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19권, 고종19년 1882년 2월

싸라리리 2025. 1. 1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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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무오

민치서(閔致序)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다.

 

2월 3일 기미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의 납채례(納采禮)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은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생신이니, 도승지(都承旨)로 하여금 문후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좌찬성(左贊成)                     민태호(閔台鎬)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이용원(李容元)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천진(天津)에 머물러있는 학도들과 장공인(匠工人)들을 단속 통제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중국에 문의해 볼 일도 있으니, 본 아문(衙門)의 주사(主事)                     어윤중(魚允中)과 이조연(李祖淵)을 모두 문의관(問議官)으로 차하해서 천진에 가서 영선사(領選使)와 충분히 토의하여 처리하도록 하고, 이러한 사유를 가지고 자문을 지어 들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4일 경신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에 전알(展謁)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종묘(宗廟)와 경모궁 도제조(景慕宮都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세자(世子)의 관례(冠禮)를 거행한 다음 처음으로 진행하는 전알(展謁)이었기 때문이다.

 

2월 5일 신유

이인응(李寅應)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조영하(趙寧夏)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2월 7일 계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의 납징례(納徵禮)를 행하였다.

 

2월 8일 갑자

춘당대(春塘臺)에서 관학 유생의 응제(應製)를 설행하였다. 시(詩)에서는 유학(幼學) 김헌제(金櫶濟), 이용의(李容儀), 유치열(兪致烈)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 및 원임 대신(原任大臣), 봉조하(奉朝賀), 사부(師傅), 빈객(賓客),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과 익위사(翊衛司)의 관리, 승지(承旨), 사관(史官)들에게 사찬(賜饌)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의 탄신일이었기 때문이다.

 

전(前)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영위(閔泳緯)를 소견(召見)하였다.

 

영광군(靈光郡)의 무망(無亡) 700결에 대하여 다시 3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감사(監司)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복계(覆啓)하였기 때문이다.

 

2월 9일 을축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의 고기례(告期禮)를 거행하였다.

 

