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12권, 고종12년 1875년 6월
6월 3일 무진
전 현감(縣監) 김병욱(金炳昱)이 상소를 올려 방어 대책을 진달하고, 이어 자신이 지은 《태평오책(泰平五策)》한 편을 바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자경전(慈慶殿), 자미당(紫薇堂), 인지당(麟趾堂)을 재건할 때의 제술관(製述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6월 4일 기사
세자가 대궐 밖으로 동여(動輿)할 때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6월 6일 신미
김상현(金尙鉉)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김수현(金壽鉉)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김병덕(金炳德)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근필(李根弼)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조준영(趙準永)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승보(李承輔)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양주화(梁柱華)를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6월 7일 임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울산부 안핵사(蔚山府按覈使) 홍철주(洪澈周)의 장계(狀啓)를 보니, ‘포흠을 범한 유리(逾吏) 김양서(金養舒)가 포흠한 공전(公錢)을 채워 넣으려고 결전(結田)에서 거두어들였다가 결국 백성들의 소요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해당 유리는 형구(形具)를 채워 좌병영(左兵營)으로 옮겨 가두고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리가 포흠한 1만 5,800여 냥 중에서 조사하여 찾아낸 여러 조항의 7,600여 냥은 별도로 채워 넣었고, 환작전(換作錢) 8,200여 냥이 남아 있는데, 본 고을의 환조(還租)를 가지고 모곡(耗穀)을 제외하고 배봉(排捧)하면 해마다 붙는 이자가 1,600여 냥이 되니 5년이 지나지 않아서 마감할 수 있으니, 묘당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전 부사(府使) 정기대(鄭基大), 전전 부사 이희성(李羲性)은 이미 체차되었다고 해서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죄상을 유사(攸司)에서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한 부(府)의 공화(公貨)를 일개 소리(小吏)에게 전적으로 맡겨놓아 제멋대로 농간질하여 차지하도록 하였으니, 피해를 입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무슨 죄겠습니까? 우선 그 죄를 바로잡아 울산 백성들에게 사과하지 않을 수 없으니, 김양서를 좌병영으로 하여금 효수(梟首)하게 하여 대중을 경각시키고, 정기대와 이희성은 해부에서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감처(勘處)하게 하소서. 포흠의 충당에 관한 여려 조항은 장계(狀啓)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호군(護軍) 민주현(閔胄顯)이 상소를 올려 과거에서 사적으로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진술하고 정면시(定面試)를 치는 제도를 정하도록 청하였다. 비답하기를,
"진술한 내용을 명심하겠다."
하였다.
6월 10일 을해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호적을 속이는 일, 사치 풍조, 술주정하는 것을 일체 엄금하되, 사치를 금지하는 조목은 지난해에 신칙한 대로 하라. 기한에 대한 문제는 대신이 물러가서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이번에 세자를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한 뒤에 사서인(士庶人)으로서 나이 80세가 된 사람들을 가자(加資)하도록 한 것은 오로지 경사를 넓히고 노인을 우대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한성부(漢城府)를 시켜 호적을 조사하여 대조하게 하였더니 호적이 없거나 나이를 속인 사람이 황해도에 65명, 강원도에 309명이나 되었습니다. 은덕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만일 자세히 살폈더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외람되게 되었겠습니까? 응자인(應資人)은 한결같이 호적을 조사한 데 따라 시행하고 해당 도신(道臣)은 모두 함사추고(緘辭推考) 하소서. 한성부의 초계(抄啓)도 진실성이 부족하니, 해당 당상을 현고(現告)를 받아 엄하게 추고하소서.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근래에 호적의 법이 해이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호(民戶)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을 전혀 살피지 않고 군정(軍丁)이 도망쳐도 조사하여 찾아내지 않으니, 어찌 이렇게 놀랍고 소홀한 일이 있단 말입니까? 옛 법식을 다시 밝혀서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도록 서울과 지방에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호적법의 중요함은 사실 나라의 정사에 관계되는 것이다.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여 전처럼 해이해짐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최근에 기강이 땅을 쓴 듯 없어져 윤리에 어긋나는 단서가 수두룩합니다. 