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19권, 고종19년 1882년 11월

싸라리리 2025. 1. 18.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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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계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변상훈(邊相勳)·최용삼(崔龍三)·홍종헌(洪鍾軒)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세자(世子)에게 《효경(孝經)》 강론이 끝난 후 사(師)와 부(傅)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이조연(李祖淵)에게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의 응제(應製)는 다른 과거와는 다른 만큼 입격자 중에 있는 69세 된 유생을 특별히 진사(進士) 방목(榜目) 끝에 붙여 넣음으로써 널리 경사를 즐기게 하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특별히 경범 죄수(輕犯罪囚)들을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일 갑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증광(增廣) 문과(文科)와 증광 무과(武科)의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이완용(李完用)에게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특별히 새로 급제한 윤횡선(尹宖善)을 제수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이응진(李應辰)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새로 급제한 남정철(南廷哲)·정광연(鄭光淵)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이위(李暐)·김세기(金世基)를 부교리(副校理)로, 이중하(李重夏)·윤철배(尹喆培)를 수찬(修撰)으로, 홍형주(洪瀅周)·김재용(金在容)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남정철(南廷哲) 이하는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응제(應製)에서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번의 증광 전시(增廣殿試)에 붙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직부전시 자격을 받은 변상훈(邊相勳), 최용삼(崔龍三), 홍종헌(洪鍾軒)을 방목(榜目) 끝에 붙여서 함께 방방(放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주문(奏文)을 짓는 것은 긴급한 문제인데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응진(李應辰)은 혐의로 인하여 지어 바치지 않고 있으니 개차(改差)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혐의로 인하여 공무를 저버리는 것은 사체(事體)에 매우 어긋난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엄격히 신칙(申飭)하여 즉시 지어 바치게 하라. 이제부터는 다른 나랏일과 관련해서 다시는 감히 인혐(引嫌)할 수 없다는 내용을 분명히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3일 을유

새로 급제한 정인성(鄭寅星)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윤태준(尹泰駿)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승우(李勝宇)를 수찬(修撰)으로, 민응식(閔應植)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모두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민응식(閔應植), 윤상익(尹相翊), 윤태준(尹泰駿)이다.

 

김병시(金炳始)를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민응식(閔應植)을 직각(直閣)으로 삼았다.

 

11월 5일 정해

전권 대관(全權大官) 조영하(趙寧夏),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을 소견(召見)하였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협상이 잘 처리된 것은 아주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조영하가 아뢰기를,
"신이 전 천진(天津)주재 독일                     영사(領事)                     뮐렌도르프〔穆麟德 : Möllendorf, Paul George von〕와 합의한 문권(文券)과 북양(北洋)의 회답 자문(咨文)을 정원(政院)에 정납(呈納)하였는데 보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벌써 읽어보았다. 대단히 훌륭하다. 이번에 온 사람이 몇 명(名)인가?"
하니, 조영하가 아뢰기를,
"당정추(唐廷樞)·진수당(陳樹棠)·마건상(馬建常)·뮐렌도르프〔穆麟德 : Möllendorf, Paul George von〕와 수원(隨員)과 하인을 합쳐서 10여 명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보정부(保定府)에 가서 뵈었는가?"
하니, 조영하와 김윤식이 아뢰기를,
"가서 뵙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렇게 추운 겨울에 풍토도 다른데, 대원군(大院君)의 기거는 평안하다고 하던가? 근심스런 마음 금할 수 없다."
하니, 조영하가 아뢰기를,
"신이 떠나기 전날 문후관(問候官) 일행이 천진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에게서 들으니 대원군의 기거는 평안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영선사(領選使)가 나올 때 학도(學徒)들과 공장(工匠)들을 다 데리고 왔는가?"
하니, 김윤식이 아뢰기를,
"다 데리고 왔는데 종사관(從事官)                     김정균(金定均)과 통사(通祠) 1명을 우선 동국(東局)에 남아 있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지난 10월에 조영하(趙寧夏)는 자문(咨文)을 가지고 천진(天津)에 가서 관세(關稅)와 외교에 능한 사람을 초빙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홍장(李鴻章)은 전 천진(天津)주재 독일                           영사(領事)                           묄렌도르프〔穆麟德 : Möllendorf, Paul George von〕, 중서(中書)                           마건상(馬建常)을 추천하여 조영하와 함께 오게 하였으며 일이 제기되는 즉시 타산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은 이전에 천진에 있는 기기 제조국(機器製造局)에 파견하여 기술을 배우게 한 생도들이 연이어 병에 걸려 돌아온 까닭에 남아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 자문을 가지고 갔던 길에 그들을 철수시켜 돌아오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따로 작은 기계를 사다가 나라에 국(局)을 설치하고 자체로 기계를 제조할 생각이었다.】


【원본】 23책 19권 8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75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독일[德] / 외교-청(淸)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상소하여, 인의(引義)를 진달하고 사임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난 달의 하유(下諭)에서 내 마음을 모두 보여주었으므로 경이 확실히 깨달았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 인피하는 글이 또 올라온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실의에 빠져 정신이 없다. 나라를 걱정하는 확고한 충성의 마음을 지닌 경으로서 이 어려운 고비를 당하여 응당 남이 비방을 하거나 말거나 곧바로 나와야 할 것인데, 이렇게 어렵게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평상시 경에게 기대한 바이겠는가? 만일 현행 정사에 걱정되는 일이 많다고 하여 용감하게 벼슬에서 물러갈 생각을 이루려고 한다면 경으로서는 좋을 것이다. 구멍이 난 배에 혼자 앉아있는데 지탱해줄 노도 없고 돛대도 없으니, 어떻게 건너가리라고 기대하겠는가? 이는 나의 성의가 얕은 것으로 아무리 가슴속의 생각을 다 털어놓았댔자 상투적인 말로 여기며 한번 가서 영영 돌아보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자신을 책망하고 있는데 무슨 겨를에 경의 처신이 지나치다고 의심하겠는가? 경에게 만일 평소 서로 믿는 도리가 있다면 다시 하유(下諭)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선뜻 마음을 돌려 조정에 나오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함부로 상소를 올려 노숙한 관리로 하여금 조정에 안착할 수 없게 하였으니, 조상학(趙尙學)을 견파(譴罷)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정배(定配)의 형전(刑典)을 시행하라."
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윤자승(尹滋承)이, ‘금산 군수(錦山郡守)                     김명수(金明洙)를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봉고(封庫)하였으므로 부득이 파출(罷黜)하겠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해당 군수의 봉고는 시행하지 말고 전 별선 군관(前別選軍官)                     김화횡(金華鑅)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공초를 받아 들이게 하라."
하였다.