서연관(書筵官)                     김낙현(金洛鉉)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듣건대, 춘궁 저하께서 지으신 시에, ‘만수와 태평을 천하가 똑같이 누린다.’고 하였다 합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황천(皇天)의 조종(祖宗)이 묵묵히 도와서 이 시를 짓게 하여 오늘날 반드시 만수 태평(萬壽太平)의 도를 누리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비록 궁료(宮僚)들과 서로 화답하는 말석에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기뻐하며 경축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만수 태평’의 도를 가지고 전하께 올림으로써, 화봉인(華封人)의 축원과 맥구인(麥邱人)의 송축을 대신하려 합니다.
신은 듣건대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순 임금은 대효(大孝)이실 것이다. 덕은 성인이 되셨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큰 덕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천수를 누린다.’ 하였으니, 이를 통해서 본다면, 덕을 닦아 성인이 되면 반드시 무강한 천수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제왕으로는 요순과 같은 덕을 지닌 이가 없었고 요순과 같은 수명을 누린 이가 없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성인의 자질로서 성인의 자리에 오르셨으니, 하기만 하신다면 역시 이와 같으실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요순의 글을 강구하시고 요순의 덕을 닦으시며 요순의 정치를 행하셔서 요순의 수명을 누리도록 하소서.
신은 또 듣건대, 《시경(詩經)》천보편(天保篇)에 이르기를, ‘길일을 택하여 정결히 술밥 지어, 이것을 효성스럽게 제향(祭享)드리니, 선군께서 너에게 기대한다고 이르시되, 만년토록 장수하여 한이 없는 것으로 해 주시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옛사람들은 수명과 복을 반드시 묘향(廟享)에서 축원하였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 임금이 소박한 음식을 즐겼던 도를 법 받으시고, 《대학(大學)》에서의 ‘소비(消費)를 천천히 하는 경사’를 행하셔서 경상적인 재정이 부족하지 않게 하면서 좋은 날을 가려 대향의 제사를 받드신다면, 위로는 복되고, 아래로는 비호를 받아 한 세상을 인수(仁壽)의 지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태평한 세상을 이루는 도리에 관해서야 지금 멀리 옛날의 사례를 인용할 여유가 없겠거니와, 다만 눈앞의 가장 시급한 일 네 가지만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서 경상적인 비용을 넉넉하게 하는 일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국가의 경비가 예전에 부족했던 것은 아닌데, 근년 이래로 전결(田結)이 대부분 각 궁방과 내사(內司)에 소속되어 있고, 게다가 조미(漕米)는 뱃사람들에게 도둑맞고 농간당하며 돈이나 무명은 서리들이 가로채어 써 버리는데도 뇌물을 받은 수령이나 포흠한 서리를 마땅한 죄목으로 처벌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조운선을 침몰시킨 뱃사람과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관대한 은전을 입기 때문에 부세(賦稅)가 적체되고 국가의 경비가 점차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근일의 상납은 모두가 새로 설립한 각 아문으로 들어가는데다가, 또 제반의 쓸데없는 비용으로 거의 소비되고 있기 때문에, 매번 대향을 받드는 데 필요한 물자나 정공(正供)의 세입이 부족한 걱정이 있게 되며, 백관들의 녹봉과 각 영문(營門)이나 각사의 군인, 서리들의 월급도 역시 많이 빠뜨리고 있습니다. 또한 공인(貢人)이나 전인(廛人)들의 경우는 아래 위에서 이들에게 재용을 의지하고 있는 바이며, 성 안의 백성들도 역시 이들을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매번 먼저 납부하게 하고는 본 가격을 지불해 주지 않고 있으니, 끝내는 반드시 재물이 고갈되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징수하고 빌릴 곳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군인과 백성이 흩어져 떠나고 도성에 재물과 곡식이 없게 되면 어떻게 태평한 세상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음사(陰祀)를 금지하고 영선(營繕)을 정지시키며, 사치를 억제하고 상사(賞賜)를 절제하소서. 각 고을에서 납부하는 전곡과 포목은 반드시 먼저 대향(大享)과 정공(正供) 및 군졸들과 서리들의 월급으로 쓰게 하고, 공인이나 전인들이 먼저 올린 것은 역시 모두 가격을 지급해 주고 나서야 비로소 태평 만세의 도리를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공(公)을 드높이고 사(私)를 억제하는 일입니다. 신은 듣건대, 주자(朱子)의 봉사(封事)에 이르기를, ‘하늘은 사사로이 덮어 주지 않고, 땅은 사사로이 실어 주지 않으며,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춰 주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왕이 된 자가 이 세 가지 사사로움이 없는 것을 받들어서 열심히 천하에 펼친다면 세상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것이 매우 공평하게 되어 기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대저 이 땅 위에는 전하의 신하와 백성이 아닌 자가 없으니, 진실로 마땅히 한결같이 보고 똑같이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가까운 친척을 편애하면서 오래된 신하는 멀리하며, 좌우의 가까운 복종(僕從)에게는 은혜가 치우치면서 사방 만백성들에게는 미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물며 군졸이나 서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굳이 오래된 자는 버리고 새로운 자를 취하며, 가까이 있는 자는 친하게 여기고 멀리 있는 자는 잊는단 말입니까. 