듣건대, 출신(出身) 윤구현(尹九鉉)이 갑자기 부호군(副護軍) 한철우(韓喆愚)의 집에 뛰어들어가 머리카락을 쥐고서 끌고 발길질하고 때리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으로 말하면 참판(參判)의 반열이고 윤구현으로 말하면 무반의 후예인데 이렇게 해괴망칙한 짓을 하였으니 이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윤구현을 빨리 형조에서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원배(遠配)함으로써, 기강을 바로잡고 패악한 습속을 막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처럼 고약한 무리들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찌 나라에 기강이 있고 조정에 체면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그 집이 있는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풍속과 교화를 수립하는 것은 나라의 정사에서 큰 문제입니다. 고(故) 참판(參判) 박종길(朴宗吉)은 아버지가 부임지에서 병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먹여 다시 살아났다가 운명하자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시신을 옮겨다가 장사를 지냈고, 3년을 여막에서 지냈으니, 실로 표창하여 드러내야 할 사람입니다. 특별히 정문을 세워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 사인(士人) 홍기섭(洪箕燮)은 신축년(1721)과 임인년(1722)에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참판 홍철인(洪哲人)의 손자입니다. 시골에서 공부하여 학문과 행실이 특별히 드러나 한 마을의 모범이 되었으며 아름답고 단정한 선비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유림들이 흠모하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특별히 남대(南臺)의 직책을 추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신헌(申櫶)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정지용(鄭志鎔)을 잉임(仍任)하라고 명하였다. 해당 감사의 장청(狀請)으로 묘당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6월 11일 병자
전교하기를,
"익고(翼考) 때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관원이 이번 봄에 세자의 책봉을 진하(陳賀)하는 반열에 참가한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다. 봉조하(奉朝賀) 이돈우(李敦宇)·임백수(任百秀)는 아들이나 조카 가운데에서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고, 우찬성(右贊成) 김대근(金大根), 상호군(上護軍) 이정재(李鼎在)·오취선(吳取善), 대호군(大護軍) 정문승(鄭文升), 호군(護軍) 김양근(金穰根), 부호군(副護軍) 남기원(南綺元)을 모두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6월 12일 정축
의금부에서, ‘시수 죄인(時囚罪人) 정기대(鄭基大)를 고산현(高山縣)의 배소(配所)로 보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6월 13일 무인
신응조(申應朝)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가 곧 체직시키고 이우(李㘾)로 대신하였다. 박제인(朴齊寅)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윤자덕(尹慈悳)을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 삼았다.
장령(掌令) 조중린(趙重麟)이 상소하여 세 조목을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성학(聖學)에 힘쓰는 것이고, 둘째는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이고, 셋째는 명분을 바로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진달하기를,
"근래에 오면서 명분이 문란해져서 분수를 범하고 강상을 무시하는 일이 거듭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 예조 좌랑(禮曹佐郞) 심관섭(沈觀燮)이 군교(軍校)의 이웃집에 우거(寓居)하고 있는데, 먼 시골에서 온 벼슬아치라고 멸시하였습니다. 군교가 조관(朝官)을 까닭 없이 구타하고 또 포교(捕校)를 시켜서 결박해서 잡아다가 포도청에 가두었습니다. 군교의 행패와 포교의 위법 행동은 모두 법률에 따라 감처(勘處)하소서. 그리고 포도대장으로 말하면 평소 단속하고 신칙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명심하겠다. 심관섭의 일은 묘당에서 자세히 조사하고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6월 14일 기묘
전 현감(縣監) 홍종태(洪鍾泰)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우리나라의 강화(江華)는 해문(海門)이 수도의 입구에 열려 있고 육지에 있는 가호들이 도성 머리에 인접해 있으니, 실로 요충지가 되는 지역이고 굳게 지킬 수 있는 요새이니, 바로 한 남자가 관문을 지키고 있으면 만 명의 적도 뚫지 못할 험고한 지형이라고 말할 만합니다. 나라에 외진(外鎭)의 요새가 있고 적이 안을 엿볼 틈이 없다면 이것은 실로 나라를 안정시키는 큰 정사인 것입니다. 한번 혁파한 후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하고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옛날대로 다시 설치하여 나라를 위해 수비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그리고 일본을 놓고 논한다면, 그 서계(書契)의 말이 트집을 잡으려는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처음에 서계를 받지 않은 것은 바로 먼저 엄정함에 의거하여 고질적인 폐단을 막아버림으로써 두려워하거나 겁내는 모양이 없고 방어할 대책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저들이 서양 오랑캐들과 부화뇌동하여 성인의 나라를 모욕하면서 문서와 사건을 가지고 제멋대로 소란을 피우니, 어떻게 그들의 행태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말만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서계를 받아들인 후에 만약 혹시 대처하기 어려운 일이 생긴다면 또한 앞으로 어떻게 조처하겠습니까? 대체로 서계를 받아들인다면 지금은 혹 위험이 없을 수도 있으나 뒤에는 반드시 걱정이 있을 것이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은 혹 걱정이 있을 수도 있으나 뒤에는 반드시 위험이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지금은 위험하더라도 뒷날 걱정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6월 15일 경진
