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11권, 고종11년 1874년 1월
1월 1일 을축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11권】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서 새해 하례를 받고 이어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 경모궁(景慕宮)에 전알(展謁)하였다. 춘알(春謁)이었다.
【원본】 15책 1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3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서 새해 하례를 받고 이어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 경모궁(景慕宮)에 전알(展謁)하였다. 춘알(春謁)이었다.
전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정월 초하루이니 도승지(都承旨)를 시켜 운현궁(雲峴宮)을 문안하도록 하라."
하였다.
노인들에게 세찬(歲饌)을 내렸다.
전교하기를,
"올해는 바로 우리 인현 성후(仁顯聖后)께서 복위한 지 180년이 되는 해이다. 옛날을 추념(追念)하니 감회가 한층 깊다.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내외의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고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의 사판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고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민진원(閔鎭遠), 고 충신(忠臣) 오두인(吳斗寅)·이세화(李世華)·박태보(朴泰輔)의 사판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민 판돈녕부사(閔判敦寧府事)가 올해 여든 살이다. 부대부인(府大夫人)께서 경축하는 마음으로 우러러 생각하면 의당 기쁘게 해 주는 일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 그 본가에 사고가 있다. 내외손(內外孫) 가운데 이름을 물어서 임기가 거의 차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자리를 내어 의망하여 들이고, 옷감과 음식물을 연례(年例) 외에 더 많이 실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사관(史官)을 보내어 존문(存問)하고서 오게 하였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는 민치구(閔致久)이다. 동몽교관에 외손자 심상훈(沈相熏)을 하비(下批)하였다.】
【원본】 15책 1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37면
【분류】인물(人物) / 인사-임면(任免) / 왕실-사급(賜給)
경연관(經筵官) 임헌회(任憲晦)를 하유하여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전교하기를,
"지난번의 처분은 사체(事體)와 공의(公議) 때문에 그렇게 하였던 것이나, 이제 한 해가 지나갔으니 참작해야 할 것이 없지 않다. 김제군(金堤郡)에 찬배(竄配)한 죄인 한계원(韓啓源)을 특별히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내렸다.
1월 2일 병인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순목(洪淳穆)이 현(縣)과 도(道)를 통해 스스로 인책(引責)하는 상소를 다시 올리니, 비답하기를,
"경은 지난번의 일을 가지고 거조가 잘못되어 사체(事體)를 손상시켰다고 하는데, 평상시 나라를 근심하는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정성으로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그때의 일을 나는 내가 창졸간에 끌어대어 인혐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오늘 전후의 상소의 말로 보면 더욱 경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이미 새해가 되었고 또 이런 때를 당하였으니, 빨리 상소를 올리는 일을 그만두고 당일로 조정에 나와 옆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나의 마음에 부응하고, 한 해가 지나도록 품고 있던 나의 회포를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윤현기(尹顯岐)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부수찬(副修撰) 이순의(李舜儀)의 상소를 보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리고 머리털이 곤두섰습니다. 신하가 진면(陳勉)하는 말에 어찌 할 말이 없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감히 ‘오행(五行)을 업신여겼다.’ 이하의 일곱 여덟 구절의 말을 마음에 싹틔우고 입으로 내어 장주(章奏)에 올린단 말입니까? 겉으로는 진달하여 경계시키는 것처럼 하였으나 속으로는 딴 생각을 품은 것입니다. 구국절절 흉패하고 음험하여 비단 오늘날 전하의 조정에서 북면(北面)한 자로서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역사 이래 임금과 신하가 있게 된 이후에 있지 않았던 흉악한 말입니다.
박우현(朴遇賢)에 대한 국문이 끝나기 전에 갑자기 도배(島配)를 시행한 것은 특별히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이순의의 무리로 말하면 응당 머리를 움츠리고 자취를 감추어 성덕(聖德)을 우러러보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패설(悖說)이 뒤를 이어 일어나 꺼리는 바가 없습니다. 《춘추(春秋)》의 무장죄(無將罪)와 한(漢) 나라의 불경법(不敬法)을 이들에게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떤 모양의 변괴가 어디에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어찌 크게 우려하여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이순의에게 먼저 찬배(竄配)의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순의의 상소는 시골의 무식한 자의 말이기 때문에 과연 깊이 죄주지 않았다. 그대 논책이 이와 같으니, 공의(公議)를 볼 수 있다. 청한 바는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1월 2일 병인
사간(司諫) 권종록(權鍾祿)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난달에 올린 전 수찬(修撰) 이순의(李舜儀)의 상소에 대하여 적이 분개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가 지적한 뜻이 겉으로는 진면(陳勉)하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실로 음험하였습니다. 비록 경(敬)이란 한 자로 말하더라도 경전에서 인용함에 있어 어찌 할 말이 없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굳이 유호(有扈)와 유묘(有苗)와 독부(獨夫) 수(受)를 정벌한 등의 일을 끄집어내어 말하였으니, 불경한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사람의 도리와 신하의 분수라고 하겠습니까? 신은 이순의에게 빨리 해당 형을 시행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사간(大司諫)에게 내린 비답에서 처분하였다."
하였다.
1월 3일 정묘
산실청(産室廳)에서, ‘중궁전의 산실(産室)을 오늘 배설(排設)해야 합니다. 삼가 전례를 상고하건대, 산실청을 설치한 다음 해산할 달을 당하면 세 제조가 함께 본원에서 입직하였습니다. 신들이 오늘부터 입직하고, 대령 의관(待令醫官) 및 별입직 의관(別入直醫官)은 각각 그 처소에서 입직하도록 하며, 진배(進排)할 각사(各司)는 전례대로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내의원(內醫院)의 세 제조와 시임 대신(時任大臣), 종정경(宗正卿), 각신(閣臣), 유신(儒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오늘은 바로 중궁전에 위한 산실청(産室廳)을 처음으로 설치한 날입니다. 기쁘게 경축하는 마음은 온 나라가 똑같지만 구구한 저의 마음은 더더욱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산실청을 처음 설치한 날에는 언제나 중궁전의 진후(診候)를 청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대령 의관(待令醫官)으로 하여금 입진(入診)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계속 안순(安順)하니 입진할 필요 없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박규수(朴珪壽)가 아뢰기를,
"일진이 길한 날에 산실(産室)을 배설(排設)하니, 대소 군정(軍情)이 기뻐서 축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기거(起居)와 자고 식사하는 절차를 더욱 조심함으로써 끝없는 아름다움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산실청을 설치한 이후 자성(慈聖)께서 더욱 기뻐하시니, 더욱 기쁘고 너무나 다행스럽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의관들도 응당 이런 말을 하겠지만 외간에서는 매번 해산달이 되면 그저 편안하게만 지내는 것도 마땅치 않고 반드시 많이 움직여야 하니 때때로 걸어서 힘을 써야 반드시 순산하는 데 크게 유익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대내(大內)에서 이대로 몸조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승후관(承候官)이 혹 하교로 인하여 별입직(別入直)하는 일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번에는 그만두라."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산실청을 설치한 후에 일을 거행하는 각사(各司)는 으레 대령하는데, 전에는 간혹 하교로 인하여 우선 대령하지 않은 때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기사년(1869)의 전례대로 하라."
하였다.
