니, 어떻게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훌륭한 장수는 외적을 방어하고자 할 때 들판을 텅 비워 놓는 방법을 써서 그 나라를 지켰습니다. 이 때문에 민보를 많이 설치했던 것이며 지금처럼 외적의 변란이 있을 때에는 더욱더 응당 시행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이 또 열읍(列邑)의 높은 지대를 보니 그 위에 성터 자리가 별처럼 널려 있고 바둑판처럼 깔려 있었는데, 아마 모두 전대에 백성들이 지키던 곳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곳을 공고하게 보수한다면 또한 노력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민보를 쌓게 해서 몇천 리 되는 바닷가를 빙 둘러친 다음, 징과 북을 둥둥 울리고 깃발을 은밀히 드러내어 연락을 해서 서로 구원하게 한다면 우리에게 방비가 있는 줄 알고 외적이 혹 의심을 하면서 감히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제도와 법령을 반포하여 되도록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여 적을 방어하고 스스로를 보전하게 한다면 반드시 모두 환호하며 춤을 추면서 며칠이 걸리지 않아 완성할 것입니다. 지역에 따라 군사가 있게 되어 외적을 방비하는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넷째, 북쪽 변경에 군사를 만들어 두는 것입니다. 설사 변경에 경보가 있더라도 어떻게 매번 경병(京兵)을 멀리 내보내 방어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 변방의 걱정이 자못 절박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동요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들로 하여금 대오를 편성하여 변방을 방어하면서 스스로 지키게 하소서. 그것은 또한 북쪽 지방의 백성들이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법은 대개 다섯 집으로 통(統)을 만들고 열 집으로 패(牌)를 만들어 다섯 집에서 장정 한 명을 책임지고 내게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면 번갈아 가면서 세우든 고용해서 세우든 관계없이 모두 당연히 건장하고 실한 사람으로 징발하는 데에 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다섯 집에서 책임을 지도록 맡긴 이상 설령 도망치거나 죽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섯 집에서 당연히 책임지고 세울 것이기 때문에 도망치거나 죽거나 새로 묶는 폐단이 영원히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실로 ‘삼대(三代)에는 군사에 일정한 숫자가 있었고 일정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 데에 부합됩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호구에서 군사를 내게 하는 것은 실로 융성했던 옛날의 군사제도로써 중국에서 근대에도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관(周官)〉의 비려 제도(比閭制度)나 족당 제도(族黨制度), 관중(管仲)의 집리 제도(執里制度)나 연향 제도(連鄕制度)는 모두 호구에서 군사를 냈기 때문에 주(周) 나라에는 일곱 집에서 한 명의 군사에 대한 봉족(奉足)을 내고 제(齊) 나라에서는 아홉 집에서 한 명의 군사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소, 말, 수레, 갑옷, 말먹이 등을 모두 백성들에게 내게 하였기 때문에 일곱 집이나 아홉 집이 힘을 합쳐야만 비로소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라를 세운 초기에 종성(宗姓)이나 이성(異姓)의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자제(子弟)들을 모두 사실 위적(衛籍)에 실어 놓았는데, 이것은 모두 호구에서 군사를 내는 법이었습니다.
지금 변경에 일이 있을 때를 당해서 만일 지금에 미쳐서 군사를 만들어 두지 않는다면 설사 군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무기가 날카롭고 정비되어 있다고 해도 장차 누가 그것을 쓰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방비를 굳게 하는 계책을 세움에 있어서는 군사를 만드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북관 일로(一路)에서부터 먼저 강구하여 시행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여길 경우에 그에 기인하여 온 나라에 그러한 군사를 만드는 것은 실로 성모(聖謨)에 관계되니 적을 방어하는 기틀이 손 안에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내정(內政)을 잘 닦는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세상의 변란은 우려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려하지 않던 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것이 숨어 있을 때에는 지극히 미미하다가도 떨쳐 일어날 때에는 지극히 드러나는 것이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형편을 가지고 논한다면 상하 중외가 다 함께 염려하는 것이 어찌 오랑캐들의 변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어리석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혹시라도 오랑캐가 다시 올 경우에 우리가 그들을 맞게 하고자 하는 것은 백성들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재물을 내도록 책임지워 군량을 마련하고 또 명령을 내려 적을 죽이도록 책임지우는 것도 백성들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목숨을 바쳐 싸울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그저 적을 방어하도록 한다면, 이것은 위태로운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백성들을 염려하는 것을 적을 염려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하여 적을 염려하는 일을 처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백성들의 곤궁함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진실로 곤궁하게 된 까닭을 따져 본다면 또한 군사를 설치하는 것을 일찍 하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습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군사를 설치함에 있어서 일정한 법이 없기 때문에 부역이 고르지 못하고, 부역이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가난하며, 백성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국용(國用)이 부족하고, 국용이 부족하기 때문에 세금을 거두는 것이 법도가 없고, 세금을 거두는 것이 법도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대부분 속이고, 백성들이 대부분 속이기 때문에 형벌이 무거워지며, 형벌이 무거워지기 때문에 백성들은 목숨을 피할 데가 없어서 변란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병정(兵政)이 이러하니, 일반 정사도 알 수 있습니다. 