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17권, 고종17년 1880년 2월

싸라리리 2025. 1. 17. 10:37
반응형

2월 2일 경자

감제(柑製)를 인정전(仁政殿)에서 행하고 시(詩)에서는 유학(幼學) 이연묵(李淵默)에게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2월 3일 신축

봉조하(奉朝賀)        강로(姜㳣)를 소견(召見)하였다. 선마(宣麻) 후에 하교하기를,
"경이 사직한 뒤로 매우 서운하였다. 지금 나라의 계책과 백성들의 근심이 끝없이 많고 광범한데 유지하고 보완하는 것은 오직 노성(老成)한 신하에게 의지하는 데 달렸을 뿐이니, 경은 이미 물러났다고 마음먹지 말고 반드시 좋은 계책을 수시로 일깨워주어 나의 두터운 기대에 부합되게 하라."
하였다. 이어 음식을 차려주고 은병(銀甁)과 은 술잔을 하사하였다.

 

2월 4일 임인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인정전(仁政殿)에서 설행(設行)하였는데, 제술(製述)로써 강(講)을 대신하여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심원빈(沈遠彬)·홍종협(洪鍾協)·이훈경(李勛卿)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2월 5일 계묘

특별히 발탁하여 조경호(趙慶鎬)를 도총부 도총관(都總府都摠管)으로 삼았다.

 

2월 8일 병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봉조하(奉朝賀)·종친(宗親)·의빈(儀賓)·시임 각신(時任閣臣)과 원임 각신(原任閣臣)·빈객(賓客)·종정경(宗正卿)·육조(六曹)와 사헌부(司憲府) 및 사간원(司諫院)의 장관(長官), 2품 이상의 관리,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홍문관(弘文館),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게 사찬(賜饌)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王世子)의 탄일(誕日)이기 때문이다.

 

경범 죄수를 특별히 석방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를 인정전(仁政殿)에서 설행(設行)하였는데,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신용선(申容善)·정익조(鄭益朝)·함우복(咸遇復)·윤주현(尹胄鉉), 진사(進士) 김우성(金祐性)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2월 9일 정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본(日本) 공사(公使)가 연례적인 일을 전담하여 이미 나왔습니다. 교린하는 정의(情誼)로 볼 때 마땅히 사례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니, 수신사(修信使)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차송(差送)하되 길을 떠날 날짜는 합당하게 가려 정하도록 해서, 먼저 이런 내용을 왜관(倭館)에 통보하라고 동래 부사(東萊府使)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10일 무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원(李裕元)이 상소하여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조영하(趙寧夏)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2월 11일 기유

경연관(經筵官)                     송병선(宋秉璿)에게 하유하기를,
"선비가 경서(經書)를 날줄로 삼고 사서(史書)를 씨줄로 삼아 학문을 하여 선비의 으뜸으로 되는 것이 어찌 그 뜻을 고상하게 하여 자신만 좋게 하려고 한 것뿐이겠는가? 장차 마음속에 품고 있는 포부를 발휘하고 전개하여 찬연히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묘리(妙理)가 있기 때문이니, 바로 우리 유학에 체(體)와 용(用)이 있는 것이다.
그대는 노숙한 선비이자 훌륭한 학자로서 궁벽한 산야에서 뜻을 고수하고 있지만 소문이 미치는바 모르는 사이에 날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번에 6품의 벼슬에 제수한 것도 역시 어진 사람을 좋아하기를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경은 굳이 다시 사양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지금 세자(世子)의 천연두가 순조롭게 회복되어 나라의 경사가 새로운 때인 만큼 시골의 숨은 선비들도 반드시 몹시 기뻐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하사한 물건은 경사를 만나 궁료(宮僚)들에게 주는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받을 것이며, 선뜻 마음을 고쳐먹고 즉시 조정에 나오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상소하여 재상직을 사직하자 비답을 내려 윤허한다고 하였다.

