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12권, 고종12년 1875년 8월
8월 1일 을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금위영(禁衛營)의 보고를 보니, ‘영(營)의 비축이 다 바닥이 나서 각종 항목으로 지출할 것이 모두 2만여 냥인데 해결할 대책이 없으니, 본영(本營)의 은화(銀貨) 중에서 5,000냥만 우선 취용(取用)하고 힘이 펴지기를 기다린 환충(還充)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은화의 비축은 다른 것에 비하여 더욱 중한 것인데 어떻게 갑자기 의논해서 제멋대로 쓰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해영(該營)의 사세(事勢)가 몹시 곤란하고 급한 만큼 특별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시행한 전례를 참작(參酌)해서 은화 5,000냥을 우선 대하(貸下)하도록 하고 영의 형편이 좀 펴지면 다음 곧 수량대로 채우라는 내용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흥민(李興敏)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남정순(南廷順)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병문(李秉文)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이풍익(李豐翼)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8월 2일 병인
강원 감사(江原監司) 윤병정(尹秉鼎)이 올린 장계(狀啓)에,
"강릉 부사(江陵府使) 조명교(趙命敎)가 올린 첩정(牒呈) 안에, ‘본부(本府)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의 사고 참봉(史庫參奉) 정난귀(鄭鸞龜), 총섭승(總攝僧) 상순(詳旬)의 보고를 받으니, 「선원각(璿源閣)의 창살이 꺾여 떨어지고 봉안(奉安)된 궤(櫃)의 문이 열려 책은 드러나고 책을 쌌던 붉은 보자기는 없기에 지키는 번승(番僧)들을 하나하나 엄하게 조사하였더니,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에서 온 번승 재명(在明)이 달게 듣고 승려 맹흔(孟欣), 수안(守安), 득청(得靑), 재형(在炯) 등이 지교(指敎)하여 이달 5일에 과연 변을 일으키려 하였다는 내용을 사실대로 자복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부사가 급히 달려가 봉심(奉審)하니,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8권,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주의(紬衣) 8책은 다행히 없어지지 않았기에 궤 안에 수습(收拾)하여 따로 자물쇠를 잠근 후 종전대로 봉안(奉安)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갇혀 있는 승려 재명과 아울러 낙산사의 승려 맹흔, 득청, 재형 등을 한 사람씩 대질시켰더니, 낙산사의 승려들이 그 사고의 번승에 폐단이 있기 때문에 백방으로 면하기를 도모하다 월정사의 승려들과 원수가 되어, 어리석고 미욱한 재명에게 수고한 값으로 많은 돈을 주겠다는 말로 사주하여 몰래 사고를 일으켜서 월정사에 화를 입히려고 꾀하였다는 사실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지금 승려 재명, 득청, 맹흔, 재형, 수안 등은 사적인 원망을 풀려고 하다가 스스로 중과(重科)에 빠졌고, 사고 참봉 정난귀, 총섭승 상순, 승장(僧將) 성능(性能) 등은 사고를 지켜야 할 책임을 지닌 몸인 만큼 범한 죄가 매우 중하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 부사 조명교는 제멋대로 사고의 문을 열었으니 몹시 경솔하며 그 죄상에 대해서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소서. 신은 직책을 다하지 못한 죄로 황공한 마음으로 감죄(勘罪)하기를 기다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묘당에서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황정연(黃正淵)의 장계(狀啓)에,
"이번의 서계(書契)는 마땅히 연향(宴饗)하는 날에 받아보아야 하겠으나 연향을 아직 설행(設行)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복색(服色)과 정문(正門) 출입(出入)에 구식(舊式)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회계(回啓)가 내려왔으므로 마땅히 연향의 설행을 서둘러야 하겠으나 그들이 끝끝내 구식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절차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만큼 사체(事體)가 있으니 신이 자의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은 선위(宣慰)의 직분을 맡고 있으나, 누차 성명(成命)이 있었음에도 교활한 저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아직 경연(經宴)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이 저들을 제압하지 못한 죄가 아닐 수 없으니 황공한 마음으로 감죄(勘罪)하기를 기다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는 9월 15일은 건원릉(健元陵), 수릉(綏陵), 경릉(景陵)에 가서 친제(親祭)하고 현릉(顯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숭릉(崇陵), 혜릉(惠陵), 원릉(元陵)에 전알(展謁)하겠다."