정사는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것인데 백성들이 정사의 폐단으로 곤란을 당하고, 군사는 변란을 막기 위한 것인데 변란이 군사로 인해서 생기니, 일찌감치 계책을 세우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여섯째, 오랑캐들이 변란을 일으키는 것을 살펴서 헤아리는 것입니다. 대체로 승리를 이룩하자면 적을 헤아리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랑캐는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나, 은밀하게 사교(邪敎)를 행하고 드러나게 통화(通貨)하기를 요구하니 그 정상이 이미 드러난 것입니다. 오랑캐는 걱정할 것 없다고 하나, 우리의 요해처를 엿보고 우리의 대도시를 불태우니 그 일이 이미 혹독합니다. 그런데 오랑캐를 헤아리는 것을 어찌 서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요구하는 것을 결코 허락할 수 없다면 이미 지켜야 하고 또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싸우고 지키는 데 대한 대비가 어떠합니까? 저들이 먼 바다를 건너와 남의 나라를 침범하는 것이 어찌 구차히 오는 것이겠습니까? 저들에 근거해서 연습을 하게 되면 반드시 믿을 것이 있게 되고 우리 측의 허실을 염탐하도록 두면 반드시 모멸받을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저들을 막고자 하면서 또 구차 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병지(兵志)에 이르기를, ‘싸우기 전에 조정의 계책이 이긴 것은 계책을 얻은 것이 많기 때문이요, 싸우기 전에 조정의 계책이 이기지 못한 것은 계책을 얻은 것이 적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과 우리의 형세를 볼 때 계책이 많은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많다고 한다면 많은 것을 믿고 닦지 않아서는 안 되며, 혹 적다고 한다면 응당 빨리 닦아서 많게 해야 합니다. 만약 이제 싸우기로 결의하고서 전략을 강구하지 않고 군사 장비를 수리하지 않는다면 어찌 위험한 방도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동동거리면서 그만 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상소를 내려보내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매우 좋다. 묘당으로 하여금 충분히 상의하여 별단(別單)으로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지금 이 여섯 가지 조항은 모두 정식 규례로 정한 것인데 어찌하여 폐기한 채 시행하지 않았는가? 오로지 실심(實心)으로 대양(對揚)하고자 하지 않은 탓이다. 지금 이렇게 상소하여 청하기까지 하니 개탄스럽다."
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신관호(申觀浩)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외람되게 신은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 잘못 중임(重任)을 맡게 되어 밤낮으로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삼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본국(本局)의 근래의 폐단 가운데에서 빨리 변통하여야 할 것과 먼저 강구해야 할 것을 구명한 다음 여섯 조항으로 만들어 성상께 올리니 보고 결재해 주소서.
첫째, 서울의 군사를 묶어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군사는 정예로운 것을 귀중히 여기고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많으나 정예롭지 못한 것도 쓸모가 없는데, 숫자가 많지 않으면서 정예롭지도 못하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현재 군졸들은 정상적인 대오가 없어서 오합지졸과 같고, 무기는 녹슬어 못쓰게 되었으니 실로 적의 손에 군사를 넘겨준다는 한탄이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군현(郡縣)에는 군사가 없는데 서울의 군영에 있는 군사조차 이 꼴입니다. 병지(兵志)에 이르기를, ‘적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믿지 말고 내가 대비하고 있는 것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혹시라도 저들이 쳐들어온다면 무엇을 가지고 대적하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한심스럽습니다. 대체로 군사가 정예롭지 못하게 되는 것은 대오를 평소에 정해 놓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병법(兵法)에서는 대오에는 일정한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고 물러감에 반드시 함께하고 움직이고 정지할 때 서로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와 얼굴이 익숙하고 뜻과 생각이 서로 부합되게 됩니다. 이것을 미루어 올라가서 장수에게까지 미친 다음에야 비로소 지휘를 뜻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지는 것이고 갑자기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병서에 이르기를, ‘많은 군사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군사를 다스리는 것과 같은 법이니, 숫자를 나누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본국에 있는 보군(步軍)을 보면 정병(正兵)이 26초(哨)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는 협련군(挾輦軍), 별파진(別破陣), 배포수(陪砲手), 서원(書員), 고직(庫直)의 각 장수(匠手) 등 700여 명이 있고, 초관(哨官), 사후(伺候), 서자적(書字的), 패두(牌頭), 청령군(聽令軍) 등 213명이 대오를 만드는 안에 뒤섞여 충당되어 있습니다. 이에 만약 동가(動駕)를 배위(排衛)할 때를 당할 경우에는 응탈대(應頉隊)를 제외하면 일정한 대오가 없어서 세 초에서 다섯 초를 이리 저리 모아서 한 초를 만듭니다. 그러니 구차하게 그 대리를 채워 액수(額數)가 비록 완전히 갖추어지더라도 절제와 호령에 있어서 어긋나는 것이 없지 않은데, 어떻게 다시 군대의 위용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빨리 변통하여 군제(軍制)를 바로잡기를 도모해야 한다고 봅니다. 협련군과 별파진을 대오에서 제외하여 별도 장령(將領)을 정하고 그 나머지 잡색군(雜色軍) 500명을 7색(色)에 분속(分屬)시켜서 대오에 뒤섞이지 않게 한다면, 정병이 단지 20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초의 수는 비록 줄어들었더라도 거의 군사들이 정예롭게 되어 절제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본국의 보군(步軍)들이 사사로이 연습하는 것을 보니, 초순에는 기예(技藝)를, 중순에는 진치는 법을, 하순에는 총쏘는 법을 연습하는 것이 규례입니다. 그러나 총쏘는 연습을 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어 이른바 포수라고 하는 자들이 화약을 장착하는 법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중순에 시사(試射)하고 상을 줄 때에 이르러서는 한 발도 적중시키는 자가 없으면서 요식(料食)를 바라고 시상(施賞)해 줄 것을 외람되이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예가 어떻게 정교해 질 수 있겠습니까?