 

이최응(李最應)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조경호(趙慶鎬)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돈상(李敦相)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응신(李應辰)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재완(李載完)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심이택(沈履澤)이, ‘정월 21일 만경 현령(萬頃縣令)                     백남리(白南离), 고군산 첨사(古群山僉使)                     김응섭(金應燮)의 연명 보고에, 중국 어선 38척(隻)이 방도(防島), 건도(件島), 말도(末島) 세 섬의 앞바다에 와 촘촘한 그물을 널리 치고서 고기 잡는 길을 막아 우리 백성들의 어업이 저절로 낭패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난잡한 무리들을 금지하고 방어하는 등의 일을 주의하여 거행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2월 13일 신해

전교하기를,
"중외(中外) 대소과(大小科)의 시취(試取)가 이제 머지않았다. 시취를 주관하는 관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공정한지 사사로운지는 모르겠지만, 여론에 부합하여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바로잡고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공급하여 백성들의 일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과거를 설행(設行)해 인재를 뽑는 뜻이다.
근래에 법을 어기고 권세가에게 빌붙는 버릇이 어찌 다만 거자(擧子)들만의 죄이겠는가? 시험을 주관하는 자들이 오직 청탁하는 것만 보고 사정(私情)에 끌려 공정한 것을 무시하고 남몰래 사람을 골라서 점찍어 놓아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 기쁨을 기리고 경사를 넓히려는 조치가 결국에는 비방과 원망을 사는 결과가 되게 하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어찌 놀랍고도 탄식하지 않겠는가?
각도(各道)에 내려간 경시관(京試官)을 계판(啓板) 앞에 불러놓고 신칙(申飭)할 것이며 또 묘당(廟堂)에서 시험을 주관하는 각 도의 도신(道臣)과 수신(守臣)에게 관문(關文)으로 신칙하여 주의해서 임금의 뜻을 받들게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최응(李最應)을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에게 하유하기를,
"경이 직무를 그만둔 지 겨우 수일 밖에 되지 않지만 내 마음은 마치 무엇을 잃은 듯하고 묘당(廟堂)의 일은 마치 오래도록 비워둔 것 같으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까닭이겠는가? 대개 경이 오래도록 부지런히 수고한 데 연유하여 나를 바로잡아 주고 도와준 데서 이미 현저한 공적과 가릴 수 없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아! 나라의 계책이 위태롭고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에 처한 것이 요즘과 같은 때가 없어서 항간의 부녀나 아이들까지 모두 다 아주 절박하다고 알고 있다. 더구나 경은 나라와 공무를 앞세우느라 한결같이 애썼으면서도 어째서 뒤돌아보면서 앞장서서 담당할 것을 생각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번에 정승의 직무를 잠깐 체직했다가 이내 임명하는 것은 경을 사사로이 아껴서가 아니라 경을 의지하여 일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조정과 지방에서 간절히 기다리는 심정이기도 하니 경은 의례적인 사양을 일삼지 말고 즉시 나와서 명에 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의익(李宜翼)을 판부사(判府事)로, 이인명(李寅命)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송병선(宋秉璿)을 지평(持平)으로, 장석룡(張錫龍)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2월 14일 임자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상소하여 병 때문에 사직하겠다고 청하니 권면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2월 15일 계축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도하(都下)의 개천을 쳐내는 공사를 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여름 오랜 장마 이후에 크고 작은 도랑이 막히지 않은 데가 없어서 근방의 집들이 물에 잠기는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도랑 치는 일을 때맞춰 지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준천사(濬川司)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을축년(1865)의 전례대로 하게 하소서. 개천을 치는 역사는 매번 힘을 들이지 않기 때문에 문득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되고 마니, 그 거행하는 것이 부지런한가 태만한가를 살펴서 논책(論責)하고 경계(警戒)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뜻으로 각 해영(該營)에 일체 엄하게 신칙(申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특별히 남호원(南鎬元)을 발탁하여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삼았다. 한붕리(韓鵬履)를 도총부 부총관(都總府副摠管)으로, 김상현(金尙鉉)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2월 16일 갑인

성균관(成均館)에서 인일제(人日製)를 설행하여 부(賦)에서는 진사(進士) 이무로(李茂魯), 유학(幼學) 심상찬(沈相瓚)에게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2월 17일 을묘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두 번째로 상소를 올려 사직하자 허락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김병국(金炳國)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민겸호(閔謙鎬)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민태호(閔台鎬)를 시강원 우부빈객(侍講院右副賓客)으로, 송병선(宋秉璿)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삼고, 윤자덕(尹滋悳)을 발탁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으니, 가망(加望)이다.

