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20권, 고종20년 1883년 12월
12월 1일 정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두 통의 자문(咨文)을 보니, 하나는 봉천(奉天)과 조선 변방 백성들의 무역 장정(章程)을 토의한 대로 하라는 교지를 받은 일에 대한 북경 예부(北京禮部)의 자문(咨文)이고, 하나는 중강(中江)의 교역 장정 책자를 지조(知照)하는 일에 대한 성경예부의 자문이었습니다.
받았다는 내용으로 각각 회자(回咨)를 지어 파발(擺撥)에게 붙여서 의주부(義州府)에 내려 보내어 들여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경기(京畿) 유학(幼學) 박지양(朴之陽) 등이 상소하여 문목공(文穆公) 유숭조(柳崇祖)를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예는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는 일보다 더 중대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시행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유학(幼學) 송인호(宋寅濩)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貞公) 김우옹(金宇顒)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문묘에 종향하는 일을 갑자기 시행 할 수 없는 것은 그 예법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유학(幼學) 김경락(金景洛) 등이 상소하여 서원(書院)을 다시 세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문 내용에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미 서원을 철폐하였으니 어떻게 갑자기 다시 시행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유학(幼學) 권심기(權心夔) 등이 상소하여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의 서원(書院)을 다시 세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세우고 철거함을 덧없이 하는 것은 그 일을 중시하는 의리가 아니다.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12월 3일 기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중국 봉천(奉天)과 조선 변경 백성들 간의 무역 규정이 체결되었다.
〈봉천과 조선 변민 교역 장정〔奉天與朝鮮邊民交易章程〕〉
제1조
변경(邊境)의 육로 무역(陸路貿易)은 원래 중국이 속국(屬國)을 우대하고 오로지 백성의 편의를 위하여 개설한 것으로서, 각 항구에서 통상(通商)하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러므로 수시로 왕래할 수 있게 한 것은 봉천성(奉天省)과 조선 변경의 상인(商人)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고, 기타 각국은 이 규정에 해당하지 않는다.
제2조
봉천성(奉天省)의 상인들은 의주(義州)에서 무역하는 것을 제외하고 지방관이 발급한 여행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고서는 조선의 각 지방을 몰래 유람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 상인들은 이 규정을 성실히 지켜야 하고 봉천성(奉天省)의 각 지방을 몰래 유람할 수 없으며, 더욱이 외국사람을 데리고 변경에 들어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외국사람을 데리고 가 자기 나라 상인이라고 속이고 함부로 국경지대에 들어간 경우에는 조사해서 데리고 간 사람을 사사로이 변경을 넘은 예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한다.
제3조
압록강(鴨綠江) 이내와 조선 평안도(平安道) 인근 각처의 하구(河口)는 중국에서 제물(祭物)과 관용(官用) 물고기를 잡는 곳이므로 민간에서 사적으로 잡는 것을 금하고, 조선 사람들이 오가며 고기잡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위반하는 사람은 처벌한다.
제4조
중강(中江)에서 의주(義州)까지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상인들이 무역하러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수 있다. 각 항구에서 통상하는 화물로서 먼 곳에서 운반해와 부려 보관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중강(中江) 부근의 구련성(九連城) 앞과 의주(義州)의 서성(西城) 밖에 설치한 세관(稅關)의 검사를 받고 시전(市廛)을 세워 왕래에 편리한 곳으로 삼는다. 봉천성(奉天省)의 변경지역에는 조선 사람이 집을 짓고 창고를 설치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중국 사람이 조선 영역 안에서 무역을 하는 때에도 이에 준해서 처리한다.
제5조
세금을 징수하고 화물의 검열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일은 관리들이 처리한다. 종래에는 책문(柵門)에 감독을 두고 세금에 관한 사무를 전적으로 맡아보게 하였으나 지금은 새 규정을 만들었으므로 따로 세관을 설치한다. 세금에 대한 사무를 감독 처리하는 모든 관리는 성경(盛京) 장군(將軍)과 봉천 부윤(奉天府尹)이 북양 대신(北洋大臣)과 의논하여 파견하되 황제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받아 시행한다.
제6조
상인들이 무역한 물건을 세관에 운반해서 불순물을 조사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등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모두 세금에 관한 사무를 감독 처리하는 관리가 소속된 문관(文官)과 무관(武官)들을 잘 단속하여 처리한다. 재정에 관한 범죄 사건은 지방 관청의 심단자(審斷者)에게 넘겨 각각 규정에 의하여 처리한다. 이 밖에 봉천성(奉天省) 사람이 조선에서 사건을 일으켰거나 혹은 몰래 조선 경내로 도망친 자에 대해서는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체포하여 안동현(安東縣)에 넘겨 처벌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봉천성(奉天省)에서 사건을 일으켰거나 몰래 봉천성(奉天省) 경내로 도망친 자에 대해서는 안동현(安東縣)에서 체포하여 의주 부윤에게 넘겨 처벌하게 한다.
국경에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여 안동현 지현(安東縣知縣)이나 의주 부윤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선 안동현에서 보고하거나 혹은 의주 부윤을 거쳐 동변도아문(東邊道衙門)에 보고하고, 동변도아문에서 다시 성경 장군(盛京將軍)과 봉천 부윤(奉天府尹)에게 보고하여 지시를 받아 안동현과 의주 부윤이 지시에 따라 처리한다.