윤종선(尹宗善)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순목(洪淳穆)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며칠 전의 비답(批答)은 내가 그 당장의 일을 가지고 범범하게 말한 것이다. 이제 부주(附奏)한 것을 보니, 몇 구절의 말을 가지고 편안하기 어려워하는 뜻이 있는 듯하다. 이것이 어찌 경에게 바라는 것이겠는가?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른 만큼 경의 나라를 사랑하고 경축하는 정성으로 다른 것은 돌보지 않고 즉시 길에 올라 조정에 돌아와 고대하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1월 4일 무진
의금부(義禁府)에서, ‘부수찬(副修撰) 이순의(李舜儀)를 정주목(定州牧)에 찬배(竄配)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월 5일 기사
김익진(金翊鎭)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조경호(趙慶鎬)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1월 6일 경오
전교하기를,
"청나라 돈을 당초에 통용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날이 갈수록 물건은 귀해지고 돈은 천해져서 지탱할 수 없다고 한다. 민정(民情)을 생각하면 비단 옷과 쌀밥도 편안하지 않으니 즉시 변통하는 것은 또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부터는 청나라 돈을 통용하는 것을 전부 혁파(革罷)하라. 묘당(廟堂)에서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각영(各營)과 각사(各司)의 정월분 공납(公納)은 모두 청나라 돈으로 특별히 봉납(捧納)하도록 하고 2월분부터는 관례대로 상평전(常平錢)으로 봉납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김병덕(金炳德)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김병교(金炳喬)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오현문(吳顯文)을 총융사(總戎使)로, 신헌(申櫶)을 진무사 겸 삼도수군통어사(鎭撫使兼三道水軍統禦使)로, 김영구(金永求)를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총융사(總戎使) 오현문(吳顯文)을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하비(下批)하여야 하는데, 이에 승자(陞資)하지 못하였으니 동지사(同知事)에 단부(單付)하라고 분부하고, 이어 정식(定式)으로 만들어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청나라 돈을 혁파(革罷)하고 상평전(常平錢)으로 2월부터 상납(上納)할 일로 방금 하교를 받들어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였습니다. 당초에 쓰다가 이제 와서 변통하는 것은 모두 백성을 위한 성상의 뜻으로 위를 덜어서 아래에 보태주는 정사를 누군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만, 경비가 군색해지는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수용(需用)과 지방(支放)은 따로 방편을 모색하여 성상의 덕의(德意)를 받들어 나가라고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및 각 군문(軍門), 각 아문(衙門)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7일 신미
김병주(金炳㴤)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박승유(朴承儒)를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조희풍(趙羲豐)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이기석(李基碩)을 황해도 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1월 9일 계유
경상 감사(慶尙監司) 유치선(兪致善)을 소견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김학성(金學性)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김보현(金輔鉉)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조강하(趙康夏)를 부제학(副提學)으로, 박선수(朴瑄壽)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월 10일 갑술
동래 부사(東萊府使) 박제관(朴齊寬)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대가 잘 다스린 공적에 대하여 나는 익히 알고 있다. 동래는 다른 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지대이니, 더욱더 힘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하납(下納)하는 쌀, 무명, 베가 많이 적체되어 농간하는 폐단이 있다고 한다. 잘 조처하되, 훈도(訓導) 이하로서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우선 처형하고 나서 계문(啓聞)해도 된다."
하였다.
1월 13일 정축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이달의 절반이 지나가니 신들은 기쁘고 우러러 고대하는 정성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가 중궁전의 건강이 요즘에는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평안하고 순조롭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새해를 맞이하여 크나큰 복이 더욱 장구하게 되었는데, 자전(慈殿)께 효도하는 정성과 나라 안에 두루 펴시는 따사로운 봄날 같은 은택에 환호성과 화기(和氣)가 온 세상에 차고 넘칩니다. 이는 바로 새로 길한 경사를 맞이할 때입니다. 성탕(成湯)의 아침이 되기를 기다린 부지런함과 대우(大禹)의 낮은 궁전의 검소함, 제요(帝堯)의 하늘같은 인(仁)과 문왕(文王)의 빛나는 경(敬)은 모두 수복(壽福)의 터전이 됩니다. 임금은 하늘같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하늘의 일을 대신하고 있으니, 모든 일에서 선조를 본받기를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옛 법을 따른다.’는 것처럼 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마치 《서경(書經)》 〈소고(召誥)〉의 ‘백성들을 정성으로 다스린다.’와 ‘하늘에 천명이 길기를 빈다.’는 것처럼 하시면 상제(上帝)께서 돌보아주어 길하기만 하고 불리함이 없어 되어 화기를 맞이하고 아름다운 상서가 아울러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유구하여 무궁한 장수를 누리게 되고 자손이 번성하는 복을 만나게 될 것이며, 온 나라가 장수를 누리게 되고 서민에게 복을 주게 될 것이니, 억만년토록 태평성대를 노래하게 되는 것이 오늘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바가 절실하니, 마음에 새겨두겠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따뜻한 날씨가 이르러 농사일이 멀지 않았고 밭갈이 하는 데는 소가 가장 중한데도 최근에 우금(牛禁)이 효과가 없어서 저자에서 도살이 낭자하게 행해지고 있으니 관가에서 금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혹 푸줏간을 설치하여 세금을 걷어 들이는 곳까지 있습니다. 게다가 우역(牛疫)이 치성하고 있습니다. 외진 촌락에서는 소를 기르는 것이 매우 드물어 묵은 전답의 경작을 거의 폐하고 있으니, 민사(民事)와 크게 관계되는 문제인 만큼 참으로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특별히 서울과 지방에 신칙하여 만약 함부로 범하다가 현장에서 잡히는 자가 있으면 형률대로 중히 다스리고, 해당 수령(守令)도 보고 되는 대로 논감(論勘)할 것입니다. 도하(都下)에서 몰래 도살하는 폐단에 대해서도 각별히 철저히 금하라고 일체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청나라 돈을 혁파한 것은 사실 백성을 위하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와서 각 도에서 상납하는 정월분 외에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청나라 돈으로 추후에 봉상(捧上)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전곡 아문(錢穀衙門)에 감결(甘結)로 신칙하였습니다. 그러나 상납하는 규정에는 본디 월당(月當)이 있으니, 당초에 아전의 무리들이 대부분 민간에서 상평전(常平錢)으로 거두어 놓고는 즉지 다 납부하지 않고 청나라 돈으로 경사(京司)에 바꾸어 바치려고 하였을 것이니, 그 소행을 따져보면 하나하나가 교활하고 악합니다. 지금 청나라 돈을 혁파한 후에 만일 경사(京司)에서 물리쳤다고 하면서 백성들한테 다시 징수한다면 도리어 그 무리에게 모리(牟利)하는 발판을 만들어 주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각 도에 신칙하여 상평전으로 상납하는 즈음에 꼭 해장(該掌)에게 책임 지워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청나라 돈을 통용하는 고을은 구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고을에서 잘 조처하여 반드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양쪽이 다 편리하도록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혹 관리와 아전이 서로 짜고 연줄을 타고서 폐단을 늘어나게 한다면 해당 수령(守令)을 우선 파직한 뒤에 잡아오며 색리(色吏)를 별도로 중히 다스리도록 한다고 먼저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각별히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각 능관(陵官)을 가관(假官)으로 차출하는 것은 아주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근래에는 정해진 말미 외에 무단히 편한 대로하여 심지어 두 능관이 다 비어 있을 때가 많다고 하니, 어찌 근신하면서 재실(齋室)을 지키고 침원(寢園)을 호위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실제 사고가 있는 경우 외에는 감히 망령되게 청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함부로 허락하지도 못하게 하고, 만약 혹시 사적인 일에 구애되어 마음대로 조절하는 경우에는 해당 당상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으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무신(武臣)이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는 것은 문신(文臣)이 경전(經傳)을 지키는 것과 그 규범이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무신이 말을 타는 것은 그 법이 오래되었습니다. 요즘 나이 많은 무장(武將)이 간혹 편여(便輿)를 사용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는 듯 하나, 나이 젊은 아장(亞將)이 아윤(亞尹)을 일단 지내고 나면 거의 다 본받아 항식(恒式)으로 여겨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정묘조(正廟祖) 때는 문관과 무관은 견여(肩輿)를 타고 관아에 나오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금조(禁條)는 예로부터 그러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장신 및 아장(亞將)을 막론하고 관아에 나올 때는 전처럼 편한 대로 할 수 없다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비단 공아에 출근할 때뿐만 아니라 사사로이 다닐 때에도 편한 대로 하지 못하게 해야 하니, 이로써 신칙하라. 무신뿐만 아니라 문신이나 음관(蔭官)이 가마를 타고 관아에 나오는 것도 조정의 체모에 관련되니, 이제부터는 타야 되는 것을 타도록 하라."