 

2월 19일 정사

김영철(金永哲)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2월 20일 무오

윤병정(尹秉鼎)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2월 23일 신유

김양근(金穰根)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민태호(閔台鎬)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2월 25일 계해

증광 감시(增廣監試) 초시(初試)의 시관(試官)을                        【일소(一所)는 홍철주(洪澈周)·정원하(鄭元夏)·목승석(睦承錫)이고, 이소(二所)는 김창희(金昌熙)·서기순(徐虁淳)·유종식(柳宗植)이다.】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나라에서 경사를 만나 과거를 설행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마는 이번의 과거는 더욱 특별하다. 바로 열성조(列聖朝)에 드물게 있는 경사이므로 특별히 조정 관리를 뽑아 시관(試官)으로 차임하였으니 십분 조심하여 정밀하고 결백하게 임금의 뜻을 받들도록 하라. 만약 추호라도 사적인 데 얽매인다면 어찌 수치로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소 시관은 다른 곳과 자별하고 일소 시관 역시 중요하다는 것은 나도 익히 들은 바가 있다. 착실히 마음을 다하여 하교(下敎)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신하된 도리이니, 어찌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관을 때에 임박해서 서로 바꾸는 것은 이전에 간혹 전례가 있기도 하였으나 이번에는 굳이 이와 같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여러 차례 신칙(申飭)하여 상하(上下)가 서로 믿기 때문이다. 비단 상시관(上試官)만 이렇게 할 뿐 아니라 부참시관(副參試官) 또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정하게 함으로써 위로는 경사를 넓히는 뜻을 체현하고 아래로는 많은 선비들의 기대에 부합되도록 하는 것이 지극히 옳을 것이다. 경시관이 내려갈 때에도 역시 이런 뜻으로써 면대하여 신칙하라.
만약 공정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탁방(坼榜)하는 날 자연히 입문(入聞)하는 도리가 있을 것이니, 어찌 다시 전교가 있기를 기다리겠는가. 유념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였다.

 

홍우창(洪祐昌)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임응준(任應準)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이재면(李載冕)을 시강원 좌빈객(侍講院左賓客)으로, 조영하(趙寧夏)를 우빈객(右賓客)으로, 민태호(閔台鎬)를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정범조(鄭範朝)를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삼았다.

 