하였다.
8월 3일 정묘
민규호(閔奎鎬)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현익(李玄翼)을 참판(參判)으로, 이면영(李冕榮)을 참의(參議)로 삼았다. 특별히 김상현(金尙鉉)을 발탁하여 도총부 도창관(都總府都總管)으로 삼았다.
8월 4일 무진
이승수(李升洙)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정두(李廷斗)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8월 5일 기사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칠석제(七夕製)를 행하였다.
8월 6일 경오
민규호(閔奎鎬)를 무위 도통사(武衛都統使)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동래 부사(東萊府使) 황정연(黃正淵)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는 유지(有旨)가 있었습니다. 왜인들에게 연향(宴饗)을 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그들이 복색(服色)과 정문(正門) 출입(出入)의 구식(舊式)을 따르지 않고 기어코 새 규례를 만들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정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만약 소상히 효유(曉諭)하여 의심을 확 풀어준다면 어찌 따르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복색 등의 문제를 가지고 번거롭게 등철(登徹)하면서 오랫동안 서로 버티면서 시간을 끌고 조정의 명령을 멈추고 집행하지 않으니 변신(邊臣)으로서 몹시 놀랍고 소홀한 행동입니다.
전 부사 황정연은 엄하게 추고(推考)할 것이며 새로 제수(除授)된 부사는 며칠 안으로 사조(辭朝)해야 할 것입니다. 서계(書契)와 연향의 절차는 전에 행회(行會)한 대로 상세히 개유(開諭)하여서 사체(事體)를 상하지 않도록 특별히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병식(趙秉式)의 보고를 보니, ‘본영(本營)에 있는 말들은 모두 둔해서 쓸 수 없기 때문에 올가을에 제주(濟州)의 공마(貢馬) 20마리를 수원부(水原府)에서 직접 획송(劃送)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강화도(江華島)는 유사시에 대한 대비가 다른 곳에 비해 특별히 중요한 만큼 보고한 내용대로 수량을 정해서 획송하도록 태복시(太僕寺)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보장(保障)의 지역이니 특별히 관심을 돌려야 할 것이다. 식년(式年)에는 10필(匹), 보통 해에는 5필씩 획송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원 감사(江原監司) 윤병정(尹秉鼎)의 장계(狀啓)로 강릉(江陵) 오대산(五臺山)의 사고(史庫)에서 생긴 변고에 대하여 묘당에서 품처하라는 유지가 있었습니다. 금궤 석실(金櫃石室)에 보관한 것이면 얼마나 엄한 비밀이기에 이렇듯 전에 없던 변이 있단 말입니까? 경고하는 말로써만 그칠 수 없습니다. 봉심(奉審)하여 고치는 일은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종친부(宗親府)와 춘추관(春秋館)에서 시급히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그 사단(事端)은 전적으로 치도(緇徒)가 번역(番役)을 괴롭게 여기고 오랫동안 감정을 품은 데서부터 생긴 것이며 죄과를 남에게 넘겨씌우려다가 스스로 중한 죄에 걸려든 것입니다. 이번에 승려 재명(在明)은 창살을 칼로 베어내고 궤짝을 손으로 뒤지고 붉은 보자기는 도적질해내고 자물쇠는 버렸습니다. 저지른 제반 조목은 극률(極律)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승려 득청(得淸)과 맹흔(孟欣)은 재물을 주고 부역을 면제해준다는 말로 재명을 꾀어서 사주하여 모략을 꾸밀 작정을 하였으니 더욱 음흉합니다. 그 죄상을 따져보면 결코 용서할 수 없으니 도신(道臣)이 결안(結案)을 받아 거행하도록 하며 그 나머지 승려 재형(在炯)과 도망 중에 있는 자들은 기한을 정해 염탐해서 체포하고 엄형(嚴刑)을 가해서 원배(遠配)해야 할 것입니다. 총섭(總攝)과 승장(僧將) 등은 잘 지켜내지 못하였고 그 죄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똑같이 형배(刑配)하고, 해당 부사는 해부(該府)에서 나감(拿勘)하도록 하고, 사고의 참봉은 본도(本道)에서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며, 도신이 죄인을 분등(分等)하면서 단지 읍보(邑報)에만 의거하여 논하였으니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이 명백하므로 엄중히 추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사고의 중요하기가 어떠한가? 이와 같이 궤를 뒤지고 보자기를 훔쳐가는 변고가 있다니 놀랍고 통분한 생각을 이길 수 없다. 종친부와 춘추관에서 봉심하는 것은 사체에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때에 식사를 공급한다면 폐단이 있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도내(道內)의 찰방(察訪)이 원래 춘추관 벼슬을 겸함(兼銜)한 사람이니 종친부에 정(正)의 자리를 가설(加設)하고 단부(單付)하여 봉심하고서 수리(修理)한 연후에 등문(登聞)하도록 하라.