홍원섭(洪遠燮)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병지(金炳地)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우(李㘾)를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이근필(李根弼)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이승보(李承輔)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한용선(韓用善)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6월 17일 임오
전교하기를,
"유생들이 상소한 일에 대해서 이미 지난번에 처분이 있었는데도 또 감히 상소를 올렸으니, 이것은 고의로 윗사람을 범한 것이다. 소두(疏頭) 최화식(崔華植)·조충식(趙忠植)·조병만(曺秉萬)·임도준(任度準)을 모두 속히 의금부에서 형구(形具)를 채워 잡아다가 남간(南間)에 가두게 하라."
하였다.
6월 18일 계미
《윤발(綸綍)》과 《일성록(日省錄)》을 보충할 때의 감동(監董)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전교하기를,
"남간(南間)에 갇힌 죄인 최화식(崔華植)·조충식(趙忠植)·조병만(曺秉萬)·임도준(任度準)은 이미 연석(筵席)의 하교에서 정한 법을 어겼다. 이것은 스스로 죽을 죄에 빠진 것이다. 모두 윗사람을 범한 부도(不道)로써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참형에 처하라."
하였다.
6월 19일 갑신
권영하(權泳夏)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학(金炳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박규수(朴珪壽), 좌의정(左議政) 이최응(李最應),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의 대략에,
"삼가 내린 전교를 보니 남간(南間) 옥에 갇힌 죄인의 결안(結案)을, 행하라는 즉시 봉입(捧入)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여러 유생들이 스스로 중한 벌에 빠졌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이지만, 명색이 선비입니다. 상소를 올린 유생들을 돌아보아 애석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선비들을 대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들은 전하를 보좌하는 책임이 있기에 감히 연명으로 호소하는 것이니, 삼가 앞서 내리신 전지를 거두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이미 경들과 서로 의논해서 법을 정한 것인데, 지금 갑자기 이와 같이 하니, 어찌 뜻밖의 일이 아니겠는가? 매우 개탄스럽다."
하였다.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官)이 올린 연명 상소(聯名上疏)의 대략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승보(李承輔),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이병문(李秉文),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홍원식(洪遠植)·이기용(李起鏞) 등이다.】 "지금 남간(南間)에 갇힌 죄인 최화식(崔華植)·조충식(趙忠植)·조병만(曺秉萬)·임도준(任度準)의 결안을 즉시 봉입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사실 속히 거행하여야 하겠으나, 다만 삼가 생각건대, 죄인의 결안은 사체가 지극히 중하므로 국청(鞫廳)을 설치하지 않고 의금부 당상만으로 부랴부랴 참작해서 처리하는 것은 옛날에도 그런 예가 없었던 일인데 지금 어떻게 만들어 행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의금부에서 법을 시행하는 뜻에도 크게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반복하여 고려하고 죄상을 조사하는 정사에도 흠이 됩니다. 지금 이 네 죄인의 결안을 곧장 봉입하는 일은 얼마나 중한 죄에 관한 것이며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할 일입니까? 단지 명을 받들어 행하는 공손함만 생각하고 법보다 더 엄한 것이 없음을 생각하지 않은 채 서둘러 자리에 나아가 옥에 갇혀 있는 죄인을 그저 예에 따라 조율하는 것같이 한다면, 몇 백 년 동안 넘을 수 없던 법식이 신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감히 서둘러 봉행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이에 감히 연명으로 짧은 글을 올려 숭엄한 전하를 번독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조용히 깊이 생각하고, 이어 신 등이 명을 모독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정한 법률을 범했으므로 스스로 결안을 받들어야 하는데 다시 무슨 물을 것이 있겠는가?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원본】 16책 12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1책 500면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왕실-국왕(國王) / 사법-법제(法制)
"지금 남간(南間)에 갇힌 죄인 최화식(崔華植)·조충식(趙忠植)·조병만(曺秉萬)·임도준(任度準)의 결안을 즉시 봉입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사실 속히 거행하여야 하겠으나, 다만 삼가 생각건대, 죄인의 결안은 사체가 지극히 중하므로 국청(鞫廳)을 설치하지 않고 의금부 당상만으로 부랴부랴 참작해서 처리하는 것은 옛날에도 그런 예가 없었던 일인데 지금 어떻게 만들어 행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의금부에서 법을 시행하는 뜻에도 크게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반복하여 고려하고 죄상을 조사하는 정사에도 흠이 됩니다.
