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1권, 고종21년 1884년 12월

싸라리리 2025. 1. 1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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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신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근수(宋近洙)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이 재야에 있은 지가 몇 해인가? 지난날 서추(西樞)에 가서 한가히 있으며 몸조리하게 해달라는 청을 들어준 것은 경이 나이도 많고 병도 많은 것을 생각해서 오래도록 책임을 지워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경이 영영 가버리고 돌아오지 않아 예의로 대우하는 나의 본의가 도리어 몸을 이끌고 물러가서 멀리 떠나려는 경의 마음을 이루어줄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더구나 지금 변란을 겪은 뒤에 나라의 형세가 마치 쌓아 놓은 바둑돌처럼 위태롭고 여러 가지 일이 마치 실타래가 엉킨 듯이 복잡하니, 경이 나랏일을 바로잡고 수습할 인재로서 벼슬길에 나가고 물러나는 근심을 품은 채 산림에서 은둔하면서 시사(時事)를 망각의 경지에 두어서는 안 될 듯하다. 경은 부디 나의 지극한 뜻을 잘 헤아려 날씨가 좀 풀린 뒤에 즉시 조정에 나와 현재의 난국을 함께 수습하도록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덕(金炳德)에게 칙유하기를,
"경이 지난날에 상소를 남겨두고 지레 돌아간 것은 참으로 무엇 때문인가? 정승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경력(慶曆 : 송(宋) 나라 인종(仁宗)의 연호) 연간의 치세(治世)에서도 없지 않았으나 한기(韓琦)나 부필(富弼) 같은 여러 어진 이들이 이 때문에 물러가려는 마음을 두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지금 경이 의리를 끌어대어 영영 가버리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의복 제도에 대한 한 가지 문제 때문이다. 나의 그 당시의 처분이 진실로 지나쳤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미 의복 제도를 편리한 대로 하라는 분부를 내렸으니, 내가 허물을 고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군신 간에는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귀한 법이다. 내가 비록 명민하지는 못하지만 어찌 나랏일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정성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변란을 겪고 난 뒤에 외세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는 이때 경처럼 노숙하고 경처럼 덕망 있는 사람이 나를 멀리 버리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선언(善言)을 진달해 준다면 조금이나마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는 가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경을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고 싶어 하듯이 생각하는 것이다. 경은 부디 나의 고심을 이해하고 즉시 조정에 나와서 나라와 백성의 일을 다행하게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홍집(金弘集)에게 칙유하기를,
"날마다 와서 모이는 것은 바로 아침저녁으로 국사를 토론하고 계획하고자 하는 것인데, 경의 아량과 충성으로 어떻게 벼슬자리에 있는 것과 다르다 하여 혹시라도 중단함이 있겠는가? 즉시 조정에 나와서 바로잡고 구제하는 계책을 도우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이전에 이미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은 날마다 와서 모이라는 처분을 내렸다. 이러한 때에 실제를 힘쓰는 정사에 한갓 형식만 일삼아서는 안 될 것이니, 상례(常例)에 구애되지 말고 항상 만나서 일에 따라 품재(稟裁)함으로써 곁에 두는 뜻에 부합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경을 잘 알기 때문에 정승으로 세울 때에 복상(卜相)할 필요도 없이 임명하는 교지(敎旨)를 한번 내리자 여론과 저절로 부합되었다. 비록 한 달 남짓 수고한 뒤인지라 잠시 경의 사양하는 뜻을 들어주기는 하였지만, 돌아보건대 지금 백성과 나라에 대한 대책이 갈수록 더욱 막연하다. 정사를 모름지기 실심(實心)과 실정(實政)으로 하여 경이 엊그제 연석(筵席)에서 한 좋은 잠계(箴戒)에 부응하려고 하니, 더욱 어떻게 경과 같이 노숙한 사람을 오래도록 서추(西樞)에서 한가하게 지내게 할 수 있겠는가? 충직하게 맹세한 마음으로 어떠한 어려운 일도 피하지 않았으며, 조용하고 간솔한 몸가짐은 온갖 일에 적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경을 두루 시험하여 이미 나타난 업적으로 볼 때 앞으로 크게 계책을 펼칠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으니, 경은 우리 영의정(領議政)과 함께 어려운 국사를 돕는 의리에 힘쓰고, 즉시 조정에 나와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을 풀어 달라."
하였다.

 

12월 2일 임신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에게 재차 하유하였다.

 

12월 3일 계유

이호준(李鎬俊)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12월 4일 갑술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날 동안 간절히 기다리던 끝에 갑자기 사임을 청하는 글이 다시 온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실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이 상소에서 분의(分義)와 염방(廉防)도 때로는 경중(輕重)과 선후(先後)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자고 하는 것이다. 지난날 급하게 임명을 받은 것은 참으로 시사(時事)가 다급하므로 분의로 보아 사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지금 겨우 며칠이 지나 난관이 날로 심해지고 있는데, 경은 한 달 사이에 이미 안정되고 다스려졌으니, 이런 한가한 때에 염방에 대해 강론하여 태평 성세를 빛낼 수 있다고 여기는가? 그러면서 또 어떻게 풍랑(風浪)에 비유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경의 거취는 바로 분의에 달려 있으니, 아직 염방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못 된다고 본다. 그뿐 아니라 이른바 염방이라는 것은 녹봉(祿俸)과 지위를 탐내어 무릅쓰고 나아가서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경은 평소에 조용히 은퇴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필경 염방을 훼손시키면서까지 등용되기를 구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것은 온 세상이 다 같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경은 망설이지 말고 애타게 기다리는 나의 기대에 부합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에게 세 번째로 하유하였다.

 