이제 지난날의 버릇을 통렬히 바로잡고 조문을 엄하게 세워서 기예를 연습하고 진치는 법을 익히게 하여 달마다 점수를 계산하여 우수한 자는 녹봉(祿俸)을 올려주고 그 다음가는 자는 돈이나 무명으로 시상하며 끝자리를 차지한 자에게는 등급을 나누어 벌을 준다면 용병(冗兵)은 저절로 도태되고 기예가 점차 정교해질 것입니다. 기예가 높아진 다음에야 담대해져서 적을 죽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군총(軍總)에 들어 있는 자들은 활과 쇠뇌를 오랫동안 익히지 않아서 갑작스럽게 배울 수는 없으나, 총 쏘는 법에 이르러서는 배우기가 쉽고 능숙해지기도 쉽기 때문에 현재 연습한 지 몇 달 만에 맞추는 자가 이미 많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무기를 날카롭게 하고 또 많이 만들어서 총수(銃手)가 더욱 많아지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한 번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 제때에 힘써야 할 급선무입니다.
현재 적을 무찌르는 도구로는 화기(火器)가 중요하니, 화약을 많이 만들어서 넉넉하게 비축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화약을 만드는 데에는 본래 알맞은 절기가 있어서 입동(立冬) 뒤에서 우수(雨水) 전이 아니면 염초(焰硝)를 만들 수가 없고, 입하(立夏) 전이 아니면 두드려서 화약을 만들 수 없으니, 만약 그때를 놓치면 재료가 있어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의당 염초를 굽는 새로운 방법을 적은 책을 인출(印出)하여 열읍(列邑)에 나누어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만들게 한다면 모두 다 넉넉하게 비축할 수 있고 정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걱정이 없는 날을 당하여서 응당 대비책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데, 현재 변방의 걱정이 헤아릴 수가 없는 상황에서 어찌 비용이 들고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꺼려 대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둘째, 향포수(鄕砲手)를 선발하도록 장려하는 것입니다. 지금 기예가 정밀한 자를 보면 총수만 한 자가 없고 총수 가운데에서 정예롭기로는 또 서북 지방의 총수만 한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방수하는 데에서 담이 커지고 사냥하는 데에서 기예가 정밀해진 것입니다. 변경 땅은 교화가 미치지 못하여 작록(爵祿)이 있는 자가 예로부터 드뭅니다. 이제 만약 늠료를 후하게 주고 영예로운 관직으로 얽어매어 출세할 수 있는 계제가 되게 한다면 거의 모두가 즐겨 달려올 것입니다. 그래야 설사 급한 경보가 있더라도 곧바로 징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국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도시(都試)를 설행하여 각기 몇 사람씩을 뽑으며, 또 경찰(京察)에서 본 지방에 변장(邊將)을 차송(差送)하면 그들은 성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영광이 있게 되는 동시에 방수하는 데에 있어서도 또한 반드시 크게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셋째, 민보(民堡)를 쌓도록 장려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고 외적이 왕래하는 것도 천 리밖에 안 되어서 빨리 오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경병(京兵)을 써서 외적이 쳐들어오는 데에 따라서 방비하고자 하면 아낙네나 어린이들도 불가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지금의 백성들의 실정으로 군현의 군사를 또 어찌 쉽게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나라에는 사실 군사가 없는 만큼 방비하는 것이 응당 많아야 할 것입니다.
민보를 쌓는 방법은 이목(李牧)의 입보(入保)에 상세히 나와 있고, 그에 대한 설은 조조(鼂錯)에게서 나타났으니, 군사를 징발하여 외적을 방비함에 있어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지키게 하는 것보다 더 튼튼한 것이 없어서 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실정은 누구나 보루를 설치하여 목숨을 지키고자 하면서 조정에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까 근심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연변(沿邊)의 군읍(郡邑)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실정을 따라서 보루를 쌓게 하고 미리 약속을 정하여 위급한 경보를 만나면 곧바로 모두 보루로 들어가서 험준한 데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들판을 텅 비워 놓고 적을 기다린다면 적이 그 땅에 들어오더라도 먹을 것이 없게 될 것이니, 어떻게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훌륭한 장수는 외적을 방어하고자 할 때 들판을 텅 비워 놓는 방법을 써서 그 나라를 지켰습니다. 이 때문에 민보를 많이 설치했던 것이며 지금처럼 외적의 변란이 있을 때에는 더욱더 응당 시행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이 또 열읍(列邑)의 높은 지대를 보니 그 위에 성터 자리가 별처럼 널려 있고 바둑판처럼 깔려 있었는데, 아마 모두 전대에 백성들이 지키던 곳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곳을 공고하게 보수한다면 또한 노력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민보를 쌓게 해서 몇천 리 되는 바닷가를 빙 둘러친 다음, 징과 북을 둥둥 울리고 깃발을 은밀히 드러내어 연락을 해서 서로 구원하게 한다면 우리에게 방비가 있는 줄 알고 외적이 혹 의심을 하면서 감히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제도와 법령을 반포하여 되도록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여 적을 방어하고 스스로를 보전하게 한다면 반드시 모두 환호하며 춤을 추면서 며칠이 걸리지 않아 완성할 것입니다. 지역에 따라 군사가 있게 되어 외적을 방비하는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넷째, 북쪽 변경에 군사를 만들어 두는 것입니다. 설사 변경에 경보가 있더라도 어떻게 매번 경병(京兵)을 멀리 내보내 방어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 변방의 걱정이 자못 절박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동요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들로 하여금 대오를 편성하여 변방을 방어하면서 스스로 지키게 하소서. 