하니,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근래에 경재(卿宰)들이 거의 모두 기구(器具)가 없기 때문에 혹 대부분 편리한 대로 관아에 나오고 있으니, 이것을 혹 일체 금지한다면 사세에 또한 민망한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하교하기를,
"이것은 혹 그럴 수도 있겠다. 나이가 많고 병든 사람은 차이를 두어야 하겠지만, 젊은 사람들이 편안한 대로 하는 것은 불가한 듯 하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든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는 것은 경전에 있는 말입니다. 온 나라의 백성들이 우로(雨露)의 은택 속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있으니, 높고 낮은 장리(長吏)들이 한마음으로 봉공(奉公)하면 어찌 미진한 정사가 있겠습니까? 면려하고 더욱 면려한다 해도 아름다운 일이 되는 데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암행어사로 일 잘하는 자를 택하여 각 도로 나누어 보내 한번 염찰(廉察)하는 것은 또한 우리나라의 고사(故事)입니다. 먼저 몇 사람을 가려 뽑아서 혹은 온 도에, 혹은 추첨하여 백성들의 폐막을 묻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이를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것은 본디 응당 행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지금 청나라 돈을 혁파하는 일이 크게 경장(更張)하는 것이니, 먼저 조치하는 방도를 다하고 나서 천천히 의논하여 가려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암행어사를 초계(抄啓)한 다음에 혹은 보내거나 혹은 보내지 않을 수도 있으며, 혹은 초계한 이외의 사람을 보낼 수도 있는데, 먼저 초계하는 것은 외도(外道)에서 조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렇게 하면 징계될 듯하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박규수(朴珪壽)가 아뢰기를,
"올해는 바로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한 구갑(舊甲)입니다. 나라를 세우고 그 사업을 후세에 전하여 우리 후대 임금과 후대 백성들을 열어 보우하신 지 이번 갑술년에 이르러 모두 여덟 번째 회갑입니다. 또한 우리 영조 대왕(英祖大王)께서 태어난 지 구갑으로 세 번째 회갑입니다. 태조 대왕의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은 높고도 넓어 천명(天命)이 길고 유택(流澤)이 흡족하였으며, 영조 대왕께서는 오랫동안 도(道)를 지켜 교화시켜서 50여 년 동안 나라를 누리셨습니다. 융성한 다스림은 삼대(三代)와 짝할 만하였으니, 대체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전수(傳授)해 온 심법(心法)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하늘을 공경하는 실제는 백성들을 위하여 일을 잘 하는 데 달려 있고,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는 요점은 절약하고 검소하게 지내는 데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태조의 어필(御筆)인 숙신 옹주(淑愼翁主)에게 집을 하사한 문건을 받들어 감상하였는데, 초가집 30칸에 지나지 않았으니 참으로 훌륭하신 절약하고 검소한 덕으로 모든 임금보다 참으로 월등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조 대왕은 무늬 있는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지 않았고 연여(輦輿)에는 금이나 은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병인년(1746)과 정사년(1737)에 모두 성교(聖敎)가 있었는데 소박을 급선무로 삼고 백성을 품어 보호하는 것으로 일념을 삼았다. 그리하여 하늘이 도우시어 백성이 늘고 물자가 풍부하였고 다복(多福)과 수고(壽考)와 인재 양성의 복을 향유하시어 지금까지 유택이 사람들의 피부와 골수에 젖어 있으니, 이는 모두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한 교화에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신이 지난번 강연(講筵)에서 일찍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로써 많이 진계(陳戒)하면서 열람하시기를 앙청하였는데, 그 마지막 장에, ‘아득한 옛날 묵묵히 한강 북쪽에 자리 잡고 인(仁)을 쌓아 나라를 여니 연대가 끝이 없네. 자자손손 성자신손(聖子神孫)이 이어지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하여 근로하여 영세(永世)를 더하리라.’ 하였습니다.
이제 새로 도읍을 정한 구갑과 성인께서 탄생하신 밝은 운수가 거듭 돌아온 때를 당하였으니, 하늘이 주신 아름다움을 대양(對揚)할 날에 창업(創業)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절약하고 검소하게 지내던 성대한 덕을 계승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하여 일하는 실제로써 영세(永世)를 더하는 효과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소민을 정성으로 다스려 천명(天命)이 길기를 빈다는 것이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니 마음 속에 새겨두겠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영의정이 지난번에 절약하고 검소하게 지낼 것에 대하여 누누이 권면(勸勉)하였는데, 요즘 사치하는 풍속이 내가 검소함을 숭상하지 않는 데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인가? 의복은 귀천(貴賤)을 나타내는 것인데, 지금은 천한 사람들이 입는 옷도 거의 질서가 없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문장(文章)을 만들어 귀천을 나타냈는데, 땅에서 나는 것을 가지고 옷을 해 입는 것에 어찌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기어코 무늬 있는 비단 등속을 가지고 다투어 서로 사치하고 있으니, 그 풍속이 참으로 지나칩니다. 오직 위에서 어떻게 이끄는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청나라 돈을 통용한 것은 대체로 한때의 임시변통에서 나온 것이지만, 7, 8년 이래로 흘러나온 것이 많은 상황에서 돈은 천해지고 물건은 귀해지는 현상이 자연히 날로 심해져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이건 모두 곤란하여 민심이 황급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감히 갑자기 폐지할 것을 의논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서울과 지방의 공화(公貨)가 모두 청나라 돈으로 쌓여 있어서 일단 혁파한 후에 보충할 대책이 없고,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 단호하게 용단을 내려 내탕고(內帑庫)에 쌓인 것이 어떻게 되든 관계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혁파해 버렸습니다. 명을 들은 날에 부녀자와 노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우레 같은 환성을 질렀으니, 이것은 참으로 지난 역사에서는 보기 드문 성대한 조치입니다. 그러나 공화는 끝내 쓸 밑천이 없고 백성들의 재물은 유통되는 이로움을 보지 못하게 되니, 이것이 눈앞에 닥친 절급한 근심입니다. 민간의 재화의 통로가 막힘이 없는 다음에야 관청에서 쓸 비용이 점차 열려 수송되는 길이 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재화의 통로가 유통되게 하고자 한다면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서 물화의 출입을 혹 구속하거나 값의 고하를 조종하게 되면 백성들이 이해관계를 따져서 점차 의구심을 품게 되어 교역하는 길이 이로부터 순조롭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한바 부디 소요하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경조(京兆)의 오부(五部)를 신칙하여 혹시라도 교역하는 즈음에 물가를 규찰하거나 조종 하지 말게 하고, 형조와 포도청(捕盜廳)에서 저자의 매매를 간섭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본디 직장(職掌)이 아닌 만큼 다시는 월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아울러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물건값의 높고 낮음을 지정해 주어서는 안 된다. 백성들에게 맡겨두면 자연히 유통될 것이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물건값의 조종은 행할 수 없는 정사입니다."