떠돌며 구걸하는 백성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12월 5일 을해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에게 네 번째로 하유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심기택(沈琦澤)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어제 상참(常參)하는 자리에서 모든 관리들의 뒤에 따라 참여하여 진심에서 우러나온 성상의 유지(諭旨)를 삼가 들었는데 아주 간절하고 측은하여 나무와 돌을 감동시키고 돼지와 물고기까지도 충분히 미덥게 할 만하여, 신은 처음에는 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얼굴을 적시더니 수족을 움직여 춤을 추기까지 하였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천지가 만물을 낳아 자라게 하는 것은 오직 한 순간도 쉬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며, 성왕(聖王)이 만백성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또한 한 순간도 쉬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른바 쉬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확고하게 견지하고 유구하게 운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의 절서는 만년이 지나도 어긋나지 않고, 성왕의 정법(政法)은 백대가 지나가도 의혹되지 않는 것입니다. 삼대(三代)의 훌륭한 시대는 오히려 논할 것도 없거니와 한(漢) 나라 문제(文帝)나 송(宋) 나라 인종(仁宗)의 경우 후세의 현군(賢君)으로 불리는데, 공순하고 검소한 덕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시종 한결같아서 혹시라도 중단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몸소 태평성세를 이룩할 수 있었고 나라의 장구한 위업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밖의 시대의 임금들도 잘 다스리자는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라가 한가한 때에는 뽕나무 뿌리처럼 견고하게 해야 한다는 경계를 안중에 두지 않다가 화란이 일어났을 때에 가서야 자기를 탓하는 조서와 자신을 책망하는 말을 지성스럽고 지극하게 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또한 확고하게 견지하고 유구하게 시행하지 못하여, 매사를 성급하게 해서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다 보니 사변이 지나가자마자 태만한 뜻이 이미 싹트고, 화란이 겨우 평정되자마자 편안히 지내려는 폐단이 다시 무성해지니, 선행의 단서는 마치 비온 뒤에 도랑물이 금방 말라버리는 것과 같고 사욕은 마치 불타는 초원에 바람이 부는 듯 하였습니다. 그래서 봉천문(奉天門)에서 내린 조서로도 번진(藩鎭)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정강(靖康 : 송 나라 흠종(欽宗)의 연호) 연간에 언로(言路)를 연 것이 성문이 다시 닫히는 데 무슨 도움이 있었겠습니까? 신은 역사책을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를 때면 책을 덮고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타고난 예지로 시종일관 학업에 전심하며 조종(祖宗)이 쌓아 놓은 업적을 계승하고, 당요(唐堯)와 우순(禹舜)의 정일(精一)한 마음을 본받아 자나깨나 어진 이를 생각하고 밤낮으로 백성들을 근심하여 온 지 이제 21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응당 다스림은 이루어지고 제도는 안정되어 대대로 태평시기를 누리는 운수가 돌아올 만한데, 어찌하여 위로는 하늘의 재변이 자주 나타나고 아래로는 민심이 안정되지 않으며, 밖으로는 적국의 우환이 날로 깊어지고 안으로는 흉악한 역적의 변고가 더욱 생겨난단 말입니까?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죽을 죄를 지은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전하께서 잘 다스려지기를 구하는 뜻은 비록 절절하지만 정사를 내는 근본에 어둡고, 선(善)을 좋아하는 마음은 많으나 선을 좋아하는 실제가 없어서입니다. 그래서 모든 행동하는 데서 공경함이 태만함을 이기지 못하고 등용하는 때에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을 없애지 못하며, 언행이 어긋나고 명실이 상부하지 못하여 치도(治道)가 날로 못해지는 것입니다. 전번에 내리신 성상의 유지는 변란을 만난 뒤에 자신을 반성하는 뜻과 징계하는 대책이 더없이 아주 극진하여 여러 사람들을 고무시켰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능히 확고하게 견지하고 오래도록 실행하실지는 감히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병인년(1866)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江華島)에 침범하여〗양요(洋擾)가 처음으로 일어났을 때에 전하께서는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임오년(1882)의 군변(軍變)이 일어났을 때에도 전하께서는 애통해하는 하교를 내렸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전화위복의 기회였는데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온갖 제도가 해이해지고 편안히 즐기려는 뜻이 전과 같아서 임금의 윤음(綸音)은 단지 옛 책에 쓰여 있는 진부한 말씀이 되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치는 것도 매우 시들해지고 부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전하의 유시가 더욱 간곡하면 할수록 백성들은 더욱 건성으로 듣고 있으니, 이것은 다 신하들이 전하의 뜻을 받들어 펴나가지 못한 죄이고 또한 전하께서도 응당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지가 쉬지 않는 도를 체득하고 성왕들의 쉬지 않는 마음을 본받아 선을 가려서 확고하게 견지하고 생각을 가다듬어 유구하게 실행하여, 온갖 교화가 맑아지고 모든 관리들이 엄숙해지도록 하소서. 이렇게 하면 위로는 천심(天心)을 감동시킬 수 있고 아래로는 민심을 보존할 수 있으며, 밖으로는 적국의 우환을 없애고 안으로는 반역의 싹을 꺾을 수가 있어서 중흥(中興)의 성대함이 하(夏) 나라와 은(殷) 나라에 짝할 수 있게 되어 한 나라와 송 나라의 다소 안정된 치세는 족히 말할 것도 안 될 것입니다. 일을 행하고 조처하는 것의 경우는 역대의 정모(政謨)가 모두 남아 있고 선왕(先王)의 전장(典章)에 환히 실려 있는 만큼 준수하는 것은 깎아낼 수 없는 금석(金石)처럼 하고, 개혁하는 것은 거문고나 비파 줄을 다시 조이는 것과 같이 할 것입니다. 이 문제도 묘당(廟堂)에서의 상주와 초야의 상소가 있는 만큼 신이 다시 장황하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오직 견고유구(堅固悠久) 네 글자로 전하를 위하여 말씀드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백성들이 윗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여기지 마소서. 확고하게 견지하면 백성들이 믿게 될 것이며, 하늘이 아래를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소서. 유구하게 실행하면 하늘이 바로 돌볼 것이니,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은 ‘성(誠)’입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말씀하시기를, ‘성은 사물의 끝과 시작이니, 성이 없으면 사물도 없다.’ 하였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지성(至誠)은 중단함이 없으니 중단함이 없으면 유구하고 유구하면 징험이 드러난다.’ 하였습니다. 신은 다시 ‘성’이라는 한 마디 말을 전하를 위해 말씀드립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말한 내용은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정태호(鄭泰好)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12월 6일 병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이 올린 장계(狀啓)로 인하여 친위사(親衛士)와 배지 군관(陪持軍官) 및 각부(各部)의 긴요치 않은 장관(將官)을 일체 해임시키되, 배지(陪持)는 이전대로 군뢰(軍牢)로써 거행하고, 각 읍의 포군(砲軍)은 적절하게 혁파하되 열읍(列邑)에서 바치는 월과전(月課錢) 또한 동진진(東津鎭)에 획부(劃付)하며 그곳에 지급하던 쌀과 돈을 혁파하고, 강계(江界) 등 3개 고을의 가결전(加結錢)과 이상의 혁파한 각종 요조(料條)를 모두 군수(軍需)에 이속(移屬)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청한 여러 조항에 대해서는 다시 더 헤아려보고 참작해서 뒤에 품처(稟處)하겠다는 뜻으로 이제 막 복계(覆啓)하여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그런데 방금 또 해당 도신이 보고한 것을 보니, 10월부터 이미 군사를 뽑아 기술과 무예를 연습시키고 있어 물자 마련이 시급한데 획급할 방도가 없다고 합니다.
경장(更張)하는 일에 관계되는 만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다만 생각할 때에 이미 새로 설치한 군제(軍制)를 중간에 폐지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며, 이미 설치한 희료(餼料)를 체불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관찰사가 아뢰기도 하고 보고도 하면서 이와 같이 간청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깊이 편리의 여부를 따져보고 그랬을 것이니, 요청한 여러 조항을 모두 다 시행하도록 허락해서 뒤처리를 잘하는 성과를 이룩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7일 정축

협판교섭통상사무아문(協辦交涉通商事務衙門) 김윤식(金允植)을 독판(督辦)으로 승차(陞差)하고, 박정양(朴定陽)을 협판(協辦)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경하(李景夏)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홍종헌(洪鍾軒)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봉구(李鳳九)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윤영신(尹榮信)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삼았다.

 

12월 8일 무인

약원(藥院)에서 올린 구계(口啓)에,
"삼가 대령했던 의관(醫官)이 전달한 것을 들으니 성상의 체후가 미령하다고 하니, 구구한 염려를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속히 신들이 의원(醫員)을 거느리고 입진하여 탕제를 상의하여 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이미 차도가 있으니 경들은 입시할 필요 없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포도청(捕盜廳)에 갇혀 있는 죄인 이희정(李喜貞)·김봉균(金奉均)·신중모(申重模)·이창규(李昌奎)·이윤상(李允相)·오창모(吳昌模)·서재창(徐載昌)·차홍식(車弘植)·남흥철(南興喆)·고흥종(高興宗)·이점돌(李點乭)·최영식(崔英植)을 왕부(王府)로 하여금 형구(刑具)를 채워 잡아다가 남간(南間)에 가두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정국(庭鞫)하되 위관(委官)은 우의정(右議政)으로 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차자를 올려 위관(委官)의 임무를 사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지나간 전례가 있으니 지금 굳이 사적인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국문하는 체통은 엄중한 만큼 즉시 나아가라."
하였다.

