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22권, 고종22년 1885년 9월
9월 1일 병신
홍종운(洪鍾雲)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9월 2일 정유
대교 권점(待敎圈點)을 행하였다. 〖권점을 받은 사람은〗 민병숙(閔丙肅)·이완용(李完用)·오철근(吳喆根)이다.
민병숙(閔丙肅)을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로, 성이호(成彛鎬)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신석년(申錫秊)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민응식(閔應植)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김선용(金善容)을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구연창(具然昌)을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 구일제(九日製)를 설행하였다. 이어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과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을 앞으로 나오게 하고는 하교하기를,
"백성들이 입는 피해를 제거하는 일로는 도적을 단속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발호하는 무리들을 포도청에서 마땅히 체포하여야 하는데, 근래에 와서 포교(捕校)와 나졸(羅卒)들이 포도청에서 부역(賦役)에 동원될 뿐 아니라 5개의 상사(上司)에서 또한 어려움 없이 불러간다고 하니, 어느 겨를에 도적을 기찰하여 잡아들이겠는가? 이제부터는 특별히 기록하여 벽에 걸어 두고 공문(公文) 없이는 감히 불러가지 못하게 하며 승정원(承政院)에서도 각별히 신칙하도록 하라. 이처럼 신칙한 뒤에도 형식적인 것으로 여기고 또다시 이전처럼 하는 경우에는 우선 포도대장(捕盜大將)부터 특별히 엄하게 처단할 것이다. 또한 요즘 양반집에서도 어렵지 않게 포교를 불러간다고 하니, 그것도 일체 엄하게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9월 4일 기해
윤병정(尹秉鼎)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송병선(宋秉璿)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만기(李晩耆)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9월 5일 경자
김학수(金學洙)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제관(朴齊寬)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특교(特敎)로 인해 양주목(楊州牧)에 포(砲)를 설치하는 방도는 우선 경비를 얻은 다음에야 군사를 훈련시킬 수 있는 만큼 앞으로 본도(本道)에 있는 각 궁방(宮房)의 면세전 가운데에서 1결(結)당 약간씩 이자를 취하여 군량의 수요를 보충하게 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양주목은 원래 경기(京畿)의 중요 지대로서 포를 설치하는 문제는 과연 현재의 급선무인 만큼 군향을 조달하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서는 달리 의논할 방도가 없습니다. 도신(道臣)이 청한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6일 신축
간품(看品)하지 못한 서영(西營) 군병을 해당 영관(領官)에게 영솔하여 올려 보내도록 서영 외사(西營外使)에 하유(下諭)하라고 명하였다.
추도기(秋到記)를 근정전(勤政殿)에서 설행하였다. 강(講)에서는 유학(幼學) 김능기(金能基), 표(表)에서는 생원(生員) 윤용선(尹容善)과 유학 조민희(趙民熙)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조문영(趙文永)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9월 7일 임인
증광 별시(增廣別試)를 설행(設行)하였다. 문과(文科) 복시(覆試)에서 장승원(張承遠) 등 33인을 뽑았다.
특별히 미국인 메릴 헨리〔墨賢理 : Merrill, Henry〕 【메리르】 에게 호조 참의(戶曹參議)의 직함을 제수하고, 이어 총세무사(總稅務司)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오늘 신(臣) 등이 러시아 사신(使臣) 베베르〔韋貝 : Waeber, K.〕와 지난해에 조인한 조약 문건을 서로 교환하였습니다."
하였다.
친군 좌영(親軍左營)에서 아뢰기를,
"양주목(楊州牧)에 포(砲)를 설치하는 문제가 과연 급선무에 관계되는 상황에서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더욱 늦출 수 없습니다. 도신(道臣)이 청한 바에서 이미 본도(本道)에 있는 각 궁방(宮房)의 면세전(免稅田) 가운데 1결당 약간씩 이자를 취하는 것으로 말한 이상 이자를 취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규례를 세우지 않을 수 없으니, 1결당 6냥씩 마련해서 군량을 보충하게 한다는 뜻으로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8일 계묘
편전(便殿)에 나아가 러시아 공사(公使) 베베르〔韋貝 : Waeber, K.〕를 접견하였다.