2월 27일 을축

무위소(武衛所)에서 아뢰기를,
"접때 동래 전 부사(東萊前府使)                     윤치화(尹致和)의 보고로 인해서 별포사(別砲士)를 가설(加設)하는 문제는 미(米)·태(太)·목(木)을 발매(發賣)한 돈 및 병자년(1877)의 상정가(詳定價)로 대전(代錢)하는 것의 미상납 액수가 서로 어긋나는 것을 구별해서 다시 보고하기를 기다린 후에 품처(稟處)하도록 계하(啓下)하였는데, 지금 다시 보고한 성책(成冊)을 보니 불입급수쇄조(不入給收刷條)를 정축년(1877)의 상정가로 대전한 것과 함께 아울러 헤아려서 탕감(蕩減)한 것을 제하고 11만 1,800여 냥(兩)을 미납한 것으로 보고해 왔습니다.
본부(本府)는 변방 관문의 중요 지대에 처해 있으므로 별포사(別砲士)를 가설하자고 청한 것에 대해서는 참작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니 100명에 한하여 증액시켜 그중 20명(名)은 두모진(豆毛鎭)에 옮겨두고 힘을 나누어 갖추게 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자 역시 조금 후하게 마련하도록 하여 종전에는 1명당 4냥씩 나누어주던 것을 1냥씩 더 준다면 원래 인원수 150명과 모두 합하여 250명에게 지출할 것과 각종 지출을 매년 통계하여 1만 6,000냥 가량 될 것입니다.
2,000냥은 이미 본 부에서 마련한 것이 있고 실지 부족 되는 몫인 1만 4,000냥은 이상의 미납된 돈 11만 1,800여 냥을 그대로 본 부에 떼 주어 우선 8년에 한하여 나누어 쓰게 하고 그 후에 마련할 방도를 그때의 형편에 따라 좋은 쪽으로 품처(稟處)하며, 상정가로 대전하는 것과 같은 문제는 허락하기 곤란한 점이 있으니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북병사(北兵使)                     임상준(任商準)이, ‘경흥 부사(慶興府使)                     신영한(申永翰)의 치보(馳報)에,「지난달 27일 북강(北江) 건너편으로부터 말을 탄 러시아 사람 19명이 얼음 위로 건너왔으므로 부사(府使)가 포군(砲軍)들을 거느리고 강변으로 나가보니 그 사람들은 벌써 말에서 내려 벌여 앉았는데 칼을 차고 총을 잡고 있었습니다. 말은 모두 의미가 통하지 않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우리나라 말을 잘 알기에 그로 하여금 통역하게 한 다음 문답한 기록을 수정(修正)해서 올려 보냅니다. 그들은 유시(酉時)에 말을 타고 되돌아갔습니다.」 하였습니다.
문답한 기록은 장문(狀聞)을 어지럽힐 것 같으므로 베껴 써서 의정부(議政府)에 올려 보냅니다. 그런데 그 말뜻을 보면 서로 좋은 관계를 맺자는 따위의 말로 얼버무렸으니 법으로 금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나쁜 부류들의 약탈이 폐단이 되고 있는데 그 방비가 매우 소루하니 국경에 인접한 지역의 방비를 엄히 단속하라는 내용으로 특별히 엄하게 신칙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문답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묻기를,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러시아국                           연추(延秋) 지방의 차지(次知)로서 직명(職名)은 고미살(高米薩)이고 이름은 마주린[馬柱隣]인데 변방의 일을 바로잡으러 왔다."라고 하였다. 묻기를, "변방 일이란 무슨 일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귀국 백성으로서 우리나라 땅에 와서 사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귀국의 변방에서 폐해를 끼친다고 하는데 좋은 관계를 맺고 금지시킨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므로 우리가 대답하기를, "귀국과 우리나라는 이미 연계를 맺은 적이 없으므로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의논할 수 없다. 우리나라 백성으로서 귀국의 나선동(羅鮮洞)에 넘어가 사는 사람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아주 가까이에서 살면서 간사한 자들이 패거리를 지어 과부를 겁탈하고 재물을 약탈하였으니 진실로 마땅히 법률을 적용해야 하겠으나 귀국의 경내에 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대로 지내왔다. 이런 난잡한 무리들을 엄하게 제지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였다. 저들이 말하기를, "일정한 규정이 없으면 간사한 자들을 막을 수 없다. 우리 경내에 사는 자들은 귀국으로 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만약 가야 할 일이 있으면 우리 관청에서 공문(公文)을 만들어 주어 혼춘(琿春)·경원(慶源) 땅을 경유하여 왕래하게 하라. 만일 공문이 없이 오면 죽여도 무방하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하여, 대답하기를, "문건을 주고받는 것은 아래 관청에서 마음대로 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저 사람이 묻기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다만 상부에 보고하여 회답을 기다렸다가 통지해 줘도 좋다."