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16권, 고종16년 1879년 7월
7월 1일 계유
무위소(武衛所)에서 인천(仁川)과 부평(富平)의 포대(砲臺)와 진영(鎭營) 청사(廳舍)의 역사(役事)가 끝났다고 보고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두 읍(邑)은 수도 가까이의 중요한 지대이며 해문(海門)의 요충지이다. 원래부터 방비를 갖추자는 논의가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미처 겨를이 없어 오히려 변경 방비가 소루하였는데 돈대(墩臺)를 쌓고 진영(鎭營)을 갖추는 일이 지금 이미 끝났다고 보고하였다. 인천에 신설한 진(鎭)은 화도진(花島鎭)이라 부르고, 부평에 신설한 진은 연희진(延喜鎭)이라고 부를 것이다.
별장(別將)은 모두 본소(本所)에서 자벽(自辟)하고 다른 진과 현저히 구별되니 골라서 임명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자주 교체해서도 안 되니 임기는 30개월로 정하라. 지구관(知彀官)은 교련관(敎鍊官) 중에서 감당할 만한 사람을 골라 윤번(輪番)으로 차송(差送)하며 제반 조치해야 할 절목은 마땅한 대로 전령(傳令)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7월 5일 정축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거행하였는데, 통(通)을 받은 진사(進士) 윤기영(尹起榮)·정은조(鄭誾朝)에게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진휼청(賑恤廳)에서, ‘한성부(漢城府)의 민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들에 대한 휼전(恤典)의 별단(別單)을 판부(判付)한 것에 의거하여, 각부(各部)의 자내(字內)에서 집이 몽땅 무너진 것이 933호(戶)요 집이 몽땅 떠내려간 것이 31호인데 각각 돈 3냥(兩)씩 주며, 절반 무너진 집이 148호요 대부분 무너지고 조금 온전한 집이 200호요 대부분 온전하고 조금 무너진 집이 77호인데 각각 돈 2냥씩 주며, 깔려 죽은 사람은 장정 한 사람당 사승포(四升布) 2필(疋)과 돈 2냥씩을 분급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7월 6일 무인
민영상(閔泳商)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7월 7일 기묘
성균관(成均館)에서 칠석제(七夕製)를 실시했는데 부(賦)에서는 생원(生員) 조동협(趙東協)에게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7월 8일 경진
덕원 부사(德源府使) 김기수(金綺秀)를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덕원(德源)은 지금 이미 개항하였으니 예전에 등한히 여기던 때와 같을 수 없다. 이미 수신사(修信使)도 지냈으니 반드시 일본의 정형(情形)과 외교 관계 등의 문제를 자세히 알 것이다. 모름지기 잘 조처해서 두 나라 사이에 말썽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또 이곳은 능침(陵寢)이 멀지 않으니 경계를 정할 때에 잘 효유(曉諭)하여 그들이 소중한 곳 근처를 왕래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7월 9일 신사
중국 북양 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이 우리나라에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과 통상하여 일본을 견제하고 러시아 사람들이 엿보는 것을 방지할 것을 권하였는데, 이때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원(李裕元)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에,
【"2월경에 객(客)이 도착하여 작년 섣달 보름에 보낸 혜서(惠書)를 받았습니다. 외교 문제를 가지고 이득과 손실에 대해 구명하고 정세에 대한 분석을 되풀이 해가면서 설명한 것은 충성스러운 시책과 커다란 계획으로써 감복하는 마음이 한량없습니다. 요사이 많은 나이에 건강하게 지내고 나랏일도 잘 처리하여 국토를 보전하고 외적을 방어하는 조처가 모두 합당하니 매우 칭송하고 뜻을 받들게 됩니다. 일본이 귀국과 교섭하는 여러 가지 절차에 대해서는, 왜인(倭人)의 성정이 포학하고 탐욕스러운 까닭에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내디디려는 계책을 쓰는 것을 귀국이 그때마다 응수하기란 틀림없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작년에 왜국에 주재한 공사(公使) 하시독(何侍讀)이 글을 보내왔는데, 왜인들이 소개해 줄 것을 청하면서 귀국과 진심으로 친하게 지내고 서로 속이지 말기를 바란다고 여러 차례 말하였습니다. 제가 또 생각하기에 자고로 교린(交隣)의 도는 진실로 타당하다면 구적(仇敵)이 원조자가 되고 진실로 타당하지 않다면 원조자가 구적이 될 것입니다. 왜인의 말이 비록 반드시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직은 기회를 맞아서 잘 유도하여 그들의 트집을 막고 영원토록 화목하기를 바랍니다. 이 때문에 일찍이 편지를 부쳐서 먼저 의심을 보여서 구실이 되도록 하지는 말라고 권고하였던 것입니다. 최근에 살펴보면 일본의 처사가 잘못되고 행동이 망측하므로 미리 방어해야 하므로 감히 은밀히 그 개요를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은 근래 서양 제도를 숭상하여 허다한 것을 새로 만들면서 벌써 부강해질 방도를 얻었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창고의 저축은 텅 비고 국채(國債)는 쌓이고 쌓여서 도처에서 말썽을 일으키면서 널리 땅을 개척하여 그 비용을 보상하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강토가 서로 바라보이는 곳이 북쪽으로는 귀국이고 남쪽으로는 중국의 대만(臺灣)이니 더욱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유구(流球)도 역시 수백 년의 오랜 나라이고 모두 일본에 죄를 지었다고 들어본 적이 없는데도 올봄에 갑자기 병선(兵船)을 출동시켜 그 나라 임금을 폐위하고 강토를 병탄하였습니다. 중국과 귀국에 대해서도 장차 틈을 엿보아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리라고 담보하기 어렵습니다. 중국은 병력과 군량이 일본의 10배나 되기 때문에 스스로 견뎌낼 수 있겠지만 귀국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은밀히 무비(武備)를 닦고 군량도 마련하고 군사도 훈련시키는 동시에 방어를 튼튼히 하면서 기색을 나타내지 말고 그들을 잘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이웃 나라 왕의 정상적인 관계로는 조약을 성실하게 지키어 그들에게 이용될 단서를 주지 않는 것이며, 하루아침에 사건이 발생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르고 우리가 옳으면 승부는 그것에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귀국은 이전부터 문화를 숭상하는 나라로는 불리었지만 반면에 경제력은 대단히 약하기 때문에 즉시 명령을 내려 신속히 도모하여 한다 해도 짧은 시일에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일본이 ‘봉상호(鳳翔號)’, ‘일진호(日進號)’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오랫동안 부산포(釜山浦) 밖에 정박시키고 대포 사격 훈련을 하고 있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사태가 엄중하여지면 중국이 힘을 다해 돕겠지만 거리가 멀기 때문에 제 시간에 미치지 못할까봐 우려됩니다. 더욱이 걱정되는 것은 일본이 서양 사람들을 널리 초빙 해다가 해군과 육군의 병법을 훈련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대포와 군함이 우수한 면에서는 서양 사람들에 만 분의 일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귀국으로서는 대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일본이 서양의 여러 나라들에 아첨하면서 그들의 세력을 빌려서 이웃 나라를 침략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작년에 서양 사람들이 귀국에 가서 통상을 하자고 하다가 거절당하고 갔으니 그들의 마음은 종시 석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일본이 뒤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여러 나라들과 결탁하여 개항에 대한 이득을 가지고 유혹시키거나 혹은 북쪽으로 러시아와 결탁하여 영토 확장의 음모로 유인한다면 귀국은 고립되는 형세가 될 것이니 은근한 걱정이 큽니다. 시무(時務)를 알고 있는 중국 사람들은 모두 의논하기를, ‘사건이 벌어진 다음에 뒤늦게 가서 구원하는 것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다른 대책을 생각해보는 것만 못하다.’