또 어찌 굳이 옛 법을 바꾸고 새로운 제도를 만든단 말입니까. 신이 삼가 오늘날 백성들의 궁핍과 재정의 부족함을 보건대, 고을마다 공납(公納)의 잘못이 있는데도 탐악을 징벌하였다는 정치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으며, 비록 가볍게 처벌하였다가도 오래지 않아서 갑자기 서용을 하곤 합니다. 곳곳의 도적들이 대낮에도 공공연히 활보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거주할 수가 없고 장사꾼들은 다닐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심지어는 공납하는 돈과 포목까지도 역시 간혹 겁탈을 당하고 있는데, 때로는 기포(譏捕)하는 자에게 체포되었다가도 존귀하고 가까운 이에게 사사로이 청탁을 하여 탈출하기도 합니다. 또 혹은 탐오한 수령이 양민을 무고하여 재물을 토색질하는가 하면, 간악한 장교는 도적을 잡는다는 핑계로 포악한 짓을 행합니다. 또 혹은 탐오한 수령이 양민을 무고하여 재물을 토색질하는가 하면, 간악한 장교는 도적을 잡는다는 핑계로 포악한 짓을 행합니다. 이는 모두가 공보다는 사를 앞세우고 그 적임자를 임용하지 않아서 생기는 폐단입니다. 신이 호남 고을에서 벼슬할 때에 뱃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위로 대내(大內)의 상공(上供)으로부터 아래로는 성 안 억만 백성들이 먹는 곡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강(京江) 선박의 운송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대 근래로 공납에 관련된 뇌물이 해마다 늘어나고 달마다 늘어나고 있으며, 또한 선주(船主)라고 불리기만 하면 역시 불법적인 침해를 수없이 당하고 있기 때문에, 강인(江人)들이 다시는 배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부유하다는 이름을 피하고 있다. 오직 궁예(宮隷)의 족속이나 존귀한 벼슬아치의 하인들이 단지 체문(帖文)을 도모하여 간혹 배를 빌리거나 임대를 시도하기도 하는데, 싣고 떠날 때에 간혹 다른 고을의 묵은 포흠곡이라고 보고 하기도 하고, 아니면 혹은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는 데 쓰기도 하고, 다른 여러 가지 잡비로 써서 이미 축난 것이 많으면 고의로 배가 침몰한 척하기도 한다. 때로는 배가 낡아도 고치지 않고 침몰시키는 자도 있고, 혹은 배가 패선했다고 칭탁하지만 실제로는 귀속되는 자가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가 섞였는데도 존귀하고 가까운 이들에게 인연하여 끝내는 죄와 벌을 면하게 된다.’고 합니다. 막중한 공적인 곡식을 이미 이 무리들이 가로채고, 또 탐악한 관리와 교활한 서리들이 꾀를 부려 농락하니, 국가의 재용을 장차 다시 어떻게 하겠으며, 도성의 백성들 역시 무엇을 의지하며 생활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신료들의 공론을 채택하지 않고 사람들이 사사로움을 부려도 살피시지 않기 때문에, 종친 외척과 근신과 좌우의 설어(褻御) 들이 각기 그들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각기 친한 바에 사사롭게 하는 것이니, 일찍이 차제(差祭)나 죄벌이 합당한지의 여부와 백성과 나라의 이로움과 병폐에 관계되는지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는 바로 옛사람이 말한, ‘조정의 신하들이 각기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위한 계책을 도모하더라도, 인군은 한 집안만을 위한 계책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건강(乾剛)을 분발하시고 사사로운 일로 알현하는 것을 엄중하게 억제하소서. 먼저 탐악을 징계하는 정치를 행하시어 종척이나 인척들이라도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마소서. 도적을 금지시키는 영을 엄하게 하시고 배를 침몰시키는 죄를 다시 엄하게 다스리셔서 혹시라도 좌우의 가까운 신하의 말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역시 태평한 시대를 만드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수령을 신중하게 가려서 너무 자주 바꾸지 않도록 하소서.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이르기를, ‘3년마다 관리의 성적을 심사하고 세 번 심사하여〔三考〕 어리석은 사람은 내치고 현명한 사람은 승진시켰다.’ 하였습니다. 한(漢) 나라의 장리(長吏)들은 대부분 구임(久任)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안하고 국가가 부유하여 재용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0고(考)를 하여 임기를 채우는 법은 역시 옛날의 법을 모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간혹 1, 2년 만에, 혹은 1년에 3, 4회씩 바꾸는가 하면, 간혹 한 사람이 4, 5년 사이에 6, 7개 고을을 옮겨 가며 역임하고 있으니, 비록 공수(龔遂)나 황패(黃覇)와 같이 유능한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더라도 어느 여가에 백성을 다스리고, 어느 여가에 정치를 이루겠으며, 또 어느 여가에 부세를 독촉하겠습니까. 하물며 맞이하고 송별하는 비용을 매번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여 백성들이 괴롭고 피곤해하며, 심지어는 관속들의 왕래에 필요한 잡비를 반드시 백성들에게서 얻어 내고도 역시 공납(公納)을 범하는 것이겠습니까. 