제7조
변경의 교역은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에 세관을 설치하고 불순물을 조사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 모두 긴요한 문제이다. 상인들의 출입을 세관에서 책임지고 조사하며 증명서가 확인되면 즉시 통과시키고, 억류하여 난처하게 만들거나 조금이라도 물건을 내라고 요구할 수 없다. 상품을 내가고 들여옴에 있어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가 책임을 지고 검열한다. 상품명세서를 점검하여 소정 규정에 맞을 때에는 세금을 징수하되 정액 외에 더 받을 수 없다.
제8조
그 해 조선(朝鮮)에서 북경(北京)에 들여가는 공물(貢物)은 국가 의전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일체 규례에 따라야 한다. 공물은 으레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다. 그 사신 및 파견관, 수행원들이 가지고 가는 행장과 사소한 물건들에 대해서는 예부(禮部)의 논의를 거쳐 제한을 늦추어준다. 사신은 화물을 가지고 가지 못하며 매 사람이 가지고 가는 의복, 책, 약품은 300근(斤)으로 제한한다. 파견관과 수행원들이 화물을 가지고 가는 경우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것이므로 홍삼(紅蔘)은 파견관 한 사람당 정량 20근으로 하고 수행원은 한 사람당 10근으로 한다. 또 의복, 짐, 사소한 물건들은 파견관 한 사람당 정량 160근으로 하고 수행원은 한 사람당 정량 80근으로 한다. 파견관과 수행원은 모두 예부(禮部)에 보고한 명단과 실제 인원수에 따라 정한다. 따로 가지고 가는 짐들이 확실히 병풍 장막이거나 도중에서 먹을 음식물일 때에는 다시 참작하여 세금을 면제해준다. 이밖에 상자에 넣어 묶은 짐들을 조사해서 화물일 때에는 이어 정확히 보고하고 세금을 바쳐야 한다. 다른 공무로 파견되어 드나드는 관리들이 증명서를 가지고 화물을 휴대한 경우에도 규정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고 면제해주지 않는다.
제9조
중강(中江)의 무역에서 징수하는 세금은 홍삼(紅蔘)인 경우 가격에 근거하여 100분의 15를 징수하고, 소나 말인 경우에는 타고 다니는 것을 빼고 시장에 들여 파는 때에는 가격의 100분의 5를 세금으로 징수한다. 그 밖의 채소, 오이, 과일, 닭, 오리, 거위, 물고기 등 민간에서 일상 필요로 하거나 또 매우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다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다.
제10조
중강(中江)의 무역은 원래 변방 사람들을 위하여 수시로 하는 무역으로서 각 항구에서 여러 나라들과 통상하는 경우와는 서로 상관이 없다. 해관(海關) 장정에 따라 본세(本稅)와 부가세(附加稅)로 구분 징수하여 폐단을 가져오게 할 수 없다. 봉천성(奉天省)의 상인이 의주(義州)의 무역 시장에 화물을 가져다 팔 경우에는 어느 지방의 화물임을 가리지 않고 역시 규정에 따라 일차 정식세금을 바치고, 조선 상인들이 중강(中江) 시장에 화물을 운반하여 팔 경우에 어느 지방의 화물임을 가리지 않고 역시 규정에 따라 일차 정식 세금을 바치며 모두 이중으로 징수하지 못한다. 상인이 외국 상품을 무역 시장에 내다 팔기를 원하지 않을 때에는 다 그 편의를 들어주고 관청에서 강제로 억제하지 못한다.
제11조
책문(柵門)에서 철따라 진행하던 무역을 중강(中江)으로 옮겨 수시로 하는 무역으로 고쳤으니, 종래에 봄과 가을에 기일을 정해 철따라 진행하던 무역을 일체 중지한다. 중강(中江)으로부터 책문(柵門)에 이르기까지 이전의 공물(貢物) 길로 공물을 든 사신이 오가는 것을 금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 그 밖의 통행증을 가지지 못한 상인이 마음대로 물건을 가져다 파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엄격히 단속하여 부당행위를 방지한다.
제12조
중강(中江)과 의주(義州)는 거리가 매우 가까워 쉽사리 건너다닐 수 있으나 오가는 것을 제한하였다. 중강(中江)과 의주(義州)의 위아래 각처에 오솔길과 갈림길이 있어 이로 다니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겨울과 봄에는 강이 얼어붙고 물이 얕아져 곳곳마다 통할 수 있으니 조사하고 체포하여 더욱 엄하게 처리해야 한다. 죄를 범한 자는 반드시 처벌하여 법이 엄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제13조
중강(中江)과 의주(義州)의 변경 백성들 간의 무역은 쌍방이 개항한 항구에서 각각 통상 사무를 맡아보는 직원을 두고 하는 무역과는 다르다. 조선 상인이 봉천성(奉天省)에서 육로로 토산물을 구매하여 오는 경우에는 세금에 관한 사무를 감독하고 처리하는 관리가 증명서를 발급해주고 조선의 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통지하여 등록하게 한다. 봉천성 상인이 조선에서 육로로 토산물을 구매해 갈 때에는 의주 부윤이 증명서를 발급해주고 세금에 관한 사무를 감독하고 처리하는 관리에게 통보하여 등록하게 한다. 증명서에는 사전에 어떤 상품이라는 것을 밝힌다. 어떤 상품이라고 미리 지정할 수 없을 때에는 모두 구매하기를 기다려 세관(稅關)이 있는 곳에 돌아와 즉시 현품으로 보고하고 원래 받았던 증명서는 반환하며, 조사하고 세금을 징수하고 납세 증명서를 발급한다. 어떤 지방에 가서 물건을 구매하려고 할 때에는 증명서에다 명백히 써넣어야 하고, 갈 수 없는 곳인 경우에는 증명서를 발급하지 않는다.