라고 합니다. 말썽도 없게 하고 사람도 편안하게 하는 도리로써 과연 능히 시종일관 문을 닫아걸고 자체로 지켜낼 수 있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서양 사람들은 가볍고 편리하고 예리한 자기들의 무기를 믿고 지구상의 여러 나라를 왕래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사실 천지개벽 이후에 없었던 판국이며 자연적인 추세이니 사람의 힘으로는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귀국이 이미 할 수 없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고 통상을 한다는 사실이 벌써 그 시초를 연 것이니, 여러 나라들도 반드시 이로부터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며 일본도 도리어 이것을 좋은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지금의 형편으로는 독(毒)으로 독을 치고 적을 끌어 적을 제압하는 계책을 써서 이 기회에 서양의 여러 나라와도 차례로 조약을 체결하고 이렇게 해서 일본을 견제해야 할 것입니다. 저 일본이 사기와 폭력을 믿고 고래처럼 들이키고 잠식(蠶食)할 것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유구를 멸망시킨 한 가지의 사실에서 단서를 드러내놓은 것입니다. 귀국에서도 어떻게 진실로 방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데, 일본이 겁을 내고 있는 것이 서양입니다. 조선의 힘만으로 일본을 제압하기에는 부족하겠지만 서양과 통상하면서 일본을 견제한다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서양의 일반 관례로는 이유 없이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대체로 각 나라들이 서로 통상을 하면 그 사이에 공법(公法)이 자연히 실행되게 됩니다. 작년에 터키가 러시아의 침범을 당하여 사태가 매우 위험하였을 때에 영국, 이탈리아와 같은 여러 나라에서 나서서 쟁론(爭論)하자 비로소 러시아는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났습니다. 저번에 터키가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면 러시아인들이 벌써 제 욕심을 채우고 말았을 것입니다. 또 구라파의 벨기에와 덴마크도 다 아주 작은 나라이지만 자체로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자 함부로 침략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강자와 약자가 서로 견제하면서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또한 남의 나라를 뛰어넘어서 먼 곳을 치려 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어려운 일로 여겼습니다. 서양의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은 귀국과 수만리 떨어져 있고 본래 다른 요구가 없으며 그 목적은 통상을 하자는 것뿐이고 귀국의 경내를 지나다니는 배들을 보호하자는 것뿐입니다.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고엽도(庫葉島), 수분하(綏芬河), 도문강(圖們江) 일대는 다 귀국의 접경이어서 형세가 서로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귀국에서 먼저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과 관계를 가진다면 비단 일본만 견제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이 엿보는 것까지 아울러 막아낼 수 있습니다. 러시아도 반드시 뒤따라서 강화를 하고 통상을 할 것입니다. 참으로 이 기회를 타서 계책을 빨리 고치고 변통할 도리를 생각할 것이지 따로 항구를 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일본이 통상하고 있는 지역에 몇 개 나라의 상인이 더 오겠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의 무역을 나누어갈 뿐이지 귀국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관세(關稅)를 정하면 나라의 경비에 적으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으며 상업에 익숙하면 무기 구입도 어렵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조약을 체결한 나라들에 때때로 관리들을 파견하여 서로 빙문(聘問)하고 정의(情誼)를 맺어둘 것입니다. 평상시에 연계를 맺어둔다면 설사 한 나라에서 침략해 오는 것과 맞닥트려도 조약을 체결한 나라들을 모두 요청하여 공동으로 그 나라의 잘못을 논의하여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 일본도 감히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이며 귀국에서도 먼 지방의 사람들을 접대하는 방도로서도 옳을 것입니다. 사건마다 강구(講求)하여 강유(剛柔)를 적절하게 하는 것을 힘쓰고 모두 협력하도록 조종한다면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방도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이 없으며, 왜인을 방어할 수 있는 계책으로서도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요즘 각 국의 공사들이 우리 총리 아문(總理衙門)에다 자주 귀국과의 상무(商務)에 대해 말해오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귀국은 정사와 법령을 모두 자체로 주관해 오고 있으니 이런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간섭하겠습니까? 단지 중국과 귀국은 한집안이나 같으며 우리나라의 동삼성(東三省)을 병풍처럼 막아주고 있으니 어찌 입술과 이가 서로 의존하는 그런 정도뿐이겠습니까? 귀국의 근심이 곧 중국의 근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제넘은 줄 알면서도 귀국을 위한 대책을 대신 생각하여 진정으로 솔직히 제기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곧 귀국 임금에게 올려서 정신(廷臣)들을 널리 모아서 심사원려(深思遠慮)하여 가부(可否)를 비밀리에 토의하기 바랍니다. 만일 변변치 못한 말이지만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먼저 그 대강을 알려주기 바랍니다. 우리 총리 아문에서도 그런 내용을 서로 알고 있어야 여러 나라들이 이 문제를 언급할 때에 기회를 보아가며 말을 하여 국면이 전환되어 가고 있다는 뜻을 서서히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종전에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 내부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힘을 합쳐 압력을 가하려고 하였으며 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옥백(玉帛)으로 하지 않고 무력을 썼던 것입니다. 그런 조약을 오랫동안 이행해 오면서 제재를 받았던 것이 매우 많았다는 것은 원근에서 다 충분히 들어서 아는 바입니다. 귀국에서 만약 무사할 때에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저들은 뜻밖의 일에 기뻐하여 당치않은 요구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편을 판매한다든가 내지(內地)에 선교(宣敎)하는 여러 큰 폐단들에 대해서 엄하게 금지시켜도 아마 저들은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로서 만약 다른 견해가 있게 되면 또한 수시로 한두 가지 적당히 참작해서 충고의 의견을 올려 전반적 국면에서는 잘못된 것이 없게 할 것입니다. 대개 정사하는 데서는 때맞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그렇게 해야 정사가 오래 유지되는 것입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하여 이해(利害)를 잘 도모하는 것이 병가(兵家)에서 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오직 집사(執事)만이 실제로 도모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 드게트〔崔鎭勝 : V.M.Deguette〕가 귀국에 나금(拿禁)되어 있는데 북경(北京)에서는 해국(該國)의 사신이 우리나라의 예부(禮部)에 공문을 보내 석방시키도록 청해 달라고 간곡히 요구하였습니다. 