새로 관리가 된 자가 경사(京司)에 관례로 바치거나 행하(行下)로 내려주는 금품도 모두 보고하기 어려운데, 간혹 파직이나 이직(移職)으로 인해 서리들이 자의로 포채(浦債)를 행하거나, 혹은 공납을 횡령하고, 혹은 백성의 결전(結錢)을 추가로 징수하는 등 결국은 백성과 국가의 커다란 폐막이 되고 있습니다. 신이 삼가 근일의 전조(銓曹)의 정목(政目)을 보건대 외직(外職)이 사람들에게 가장 선망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마다 바꾸고 해마다 옮기는 것은 오로지 눈앞의 사사로운 정을 따르기 때문일 뿐인데, 어찌 일찍이 백성과 나라의 폐단을 논하겠습니까. 심한 경우는 간혹 감사가 관리의 고과를 전(殿)으로 매겨도 모두 구애하지 않고, 혹은 원래 전혀 이력(履歷)이 없어 관리의 다스림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도 단지 작은 노고만을 이유로 갑자기 제수하기도 하니, 이미 신중히 간택되는 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역시 장차의 폐단을 만드는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간절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러한 폐단을 깊이 생각하시어 사사로운 은혜에 구애하지 마소서. 무릇 방백과 수령을 반드시 신중하게 선택하여 갑자기 제수하거나 자주 교체하지 마시어, 실제로 명성과 실적이 있는 경우에는 구임하게 하여 바꾸지 마소서. 만약 탐오하고 혼약(昏弱)한 자라면 일체 죄를 주고 도태시켜서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하고 공납(公納)에 지체됨이 없도록 하신다면 역시 태평한 시대를 여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네 번째, 외교는 반드시 먼저 안을 닦아야 합니다. 신은 듣건대, 익(益)이 순(舜) 임금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경계하면 근심이 없을 것이니 법도를 잃지 마소서.’ 하였고, 끝에 이르기를, ‘나태하지도 말고 황폐하지도 말아야 사방의 오랑캐들도 와서 붙좇는다.’ 하였습니다. 주왕(周王)도 역시 ‘천보시(天保詩) 이상의 것으로는 안으로 다스리고, 채미시(采薇詩) 이하를 가지고는 밖을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본다면 옛날의 성왕들은 반드시 먼저 법도를 잃지 않고 제사를 올려서 복을 받으며, 군졸들의 원망이 없은 다음에야 외적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 말하는 자들은 단지 교린(交隣)을 밝혀야만 한다고 하면서 안을 닦은 일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수 임금과 주왕의 도이겠습니까.
대저 우리나라의 재물과 곡식은 단지 국내에서만 쓸 만하고, 나라 안의 군졸들의 기예는 밖으로는 둔한 듯하나 안으로는 실로 쓸 만합니다. 오늘날에는 한갓 진기하고 사치스러운 다른 나라 물건만을 귀하게 여겨 우리나라의 재물이 날마다 수없이 허비되고 있는 것은 돌아보지도 않고 있으며, 한갓 다른 기예만을 신기하다고 교묘하다고 말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재주와 기예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령 저들의 기물이나 재주와 기예 가운데 혹시 취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고 모두 윗사람을 친히 여기고 나이 많은 이를 섬기게 되고 난 다음에야 다른 기예에 대해서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저들의 물건이 모두 부질없고 화려하기만 하여 아무런 실속이 없으며, 저들의 기예가 모두 올바른 방도가 아닌 경우이겠습니까. 옛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온 세상이 다 그렇게 쏠리지 않음이 없습니다. 저들이 줄을 이어 들어와서 우리나라의 재정은 날로 소모되고 있는데, 재물과 곡식과 포목을 또한 장리나 간악한 서리, 궁액이나 존귀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농간을 부려 횡령을 하게 된다면, 백성은 궁핍하고 군졸들은 굶주리게 될 것이니, 또한 교린을 하려고 하더라도 어떻게 교린을 하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순 임금과 주왕의 법을 강명하시어 화려한 먼 지방의 물건을 엄금하시고, 다시 가까운 신하들이 사사로운 일로 알현하는 것을 물리치도록 하시며, 대향(大享)과 정공(正供)에 구차한 어려움이 업도록 하시고, 군졸이나 서리들의 녹봉을 주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한 다음에 비로소 교린하는 방도를 강명하신다면, 진실로 만수와 태평의 세상을 온 천하와 같이한다고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차례 돈독하게 불렀으나 끝내 그대를 이르게 하지 못하여 부끄러움이 절실하였는데, 방금 상소를 보고 나서는 더욱더 나 자신도 모르게 망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러나 진술한 여러 가지 조목은 경전을 인용하고 의리에 입각하여 시대를 구제하고 풍속을 제도하는 데 어느 것 하나 절실하고 지극한 논의가 아닌 것이 없었다. 진실로 깊이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도리를 살피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더욱 충성스럽고 사랑스런 마음을 볼 수 있겠다. 내가 마음 속으로 그대를 반드시 오도록 해서 아침저녁으로 좌우에서 보필하고 계옥(啓沃)하는 책임을 다하게 하고자 하는 생각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제 봄 해가 점차 길어져 강연과 서연을 장차 열려고 하니, 그대는 즉시 분연히 일어나 나의 갈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실함(實銜)은 그 사이에 이미 변통하였다. 내려준 물건은 이미 전례가 있는 것이니 이처럼 사양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안심하고 받도록 하라."
하였다.