하고, 박규수가 아뢰기를,
"돈과 물건은 경중과 귀천이 반드시 균형을 이룬 뒤에야 백성과 나라에 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청나라 돈의 폐단이 최근에 와서 극심하게 된 데에는 그 까닭이 있습니다. 갑자년(1864) 이전에는 부유한 백성이 돈을 주조하여 관가에 세금을 바치도록 허락하여 사사로이 잘못 공사(公私)가 다 이롭다고 일컬었는데, 함부로 만들어 질 나쁜 돈이 나라 안에 가득 차서 물건값이 뛰어올랐으나 주전로를 설치한 백성들은 이때를 이용하여 이득을 보았습니다. 근일에 와서는 이 무리들이 돈을 주조한 뒤에야 공사가 다 이롭다는 말을 만들어 주고받으면서 백성들을 선동하고 현혹시켜 서로 전파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법령이 있기도 전에 모두 청나라 돈은 반드시 혁파될 것이라고 말하였고 이 때문에 모든 물건이 유통되지 않아 교역(交易)이 마침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청나라 돈이 혁파된 지금에 와서 이 무리들은 계책을 실현할 수 있다고 여겨 기어코 돈을 주조하여 개인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하여 소문을 계속 퍼뜨려 시끄럽게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을 어지럽히고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으로써 반드시 죽여 용서할 수 없는 무리들인 것입니다. 만일 경솔하게 이 조치를 취한다면 나라와 백성들에게 폐해가 됨이 반드시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엄하게 제방(隄防)을 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조에 분부하여 만약 돈을 주조해야 한다는 말을 떠벌여 민심을 현혹시키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을 게시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사기(史記)》를 보건대, 돈을 주조할 때에는 물건값이 언제나 대부분 뛰어올랐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생산되는 물건은 한정이 있고 돈이 나오는 것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잡된 말을 위에서 해당 법령이 없다고 해서 아래에서 감히 멋대로 헤아려 한단 말인가? 경조에 분부하여 엄하게 징계하라."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이번에 폐지한 청나라 돈은 바로 하나의 쓸모없는 물건입니다. 간간이 분쇄(粉碎)하여 녹여서 집물을 만드는 등 본래 자연에 맡겨야 하는데, 관고(官庫)에 쌓여 있는 것에 이르러서는 만일 조금이라도 변통할 길이 있다면 시험해 보는 것도 무방합니다. 매번 연사(年使)나 별사(別使)의 행차에 드는 여비와 잡비로 서울과 지방에서 제급(除給)하는 것이 그 수량이 적지 않으며, 은화(銀貨)로 환작(換作)하는 것도 또한 많습니다. 이제 만약 청나라 돈으로 제급하여 북경으로 들어가는 비용으로 삼으면 저들 돈은 본고장으로 돌아가 해마다 줄어들 것이오, 우리 돈은 그대로 관고(官庫)에 있게 되어 해마다 남게 될 것이니, 이것은 시험해볼 만한 일입니다. 다만 돈과 은의 절가(折價)가 어떠하며, 운반하는데 소모되는 비용이 어떠한지는 의주와 책문의 사정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림짐작으로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영상(領相)이 지금 사역원 도제거(司譯院都提擧)의 직함을 띠고 있는 만큼 일을 잘 알고 있는 역원(譯員)에게 가부를 널리 문의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영상과 상의하여 조치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저들 땅으로 말하면 은을 가지고 돈을 바꾸기는 쉽지만 돈을 가지고 은을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저들 땅으로 멀리 내보내자는 논의는 적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순조롭고 편리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들 땅으로 수송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그것이 나올 때 이미 관유(關由)가 없으니, 지금 어떻게 몰래 가지고 들어가서 잠상(潛商)의 길을 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신이 갈 때 여비로 주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순전히 청나라 돈으로 주면 목전의 준비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저들 땅에서 공적으로 쓰는 은가(銀價)로 1만 냥을 지급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지금 경사(京司)에 있는 청나라 돈이 못 되도 300만 냥은 되니 비록 해마다 지급 하더라도 어느 세월에 끝이 나겠습니까? 설혹 이것을 가지고 가더라도 이곳에 쓰지 않는 물건을 저들 땅에선들 어찌 안심하고 받아서 은화(銀貨)로 바꾸어 줄 리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이번의 혁파는 대성인(大聖人)의 크고 광명한 정사에서 나온 것으로써 억만 백성들이 모두 기뻐서 춤을 추고 있는데, 이제 어찌 사소한 이해 때문에 종전대로 쌓아두고 해마다 풀어써서 백성들로 하여금 국법(國法)을 엿보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계속해서 이렇게 한다면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자연히 다시 변통해야 할 우려가 있게 될 것인데 이것을 어찌 상세히 의논하여 조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결단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있는 청나라 돈을 어떻게 조처해야겠는가?"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만약 이렇게 될까 걱정된다면 전부 녹여서 덩어리로 만들어 쌓아두었다가 수용(需用)을 기다리는 것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몽땅 녹여도 되겠는가?"
하자, 이유원이 아뢰기를,
"창고의 돈도 공화(公貨)인 만큼 아래에서 마음대로 청하기는 어렵습니다. 오직 어떻게 처분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장부(掌簿)의 책임진 신하와 충분히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호조(戶曹), 선혜청(宣惠廳)과 각사(各司), 각영(各營)에 선별해 둔 우리 돈의 수량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호조에 800냥 있다는 것을 신이 들어서 알고 있으나, 이외의 것은 듣지 못하여 아직 모릅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세균(金世均)이 아뢰기를,
"호조에 지금 있는 것 가운데서 상평전은 따로 둔 것이 없습니다. 경복궁 안에 기와를 덮는 공사는 지금 당분간 정지하였으나 각 능(陵)과 원(園)의 제관(祭官)의 노자와 어보(御寶)를 자지(慈旨)로 문안패(問安牌)를 다시 만드는 일에 동원된 공장(工匠)에게 지급할 것은 모두 지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 먼저 받아둔 지 좀 오래된 것 중에서 1만 1,500냥을 선별하고 나니, 남은 상평전은 800여 냥에 불과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급대(給代)해야 하는데 무슨 방법으로 급대하겠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경비가 너무나 염려스럽습니다. 호조에서는 날마다 소비되는 비용도 이어댈 길이 없으며, 각사(各司)와 각영(各營)에 대해서 말하면 날마다 떼 줄 것을 청하지만 신은 조처할 대책이 없으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쓰고 있는 상평전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것은 호조 당상과 선혜청 당상이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1,000만 냥은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에 대부분 소비해 버렸습니다."