 

11월 6일 무자

동지사(冬至使)인 세 사신(使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정사(正使)                           심이택(沈履澤), 부사(副使)                           민종묵(閔種默), 서장관(書狀官)                           정하원(鄭夏源)이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부사를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은 보정부(保定府)에 가서 대원군(大院君)의 기거를 문후드리고 오라. 천진(天津)의 세무(稅務)도 탐지해 오라."
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죄인 배전(裵)을 잡아다가 엄하게 신문하니, 공초(供招)한 내용에, ‘저는 김해(金海)에 사는 백성으로서 전 별선 군관(前別選軍官)                     상직현(尙稷鉉)이나 이시우(李時宇)와는 애초에 은혜도 원한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혹 추천을 통해 등용되려고 하면 그때마다 방해하고 농간하여 못된 무리로 몰아세웠습니다. 스스로 신세를 돌아볼 때 원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두영(李斗榮)의 이름을 빌어 상소문을 지어 올렸으니 남의 이름을 도용한 죄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공초를 놓고 보면 감정을 품은 것으로 인하여 남을 죄에 빠뜨릴 계책을 쓴 것은 벌써 교활한 짓이며, 게다가 남의 이름을 도용하여 상소를 올렸으니 더욱 몹시 증오스럽습니다. 응당 의율(擬律)하여 감처(勘處)하여야 하겠으나 이미 엄하게 신문하라는 명을 받았으므로 삼가 공초를 받아들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남의 이름을 도용하여 상소를 올리고, 감정을 산 것 때문에 남을 함정에 몰아넣었으니, 이와 같이 법을 무시하는 무리들은 심상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한 차례 엄히 형신(刑訊)한 뒤 원악도(遠惡島)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11월 7일 기축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새로 설치한 친군(親軍)을 교련(敎鍊)하였다. 이어 중국 사신 원세개(袁世凱), 장광전(張光前), 하립조(何立朝), 하증주(何增珠) 등을 접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교련한 것이 이와 같이 정연하고 능란한 것을 보고 여러 장수들이 애써 수고한 공로를 짐작할 수 있으며 또한 감격을 금할 수 없소."
하니, 원세개 등이 아뢰기를,
"귀국의 군사들은 다 재능이 있어서 가르치기에 매우 쉬웠습니다. 사례(謝禮)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그리고 이어 이십육변체진도(二十六變體陣圖)를 올렸다.

 

남정순(南廷順)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11월 8일 경인

이조연(李祖淵)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삼았다.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11월 9일 신묘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함경 전 감사(咸鏡前監司)                     김유연(金有淵)의 장계(狀啓)를 보니, 경원 부사(慶源府使)                     이희영(李熙榮)의 첩정(牒呈)을 하나하나 들면서 말하기를, ‘청(淸) 나라 사람 1명(名)이 훈춘성(琿春城)에서 공문을 가지고 왔는데, 우리나라 빈민으로서 길림(吉林) 변두리에 몰래 농사지은 자를 찾아내어 우리나라에 돌려보내 줄 것이니 지방관의 귀적(歸籍)을 교부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회답 공문을 작성하여 보낼지 여부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공문을 받았으니 회답 공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신(道臣)이 말을 잘 만들어 보내라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10일 임진

전교하기를,
"죄인 임응준(任應準)과 이회정(李會正)을 배소(配所)로 보내는 일을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전 정언(前正言)                     이희봉(李羲鳳)이 상소하여, 경비가 고갈된 폐단에 대해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모두 시의(時宜)에 부합되니, 유념하겠다."
하였다.

 

11월 11일 계사

유학(幼學) 이근호(李根澔)가 상소하여, 기강을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며, 호포(戶布)를 없애고, 군정(軍丁)을 조사하며, 훈련 도감(訓練都監)을 재정비하고, 병기를 수선하며, 재물을 생산하는 일을 잘 다스리고, 재정을 절약하며, 사치한 기풍을 막고, 부역(賦役)을 가볍게 하며, 양전(量田)을 시행하고, 탐관오리를 징벌하며, 과거(科擧)의 규정을 세우고, 재앙이 없도록 빌며, 세자(世子)를 공부시킬 것 등 15가지 시무(時務)에 대한 것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목 중에 자못 취할 만한 것이 많으나, 미진한 점도 있다."
하였다.

 

우승지(右承旨)                     박용대(朴容大)가, ‘신이 이달 6일에 내린 성상의 비지(批旨)를 받들고 홍순목(洪淳穆)이 살고 있는 금사면(金沙面)으로 달려가서 전유(傳諭)하였더니 그가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간절한 사정을 올리고 은명(恩命)을 어기고는 밤낮으로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방금 내려 보낸 비지를 보니 말씀하신 뜻이 참으로 엄격하였으며, 『식유(寔由)』이하의 몇 구절은 신하로서는 감히 들을 수 없는 내용이어서 더욱 두려워 죽을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라 금오문(金吾門) 밖에 엎드려 엄한 처벌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1월 12일 갑오

승정원(承政院)에서,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지금 의금부(義禁府) 문 밖에서 서명(胥命)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지난번의 비답에서 이미 거듭 이야기하여 심중의 생각을 모두 털어놓았으므로 경이 며칠 안으로 연석(筵席)에 나오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또 이렇게 서명(胥命)하고 있으니, 몹시 기다리던 나머지 매우 실망스럽다.
지금 형편으로서는 과연 경이 이와 같이 스스로 인책(引責)할 때가 아닌데 필시 비지(批旨)의 어구(語句)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식유(寔由)’ 이하 38자(字)는 환수(還收)한다. 경은 안심하고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즉시 명에 응하도록 하라. 나는 지금 옆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고 있다."
하였다.

 