 

박정양(朴定陽)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2월 11일 정묘

강화도(江華島)의 포량목(砲糧木) 11동(同)을 올해부터 해부에 이속(移屬)시켜 주어 새로 설치한 포군(砲軍)의 양식에 보태어 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민영위(閔泳緯)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김영수(金永壽)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2월 15일 신미

이상수(李象秀)를 시강원 진선(侍講院進善)으로, 김창희(金昌熙)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민종묵(閔種默)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조의현(趙儀顯)을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2월 17일 계유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과 이조연(李祖淵)을 소견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에 그대들을 보내는 것은 다른 일 때문이 아니다. 통상 문제와 외국과의 관계 문제 때문이다. 벌써 영선사(領選使)에게 하교하였고, 또 이번 자문(咨文)에도 상세한 내용을 적었지만 그대들이 모름지기 천진(天津)에 가거든 통상 대신(通商大臣)과 이해관계를 서로 의논하여 일을 잘 처리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무관은 현재 병졸을 거느리고 있지 않으니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다. 영선사와 의논하여 즉시 귀국시킬 것이며, 학도(學徒)들과 장공인(匠工人)들도 일일이 대조하고 살펴 실제로 병(病)이 있거나 성과가 없는 사람도 무관을 따라서 마찬가지로 내보내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사대(事大)의 의절은 마땅히 성의껏 해야 하지만 형식에 구애되어 백성과 나라에 해를 끼치는 것은 구례(舊例)대로 너그럽게 처리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신 문제와 북도(北道)의 호시(互市)문제는 일일이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과 통상 대신(通商大臣)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편리하게 하도록 힘써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일본과는 이미 개항(開港)하고 통상할 것을 허락하였는데 중국에 대하여서는 아직도 해금(海禁)을 고수하고 있으니 중국을 가까이하는 뜻에 어긋난다. 중국은 우리 나라에 이미 여러 항구를 개방하여 서로 무역을 하면서 지장없이 왕래하므로 힘써 약속을 준수할 것에 대한 문제도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과 통상 대신(通商大臣)과 의논하라."
라고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근래에 외국이 우리 나라를 엿보려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사전에 치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으니, 통상 대신과 천진에 머무르고 있는 사신에게 가서 의논하여 국가에 유익한 모든 것에 대해서 각별히 강구하여 확정하라."
하였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이 경흥 부사(慶興府使)                     장진행(張晉行)이 올린 첩정(牒呈)을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아뢰기를, ‘러시아 사람들의 편지도 함께 올려 보냅니다. 그들이 회답을 받고 싶어하니 회답을 해야 할지의 여부에 대해 조정의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편지를 보내온 이상 회답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는, 두역(痘疫)의 전염병이 돌 때에는 사전에 통보해 달라는 것이니 그들의 간청대로 허락하도록 하소서.
다른 하나는, 러시아 말을 잘 아는 사람을 구하여 통사(通事) 가운데 뽑아서 보내라는 일입니다. 몇 해 전에 저들의 지역에서 돌아온 유민(流民)들에게는 형편을 물었을 뿐이고 애초에 통사(通事)를 요구한 일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취지로 아울러 말을 잘 만들어 회서(回書)하도록 감사(監司)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19일 을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빈(王世子嬪) 책빈례(冊嬪禮)를 거행하였다. 교명문(敎命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자(世子)를 미리 세우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다지는 문제와 관계되고, 어진 배필을 선발해 세우는 것은 풍속과 교화의 바탕에 관계된다. 군자(君子)가 힘쓰는 것은 단서를 짓는 것에서부터 살펴야 하는 법이니, 성왕(聖王) 역시 그 후사(後嗣)를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훌륭히 빛내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세자는 진실로 만백성의 기대와 관계된다. 이미 관례(冠禮)와 자(字)를 짓는 의식을 거행하여 엄숙히 성인의 의젓한 모습을 갖췄으니,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가정을 세워야 하는 만큼 마땅히 빨리 빈(嬪)을 맞아야 한다. 이에 훌륭한 규수를 구하여 이름있는 가문에서 선발하였다. 그의 덕은 단정하고 성실하였으며 그 예의는 공경스러웠고 정중하였다. 아! 저 민씨(閔氏)는 옛날의 어진 부인들과 같은 훌륭한 복을 가지고 있다. 대대로 절개과 충성이 이어져 정헌공(正獻公)을 받은 명성과 덕망이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고, 왕비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남긴 혜택을 받았다.
대체로 선행과 경사가 모이는 곳에서 훌륭한 자태를 가진 사람이 나오며, 글공부를 하여 옛날의 어진 부인들의 모범을 본받은 듯하였다. 경사(卿士)에게 자문하여 따랐고 점을 쳐보니 역시 길하였다. 그리하여 혼인예식을 빛나게 거행하니 주안(朱雁)과 현단복(玄端服)이 밝고 아름답게 빛났다. 영의정(領議政)        서당보(徐堂輔)와 겸 예조 판서(兼禮曹判書)        민겸호(閔謙鎬)를 보내어 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너를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하는 만큼 총애를 받고 훈계의 말을 가슴에 새길 것이다. 우리의 종통을 이어 만대를 계승하여 가게 할 것이며, 너의 집을 화순하게 해서 온갖 복을 펴야 할 것이다. 공경으로 부모를 섬겨야 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아랫사람을 거느려야 할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삼가하여야 복록(福祿)이 모여들고 안팎이 다 잘되어야 백성들이 따를 것이다. 말을 바르게 하여 법도에 맞도록 하고 사미(思媚)와 사제(思齊)의 명예를 떨치고, 자손을 번성하게 하는 상서로운 복을 쌓아 아름다운 칭송을 받아 창성함을 더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영의정(領議政)            서당보(徐堂輔)가 지었다.】 하였다.


【원본】 23책 19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0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하였다.

 

2월 20일 병자

찬배 죄인(竄配罪人) 김영석(金永奭)·심진규(沈鎭圭)·민영주(閔泳柱)·정인협(鄭寅協)과 정배 죄인(定配罪人) 조병우(趙秉友) 등 7인을 방송하라고 명하였다.