하고, 김세균이 아뢰기를,
"처음에 주조한 돈의 숫자는 설혹 상고할 만한 자취가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뒤라 쓰고 있는 숫자를 지적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청나라 돈을 조처하는 방도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연석(筵席)에서 물러간 뒤에 영상(領相)과 우상(右相)이 재부(財賦)를 맡은 신하와 함께 좋은 쪽으로 충분히 의논해서 초기(草記)하여 품달하라."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몇 해 전에 관서 지방(關西地方)에 결두전(結頭錢)과 원납전(願納錢)을 가지고 작환(作還)한 자가 있었다. 청나라 돈을 혁파한 이때에 환곡의 폐단 때문만이 아니라 경상비용도 매우 어렵다. 묘당에서 관서에 행회(行會)하여 발본(拔本)해 올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우의정이 일찍이 평안 감사를 지냈으니 자세히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박규수가 아뢰기를,
"이것은 신이 재임할 때의 일이 아닙니다. 신이 임신년(1872) 겨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그때의 감사(監司) 남정순(南廷順)을 만났는데, 바야흐로 60만 냥으로 20만 섬을 작환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돈으로 분급(分給)한 것이었으니, 본전을 민결(民結)에 남겨두고 단지 모작전(耗作錢)만 취하여 상납(上納)할 작정이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김세균이 아뢰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호조의 수용(需用)을 꾸려나갈 수가 없는데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염려해 주시니 참으로 흠앙해 마지않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호조에서 한 해에 받아들이는 돈이 5, 6십만 냥에 지나지 않지만 응당 내려주어야 할 것은 무려 40만 6,000여 냥이나 되며, 그밖에 비상 지출이 얼마인지 예측할 수 없으니 경비가 매양 궁색할까 걱정하게 됩니다. 재작년 겨울에 정부에 보고하여 대신이 연석에서 여쭈고 행회하여 이 계유년(1873)의 별비환(別備還) 20만 섬을 만들었는데, 듣자니 전결(錢結)하여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올해 가을부터 시작하여 장차 이자를 취해 올려 보내면 해마다 6만 냥은 보충해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만약 발본하게 되면 눈앞의 일은 매우 다행스럽겠지만 앞으로의 경상비용은 참으로 염려됩니다. 관서의 상납분 가운데 오랫동안 거두지 못한 것을 이미 관문(關文)을 띄워 재촉한 것이 6만 4,000여 냥이니, 이것을 합하면 66만여 냥이 됩니다. 이것을 일시에 다 독촉한다면 이것은 영남과 관북과 같이 이미 상평전을 쓰고 있는 곳과는 차이가 있는 만큼, 신속하게 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이것도 또 걱정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관서의 곡식 총량을 보니, 이 환곡은 미처 기록에 넣지 않았다."
하니, 김세균이 아뢰기를,
"이 환곡은 이자를 불린 후에 곡부(穀簿)에 기록합니다. 그래서 작년에는 미처 기록에 넣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관서 지방의 환곡 폐단은 해가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크게 백성들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을축년(1865)에 도신 홍우길(洪祐吉)이 크게 경장(更張)하여 일체 포흠(逋欠)을 탕감(蕩減)하고 환곡을 파하고 결(結)마다 1냥씩 배분하여 모작(耗作)으로 만들어 급대하여 상납(上納)하게 하였는데, 1호(戶)마다 4두(斗)씩을 배분하여 감영(監營)과 고을의 지방(支放)에 쓰도록 이용하였는데, 성향(城餉)은 10만 석 외에 더는 저축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경사(京司)에서는 옛날 규례대로 곡부를 마감하고 있으니 비록 옛날 법을 중히 여긴 것이다 하더라도 그 실제는 빈 문서입니다. 이번에 입람(入覽)하신 곡식 총 대장에는 과연 1포(包)의 실제 곡식도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나는 곡식이 있는 줄로 알았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는 몇 해 전에 환곡을 탕감해 토지 결수에 돌린 것입니다. 호조 판서의 말은 호조의 사세를 위한 것입니다만, 목전의 조치가 너무도 시급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돌아보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즉시 관문으로 신칙하여 될수록 빨리 수납(收納)하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관서는 관북과 가까우니 상평전을 통행하는 방도가 도하(都下)보다 나을 것 같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비단 멀리 관서나 관북에 미쳐서만이 아니라 서울에서 가까운 교외만 하더라도 상평전을 통행하는 것이 도성 안보다 낫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잘 절약해 쓰면 경비가 충족될 것이다. 지금 경비가 한시 급하니 속히 관문을 보내야 한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물러가서 응당 관문을 보내겠습니다만, 호조에서도 관문을 보내 신칙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신과 재부 신하는 연석에서 물러난 뒤에 각사(各司)에 남아 있는 청나라 돈의 수효를 상세히 써서 들이라."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삼가 써서 들이기는 하겠지만 3, 4백만 냥은 밑돌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한경원(韓敬源)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장석룡(張錫龍)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홍만식(洪萬植), 김명진(金明鎭), 유진학(兪鎭學), 조우희(趙宇熙), 서정순(徐正淳), 유석(柳), 이건창(李建昌), 홍건식(洪健植), 장원상(張原相), 강찬(姜籫), 박용대(朴容大), 윤조영(尹祖榮)을 암행어사로 초계(抄啓)하였다.
1월 14일 무인
조기응(趙基應)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인장을 고쳐 만들 때의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전 무겸(武兼) 김노수(金魯壽)가 상소하여 첫째는 만동묘(萬東廟)를 다시 설치할 것과 둘째는 동포(洞布)를 균등하게 분배할 것을 진달하고, 말미에 최익현(崔益鉉)을 바로잡아 구제해 줄 것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논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1월 15일 기묘
조병휘(趙秉徽)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원명(李源命)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임상준(任商準)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1월 16일 경진
본관록(本館錄)001) 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임상호(任尙鎬), 김용규(金容圭), 정원화(鄭元和), 유종식(柳宗植), 김학진(金鶴鎭), 서정순(徐正淳), 이근명(李根命), 유진학(兪鎭學), 조병필(趙秉弼), 윤조영(尹祖榮)이다.
1월 17일 신사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를 행하였다. 입시(入侍)할 때에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에게 하교하기를,
"청나라 돈을 혁파(革罷)한 후에 각영(各營)과 각사(各司)에 있는 청나라 돈을 각각 그 사(司)로 하여금 묘당(廟堂)에 의논하여 될수록 빨리 조처하도록 하라."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각 영과 각 사에서 우선 조처할 방도를 모르고 있으니, 매우 답답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교를 받들었으니 마땅히 신칙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영남(嶺南)의 결두전(結頭錢)을 작환(作還)한 것은 묘당에서 관문으로 신칙하여 될수록 빨리 작전(作錢)하여 상납하게 해야 한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호조(戶曹)의 경비와 각 영의 봉족(奉足)과 공인(貢人)이 수가(受價)를 지급할 수가 없으니, 이 때문에 도하(都下)의 전정(錢政)이 유통될 길이 없습니다. 지금의 사세로는 변통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영남의 곡부를 성책(成冊)한 데에서 그 수효를 보았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삼가 정부와 호조의 문서를 상고해 보고 관문을 보내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호조의 일상 비용을 과연 잇기가 어렵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교한 것이다. 이밖에 달리 있는 것은 있는가, 없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영남의 병인년(1866) 별비환(別備還)은 위에서도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자, 하교하기를,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조(東朝)의 하교를 받들어 시행한 것이므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는 그렇다 하더라도 사창(社倉)의 환곡은 작전(作錢)할 수 있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사창이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는데, 병인년(1866) 별비환이 그 가운데 뒤섞여 들어가 있어 이것도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자, 하교하기를,
"손을 댈 만한 것은 손을 대야 한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이 손을 댈 만한 것을 뽑아서 별단(別單)에 써서 들여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자, 하교하기를,
"과연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동조께서도 들여다 보실 것이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듣건대, 관북(關北)에도 새로 작환(作還)한 것이 있다고 하니, 일체 관문을 보내 신칙하라."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이 탐지했더니 과연 어떤 모양으로 작환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명목과 수효가 우선 명확치 않으니 다시 상세히 탐지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체 작전해야 한다. 이른바 별환(別還)은 설치한 본의가 백성과 나라를 위한 것이었는데, 도리어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다. 동환(洞還) 외의 별환(別還)을 작전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 없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환곡은 수재(水災)나 한재(旱災) 등 뜻밖의 일에 대처하기 위한 것인데, 모두 작전한다면 장구한 계책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환곡을 설시한 본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도리어 간사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한갓 종이쪽지의 공문(空文)만 있을 뿐이고 곡식은 없기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이 여러 번 방백(方伯)을 지냈기 때문에 환곡의 폐단을 익숙히 알고 있으나 사실 배제할 대책이 없습니다. 우상이 오늘 연석에 나오지 않았는데, 신이 물러가 상의하겠으며, 또한 원임 대신에게 문의한 다음 별단에 써서 들여 성상의 재결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자, 하교하기를,
"그대로 하라. 별단을 빨리 써서 들이라."