우승지(右承旨)                     박용대(朴容大)가, ‘신이 이달 12일에 성상의 하유(下諭)를 받들고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다시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곳에 가서 전유(傳諭)하였더니, 그가 아뢰기를, 「신이 머리를 조아려 대명(待命)하고 처분을 기다리던 중 삼가 은유(恩諭)를 받드니, 『식유(寔由) 이하의 38자를 환수(還收)한다.』는 명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은 이에 여러 번 번거롭게 의견을 올리는 것이 두려운데다,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삼가 염치를 무릅쓰고 달려 나아가 응당 받아야 할 처분을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의 이번 처의(處義)로 말하면 이처럼 장대하게 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조정에 돌아왔으니 경은 안심하고 국무를 보기 바란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신의 정황에 대해서는 전후의 상소문에서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친필 비답을 받은 날 응당 엎어지며 달려와서 하교를 받들어야 했으나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상직(相職)에 제배(除拜)하신 뒤에 간곡히 부르는 하교 내용은 더없이 두렵고 황송하여 한 번은 은명(恩命)에 숙배하려고 염치를 무릅쓰고 등대(登對)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상소 내용이 과연 무례하고 거칠기는 하였다. 그런데 공명첩(空名帖)으로 말하면 원래 전례가 있는데 그 말이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도백(道伯)이 보고한 것을 관례대로 위에 아뢴 것인데 그와 같이 꼬집어 말씀하시니, 응당 받아들여 허물로 여기겠습니다. 죄가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데 어떻게 염치를 무릅쓰고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물리쳐 주소서."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이 어려운 시기에 나라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확고한 충성심을 지닌 경으로서 어찌하여 책임을 벗어버리려고 하는가? 경은 다시는 고사(固辭)하지 말기 바란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조상학(趙尙學)이 정배(定配)된 것은 그의 상소가 불가해서가 아니라 신 때문에 이렇게까지 처분을 받았으므로 신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언로(言路)를 열어 놓은 때가 아닙니까? 특별히 명을 거두어 주시는 것이 신의 절절한 소망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 상소는 매우 놀랍고 망령되었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나라의 재정이 이와 같이 어려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재정을 늘리는 것을 전적으로 주전(鑄錢)에 의지하는데 이것도 듣자하니 성실하게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혜청(宣惠廳)에 화재가 나서 손실이 매우 크다고 하니 몹시 답답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금전(金錢)과 은전(銀錢)을 통용하면 힘을 펼 수 있겠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그것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만 통용하는 초기에는 반드시 돈이 있은 다음에야 교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책이 널리 시행되지 못하니 매우 답답합니다."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전 별선 군관(前別選軍官)                     김화횡(金華鑅)에 대해 판부(判付) 내용을 가지고 문목(問目)을 만들어 추궁하여 물으니, 전후하여 한 행위가 원칙에 위반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행동을 구명하여 보니 참으로 통탄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공초를 받아서 들입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명을 받들고 잠행(潛行)하면서 이와 같이 자취를 드러내고 폐단을 일으켰으니 무엄하기 짝이 없다. 원악지 정배(遠惡地定配)하라."
하였다.

 

이돈응(李敦應)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정기회(鄭基會)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본청(本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불타버린 건물과 전(錢), 목(木), 은(銀)을 통계하면, 대청과 창고의 칸수는 합하여 111간(間)이고, 전은 3,336냥(兩) 남짓이며, 목은 148동(同) 36필(疋) 남짓이고, 은은 147냥 남짓입니다.
각청(各廳)의 역인(役人)들의 내사고(內私庫)에 있는, 각 고을에서 상납하였으나 미처 입고하지 못한 전은 1만 5,687냥 남짓이고, 창고에 넣고 미처 바치지 못한 목은 127동 20필입니다. 관고(官庫)에 쌓아두었다가 옮겨 낼 때 축난 전은 1,079냥 남짓이고, 목은 4동 39필 남짓이며, 포(布)는 2동 47필입니다.
재물을 보관하는 중요한 곳을 사전에 잘 신칙(申飭)하지 못하여 이와 같이 화재를 당하게 된 것은 참으로 몹시 놀라운 일입니다. 해당 입직 낭청(郞廳)은 해부(該部)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감처(勘處)하게 하고, 나머지 원역(員役)들은 모두 형조(刑曹)에 이송하여 엄히 처벌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화재이니, 낭청 이하는 특별히 용서하라."
하였다.

 