세 놈이 범한 죄로 말하면 매우 흉악하고도 고약한 것이니 원래 극률로 처단하여야 하겠으나 특별히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의리를 미루어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하며, 그 나머지 놈들은 도신이 경중을 구별하여 참작해서 처리하게 하라. 해당 부사는 나감해야 하겠으나 참작해야 할 것이 없지 않으니 특별히 보류하여 당분간 죄명을 지닌 채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7일 신미
전주(全州) 등 고을의 표호(漂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8월 8일 임신
한성부(漢城府)에서, ‘오부(五部)의 민가(民家)가 무너져 사람이 압사하였습니다.’라고 치계(馳啓)하니, 전교하기를,
"휼전(恤典)을 해청(該廳)에서 분급(分給)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9일 계유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경근문(敬覲門)을 지나서 본궁에 근친하고 이어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가을 전알이다.
전교하기를,
"책례(冊禮) 후에 처음으로 알성례(謁聖禮)를 행하니 기쁘고 행복한 감회가 다른 때보다 곱절 더하다. 뜻을 보이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되니, 도제조(都提調)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匹)을 사급(賜給)하라."
하였다.
8월 10일 갑술
만경전(萬慶殿)에 나아가 하직하는 동래 부사(東萊府使) 홍우창(洪祐昌)을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동래부는 다른 곳과는 다르며 요즈음은 변정(邊情)이 더욱 예측하기 어려우니 매사를 착실한 마음으로 해 나가면서 대양(對揚)할 계책을 극진히 하라. 비록 조정의 처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편의에 따라 일해 나갈 것이며, 저들에게 개유(開諭)할 때에는 각별히 조심하며 임기응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군용(軍容)이 쇠잔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수선(修繕)을 도모하되 인심을 얻는 것을 제일 급선무로 삼으라."
하니, 홍우창이 아뢰기를,
"현재 본부(本府)의 사무가 전에 비해 배나 많아졌으니 걱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8월 12일 병자
전교하기를,
"지난번 신태관(申泰觀)이 상소를 올린 뒤에 사람들의 말이 이렇게 거듭 들어오니, 이것은 줄곧 관대하게 용서할 수 없다. 이승보(李承輔)에게 찬배(竄配)하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임흥준(任興準)을 경기 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전 장령(掌令) 이동영(李東榮)이 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임신년(1872)에 유흥영(柳興榮), 이관수(李觀秀)가 역모(逆謀)하여 무기와 군복 등을 유흥영의 형 유지영(柳芝榮)의 집에 감추었는데, 그때 수령이 아첨하고 부합하여 유흥영을 단지 그 문중 안에서 처단하게 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속히 추율(追律)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날 상소를 올린 역적이 복합(伏閤)하자 범상 부도(犯上不道)라고 하교하셨는데, 판서 이승보(李承輔)는 끝내 임금을 뒤로 미루는 의리를 품고 태만히 하여 거행하지 않고서 감히 저희 당을 비호하는 계책으로 불경죄를 함부로 범하였습니다. 도사(都事)가 압송해갈 때 ‘즉일로 배도(倍道)하라.’고 하교하셨는데, 문을 나서서는 지체하고 중도에서는 소요(逍遙)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인기(人紀)를 세우소서.