 

정국(庭鞫)을 전 금위영(禁衛營)에서 설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박제관(朴齊寬)이 보고한 것을 보니, ‘공주(公州)·은진(恩津)·연기(燕岐)·태안(泰安) 등 4개 고을에서 5년 조(條)의 바치지 못한 세곡(稅穀)은 점차적으로 폐단이 쌓여 발본색원(拔本塞源)하지 못할 정도로 되었습니다. 폐단이 극도에 이른 만큼 응당 변통이 있어야 할 것이니, 바치지 못한 쌀과 콩을 특별히 각년(各年)의 시가대로 수납하도록 허락하여 소생하는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공부(供賦)는 중요한 일인 만큼 진실로 조절하기가 어려운 것이지만 여러 도에서 보고한 것을 참작하고 저 백성들의 사정을 생각할 때에 진실로 은택을 크게 베풀지 않고서는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위에서 말한 쌀과 콩을 요청한 대로 당시의 시가대로 받도록 허락하시고, 계미년(1883) 조의 경우는 본색(本色)으로 수납(輸納)하라는 뜻으로 행회(行會)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9일 기묘

약원(藥院)에서 재차 아뢰기를,
"입진(入診)하게 해 주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 신정희(申正熙)를 체직(遞職)시키고, 이교헌(李敎獻)으로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해주목(海州牧)의 호환(虎患)을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성근(金聲根)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고성부(固城府)의 임오년(1882) 조(條) 전세(田稅)인 쌀과 콩을 실은 선박 1척이 작년 10월 고군산(古群山) 앞바다에 당도하였는데, 그때 마침 풍랑이 높아 얼음이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호송하라는 뜻으로 해진(該鎭)의 첨사(僉使)에게 제칙(題飭)하였습니다. 그런데 해당 선주(船主) 김영주(金永柱)가 몰래 실어다가 통영(統營)·동래(東萊)·한산(韓山)·원산(元山) 등지에 방매하고, 그 값으로 받은 돈을 혹은 남에게 맡겨두기도 하고 혹은 여기저기 꾸어주기도 하였다고 하므로, 해당 첨사를 시켜 상세히 조사하고 검열해서 방매한 쌀값 1,974냥과 바꾼 콩 29섬 석(石) 중에서 남에게 맡겨둔 것은 수량을 대조해서 받아두고, 여기저기 꾸어준 것은 꾸어간 사람들을 일체 다 잡아가두고 받아내며, 해당 선주는 잡아다 군산진(群山鎭)의 옥에 엄하게 가두어 놓았습니다. 감관(監官)과 색리(色吏)가 애초에 함께 타지 않은 데는 반드시 협잡을 한 것이 있을 것이니, 모두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정부(正賦)에 대한 법의(法意)가 얼마나 엄중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이놈들이 마구 방매한 죄는 응당 해당하는 법이 있으니, 한시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 김영주는 우수영(右水營)에 압송해서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며, 감관과 색리는 협잡한 내막을 끝까지 신문하여 공술을 받은 뒤에 법조문에 근거해서 곧장 처결하고 그 전말을 치계(馳啓)하도록 양남(兩南)의 도신에게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12일 임오