사실은 이 사건을 조정해서 말썽을 없애려는 생각이었는데, 아마 이미 조사해서 시행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편지를 받는 족족 이웃 나라를 사귀는 도리에 대하여 친절히 말해주는데 어찌 번거롭다고 해서 마음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털어놓지 않겠습니까? 문안을 드립니다. 글로는 간곡한 뜻을 다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유원(李裕元)의 회답 편지에, 【"이중당(李中堂) 문화전(文華殿) 태학사(太學士) 숙의백야작(肅毅伯爺爵)께 올립니다. 그동안 헌서 계관(憲書啓官) 이용숙(李容肅)의 편에 삼가 글을 써서 부치면서 유 태수(游太守)에게 부탁해서 가져다 전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10월 20일 경에 이용숙의 수본(手本)을 받았습니다. 이미 그 글이 전달되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자세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궁금한 생각이 맺혀 있습니다. 이제 공문을 바치러 가는 사신 편에 외람되게 마음속에 품고 있던 바를 고백하면서 꼭 전달될 것을 바랍니다. 올해 7월 9일에 보내준 편지를 8월 그믐 경에 받아 읽었으나 그 후 또 이럭저럭하다가 지금까지 회답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예사 소식을 알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태만해서는 안 될 것인데, 더구나 거듭 말한 사연이 순전히 우리나라의 기밀에 속하는 것을 깨우쳐준 것인데도 멍청히 듣지도 알지도 못한 것처럼 있자니 저로서도 제 자신의 변변치 못한 죄과를 얼마나 책망하게 되겠습니까? 이제 외람되게 심정을 털어놓으며 더욱 시간을 재촉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양해하여 줄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 와서 우리나라에서 일본과 화친하고 조약도 맺고 통상도 하는 것은 사실상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일이지만 그들과의 접촉에서 부디 의심하는 뜻을 보이지 말라고 한 높은 가르침은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참으면서 겉으로 유순하게 대하는 것은 사나운 체하는 성기(性氣)를 꺾자는 것인데 그들의 언동에는 엉뚱한 요구가 없지 않습니다. 규정한 이외의 딴 항구를 지적하여 개방해 달라는데 어디나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두 시간이나 승강이한 뒤에 원산진(元山津)으로 승낙해 주었습니다. 인천(仁川)은 수도 부근에 속하기 때문에 마침내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더니 어느 정도 불평을 품게는 되었으나 교제가 파탄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탐욕스럽고 교활한 수작으로 말하면 순전히 고래처럼 들이키고 잠식하자는 것입니다. 올봄에 유구국(流球國)을 멸망시킨 것이라든지 요즘 대포와 군함을 연습한 일들은 이렇게 비밀리에 기별해서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눈과 귀를 다 막고 앉아 있는 우리로서 어디서 얻어 듣겠습니까? 당신이 어진 덕으로 작은 우리나라를 돌보아준 지는 매우 오래 전부터이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이렇게 위험이 닥치거나 환난이 일어나기 전에 방지할 대책까지 강구해 주는 것이 이런 정도에까지 이를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오늘 서양 사람들의 판국은 사실상 자연적인 기운입니다. 우선 환난(患難)을 방어해야 할 중요성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또 독으로 독을 치고 적을 끌어 적을 제압하는 계책에 대해서 찬찬히 보여주니, 아무리 볼품없는 인물로 소견이 암둔하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자세히 설명하는 데야 어찌 환히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서양 각 국과 먼저 통상을 맺기만 하면 일본이 저절로 견제될 것이며, 일본이 견제되기만 하면 러시아가 틈을 엿보는 것도 걱정 없을 것이라는 것은 바로 당신의 편지의 기본 내용입니다. 이 밖에 관세를 정하는 데 대한 문제, 장사 형편을 알았다가 적용하는 데 대한 문제, 각종 폐단을 엄격히 금지할 데 대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대책이 그리도 세밀합니까? 참으로 황송하고 감사합니다. 어찌 감히 그 말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스스로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한쪽 모퉁이에 외따로 있으면서 옛 법을 지키고 문약(文弱)함에 편안히 거처하며 나라 안이나 스스로 다스렸지 외교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서양의 예수교는 오도(吾道)와 달라 사실 인간의 윤리를 그르치는 것으로서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맹렬히 타오르는 불처럼 두려워하고 독한 화살처럼 피하고 귀신을 대하듯 조심하고 멀리합니다. 요사이 몰래 숨어들어온 프랑스 사람을 체포하였다가 자문을 받고 해송(解送)하였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예수교에 물든 자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미루어 보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편을 판다든지 예수교를 퍼뜨린다든지 해도 바로 약하고 순한 우리의 힘으로는 성난 짐승처럼 덤벼드는 저들을 당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밝게 알 수 있습니다. 옛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먼 나라와 교류하고 가까운 나라를 친다.’라고 하였고, 또 ‘오랑캐를 끌어 들여 오랑캐를 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적을 끌어 적을 막는 계책인 것입니다. 그러나 목전의 형편은 옛날과 달라서 아무리 강성하여 힘 있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아침에는 외교, 저녁에는 무력 두 방면에서 상대하다가는 장차 분주한 통에 힘이 다하여 자기부터 먼저 패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처럼 문약한 나라가 어떻게 옛일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실로 할 수 없는 것이지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신농씨(神農氏)는 백 가지 풀을 맛보다가 독을 만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나 신농씨가 아닌 사람이 그대로 본받아 했다가는 한번 독을 만나 죽으면 그만이지 다시 살아날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적을 제어한다는 노릇이 먼저 적의 공격을 받게 되고 독을 치려는 노릇이 먼저 독에 중독 될 것입니다. 은근히 걱정되는 것은 한번 독에 걸리면 다시 일어날 수 없으니 어느 겨를에 적을 제어하겠습니까? 당신의 위엄과 명망이 천하에 떨치고 계교와 책략이 내외의 정세에 들어맞아 저 강대한 러시아나 복잡한 서양 나라들이나 변덕이 많은 일본 사람들도 진심으로 굽혀들어 무릎 꿇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일본 사람들이 대만(臺灣)을 노린다고 하여도 해를 입을 턱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오랫동안 당신의 덕을 입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공법(公法)은 이미 이유 없이 남의 나라를 빼앗거나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러시아와 같은 강국도 귀국에서 군대를 철수하였으니, 혹시 우리나라가 죄 없이 남의 침략을 당하는 경우에도 여러 나라에서 공동으로 규탄하여 나서겠습니까? 한 가지 어리둥절하여 의심이 가면서 석연치 않는 점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유구왕(流球王)을 폐하고 그 강토를 병탄한 것은 바로 못된 송(宋) 나라 강왕(康王)의 행동이었습니다. 