그것은 또한 북쪽 지방의 백성들이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법은 대개 다섯 집으로 통(統)을 만들고 열 집으로 패(牌)를 만들어 다섯 집에서 장정 한 명을 책임지고 내게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면 번갈아 가면서 세우든 고용해서 세우든 관계없이 모두 당연히 건장하고 실한 사람으로 징발하는 데에 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다섯 집에서 책임을 지도록 맡긴 이상 설령 도망치거나 죽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섯 집에서 당연히 책임지고 세울 것이기 때문에 도망치거나 죽거나 새로 묶는 폐단이 영원히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실로 ‘삼대(三代)에는 군사에 일정한 숫자가 있었고 일정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 데에 부합됩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호구에서 군사를 내게 하는 것은 실로 융성했던 옛날의 군사제도로써 중국에서 근대에도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관(周官)〉의 비려 제도(比閭制度)나 족당 제도(族黨制度), 관중(管仲)의 집리 제도(執里制度)나 연향 제도(連鄕制度)는 모두 호구에서 군사를 냈기 때문에 주(周) 나라에는 일곱 집에서 한 명의 군사에 대한 봉족(奉足)을 내고 제(齊) 나라에서는 아홉 집에서 한 명의 군사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소, 말, 수레, 갑옷, 말먹이 등을 모두 백성들에게 내게 하였기 때문에 일곱 집이나 아홉 집이 힘을 합쳐야만 비로소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라를 세운 초기에 종성(宗姓)이나 이성(異姓)의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자제(子弟)들을 모두 사실 위적(衛籍)에 실어 놓았는데, 이것은 모두 호구에서 군사를 내는 법이었습니다.
지금 변경에 일이 있을 때를 당해서 만일 지금에 미쳐서 군사를 만들어 두지 않는다면 설사 군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무기가 날카롭고 정비되어 있다고 해도 장차 누가 그것을 쓰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방비를 굳게 하는 계책을 세움에 있어서는 군사를 만드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북관 일로(一路)에서부터 먼저 강구하여 시행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여길 경우에 그에 기인하여 온 나라에 그러한 군사를 만드는 것은 실로 성모(聖謨)에 관계되니 적을 방어하는 기틀이 손 안에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내정(內政)을 잘 닦는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세상의 변란은 우려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려하지 않던 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것이 숨어 있을 때에는 지극히 미미하다가도 떨쳐 일어날 때에는 지극히 드러나는 것이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형편을 가지고 논한다면 상하 중외가 다 함께 염려하는 것이 어찌 오랑캐들의 변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어리석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혹시라도 오랑캐가 다시 올 경우에 우리가 그들을 맞게 하고자 하는 것은 백성들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재물을 내도록 책임지워 군량을 마련하고 또 명령을 내려 적을 죽이도록 책임지우는 것도 백성들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목숨을 바쳐 싸울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그저 적을 방어하도록 한다면, 이것은 위태로운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백성들을 염려하는 것을 적을 염려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하여 적을 염려하는 일을 처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백성들의 곤궁함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진실로 곤궁하게 된 까닭을 따져 본다면 또한 군사를 설치하는 것을 일찍 하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습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군사를 설치함에 있어서 일정한 법이 없기 때문에 부역이 고르지 못하고, 부역이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가난하며, 백성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국용(國用)이 부족하고, 국용이 부족하기 때문에 세금을 거두는 것이 법도가 없고, 세금을 거두는 것이 법도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대부분 속이고, 백성들이 대부분 속이기 때문에 형벌이 무거워지며, 형벌이 무거워지기 때문에 백성들은 목숨을 피할 데가 없어서 변란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병정(兵政)이 이러하니, 일반 정사도 알 수 있습니다. 정사는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것인데 백성들이 정사의 폐단으로 곤란을 당하고, 군사는 변란을 막기 위한 것인데 변란이 군사로 인해서 생기니, 일찌감치 계책을 세우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여섯째, 오랑캐들이 변란을 일으키는 것을 살펴서 헤아리는 것입니다. 대체로 승리를 이룩하자면 적을 헤아리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랑캐는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나, 은밀하게 사교(邪敎)를 행하고 드러나게 통화(通貨)하기를 요구하니 그 정상이 이미 드러난 것입니다. 오랑캐는 걱정할 것 없다고 하나, 우리의 요해처를 엿보고 우리의 대도시를 불태우니 그 일이 이미 혹독합니다. 그런데 오랑캐를 헤아리는 것을 어찌 서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요구하는 것을 결코 허락할 수 없다면 이미 지켜야 하고 또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싸우고 지키는 데 대한 대비가 어떠합니까? 저들이 먼 바다를 건너와 남의 나라를 침범하는 것이 어찌 구차히 오는 것이겠습니까? 저들에 근거해서 연습을 하게 되면 반드시 믿을 것이 있게 되고 우리 측의 허실을 염탐하도록 두면 반드시 모멸받을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저들을 막고자 하면서 또 구차 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병지(兵志)에 이르기를, ‘싸우기 전에 조정의 계책이 이긴 것은 계책을 얻은 것이 많기 때문이요, 싸우기 전에 조정의 계책이 이기지 못한 것은 계책을 얻은 것이 적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과 우리의 형세를 볼 때 계책이 많은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많다고 한다면 많은 것을 믿고 닦지 않아서는 안 되며, 혹 적다고 한다면 응당 빨리 닦아서 많게 해야 합니다. 만약 이제 싸우기로 결의하고서 전략을 강구하지 않고 군사 장비를 수리하지 않는다면 어찌 위험한 방도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동동거리면서 그만 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상소를 내려보내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매우 좋다. 묘당으로 하여금 충분히 상의하여 별단(別單)으로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지금 이 여섯 가지 조항은 모두 정식 규례로 정한 것인데 어찌하여 폐기한 채 시행하지 않았는가? 오로지 실심(實心)으로 대양(對揚)하고자 하지 않은 탓이다. 지금 이렇게 상소하여 청하기까지 하니 개탄스럽다."
하였다.