하였다.
검교 직제학(檢校直提學) 김보현(金輔鉉)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일성록(日省錄)》과 《윤발(綸綍)》가운데 불에 탄 것이 많으니, 다시 베껴 내야 한다."
하니, 김보현이 아뢰기를,
"물러간 다음 시임 각신(時任閣臣)과 함께 상의한 뒤에 품정(稟定)하겠습니다."
하였다.
1월 18일 임오
의정부(議政府)에서 ‘영남(嶺南) 소재의 각 아문(衙門)에 있는 곡식 수량을 뽑아내어 별단(別單)에 써서 들입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자전(慈殿)의 분부를 받들었다. 병인년(1866)과 정묘년(1867)에 따로 마련한 사창(社倉)의 환곡(還穀) 가운데 5만 석을 작전(作錢)하여 올려 보내라고 묘당(廟堂)에서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1월 19일 계미
《신부(信符)》와 《한부(漢符)》를 갑술년(1874)부터 시작하되 진상(進上)과 반급(頒給)은 옛 규례를 회복하여 행하라고 명하였다.
김대근(金大根)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민규호(閔奎鎬)를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으로, 이경하(李景夏)를 훈련대장(訓鍊大將)으로, 조영하(趙寧夏)를 금위대장(禁衛大將)으로, 이동현(李東鉉)을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광주 유수(廣州留守) 이우(李㘾)의 장계(狀啓)를 보니, ‘청나라 돈을 폐지한 후에 각종의 처리하지 못한 것이 모두 4만 5,300냥입니다. 지금 경비가 몹시 곤란한 때에 억지로 급대(給代)해 줄 것을 청하는 것은 성실한 도리가 아니니, 선혜청(宣惠廳)과 호조(戶曹)에 저축해 둔 청나라 돈 가운데 8만 냥으로 한정하여 획하(劃下)하여 주시면 영에서 무슨 조치를 취해서든지 해결할 수 있게 할 일에 대하여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버리다시피 한 물건을 유용한 데 쓰자는 것은 일정한 견해가 있는 것 같으니, 거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계(狀啓)에서 청한 대로 선혜청에 있는 청나라 돈 가운데서 그 숫자에 맞춰 획하함으로써 군사비용에 보태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20일 갑신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환곡(還穀)을 작전(作錢)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이미 공문을 발송하였는데, 관북(關北)의 환곡은 또한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문서를 상고하여 보니, 관북의 환전(還錢)이 11만 냥이고 관서(關西), 영남(嶺南)에서 작전한 것까지 모두 계산하면 130만 냥 정도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경비가 부족하여 과연 어쩔 도리가 없어 부득이 이런 처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단지 결두전(結頭錢)만 지적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묘당(廟堂)에서 잘 토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정부에서 따로 보관하고 있는 돈이 거의 10만 냥에 가까우니, 지금 당장은 급대(給代)하기 어렵지만 뒷날에 가서 돈이 넉넉하게 되면 다시 보충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각사(各司)에 있는 별단(別單)으로 보고한 청나라 돈으로 말하면 지금 경비로 써야 할 돈입니다. 지금 쓰지 못하게 되었지만 급대하는 경우에는 용도의 긴급 여부를 보고 구별하면 줄일 수량이 있을 것 같으며 급한 고비를 넘기는 데에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상평전(常平錢)이 들어온 양을 보니, 100만 냥이나 된다. 그런데 별단에 있는 청나라 돈 200만 냥은 처리할 방도가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나라에는 경비로 쓸 것이 없고 또 민간에서 걷어 들일 수도 없으니, 환곡을 작전하는 외에도 다른 도리가 없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전에도 나라의 비용이 매우 곤란하였을 때에는 이런 사례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곡식 장부가 텅 비어서 손쓸 대책이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환곡에 대한 탕감(蕩減)은 바로잡아 놓은 다음에도 있었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호조(戶曹)의 경비가 매우 군색하니 경복궁(景福宮) 공사는 당분간 그만둘 것이다. 시어소(時御所)도 수리할 곳이 많지만 사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나라에 3년분의 저축이 있어도 오히려 방도가 없을 것인데, 눈앞의 비용도 정말 해결할 대책이 없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청나라 돈을 처리하는 방도로 말하면, 지금은 버린 물건이 되었지만 필경 다 쓸 데가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광주 유수(廣州留守)가 장계(狀啓)로 청한 것으로 보더라도 몽땅 쓰지 못할 리는 만무합니다. 이미 무용지물이니, 혹은 녹여서 그릇을 만들 수도 있고 혹은 녹여서 양을 계산하여 군수용으로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황해도 수사(黃海道水使) 윤협(尹𣇍)을 잉임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계청(啓請)하였기 때문이다.