11월 13일 을미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생각하대, 우리 익고(翼考)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을 모두 드러내어 찬양하지 못하였으나, 나 소자(小子)는 보답하려는 마음이 늘 간절하였다. 지금 하늘이 복을 많이 내려주어 나라의 운명이 끝없을 뿐 아니라 내년은 바로 우리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 국모가 되신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만년 장수를 축복하는 정성을 표시하려고 옥책(玉冊)을 올리는 법전을 상고하여 익종 대왕(翼宗大王)께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고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께 존호를 가상(加上)하려 한다. 이에 동짓날에 대신(大臣)과 종백(宗伯)을 소견(召見)하는 것이다."
하니,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내년의 태세(太歲)는 국가의 보기 드문 큰 경사입니다. 이 큰 경사를 당하여 금보(金寶)와 옥책으로 이전(彛典)을 거행하는 것은 원래 우리나라의 예법에 있어서 마땅한 일입니다. 익종 대왕의 훌륭한 덕을 소급해서 밝히고 자성 전하께 아름다운 칭호를 더 융성히 함으로써 풍성히 제사드리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바로 성상의 효성이 더욱 빛나고 백성들이 서로 기뻐하는 것이니, 손뼉치고 축하드리는 지극한 마음을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밝은 명을 내리소서."
하니,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내년의 경사는 국가의 보기 드문 경사입니다. 익종 대왕께 존호를 추상하고 자성 전하께 아름다운 칭호를 더 융성히 올리는 것은, 날을 아껴 효도하고 부모의 나이가 더해 가면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는 우리 성상의 지극한 효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속히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온 나라 신민(臣民)들의 한결같은 마음에 부응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우리 자성 전하께서 국모가 되신 지 50년이 되는 해와 우리 왕대비(王大妃) 전하께서 국모가 되신 지 40년이 되는 해가 다같이 내년이니 참으로 국가에서 보기 드문 경사이다. 나 소자는 더없이 기뻐하고 축원하는 마음에서 정월 초하루에 친히 표리(表裏)와 치사(致詞)와 전문(箋文)을 양전(兩殿)께 올리기 위하여 이렇게 묻고 의논하는 것이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대왕대비전께서 국모가 되신 지 50돌과 왕대비전께서 국모가 되신 지 40돌이 되는 해가 다같이 내년에 있게 되어, 두 경사를 합쳐서 정월 초하루에 친히 성대하게 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참으로 억만년 끝없는 복입니다."
하고, 김병국이 아뢰기를,
"더없이 큰 경사가 일시에 겹쳐 정월 초하루에 경사를 축하하는 것은 인정과 예법에 부합되므로, 매우 기쁨과 축하드리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왕대비전에 올 가을 진찬(進饌)하는 예를 응당 속히 거행하여 조금이나마 정성을 펴야 하겠으나, 훌륭한 덕을 지니신 자성께서 이런 때에 그렇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러 번 하교하시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감히 성의(聖意)를 우러러 받들지 않을 수 없으므로 진찬하는 것은 내년 가을로 물려 거행하도록 미리 전교하는 바이니, 제반 의식 절차를 해사(該司)로 하여금 미리 준비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대왕대비의 겸양하시는 뜻을 이와 같이 받드시니 전하의 효성은 더욱 빛이 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달 6일은 바로 우리 자성의 탄신일이다. 나 소자의 경축하는 마음은 여느 해보다 각별하니, 이날 대내에서 표리와 치사와 전문을 올려 인정과 예법을 펼 것이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자성 전하의 연세가 더욱 높아져 해가 갈수록 귀중해지시니, 이날의 경사스러운 예식에 대해 경축하는 마음 더욱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장수(長壽)를 축원하는 마음은 해가 갈수록 더욱 절절합니다. 이제 하교를 받들고 보니 전하의 효성이 더욱 빛나 사람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병문(李秉文)이 아뢰기를,
"의호(議號)를 당일에 거행한 전례도 있고 택일(擇日)하여 거행한 전례도 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택일하여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병문이 아뢰기를,
"삼가 등록(謄錄)을 상고하여 보니, 종전에 존호의 추상과 존호의 가상을 병행할 때 도감(都監)의 명칭을 ‘상호도감(上號都監)’이라고 불렀고, 모든 계사(啓辭)와 문이(文移)는 그 담당한 바에 따라서 썼습니다. 이번에도 이렇게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신이 세자(世子)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방도에 대하여 일찍이 진달해 올린 바가 있습니다. 대체로 바른말과 바른 일로 덕성을 키워나가는 것이 근본이 되는 공부이며, 학문을 도와 조석(朝夕)으로 익히어 지혜와 사고를 넓혀주어야 합니다. 성인의 기업(基業)을 만드는 것이 실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그 요체는 세자궁(世子宮)의 관리들을 가려 선발하여 곁에서 가르쳐주게 하고, 잠시라도 늘 책에 마음을 두게 하여 중단하는 일이 없게 한다면 훗날에 가서 덕이 성취되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끌어 가르치고 보고서 감동받게 하여 순조롭게 무젖도록 함으로써 견문을 넓히게 하소서. 구구한 바람 견딜 수 없습니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신은 지난 가을에 서연(書筵)을 자주 여시라는 뜻으로 상주하였는데 특별히 채납하여 주셨습니다. 제왕의 학문은 보통사람들과 다릅니다. 날마다 세 차례의 강(講)을 열고 소대(召對)와 야대(夜對)를 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강독을 하면서 중단 없이 하는 것을 하나의 정식(定式)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자궁의 관리들로 하여금 곁에서 좋은 이야기와 훌륭한 계책을 진달하게 하면 앞으로 빛나는 성과와 덕을 닦고 감화되는 보람은 진실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더없이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들의 말이 매우 좋으니 이렇게 행해야 하겠다. 단정하고 박식한 사람을 주위에서 선발하여 쓴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될 수 있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옛날부터 세자를 가르치는 방법은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바른 사람으로 두는 것보다 더 앞서는 방도는 없습니다. 반드시 어질고 단정한 사람을 선발하여 세자궁의 관리로 두고 구임(久任)하게 하며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자들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보부편(保傅編)〉의 분명한 훈계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오늘 경들의 말이 이처럼 간절하니 어찌 명심하지 않겠는가? 옛날 현인들의 훈계는 바로 후세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법칙이다. 춘방관(春坊官)도 구임하게 하는 것이 좋은데 최근에 자주 체임되니, 이는 잘못된 일이다. 사(師)와 부(傅)를 각별히 더 신칙하라."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실제적인 일이 아니면 체임을 도모하지 말도록 칙유(勅諭)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산림에 은거하던 유림의 거장들이 옛날에는 연석에 많이 참석하였는데 근래에는 자기의 뜻만 고상하게 가지면서 선뜻 응하려고 하지 않으니, 나의 사모하고 우러르는 마음만 간절하다. 다시 돈유(敦諭)하여 마음을 돌리기를 기대하겠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산림에서 덕을 수양한 사람은 원래 쉽게 조정에 나오지 않는데다가 중엽 이후로는 더욱 드무니, 오직 전하께서 성심으로 예의를 갖추어 간곡히 불러들이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동궁이 서연(書筵)에서 매일같이 힘쓰고 있으니, 더욱 힘쓰라는 유지(諭旨)를 내리겠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어진 선비들이 세자를 보도(輔導)하는 직임에 있습니다. 예를 다하여 그들을 오게 하여 세자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자리에 드나들게 한다면 도움되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우리 익고(翼考)의 지극히 어질고 높은 덕에 대해서는, 아! 자나깨나 잊을 수 없다. 비록 여러 차례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아직도 제대로 찬양하지 못하였으니, 보답하려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조금인들 늦출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하늘이 복을 내려주고 나라의 큰 운명이 끝이 없어, 내년이 바로 우리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 국모가 되신 지 50년이 되는 경사스런 해이다. 세월이 가는 것을 아까워하며 장수를 축원하는 것은 곧 온 나라 사람들의 일치한 심정이다.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을 올리고 아름다운 칭호로 찬양하는 예가 원래 법전에 있어 상고할 수 있다. 이에 동짓날 대신(大臣)들과 종백(宗伯)을 소견(召見)해 보니, 여러 사람들의 말이 일치하였다. 익종 대왕(翼宗大王)께 존호를 추상(追上)하고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 존호를 가상(加上)하는 일을 도감(都監)을 합설(合設)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내년은 우리 자성께서 국모가 되신 지 50년이 되고 또한 우리 왕대비전(王大妃殿)께서 국모가 되신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이것은 참으로 나라에서 보기 드문 경사인데 같은 해에 겹치게 되었으니, 기뻐서 축복하는 나의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정월 초하루에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에 표리(表裏)와 치사(致詞)와 전문(箋文)을 친히 올리려고 한다. 포고(布告)하는 의절(儀節)을 의조(儀曹)에서 규례대로 마련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다음달 6일은 자성의 탄신일이다. 나 소자(小子)가 장수를 축원하는 마음은 다른 해와는 더욱 다르니, 이날 대내(大內)에서 표리와 치사와 전문을 올리겠다. 여러 의절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올 가을 진찬(進饌)의 예를 응당 속히 거행하여 성의를 표시해야 할 것이지만 그동안 이 문제로 여러 번 하교를 받들었는바, 흉년이 들어 근심스럽고 소요스러운 이때에 요란하게 음식을 올리는 의식을 가지는 것은 만만 번 부당하다고 하시면서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다. 그 겸허하고 거룩한 뜻을 우러러 받들지 않을 수 없으니 대왕대비의 진찬을 다시 명년 가을로 마련하고 제반 의절은 각 해조에서 미리 마련하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을 상호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로, 김유연(金有淵), 이병문(李秉文), 정기회(鄭基會)를 제조(提調)로 삼았다.