강찬(姜𧄽)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좌우포도청(左右捕盜廳)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10월 20일에 일본 사람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眞三〕를 살해한 죄인 김태흥(金太興)을 이달 6일에 남문(南門) 밖에서 체포하여 엄하게 신문하고 공술을 받았는데, 낱낱이 자복한 것으로 보아 살해한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종범(從犯) 원한갑(元漢甲)과 함께 속약(續約)대로 징계하고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형률을 시행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13일 계미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죄인 김봉균(金奉均) 등에 대해서는 지만(遲晩)을 받아 결안(結案)하였습니다. 김봉균의 결안에, ‘사나운 악종으로 흉악한 역적 괴수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습니다. 이역(異域)에 동행한 역신(逆臣)이 그를 보기를 심복처럼 여겼으며, 음모를 서로 도와준 때에 있어서는 생도(生徒)들이 친형제와 같아서, 우정국(郵征局)에서 변란을 일으킬 때에 이미 치밀하게 포치(布置)해 놓았습니다. 경우궁(景祐宮)에 난입한 이후는 정절(情節)이 더욱 흉악하였으니, 도당(徒黨)을 두루 포치하면서 호위한다는 이름을 사칭하였고 정승들을 살해하면서 각각 직무를 분담하였습니다. 요사한 기운을 부리는 것으로 말하면 좌수(左帥)의 참담한 화를 어찌 차마 다 말할 수 있겠으며, 독의 칼날이 미친 바로 말하면 중관(中官)의 원통한 영혼을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천고에 없었던 변고이니, 어찌 법을 서둘러 시행하는 형률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이희정(李喜貞)의 결안에, ‘본래 천한 군졸의 신분으로 망녕되게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가져 변란을 일으킬 생각에 급급하여 13일 밤에 열린 회의에 동참하였으니, 비밀리에 역적을 도운 형적을 볼 때 한두 가지 사건에 연루된 것이 아닙니다. 우정국에서 변란을 일으킨 뒤에는 서재필(徐載弼)과 잠시 몸을 숨겼고, 요금문(曜金門)에 와서 대기하기로 한 약속에는 신중모(申重模)와 함께 갔습니다. 통행증을 궁에 들여 즉시 영관(領官)의 가짜 날인을 받았고, 칼을 차고 전각(殿閣)에 서서 오직 적신(賊臣)의 음흉한 사주만을 들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공술이 이미 적실하니 법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신중모의 결안에, ‘본래 생도의 명색으로 몰래 흉적의 계획을 품고 김옥균(金玉均)과 서재필의 집을 소굴로 여겼으며, 탑동(塔洞)의 승방(僧房)의 모임에는 은밀히 서로 불러 모으고 13일 밤에 술자리의 회의에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을 들었고, 16자루의 환도(環刀)를 나누어 차기로 한 계획은 또한 매우 지독합니다. 우정국의 변란을 도모하던 초기에는 도당들과 뱀과 지렁이처럼 결탁하였고, 요금문에 가서 약속할 때에는 올빼미와 부엉이처럼 호응하였으며, 군직(軍職)의 가짜 서명을 받아 가지고 앞장서서 대궐에 들어갔고, 호위라는 명색을 빌어서 무기를 가지고 전각에 올라갔습니다. 내막이 이미 드러난 이상 나랏법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였고, 이창규(李昌奎)의 결안에, ‘본래 미천한 상놈으로 부상청(負商廳)의 좌사(左社)로 있으면서 역괴에게 붙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바쳐 흉악한 무리들과 결탁하여 마음이 서로 통해 있었습니다. 17일 사변에 대하여 미리 그 음모에 참가해 도모하였고 100여 명을 동원해 난을 평정하러 간다고 거짓으로 핑계대고 인장과 부신(符信)을 김옥균에게 바쳤습니다. 그 정상이 이미 드러나자 이인종(李寅鍾)에게 지시를 받았으니 실태가 모두 드러났습니다. 부령관(副領官)의 가짜 서명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며 칼 한 자루씩을 나누어 주었으니, 장차 무엇을 하자고 한 것이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의 공술이 다 갖추어져 있으니 아무리 교묘하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가릴 수 없을 것이며 법률이 지극히 엄하니 어떻게 나랏법에서 혹시라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모두 모반대역부도(謀反大逆不道)에 대해 확실하게 지만이라고 하였으니, 부대시 능지처사(不待時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이점돌(李點乭)의 결안에, ‘천한 노비의 부류로서 홍현(紅峴) 흉적의 집에 거처하면서 앞잡이로 신임을 받고 귀신같이 출몰하였습니다. 17일 밤 우정국(郵征局) 연회 때에는 중요한 임무를 도맡아 주관하고 자기의 특출한 공로로 자처하였으니, 공범자가 확실하고 단서가 모두 드러났습니다. 스스로 반드시 죽을 죄를 범하였으니 어떻게 응당 시행해야 할 형률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이윤상(李允相)의 결안에, ‘본래 사납고 미련한 자로서 속에 간특한 마음을 품고 잇속을 추구하기에 급급하여 적괴(賊魁)와 깊이 결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 기회를 이용할 만하다고 여기고 난동을 부리는 무리들과 두루 사귀었습니다. 지극히 참혹하고 아주 간특한 말을 서광범의 집 후원(後苑)에서 처음으로 발언하였으며, 재앙을 즐기고 난리를 부르는 마음으로 흉역 이인종(李寅鍾)의 흉악한 소굴에 붙었습니다. 별군직(別軍職)의 벼슬을 주겠다는 약속에 벼르면서 기다렸으며, 우정국의 연회에 대해서는 마음을 터놓고 상의하였습니다. 내막이 모두 드러난 것은 응당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았으며 전헌(典憲)이 밝게 게시되어 있으니 어찌 사시(肆市)의 주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모두 모반부도(謀叛不道)에 대해 확실하게 지만이라고 하였으니, 부대시참(不待時斬)에 해당합니다.
차홍식(車弘植)의 결안에, ‘처신(處身)은 중으로 있다가 환속하였고 타고난 성질이 지극히 교활하고 간사합니다. 김옥균이 일본에 갈 때에 선뜻 함께 배를 타고 갔고, 서재필이 대궐에 들어가는 길에 등불을 들고 따라 들어갔습니다. 함께 악한 짓을 한 내막이 절로 드러났으니 어찌 교묘하게 꾸며대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흉역을 제거하는 법을 밝게 게시하여 응당 사형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고, 서재창(徐載昌)의 결안에, ‘머리의 피도 안 마른 나이에 이미 외국과 교제하려는 딴 마음을 두었으며, 요사한 기운이 쌓여 언제나 내란의 음모를 품고 있었습니다. 복장은 매우 괴이하여 본국의 습속과 되도록 어긋나게 하였으며, 동태가 수상하여 훗날의 계략을 몰래 품고 있었습니다. 승방에서 모의한 모임에 함께 참여했으면서도 우정국에서 변란을 일으킨 일에 대하여 감히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반역한 죄상을 가릴 수 없으니 나라의 법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남흥철(南興喆)의 결안에, ‘본래 간사한 무리로서 악독한 뜻마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학 공부를 한다는 명색에 빙자하여 다른 나라와 연계를 맺고, 몰래 악독한 계책을 실현할 생각으로 적신에게 붙었으며, 도읍 사람의 집을 무너뜨렸으니 평소의 고약한 행실을 알 수 있습니다. 흉악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 한패거리가 되어 당역(黨逆)의 본심을 더욱 드러내었으니, 단서가 모두 드러난 만큼 비록 아무리 변명을 한다고 해도 용서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라의 법이 더없이 엄격하니 어떻게 법률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최영식(崔英植)의 결안에, ‘본래 보잘것없는 천인(賤人)으로서 오래도록 독사 같은 악독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흉역 이인종을 위해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대접하고 오직 같은 무리의 지시만을 들었으며, 역적 박영효(朴泳孝)를 만나서 소매를 잡고 물어 보았으니, 어떻게 그 주모자의 행동거지에 대하여 몰랐겠습니까? 정상이 본래 음흉하고 간특하나 단서가 이제 이미 다 드러났으니, 이에 조사해 밝혀진 내용을 상고하여 응당 속히 해당 형률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모두 지정불고(知情不告)에 대해 확실하게 지만이라고 하였으니, 부대시참에 해당합니다."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모반대역부도(謀反大逆不道) 죄인 김봉균(奉均) 등과 모반부도(謀反不道) 죄인 이점돌(李點乭) 등은 이미 정형(正刑)에 승복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연좌된 사람들의 나이, 이름, 생존 여부, 거주지를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장적(帳籍)을 상고해서 밝혀내게 하는 동시에 또한 오부(五部)와 각 해도(該道)에 분부하여 일일이 조사해 내어 성책(成冊)하여 첩보(牒報)한 뒤 법률대로 거행하게 하며, 가산의 적몰과 파가저택(破家瀦澤) 등의 일은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승전(承傳)을 받들어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정국(庭鞫)을 철파(撤罷)하라고 명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 【대사헌(大司憲) 홍종헌(洪鍾軒), 대사간(大司諫) 이봉구(李鳳九), 장령(掌令) 김기룡(金基龍), 지평(持平) 김명기(金命基), 정언(正言) 이희봉(李羲鳳)이다.】 의 대략에,
"국청(鞫廳)에서 복법(伏法)된 여러 흉악한 자들은 모두 풀을 베듯 짐승을 잡듯이 죽여 근원을 철저히 없애야 합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이점돌(李點乭) 이하 여러 역적들에게 모두 극률(極律)을 시행하며, 이미 죽은 최영식(崔英植)에게는 속히 노륙(孥戮)하는 형벌을 시행함으로써 나라의 법을 중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점돌 이하 여러 역적들에 대해서는 이미 처분이 있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최영식의 일은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국(金炳國),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이다.】 의 대략에,
"정국(庭鞫)을 며칠 동안 진행하여 캐묻고 조사하는 일이 이제 겨우 끝났는데, 김옥균(金玉均) 등 다섯 역적과 흉도로서 국초(鞫招)에 나온 자들이 더러는 도망쳐서 아직 체포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이미 죽어서 처단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주륙(誅戮)하는 전형(典刑)이 아직까지 지연되고 있으니, 신인(神人)의 울분과 사리에 어긋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도망친 자들은 특별히 신칙해서 염탐하여 체포하게 하고, 이미 죽은 자는 모두 추륙(追戮)을 더하셔서 나라의 법을 시원히 바로잡음으로써 사람들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국옥(鞫獄)은 그 당여(黨與)들만 다스렸을 뿐이다. 그 괴수를 체포하지 못하고 먼저 그 지속(支屬)들에 대해서만 논죄하고서 나라의 법을 통쾌하게 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응좌 죄인(應坐罪人)으로 수사(收司)된 사람 중에 최영식(崔英植)을 노륙하는 일은 이미 대간(臺諫)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윤허하였으니, 경들은 이해하라."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양사(兩司)와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이 차자를 올린 것과 관련하여 죄인 최영식(崔英植)에게 노륙의 형전을 시행하도록 비지(批旨)로 윤허하셨습니다.
죄인 최영식은 모반대역부도(謀反大逆不道) 죄인으로 능지처사(凌遲處死)〉의 형률을 시행하고, 응좌 죄인(應坐罪人)들은 나이와 이름, 생존 여부와 거주지를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장적(帳籍)을 상고하여 밝혀내게 하며, 또 오부(五部)와 각 해도(該道)에 분부하여 일일이 조사해 내어 성책(成冊)하여 보고하게 한 뒤에 이괄(李适)과 심상운(沈翔雲)의 예대로 거행하게 하며,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고 파가저택(破家瀦澤)하는 등의 일은 각 해사(該司)에서 승전을 받들어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14일 갑신

전 후영사(前後營使) 신정희(申正熙)를 기복(起復)하여 전직(前職)에 잉임(仍任)하라고 명하였다.