지금 이 네 죄인의 결안을 곧장 봉입하는 일은 얼마나 중한 죄에 관한 것이며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할 일입니까? 단지 명을 받들어 행하는 공손함만 생각하고 법보다 더 엄한 것이 없음을 생각하지 않은 채 서둘러 자리에 나아가 옥에 갇혀 있는 죄인을 그저 예에 따라 조율하는 것같이 한다면, 몇 백 년 동안 넘을 수 없던 법식이 신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감히 서둘러 봉행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이에 감히 연명으로 짧은 글을 올려 숭엄한 전하를 번독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조용히 깊이 생각하고, 이어 신 등이 명을 모독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정한 법률을 범했으므로 스스로 결안을 받들어야 하는데 다시 무슨 물을 것이 있겠는가?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6월 20일 을유
경상 감사(慶尙監司) 박제인(朴齊寅)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다시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의 대략에,
"당초에 정한 율이 신 등이 참여하여 의논한 것이라는 비답 하교가 정중하니 황송해서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의 처분은 지난번에 신칙하신 하교가 이미 엄하였는데도 유생들이 또 이렇게 번독스럽게 하니 저들은 곧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엄하게 주벌하지 않으면 기강이 날로 무너질 것이므로 성상께서 이를 심려하신 것일 따름입니다.
생각건대, 성스러운 조정이 500년 동안 배양한 것은 오로지 선비들에게 있어 나라의 원기(元氣)가 되었습니다. 지금 소유(疏儒)들은 스스로 중률(重律)에 빠진 것이니 비록 용서할 수 없는 죄에 관계되지만 특별히 인애(仁愛)를 시행하여서 재단하여 처리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윗사람을 범한 부도(不道)한 죄라 하더라도 만일 선비라는 명색 때문에 주벌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임금이 없고 선비만 있게 될 것이다. 경들의 말이 옳겠는가? 대신들의 의논은 전후가 달라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의 대략에, 【응교(應敎) 홍건식(洪健植), 부응교(副應敎) 김구현(金九鉉), 교리(校理) 권노연(權魯淵), 부교리(副校理) 이수만(李秀萬)․박제성(朴齊晟), 수찬(修撰) 윤조영(尹祖榮)․김옥균(金玉均), 부수찬(副修撰) 윤승구(尹升求)․ 민종묵(閔種默)이다.】 "지난번 연교(筵敎)가 절엄(截嚴)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줄곧 시끄럽게 굴다가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불쌍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대체로 선비란 나라의 원기이므로 대뜸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대료(大僚)들의 간절한 진술이 있은 것입니다. 신 등은 논사(論思)의 직(職)에 있으므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기 어려워 이처럼 감히 연명으로 호소하며 헤아려 처분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은 처분하라는 전교를 보지 못하였는가? 정률(定律)을 고의로 범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사죄(死罪)에 빠진 것인데 어찌 죽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말라." 하였다.
【원본】 16책 12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0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지난번 연교(筵敎)가 절엄(截嚴)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줄곧 시끄럽게 굴다가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불쌍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대체로 선비란 나라의 원기이므로 대뜸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대료(大僚)들의 간절한 진술이 있은 것입니다. 신 등은 논사(論思)의 직(職)에 있으므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기 어려워 이처럼 감히 연명으로 호소하며 헤아려 처분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은 처분하라는 전교를 보지 못하였는가? 정률(定律)을 고의로 범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사죄(死罪)에 빠진 것인데 어찌 죽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말라."