 

11월 15일 정유

전교하기를,
"정비(情費)를 상납(上納)하는 것은 본래 경법(經法)이 아니다. 그런데 근래에 듣자니 각사(各司)에서 이 폐단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토색질이 전보다 몇 배나 더 심하고, 전(錢)과 목(木)이 밖에서 묵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소행을 구명해 보면 참으로 통분할 노릇이다. 재정은 바닥나고 소용되는 물자는 더없이 방대한데, 정비를 노리며 정공(正供)을 지체시키고 있다. 담당 아전(衙前)은 호소할 데가 없고 백성들과 고을들은 이 때문에 피폐해져 가고 있다. 저 원역배(員役輩)들이 만일 조금이라도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관원들은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따지지 않았으며 법사(法司)는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였으니, 과연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만일 정비 때문에 상납이 지체되는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담당 아전은 법사에 가서 고소하고, 법사는 즉시 법에 근거하여 징벌하여, 설사 상사(上司)의 원역이라고 하더라도 구애됨이 없이 추조하고 다스리되, 죄가 크면 일률(一律)로 시행하고, 죄가 작으면 형배(刑配)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11월 16일 무술

친군영 영무처(親軍營營務處)에서, ‘이달 7일 춘당대(春塘臺)에 친림하시어 군사를 사열하신 다음에, 총리동정전적 영무처 겸 판산동해방 영무처(總理東征前敵營務處兼辦山東海防營務處)에서 새로 건립된 조선의 친군영을 감독 훈련하고 있는 중서 사인(中書舍人)                     원세개(袁世凱)가 보내온 공문에, 「변변치 못한 신은 본래 일개 진부한 유생일 뿐인데 어떻게 군사 관계 사무를 알겠습니까? 이번 군사 훈련에서 급속한 기일 안에 성과를 거둔 것은 변변치 못한 저의 힘이 아니라 실은 지난번 임용을 파격적으로 하라는 하교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군사들에게 포고하였더니, 비로소 분발하여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지금 친림하시어 군대를 사열하시니 매우 기쁩니다. 휘단(彙單)을 가지고 앞으로 더욱 힘을 내게 하기 위하여 각각의 재능 있는 사람들을 장려함으로써 고무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오는 자들을 권면하였으면 합니다. 귀국(貴國)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정령(政令)에 대해 또한 어떻게 감히 함부로 의논하겠습니까? 다만 원조(援助)하고자 할 뿐입니다. 중국 장수들이 출정(出征)할 때 각 사람들을 보증하여 천거하는 것은 모두 장수들로부터 말미암는데 먼저 관명(官名)을 의망한 뒤 안(案)을 모아 가부(可否)와 능력에 대해 전지를 청하고자 하니, 모두 주달해서 참작해서 시행하소서. 너무도 황송한 가운데 명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휘단을 봉입(捧入)합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양전(兩銓)에 분부하여 휘단대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김영수(金永壽)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1월 17일 기해

중국                     사인(舍人)                     마건상(馬建常)과 전 청(淸) 나라주재 독일                     영사관(領事官)                     뮐렌도르프〔穆麟德 : Möllendorf, Paul George von〕를 접견하였다.

 

전교하기를,
"외교 업무가 시작된 이 시기에 관할하는 관청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통리아문(統理衙門)을 설치하여 일체 사무를 거기에서 처리하게 하되, 응행 절목(應行節目)은 되도록 간편하게 하도록 의정부(議政府)에 분부하라."
하였다.

 

행 병조 판서(行兵曹判書)                     조영하(趙寧夏)를 판리통리아문사무(辦理統理衙門事務)로,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홍집(金弘集)을 협판통리아문사무(協辦統理衙門事務)로, 전 청(淸) 나라주재 독일                     영사관(領事官)                     뮐렌도르프〔穆麟德 : Möllendorf, Paul George von〕를 참의통리아문사무(參議統理衙門事務)로 삼았다.

 

홍종운(洪鍾雲)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면영(李冕榮)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11월 18일 경자

빈청(賓廳)에서 〖망단자(望單子)를〗 서계(書啓)하였다.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추상존호 망단자(追上尊號望單子)를 기태 수유 희범 창희(基泰垂裕熙範昌禧)로 서계하고, 대왕대비(大王大妃)의 가상존호 망단자(加上尊號望單子)를 휘안(徽安)으로 서계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百官)들의 진전(進箋)을 받았다.

 