 

1월 17일 임신

이인석(李寅奭)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이인명(李寅命)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의익(李宜翼)이 장계(狀啓)하기를, ‘선혜청(宣惠廳)에 바칠 쌀 1,108석(石) 13두(斗) 남짓과 콩 7석 5두 남짓을 실은 공충도(公忠道) 덕산군(德山郡)의 대동선(大同船) 1척이 병인년(1866) 10월 19일에 양성현(陽城縣) 농도(籠島)에 도착하여 배 전체가 침몰하였습니다. 증미(拯米) 1,087석을 법전에 의거하여 물에 젖은 쌀을 다시 말〔斗〕로 되어 보니, 실제 쌀이 694석 10두이었습니다. 이것을 시가(時價)대로 1냥(兩) 9전(錢)씩에 방매(放賣)하여 상납할 요량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취재(臭載)의 근심이 전후로 어찌 한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이 배의 일처럼 구구절절 의심스럽고 괴이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미 안쪽 바다에 도착하였고 또한 어둡지도 않았으니, 풍랑과 안개를 만났다 하더라도 어찌 배를 부릴 기술이 없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데도 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세 놈이 도망친 것은 스스로 겁먹어 그런 것이라고 핑계 대었고, 건져낸 쌀로 줄어든 것을 계산해 보면 거의 절반에 가깝고, 함께 실었던 콩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규명하여 보면 술수를 부린 흔적을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도망친 세 놈은 기한을 정하여 체포하고 감색(監色)과 사공을 다시 엄하게 형신(刑訊)을 가하여 기어이 자백을 받아내어 해당 형률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곡주관(穀主官)인 덕산 군수(德山郡守) 신석유(申錫游)와 지방관(地方官)인 양성 전 현감(陽城前縣監) 이민항(李敏恒)을 모두 유사(攸司)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조처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건져낸 곡식을 이미 발매하였으니 열미(劣米)와 아울러 일체 대전(代錢)하여 상납하게 한다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나감(拿勘)하는 것은 용서하여 우선 죄명을 지닌 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0일 을해

전교하기를,
"듣건대, 《선파속보(璿派續譜)》가 지금 거의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선왕조에서 편찬하도록 명한 책이다. 서문(序文)을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라."
하였다.

 

특별히 민승호(閔升鎬)를 발탁하여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북관(北關)에서 지방(支放)하는 곡식을 해창(海倉)에 실어다 바치는 것이 바로 육진(六鎭)의 백성들의 견디기 어려운 폐단입니다. 그러나 해영(該營)의 지방의 수요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군량미로 회계한 것 안에 있는 곡식을 반을 나누어 주고 취한 모곡(耗穀) 가운데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1,500석(石)을 특별히 획부(劃付)하여 한결같이 그 지방의 규정에 따라서 작전(作錢)하되, 혹시라도 어기지 말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송하는 비용은 본영에서 일체 담당하여 환곡(還穀)을 내는 백성들을 영원히 침해하지 말게 해 환곡을 내는 백성들은 단지 본곡(本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고을의 창고에 바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으로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순영과 병영(兵營) 및 각 해당 읍에 비치해 두고 영구히 준행하도록 하라고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강화(江華) 공도회(公都會)의 시권(試券)을 거두어서 올려 보내게 할 것으로 연석에서 아뢰어 윤허를 받았습니다. 화성(華城)의 도회(都會)를 2년치를 올봄에 합하여 설행하되, 해부(該府)에서 시권을 거두어 성균관(成均館)으로 올려 보내고 성균관으로 하여금 고시(考試)하여 출방(出榜)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형(文衡)을 차임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시제(詩題)와 시취(試取)를 대사성(大司成)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한다는 내용으로 규정을 정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무신(武臣)이 유수로 있는 세 도(都)에서도 모두 이 규정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육진(六鎭)에 있는 군기(軍器)를 지금 한창 수리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루아침이나 하루 저녁에 마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무기 창고와 각 군영에 있는 무기 가운데에서 활과 화살, 조총, 화약을 분배(分排)하여 내려보내어 경계를 엄하게 하는 대책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21일 병자