하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승보(李承輔) 등이 다시 연명 상소(聯名上疏)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누차 연명 상소를 올리는 것은 논쟁을 좋아해서 그러는 것이다. 신하의 본분으로서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거행여부는 스스로 요량해서 하라."
하였다.
6월 21일 병술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와서 말하기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학(金炳學), 판부사(判府事) 홍순목(洪淳穆)·박규수(朴珪壽), 좌의정(左議政) 이최응(李最應),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지금 한창 의금부의 문밖에서 서명(胥命)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좌의정(左議政) 이최응(李最應),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이 마음속으로 황송하다고 하면서 또 녹사(錄事)를 시켜 명소(命召)를 가져다 바치는데 어떻게 하여야 할지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에 대하여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이어 좌의정과 우의정에게 명소를 전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다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미 어제 비답에서 전유(傳諭)하였는데 어찌 또 이렇게 시끄럽게 굴 수 있는가?"
하였다.
6월 22일 정해
김병시(金炳始)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좌의정(左議政) 이최응(李最應),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이 마음속으로 더욱 황송하다고 하면서 또 녹사(錄事)를 시켜 명소(命召)를 가져다 바치는데 어떻게 하여야 할지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명소패를 다시 돌려주어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여러 대신들이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의 구어(句語) 때문에 서명(胥命)한다고 하는데, 차자에 대한 비답을 환수(還收)할 것이니 곧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6월 23일 무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학(金炳學), 판부사(判府事) 홍순목(洪淳穆)·박규수(朴珪壽), 좌의정 이최응(李最應), 우의정 김병국(金炳國)이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의 대략에,
"거듭 엄한 비답을 받고 엎드려서 서명(胥命)하고 있는데 이에 회유(誨諭)하여 개석(開釋)해 주고, 비지(批旨)를 환수(還收)하여 위벌(威罰)을 내리지 않으니 신 등은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만 가득합니다.
지난날 연교(筵敎)가 절엄(截嚴)했던 것은 아마도 복합(伏閤)하는 유생들이 감히 다시 문제를 시끄럽게 굴지 못하게 하고 극률(極律)을 적용해서 두려움을 알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신들이 성의(聖意)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더라면 어째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논주(論奏)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침묵만 지키다가 물러갔으니 신들의 죄는 어찌 감히 스스로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위벌을 내려 구료(具僚)를 경계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인혐(引嫌)할 필요가 없음을 경들은 헤아리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참작하여 헤아린 것이 있으니, 남간(南間)에 갇힌 죄인 최화식(崔華植) 등은 모두 특별히 한 가닥 목숨을 살려주어 사형을 감하여서 원악도(遠惡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길을 세 배로 재촉하여 당일 압송하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소유(疏儒)의 일로 연교(筵敎)가 있었는데 일전에 남간(南間)에 갇힌 죄인의 일로 한번 더 번거롭게 해 드렸으니, 이것이 어찌 분의(分義)이겠습니까? 그러나 사형을 시행하는 것은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생각을 돌리고 처분을 특별히 도로 거두셨으니, 살리기 좋아하는 덕에 크게 빛이 났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들의 연명 차자(聯名箚子)가 어찌 누차 번거롭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인가? 이번 일은 정말 개탄할 일이다.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官)들로 말하면 어찌 이런 도리가 있단 말인가? 무엄하기 짝이 없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신 등은 동솔(董率)하는 자리에 있으니 더욱 황송합니다. 천지의 살리기 좋아하시는 덕이 백성들의 마음에 젖어들어 이후부터는 스스로 유사(有司)를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흠앙(欽仰)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죄를 범하였는데도 특별히 목숨을 살려준 것은 호생지덕이 백성들의 마음에 젖어든 것일 뿐 아니라 간책(簡冊)에 빛날 일입니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박규수(朴珪壽)가 아뢰기를,
"네 사람을 일시에 극률(極律)에 처하는 것은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신 등이 연명으로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이와 같이 처분하였으니 참으로 우러러 칭송하게 됩니다."