1월 21일 을유
삼군부(三軍府)에서, ‘상주목(尙州牧)에는 포수(砲手) 100명, 별포 창검 효사(別砲槍劍驍士) 50명, 별기수군(別旗手軍) 50명, 별포진(別砲陣) 100명, 별군관(別軍官) 100명을 설치하여 합계 400명을, 청산진(靑山鎭)에는 포군(砲軍) 50명, 무사(武士) 100명, 별포사(別砲士) 30명을 설치하여 합계 180명을, 황해도 수영(黃海道水營)에는 포군 40명, 별료사(別料士) 15명을 설치하여 합계 55명을 설치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월 23일 정해
함경 감사(咸鏡監司) 서당보(徐堂輔),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성교(趙性敎), 진무사(鎭撫使) 신헌(申櫶), 통제사(統制使) 이주철(李周喆)을 소견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규장각(奎章閣)에서 아뢰기를,
"《윤발(綸綍)》과 《일성록(日省錄)》을 수정하고 보충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권수를 가져다가 상고하여 보니, 《윤발》이 35권이고 《일성록》이 자그마치 493권이나 되었습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각사(各司)의 문서들에서 뽑아내어 베껴서 책으로 묶어야 하겠는데, 기록을 읽으면서 써내는 일은 매우 방대하고 규장각 검서관(奎章閣檢書官)의 수는 적으니 완료하여 마감하기가 어렵습니다. 전 검서관 가운데 실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본사(本仕)를 면제하여 아울러 군함(軍銜)을 띠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도록 해 주소서. 서사리(書寫吏) 역시 인원수가 적으니 본각의 대령 및 해원의 사자관(寫字官), 각 사의 글씨를 잘 쓰는 서리(書吏)를 뽑아서 일을 시키도록 하소서. 여기에 드는 종이와 물자는 본각에서는 마련할 도리가 없으니, 호조에서 진배(進排)하도록 해 주소서. 편성하는 대로 신들이 분담해서 원본과 상고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병휘(趙秉徽)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월 24일 무자
이경우(李景宇)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재현(金在顯)의 보고를 보니, ‘청나라 돈을 폐지한 다음 본 감영에 실제로 있는 돈이 3만 4,400여 냥이나 되지만, 감히 억지로 급대(給代)를 청할 수 없고 또 달리 변통할 길이 없으니, 지출할 때 시급한데도 전혀 조치할 수가 없습니다.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 있는 청나라 돈 가운데 10만 냥만 특별히 획하(劃下)하여 동철가(銅鐵價)로 시가에 따라 팔아서 경비에 보충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본 감영의 지출이 원래 모자라며 또 변통하는 때를 당하여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청나라 돈을 획하해 달라는 청은 이미 규례도 있으니, 선혜청에 있는 것 중에서 5만 냥과 호조에서 가지고 있는 중에서 3만 냥으로 특별히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부호군(副護軍) 김규섭(金奎燮)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첫째는 사람을 선발하여 벼슬을 주며, 둘째는 《사략(史略)》을 갖추어 두고 보며, 셋째는 벼슬을 중하게 여기고 재물을 절약하며, 넷째는 수령(守令)에 대해서 승급과 강직을 엄하고 명백하게 하며, 다섯째는 환곡(還穀)을 바로잡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말이 매우 좋으니, 유념하겠다."
하였다.
1월 25일 기축
대신들을 인견(引見)할 때 하교하기를,
"외도(外道)의 작전(作錢) 가운데 혹 바친 데가 있는가?"
하니,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평안 감영(平安監營)에서 올라온 도부장(到付狀)이 있는데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면서 바치는 대로 올려 보내라고 하였으니, 내달 초부터는 차례로 상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조속히 올라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2월부터 4월까지 석 달 동안에 공가(貢價)로 지불해야 할 것이 거의 10만 냥이나 되고, 병조(兵曹)에서 한 달에 지불해야 할 것도 1만 3, 4천 냥이 됩니다. 각 영의 봉족(奉足)은 4월에만 있는데 매달 지불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닙니다. 현재 서둘러야 할 급대(給代)는 대략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각 사에서 가지고 있는 청나라 돈에 대한 별단(別單) 가운데 다시 그 긴급 여부를 구별해서 부표(付標)하거나 주(註)를 달아서 성상께서 열람하시는 데에 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의정부(議政府)에 따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면 의정부에서 저축한 것은 아닙니다. 각 그 사(司)에서 해마다 따로 보관해 두었다가 나라에 큰 일이 있게 되면 의정부에서 조치하여 들여다 쓰는 것입니다.
형편이 완화되기를 기다려 보충하면 될 것인데 각 사에는 모두 봉부동(封不動)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상 수요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저축하지 않고 위급한 고비를 메우려고 한다면 진실로 나라의 재정에는 부족함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것은 사실 급할 때에 쓸 것인데 아직도 보충하지 못하였으니 답답하다. 어제 경기 감영(京畿監營)에서도 청나라 돈을 청해서 가져갔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런 것을 아뢰기는 참으로 외람될 듯합니다만, 이 돈을 녹여서 구리그릇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광주와 경기 감영에서 요청하여 얻어간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렇게 청해서 가져가면 청나라 돈을 처리하기가 쉬워 쌓아두는 것보다 나을 듯하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요구해 갈 곳이 많지 못할 것 같은데 청나라 돈은 전부 버릴 물건이 아니니, 각기 그 사에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계속해서 이유원이 아뢰기를,
"청나라 돈을 폐지한 지 이제 겨우 보름에 불과하지만 민간에서는 예전과 같으니, 이는 혜택이 미친 것으로 민심도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다만 나라의 비용이 궁색해서 시급한 수용을 해결하기 매우 곤란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배분할 만한 곳을 구급(救急)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월 27일 신묘
격포진(格浦鎭)의 조창(漕倉)에서 받은 조세미(租稅米)를 배로 운반할 일을 위도(蝟島)와 고군산(古群山) 두 진장(鎭將)이 돌려가며 책임지고 실어 나르게 하라고 명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장계(狀啓)로 청함으로 인하여 묘당(廟堂)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1월 28일 임진
의주 부윤(義州府尹) 황종현(黃鍾顯)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의주부(義州府)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므로 다른 곳과는 다르니, 특별히 엄하게 단속하여 몰래 국경(國境)을 넘어가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니, 황종현이 아뢰기를,
"신이 영의정(領議政)을 만나 삼가 지난날 연석(筵席)의 하교를 들었습니다. 요즘 변경의 정세가 어지러워 몰래 월경(越境)하는 폐단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내려간 다음에는 엄하게 금지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전번에 영의정을 만나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번 강조하였는데, 요즘 듣건대 몰래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이 아주 많다고 하니, 변경에 대한 정사가 답답하다."
하니, 황종현이 아뢰기를,
"만일 몰래 국경을 넘다가 발각되는 자가 있으면 경중에 따라 처벌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만일 죄가 용서할 수 없는 자가 있으면 먼저 목을 자르고 후에 보고해도 안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설사 저쪽 사람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자가 있으면 국경에서 목을 매달아 정신을 차리게 하도록 하는 것은 두 나라의 조약(條約)이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과연 조약이 있다. 이것을 준수하면 변경 정사는 문제없을 것이다."
하니, 황종현이 아뢰기를,
"몰래 국경을 넘는 길은 압록강(鴨綠江)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 연안을 따라가며 상하에 몰래 건너가는 곳이 많아서 사실 하나하나 다 살피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이 여러 전임 신하들한테서 들었고 영의정도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영의정은 그 전에 의주 부윤을 지냈기 때문에 변경 정세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다. 몰래 국경을 넘는 폐단은 특별히 엄하게 금지해야 할 것이다."
하니, 황종현이 아뢰기를,
"잠상(潛商)하는 폐단은 그 전에도 있었지만 이처럼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물건으로 물건을 바꾸어 매매할 때에는 불편했기 때문에 꺼리는 것이 있어서 감히 문란하게는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 돈을 통용한 후로는 잠상하는 사람들이 물건을 팔고 돈을 받아 편리하게 쓸 수 있기 때문에 잠상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서 금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청나라 돈을 폐지해 버렸으니 이런 폐단이 좀 줄어들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저들의 돈을 이제는 쓰지 않으니, 이러한 폐단도 따라서 조금 줄어들 것이다."
하니, 황종현이 아뢰기를,
"그럴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중국의 규율이 요즘에 와서 자못 해이되어 압록강 이북의 공한지(空閒地)에 많은 백성들이 살고 있으며 밥 짓는 연기가 바라다 보인다고 한다."
하니, 황종현이 아뢰기를,
"두 나라의 접경지대에 공한지를 둔 것은 원래 목적이 있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골짜기마다 마을이 생겼다고 하니 변경의 근심거리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마땅히 금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저쪽 사람들 가운데도 잠상하러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니, 황종현이 아뢰기를,
"만일 우리나라 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맞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매우 엄하게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중국의 물건이 들어올 때 이단(異端)의 책까지 들어오고 있는데, 변경의 관문에서 엄하게 단속하면 이 폐단은 제풀에 근절될 것이다."