홍철주(洪澈周)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인응(李寅應)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국(金炳國)이 상소하여 치사(致仕)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9월 9일 갑진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의 응제(應製)를 근정전(勤政殿)에서 설행하였다. 부(賦)에서 유학(幼學) 김규영(金奎永)과 민치헌(閔致憲), 표(表)에서 진사(進士) 정리원(鄭履源)과 유학(幼學) 이경직(李耕稙)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9월 10일 을사
김유연(金有淵)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삼가 하교(下敎)에 의거하여 대원군(大院君)을 존봉(尊奉)하는 의식 절차를 대신들과 상의하고 별단(別單)에 써서 들입니다.’라고 아뢰었다.
【1. 가마〔轎子〕는 8사람이 메는 것으로 할 것. 1. 흉배(胸背)는 거북 흉배로 할 것. 1. 품계에 따르는 띠는 푸른 빛깔의 가죽에 붉은 빛깔의 호박으로 할 것. 1. 초선(蕉扇)은 일산(日傘)으로 대신하되 흰 바탕에 푸른 테를 두른 것으로 할 것. 1. 부대부인(府大夫人)의 품계에 따르는 띠는 푸른 빛깔의 가죽에 붉은 빛깔의 호박으로 할 것. 1. 대문 밖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울 것. 1. 대문에 차단봉〔橫杠木〕을 설치할 것. 1. 대문은 습독관(習讀官)들이 윤번(輪番)으로 입직할 것. 1. 대신(大臣)은 소생(小生)이라고 호칭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이하는 소인(小人)이라고 호칭할 것. 1. 조정의 신하들은 전명(傳命)하는 일 이외에는 감히 사적으로 만나보지 못하게 할 것.】
【원본】 26책 22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2책 210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의생활-예복(禮服)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개성 전 유수(開城前留守) 조준영(趙準永)의 보고를 보니, ‘본영(本營)의 포교(捕校) 백경석(白景錫) 등이 적당(賊黨)의 우두머리 6명을 염탐하여 체포하였는데, 공력을 들인 것이 많은 만큼 특례로 표창하여 보답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자진하여 나서서 힘을 내어 적의 우두머리를 체포하였으니,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응당 표창하여 보답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니, 백경석은 외직(外職)에 조용(調用)하고, 김찬(金鑽)은 전후하여 공로를 세운 것이 특히 많아서 여러 차례 수령(守令)의 보고에 오른 만큼 임기 만료가 가까운 변장(邊將) 자리를 빈 자리로 만들어 차임(差任)하여 보내고, 우진복(禹鎭福)은 상가(賞加)하도록 해조(該曹)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11일 병오
내무부사 협판(協辦內務府事) 민응식(閔應植)·민영익(閔泳翊)·이종건(李鍾健)을 모두 상리국 총판(商理局總辦)으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서정순(徐正淳)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신석유(申錫游)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윤병정(尹秉鼎)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국(金炳國)이 재차 상소하여 치사(致仕)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9월 12일 정미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어제 내린 비답을 통하여 이미 다 잘 알았을 것이다. 경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휴양을 하겠다는 생각에 불과하지만 내가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의지하며 믿고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때로 말하면 지금보다 더 급한 때가 없고 부탁을 중히 했던 것으로 말하면 경보다 노련한 사람이 없다. 더구나 경은 훌륭한 정사와 계책으로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숨길 수 없게 되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경이 한번 나오고 한번 물러가는 일은 실로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는 바이니, 내가 어떻게 이처럼 간곡하게 특별히 유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납득하여 다시는 사직하지 말며 더욱 바로잡고 수습하는 책무를 다하여 온 나라 사람들의 기대에 부합되게 하라."
하였다.
9월 13일 무신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건청궁(乾淸宮)에 나아가 미국 대리공사(代理公使) 폴크〔福久 : Foulk, George C.〕 【포크】 를 접견하였다.