 

민영환(閔泳煥)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서연관(書筵官)                     이상수(李象秀)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풍헌(風憲)의 임무가 과연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이 직책에 응하는 자는 그 사람됨이 또한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옛날에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일찍이 명묘(明廟)에게 아뢰기를,
‘인주(人主)는 머리요, 대신은 복심(腹心)이며, 대관(臺官)은 이목(耳目)이니, 이 삼자(三者)는 서로 상대하여 이루어집니다.’ 하였습니다. 간혹 대신을 신임하면서도 구제하여 보필할 현인은 구하지 않고 오로지 아첨하고 뜻을 따르는 자만이 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해서 얻은 신하는 간사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는 신하가 아니면 반드시 흉악한 도적이거나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른바 이목이라고 하는 것은 원수(元首)의 이목이 아니고 바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의 이목인 것입니다. 바야흐로 성상께서 대신을 가려 뽑으시어 진실로 시대의 바라는 바에 부응하니, 온갖 법도와 여러 가지 사무가 거의 거듭 새로워지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많은 관직을 비워 두고 폐하여 관리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데, 양사(兩司)가 더욱 심합니다.
위에서 잘못하는데도 편안하게 앉아 구제할 줄모르고, 아래에서 속이고 숨기는 것이 많은데도 전혀 규찰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훌륭한 이목의 관리를 선발하여 임용하여서 이미 닫힌 언로(言路)를 다시 열고 오래 되도록 퇴폐한 채 있는 기강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어찌 신과 같이 어리석고 하찮은 자를 잠시라도 이 자리에서 임용하여 이로써 거듭 어진 이들이 진출하는 것을 방해하고 자리를 도둑질하는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직책을 속히 바꾸어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제수하시고, 내려주신 상전을 속히 거두어들여 공이 있는 사람을 기다리신다면 실로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삼가 성상의 유시를 받고 보니, 이르시기를 ‘동궁의 관례를 이미 마쳤으니, 덕성을 기르고 가르치는 일이 바로 지금에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삼가 읽고는 더욱 손 모아 축하하며 춤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관례를 하기 전에 가르치고 인도한 것이 예전에 어찌 부족하였겠습니까마는, 이미 관례를 치르고 나서 성인(成人)의 도리를 책임지우는 것은 이에 기준이 있고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성정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선묘(宣廟)에게 진계(陳啓)하기를, ‘필부(匹夫)가 그 자손에게 십금(十金)의 재산을 남겨 주면서도 오히려 잘 지킬 것을 생각했는데, 하물며 백년의 사직과 천리의 봉강(封疆)을 모두 들어서 서로 물려준 경우이겠습니까. 터럭만큼이라도 스스로 한가하거나 안일한 생각을 갖게 되면 선인을 본받는 생각이 어긋나게 되고 선대의 기업(基業)이 온전치 못하게 됩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가르쳐 기르는 근본은 역시 상께서 몸소 행하시어 솔선하시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집안의 자제들도 스스로 약간의 지각이 있게 되면 하나 하나의 행동이나 동정을 오직 부모나 형제를 본받게 되는데, 선하고 약한 행실로 나뉘어지는 것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물며 인주(人主)의 한 몸은 만 가지 변화의 근본이 되며, 세자를 가르쳐 기르는 일은 세상을 태평하게 만드는 기초가 되는 것이니, 어찌 소홀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세자가 효도하기를 바라신다면 반드시 앞서서 장락궁(長樂宮)에 성심을 다하시고, 세자에게 우애가 있기를 바라신다면 반드시 앞서서 형제들에게 사랑을 극진히 하시고, 세자가 자주 서연에 참석하여 듣기를 원하신다면 반드시 몸소 경연에 납시어서 솔선하시고, 세자가 농사짓는 어려움에 대해 알기를 바라신다면 반드시 직접《서경(書經)》의 무일편이나 《시경(詩經)》의 칠월장(七月章)을 읽으시어 이로써 권장하소서, 기묘한 기예나 지나친 기교를 물리치는 것은 세자가 그것을 보고 즐겨 할 것을 두려워해서이고,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꾸민 얼굴색을 물리치는 것은 세자가 가까이해서 현혹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안일하고 편안한 것이 생각날 때는 세자가 이것을 본받는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사치스러운 것이 생각날 때는 세자가 이것을 본받는다는 것을 생각하소서. 상벌이 합당하지 않으면 오직 세자가 이것을 본받을까 염려하시고, 즐겁고 노함이 절제가 없게 되면 역시 세자가 이것을 본받을까 염려하소서. 전하의 표정이나 동작 하나까지도 바른 곳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고, 전하의 앞뒤나 좌우에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된 뒤에 견문이 넓고 도덕과 학숙이 있는 선비를 아주 정밀하게 선발하여 보도(輔導)하는 일을 책임지운다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덕과 학업이 날로 발전하게 되어 다시는 보이는 물건에 따라 마음이 옮겨가는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신과 같이 비천하고 아는 것이 없는 자로 하여금 궁료(宮僚)들의 옆자리에 않게 하여 여론의 비난만 받게 하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곧바로 신에게 내린 서연관의 직책을 갈고 소명(召命)을 영원히 거두시어, 이로써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시고 사사로운 분수를 편안하게 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라의 경사가 화평하게 이르고 봄철의 절기 또한 이미 난만한데, 마음속에 떠나지 않기를 고대하고 있던 중에 사양하는 글을 받고 보니, 종이에 가득한 글이 모두 경계하는 말들로서 인군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대의 가슴속에 인군을 보도(輔導)하고 세상을 구제할 만한 학문이 있다는 것을 가히 한 점의 고기 맛만으로도 온 솥 안의 국맛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자를 가지고 주고받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좌우에서 훈도하여 보고 느끼는 것만 못하니, 다시는 뒤로 물러나 머뭇거리지 말고 곧바로 조정에 나오기를 도모하라. 대간의 직책은 사양하고 물러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내려준 물건은 곧 경사 때마다 으레 은혜로 내려 주는 물건이다. 그대는 안심하고 받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1일 정축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 초계례(醮戒禮)를 거행하였다. 별궁(別宮)에서 왕세자의 친영례(親迎禮)를 거행하고, 중희당(重熙堂)에서 동뢰연(同牢宴)을 거행하였다.