구라파의 다른 나라들 중에서는 응당 제(齊) 나라 환공(桓公)처럼 군사를 일으켜 형(邢) 나라를 옮겨놓고 위(魏) 나라를 보호하거나, 혹은 일본을 의리로 타이르기를 정(鄭) 나라 장공(莊公)이 허(許) 나라의 임금을 그대로 두게 한 것처럼 하는 나라가 있음직한데 귀를 기울이고 들어봐도 들리는 말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터키를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준 것으로 보아서는 공법이 믿을 만한데, 멸망한 유구국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공법이 그 무슨 실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일본 사람들이 횡포하고 교활하여 여러 나라들을 우습게보면서 방자하게 제멋대로 행동해서 공법을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까? 벨기에와 덴마크는 사마귀만 한 작은 나라로서 여러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지만 강자와 약자가 서로 견제함으로써 지탱되는데 유구왕은 수 백 년의 오랜 나라로서 그대로 지탱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지역이 따로 떨어져 있고 여러 나라들과 격리되어 있어서 공법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까? 우리나라는 기구하게도 지구의 맨 끄트머리에 놓여 있어 터키, 유구국, 벨기에, 덴마크와 같은 작은 나라들보다도 더 가난하고 약소합니다. 게다가 서양과의 거리도 아주 멀어 무력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더욱 어림없는 일이고 옥백으로 주선하려고 하여도 자체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저 일본 사람들은 통상에 경험이 있고 영업에 재능이 있어서 부강하게 되는 방도를 다 알고 있지만 오히려 저축이 거덜 나고 빚만 쌓이게 된 것을 탄식한답니다. 설령 우리나라가 정책을 고쳐서 항구를 널리 열어 가까운 나라들과 통상하고 기술을 다 배운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들과 교제하고 거래하다가 결국 창고를 몽땅 털리고 말 것입니다. 저축이 거덜 나고 빚이 쌓이는 것이 어찌 일본 사람의 정도에만 그치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나라는 토산물도 보잘것없고 물품의 질이 낮다는 것은 세상이 익히 아는 바입니다. 각국에서 멀리 무역하러 온다 하여도 몇 집끼리 운영하는 시장과 같아서 천리 밖에서 온 큰 장사를 받아주기는 어려우니, 주인이나 손님이나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자체로 어떻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 그러한 것입니다. 절름발이로서 먼 길을 갈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외교란 말을 하지 말고 앉아서 제 나라나 지키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중국의 규모는 비유하면 하늘과 땅처럼 광대하기 때문에 크건 작건 한 풀무로 불어치우고 곱건 밉건 한 모양으로 만들어 기린이건 봉황이건 뱀이건 용이건 모두 다 포함하여 그때그때의 형편에 부합시켜도 태산반석에 올려지고 따라서 모든 나라가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섣불리 본받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하루살이가 큰 새처럼 날아보려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진심으로 타일러주어 되도록 우리를 잘되게 하고 해를 면하게 하려는 생각이 간절하고 진지하니 부형이 자제에게 대한 생각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러나 형편이 허락지 않아 그대로 받들어 실행하지 못하니, ‘워낙 어리석은 사람은 종신토록 깨닫지 못한다.’고 한 말이 바로 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딴에 의탁하고 믿는 것으로 말하면 서양 나라들과 일본도 당신의 위엄 아래에서는 감히 방자하게 놀지 못하는 만큼 우리나라가 길이 당신의 덕을 입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지도를 받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밤낮으로 바라는 소원입니다. 생각이 궁하고 말이 모자라 더 쓸 바를 모르니 어리석은 사람을 가엾이 여기어 그 죄를 용서하기 바랍니다. 다 쓰지 못하니 살펴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원본】 20책 16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599면
【분류】외교-러시아[露] / 외교-미국(美) / 외교-독일[德] / 외교-영국(英) / 외교-야(野)
하였다. 이유원(李裕元)의 회답 편지에,
【"이중당(李中堂) 문화전(文華殿) 태학사(太學士) 숙의백야작(肅毅伯爺爵)께 올립니다. 그동안 헌서 계관(憲書啓官) 이용숙(李容肅)의 편에 삼가 글을 써서 부치면서 유 태수(游太守)에게 부탁해서 가져다 전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10월 20일 경에 이용숙의 수본(手本)을 받았습니다. 이미 그 글이 전달되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자세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궁금한 생각이 맺혀 있습니다. 이제 공문을 바치러 가는 사신 편에 외람되게 마음속에 품고 있던 바를 고백하면서 꼭 전달될 것을 바랍니다. 올해 7월 9일에 보내준 편지를 8월 그믐 경에 받아 읽었으나 그 후 또 이럭저럭하다가 지금까지 회답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예사 소식을 알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태만해서는 안 될 것인데, 더구나 거듭 말한 사연이 순전히 우리나라의 기밀에 속하는 것을 깨우쳐준 것인데도 멍청히 듣지도 알지도 못한 것처럼 있자니 저로서도 제 자신의 변변치 못한 죄과를 얼마나 책망하게 되겠습니까? 이제 외람되게 심정을 털어놓으며 더욱 시간을 재촉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양해하여 줄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 와서 우리나라에서 일본과 화친하고 조약도 맺고 통상도 하는 것은 사실상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일이지만 그들과의 접촉에서 부디 의심하는 뜻을 보이지 말라고 한 높은 가르침은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참으면서 겉으로 유순하게 대하는 것은 사나운 체하는 성기(性氣)를 꺾자는 것인데 그들의 언동에는 엉뚱한 요구가 없지 않습니다. 규정한 이외의 딴 항구를 지적하여 개방해 달라는데 어디나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두 시간이나 승강이한 뒤에 원산진(元山津)으로 승낙해 주었습니다. 인천(仁川)은 수도 부근에 속하기 때문에 마침내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더니 어느 정도 불평을 품게는 되었으나 교제가 파탄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탐욕스럽고 교활한 수작으로 말하면 순전히 고래처럼 들이키고 잠식하자는 것입니다. 올봄에 유구국(流球國)을 멸망시킨 것이라든지 요즘 대포와 군함을 연습한 일들은 이렇게 비밀리에 기별해서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눈과 귀를 다 막고 앉아 있는 우리로서 어디서 얻어 듣겠습니까? 당신이 어진 덕으로 작은 우리나라를 돌보아준 지는 매우 오래 전부터이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이렇게 위험이 닥치거나 환난이 일어나기 전에 방지할 대책까지 강구해 주는 것이 이런 정도에까지 이를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오늘 서양 사람들의 판국은 사실상 자연적인 기운입니다. 우선 환난(患難)을 방어해야 할 중요성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또 독으로 독을 치고 적을 끌어 적을 제압하는 계책에 대해서 찬찬히 보여주니, 아무리 볼품없는 인물로 소견이 암둔하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자세히 설명하는 데야 어찌 환히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서양 각 국과 먼저 통상을 맺기만 하면 일본이 저절로 견제될 것이며, 일본이 견제되기만 하면 러시아가 틈을 엿보는 것도 걱정 없을 것이라는 것은 바로 당신의 편지의 기본 내용입니다. 이 밖에 관세를 정하는 데 대한 문제, 장사 형편을 알았다가 적용하는 데 대한 문제, 각종 폐단을 엄격히 금지할 데 대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대책이 그리도 세밀합니까? 참으로 황송하고 감사합니다. 