울산 전 부사(蔚山前府使) 정기대(鄭基大)는 아전의 포흠을 백성들에게서 억지로 징수하여 백성들이 신소가 일제히 이르자 군사를 동원하여 도륙(屠戮)하였습니다.
상주 전 목사(尙州前牧使) 조병로(趙秉老)는 잡기(雜技)와 음행(淫行)으로 〖죄안을 만들어〗부민(富民) 40여 호(戶)에서 몇 만 금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치(善治)했다고 청주(淸州)로 이임(移任)하였고 암행어사도 포계(褒啓)를 하였으니, 선치하는 자는 과연 탐학을 장기(長技)로 삼는 것입니까? 냉혹하게 잘 살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목은, 비록 언사(言事)는 폐단에 대해 말하였으나 말이 대부분 거칠고 잡스럽다."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이승보(李承輔)는 진산군(珍山郡)에 배소(配所)를 정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8월 14일 무인
연안부(延安府)의 표호(漂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부호군(副護軍) 박제관(朴齊寬)이 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몇 해 전에 안동(安東)을 맡아 다스릴 때에 온갖 일을 그르치고 한 가지도 보답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방금 삼가 전 장령(掌令) 이동영(李東榮)의 소본(疏本)을 보니, 그 중에 유흥영(柳興榮)의 일을 논하면서 수령(守令)을 핍박하여, ‘아첨하고 부합하여 그 문중 안에서 처단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때 유흥영을 체포하여 순영(巡營)에 보고해 순영에서 조사하였고 신은 이 옥사에 처음부터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터무니없는 말로 헤아릴 수 없는 죄과에 얽어 빠뜨리고 있으니 남을 논하는 말이 어찌 이처럼 모호하단 말입니까? 지금 당한 일을 생각해보니 침묵하며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을 사패(司敗)에 넘겨 아첨하고 부합하였다는 등의 일을 명백하게 밝혀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야기한 사람의 말이 무고가 아니라면 빨리 해당 형률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인혐(引嫌)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8월 16일 경진
전교하기를,
"매번 한 차례 과장(科場)을 치르고 나면 그때마다 한 가지 과거의 폐단이 늘어나 전후의 칙교(飭敎)가 겉치레처럼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시관(試官)으로 말하면 응당 마음가짐을 지극히 공평하게 하며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을 밝고 진실 되게 하는 것으로 임금의 명을 대양(對揚)하는 도리로 삼아야 할 것인데, 혹 과거의 체모를 스스로 잃는 과실을 범하여 끝내는 많은 사람들의 비방을 막기 어려운 지경에 귀착된다. 선비들로 말하면 자신을 깊이 수양한 사람이 꼭 다 그러한 것은 아니나 대개가 분경(奔競)을 우선으로 삼고 요로에 뇌물을 주고 청탁하는 일을 도모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과장의 좋은 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다투어 잡된 무리들이 말썽을 일으키기까지 하고 있으니, 법을 멸시하고 명령을 어기는 작태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나라에 상헌(常憲)이 있는 만큼 법령을 범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다.