평산부(平山府)의 세곡(稅穀)을 산군(山郡)의 예대로 특별히 돈으로 대납(代納)하도록 허락하되, 호조(戶曹)에서 따로 절목을 만들어 해읍(該邑)에 관문(關文)을 보내고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훈련 대장(訓鍊大將) 신관호(申觀浩)가 상소하여 여러 조항의 병사(兵事)에 대해 진달한 데에 대한 비답에, ‘묘당에서 충분히 상의하여 확정한 다음 별단(別單)으로 품처하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소본(疏本)을 가져다 보니, 첫째는, ‘협련군(挾輦軍)과 별파진(別破陣)을 대오에서 떼 내어 따로 명색을 세우고 별도로 장령(將領)을 정하며, 그 나머지 잡색군(雜色軍) 500여 명도 모두 떼 내어 7색(色)에 분속(分屬)시켜 대오에 뒤섞이지 않게 한다. 그럴 경우 떼 내는 군사가 6초(哨)이기 때문에 정병(正兵)이 단지 20초로 될 것인데, 초의 수는 비록 줄어들었지만 실상은 정한 숫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병기를 수리하고 화약을 만들며 무예를 익히고 상벌을 시행함에 있어서 지금이 충분치 못하니, 각별히 먼저 구획(區劃)하여야 한다.’고 한 일입니다. 정예로운 것이 귀하고 많은 것이 귀하지 않다는 것은 병가(兵家)의 좋은 계책입니다. 이번에 진달한 바에는 실로 의견이 있으니, 해당 군영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없애거나 보태기도 하여 좋은 쪽으로 변통하여 계품(啓稟)해서 시행하게 하여야 합니다. 기예를 익히고 병기를 수리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정상적인 법이고 정상적인 규정입니다. 만약 잘 시행해 나가기만 하면 폐단을 구제하지 못할 것을 근심할 것이 없으니, 다시 거듭 분명하게 신칙하여 기어이 폐단을 고치는 효과가 있게 하여야 합니다.
염초(焰硝)를 굽고 화약을 만드는 것을 각기 그 군영과 고을에서 자체로 하도록 본부에서 마감하게 하는 것은 또한 편리한 제도입니다. 그러니 각 도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그 숫자를 나누어 배정하여 영원히 연례(年例)로 만들게 하고, 마감할 때에는 각기 몇 근씩을 모두 모아서 본 감영에 올려 보내게 하여 물품을 보고 우열을 살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둘째는, ‘서북(西北)의 포수(砲手)들을 각각 100명씩 시취(試取)하여 뽑아서 올려 보내어 별초(別哨)로 만든 다음 두령(頭領)을 뽑아서 임명하여 번갈아 가면서 교대로 올려 보내게 하는 한편, 훈련 도감에서 봄가을로 도시(都試)를 보여 각각 몇 사람씩을 뽑게 한다. 또 6월과 12월의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에 본 지방의 변장(邊將) 가운데에서 두 자리에 그들을 임명해 보내어 고무하고 장려하여야 한다.’고 한 일입니다. 뽑아 올려보내는 지방의 포수가 과연 정예롭다면 해도의 도신과 수신에게 관문을 보내 물어본 뒤에 다시 품처하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는, ‘연변(沿邊)의 군읍(郡邑)에서 백성들이 자체적으로 보루를 쌓게 하여 경보가 있을 경우 굳게 지킬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 일입니다. 옛날 것을 끌어다 대면서 증명하여 자세하게 의논을 내세우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새로운 제도를 창설하는 데 관계되니, 또한 반드시 억지로 설치하도록 독촉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제(堡制)나 보약(堡約) 같은 것을 한 책으로 만들어서 우선 관문을 보내 각 도에 물어본 다음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따르고 백성들의 실정대로 순종해서 시행할 만한 고을에서는 그 지형을 살펴보고 설치해 둘 곳을 헤아려서 본 의정부(議政府)에 논보(論報)하게 해야 합니다.
넷째는, ‘먼저 북관(北關)에서부터 호구에 따라 군사를 내는 제도를 강구하여 시행하고, 관가에서 총과 활을 지급하여 익히게 한 다음 징발해야 한다.’고 한 일입니다. 호구에 따라서 군사를 내는 것은 실로〈주관(周官)〉의 비려(比閭)와 족당(族黨)의 뜻에서 나온 것으로써 역대의 군사 제도가 또한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만약 군사를 설치하자고 한다면 이것이 아니고서는 설치할 방도가 없으니, 확실한 의논과 큰 계책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군현(郡縣)에 군사를 두지 않은 지가 오래된 상황에서 한꺼번에 아울러 논하기는 어렵습니다. 관서에는 바야흐로 변경의 사변이 있는 데다가 또 군포(軍布)를 징수한 전례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그곳에서 먼저 시행하자는 논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제도를 시행할 만한가를 토론하여 확정하고서 도신과 수신에게 관문을 보내 물어본 뒤에 시행해야 합니다.
지금 이 여러 조항들은 군국(軍國)의 큰 정사입니다. 그런 만큼 시행하는 것을 즉시 결정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각별히 더 사리를 따져본 다음 별단(別單)으로 계하(啓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북병사(北兵使)가 지금 행영(行營)에 있는데, 이처럼 경계를 엄하게 하는 때를 당하여 만약 바람이 없다는 이유로 규례대로 철수하고서 돌아온다면 방수(防守)하고 통제하는 방도가 또한 허술하게 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대로 주둔해 있으라는 뜻으로 급히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23일 무인

전교하기를,
"천한전(天漢殿)에 어진(御眞)을 이봉(移奉)할 때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김 봉조하(金奉朝賀)가 나아가 봉심(奉審)하라."
하였다.

 

진도부(珍島府)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1월 24일 기묘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외도(外道)에 있는 무기를 현재 차례로 보수하고 있습니다만 도하(都下)에 있는 군사 장비는 더욱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 각영(各營)이 영락하여 사력(事力)이 실로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새로 주조한 돈 가운데에서 훈련국(訓鍊局)에 2만 냥, 두 군영과 군기시(軍器寺)에 1만 냥씩 획송(劃送)하여 특별히 보수하게 하여 면모를 일신하는 효과가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태경(尹泰經)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정재(李鼎在)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월 25일 경진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종친부(宗親府)에서,
"철종 대왕(哲宗大王)의 어진(御眞)으로서 임자년(1852)에 그린 것 2본과 신유년(1861)에 그린 것 2본, 임금이 직접 쓴 책, 맞이할 때 작위를 봉하는 교지(敎旨) 등을 함께 천한전(天漢殿)의 새 전각에 이봉(移奉)한 뒤에 신들은 의빈(儀賓), 각신(閣臣)들과 이어서 함께 펴서 전봉(展奉)하였습니다."
하였다.