제14조
봉천성(奉天省) 상인은 조선에 가서 의주(義州)에서만 교역할 수 있고, 조선 상인은 봉천성에 가서 중강(中江)에 설치한 초소에서만 교역을 할 수 있다. 봉천성(奉天省)에서 관할하는 지역은 제2의 수도인 중요한 지역이므로 원래의 준칙을 준수해야 한다. 토산물을 구매할 때에도 봉황성(鳳凰城)의 변문(邊門)으로 출입하며 공물 길을 통해서만 돌아가야 하고 마음대로 유람할 수 없다. 조선은 청(淸) 나라의 속국(屬國)이므로 본토와 같이 본다. 봉황성 상인도 금령을 어기면서 국경을 넘어 다닐 수 없으며 위반하는 자는 징벌한다.
제15조
항구의 화물은 바다를 이용하여 운반해야 한다. 봉천성(奉天省) 상인들이 개항한 조선 항구에서 사들여 운반하는 화물을 육로로 중강(中江)이나 혹은 조선의 의주(義州) 및 다른 지방에 가져다 파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 상인들에 대해서도 개항한 봉천성의 항구에서 사들여 운반하는 상품을 육로로 의주나 혹은 봉천성 또는 다른 지방에 가져다 파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위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상품을 조사하여 관청에 몰수하고 죄과의 등급을 높여 처벌한다. 관리가 공무를 위해 문건을 가지고 가쁜 한 몸으로 화물을 가지지 않았을 때에는 상인들과 같이 취급하지 않고 조사하고 검열하는 즉시 통과시켜 구별을 표시한다.
제16조
상인들이 화물을 운반할 때에는 작성한 명세서를 관청에 제출하여 검열을 받고 도장을 받는다. 밀수상품을 가지고 가면서 보고하지 않았을 때에는 몰래 세금에서 빠져나가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사하여 관청에 몰수한다. 수입한 아편과 국내산 아편, 제작된 군기(軍器) 및 일체 금지하는 물건에 대해서는 천진(天津)에서 원래 논의 규정한 날라다 파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 가지고 국경을 넘을 수 없고, 유통하는 동전도 운반하여 국경을 넘어갈 수 없다. 위반하는 자는 분별하여 처벌한다.
제17조
상인들이 무역에 사용하는 금과 은은 몸에 따르는 의복, 행장(行裝), 필묵(筆墨), 책들과 함께 다 세금을 면제한다. 다만 사금(砂金)과 은(銀)광석을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은 상품과 원래 같으나 엽전(葉錢)처럼 만든 금, 가락지처럼 만든 금, 금장식물, 돈처럼 만든 은, 덩어리 은, 부스러기 은 등을 시장에서 쓰는 경우 세금을 면제 받는 것과는 다르다. 가격에 근거하여 100분의 5를 규정대로 세금을 거두고 면제해주지 않는다. 허위기재하여 세금을 탈루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제18조
무역하는 화물이 해산물, 가죽, 베, 종이, 놋그릇, 자기 등속의 물건은 모두 가격에 근거하여 100분의 5를 세금으로 징수한다. 세금 규정에 없는 경우 상인이 가격을 정해서 수시로 보고하고, 역시 가격에 근거하여 100분의 5를 세금으로 징수하며 정액 외에 더 요구할 수 없다.
제19조
조선 사신이 북경(北京)으로 행차함에 있어 변경에 들어설 때에는 전례에 따라 봉황성의 성수위(城守尉)가 미리 성경 장군(盛京將軍)에게 보고하고 각 관청에서 예부(禮部)에 통보한다. 한편 성수위는 직접 변문(邊門)에 나아가 감시하고 연로(沿路)에 관리를 파견하여 잘 호송한다. 파견관과 통역원들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일은 모두 공물에 관계된 일이고 예법에 관계된 일이므로 기존 제도에 따라 천진(天津)에서 원래 협의한 조약에 부합되게 해야 한다. 군사들을 엄격히 단속하여 트집을 잡고 무엇을 내라고 요구하지 못하게 하며, 위반하는 자는 조사하여 규명한다.