어찌 감히 그 말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스스로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한쪽 모퉁이에 외따로 있으면서 옛 법을 지키고 문약(文弱)함에 편안히 거처하며 나라 안이나 스스로 다스렸지 외교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서양의 예수교는 오도(吾道)와 달라 사실 인간의 윤리를 그르치는 것으로서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맹렬히 타오르는 불처럼 두려워하고 독한 화살처럼 피하고 귀신을 대하듯 조심하고 멀리합니다. 요사이 몰래 숨어들어온 프랑스 사람을 체포하였다가 자문을 받고 해송(解送)하였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예수교에 물든 자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미루어 보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편을 판다든지 예수교를 퍼뜨린다든지 해도 바로 약하고 순한 우리의 힘으로는 성난 짐승처럼 덤벼드는 저들을 당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밝게 알 수 있습니다. 옛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먼 나라와 교류하고 가까운 나라를 친다.’라고 하였고, 또 ‘오랑캐를 끌어 들여 오랑캐를 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적을 끌어 적을 막는 계책인 것입니다. 그러나 목전의 형편은 옛날과 달라서 아무리 강성하여 힘 있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아침에는 외교, 저녁에는 무력 두 방면에서 상대하다가는 장차 분주한 통에 힘이 다하여 자기부터 먼저 패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처럼 문약한 나라가 어떻게 옛일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실로 할 수 없는 것이지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신농씨(神農氏)는 백 가지 풀을 맛보다가 독을 만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나 신농씨가 아닌 사람이 그대로 본받아 했다가는 한번 독을 만나 죽으면 그만이지 다시 살아날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적을 제어한다는 노릇이 먼저 적의 공격을 받게 되고 독을 치려는 노릇이 먼저 독에 중독 될 것입니다. 은근히 걱정되는 것은 한번 독에 걸리면 다시 일어날 수 없으니 어느 겨를에 적을 제어하겠습니까? 당신의 위엄과 명망이 천하에 떨치고 계교와 책략이 내외의 정세에 들어맞아 저 강대한 러시아나 복잡한 서양 나라들이나 변덕이 많은 일본 사람들도 진심으로 굽혀들어 무릎 꿇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일본 사람들이 대만(臺灣)을 노린다고 하여도 해를 입을 턱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오랫동안 당신의 덕을 입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공법(公法)은 이미 이유 없이 남의 나라를 빼앗거나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러시아와 같은 강국도 귀국에서 군대를 철수하였으니, 혹시 우리나라가 죄 없이 남의 침략을 당하는 경우에도 여러 나라에서 공동으로 규탄하여 나서겠습니까? 한 가지 어리둥절하여 의심이 가면서 석연치 않는 점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유구왕(流球王)을 폐하고 그 강토를 병탄한 것은 바로 못된 송(宋) 나라 강왕(康王)의 행동이었습니다. 구라파의 다른 나라들 중에서는 응당 제(齊) 나라 환공(桓公)처럼 군사를 일으켜 형(邢) 나라를 옮겨놓고 위(魏) 나라를 보호하거나, 혹은 일본을 의리로 타이르기를 정(鄭) 나라 장공(莊公)이 허(許) 나라의 임금을 그대로 두게 한 것처럼 하는 나라가 있음직한데 귀를 기울이고 들어봐도 들리는 말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터키를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준 것으로 보아서는 공법이 믿을 만한데, 멸망한 유구국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공법이 그 무슨 실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일본 사람들이 횡포하고 교활하여 여러 나라들을 우습게보면서 방자하게 제멋대로 행동해서 공법을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까? 벨기에와 덴마크는 사마귀만 한 작은 나라로서 여러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지만 강자와 약자가 서로 견제함으로써 지탱되는데 유구왕은 수 백 년의 오랜 나라로서 그대로 지탱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지역이 따로 떨어져 있고 여러 나라들과 격리되어 있어서 공법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까? 우리나라는 기구하게도 지구의 맨 끄트머리에 놓여 있어 터키, 유구국, 벨기에, 덴마크와 같은 작은 나라들보다도 더 가난하고 약소합니다. 게다가 서양과의 거리도 아주 멀어 무력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더욱 어림없는 일이고 옥백으로 주선하려고 하여도 자체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저 일본 사람들은 통상에 경험이 있고 영업에 재능이 있어서 부강하게 되는 방도를 다 알고 있지만 오히려 저축이 거덜 나고 빚만 쌓이게 된 것을 탄식한답니다. 설령 우리나라가 정책을 고쳐서 항구를 널리 열어 가까운 나라들과 통상하고 기술을 다 배운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들과 교제하고 거래하다가 결국 창고를 몽땅 털리고 말 것입니다. 저축이 거덜 나고 빚이 쌓이는 것이 어찌 일본 사람의 정도에만 그치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나라는 토산물도 보잘것없고 물품의 질이 낮다는 것은 세상이 익히 아는 바입니다. 각국에서 멀리 무역하러 온다 하여도 몇 집끼리 운영하는 시장과 같아서 천리 밖에서 온 큰 장사를 받아주기는 어려우니, 주인이나 손님이나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자체로 어떻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 그러한 것입니다. 절름발이로서 먼 길을 갈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외교란 말을 하지 말고 앉아서 제 나라나 지키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중국의 규모는 비유하면 하늘과 땅처럼 광대하기 때문에 크건 작건 한 풀무로 불어치우고 곱건 밉건 한 모양으로 만들어 기린이건 봉황이건 뱀이건 용이건 모두 다 포함하여 그때그때의 형편에 부합시켜도 태산반석에 올려지고 따라서 모든 나라가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섣불리 본받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하루살이가 큰 새처럼 날아보려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진심으로 타일러주어 되도록 우리를 잘되게 하고 해를 면하게 하려는 생각이 간절하고 진지하니 부형이 자제에게 대한 생각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러나 형편이 허락지 않아 그대로 받들어 실행하지 못하니, ‘워낙 어리석은 사람은 종신토록 깨닫지 못한다.’고 한 말이 바로 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딴에 의탁하고 믿는 것으로 말하면 서양 나라들과 일본도 당신의 위엄 아래에서는 감히 방자하게 놀지 못하는 만큼 우리나라가 길이 당신의 덕을 입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지도를 받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밤낮으로 바라는 소원입니다. 생각이 궁하고 말이 모자라 더 쓸 바를 모르니 어리석은 사람을 가엾이 여기어 그 죄를 용서하기 바랍니다. 다 쓰지 못하니 살펴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원본】 20책 16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599면
【분류】외교-러시아[露] / 외교-미국(美) / 외교-독일[德] / 외교-영국(英) / 외교-야(野)
하였다.
7월 10일 임오
지평(砥平), 평산(平山), 원주(原州) 등 고을에서 표호(漂戶), 퇴호(頹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덕원부(德源府)의 응행사무절목(應行事務節目)을 아뢰었다.