먼저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특별히 시관을 잘 뽑도록 하며, 또 법사(法司)에 신칙하여 단속해서 문란한 행동을 금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시험 규정을 맑고 엄정하게 하며 장옥(場屋)을 정숙하게 하라고 분부하라. 그리고 이 전교를 가지고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의 과장에 게시하여 여러 선비들에게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7일 신사
부호군(副護軍) 박이도(朴履道)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지난해에 경상남도 암행어사의 책임을 맡았으나 일이 결국 잘못되었습니다. 그런데 전 장령(掌令) 이동영(李東榮)의 상소에 상주 목사(尙州牧使) 조병로(趙秉老)에 대하여 마치 폄하(貶下)해야 할 것을 도리어 포상한 듯이 말하였습니다. 신은 스스로 사실을 찾아 논열(論列)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으나 혹시 잘못이 있다면 무슨 처벌이든 받아야 할 것입니다. 위벌(威罰)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처럼 인혐(引嫌)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한치규(韓緻奎)가 상소하여 일곱 가지 조목을 진달하였는데, 성학(聖學)에 힘쓰는 것,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것, 기강을 세우는 것, 탐학(貪虐)을 징계하는 것, 군정(軍政)을 닦는 것, 과거의 폐단에 대해 신칙하는 것, 형벌(刑罰)을 신중히 하는 것이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항은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8월 19일 계미
후보자 추천을 늘려서 김병시(金炳始)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상현(金尙鉉)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8월 21일 을유
강릉부(江陵府)의 압사(壓死)한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8월 22일 병술
영종 첨사(永宗僉使) 이민덕(李敏德)이, ‘이양선(異樣船)이 난지도(蘭芝島)에 정박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일본 군함 운양호(雲揚號)가 항로를 측량할 때이다.】
【원본】 16책 12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1책 504면
【분류】외교-일본(日本) / 교통-수운(水運) / 군사-관방(關防)
8월 23일 정해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구일제(九日製)를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낯선 배가 내양(內洋)에 들어왔는데 그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 무슨 일로 와서 정박하고 있는지 상세히 문정(問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리에 밝은 역관(譯官) 몇 사람을 사역원(司譯院)에서 특별히 선정하게 하여 하직 인사는 그만두고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민태호(閔台鎬)가 보고한 바를 보니, ‘통진 부사(通津府使)가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덕포(德浦)의 손돌목〔孫石項〕에서 파수(把守)하고 있는데 군량을 획급(劃給)하는 것이 과연 시급하니 모(某) 아문(衙門)의 쌀 300석(石)만 특별히 획하(劃下)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낯선 배가 내양에 침입한 만큼 방수를 소홀히 할 수가 없는데 읍(邑)에는 창고에 남아 있는 양식이 없고 군대에는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 외창(外倉)에 있는 쌀 중에 300석을 즉시 획송(劃送)하라고 호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낯선 배가 경기 연안에 와서 정박하고 있은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나 외양(外洋)의 여러 고을에서 그 배가 지나간 형적에 대해 수계(修啓)한 곳이 한 곳도 없으니, 어찌 이러한 변정(邊政)이 있겠습니까? 망을 보는 일이 이처럼 소홀하니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니며 너무나 한심한 노릇입니다. 이 내용으로 우선 삼남(三南)과 양서(兩西)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관문(關文)으로 그 신칙하여 그 경위를 자세히 조사하여서 치문(馳聞)하게 하여 엄하게 감처(勘處)하도록 하고, 이후의 거행은 더욱 엄하게 단속하고 신칙하여 감히 게을리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일체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이양선(異樣船)이 강화도(江華道)와 아주 가까운 곳에 와서 정박하고 있는데 그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연해의 방수를 더욱 엄하게 신칙하여 임기응변하게 하도록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강화 유수(江華留守)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4일 무자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경기(京畿)의 연해(沿海)에 정박하고 있는 낯선 배가 아직 어느 나라의 어느 지역 사람들인지 알 수 없으나 언제 내양(內洋)을 침범해 들어올지 예측하기 어려운데, 불을 지르고 포를 쏘아대니 더욱 가증스럽습니다. 이 배는 몇 해 전에 약탈하던 이양선과 같은 종류입니다. 항산도(項山島)에 불을 지르고 영종진(永宗鎭)에 포를 쏘아댄 일은 비록 경기와 강화(江華)의 두 군영에서 장본(狀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해당 방영(防營)에서는 동정(動靜)에 대하여 막연하여 장계(狀啓)를 올리지 않았으니, 변정(邊情)으로 헤아려볼 때 이보다 소홀한 것이 없습니다.