제20조
중강(中江)의 무역에서 사용하는 자와 저울은 조선과 그 길이와 무게가 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중강과 의주(義州) 두 곳에서 평상시에 사용하는 자와 저울을 서로 비교하여 같지 않을 때에는 국경의 지방관들이 함께 모여 공평하게 맞추어 같게 만들 것이며, 힘써 지방 실정에 맞게 해서 다른 지방의 자와 저울을 가지고 물건을 재고 달지 못하게 하여 공정성을 밝혀야 한다.
제21조
전에는 책문(柵門)에서 매번 야간에 교역하였으므로 몰래 빠져나가 감추는 등의 폐단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중강(中江)으로 옮겼으므로 종래의 관습을 그대로 둘 수 없다. 엄격하게 금지시켜 캄캄한 밤에 시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위반하는 자는 처벌한다.
제22조
조선 상인들이 무역을 함에 있어 종전에는 관청에서 둔 중개인에게 의하여 가격을 정하였으므로 그 가격의 높낮은 폐단이 생기는 것을 면할 수 없었다. 간혹 물건을 가지고 무역시장에 가서 화물을 외상으로 팔았을 경우에 상반기에 구매한 화물 값을 후반기에 갚아주기로 약속하였으나 하반기에 중개인이 매번 빚을 진 일로 하여 오지 않으므로 받아낼 수 없으니, 상인들에게 큰 폐해로 되고 있다. 지금은 중강(中江)에 무역 시장을 다시 설치하여 수시로 교역하므로 매매하려고 할 때에는 다 상인들 자신이 값을 상정(詳定)하는 것을 들어주고, 중개인이 중간에서 도맡아 하지 못하게 하여 오랜 폐단을 없앤다.
제23조
중강(中江)에 새로이 변경시장을 설치하였다. 지방 관리가 교섭할 일이 있어 문건을 교환하는 경우에 격식을 지켜야 한다. 조선은 반드시 ‘천조(天朝)’ 혹은 ‘상국(上國)’이라는 글자로 존대해서 써야 한다. 보통 공문에 속하는 것도 규례에 따라야 하고, ‘중동(中東)’ 등의 글자를 써 일정한 규례를 어기지 못한다. 봉천성(奉天省)의 변방 관리들은, ‘조선국(朝鮮國)’ 혹은 ‘귀국(貴國)’이라는 글자를 써 우대하는 뜻을 보인다.
제24조
변경에서 몰래 국경을 넘는 자를 조사하고 그 방비 대책을 엄격히 세우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이번 규정에 구체적으로 실려 있지 않은 것은 쌍방 지방관들이 수시로 대책을 세워 처리하고, 곧 서로 통지해서 상세하게 문건을 작성하며 모두 치밀하게 함으로써 변경백성들이 수시로 교역하는 대체적인 국면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한다.
광서(光緖) 9년 12월 3일
중국 2품함(二品銜) 봉천 전영 익장(奉天全營翼長) 동변 병비도(東邊兵備道) 진본식(陳本植) 조선국 서북 경략사(朝鮮國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
【원본】 24책 20권 9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32면
【분류】외교-청(淸) / 무역(貿易) / 어문학-문학(文學)
조선국 서북 경략사(朝鮮國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
【원본】 24책 20권 9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32면
【분류】외교-청(淸) / 무역(貿易) / 어문학-문학(文學)
이원명(李源命)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2월 4일 경술
전교하기를,
"강원 감사(江原監司) 윤우선(尹宇善)과 황해 감사(黃海監司) 민치서(閔致序)를 서로 바꾸도록 하라."
하였다.
이택응(李宅應)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2월 5일 신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경기(京畿) 해안을 방어하는 병사와 포군의 조련(調練)은 매우 시급한 일이다. 독판 교섭 통상 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영목(閔泳穆)을 경기 해안 방어 사무 총관〔畿沿海防事務總管〕으로 차하(差下)하라. 동래(東萊)와 덕원(德源) 같은 곳도 소홀하게 놓아둘 수 없으니 통리 군국 아문(統理軍國衙門)에서 좋은 쪽으로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각 관청에서 달마다 내주는 요식과 공물 값을 지불하지 못한 것이 매우 많다고 들었다. 이 추운 때에 더욱 걱정되니 돈 15만 냥(兩)을 특별히 내하(內下)하고, 묘당(廟堂)에서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그리고 병조(兵曹)에 적당히 분획(分劃)하여 나눠주게 하라."
하였다.