 

양헌수(梁憲洙)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조석여(曺錫輿)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변란에 대한 사실을 주문(奏文)에 추가해서 덧붙이겠다는 내용으로 계품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자세히 글을 짓게 하고, 재주관(齎奏官)은 전환국 방판(典圜局幇辦) 이응준(李應俊)을 임명하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재차 올린 차자에,
"최영식(崔英植)의 일은 즉시 처분을 받아 울분을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이런 큰 역적은 노륙(孥戮) 정도에서 그쳐서는 안 될 듯하니, 속히 이괄(李适)과 심상운(沈翔雲)에게 시행하였던 형률을 시행하소서. 이점돌(李點乭) 이하 여러 역적들도 모두 만고의 큰 역적인데 단지 형률을 거리에서 시행하는 데 그치고 파가저택(破家瀦澤)의 형률을 시행하지 않아서 백성들의 마음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들끓고 있습니다. 김옥균(金玉均) 등 네 역적의 경우는 바다를 건너서 법망을 빠져나간 관계로 법을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미 자복한 여러 죄인들에게 모두 극률(極律)을 시행하신 다음 이웃 나라에 성명을 내시고, 제기(緹騎)에게 속히 잡아들이게 하여 전형(典刑)을 속시원히 바로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이전 비답에서 유시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교리(校理) 이기조(李基肇), 부교리(副校理) 노영경(盧泳敬)·이건영(李建永), 수찬(修撰) 이승연(李承淵)·이범진(李範晉), 부수찬(副修撰) 홍학주(洪學周)이다.】 "최영식(崔英植)에게 형률을 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간(臺諫)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원본】 25책 21권 98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83면
【분류】사법-재판(裁判)
"최영식(崔英植)에게 형률을 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간(臺諫)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12월 15일 을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여주(驪州) 등 여섯 고을의 상정미(詳定米)를 본색(本色)으로 납부하도록 한다는 뜻으로 복계(覆啓)하여 행회(行會)하였습니다. 방금 당해 도신(道臣) 심상훈(沈相薰)의 보고를 보니, ‘죽산(竹山)과 양지(陽智)의 갑신년(1884) 조는 신사년(1881)부터 이미 상정미로 배정하여 바치게 한 것인데, 지금 독책하여 받아낼 곳이 없으니 탕감시켜 주느니만 못합니다. 여주의 신사년 조는 강에 이르러 침몰되어 곡물이 부패하여 지금까지 지체되고 있으니, 매 석(石)당 6냥씩 돈으로 대납하게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풍덕(豐德)의 경우는 다시 설치한 지 얼마 안 되어 고을의 형편이 영락하였으니 대동미(大同米)의 절반은 상정미(詳定米)로 할 것이며, 삭녕(朔寧)은 험난한 여울로 조운하는 과정에서 매번 실수하는 한탄이 있으니, 절반은 돈으로 대납하게 해 주소서. 또한 교하(交河)에서 바치는 쌀과 콩은 한결같이 임오년(1882)과 계미년(1883)에 바치던 전례대로 특별히 돈으로 대납하도록 허락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도신이 보고한 백성들의 사정을 살펴 볼 때 모두 이미 허락한 연한 안에 대동미의 절반으로 상정가를 정하되 삭녕은 가장 변방이므로 논하지 마시고, 교하의 쌀과 콩은 특별히 돈으로 대납하는 것을 허락하는 뜻으로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세 번째로 올린 차자의 대략에,
"도망간 김옥균(金玉均) 등 4명의 흉악한 역적과 여러 역적들을 모두 다 기한을 정해 놓고 체포하여 시원히 형장(刑章)을 바로잡으시고, 비록 체포하기 전이라 하더라도 수사(收司)하여 응당 시행해야 할 형률을 적용하는 것을 하루라도 지체시켜서는 안 됩니다. 최영식(崔英植)·이점돌(李點乭)·이윤상(李允相)에 대하여 모두 김봉균(金奉均) 등에게 시행했던 형률대로 시행하시고, 차홍식(車弘植) 등 다섯 역적과 오창모(吳昌模) 및 생도(生徒)들, 국초(鞫招)에서 언급된 자들로 이미 죽은 자와 도망간 자들에 대하여 빨리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그 이름을 조사해 내고 아울러 노륙의 형벌을 시행하여 나라의 법이 엄격해지고 대중들의 울분이 풀어지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앞서 비답한 바가 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오창모의 일과 이미 죽은 흉도들에 대해서는 일체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재차 차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대간(臺諫)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윤자승(尹滋承)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2월 16일 병술

양사(兩司)에서 올린 합계(合啓)에,
"지레 죽은 최영식(崔英植)은 이괄(李适)과 심상운(沈翔雲)에게 적용한 형률을 더 시행하고, 도망친 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은 우선 수사법(收司法)을 시행하고, 이점돌(李點乭)·이윤상(李允相)·오창모(吳昌模)는 모두 극률(極律)을 적용하며, 차홍식(車弘植)·서재창(徐載昌)·고흥종(高興宗)·남흥철(南興喆)·최영식은 또한 노륙의 형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최영식과 이점돌 등의 일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 4명의 역적과 차홍식 등의 일은 그대로 윤허한다."
하였다.

 

한경원(韓敬源)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

 

12월 17일 정해

양사(兩司)에서 재차 계사(啓辭)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최영식(崔英植)과 이점돌(李點乭) 등의 문제는 이미 처분이 있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체포하는 문제는 아뢴 대로 윤허한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해방 총관(海防總管) 이규원(李奎遠)을 동남 개척사(東南開拓使)로 차하(差下)하라."
하였다.

 

김유연(金有淵)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2월 18일 무자

전교하기를,
"이번 국안(鞫案)은 징토(懲討)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미 대간(臺諫)의 청을 윤허하였던 것인데, 여러 사람들의 공초(供招)를 참작하여 볼 때에 차이가 없지 않으니, 일체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한 형률(刑律)대로 시행하라고 의금부(義禁府)에 분부하라."
하였다.

 

원의 계사(院議啓辭)에, 【좌승지(左承旨) 박주양(朴周陽), 좌부승지(左副承旨) 홍승목(洪承穆)이다.】 "삼가 전교가 내려진 것을 보니, 이미 대간(臺諫)의 청을 윤허한 여러 역적들의 문제에 대하여 일체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한 형률(刑律)대로 시행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서로 돌아보며 깜짝 놀라 한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참작하라는 전하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필경 중외(中外)의 울분을 초래할 것이니, 도로 철회한다는 명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굳이 이처럼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으니 빨리 반포하라." 하였다.


【원본】 25책 21권 98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83면
【분류】사법-재판(裁判)
"삼가 전교가 내려진 것을 보니, 이미 대간(臺諫)의 청을 윤허한 여러 역적들의 문제에 대하여 일체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한 형률(刑律)대로 시행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서로 돌아보며 깜짝 놀라 한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참작하라는 전하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필경 중외(中外)의 울분을 초래할 것이니, 도로 철회한다는 명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굳이 이처럼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으니 빨리 반포하라."
하였다.

 

12월 19일 기축

낙선재(樂善齋)에 나아가 청(淸) 나라의 흠차(欽差) 오대징(吳大澂)과 속창(續昌)을 접견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및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옥체에 탈이 나서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를 들이기까지 하였는데, 약제를 써서 효험을 보아 이제 이미 건강이 회복되셨으니, 이것은 바로 종사(宗社)의 끝없는 복이고 신민(臣民)의 더없이 큰 경사입니다. 신들은 기쁘고 경축하는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감히 종묘(宗廟)에 고하고 교문(敎文)을 반포하며 경사를 축하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종묘에 고하고 교문을 반포하며 경사를 축하하는 것은 매우 당치 않은 일이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과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서로 뒤를 이어 빨리 성명(成命)을 내리도록 청하니, 하교하기를,
"한때 생각지 않던 병이 생겼다가 곧 나았는데 어찌 이렇다고 하례(賀禮)를 하겠는가?"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들이 물러가서 뒤에 연명 차자(聯名箚子)로 아뢰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렇게 할 필요 없다."
하였다. 김병시가 이어 사면(辭免)시켜 줄 것을 아뢰니, 하교하기를,
"경이 다시 정승의 벼슬에 임명된 것은 내가 몸조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아직 한 번도 예의를 차려 만나보지 못하여 매우 안타까웠는데, 지금 좋은 가르침을 듣게 되니 실로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경이 8조(條)의 좋은 충고를 하여 나에게 권고하였으니, 내가 감히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임금을 옳은 길로 인도하며 알고 있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경에게 요구하니, 경은 다시 사직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는 뜻에 부합되게 하라."
하였다.