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응당 영문(營門)에 보고하고 영문에서 경사(京司)에 전달하여 보고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들이 묻기를, "회답이 내려오자면 얼마나 걸리는가?"라고 하여, 대답하기를, "3개월은 걸릴 것 같다."라고 하였다. 저들이 묻기를, "꼭 어기지 말아야 하는가?"라고 하여, 대답하기를, "어떻게 어기겠는가?"라고 하였다. 저들이 묻기를, "귀국에서 도망친 백성으로서 우리나라에 와서 사는 사람들이 간혹 장사하기 위해서 귀국으로 왕래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매우 방해되는가?"라고 하여,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법은 매우 엄격해서 붙잡기만 하면 법조문을 적용하는 것으로 원래부터 규정이 있으니 이것은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들이 말하기를, "귀국에서 도망친 백성이 이미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이상 지금은 우리 백성이다. 만일 여기 와서 폐해를 끼치는 일이 있을 경우 그 자리에서 급히 우리 관청에 알려준다면 마땅히 엄하게 처리하겠다."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폐해를 끼친 자에 대한 엄한 처리는 오직 귀국 관청의 처분에 달렸지만, 우리의 변방 백성들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해 주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급히 알리는 문제는 상급 관청에서 회답이 내려오기 전에는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저들이 말하기를, "귀국의 모반 백성들이 과부를 겁탈하고 재물을 약탈하여 허다한 폐단을 끼쳤는데도 우리 관청에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대체로 서신 연계가 없기 때문이니, 돌아간 다음에 조사하여 처리할 작정이다. 그러나 귀국에서 아직은 서신 거래를 그다지 하지 않기 때문에 변방의 모든 문제를 과연 바로잡을 수 없으니 매우 유감스럽다."라고 하여, 대답하기를, "서신 거래라는 말은 과연 논의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저들이 묻기를, "귀국이 일본과 이미 친선 관계를 맺었다고 하는데 친선 관계를 맺은 글이 이곳에 있는가?"라고 하여, 대답하기를, "옛날 임진년(1592) 이후로 일본과 교제를 가진 지 300여 년이 되니 예전대로 연계를 가진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저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지역이 넓고 재물이 많아서 조금도 다른 나라를 엿볼 생각이 없고 다만 여러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다."라고 하여,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단지 영토만 지킬 뿐, 외교 관계를 맺는 법은 없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묻기를, "나선동(羅鮮洞)에다 별포(別砲)를 신설하였다고 하는데 나라의 명령이 있어서 그렇게 하였는가?"라고 하니, 저들이 말하기를, "사사로이 설치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묻기를, "사사로이 별포를 설치한 것은 바로 재물을 약탈하고 폐단을 끼치려는 계책인데 어째서 금하지 않는가?"라고 하니, 저들이 말하기를, "차차 적당히 처리하겠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묻기를, "귀국의 관청이 여기에서 몇 리나 되는가?"라고 하니, 저들이 말하기를, "여기에서 90리(里)이다."라고 하였다.】


 

 

2월 29일 정묘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행하여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민정호(閔正鎬)·조석구(趙晳九)에게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은 감시(監試) 급제자를 출방(出榜)하였다. 이것이 과연 하나라도 부정함이 없이 정밀하고 공정하게 한 것인가? 이미 연석(筵席)에서 ‘북면(北面)’이란 두 글자로 반복해서 신칙했는데도 방안(榜眼)이 나오자마자 여론이 떠들썩하니 분의(分義)와 도리로 볼 때 어찌 이같이 하고자 하는가.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참으로 놀랍고 통탄할 일이다.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의 감시 시관(試官)은 모두 변원(邊遠)에 찬배(竄配)하는 법조문을 적용하라.
문공사관(文公事官 : 김옥균(金玉均))으로 말하자면 그는 규찰하는 사람으로서 도리어 협잡을 일삼았다고 하니 듣기에 통분하기 그지없다. 역시 변원에 찬배하는 법조문을 적용할 것이며, 감시관(監試官) 역시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우니 모두 간삭(刊削)하고 한성시(漢城試)의 감시 초시(初試)는 파방(罷榜)하고 다시 설행하라."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