이순익(李淳翼)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9월 14일 기유
서형순(徐衡淳)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9월 15일 경술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서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 증광 별시(增廣別試)의 문무과(文武科) 전시(殿試)를 설행하였다. 문과(文科)에서 유치익(兪致益) 등 46명을 뽑고 무과(武科)에서 이민대(李敏大) 등 28명을 뽑았다.
전교하기를,
"이 집안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나온 것은 매우 기특하고 기쁜 일이다. 새로 급제한 정리원(鄭履源)에게 사악(賜樂)하고, 청선 군주(淸璿郡主) 내외의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이 집안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새로 급제한 홍승오(洪承五)에게 사악하고, 익정공(翼靖公 : 홍봉한(洪鳳漢)) 내외의 사판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새로 급제한 윤헌(尹)은 정현 옹주(貞顯翁主)의 종손(宗孫)이다. 급제한 것은 참으로 매우 기쁘고 다행한 일이니, 사악하고, 옹주(翁主) 내외의 사판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새로 급제한 오정근(吳正根)은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종손이다. 이번 과거에 입격한 것은 참으로 기쁘고 다행한 일이니, 사악하고, 공주(公主) 내외의 사판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이 집안의 봉사손(奉祀孫)이 과거에 입격한 것은 매우 드물고 귀한 일이니, 새로 급제한 김용원(金容元)에게 사악하고,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내외의 사판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의 집안에서 과거에 입격한 사람이 나온 것은 참으로 기쁘고 다행한 일이니, 새로 급제한 김석규(金錫圭)에게 사악하고, 부원군 내외의 사판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조 문정공(趙文正公 : 조광조(趙光祖))과 이 문성공(李文成公 : 이이(李珥)) 두 집안에서 과거에 입격한 사람이 나온 것은 드물고 귀한 일이니, 새로 급제한 조종순(趙鍾純)과 이종문(李種文)에게 다같이 사악하고, 두 선정(先正)의 사판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새로 급제한 심구택(沈九澤)은 청릉 부원군(靑陵府院君)의 봉사손(奉祀孫)이니, 사악하도록 하라.
새로 급제한 이석영(李石榮)과 이용태(李容泰)에게 특별히 사악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6일 신해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정한모(鄭翰謨)는 익헌공(翼憲公) 정태화(鄭太和)의 봉사손(奉祀孫)이고, 새로 급제한 이승재(李承載)는 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의 봉사손이며, 새로 급제한 정의묵(鄭宜默)은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봉사손이니, 다같이 사악(賜樂)하도록 하라. 새로 급제한 송종억(宋鍾億)과 이호석(李鎬奭)에게 특별히 사악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우선(尹宇善)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특별히 심응택(沈應澤)을 발탁하여 참판(參判)으로, 이택영(李澤永)을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9월 17일 임자
황해 감사(黃海監司) 조경하(趙敬夏)를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윤용선(尹容善)에게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김병덕(金炳德)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삼았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중국과 조선 간의 육상 및 해상 조약이 체결되어 반포된 지 벌써 4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듣건대 길림 독리상무(吉林督理商務)가 8개월 이내에 화룡욕(和龍峪)으로 온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도 감리(監理)를 차정(差定)하여 일체의 상무(商務)를 처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회령 부사(會寧府使) 서형순(徐珩淳)을 감리관북육로통상사무(監理關北陸路通商事務)로 차하(差下)하여 이조(吏曹)로 하여금 하비(下批)하게 하소서.