【하나, 본부의 부사(府使)는 이미 문당상(文堂上)으로 임명하고, 지금 개항을 맞아 주관하여 검찰(檢察)할 일이 실로 많고 또 사태는 전과 다름이 있으니, 이제부터는 독진(獨鎭)으로서 시행해야 할 것. 하나, 일이 변경 정세와 관련되는 것은 곧바로 수계(修啓)하여 등보(謄報)하고 그 밖에 백성이나 고을에 관계되는 것은 순영(巡營)에 보고한 다음 전보(轉報)해서 처리하도록 할 것. 하나, 옥로(玉鷺)를 장식하고 쌍교(雙轎)를 타는 것은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규례대로 할 것. 하나, 부임하거나 교체할 때의 노문 마패(路文馬牌)와 지참(支站) 등도 동래 부사의 규례대로 할 것. 하나, 임기가 차면 면간교대(面看交代)하고 감영(監營)의 연명(延命)도 동래 부사의 규례에 따라 할 것. 하나, 각 항의 차사원(差使員)은 이제부터 영영 없앨 것. 하나, 의주(義州)와 동래의 양부(兩府)는 비록 가족을 데리고 가는 규례가 없다 하더라도 본 고을은 외지의 먼 변경 지방과는 차이가 있으니 가족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할 것. 하나, 저들과 서로 만날 때 데리고 가는 비장(裨將)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2명 정도를 데리고 가고, 요포(料布)는 감영(監營)과 고을에서 상의하여 마련하며 개항 후에는 세전(稅錢) 가운데서 조획(措劃)할 것. 하나, 훈도(訓導) 1원(員), 역학(譯學) 1원은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선발해 보내되 거처하는 곳은 우선 본 부의 관청으로 하고, 사환(使喚)과 하인도 역시 부산(釜山)의 규례대로 정하여 줄 것. 하나, 동래부(東萊府)의 통사(通詞) 몇 명을 임시로 빌려서 보내고, 본 부의 아랫사람 가운데서 익숙하게 거행하도록 할 것. 하나, 본 고을은 이미 개항을 허락하였으니 상선(商船)이 연해의 포구에 드나들 때 만약 스스로 각자 그 고을에서 주관하게 한다면 항구 지역이 난잡해지는 폐단이 생길 것이니, 안변(安邊), 영흥(永興), 문천(文川)의 각 포구는 본 부에서 모두 관리하고 통솔하도록 하되, 각자 그 고을에서 조세를 거두는 등의 일은 이전처럼 각각 그 고을 자체에서 받고, 본 부의 아랫사람들이 토색질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폐단은 일절 엄금할 것. 하나, 미진한 조항은 추후에 마련할 것.】
【원본】 20책 16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1책 600면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7월 11일 계미
인천(仁川), 부평(富平)의 포대(砲臺)와 진사(鎭舍)의 역사(役事)를 감독한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고, 전 유수(前留守) 이경하(李景夏), 전 어영 대장(前御營大將) 신정희(申正熙)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7월 12일 갑신
민치상(閔致庠)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양근(楊根), 거제(巨濟), 예천(醴泉) 등 고을에서 표호(漂戶), 퇴호(頹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근필(李根弼)이, ‘밀양군(密陽郡) 본 창고의 「지(地)」 자(字) 조선(漕船)에 실은 대동미(大同米) 1,004석(石)은 선주(船主) 정두성(丁斗星)이 임선(賃船) 3척에 나누어 싣고 막 국경을 넘어 잠매(潛賣)하였는데, 그중에 140석(石)을 실은 배가 천성 만호(天城萬戶)가 있는 데서 잡혔습니다. 정가(丁哥)와 잠매한 배는 당장 붙잡을 계획입니다. 해당 부사(府使) 신석균(申奭均)은, 국경을 넘어 잠매하는 것이 비록 뜻밖의 일이긴 하지만 미리 더 단속하고 신칙하였더라면 어찌 전에 없던 이런 변고가 있었겠습니까. 직무를 소홀히 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그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라고 아뢰었다.
7월 13일 을유
수원(水原), 금산(錦山), 선천(宣川) 등 고을에서 표호(漂戶), 퇴호(頹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원산진 개항 예약(元山鎭開港豫約)에 대해 의정(議定)하였다.
〈원산진 개항 예약(元山鎭開港豫約)〉
제1관
조선 정부는 【조선력(朝鮮曆)으로는 경진년(1880) 3월, 일본력(日本曆)으로는 명치(明治) 13년 5월이다.】 이후부터 마땅히 일본 사람의 무역을 위하여 함경도(咸鏡道) 원산진(元山鎭)을 개항하고, 그 거류지는 장덕산(長德山)과 그 서쪽 해안에 정하며, 부지 면적은 초량관(草梁館)에서 실측(實測)한 데 근거한다.
제2관
거류지(居留地)의 세금은 그 땅에서 종전에 받던 세액을 그대로 따르되, 3조에 기재된 두 나라 정부의 경비를 다시 가감하고 계산해서 의정(議定)한다.
제3관
일본 사람들의 거류지 건설은 조선 정부가 책임진다. 그러므로 양국 위원(委員)들이 모여서 협의하여 무성한 잡목과 돌무지들을 제거하는 것과 도로와 교량을 조성하는 것은 조선 정부가 마련한다. 다만 집터를 안배하거나 도로를 수리하는 등의 일은 일본 정부가 책임진다.
제4관
거류지 근방의 지장이 없는 땅을 일본 사람들의 묘지로 하되 조액(租額)은 그 토지를 살려 종전에 받던 대로 납부한다.
제5관
조선 정부는 장덕산(長德山) 서쪽 해안으로부터 장덕도(長德島)까지 부두를 쌓고, 특별히 주의해서 수시로 수리하여 화물을 부리고 싣거나 선박이 정박하는 데 편리하게 한다. 조선의 각종 선박도 역시 해관(海關)에 단자(單子)를 제출하고 선조(船租)를 조납(照納)하면 이 안에 정박할 수 있다. 본 국의 각 지방에 곧바로 오가면서 운수(運輸)하는 것은 진실로 금지할 수 없다. 조선 사람이 일본배를 타고 개항한 각 항구로 드나들 때에는 그의 거주지와 성명, 소지한 물품을 모두 해관(海關)에 보고해야 승인문건을 발급할 수 있다. 단 제출하는 단자와 보고 명세는 되도록 간결하게 해서 미야모토〔宮本〕 이사관(理事官)의 명치 9년 8월 29일 편지의 취지에 어긋남이 없도록 한다. 부두를 장덕도(長德島)까지 쌓는 문제는 추후에 지형을 살펴보고 형편을 고려하여 적당한 대로 의정한다.
제6관
조선 정부는 부두에 해관을 두어 수출입하는 물품을 검사한다. 해관 앞에 창고를 지어 검사할 때에 비바람에 젖거나 습기가 차는 것을 피하는 데 쓴다.
제7관
일본 사람들이 한가롭게 통행할 수 있는 이정(里程)은 마땅히 부산항(釜山港)의 규례에 따라 사방 10리로 정한다. 만약 통행을 금지한 지대인 용주리(湧珠里)와 명석원(銘石院)이 10리 안에 있으면 마땅히 방해되지 않는 곳으로 보충하고 덕원부(德源府)에 이르는 것은 동래부의 규례대로 한다. 단 원산진(元山津)과 갈마포(葛麻浦)의 도로가 만약 이 이정 안에 있어서 통행을 금지한 곳이 있으면 마땅히 따로 한 길을 내어 통행에 편리하게 한다.
이상의 7개 조항 내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마땅히 그 지역에 가서 상의하여 결정한다.