 

가례도감 도제조(嘉禮都監都提調) 이하 세자를 배종(陪從)한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 관리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제조(提調)                     김병시(金炳始), 죽책문 서사관(竹冊文書寫官)                     정기세(鄭基世), 진작관(進酌官) 이돈하(李敦夏), 전교관(傳敎官)                     이기호(李起鎬), 찬상(贊相) 민영규(閔泳奎), 봉규(捧圭) 이승고(李承皐), 도청(都廳)                     김영덕(金永悳)·홍승헌(洪承憲), 사옹원 정(司饔院正)                     박영교(朴泳敎), 상례(相禮)                     한기동(韓耆東)에게 모두 가자하였다.

 

특별히 경범 죄수들을 방송하였다.

 

2월 22일 무인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축하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인(家人)의 지위는 집안을 바르게 하는 데 있으니 가정의 도리가 바르게 되어야 이극(貳極)이 존중되며, 면복(冕服)을 갖추고 친히 나가 맞이하여 들이니 군자가 친영(親迎)을 함으로써 만세토록 이어 나가는 것이다. 이에 이를 크게 고하여서 훌륭하고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한다.
내가 생각건대, 나라의 근본은 원량(元良)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인륜은 비필(媲匹)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마치 해와 달이 음과 양의 자리를 정하는 것과 같으니 그 상(象)은 이궁(离宮)의 밝음에 합치하고, 비유하자면 건곤이 팔괘(八卦)의 문이 되는 것과 같으니 그 뜻은 진기(震器)의 덕에 부합되는 것이다. 옛날 문왕(文王)이 태자로 있을 때에 배로 부교(浮橋)를 만들어 위수(渭水)에서 비(妃)를 맞이하였으니 이 때문에 《주례(周禮)》에서 천자의 혼례를 중요하게 여겨 여피(儷皮)와 속백(束帛)의 예물을 가지고 빙문(聘問)하고 답례하였던 것이다.
돌아보건대, 과문하고 어두운 나에게 다행이 세자가 있어 삼조(三朝)가 날로 편안한 것을 기뻐하였다. 온화하고 예모있는 행동은 날로 성취되어 하나의 일을 행함에 모두 합당함을 얻었고, 의도(儀度)는 하늘에서 이루어 주었으나 서연(書筵)을 통하여 더욱 명백하게 알려 주는 공이 있으니, 장차 이로서 시서와 예악에 통달할 수 있을 것이다. 관례를 행하여 성인(成人)의 도리를 갖추니 천지와 조종(朝宗)에 커다란 서광이 있도다. 오직 아름다운 배필은 온갖 복의 근원이니, 마땅히 아름다운 의범으로 이남(二南)의 교화를 이을 것이다. 충년(沖年)의 나이로 종묘에 제사지내며 덕을 길러 바야흐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를 기약할 수 있겠고, 종사(宗事)의 빈번(蘋蘩)은 모두 공경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니 모름지기 성실하고 엄숙하고 단일(端一)해야 할 것이다.
왕세자빈 민씨(閔氏)는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종실로서 충성을 다하는 이름 있는 집안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전승하여 바르지 않을 것을 배척하고 정도를 지켜 사림의 걸출한 영수가 되었고, 하늘을 떠받치고 해를 부축하는 대의를 잡아 뛰어난 국가의 동량이 되었다. 중궁(中宮)은 지친(至親)으로 존장(尊章)이 되어 아름다운 영예를 크게 이었고, 태모(太母)께서는 이에 엄격히 간택을 하고 나서 세자빈의 복기(福氣)를 칭찬하시니 기쁨과 즐거움이 배나 더한다. 가법을 계승한 것은 화순함과 근검이요. 내칙(內則)으로 익힌 것은 효경(孝敬)과 온순함이로다. 거북점과 시초점을 치고 또 경사(卿士)에게 물어서 기러기와 장(璋)의 예물을 마련하여 좋은 날을 가리고, 각종의 패옥과 화려한 예복을 갖추고 유의(愉衣)를 입으니, 보배스런 빛이 어리고 청석(靑石)과 은방(銀𤗐)은 어륜(御輪)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도다.
이른 새벽에 예물을 갖추고 한 잔 술을 올려 장차 가장이 될 자리를 드러내고, 좋은 날에 누에고치를 나누어 주어 육복(六服)을 만들어 올리는 일을 하리라. 어찌 유독 대궐 안에서 만의 큰 경사이겠는가. 모든 강토 안에서 서로를 즐거움을 고하고 있다. 이로써 성해(星海)의 송축이 비등함을 보겠으니, 마땅히 과실이 있는 자를 사면하고 죄가 있는 자를 관대히 용서하는 은택을 널리 흡족하게 베풀어 주는 것이 마땅하다.
이달 22일 새벽 이전에 잡범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사면해 주라. 아! 부부가 있은 연후에 부자가 있는 것이니, 백세토록 줄기와 가지가 뻗어 나가 관저(關雎)와 인지지(麟之趾)의 덕화가 작우(鵲虞)에 응하게 되는 것은 한 나라의 풍교(風敎)에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잘 알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전(前) 대제학(大提學)                           김상현(金尙鉉)이 지은 것이다.】 하였다.