시임 대신(時任大臣)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군사들의 반란이 있은 후에 해이해진 기강을 시급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외무아문(外務衙門)이 있으니 앞으로 대궐 안에 내무아문(內務衙門)을 설치하고, 조정 관리들이 매일 모여서 재결(裁決)할 것은 재결하고 품정(稟定)할 것은 품정하여 철저히 강구하라. 경들은 모쪼록 한마음으로 함께 나라의 일을 수습하도록 하라."
하니,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국사를 염려하시는 마음이 언제인들 지성스럽지 않으셨겠습니까마는, 이번 전하의 하교는 더없이 거룩하니 바람이 일자 풀잎이 쓰러지듯 멀고 가까운 곳의 듣는 사람치고 틀림없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신들은 별로 아는 것은 없지만 어떻게 있는 힘과 충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적임자를 얻어 구임(久任)하게 하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성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듣자니 다른 나라에도 내무아문과 외무아문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된다고 해도 신하들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고, 내가 안 된다고 해도 신하들이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상하(上下)가 서로 믿게 된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지금 받든 성상의 하교가 이렇게까지 간곡하고 극진하니 신들은 변변치 않은 의견이라도 좋은것은 시행하고 나쁜것은 시정하여 지당한 것을 찾기를 더욱 마음속으로 잊지 않겠습니다."
하니,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고 더욱 우러르게 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나라의 형편과 백성들의 근심스러운 사정을 놓고 볼 때 바로 군신 상하가 다같이 정신을 집중해야 할 시기입니다. 영상(領相)이 구체적으로 진달하였으니, 신도 별로 아는 것은 없지만 어찌 충성과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홍장(李鴻章)과 오장경(吳長慶)은 모두 말하기를, ‘외무(外務)가 비록 긴요하지만 내무(內務)에 더욱 먼저 힘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근래에 다른 나라의 정사에서는 모두 이를 급선무로 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외무아문을 설치하였으니 내무아문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내무 사업에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없습니다. 지금 민심은 거의 안정되어 있지 못합니다.
공시인(貢市人)을 놓고 말하면, 오랫동안 값을 받지 못했는데도 성의를 다하여 진배(進排)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극히 가상한 일로서 참으로 전하의 혜택을 흠뻑 입은 것으로 인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매우 위급한 형세여서 맡은 직무를 수행할 길이 없어 호소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대궐 안팎의 각 원역(員役)들을 놓고 말하면, 급료와 요미(料米)를 오랫동안 내주지 않아 이 추운 계절에 목전의 급박한 형편을 이기지 못하여 도망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졸(校卒)을 놓고 말하면 각진(各陣)마다 거행이 없는 날이 없는데 또한 규례대로 급료를 주지 못하고 있으니 몹시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형편은 아침에 저녁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는 만큼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방도를 모색하는 것이 첫째가는 급선무입니다.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이며 근본이 든든해야 나라가 편안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과연 급선무이다. 이제부터 공정하게 하는 것을 법으로 삼고 사사로운 것을 물리친다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공정하게 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성상의 하교를 받고 신은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목전의 위급한 상태는 아침에 저녁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인데 재용이 있은 다음에라야 힘을 펼 수 있습니다. 지금 민심이 이와 같이 튼튼히 자리 잡지 못한 것은 재용이 고갈됨으로 해서 이와 같은 연속적인 황급한 형편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신이 전후하여 여러 번 진달한 것은 모두가 절약과 검박으로 재용을 늘리는 기본방도로 삼을 것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오늘날의 형편을 볼 때 청인과 일본인의 접대에만 힘쓰느라 우리나라 서울의 군사와 백성을 구휼하는 일에는 미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재용이 넉넉지 못하기 때문이니 몹시 답답한 일입니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재용이 고갈된 형편에 대해서는 방금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듣자니, 호련대(扈輦隊)의 무리들도 오랫동안 급료를 받지 못하여 대궐 밖에 모여서 신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호소하려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아도 거의 모든 일이 다 이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외무아문을 새로 설치했으니 내무아문을 나누어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 대신들이 방편을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수레를 미는 것에 비유하자면, 세 사람이 한마음으로 수레를 밀고 가는 일에 주력하는 것과 같을 뿐이니, 어떻게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신은 팔이 아프고 다리가 마비되어 지금 참고 일하기 어렵지만 감히 병을 핑계대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정승들이 오늘처럼 구차하고 어려운 때는 없었습니다. 신은 나이가 70에 가까워 정신이 혼미하여 제 직책을 감당할 방도가 없으며, 좌상도 늘 병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나라에 있는 세 정승으로 말하면 마치 솥에 달린 세 개의 발과 같은 존재이니, 이러한 시기에 더구나 다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지금 모든 일을 새롭게 고쳐나가기 위해 이렇게 관청을 신설하는 것이니 반드시 정승의 정원을 채워 서로 공경하고 돕는다면 어찌 모든 일에서 다같이 빛나는 성과가 이룩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정승들의 구차하고 어려운 형편은 재정이 군색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재용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도 아니니 워낙 쉽게 늘리기 어려운 것이지만, 정승의 직임은 지금 물망에 오른 사람들을 돌아보면 적임자가 많으므로 오직 전하께서 발탁하시는 데 달려 있습니다. 부디 유념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바로잡은 것이 없다. 서울의 민심이 이로 말미암아 의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없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대신들도 맡아서 감독하여 속히 처결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것도 급한 일이지만 그것은 결재하고 확정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이전부터 유시무종(有始無終)이 되기 쉬웠던 것입니다. 선조(宣祖) 때의 정공도감(正供都監)과 경제사(經濟司)라는 관청은 결국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신이 한 달 남짓 시골에 있다가 돌아와 들으니 환곡의 총수와 토지 면적의 총수 등 제반 문제와 관련하여 지방의 각도(各道)에 공문을 발송하였다고 합니다. 이때가 어떤 시기입니까? 일을 시작하는 데는 대체로 크게 판을 벌리지 않아야 비로소 쉽게 끝낼 수 있습니다. 지금의 방도로서는 필요 없는 소비와 지나친 허비 중에서 가장 심한 것을 추려 되도록 비용을 줄이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효를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의 말이 절실하다. 꼭 실효를 거두도록 하라."
하였다. 김병국이 아뢰기를,
"비용을 줄이는 것에 대해, 하인들이 아랫사람들의 것을 덜어 윗사람에게 보탠다는 것으로 알게 되면 사람들이 자연히 의심하고 겁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저 나라에 유익하면서도 백성들에게 폐해를 주지 않는 것 중에서 줄일 것은 줄이고 덜 것은 덜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지방 각도(各道)에 공문을 보낸 것들은 지체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무슨 일이든 마땅하게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병국이 아뢰기를,
"공시인들의 황급한 형편이 몹시 딱하니, 만약 연보전(捐補錢) 중에서 20만 냥(兩) 한도 내에서 추이(推移)하여 분급(分給)한다면 성은을 우러르면서 틀림없이 감격과 찬송을 금치 못할 것이며, 위급한 형편을 풀어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렇게 감히 우러러 진달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의견이 매우 타당하다. 20만 냥으로 어떻게 여러 공인(貢人)들의 어려움을 풀어줄 수 있겠는가마는, 우선 이대로 획급(劃給)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지금 재정이 극히 곤란한 형편에서 이러한 처분이 있으니 전교가 일단 내려가면 모든 도민(都民)들이 마치 따뜻한 봄날을 맞아 만물이 춤추듯 기뻐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정도의 수량을 획급한다고 어떻게 그 일부라도 막겠는가?"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혜택이 아래에 미치기만 하면 액수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백성들은 돌보아주는 깊은 은혜에 감격하여 칭송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들을 빈대(賓對)나 입진(入診)할 때가 아니면 소견하는 일이 매우 드무니 이제부터는 자주 만나 격이 없이 의논하는 것이 매우 좋겠다. 영묘조(英廟朝)·정묘조(正廟朝)때의 전례를 놓고 보면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수시로 불러들여 접견하였다. 지금도 그렇게 하여야 하겠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옳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상하가 서로 뜻이 통하고,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꼭 아뢰게 되어 사무가 지체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지금 이 연석에 나온 것은 신들과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뿐입니다. 이렇게 불러들여 접견하게 되면 진달한 의견이 지체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통행되는 규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천하가 다 그렇다고 한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외무아문을 설치하고 또 내무아문을 설치하는 것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얕은 데로부터 깊은 데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한 가지 새로운 정사를 시행하고 내일 또 한 가지 새로운 정사를 시행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정사를 이룩하는 근본입니다. 그리하여 그 소문이 날마다 각 나라 신문에 보도되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되는 것이니, 일거일동을 어찌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우리나라가 외교 업무에 익숙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오 장군도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웃 나라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 형식이 많고 전례만 따른다고 논하고 있으니, 어찌 불만의 뜻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은 생기는 대로 즉시 해결하여야 궁색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각 나라에서 오고가는데 있어서 맞아 접대하는 일을 만일 사전에 미리 생각하지 않으면 여유 있게 처리할 방도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성인들은 때에 맞게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 살면서 옛날의 방도를 행하면 편치 않은 일들이 있으니, 부득이 때에 따라 임기응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는 탐오를 징벌하는 데 있다. 선주(船主)와 포리배(逋吏輩)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아야 많은 사람들을 독려할 수 있다. 간혹 사람을 동정하는 정사로 인하여 죽여야 할 것을 죽이지 않으면 법이 집행될 수 없는 것이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정사에서 포상과 처벌을 어김없이 하여야 법이 설 수 있습니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일단 법령을 믿지 않으면 일이 성사되지 않는 법입니다. 법을 위반한 사람을 일체 용서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살려 주는 방법으로 죽인다.’는 것입니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포상을 사리에 어그러지게 하지 말 것에 대하여 옛날의 현인이 간곡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당(唐) 나라 덕종(德宗)이 오이를 바친 백성에게 교위 벼슬을 포상으로 주었을 적에 육지(陸贄)가, ‘군공(軍功)을 세운 사람에게 주어야지 함부로 포상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아뢰었던 것입니다. 포상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중국에서 육각로(六閣老)를 둔 것은 정사를 논평하는 데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대신에 어찌 정해진 수가 있겠는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오직 적임자를 얻어 직임을 맡길 때에는 재능이 많은 것이 귀중한 것이니, 어찌 정한 수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때문에 임금노릇 하기가 어렵고 신하노릇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습니다. 비록 간언을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신다 하더라도 두려움이 앞서 진달하는 것은 언제나 열에 두셋도 못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것이 바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믿을 수 있는 기회이다. 성실하고 공정하게 하는 것을 정치의 첫째 방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공정하게 하는 그 가운데 또한 성실하게 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신은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아직까지 조그마한 보답도 하지 못하면서 그저 총애를 받고 영광만 누리고 있으니, 늘 황송하고 부끄럽기만 합니다. 오늘 훌륭한 임금은 계신데 어진 신하가 없다는 한탄스러움에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상하가 말을 주고받으며 기탄없이 흉금을 털어놓았는데 경들은 부디 잊지 말도록 하라. 나도 잊지 못할 것이다."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오늘밤 연석에서 한 대화는 정말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인데 한 순간인들 어찌 감히 은혜가 넘치는 정중한 말씀을 잊겠습니까? 더할 나위 없는 영광에 다만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오늘 연석에서의 대화로 말하면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이 될 뿐만 아니라 신들의 영광도 무어라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나라의 사무는 원래 안과 밖을 구별해서는 안 되지만 이미 외교 처리를 위해 따로 한 개의 아문(衙門)을 따로 설치하였으니, 그 내무의 일도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대궐 안에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을 신설하고 조정의 관원 중에서 정사하는 방법에 숙달한 사람들을 적절하게 가려 임명하고 나서 대신들이 거느리고 모임을 가지게 하며, 백성들에게 편리하고 나라에 이로운 모든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하여 충분히 토의하고 결재하며 품처(稟處)하게 함으로써 면모를 일신하게 하라. 나는 앞으로 건의하는 대로 흔연히 받아들여 시행하겠다. 이것은 백성과 나라의 존망과 관계되는 사업으로서 위와 아래가 서로 노력하여야 할 문제이다. 나는 다시 더 말하지 않겠으니 아문을 설치할 제도에 대해서는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각 공계(貢契)에서 받아야 할 값과 각 아문(衙門)에서 내주어야 할 급료를 오랫동안 주지 못한 것이 매우 많다고 하니, 밤낮 근심되는 마음을 어떻게 형언할 수 있겠는가? 묘당(廟堂)에서 어떤 명목의 전(錢) 중에서든지 30만 냥(兩) 한도 내에서 우선 떼어내어 적당히 나눠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속히 장부를 청산하도록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 분부하라."
하였다.