부기(附記)
본 예약(豫約)은 7월 13일 예조 판서(禮曹判書) 심순택(沈舜澤)과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거듭 확인해보고 결정하였다.
7월 15일 정해
반접관(伴接官) 홍우창(洪祐昌)이,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예조에서 회답 서계(書契)를 받고 이어 다담례(茶啖禮)를 거행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7월 16일 무자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의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학(金炳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 판중추부사 한계원(韓啓源),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좌의정 김병국(金炳國)이다.】 대략에,
"일본 공사(公使)가 덕원(德源)과 인천(仁川)을 개항할 것을 와서 요청하면서 여러 차례의 공적인 사무에서 계속 시끄럽게 굴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덕원을 특별히 허락한 것은 바로 여러 대신들과 의정부 당상이 공식 석상에서 의논하여 정한 것입니다. 인천에 대해서는 서울에서 100리 내에 가까이 있는 관계로 허락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높고 낮은 관리들의 여러 의견이 시종일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니, ‘신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모여 의논하였는데, 가부간에 견해들이 같지가 않았습니다.’ 하였고, 또 ‘편리한 쪽으로 귀결하자는 의논이 부득이한 데서 나왔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라고도 하였으며, 또 ‘허락하기 어려운 것을 선뜻 허락하여 끝없는 걱정을 열어놓았습니다.’라고도 하였는데, 마치 신들의 의견이 각각 달라서 되도록 편리한 쪽을 따라 허락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선뜻 허락한 듯이 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의 의혹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신들이 지난번에 사적으로 모인 자리에서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는 의견이 이 대신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의정부에서 엄한 말로 굳게 거절한 것도 역시 문서를 만든 것이 있어서 함께 돌려본 다음에 저들의 사신에게 보내어 타일렀습니다. 그 글이 확연히 좌계(左契)와 같은 만큼 신들이 한결같은 말로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고 분명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신들이 정말 만약 편리한 쪽으로 귀결하자는 논의에서 선뜻 허락해도 좋다는 의견을 내놓았다면 이것은 신들이 나랏일을 그르친 것이니, 그 죄가 어디에 해당하겠습니까?
신들은 진실로 응당 그 자리에서 모두 밝혀야했으나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의리상 자연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침묵을 지키면서 끌어왔습니다. 그런데 공적인 일이 지금 끝나 이제서야 사적인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연명으로 사실을 들추어 성상께 번거롭게 아룁니다.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살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의 말이 참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영중추부사가 올린 상소문의 문구에는 간혹 깊이 생각지 못한 것이 있는데, 바로 묘당의 일에 대해 논란한 데서 연유한 것이니, 경들은 굳이 지나치게 인혐(引嫌)할 필요 없다. 경들은 잘 헤아리라."
하였다.
7월 17일 기축
무위소(武衛所)에서 아뢰기를,
"방금 의정부 초기에 대해 계하(啓下)하신 것을 보니,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치화(尹致和)가 보고한 바로 인하여 해당 고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조항들을 본소(本所)로 하여금 품지하여 거행하도록 청하였습니다. 그 여러 조항 가운데서 운감(運監)에서 축낸 쌀과 콩값 5,000여 냥(兩)은 병자년(1876) 유고조(留庫條)의 쌀과 콩을 발매(發賣)할 때 축낸 것을 나누어 징수한 것입니다. 쌓아두어 썩고 상하는 것은 형편상 당연하여 이미 포흠한 것과는 다르니, 마땅히 참작해 주어야 합니다. 청한 대로 특별히 탕감해 주도록 허락하소서.
구포배년 미납전(舊逋排年未納錢) 1만 7,000여 냥, 불입급수쇄전(不入給收刷錢) 1만 2,000여 냥, 백성들의 토지에 부과한 세금과 입본(立本)한 쌀값의 미수조(未收條)에 부친 돈 1만 5,000여 냥은 모두 막중한 나라 재산으로서 꼭 받아내어야 하는 것이지만 간혹 이 사이에 편파적으로 징수한다는 원성이 있고, 또 오랜 동안 계속되어 온 터라 거두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변방 고을의 백성들의 사정도 마땅히 고려해야 하므로 모두 3분의 2를 탕감해 주어서 장수와 아전, 군사와 백성들이 조정에서 넉넉히 구휼해 주는 혜택을 골고루 입게 하소서.
입급(入給) 제도를 없애버린 뒤에 쌀, 콩, 무명을 판매한 돈과 아직 상납하지 않은 상대전(詳代錢) 14만 7,300여 냥은 문서를 가져다가 따져보니, 수량이 많이 어긋나서 해당 고을에 공문을 띄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으니, 하나하나 구별해서 성책(成冊)하여 다시 상세히 보고하도록 한 연후에야 근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정미(詳定米)를 영구히 떼 주는 문제에 대해서는 선뜻 의논하기 곤란하니, 별포사(別砲士)를 더 두는 문제와 함께 다시 의논하되, 우선 성책하여 보고하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품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반접관 홍우창(洪祐昌)이, ‘일본(日本) 대리공사(代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수원(隨員)을 데리고 본 국으로 떠나가는데 종자(從者) 25명은 그대로 관소(館所)에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강로(姜㳣)가 올린 차자(箚子)의 대략에,
"인천(仁川)을 결단코 개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바로 온 나라 사람들의 똑같은 생각이고 조정의 논의에서도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지난번 사적인 자리에서 회의할 때 신은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였으니,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이 자인(自引)하는 연명 차자에 신은 애초에 참석하지 못한 관계로 이름을 나란히 끼워 넣을 수는 없으나, 그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참여했건 참여하지 않았건 실로 차이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의 의논은 어제 연명으로 차자한 것인데, 이미 비답을 내려 타일렀으니 경도 마땅히 이해하라."
하였다.