옹진(瓮津)과 동래부(東萊府)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충주(忠州)의 유학(幼學) 윤영덕(尹永德), 진사(進士) 경난(慶煖), 전 도사(前都事) 이교철(李敎哲) 등이 다 상소하여 곤전(坤殿)이 주가(駐駕)한 곳에 궁전을 짓고 비석을 세울 것을 청하니, 모두 허락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12월 6일 임자
의정부(議政府)에서, ‘내하(內下)한 돈 15만 냥(兩)을 묘당(廟堂)에서 적당히 분표(分俵)하게 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전하가 근심스러워서 간곡한 특지(特旨)를 내려 이와 같이 내탕전(內帑錢)을 더는 훌륭한 조치를 취하였으므로 연말에 들어서 돌봐줄 것을 기대하던 사람들의 심정은 그 기쁨과 칭송에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삼가 하교에 따라 호조(戶曹)에는 8만 냥, 병조(兵曹)에는 5만 냥, 선혜청(宣惠廳)에는 2만 냥을 분배하여 획급(劃給)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근수(宋近洙)가 상소하여 휴치(休致)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12월 8일 갑인
심순택(沈舜澤)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영수(金永壽)와 의주 부윤(義州府尹) 김기수(金綺秀)의 장계(狀啓)를 보니, ‘교역 장정(章程)의 각항의 사무는 원래 경략사(經略使)가 의정(議定)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처음 규정한 것이므로 결국 아래에서는 마음대로 집행할 수 없으니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경략사(經略使)가 의정한 것이 있으니 그대로 시행할 것에 대하여 도신(道臣)과 해당 부윤(府尹)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생원(生員) 장우원(張祐遠)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조식(曺植)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니 갑자기 시행할 수 없다.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12월 9일 을묘
성균관(成均館)에서 감제(柑製)를 설행하였다. 부(賦)에서 유학(幼學) 이원희(李源憙)와 김덕수(金德洙)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충주 목사(忠州牧使) 민응식(閔應植)에게 군국 사무 독판(軍國事務督辦)을 잉대(仍帶)하여 찰임(察任)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영목(閔泳穆)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이인명(李寅命)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이원명(李源命)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2월 11일 정사
경상도(慶尙道) 유생 권세연(權世淵) 등이 상소하여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을 다시 세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전날의 비답이 있으니 다시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12월 12일 무오
윤귀영(尹龜永)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전번에 충청우도 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使)의 보고로 인해 보령부(保寧府)를 합치는 것의 편부(便否)를 도신(道臣)에게 관문(關問)하고, 의견을 등문(登聞)할 것에 대하여 복계(覆啓)하고 행회(行會)하였습니다.
해당 감사(監司) 남일우(南一祐)의 장계(狀啓)를 보니, ‘따로 조사관을 정하여 편부(便否)를 조사하니, 다시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혹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관방(關防)의 중요함이 다른 데와는 다릅니다. 부사(府使)를 겸한 이래로 군영(軍營)의 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제와 분설(分設)한다면 보장하는 비용과 장수와 군사의 지방(支放)은 더욱더 곤란할 것이므로 도리어 애초에 합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저 어리석은 백성들의 말을 따라 폐단 수습을 고려하지 않고, 갑자기 합설(合設)을 의논하는 것은 사실 곤란한 일입니다. 합치고 나누는 문제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고을을 다시 설치할 것에 대한 논의는 사실 오늘 처음 제기된 문제가 아닌 만큼 자주 들어도 그 말에 이상할 것은 없고,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형편상 일리가 있습니다. 더구나 합치고 나누는 문제에 대하여 유생들의 상소와 백성들의 호소가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으니 그 물의(物議)가 각각 다르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 복읍(復邑)한 곳의 수령(守令)이 적임자가 아니면 받는 피해가 오늘보다 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과연 도신이 진술한 바와 같이 수영(水營)이 더욱더 조췌(凋萃)하고 있으니 응당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복읍하는 문제는 시행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보령(保寧)의 유생 이용구(李龍九) 등의 상소문에 대한 비지(批旨)에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소본(疏本)을 가져다보니, ‘복읍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약한 무리들과 간사한 아전(衙前)들이 폐해를 꾸며대면서 서울과 시골에 출몰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고 있습니다. 본읍을 영원히 수영(水營)에 소속시키고, 전패(殿牌)와 교궁(校宮)은 수영에 이봉(移奉)하며, 관청 건물은 모두 헐어버리고, 아전과 노예들도 수영에 이부(移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도계(道啓)와 관련하여 복읍하는 문제를 시행하지 말 것에 대하여 다시 아뢰었으나, 상소문에서는 폐해가 이와 같다고 말하였으니, 여러 조항에서 청한 문제는 도신과 수신(帥臣)이 방편(方便)을 충분히 토의하여 등문(登聞)한 뒤 다시 품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14일 경신
김만식(金晩植)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민치설(閔致卨)을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12월 16일 임술
이재경(李在敬)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조병세(趙秉世)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12월 18일 갑자
통리 군국 사무(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경기(京畿) 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와 포군의 조련(調練) 문제는 시급한 일입니다. 동래(東萊)와 덕원(德源)같은 곳에 소홀하게 맡겨둘 수 없으므로 통리 군국 사무(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좋은 쪽으로 품처(稟處)하게 할 것에 대해 명을 내리셨습니다.