 

약원(藥院)에서 올린 구계(口啓)에,
"방금 연석(筵席)에서 세자궁(世子宮)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들어, 근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들이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들어가서 증세를 자세히 진찰하도록 빨리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이미 차도가 있으니 경들은 입시(入侍)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국(金炳國),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이다.】 "경사를 축하하고 종묘(宗廟)에 고하며 교문(敎文)을 반포하는 예(禮)를 길일을 받아 거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까 연석(筵席)에서 이미 나의 뜻을 다 말하였지만 한때 생각지 않던 병이 생겼다가 곧 나았는데 굳이 크게 떠들어댈 것이 있겠는가? 경들의 말이 비록 이처럼 간절하나 따를 수 없으니, 경들은 이해하라." 하였다.


【원본】 25책 21권 99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8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경사를 축하하고 종묘(宗廟)에 고하며 교문(敎文)을 반포하는 예(禮)를 길일을 받아 거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까 연석(筵席)에서 이미 나의 뜻을 다 말하였지만 한때 생각지 않던 병이 생겼다가 곧 나았는데 굳이 크게 떠들어댈 것이 있겠는가? 경들의 말이 비록 이처럼 간절하나 따를 수 없으니, 경들은 이해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강하(趙康夏)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조운(漕運)을 지체시킨 창원(昌原) 등 20읍(邑) 수령(守令)들의 죄상을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조운의 중요성에 대하여 조령(朝令)으로 엄하게 신칙하였는데도 기한을 지연시킨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인 만큼 도신(道臣)이 논감(論勘)한 것은 사체(事體)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허다한 수령들이 한꺼번에 심리(審理)를 받는 것도 업무를 비우게 되는 폐단이 있을 것 같으니, 모두 우선 죄명을 지닌 채 직임을 살피게 하소서.
풍랑이 높아 출발하지 못하였다고 핑계를 대나 곡식의 수량은 그대로인 만큼 출발하지 못하고 해읍(該邑)에 봉류(捧留)하고 있는 것과 이미 출발하여 다른 곳에 정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다시 도신으로 하여금 적발하여 살피게 하여, 만일 속이고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고을이 있는 경우에는 즉시 등문(登聞)하여 파직(罷職)으로 감처(勘處)하라는 내용으로 별도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20일 경인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재차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경들이 이렇게까지 애타게 간청하는데 줄곧 버티는 것은 도리어 사체(事體)에 맞는 일이 아니므로 할 수 없이 윤허하는 바이니, 경들은 이해하라."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한 형률(刑律)대로 시행하도록 한 명을 거두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처분이 있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21일 신묘

전교하기를,
"오늘은 대원군(大院君)의 생신이다. 멀리서 그리워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니 운현궁(雲峴宮)에 도승지(都承旨)를 보내서 문후(問候)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12월 22일 임진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및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우리 동궁 저하(東宮邸下)가 몸이 편치 않다가 좋은 약제로 효험을 보아 건강이 날로 회복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더없이 큰 경사입니다. 백관(百官)과 만백성 모두가 대궐 뜰에서 기쁘게 춤추며 조금이나마 정리(情理)와 예의를 펴고자 합니다. 삼가 나라의 전례를 상고하건대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는 무릇 이러한 경사가 있을 경우에는 곧 이러한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우리 전하께서도 이미 무인년(1878)에 거행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밝은 명을 내려 해조(該曹)에서 종묘(宗廟)에 고하고 교문(敎文)을 반포하는 절차를 길일을 받아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과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서로 뒤를 이어 청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세재(李世宰)가 앞으로 나아와 아뢰기를,
"이번에 전하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종묘에 고하고 교문을 반포하며 진하하는 절차에 대하여 길일을 가려 입계하였습니다. 세자궁(世子宮)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종묘에 고하고 교문을 반포하며 진하하는 절차도 길일을 가려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좀 전에 삼가 보니 동가(動駕)에 대한 전교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수고롭게 행차하는 것은 건강에 해로우므로 신들은 걱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 흠차(吳欽差)가 나온 뒤 아직까지 가서 접대하는 예를 지체하고 있어 참으로 사체(事體)에 흠이 되고 있다. 지금은 몸조리한 지도 며칠 되었고 날씨도 매우 좋은 만큼, 가마를 타고 갔다 온 뒤에 몸조리를 잘하면 조섭하는 데 잘못될 우려가 없을 것 같다."
하였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오늘 신시(申時)에 흠사(欽使)가 신들을 만나자고 하여 지금 가려고 합니다. 이전에 논의한 것 가운데서 서원(書院)과 전선(電線) 두 가지 일에 대하여 필경 다시 물을 것인데 어떻게 대답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전선, 이것은 좋은 문제이다. 그뿐 아니라 오 흠차도 이미 거듭 권고한 것이니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서원에 대한 문제는 서울 한 곳에서만 시험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전하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진하(陳賀)하고 세자(世子)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진하하는 의식을 거행할 길일을 이달 29일로 잡아 함께 거행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2월 23일 계사

남별궁(南別宮)에 나아가 오대징(吳大澂), 속창(續昌) 두 흠차(欽差)를 접견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및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전날의 역변(逆變)은 바로 천고에 없었던 것인데, 오직 하늘과 조종(祖宗)이 은밀히 도우시어 분란을 제거하고 요사한 기운을 없애니, 대궐 안이 크게 맑아지고 우리 전하와 각 전궁(殿宮)이 정아(正衙)에 돌아와 해와 달이 다시 밝게 비추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종사(宗社)의 끝없는 경사입니다. 신들이 이에 울음을 웃음으로 돌리게 되었으니 전례(典禮)를 상고해서 경사를 축하하도록 청하는 것은 참으로 하루도 늦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이어 일이 생겨 아직까지 그대로 있으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모두가 신들이 직책을 잘못 수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 법상 마땅히 시행하여야 하고 그만둘 수 없는 일로, 우리 동방의 백성들치고 그 성대한 행사를 보고 조금이나마 기쁜 심정을 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밝은 명을 내려 의식을 거행하여 백관과 만백성이 우러러 바라는 기대에 부응하소서."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과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서로 뒤이어 청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당초의 일에 대하여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각 전궁(殿宮)이 대궐에 돌아와 태평하게 된 것에 대해 말한다면, 이것은 경사이고 다행한 일로서 자전(慈殿)에 관계되는 문제인 만큼 윤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 가서 두 흠차(欽差)를 만나보니 모두 매우 기뻐하였다. 환궁한 뒤에 곧 와서 사례하고는 아뢰기를, ‘앞으로 통문(通門)을 영영 교체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절절하였다. 두 흠차가 또 옛날 동경(銅鏡)과 수창(手鎗) 및 창법(鎗法)에 보냈으므로 내가 할 수 없이 받았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이것은 다른 물건과 다르므로 받아도 괜찮습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일전에 흠사(欽使)와 필담(筆談)한 것을 보셨으리라고 삼가 생각합니다. 전선(電線)에 대한 문제는 이미 자문(咨文)에 밝히셨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자문을 보냈다. 서원(書院)의 문제는 규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서원의 규제는 시부(詩賦)의 사장(詞章)을 취하지 말고 경의(經義)와 치사(治事)를 위주로 하소서. 이것은 송(宋) 나라 신하 호원(胡瑗)이 제자를 가르친 방법입니다. 대체로 학문은 먼저 경의를 강론하여 충효(忠孝)의 본령을 세우고, 다음으로 치사를 강론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성과를 보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이밖에 따로 이치를 연구하고 지식을 넓히는 학문이 있는데, 요즘에는 시국(時局)이 변하여 산수(算數), 제조(製造), 기선(汽船), 창포(鎗礟) 등의 학문에 대해서도 두루 통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흠사가 말하기를, ‘선비 1인을 양성하는 비용을 군사 1명을 양성하는 비용과 맞먹게 한다면 먼 지방의 선비들도 스스로 기꺼이 달려와서 학문에 힘쓸 것이다. 나라에서 인재를 양성하려면 반드시 평소에 양성해야 하니, 가령 100인 가운데 두셋의 큰 인재를 얻기만 해도 앞으로 반드시 그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런 만큼 비록 백만 금을 쓴다고 하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 규제가 참으로 좋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세재(李世宰)가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이번에 전하와 각 전궁(殿宮)께서 환어하신 것을 칭경(稱慶)하고 진하(陳賀)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 성명을 받들었습니다. 택일(擇日)하여 거행하는 문제를 초기(草記)로 품정(稟呈)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특별히 조동면(趙東冕)을 제수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다.