하니, 좌의정(左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이번의 처분은 실로 조야(朝野)의 간절한 소망에 부합됩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이렇게 용서해준다는 처분을 받으니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성덕을 알게 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어떻게 꼭 율(律)을 적용하려고 하겠는가? 그들이 이미 고의로 범하였는데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는가? 이것을 처벌하지 않으면 무슨 징계가 되겠는가?"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선비들이 스스로 죄를 범하는 것은 혹 소견이 우곡(迂曲)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6월 24일 기축
의금부(義禁府)에서, ‘남간옥(南間獄)에 갇힌 죄인 최화식(崔華植)은 나주목(羅州牧)의 지도(智島)에, 조충식(趙忠植)은 영광군(靈光郡)의 임자도(荏子島)에, 조병만(曺秉萬)은 강진현(康津縣)의 고금도(古今島)에, 임도준(任度準)은 흥양현(興陽縣)의 녹도(鹿島)에 모두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으며 의금부 도사를 파견하여 길을 세 배로 재촉하여 당일로 압송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장령(掌令) 조중린(趙重麟)의 상소로 인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 심관섭(沈觀燮)이 포도청(捕盜廳)에 잡힌 문제에 대하여 상세히 조사하여 품처(稟處)하라는 명을 삼가 받들었습니다. 형조(刑曹)로 하여금 그 곡절을 자세히 조사해 보게 하니, ‘전적으로 이웃에 사는 집의(執義) 군교가 거짓으로 고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포도청의 포교(捕校)를 보내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포악과 도둑질을 한 행위가 없으면 궁한 시골의 백성이라도 함부로 잡아서 잘못 다스려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조관(朝官)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체포할 때에 자세히 살피지 못한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 백낙정(白樂貞)은 간삭(刊削)의 법을 시행하소서. 심관섭으로 말하면 평소 몸가짐에 만일 조금이라도 조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치욕을 끼친 것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게 하소서. 영교(營校)는 법조(法曹)에 넘겨 엄히 형신(刑訊)하고서 원배(遠配)하고, 포교도 역시 형배(刑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6월 25일 경인
유치숭(兪致崇)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윤현기(尹顯岐)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우(李㘾)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6월 26일 신묘
김기석(金箕錫)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6월 28일 계사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성경(盛京)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보니, 군무 독판(軍務督辦) 이숭(李崇)이 자문으로 알리는 문제였습니다.
통령(統領) 진제청(陳濟淸)의 품칭(稟稱)을 보니, ‘올해 5월 22일 대동구(大東溝) 안자산(鞍子山)에서 산속에 숨어있는 비적을 수포(搜捕)하기 위하여 강을 건너는 곳까지 추격해갔더니 수많은 배들이 북쪽 언덕에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급히 가서 알아보니, 조선국(朝鮮國)에서 우리 군대가 비적들을 섬멸할 것임을 듣고, 개철강(凱撤江)이 장마로 물이 불었기 때문에 도보로 건너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나라의 변경을 지키는 해당 관리가 밤을 밝혀가며 큰 배 20척을 동원하고 통사(通事) 4원(員)을 연속 파견하여 애강(靉江)까지 책임지워 보내왔으며, 우리 군사가 건너야 할 나루 북쪽에 배를 매고 기다리면서 대병(大兵)을 건네주려고 하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조선국에서 배를 동원하여 강을 건너는데 변경을 지키는 관리가 주사(舟師)를 급히 집합하여 강에다 배를 세워놓고 대기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합니다. 어떤 표창을 하겠는가 하는 것을 참작하여 판리(辦理)하는 외에 상응(相應)하여 지조(知照)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회답 자문은 전례대로 만들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6월 29일 갑오
울산 안핵사(蔚山按覈使) 홍철주(洪澈周)가 올린 장계(狀啓)에,
"난민(亂民)들을 주모자와 추종자로 구별하여 등문(登聞)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만일 폐단을 호소하려고 하면 어찌 표현할 말이 없을까 걱정하겠으며, 만일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면 어찌 방법이 없을까 걱정하겠는가? 그런데 조정에서 차견(差遣)한 명리(命吏)를 꾸짖고 핍박하고 끌고 다니고 내쫓았으니, 어찌 이런 패악(悖惡)이 있단 말인가? 옥을 부수고 관사를 빼앗고 재물을 움켜쥐고 장부를 찢었으니, 이것이 과연 어떠한 백성의 습속이란 말인가? 사계(査啓)에서 분등(分等)한 데에는 자연 경중이 있을 것이니, 묘당에서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