 

11월 19일 신축

특별히 신기선(申箕善)을 제수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을 총리통리내무아문사무(總理統理內務衙門事務)로, 좌찬성(左贊成)        민태호(閔台鎬), 상호군(上護軍)        윤자덕(尹滋悳)과 김병시(金炳始),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유연(金有淵)을 판리통리내무아문사무(辦理統理內務衙門事務)로,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윤식(金允植)을 협판통리내무아문사무협판(協辦統理內務衙門事務)로, 부호군(副護軍)        홍영식(洪英植), 예조 참의(禮曹參議)        어윤중(魚允中), 동부승지(東副承旨)        신기선(申箕善)을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參議統理內務衙門事務)로 삼았다.

 

민영목(閔泳穆)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하니, 비답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었다.

 

전 정언(前正言)                     김원제(金源濟)가 상소하여, 광산을 개발하는 문제와 청나라 돈과 일본 돈을 통용하는 것의 유리한 점에 대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유념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김영효(金永孝)가 상소하여 시무에 대하여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黃海道)에서도 조운(漕運)을 시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팔도(道)에 각각 병영(兵營)을 설치하여 새로운 기술을 배우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농사(農司)를 설치하여 농사에 관한 책과 정밀하고 편리한 농기계를 각 나라에서 구입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의견이 시세의 요구에 부합되니 매우 가상하다. 유념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이은우(李殷雨)가 상소하여 시무에 대하여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해를 막는 것이고, 둘째는 도적을 없애는 것이고, 셋째는 병기를 만드는 것이고, 넷째는 호포(戶布)를 바로잡는 것이고, 다섯째는 흩어져있는 재산을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여섯째는 폐단의 근원을 없애는 것이고, 일곱째는 탐오와 학정을 억제하는 것이고, 여덟째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고, 아홉째는 관전(寬典)을 쓰는 것이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유념하겠으나, 적절하지 못한 문제도 있다."
하였다.

 

유학(幼學) 강기형(姜基馨)이 상소하여 시무에 대하여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내무이고, 둘째는 기계이며, 셋째는 외무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말한 것은 참으로 절실하니 매우 가상하다. 유념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양진화(梁鎭華)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석탄이라는 것은 값이 싸고 용도가 넓으며, 중국과 서양의 나라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일용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은 이것입니다. 석탄은 평양(平壤)에서 생산되고 있으니 하늘과 땅이 우리의 종사(宗社)와 백성들을 도와주고 있는 복입니다. 이름은 탄(炭)이라고 부르지만 그 이용 가치는 금은 주옥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의견은 참으로 시세의 요구에 부합되니, 시험해 보게 하겠다."
하였다.

 

11월 20일 임인

홍순목(洪淳穆)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송근수(宋近洙)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민영위(閔泳緯)를 시강원 좌부빈객(侍講院左副賓客)으로 삼았다.

 

11월 21일 계묘

상호도감(上號都監)에서 계청(啓請)하여 익종대왕추상존호옥책문제술관(翼宗大王追上尊號玉冊文製述官)에 김상현(金尙鉉), 서사관(書寫官)에 정범조(鄭範朝), 악장문제술관(樂章文製述官)에 김병시(金炳始), 금보전문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에 이유원(李裕元), 대왕대비전가상존호옥책문제술관(大王大妃殿加上尊號玉冊文製述官)                     민태호(閔台鎬), 서사관에 조영하(趙寧夏), 악장문제술관에 윤자덕(尹滋悳), 옥보전문서사관(玉寶篆文書寫官)에 김병국(金炳國)을 차출하였다.

 

홍문록(弘文錄)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윤길구(尹吉求), 신용선(申容善), 정은조(鄭誾朝), 이훈경(李勛卿), 정수현(鄭秀鉉), 김중식(金中植), 임희상(林羲相), 김승균(金昇均), 윤기원(尹起元)이다.