포를 설치하고 무예를 훈련하는 것은 나라에 있어서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중요한 정사입니다. 그런데 항구업무가 방대한 이때에 전하께서 방어사업에 관심을 돌리고 특교(特敎)를 내려 신칙(申飭)하였으니 참으로 흠모와 칭송을 금할 수 없습니다. 먼저 경기(京畿) 해안 여러 곳에서 응당 시행하여야 할 조항들에 대하여 따로 사목(事目)을 갖춰 써서 들이게 하고, 동래와 덕원같은 곳에서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문제도 차제로 강구한 다음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20일 병인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12월 21일 정묘
전교하기를,
"오늘은 대원군(大院君)의 생신이다. 멀리 외지에 있으므로 그리운 생각은 더욱 간절하다. 운현궁(雲峴宮)에 도승지(都承旨)를 보내 문후(問候)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협판 군국 사무(協辦軍國事務) 한장석(韓章錫)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금 정사를 날로 새롭게 하였으나 백성들의 뜻은 안정되지 못하고, 과거를 크게 베풀었으나 뛰어난 인재는 나오지 않습니다. 군정(軍政)을 강화하였으나 도적은 공공연히 다니고, 처벌을 매우 엄격히 하였으나 사유(四維)는 날이 갈수록 무너지고 있습니다. 혜택이 곳곳에 미치고 있으나 모든 일들을 서로 권면하지 않으며, 정공(正供)은 언제나 지연되고 있으나 뇌물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언로(言路)가 크게 열리고 있으나 도움이 되는 의견은 없고, 이득을 볼 수 있는 원천은 모두 열려있으나 국가와 개인은 다같이 더욱 궁색합니다. 이것이 어찌 자신에 대한 반성이 부족하고, 사물에 대한 이치를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빈말은 실용에 도움이 없고, 법은 스스로 행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변화의 근본은 오로지 전하의 한 몸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강건하게 세우고 성실하게 지키며 사적인 것이 없이 실행해야 합니다.
또 삼가 생각하건대 세자(世子) 저하의 공부는 나날이 성취되어 가고, 예지는 점차 트이고 있으니 좋은 영향을 주어 길러내는 근본은 바른 선비를 가까이하고, 바른 말을 들으며, 바른 일을 보는 도리에 있습니다. 또 전하가 사물에 대응하는 가르침을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보이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유념하여 종사(宗社)의 터를 크게 다지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의견이 매우 절실하므로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충주(忠州)의 진사(進士) 경준(慶焌) 등이 상소하여 곤전(坤殿)이 주가(駐駕)한 곳에 궁전을 짓고 비석을 세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그렇게 번거롭게 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12월 22일 무진
박제인(朴齊寅)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통리 교섭 통상 사무 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경략사(經略使)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의주(義州)의 세금을 이정(釐正)할 여러 가지 조항들을 신(臣)의 아문(衙門)에서 품처(稟處)하라고 계하(啓下)하였습니다.
세과(稅課) 중에서 역원(譯員)들이 규례를 어긴 것은 사역원(司譯院)에서 재감(裁減)할 것을 청하였고, 사신 행차의 여비문제를 이정(釐正)하는 문제도 신의 아문(衙門)에서 마음대로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세액 기준은 이미 장정에 정해놓았고, 수출하고 수입하는 상품에 대해서는 100분의 5를 적용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으니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세무청(稅務廳)의 차역(差役) 등의 문제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는 것은 멀리서 타산하기는 어려우니, 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관문(關問)하여 보고가 온 다음에 다시 품처(稟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의주(義州)의 상무(商務) 대하여 새로운 장정으로 개정하였으니 전관(專管)하는 대원(大員)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의주 부윤을 의주통상사무 겸 감리로 차하(差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이명철(李命喆)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최근에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유랑하면서 먹고 사는 무리들이 다수 강도가 되어 길가는 사람들을 약탈하고 마을들을 훑어가고 있습니다. 폐단이 점점 확대되고 있으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하건대, 강도라고 하여 다 강한 것은 아니고, 백성이라고 하여 다 약한 것은 아닙니다. 무기를 가진 사람은 강하고, 주먹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약한 법입니다. 이제 온 나라의 민가들에 각각 창을 두게 하고, 사람들은 각각 칼을 차고 총을 가지게 한다면 추격하여 잡아내지 않아도 도적은 다 제풀에 그만둘 것이며, 도적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나라의 방어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의견이 역시 방어를 갖추는 한 가지 방도이다."
하였다.
출신(出身) 유진하(兪鎭夏)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나라가 강하고 약한 것은 전적으로 군사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군비를 정비하지 않은 지 이제 수백 년이 됩니다. 올해에 이르러 비로소 친군(親軍)을 설치하니 상비하는 군사가 될 것입니다. 상비적인 군사가 있으면 반드시 부대를 나눠야 합니다. 이제라도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영(軍營)의 군안(軍案)을 다시 정리하여 노약자들을 제거하고 건실한 장정으로 채워서 각 해당 군영(軍營)에서 아침저녁으로 조련(調練)하게 한다면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받아들일 수 있는 의견이 적지 않다. 매우 가상한 일이다."
하였다.
양주(楊州)의 유학(幼學) 황심현(黃心顯) 등이 상소하여 자신의 조상인 고(故) 영의정(領議政)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를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문묘에 종향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므로 갑자기 시행할 수 없다. 다시 후일의 공의(公議)를 기다리라."
하였다.