 

강화부(江華府)의 인화보 만호(寅火堡萬戶) 자리를 권관(權管)으로 고쳐 초사(初仕) 자리로 만든 다음 해영(該營)에서 선전관(宣傳官)과 부장감으로 추천된 출신(出身)들을 활쏘기와 총쏘기를 차례로 돌아가면서 취재(取才)해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으로 삼망(三望)을 갖추어 병조(兵曹)에 보고하여 낙점을 받아 차송(差送)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진무사(鎭撫使)가 장계로 청한 것으로 인하여 의정부에서 아뢴 것이다.

 

파주목(坡州牧)의 전세(田稅)를 상정가(詳定價)로 대납(代納)하도록 하고, 대동미(大同米)는 저장하여 두었다가 전량을 획부(劃付)하여 이전대로 이식을 취하고, 포흠난 향곡(餉穀)은 다시 5년간 특별히 뒤로 물려주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본 파주가 바야흐로 군직을 설치하고 무예를 시험보일 경우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줄 지방(支放)을 형세상 배비(排比)하기가 어렵다고 아뢰었기 때문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의익(李宜翼)이 의 보고한 바를 보니, ‘통진부(通津府)의 문수산성(文殊山城)은 바로 관방(關防)의 요충지인 만큼 진해(鎭廨)와 성첩(城堞)과 무기 등의 허다한 수리를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호조(戶曹)에서 새로 주조한 돈 가운데에서 1만 냥(兩)을 절계(折計)하여 획송(劃送)하여 차례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병식(趙秉式)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삼가 의정부(議政府)에서 복계(覆啓)한 것을 윤허하신 데에 의거하여 군제(軍制)를 변통한 것을 별단(別單)에 써서 들입니다.’라고 아뢰었다.
【1. 일체 각초(各哨)에 있는 협련 정군(挾輦正軍) 300명과 그 밖의 군사 80명을 초 밖으로 떼낸 다음 그들을 나누어 좌우 반열로 만들고 각각 초관(哨官) 1원(員)을 두어 거느리게 하는 것으로 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습조(習操)할 때는 나누어서 2초로 만들고 별중사좌우초(別中司左右哨)로 호칭하면서 연습하게 할 것입니다. 시위할 때는 좌우열 협련군(左右列挾輦軍)으로 호칭하도록 할 것입니다. 1. 협련군의 좌열은 파총(把總)이 거느리고 우열은 초관이 거느리는 것은 비록 이것이 고규(古規)이기는 하지만, 병제(兵制)에 어긋나기 때문에 각각 초관을 두어 거느리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도령 장관(都領將官)이 없어서는 안 되므로, 파총을 도령으로 삼고 이어서 협련 파총(挾輦把總)으로 호칭하도록 하고 습조할 때는 별중사 파총(別中司把總)으로 호칭하도록 할 것입니다. 표하군(標下軍)도 마련하여 습조시킬 것입니다. 1. 각초와 각색(各色)에 있는 별파진(別破陣) 90명과 화전군(火箭軍) 10명을 초 밖으로 덜어 1색으로 만들도록 하고 교련관을 차출(差出)하여 영솔(領率)을 맡길 것입니다. 1. 각초에 있는 원역(員役) 38명과 각소(各所)의 배포수(陪砲手) 71명은 모두 칠색 표하군(七色標下軍)에 이속(移屬)시키고 각색 장수(匠手) 74명과 차부(車夫) 4명을 모두 당보색(塘報色)에 이속시킬 것입니다. 1. 각초에 있는 잡색군(雜色軍)을 이미 나누어 소속시킨 이상 다른 군사로써 그 자리를 보충하지 않을 수 없으니 중사(中司)의 6초와 양 중사의 취수(吹手) 800명을 모두 우선 혁파하고 추이(推移)하여 나누어 소속시킬 것입니다. 1. 서자적(書子的) 10명을 칠색과 별중사(別中司)의 표하군에 나누어 차송하고 협련군의 패두(牌頭) 8명 안에서 3명을 별중사(別中司)의 좌우초(左右哨) 및 별파진색(別破陣色)에 차송하고 2명을 서자적이 부족한 인원수에 옮겨 설치하며 그 나머지 3명은 다시 나누어 차송할 곳이 없으니 우선 감하(減下)하였다가 패두의 빈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차례로 처리할 것입니다. 1. 정군 380명을 옮겨다 별중사의 좌우초에서 이설한 빈 자리에 옮겨다 보충하고, 21명을 별중사의 취수로 옮겨다 두며 90명을 옮겨서 별파진(別破陣)에서 원색(元色)으로 옮겨다 둔 빈 자리에 보충하며, 109명을 옮겨다 원역(員役)에 보충하고, 각소의 배포수(陪砲手)와 각색의 변수(邊首) 등을 칠색군의 빈 자리에 나누어 소속시키며, 78명을 옮겨다 각색의 장수와 차부 등에 채우고 당보색(塘報色)의 대임으로 옮겨서 소속시키며, 40명을 옮겨다 보군(步軍) 20초에서 서자적과 패두를 떼내어 대오를 만든 빈 자리에 보충하고, 9명을 옮겨다 당보색의 부족한 인원수를 보충할 것입니다. 1. 복마군(卜馬軍) 30명을 별중사의 좌우초에 옮겨 설치하고, 4명을 별파진색(別破陣色)으로 옮겨다 두며, 18명을 칠색 복마군에서 부족한 숫자에 옮겨다 두고, 6명을 오사(五司)의 취수, 복마군에서 부족한 숫자에 옮겨다 둘 것입니다. 1. 중사(中司)의 6초는 본래 살수(殺手)이었던 만큼 이번에 이미 변통하여 좌우부(左右部), 좌우사(左右司)에서 각 중초를 합하여 4초를 살수로 편성하여 연습시킬 것입니다. 1. 양사(兩司)의 6초를 지금 이미 변통한 만큼 파총 2원과 초관 6원도 모두 감하(減下)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파총 1원과 초관 2원은 협련군의 장수로 도로 계하하여 군사를 거느리는 것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좌열(左列) 초관을 승륙(陞六)하였으면 우열 초관도 승차(陞差)해야 하니, 좌열은 임기가 만료되면 감하하고 파총은 병조에서 빈 자리가 나는 데 따라 다른 벼슬에 이송(移送)시킬 것입니다. 1. 파총 6원이 내외의 직소(直所)에서 나누어서 수직을 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 중사의 파총을 이번에 이미 감하한 만큼 내외의 입직을 배비(排比)할 길이 없습니다. 파총 4원이 단지 대궐 안에서만 입직하고 북영(北營)의 입직은 마병(馬兵)의 초관이 돌아가면서 입직하는 것으로 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병의 초관은 정식(定式)에 의거하여 반드시 전함(前銜) 4, 5품 이상으로 의망(擬望)하고 위반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1. 감하한 초관 2원은 협련군의 장수로 도로 계하하였고 2원은 본래 기패관(旗牌官)의 체아과(遞兒窠)인 만큼 원래의 자리는 전부 없애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한 자리는 체아 자리로 옮겨다 두고 한 자리는 도로 기패관의 요식(料食)을 주는 품계에 넘길 것입니다.】