【원본】 23책 19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책 41면
【분류】역사-고사(故事) /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하였다.

 

왕세자빈(王世子嬪)이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에 조현례(朝見禮)를 행하였다. 이어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과 왕대비전에 조현례를 행하였다.

 

진하(陳賀)할 때의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 관리들을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민종묵(閔種默), 선교관(宣敎官)                     이원중(李源中), 좌통례(左通禮)                     홍시형(洪時衡), 우통례(右通禮)                     이희수(李希洙)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세자빈궁(世子嬪宮)에서 쓸 내령(內令) 4부(部), 문안패(問安牌) 5부, 마패(馬牌) 5부, 내령의 대소 인장(印章)을 새로 만들어 들여왔다.

 

박성양(朴性陽)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2월 23일 기묘

오준영(吳俊泳)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입학 관례 별시(入學冠禮別試)를 경과 증광시(慶科增廣試)와 합쳐서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2월 24일 경진

왕세자빈(王世子嬪)의 세보(世譜) 수정은 돈녕부(敦寧府)에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해부(該府)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2월 25일 신사

영의정(領議政)                     서당보(徐堂輔)가 첫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6일 임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부(賦)에서 유학(幼學) 민용호(閔龍鎬)·유영장(柳榮壯)·김영리(金永理)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강원 감사(江原監司)                     민치서(閔致序)와 황해 감사(黃海監司)                     남정익(南廷益)을 서로 바꾸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의 경사를 계기로 마땅히 뜻을 보여주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다. 시임(時任) 및 원임 사부(原任師傅)와 시임 빈객(時任賓客),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과 익위사(翊衛司) 관리들의 아들이나 손자, 조카로서 생진시(生進試) 복시(覆試)응시자는 모두 이번의 복시의 방목(榜目)의 끝에 붙여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파광군(坡光君) 윤종의(尹宗儀)가 소과(小科)에 회방(回榜)했다고 하니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그의 손자가 마침 해액(解額)에 들었다하니 일이 매우 기이하다. 특별히 생진시(生進試) 방목(榜目)의 끝에 붙임으로써 조정에서 우로(優老)하는 은전(恩典)을 보일 것이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홍석우(洪錫祐)가 소과(小科)에 회방(回榜)했다고 하니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현직보다 높은 벼슬에 조용시키게 하고, 그의 아들이 마침 해액(解額)에 들었다하니 특별히 생진시(生進試) 방목(榜目)의 끝에 붙임으로써 먼 지방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정에서 뜻을 보이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서당보(徐堂輔)가 재차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7일 계미

영의정(領議政)                     서당보(徐堂輔)가 세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8일 갑신

영의정(領議政)                     서당보(徐堂輔)가 네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9일 을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영의정                     서당보(徐堂輔)가 다섯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내령(內令) 조성(造成)할 때의 해방(該房)의 승지(承旨)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2월 30일 병술

영의정(領議政)                     서당보(徐堂輔)가 여섯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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