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16권, 고종16년 1879년 10월

싸라리리 2025. 1. 1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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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경자

효휘전(孝徽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섭사손(攝嗣孫) 이규응(李珪應)을 오늘 정사에서 6품직에 의망(擬望)하라."
하였다.

 

윤자덕(尹滋悳)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홍재현(洪在鉉)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한경원(韓敬源)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10월 3일 임인

효휘전(孝徽殿)에 나아가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지냈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여 유학(幼學) 김필수(金弼洙)에게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신단(申檀)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10월 4일 계묘

순천부(順天府)에서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10월 7일 병오

전교하기를,
"이해의 이달에 나 소자(小子)가 부모에게 효양(孝養)하고 장수를 축원하는 정성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과 덕안 부부인(德安府夫人)의 사판(祠版)에 도승지(都承旨)를 보내서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8일 정미

특별히 윤영신(尹榮信)을 발탁하여 도총부 부총관(都總府副摠管)으로 임명하였다.

 

공주(公州) 등 고을에서 표호(漂戶), 퇴호(頹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10월 10일 기유

윤성진(尹成鎭)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한철우(韓喆愚)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0월 11일 경술

전교하기를,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 오하영(吳夏泳)의 행동이 극히 무엄하니 찬배(竄配)의 법을 적용하라."
하였다.

 

김기석(金箕錫)을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10월 12일 신해

효휘전(孝徽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민겸호(閔謙鎬)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0월 13일 임자

건원릉(健元陵), 원릉(元陵)에 나아가 전알하였다. 이어 수릉(綏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이어 경릉(景陵)에 나아가 전알하였다.

 

전교하기를,
"고(故) 영의정(領議政) 정존겸(鄭存謙)의 묘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10월 15일 갑인

수릉(綏陵)에서 친히 제사지낼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찬례(贊禮) 윤자덕(尹滋悳),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성근(金聲根), 집례(執禮) 남숙희(南肅熙), 대축(大祝) 조동필(趙東弼), 양주 목사(楊州牧使) 신석년(申錫秊)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강로(姜㳣)가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니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10월 16일 을묘

특별히 조성하(趙成夏)를 발탁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0월 24일 계해

강원 감사 임한수(林翰洙)를 소견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10월 26일 을축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 심이택(沈履澤)이, 세 조창(漕倉)의 재운(再運)은 겨울이 이미 반드시 틀림없이 중도에 얼음이 얼게 될 것이므로 내년 봄이 되거든 짐을 싣고 떠날 것을 청하였습니다. 지금 바닷바람이 이미 높아져 형편상 얼음이 얼게 될 근심을 면치 못할 것이니, 장계에서 청한 대로 봄이 되거든 일제히 발송하되 반드시 3월 안으로 액수에 맞추어 납부하라는 내용으로 엄하게 신칙하여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7일 병인

의정부에서, ‘경리청(經理廳)을 무위소(武衛所)에 부속시키는 문제는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하교를 받았습니다. 북한 관성장(北漢管城將) 이하 여러 장교, 원역(員役), 군졸, 도례(徒隷)의 실수와 관성소(管城所), 삼유영(三留營), 승창(僧倉)에 있는 무기 등 물건과 각 항목의 돈과 곡식, 여러 곳의 둔전(屯田), 중앙과 지방의 산터 등을 이속(移屬)하는 조건과 기타 돈과 곡식을 총융청(摠戎廳)에 넘기는 문제는 모두 가지가지로 구별해서 별단(別單)에 써서 들이고, 조지서 제조(造紙署提調)가 관성장(管城將)을 예겸(例兼)하는 것과 북도 참군(北道參軍)을 차출하는 규례도 일체 문건을 만들어 현록(懸錄)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0월 28일 정묘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구일제(九日製)를 행하였다.

 

10월 29일 무진

전교하기를,
"파수군(把守軍)을 장예청(壯藝廳)이라고 부르며, 매년 사등 시사(四等試射) 때 매 분기마다 호조의 무명 10동(同), 포(布) 5동과, 병조의 목 10동, 포 6동을 이번 겨울 분기부터 시작하여 본 소에 바치되 춘등과 추등에는 목 5동씩을 더 바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영릉(寧陵)을 보토(補土)할 때의 감동 당상(監董堂上)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고 여주 목사(驪州牧使) 홍순형(洪淳馨)은 가자(加資)하였다.

 

이승보(李承輔)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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