경기 감영에서 해영과 해읍(該邑)에 파발마(擺撥馬)를 띄워 통지하여 형세를 빨리 치문(馳聞)하게 하소서. 저들의 속내는 허실을 헤아리기 어려운 만큼 한결같이 일전에 행회(行會)했던 방수의 절차에 의거하여 특별히 단속하여 연해의 고을과 진영이 서로 협력하여 돕고 호응해서 임기응변할 수 있도록 다시 경기 도신과 강화 유수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5일 기축
이주철(李周喆)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유학(幼學) 민영기(閔泳驥)가 여리(閭里)에서 소란을 피우고 평민들을 침학(侵虐)하였다고 하니, 형조(刑曹)에서 한 차례 엄히 형신(刑訊)한 후 백령진(白翎鎭)에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세균(金世均)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민태호(閔台鎬)가 올린 장계(狀啓)에,
"방금 영종 첨사(永宗僉使) 이민덕(李敏德)의 등보(謄報)를 받아보니, ‘저들의 배가 연기를 피우고 닻을 올린 후 앞바다로 내려오면서 연이어 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전군(全軍)이 전부(顚仆)되고 화염이 성안에 가득하여 민가(民家)가 연이어 타면서 공해(公廨)까지 불길이 미쳤기 때문에 전패(殿牌)를 모시고 토성(土城)으로 퇴군하였는데 죽거나 다친 군졸(軍卒)의 숫자를 아직 세지 못하였으며 첨사의 인신(印信)까지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잠깐 사이에 갑자기 온 성을 잃었으니 아뢸 말이 없습니다. 또 해당 첨사는 직책이 방어하는 데 있는 것인데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진의 관속들을 이끌고 성을 버리고 피신하였으니, 우선 파출(罷黜)하고 그 죄상을 유사(攸司)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다.
8월 26일 경인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영종(永宗)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보고가 방금 도착하였습니다. 어떤 추악한 놈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외진 성의 잔군(殘軍)으로는 설령 막아낼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많지도 않은 적도들이 함부로 날뛰도록 놓아두어 관청이 몽땅 불에 타버리고 인신(印信)이 섞여 들어가 녹아버렸는데도 한 놈의 괴수의 목도 베지 못한 채 밖으로 퇴각해 머물렀다고 하니, 그렇다면 방어한 것은 어떤 일입니까? 사율(師律)로 헤아려볼 때 놀라운 일입니다. 해당 방어사 이민덕(李敏德)을 우선 파출(罷黜)시키고 임무가 교대되는 대로 해부(該府)에서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그 후임은 해조(該曹)에서 상격(常格)에 구애되지 말고 각별히 가려서 차임(差任)하게 하여 당일로 말을 주어 내려보내게 하고, 인신도 즉시 만들어 주도록 예조(禮曹)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삼가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계(狀啓)를 보니, ‘적선(賊船)이 방금 외양(外洋)으로 나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여 실상과 종적을 헤아리기 어려운 만큼 이런 때에 계엄(戒嚴)하는 방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영종을 지켜내지 못한 뒤에 군사를 늘리고 군량을 보내는 방도를 경기 감사가 강화 유수(江華留守)와 함께 상의하고 계획해서 견고하게 수비할 대책을 도모하게 하고 연해(沿海)의 요충지들도 일체 단속하고 방어하도록 신칙하고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영종진(永宗鎭)에서 불에 탄 민가와 죽거나 다친 교졸(校卒)이 아직 숫자가 집계되어 등문(登聞)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장례 비용을 넉넉히 지급하고 부상당한 사람에게는 약물을 베풀어 구호하며 안집(安輯)하게 하는 방도를 가장 급선무로 삼도록 할 것과 아울러 본도(本道)에서 특별히 위로하고 보살펴 즉시 집을 지어 주게 하여 조정에서 백성들을 돌보아주는 뜻을 보여주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인천(仁川)을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 영종진(永宗鎭)을 인천 방어영에 이속시키되 제반 조획(措劃)은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7일 신묘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인천(仁川)을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는 