 

12월 24일 갑오

예조(禮曹)에서, ‘환어한 뒤에 칭경(稱慶)하고 진하(陳賀)하는 길일을 추택(推擇)하였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29일에 합설(合設)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진하하는 경사의 명칭을 ‘전하의 건강이 회복되고, 세자(世子)의 건강이 회복되고 전하와 각 전궁(殿宮)이 환어하다.’로 세 가지 경사를 합해서 부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진하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경사를 합해서 설행하도록 계하(啓下)하셨습니다.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은 전례대로 봉진(封進)하도록 경외(京外)에 통지하며, 전문(箋文)의 머리글은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지방의 방물과 물선은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진하(陳賀)는 권정례(權停例)로 하고, 왕세자(王世子)가 진전(進箋)하고 치사(致詞)하여 예를 행하는 절차는 마련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병호(趙秉鎬)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영(本營)의 병정(兵丁)으로서 경진(京陣)에 나와 영하(營下)의 장사(將士)들과 함께 각처(各處)에서 파수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본부(本府)의 백성들이 돈과 재물을 바쳐 비용을 보태 주기도 하고 소, 물고기, 미역을 바쳐 군사들을 먹이기도 하니, 이런 때에 와서 의로운 마음으로 자원하여 물품을 바치는 것은 매우 가상합니다. 각인(各人)에게 포상하는 은전(恩典)을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병사의 노고를 염려해서 이처럼 돈과 재물을 자원하여 도와주고 있으니 그 의기가 참으로 가상합니다. 각인에게 모두 해영(該營)으로 하여금 마땅하게 헤아려 시상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박제관(朴齊寬)의 장계(狀啓)를 보니, ‘갑술년(1874) 태봉(胎封) 때에 연로(沿路)의 결성(結城) 등 여섯 고을에 대하여 구재원징조(舊災冤徵條) 336결(結) 6부(負)를 특별히 10년 간 정세(停稅)하였습니다. 기한은 이미 지났는데 땅은 한 치도 개간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많이 떠나가서 그저 결부(結簿)만 가지고 친족과 이웃에게 두루 징수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여섯 고을에 대하여 탈결(頉結)로 잡아주어 특별히 다시 더 10년을 연장하여 정세하여, 각 해읍(該邑)으로 하여금 착실히 경작하도록 장려하고 기경(起耕)하는 대로 집복(執卜)하도록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기한이 찼는데 다시 기한을 연장하여 주도록 청하는 것은 국결(國結)의 중요한 측면으로 헤아려볼 때 원래 논의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기읍(畿邑)은 조정에서 진념하는 것이 다른 곳과는 달라서 시종 돌봐주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특별히 5년을 기한으로 정세를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영접사(迎接使)가, ‘오 흠차(吳欽差)과 속 흠차(續欽差) 두 흠차 일행이 오늘 묘시(卯時)쯤에 출발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2월 25일 을미

신헌구(申獻求)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초토신(草土臣) 민영익(閔泳翊)이 상소하여 사정을 진달하고, 이어 융함(戎銜)을 사직(辭職)하니, 비답하기를,
"종이를 가득 채운 상소의 내용이 서글프고 측은하여 차마 끝까지 다 읽지 못하였다. 경의 집안에서 여러 번 화를 겪은 것은 경의 집안 일 때문이 아니요 바로 나라를 위하여 어려움을 받은 것이다. 온갖 시련을 겪은 뒤에 경이 홀로 외롭게 겨우 살아남았으니, 이것은 바로 천심(天心)이 경의 집안을 보전해서 우리나라를 도와주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 점 충성스러운 마음을 깊이 간직하여 비록 자리에 누워 신음할 때에도 오히려 잊지 않고 나랏일을 걱정하는 정성에 대하여 매우 가상히 여긴다.
우영사(右營使)의 직임을 사직한 것은 의례적으로 사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우선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니, 경은 안심하고 조리하여 빨리 회복해서 나의 마음을 위로하라."
하였다.

 

12월 27일 정유

전교하기를,
"묘궁(廟宮)에 전알(展謁)하는 것을 모레 할 것이니 자내(自內)의 예(例)로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군 우영(親軍右營)의 군공을 세운 장졸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병방(兵房) 신석희(申奭熙)에게 가자(加資)하였다.

 

김영수(金永壽)를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삼았다.

 

12월 28일 무술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국(金炳國),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이다.】 ‘묘궁(廟宮)에 전알(展謁)하는 것에 대한 명(命)을 철회하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이 이렇게 애써 간청하니 하는 수 없이 따르겠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전번에 내수사(內需司)에 계하(啓下)하신 단자(單子)로 인하여 안변(安邊)과 덕원(德源) 등지의 보세(洑稅)를 거두어들이는 궁감(宮監)을 불태워 죽인 자들을 잡아가두고 끝까지 신문하여 구별해서 계문(啓聞)하라는 내용으로 해도(該道)에 관문(關文)을 보냈습니다.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정기회(鄭基會)의 계본(啓本)을 보니, 회사관(會査官)인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교영(李敎榮)과 함흥 판관(咸興判官)        정기우(鄭基雨)가 조사하여 보고한 것을 낱낱이 들면서 아뢰기를, ‘박학성(朴學性), 이연숙(李連淑), 김용현(金用鉉) 등 세 놈은 이 옥사(獄事)의 중요 범인인데 그 자리에서 도망쳤으므로, 각진(各鎭)에 엄하게 신칙하여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김인영(金仁永), 조석범(趙錫凡), 엄익손(嚴益孫)은 모두 논의를 주도하거나 동참한 형적은 없으나 다같이 도로 가두고 삼가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은 더 추궁할 것이 별로 없으므로 모두 보방(保放)하였습니다. 초검(初檢) 때 뇌형(牢刑)을 혹독하게 시행하여 억지로 정범(正犯)을 정한 안변 부사(安邊府使)        윤조영(尹祖榮)의 죄상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습니다. 사관(査官)인 영흥 전 부사(永興前府使)        이명재(李命宰)와 복사관(覆査官)인 문천 군수(文川郡守)        오도영(吳道泳)은 전안(前案)에 주견없이 덩달아 찬동하여 주모자와 추종자를 구분하지 않았으니 엉성하게 그르친 과오를 모면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보세를 마구 물리는 데서 소동이 야기되어 변고가 궁감을 불태워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흉악한 무리들은 이미 흩어졌고 주범을 아직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옥사를 어떻게 결단하여 처리하고 법을 어떻게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도망친 죄인 박학성 등 세 놈은 기한을 정하여 탐문해서 체포해 끝까지 신문해서 진상을 알아낸 뒤에 빨리 해당 형률을 시행하고, 갇혀 있는 김인영, 조석범, 엄익손은 모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율하여 처리하도록 하며,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은 이미 죄줄 만한 단서가 없으니 모두 다 참작해서 방송(放送)하소서. 초검관(初檢官) 윤조영은 도신의 계사에서 이미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였으니 이제 다시 논의할 것이 없으며, 사관인 이명재와 복사관인 오도영에게도 또한 경고가 없을 수 없으니 엄하게 추고(推考)하는 국법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단천부(端川府)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이범진(李範晉)을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삼았다.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12월 29일 기해