충청도(忠淸道) 유생 황익희(黃翼熙) 등이 상소하여 각 서원(書院)을 다시 세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갑자기 시행할 수 없는 일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12월 24일 경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원식(金元植)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 군영(軍營)의 별효사(別驍士) 중 번장(番長)으로써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을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마다 뽑아서 보고하는 것은 계하(啓下)하여 정식화한 것입니다. 별효사를 이미 혁파하여 병정으로 고쳤으니, 전날 번장으로 오래 복무한 사람들은 본영의 병장(兵將), 수문장(守門將), 중영 군관(中營軍官), 종사 군관(從事軍官), 군기 감관(軍器監官) 등 다섯 개 청에 이속하고 출근 횟수가 많은 순서에 따라 전례대로 뽑아 보고하여 장려하고 공로에 답하는 일을 해조(該曹)에서 품지(稟旨)하여 분부하게 할 것을 계하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별요사를 이미 혁파하고 병정으로 고쳤으므로 오래 근무한 문제를 장청(狀請)에 따라 본명의 병장, 수문장, 중영, 군관, 종사, 군관, 군기 감관 중 근무 횟수가 많은 순서에 따라 매번 도목정사에 1인을 뽑아 보고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평양부(平壤府) 진사(進士) 노장(盧𤍤)이 상소하여 인현 서원(仁賢書院)을 다시 세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공의(公議)라고 하지만 어떻게 갑자기 시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25일 신미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영수(金永壽)의 장계(狀啓)를 보니, ‘의주(義州)에서 엽전(葉錢)을 주조하는 일은 방대하고 힘은 부족하여 동(銅)과 연(鉛)을 계속 주조할 수 없으며, 장공인(匠工人)들이 해를 입기 때문에 이번 5일부터 20일을 한정하여 당오전(當五錢)을 주조하다가 가마를 철폐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오전(當五錢) 가마를 철폐하는 것에 대해서는 본 아문(衙門)에서 이미 계품(啓稟)하고 행회(行會)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고을의 보고에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지만 애초에 관유(關由)하지 않고 갑자기 허락하였으니 해당 도신(道臣)에게 엄하게 추고(推考)하는 법을 시행하고, 가마를 철폐하는 문제는〖위의〗기한까지 치계(馳啓)로 등문(登聞)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26일 임신
숙의(淑儀) 범씨(范氏)가 졸(卒)하였다. 전교하기를,
"숙의(淑儀) 범씨의 상사(喪事)에 관판(棺板) 1부를 수송하고, 숙의(淑儀) 방씨(方氏)의 상례에 따라 장사에 필요한 물건은 호조(戶曹)에서 적당히 수송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좌우 포도청(左右捕盜廳)의 보고를 보니, ‘당적(黨籍)을 붙잡은 기교(譏校)와 혜상 공국(惠商公局)의 좌우사 공원(左右社公員), 그리고 상대(商隊) 등 수포인(首捕人)과 부포인(副捕人)의 성명을 책으로 작성하여 왔습니다. 위험한 소굴에 들어가서 음흉한 행동을 정탐하고 죽을 힘을 다하여 붙잡아냈으니, 그 성의는 참으로 가상하므로 응당 장려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수포 포교(首捕捕校) 태흥원(太興元) 등, 혜상 공국(惠商公局) 수포 상대(首捕商隊) 노구봉(盧九奉) 등, 수포 공원(首捕公員) 김규환(金奎桓)에게 다 해조(該曹)에서 조건이 좋은 지방의 변장자리를 만들고 임명하여 차송(差送)할 것이며, 부포 포교(副捕捕校) 민응오(閔應五) 등, 부포 상대(副捕商隊) 최용준(崔龍俊) 등, 부포 공원(副捕公員) 김상준(金相俊)에게 다 상을 주고, 상대(商隊) 이재용(李在容) 등, 공원(公員) 김광연(金光淵)에게 모두 첩가(帖加)를 성급(成給)하는 일을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홍집(金弘集)의 세 번째 계본(啓本)을 보니, ‘양주 목사(楊州牧使), 죽산 목사(竹山牧使), 장단 부사(長湍府使)의 첩정(牒呈)을 하나하나 들면서 명화적(明火賊)들을 추격하여 붙잡은 포교(捕校) 등을 표창할 것에 대하여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당적을 염탐하여 붙잡을 것에 대한 조정의 신칙(申飭)은 매우 엄격합니다. 세 고을의 진교(鎭校)와 포교(捕校)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추격하여 붙잡은 것은 극히 가상한 일이니 마땅히 분등(分等)하여 논상(論賞)하여야 할 것입니다.