【원본】 8책 4권 9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57면
【분류】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법(兵法)

 

1월 26일 신사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한림 권점(翰林圈點)을 행하였다. 〖권점을 받은 사람은〗 서석보(徐奭輔), 이승수(李承洙), 김영로(金永珯), 홍건식(洪健植), 조우섭(趙宇燮), 조병호(趙秉鎬), 서상준(徐相駿), 이용우(李龍雨)이다.

 

훈련국 별기대 초관(訓練局別騎隊哨官)을 실직에 있는 파총(把總)의 예대로 참상(參上)으로 시행하였다가 차례로 천전(遷轉)하도록 명하였다. 묘당(廟堂)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1월 27일 임오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28일 계미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였다. 이승수(李承洙), 조병호(趙秉鎬), 서석보(徐奭輔), 김영로(金永珯)를 선발하였다.

 

민치상(閔致庠)을 공충도 관찰사(公忠道觀察使)로 삼았다.

 

1월 29일 갑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중앙 각사(各司)와 각영(各營)에서 병인년(1866)의 회계부(會計簿)를 올렸다. 【호조(戶曹), 양향청(糧餉廳), 선혜청(宣惠廳), 병조(兵曹), 훈련국(訓鍊局),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총청(總廳)에 현재 남아 있었던 것은 

황금 98냥(兩) 5전(錢) 2분(分), 

은 8만 936냥 7전 9분 6리(釐) 남짓, 

돈 99만 5,168냥 7전 8분 남짓, 

명주 73동(同) 39필(疋) 28척(尺) 남짓, 

무명 1,981동 16필 11척 5촌(寸) 5분(分) 남짓, 

모시 31동 31필 남짓, 

베 421동 29필 14척 5촌 7분 남짓, 

쌀 5만 1,552석(石) 1두(斗) 5승(升) 5합(合) 5석(夕) 4리(厘) 남짓, 

콩 1만 1,153석 4두 1합 7석 남짓, 

좁쌀 1,107석 11두 7합 9석 남짓, 

겉잡곡 3만 825석 4두 남짓, 

꿀 2,307근(斤)이다.】



 

응자 노인(應資老人)에 대하여 하비(下批)하였다. 100살인 자가 27인이다. 【중관(中官) 김관국(金寬國), 양근(楊根)의 윤배(尹培), 서원(西原)의 손계형(孫啓亨), 강동(江東)의 윤해동(尹海東)·이성철(李聖哲), 양양(襄陽)의 김홍례(金弘禮)·김시익(金始翼), 이천(伊川)의 원석방(元錫昉), 진안(鎭安)의 김낙행(金洛行), 흥양(興陽)의 심득문(沈得文), 안동(安東)의 박계한(朴啓漢), 김해(金海)의 권인손(權仁孫)·김순영(金順永), 선산(善山)의 이복춘(李馥春), 인동(仁同)의 이원극(李源極)·지익한(池益漢), 길주(吉州)의 이동린(李東麟), 칠곡(漆谷)의 이동혁(李東赫), 양산(梁山)의 정수귀(鄭壽龜), 영덕(盈德)의 최상권(崔尙權), 산청(山淸)의 김운룡(金雲龍), 자인(慈仁)의 안동학(安東學), 해주(海州)의 문도언(文道彦), 성천(成川)의 나석정(羅錫政)·김홍규(金洪圭), 대구(大邱)의 이광억(李光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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