 

11월 22일 갑진

영부사(領府事)                     홍순목(洪淳穆)을 제배(除拜)하여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이 일전에 직책을 벗어났던 것은 경이 고심하는 것 때문에 잠시 윤허하였던 것이고, 백성과 나라의 어려운 형편이 날이 갈수록 더욱 위급해지고 있는 이때에 노숙하고 덕망이 높은 경으로서 아무리 한가하게 쉬려고 한들 어떻게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
경이 나를 도와주고 바로잡아 준 것이 이미 드러난 공적이 있으니, 이번에 다시 임명하는 것은 나 한 사람의 뜻일 뿐만 아니라 바로 모든 사람에게 있는 바이다. 나라 일에 모든 힘을 다하는 충성과 쉬운 일이나 험난한 일이나 가리지 않는 지조를 지닌 경으로서 여러 말을 기다리지 않고 선뜻 나설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은 즉시 일어나 명에 응함으로써 몹시 기다리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11월 24일 병오

김영수(金永壽)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정태호(鄭泰好)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영수(金永壽)와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영목(閔泳穆)을 서로 바꾸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상소하여 재상직을 사임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가 또 올라왔다. 지금 나라의 형편과 백성들의 운명은 위험하고도 급한 것이 계란을 쌓아놓은 것 같을 뿐만이 아니다. 이것을 부지하고 수습해 나가는 것은 오직 보상(輔相)의 직임에 달려 있다. 경이 상소에서 나라에 모든 힘을 다하는 충성을 지니고 나라를 운영하는 재능을 지닌 사람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경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닌가? 노와 돛대가 부러지면 배가 멈춰 설 곳이 없다는 것은 바로 경이 자신의 일을 근심해서 쓴 말인데, 나라를 우려하는 경의 근심은 필시 이보다 클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의 시비는 놀랍고 망령된 것으로서 따질 것도 못 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그 넓은 도량에 담아 두고 있는가? 하루만 일을 보지 않아도 온갖 일이 번잡하게 몰리니, 경은 나의 뜻을 받들고 형식적으로 사양하지 말고 즉시 조정에 나와 온 나라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11월 25일 정미

이원명(李源命)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도경(都京)의 예부(禮部)에서 보내 온 자문(咨文)을 보니, ‘길림성(吉林省)에 들어온 유민(流民)들에 대하여 이제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하고 모아서 돌려보내야겠는데, 다만 염려되는 것은 그 유민의 수효가 많기 때문에 즉시 몰아내 보내면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닐 것 같아서 기한을 넉넉히 줌으로써 돌봐주는 뜻을 보이라는 황제의 칙유를 받들어 통지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의 하교를 따르겠다는 내용으로 회답 자문을 지어서 파발로 만부(灣俯)에 내려 보내어 북경(北京)에 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6일 무신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을 인견(引見)하였다. 홍순목이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수신사(修信使)의 장계(狀啓)는 이미 들어왔으나 별다른 소식은 없다. 그리고 그 나라의 국서가 온다고 하지만 내막을 몰라서 매우 답답하다. 배상 문제는 기한을 10년 연장한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그것이 다행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마음을 놓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갑자기 정한 기한이 닥쳐와 마련해주지 못하는 날에는 어찌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영남(嶺南)에 내려 보내는 몫을 의정부(議政府)에서 해마다 책임지고 보상해 주면 몇 해 안가서 빚을 청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속시원한 조처이니, 이렇게 하면 이후의 재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의 말이 아주 좋다. 내려 보내는 수량이 얼마인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그 수효는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듣기에는 50만 냥에 달한다고 한 듯합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내무아문(內務衙門)을 설치하라는 하교가 내린 지 여러 날이 되지만 아직 받들지 못하여 대단히 황송합니다. 이 아문을 설치하는 것은 어려운 이 시기에 전하께서 정력을 기울여 정사를 잘 하려고 애쓰는 계기로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밤 연석에서의 하교 중 공정하고 성실히 하라는 말씀은 참으로 만세토록 변치 않을 확고한 의논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하늘은 임금의 도리이고 땅은 신하의 도리입니다.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는 것은 《주역(周易)》에서 이른바 하늘과 땅이 서로 사귄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와 같이 되어야 상하간의 마음과 뜻이 통하여 모든 일이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늘은 위에만 머물러 있고 땅은 아래에만 머물러 있으면 이것이 이른바 막힌 것이니, 위태롭고 어려운 일이 없는 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이 내려지면 반드시 집행하여야 하고 되돌릴 수 없으니 명을 내리기 전에 공명정대한가를 신중히 살피면 아랫사람들이 어찌 공경스럽게 받들어 집행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한 가지 새로운 정사를 시행하고 내일 한 가지 새로운 정사를 시행하며, 이렇게 해나간다면 나라를 다스려 태평세상을 만드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듯이 쉬울 것입니다. 만일 이 시기를 헛되이 보낸다면 수습하기 어려울 것이니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안에 들어가서는 법도가 있는 신하와 정사를 도울 어진 선비가 없고, 밖으로는 적국(敵國)이나 외환(外患)이 없으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바로 군신 상하 간에 정신을 모아 큰일을 할 때이니, 삼가 바라건대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의 말은 지극히 타당하니, 마음에 새겨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신들의 책임은 좋은 것을 올리고 좋지 않은 것을 바로잡아주는 것을 첫째 도리로 삼고 있으니, 오직 전하께서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노숙한 여러 신하가 이 도리를 가지고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도와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힘쓰라."
하였다.

 

11월 27일 기유

추상존호금보전문서사관(追上尊號金寶篆文書寫官)                     이유원(李裕元)이 상소하니, 체차(遞差)하고 윤의선(尹宜善)을 임명하였다.

 

11월 28일 경술

〖일본(日本)에 갔다가〗 돌아온 수신사 대관(修信使大官) 박영효(朴泳孝)와 부관(副官) 김만식(金晩植)을 소견(召見)하였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정범조(鄭範朝)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1월 29일 신해

전교하기를,
"지금 외무(外務)가 방대하니 모든 문제를 신속히 처리하여 늦지 않게 하라. 그리고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기복(起復)하는 것으로 말하면 우리 왕조에서 이미 그렇게 시행한 전례가 많다. 전 참판(前參判)                     민영익(閔泳翊)을 협판통리아문사무(協辦統理衙門事務)로 차하(差下)하고 기복하여 공무를 보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남일우(南一祐)의 장계(狀啓)를 보니, ‘도내(道內) 각읍(各邑)의 신구(新舊) 포흠(逋欠)에 대하여 삼가 연석(筵席)에서 아뢴 내용에 따라 행회(行會)하여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만일 전적으로 정해놓은 기한에 따라 그저 포안(逋案)만 뽑아낸다면 요행수를 써서 면제받는 폐단이 없으리라고 단정하기 어려우니, 우선 몇 달 기한을 늦추어 가지고 포흠을 찾아낼 방법을 강구하고 충납(充納)할 방도를 모색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실제대로 찾아낼 수 있다면 기한을 늦추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뢴 대로 몇 달 동안 기한을 늦추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30일 임자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크고 작은 은전(銀錢)를 이제 주조하였으니 우선 행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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