양주(楊州)의 수포 진교(首捕鎭校) 안득환(安得煥)은 도(道) 내에 임기가 가깝고, 조건이 좋은 곳의 변경 장수로 차송(差送)하고, 죽산 진교(竹山眞敎) 양금복(梁今卜)과 장단 진교(長湍鎭校) 박진홍(朴鎭弘)은 다 상을 주며, 양주 진교(楊州鎭校) 김수환(金洙煥), 죽산 진교(竹山眞敎) 이명준(李明俊), 장단 진교(長湍鎭校) 김규태(金奎泰) 등은 모두 첩가를 성급(成給)하는 일을 해조(該曹)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27일 계유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홍집(金弘集)이, ‘화적(火賊) 김다물(金多物) 등 네 사람을 효경(梟警)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2월 28일 갑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이 해도 거의 다 가고 있으니 봄철 조운(漕運)이 멀지 않았습니다. 조세 곡식을 창고에서 내고 배를 띄우며 감색(監色)이 함께 타는 일은 모두 원래 정해놓은 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지연되고 있으니 벌써 대단히 법에 어긋납니다. 더구나 지금 경사(京司)의 경비가 완전히 바닥이 난 때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어서 떠나보낼 때, 감색 무리가 편리한 것만 생각하고 애당초 배를 타지 않아 지킬 사람이 없으므로 남에게 내맡겨 축이 나게 됩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고 보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도백(道伯)과 수령(守令)들이 만일 각별히 감독하고 검사하여 조금도 소홀히 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막중한 조세를 어찌 지연시키고 축이 나는 것을 평범한 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신칙하게 할 것을 우선 삼남(三南)의 도신(道臣)에게 관칙(關飭)해야 하며, 곡물을 받아들이고 실어서 운반하며 감색이 배를 타고 영솔하는 등의 문제는 일체 전식(典式)을 따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처리를 잘하지 못하는 수령(守令)은 즉시 논감(論勘)하고 절대로 용서하지 말 것을 아울러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영수(金永壽)와 병사(兵使) 이종건(李鍾健) 그리고 의주 부윤(義州府尹) 김기수(金綺秀)의 장계(狀啓)를 보니, ‘헌서 재자관(憲書䝴咨官)이 데리고 온 국경을 넘은 죄인 이노일(李魯日)에게서 여러 번 취초(取招)하였으나, 정상을 참작하고 종적을 살펴보면 죄가 가벼운 면이 없지 않을 것 같으니 형구(形具)를 채워 엄격하게 가두어 놓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변경에 대한 금령이 극히 엄격하고 죄를 범하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래 나라의 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까닭 없이 국경을 넘은 것과는 다르고, 또 신병(身病) 때문에 체류한 것은 불쌍한 일이며, 요패(腰牌)는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형편상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가벼운 죄로 논하는 것은 돌보아주는 취지에 부합할 듯하니 갇혀있는 죄인 이노일을 엄하게 형신(刑訊)하고 도배(島配)하는 일을 분부하는 동시에 이 사유(事由)를 승문원(承文院)에서 자문(咨文)을 지어 들여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충청도(忠淸道) 유학(幼學) 조득년(趙得年) 등이 상소하여 각 서원(書院)을 다시 세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할 것 없다.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12월 29일 을해
전교하기를,
"친군(親軍)에 대한 감독은 스스로 승접(承接)하여 거행하여야 하지만 장령(將領)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좌우영(左右營)에서 각 병방(兵房) 1원, 전영(前營)에서 정령관(正領官) 2원을 각영 중군(中軍)의 규례대로 아장(亞將)을 거친 사람으로 차출하고, 전영 부령관(前營副領官) 2원은 영장(營將)으로부터 병사(兵使)와 수사(水使)에 이르기까지 의망하여 차출하라. 좌우영(左右營)의 영관(領官) 1원은 참상(參上)에서부터 당상(堂上) 3품에 이르기까지 의망하여 차출하고, 전영 참령관(前營參領官) 2원은 당하(堂下) 정3품 이하로 의망하여 차출하라."
하였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오준영(吳俊泳)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박제교(朴齊敎)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김완수(金完秀)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조석여(曺錫輿)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김사익(金思翊)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충주 목사(忠州牧使) 민응식(閔應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생각하건대 본주(本州)의 고을은 영(嶺)을 등지고 호(湖)를 둘러 안은 삼남(三南)의 요충지이며, 한 도(道)의 근본 기지입니다. 지난날 성공과 실패의 역사는 말할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근일의 적개심을 가지는 기풍은 아직도 볼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탄환과 보잘것없는 성은 절반이 무너졌고, 수백 명의 포군(砲軍)들은 거의 지쳐 있으므로 마치 하나의 빈 성과도 같습니다.
이제 병사와 포군을 증설하여 밤낮으로 훈련을 하고, 성을 수축(修築)하여 사전에 방어준비를 하려는 변변치 못한 방략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결국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돈과 곡물입니다. 수입을 타산해보면 녹봉(祿俸)에 몽땅 나가기 때문에 전혀 도움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상소문 내용을 가지고 묘당(廟堂)에 하문(下問)하여 신의 말이 그렇게까지 허망하지 않다면 속히 조획(措劃)하도록 하소서. 군사를 뽑는 문제와 군비를 마련하는 문제는 차후에 묘당(廟堂)에 논보(論報)하여 편리한 방법으로 재처(裁處)함으로써 방어임무에 효과가 있게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의견이 정말 시세의 요구에 부합된다. 상소 내용은 묘당(廟堂)에서 좋은 쪽으로 품처(稟處)하겠다."
하였다.
12월 30일 병자
시강원(侍講院)에서 아뢰기를,
"세자(世子)가 11세 전까지 회강(會講) 규례대로 하고 취품(取稟)하지 말 것에 대하여 일찍이 경진년(1880)에 초기(草記)를 통해 윤허하였습니다. 내년 정월 2일은 바로 회강(會講) 일차(日次)이니, 규례대로 거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각도의 재결(災結)은 4만 5,586결로 특별히 준획(準劃)을 허락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사복시(司僕寺)에서 각도 목장의 말의 수효는 4,858필(匹)이라고 아뢰었다.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20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