7월 18일 경인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상주(尙州) 등 고을에서 표호(漂戶), 퇴호(頹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원(李裕元)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지난번에 올린 상소는 외람된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서, 이미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고 마침내 목구멍을 움직임을 면치 못하여 결국에는 여러 대신들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게 하였으니, 신은 너무도 황공하고 부끄러워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신은 본래 고지식하여 처세술에 어두워 일을 만나면 잘난 체하여 함께하려는 사람이 적습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물러가려고 하였으나 여러 번 만류하는 은혜를 입어 중추부에서 배회하며 잔두(棧豆)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 홀연히 일본 사신이 자주 오자 간혹 논의하는 말석(末席)에 참여하였는데 비록 조금 다른 의견이 있었기는 하였지만 별로 화기(和氣)를 잃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천(仁川)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생각에 다만 근심스럽기만 하여 말이 저도 모르게 당돌해졌고 멍청히 말한 것은 일에 나아가 일을 논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시비는 우선 내버려 두어 논의하지 않았지만 공적인 일이 온당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다행한 일입니다. 일개 신 같은 사람이 함부로 논의한 죄과를 받는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그 책임을 사양하겠습니까? 애석한 바는 보잘 것 없는 신이 혼미하여 실수해서 조정의 기상을 어지럽혀 이 지경이 되게 하였으니, 신 자신의 입장에서 신을 볼 때도 역시 슬픕니다. 바삐 짧은 글을 지어 역마(驛馬)를 달려 모두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굽어 살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말이 곧 여러 대신들의 말인데 어째서 함부로 논의하였다고 자처하는가. 또 굳이 이와 같이 인혐할 필요는 없으니 경은 헤아리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9일 신묘
전교하기를,
"지난번 반접관에 대한 처분과 판찰관(辦察官) 이하에게 죄를 준 것은 참작할 것이 없지 않으니, 모두 특별히 용서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각종 쌀과 콩 가운데서 오래전부터 아직 거두어 상납하지 못한 것은 각영(各營)과 각사(各司)로 하여금 각 도에 엄하게 신칙하여 얼음이 얼어붙기 전에 실어 올려 보내게 하고, 이미 도착한 것은 3일 내로 창고에 넣고 배는 그대로 곧바로 내려 보내어 빨리 다시 운반하도록 하라. 실어다 바칠 때에는 조선(漕船)이건 임선(賃船)이건 막론하고 선가(船價)만 주고, 경사(京司)의 정비(情費) 명색은 일절 엄금하라. 이렇게 신칙한 뒤에도 또 토색질하여 사사로이 서로 주고받는 폐단이 있을 때에는 해당 원역(員役)과 감색배(監色輩)는 적발해서 엄하게 징벌하고, 신칙하지 못한 당상(堂上)과 낭청(郞廳) 역시 엄중한 추궁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일로 특별히 분부하라."
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방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명응(李明應)의 보고를 보니, ‘서천군(舒川郡)에서 몇 해 전에 사환미(社還米) 경납조(京納條)를 바다에 빠뜨렸다가 건져낸 쌀 738석(石)을 매 섬당 시가(市價)에 따라 7전씩에 팔았는데, 건지지 못한 쌀 162석은 매 섬당 7전씩 세곡으로서 건져 낸 쌀을 파는 규례에 따라 바치도록 허락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해군(該郡)은 흉년을 거친 이후로 쌓인 폐단을 아직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특별히 구휼하는 정사를 실시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미 건져낸 쌀은 보고한 바 대로 본가(本價)로 상납하게 하고 건지지 못한 쌀은 특별히 탕감해 주도록 호조와 해도(該道)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심이택(沈履澤)의 보고를 보니, ‘지도(智島)와 나주(羅州) 두 목장은 병자년(1876)과 정축년(1877) 두 해에 가혹한 기근과 전염병의 피해를 입었는데, 얼마 남지 않은 백성들이 이미 둔세(屯稅)를 내고 또 정공(正供)까지 내야 하나 형편상 진실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도에서 바치는 신미년(1871)에 가결(加結) 174결 남짓과 나주 목장에서 관할하는 자은(慈恩), 장산(長山), 압해(押海) 세 섬에서 호조와 선혜청에 신미년에 바쳐야 할 결수(結數) 98결 남짓은 모두 우선 그만두게 하였다가 섬의 백성들이 불어나기를 기다려 다시 조세를 내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것은 원장(元帳) 외에 조사해 낸 것은 아니지만 이미 목세(牧稅)를 바친 데다 정부(正賦)를 독촉하는 것이니, 이는 한 땅에서 두 가지 세를 내는 것이 됩니다. 두 목장에서 신미년에 바쳐야 하는 세금은 모두 당분간 그만두게 하고, 올가을부터 개간을 권장하도록 철저히 신칙해서 즉시 결총(結總)을 회복하도록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 심이택의 보고를 보니, ‘영광군(靈光郡)에서 병자년(1876)과 정축년(1877) 이래로 사람이 줄고 토지가 묵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심한 것이 바로 서쪽의 아홉 개 면(面)의 진결(陳結)입니다. 조세를 감면받지 못한 남은 백성들도 역시 장차 모두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진결 1,400결 남짓을 3년 동안 임시로 조세를 감면해 주고 병자년과 정축년 두 해의 미납조(未納條)의 상대전(詳代錢)은 7년 동안 나누어 바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두 해 몫의 정부(正賦)를 대납(代納)하도록 허락해 주고 궁결(宮結)을 원래 정가(定價)대로 시행하여 균역세(均役稅)의 3분의 1을 총량을 줄여 준 것은 진실로 드문 혜택입니다. 그런데 또다시 상대전의 기한을 늘여주기를 청하고 진결의 조세를 덜어주기를 청한 것은 더욱이 규례 밖의 일입니다. 그렇지만 몇 해 전 흉년은 해군이 가장 심하니, 보호해서 편안히 살 방도를 조정에서 시종일관 각별히 시행하지 않는다면 실마리를 찾기가 매우 곤란합니다. 서쪽 9개 면(面)의 진결은 절반을 다음해까지 조세를 감해 주고, 상대전은 3년 동안 나눠 바쳐서 백성과 고을을 온전히 하도록 해도에 관문으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0일 임진
이종승(李鍾承)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홍우길(洪祐吉)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구준현(具駿鉉)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개성 유수(開城留守) 조경하(趙敬夏)가 본영(本營)에서 관서(關西)의 소미(小米) 2만 석(石)의 올해 모조(耗條) 2,000석을 규례대로 나누어 달라고 장계(狀啓)로 청하였습니다. 지방(支放)을 급대(給代)하는 것은 연례적인 일이 되어 버렸으니 해서(海西)에 소재한 병인년(1866) 별비곡(別備穀)의 모조에서 이 수량만큼 획송(劃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2일 갑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상소하여 재상직을 사직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7월 23일 을미
신재검(申在儉)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7월 25일 정유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봉조하(奉朝賀), 종친(宗親), 의빈(儀賓), 시임 각신(時任閣臣)과 원임 각신(原任閣臣), 육조(六曹)와 양사(兩司)의 장관, 종정경(宗正卿), 2품 이상, 승지와 사관, 홍문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사찬(賜饌)하라고 명하였다. 성상의 탄신일이었기 때문이다.
7월 26일 무술
홍우창(洪祐昌)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호익(李鎬翼)을 참의(參議)로 삼았다.
7월 28일 경자
이병문(李秉文)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조숙하(趙肅夏)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몹쓸 전염병이 유행하여 수도와 지방에서 사망하는 근심이 많이 있다고 하니, 듣기에 매우 걱정스럽다. 별려제(別厲祭)를 날을 택하지 말고 지내도록 예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듣건대 지금 몹쓸 전염병이 성행한다고 하니, 각영(各營)과 각사(各司)에서는 중한 죄인 외에는 모두 방송(放送)하라. 비록 공화(公貨)를 탐오한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우선 보방(保放)하였다가 전염병이 말끔히 가신 다음 전교를 기다릴 것 없이 다시 가두어 독촉하여 받아내도록 하고, 수쇄(收刷)하는 일에 대해서는 보방 하였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말고 계속 감독하고 신칙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7월 29일 신축
송근수(宋近洙)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조창영(趙昌永)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여주(驪州), 북청(北靑), 거제(巨濟) 등 고을에서 표호(漂戶), 퇴호(頹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영춘현(永春縣)의 호환을 당해 죽은 사람〔嚂死人〕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