진하(陳賀)를 권정례(權停例)로 인정전(仁政殿)에서 예(禮)를 행하고, 사면(赦免)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황천(皇天)의 신령이 은근히 도와주어 궁궐 안이 깨끗이 정리되어 다시 돌아오고 과인(寡人)의 병과 세자(世子)의 병이 회복되어 여러 가지 경사가 겹쳤으므로 이에 교문을 반포하는 바이다.
생각하건대 나는 변변치 못한 몸으로 외람되게 왕위에 올라 조종(祖宗)의 큰 부탁을 걸머지고 늘 몸조리를 잘못할까봐 우려하였고, 나라가 곤란을 겪을 때에 당해서는 미처 분발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부지런히 애써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자꾸 생기는 데야 어떻게 하겠는가? 역적 사건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 속에서 생겨난 것은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니요, 화가 생길 기미가 당장에 박두하게 된 것은 바로 빼앗지 않고는 만족할 줄 모르는 무리들 때문이었다. 변란 중에 대비(大妃)의 행차를 모실 수 있었던 것은 상국의 세 장수의 덕이며, 역적들을 쓸어버린 뒤에 곧 돌아와 우리나라의 만년 터전을 닦아졌다. 전(殿)과 궁(宮)에 화락한 기운이 넘치니 대궐 안이 더욱 엄숙해졌으며 온 나라에 칭송하는 소리가 끓어오르니 나라가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겨울에 이르러 나의 건강이 좋지 못하고 세자의 건강도 좋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육기(六氣)가 교감(交感)할 때 계절에 따른 조섭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는데, 백령(百靈)이 와서 도와주어 몸 보양을 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행히 이전의 병이 나아 큰 시름을 놓게 되니, 모든 백성들이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며 온 나라에 즐거운 노랫소리가 다시 끓어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일과 나라를 위한 일들이 끝이 없어 언제나 그저 복되게 하고 돌봐줄 생각뿐이요, 바야흐로 부지런히 정사를 보기에도 겨를이 없으니 감히 안정되고 다스려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편 저 막을 수 없는 여론은 바로 드물게 있는 세 가지 경사로 여기고 있다.
병이 나은 뒤로 선(善)의 단서가 많이 나타나니 되짚어 생각건대 괴로운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지난번에 쓴맛을 보았으니 또한 훌륭한 시대를 열 때인데, 법의 그물이 너무 넓으니 어떻게 임시방편으로 할 수 있겠는가? 병석에서 겨우 편안한 것은 병이 조금 나았다고 믿을 수 있는 경우가 아니다. 생각을 가다듬어 정사를 잘한 효과가 있어야 거의 화(禍)를 복(福)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뜻을 굽혀서 억지로 따른 것이 어찌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겠는가? 널리 은덕을 베풀어서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흠뻑 젖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종묘(宗廟)의 제사를 내가 지냈고 다시 조정을 밝히는 교문을 반포하니, 모든 죄와 허물을 깨끗이 씻어주어 온 나라에 교화를 넓혀 모든 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해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다같이 경사를 누리도록 할 것이니, 이달 28일 새벽 이전에 범한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를 모두 용서한다.
아! 나와 함께 태평세월을 누리도록 보존해 주는 법도를 내리는 것이다. 초목이 모두 스스로 즐거워하고 월령(月令)은 화창한 봄날이니 소나무와 잣나무 같이 꿋꿋이 대를 이어나가며 하늘이 큰 복을 보존하는 것을 칭송하여야 할 것이므로, 이에 교시(敎示)를 내리니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윤자승(尹滋承)이 지었다.】


【원본】 25책 21권 10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8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약원(藥院)의 도제조(都提調) 이하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대소 자교 부신(慈敎符信), 내교 부신(內敎符信), 달자 부신(達字符信), 성자 부신(省字符信), 내령 부신(內令符信) 조성 시 승지(承旨)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이번 경과(慶科)는 초시(初試)는 그만두고 정시(庭試)로 설행(設行)하되 날짜는 오는 3월 20일 전후로 가려서 들이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계품(啓稟)하였기 때문이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올린 사면 단자(赦免單子)로 인하여 전교하기를,
"윤조영(尹祖榮), 이병문(李秉文), 정낙용(鄭洛鎔), 홍운섭(洪運燮), 이승필(李承弼), 이병익(李秉翼), 유긍수(柳肯秀), 이재욱(李載旭), 남정익(南廷益), 이상돈(李相惇), 홍시우(洪時愚), 이태현(李泰鉉)을 모두 풀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경죄수(輕罪囚)를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조정에서 공시(貢市)를 생각하는 것은 바로 도민(道民)을 보호하기 위한 뜻인데, 요즘 비용이 군색하여 공시가 받을 값을 지체시키면서 주지 못하고 있다. 형편을 생각하면 매우 딱하게 되었으므로 전(錢) 10만 냥과 목(木) 200동(同)을 특별히 내하(內下)하니, 묘당(廟堂)에서 알맞게 헤아려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 나누어주게 하여 조금이나마 민력(民力)을 펴게 하는 방도가 되게 하라."
하였다.

 

윤자승(尹滋承)을 세자시강원 좌빈객(世子侍講院左賓客)으로, 이호준(李鎬俊)을 우빈객(右賓客)으로, 김상현(金尙鉉)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삼았다.

 

12월 30일 경자

전교하기를,
"전 우영사(前右營使) 민영익(閔泳翊)을 우영사에 도로 제수하고 병세에 차도가 있은 뒤에 병부(兵符)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정기회(鄭基會)가 올린 장계(狀啓)에, ‘본도(本道)는 올해 농사가 전에 없이 큰 흉년이 들어 각곡(各穀)이 제대로 익지 못한 것은 남도(南道)나 북도(北道)가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의 형편이 황급하게 된 조건에서 만약에 똑같이 돌봐주지 않는다면 구렁텅이에 쓰러질 위험이 당장에 박두하게 될 것이니 묘당(廟堂)에서 품지(稟旨)하여 특별히 넉넉하게 획급(劃給)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관북(關北)은 바로 우리 왕조가 일어난 고장인데 온 도(道)에 흉년이 들었다고 도신(道臣)이 장계(狀啓)하여 딱한 사정을 보고하였으니 듣고는 매우 근심스러워 잠을 편히 잘 수 없다. 특별히 내탕전(內帑錢) 1만 냥을 내려서 진휼(賑恤)하는 자금에 보태게 하라. 도신과 수재(守宰)가 접제(接濟)할 방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십분 명을 잘 받들어 집행하여 한 사람이라도 굶어죽는 근심이 없게 하라고 묘당(廟堂)에서 말을 만들어 분부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전날에 배종(陪從)하여 호위하고 갈 때 힘을 다한 여러 사람들에 대하여 포상하는 정사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조와 병조에서 상당직(相當職)에 각별히 수용(收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중국 사람의 물건을 약탈한 백령도(白翎島)의 강도들이 도망하였는데 주동자 이창서(李昌西), 유영석(柳永石), 우재기(禹在己) 세 놈을 기한을 정해서 수색하여 체포하라고 엄하게 신칙하여 관문을 띄웠습니다. 방금 황해 감사(黃海監司) 윤우선(尹宇善)의 보고를 보니, ‘위의 세 놈을 지금 체포해서 영옥(營獄)에 가두어 놓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리를 이루어 불태우고 약탈한 것 자체가 이미 아주 놀라운 일인 데다가 상무(商務)에 관계되는 만큼 또한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 현재 갇혀 있는 세 놈을 다시 더 끝까지 신문하여 우두머리를 적발해 내어 수영(水營)에 압송해서 해당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군민(軍民)을 크게 모아놓고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고 그 나머지 두 놈은 엄히 형신하여 원배(遠配)하라고 도신(道臣)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태복시(太僕寺)에서, ‘각도(各道) 목장의 마축(馬畜)의 수효가 4,947필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각도(各道)의 재결(災結) 5,650결(結)을 특별히 수량에 맞춰 획급(劃給)하도록 허락하소서.’라고 아뢰었다.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2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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