데 대한 조획(措劃)을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영락된 진을 지키는 데서 이미 소홀하였다는 한탄이 많았는데, 이번에 영종을 이속시키고 인천을 승격시킨 것은 실로 변경을 중시하고 방어를 견고히 하려는 깊은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해당 부사(府使) 이민중(李敏中)은 일찍부터 치적(治績)이 드러났으니 이 직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직임을 살피도록 하며 감목관(監牧官)도 겸대(兼帶)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9일 계사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일전의 영종진(永宗鎭) 사건은 극히 격분할 일이어서 말을 꺼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설사 성이 고립되고 군사가 적다고 하더라도 추악한 무리들이 육지로 올라오는 것을 좌시한 채 감히 접전(接戰)하지 못하였고 휘하의 600명이나 되는 포수와 군사들이 부상을 당하여 흩어지게 만들고 성(城)과 인신(印信)을 버리고서 놀라고 겁에 질려 쥐새끼처럼 도망쳐버렸습니다. 해당 방어사(防禦使)의 죄는 자연 해당하는 형률이 있습니다.
병인년(1866)에 양요(洋擾)를 겪은 뒤에 10년 동안 군오(軍伍)도 늘리고 성벽도 튼튼히 하고 무기도 수리하고 군량도 비축했으며 기예(技藝)를 단련하고 포상으로 격려하고 권장하는 등 조정에서 아주 주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건대, 천 날을 두고 군사는 양성하는 것은 한때에 쓰려고 해서인데, 그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대체로 통솔자(統率者)로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아무리 몇 만 명의 정예한 군사가 있다 해도 패하지 않으면 무너져 다시는 단 한 명도 과감하게 적을 죽이려는 마음을 갖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연해(沿海)를 방어하는 방도로써는 저들의 배가 방금 물러갔다고 하여 조금도 해이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곤수(梱帥)와 수령(守令)을 막론하고 오직 그 적임자를 뽑고 재능이 있는 자를 취해야 하니, 제일 급선무로 이보다 더 급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처럼 외람되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념(聖念)에 깊이 유념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변경의 금법이 이와 같이 해이해졌으니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하되 별도로 규찰하도록 하라고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이양선이 지금 물러갔지만 저놈들이 물러갔다고 하여 조금도 경계를 늦출 수 없습니다. 앞일을 걱정하고 미리 준비를 갖추는 일은 늦출 수 없으며 안으로 국정을 닦고 밖으로 침략을 막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인천을 방어영으로 승격시키는 것이나 연해의 방어에 대하여 다시 신칙하여 단속하는 것은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려는 것입니다. 안으로 국정을 닦는 요체(要諦)로 말하면 재정을 절약하고 규율을 세우며 탐묵(貪墨)을 징계하고 사치를 금지하는 것인데 그 근본은 오직 늘 학문에 힘쓰시는 일입니다. 신이 구태여 먼 옛날의 일을 끌어다가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지금은 초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생겼으니, 성지(聖知)를 분발하여 날마다 강연(講筵)을 열어 시종일관 꾸준하게 공부하시고 잠시도 중단함이 없게 하시어 계속해서 밝히는 성상의 학문이 더욱더 밝게 되고 이르신 광명(光明)의 경지가 더욱더 광명하게 된다면 비단 눈앞의 시급한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북채가 닿자 북소리가 울리고 풀이 바람에 눕듯 꼭 하고자 하는 대로 다스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안으로 국정을 닦고 밖으로 침략을 막는 일도 다 제대로 될 것입니다. 힘쓰시고 힘쓰기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안으로 국정을 닦고 밖으로 침략을 막는 일은 참으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학문에 모든 힘을 다하는 것이 곧 국정을 닦는 것이라는 것은 매우 적중한 말인데 어찌 가슴에 새겨두지 않겠는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