하니, 황종현이 아뢰기를,
"변경에 대한 금령이 해이되어 점점 늘어나는 폐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간사한 행위의 구멍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책문(柵門)으로 통하는 길을 제외하고도 바다에서 서로 교역하는 것도 몇 곳인지 알 수 없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의주에서부터 들어오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라. 세 사신의 짐은 별로 염려할 것이 없으나 임역(任譯)들은 잘 단속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폐단을 막는 데에 장애가 없게 되니, 엄격히 금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1월 29일 계사
대신들을 인견(引見)할 때 하교하기를,
"결렴(結斂)이 크게 민폐가 되고 있다. 이미 바친 것을 이제 상평전(常平錢)으로 다시 바치게 하려고 한다면 더욱 민폐가 될 것이니, 특별히 청나라 돈으로 다시 바치게 하며 바치지 못한 것은 탕감하라는 뜻으로 전교하려 한다."
하니,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이것은 참으로 백성들에게 혜택이 되는데, 원래 바치는 것 외에 수량을 늘려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 매우 곤란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폐단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왜 탕감(蕩減)하지 않겠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청나라 돈으로 다시 받는 것은 그 혜택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과연 방해되는 곳이 있기에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결렴이 민폐가 되지 않은 때가 없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탕감해 주시니, 크게 은혜로운 정사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라의 비용에 군색한 점이 많으니, 이것이 답답한 노릇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만일 백성들에게 편리하다면 설사 나라의 비용에 손실이 있더라도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 다만 백성들에게 이롭기만 하면 그만이다. 세 도에서 작전(作錢)한 것은 언제 올라오게 되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관서(關西)의 공문을 다시 보니, 바치는 대로 올려 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는 감영(監營)에 부임한 지 좀 오래되었으나 경상 감사(慶尙監司)와 함경 감사(咸鏡監司)는 이제야 부임하였으니, 즉시 거행하라고 전교를 내어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런 전교를 내면 세 도의 감사들은 더욱 감독하여 신칙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렇게 되면 곧바로 올려올 것 같은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이번에 청나라 돈을 급대(給代)한 방도를 특별히 전하의 처분을 입어 이와 같이 조치를 내리게 되니,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별단(別單)을 방금 수정하여 성상께서 열람할 수 있도록 갖추었는데, 200여 만 냥의 수량을 100만 냥으로 급대하는 것은 사실 적당하지 않습니다. 정월부터 4월까지 각 사에서 지불한 것과 다른 비용을 계산해서 분배해 주면 호조(戶曹)에 급대한 것이 가장 많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호조의 것이 얼마나 되는가?"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호조에 준 것이 거의 60만 냥이 되지만 시어소(時御所)의 수리와 《일성록(日省錄)》을 수정 보충하는 조목도 다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외도(外道)에 도고(都賈) 명색이 많다고 하는데, 이것을 엄격히 금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묘당(廟堂)에서 늘 금지하도록 강조하고 있지만 요즘에는 과연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듣자니 최근에도 있다고 한다. 외도의 물건이 이 때문에 올라오지 못하여 수도의 물가(物價)가 뛰어오르고 있으니 대단히 고약한 일이다. 도매 명색을 일체 엄금해야 할 것이다."
하니, 이유원 아뢰기를,
"삼가 내린 하교대로 각도에 공문을 내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전라도(全羅道)와 충청도(忠淸道)의 산골 고을의 전세(田稅)를 백성들에게서 돈으로 거두었다가 조창(漕倉)을 열 때에 맞추어 쌀로 바꾸어 조선(漕船)에 바치는 경우가 혹 있다고 한다. 지난 가을에 이미 청나라 돈으로 받았는데, 지금 폐지한 후이니 형편으로 보아 상평전으로 바꾸어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첫 운반이 멀지 않았으니 궁벽한 마을의 가난한 백성들이 무슨 수로 갑자기 마련하겠는가? 아무래도 엄하게 독촉하여 마치 죄수를 몰아대는 듯한 지경에 이를 것이니, 백성들의 정상이 정말 걱정된다. 묘당에서 해당 관청에 통지하여 백성들을 숨 돌리게 하고 혹 가을에 대동미(大同米)로 바치게 하면 어떻겠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전라도와 충청도의 전세에 대해서는 어느 고을과 곡식 수량이 얼마나 되는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산골 고을들에서 매번 돈과 무명을 절반씩 섞어서 바쳤는데 만약 가을 대동미로 전부 기한을 미룬다면 경비가 말이 아니라는 걱정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창 별저미(京倉別儲米)가 15만 석은 될 것이니 한 해 동안은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하교하려는 것이다. 영남(嶺南)에서는 본래 상평전을 사용하였으니 이런 걱정은 없을 것 같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경창(京倉)의 쌀이 얼마인지 모르긴 하겠으나 지출에 충분하다면 백성들을 위하는 입장에서 이런 처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을 대동미로 받는 법은 흉년이 들 때에나 간혹 있는 만큼 매번 변통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물러가서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 자세히 물어서 편리 여부를 알아낸 뒤에 다시 앙품하겠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관서(關西)와 관북(關北), 영남(嶺南)에서 환곡(還穀)을 작전(作錢)하도록 이미 하교가 있었다. 나라를 위한 도리에 있어서 해도의 도신들이 반드시 온갖 정성을 다해서 왕명을 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비용이 한때가 급하니, 묘당(廟堂)에서 다시 세 도에 특별히 신칙하여 기한을 정해 놓고 받아들이도록 삼현령(三懸鈴)으로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결렴(結斂)은 원래 정상적인 법이 아니기 때문에 지난번에 처분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청나라 돈을 폐지한 후에 애로 되는 것을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묘당에서 해조에 분부하여 퇴짜를 당한 공물 명세서의 물건은 특별히 바치게 하고, 외도(外道)에서 이미 거두었으나 아직 바치지 못한 것은 해읍(該邑)에 머물려 두고, 아직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은 아울러 다 탕감하도록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함으로써 내가 지극히 근심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규장각(奎章閣)에서 상아패(象牙牌)를 쓰지 말도록 몇 해 전에 규정으로 정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규장각을 설치할 때 이미 있었던 규례를 그냥 폐지할 수는 없다. 이제부터는 다시 상아패를 사용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규장각에서 상아패를 사용하는 문제와 교서(敎書)를 전달하는 것은 종전 규례대로 하라."
하였다.
1월 30일 갑오
경각사(京各司)와 각 영에서 계유년(1873)의 회계부(會計簿)를 올렸다. 【호조(戶曹), 양향청(糧餉廳), 선혜청(宣惠廳), 병조(兵曹), 훈련 도감(訓鍊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총융청(總戎廳)에 현재 있는
황금(黃金)은 151냥(兩) 1전(錢) 1분(分),
은은 15만 4,933냥 7전 6분 남짓,
전은 163만 5,498냥 3전 9분,
명주는 87동(同) 30필(疋) 28척(尺) 남짓,
무명은 5,330동 24필 21자 남짓,
모시는 38동 30필 12척,
베는 1천 559동 13필 2척 남짓,
쌀은 20만 5,794석(石) 8두(斗) 6승(升) 남짓,
콩은 3만 8,320석 13두 7승 남짓,
좁쌀은 1,476석 10두 9승,
겉잡곡은 38석 4두이다.】
100세 노인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안승렬(安承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