경원(慶源)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혼춘(琿春) 관할의 보강(步江) 나루 어귀에는 이미 중국에서 분국(分局)을 추가로 설치하고 독리상무(督理商務)가 관리를 파견하여 관세(關稅)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 지역은 경원과 서로 가까우므로 우리나라에서도 응당 경원 땅에 분국을 설치하고 해당 부사(府使)를 시켜 관할하고 조세를 받도록 하되, 일체의 규정에 대해서는 감리의 명령을 받을 것이며, 매달 세금의 출납 대장도 정리하여 감리에게 보고하면 감리가 일에 따라 안무사(按撫使)에게 보고해서 다시 본 아문(衙門)에 보고가 전달되게 하소서. ‘관북통상사무(關北通商事務)’라는 관방인(關防印 : 공문서의 위조를 막기 위해 찍는 도장)을 전례대로 주조해서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국(金炳國)이 세 번째로 상소하여 치사(致仕)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9월 18일 계축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증광 별시(增廣別試)의 문무과(文武科)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홍순긍(洪淳肯)은 충렬공(忠烈公) 홍명구(洪命耉)의 봉사손(奉祀孫)이고, 새로 급제한 최병진(崔秉鎭)은 증 이조 판서(贈吏曹判書) 최신(崔愼)의 봉사손이며, 새로 급제한 정이섭(丁理燮)은 고(故) 진선(進善) 정시한(鄭時翰)의 봉사손이고, 새로 급제한 조만승(曺萬承)은 강관(講官)의 아들이니, 다같이 사악(賜樂)하도록 하라."
하였다.
새로 급제한 유치익(兪致益)을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로, 성대영(成大永)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모두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정리원(鄭履源)과 조종순(趙宗淳)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김병억(金秉億)과 김용원(金容元)을 부교리(副校理)로, 홍순긍(洪淳肯)과 심구택(沈九澤)을 수찬(修撰)으로, 이용태(李容泰)와 민영달(閔泳達)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모두 중비로 제수한 것이다.
9월 19일 갑인
새로 급제한 이호석(李鎬奭)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다. 특별히 제수한 것이었다. 윤용선(尹容善)과 정의묵(鄭宜默)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송태헌(宋台憲)과 이승재(李承載)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모두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9월 20일 을묘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남정철(南廷哲)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자산부(慈山府)는 순영(巡營)과 병영(兵營)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실상 남쪽과 북쪽을 방어하는 요지입니다. 더구나 그 경내에 있는 자모산성(慈母山城)은 지형이 험하고 성채와 보루가 완전하고 견고합니다. 그리고 창성부(昌城府)는 본래 변방 지대로서 방어사영(防禦使營)을 겸하여 두고 있는데 관할하는 바가 별로 긴요하지 않습니다. 창성부는 옛날대로 단지 변방 지대로서의 역할만 시행하게 하고 방어사영은 자산부로 옮기는 것이 현재의 조건에 알맞을 것 같습니다. 청천강(淸川江) 남북을 통할하는 방도에 대해서도 다같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제정하고 설치한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 도신(道臣)이 진술한 것도 필경 충분히 비교하고 헤아린 바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자산(慈山)에 방어영을 설치하여 남북을 통할하게 하고, 창성은 이전 규례를 복구하여 변방 지대로서의 역할을 시행하게 하는 것이 편리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관방(關防)과 관제(官制)에 관계되는 문제인 만큼 원임 대신(原任大臣), 전조(銓曹)의 관리, 여러 영사(營使)들에게 물어보고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물어볼 필요 없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 연안의 고을에 대해 명색 없는 세금을 거두는 것을 금지하는 일에 대하여 전후로 칙교(飭敎)한 것이 과연 어떠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협잡 무뢰배들이 법을 세운 본의를 생각하지 않고 순전히 사리사욕을 채우기만을 일삼아 혹은 궁방(宮房)에 신고하기도 하고 혹은 경사(京司)에 청탁하기도 하여 마침내 받아들이는 것은 보잘것없고 모두 중도에서 없어지고 만다고 하니, 해를 끼치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선상(船商)이 없어지고 물가가 뛰어오르니, 이것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부터는 궁방이나 경사를 막론하고 모든 새로 만든 각종 세금을 낱낱이 없앨 것이며, 만약 혹 또다시 이전 버릇을 답습하여 강제로 거두어서 폐단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나타나는 대로 잡아다가 형벌을 가한 뒤에 귀양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1일 병진
전라우도 암행어사(全羅右道暗行御史) 심상학(沈相學)을 소견(召見)하였다. 서계(書啓)와 관련하여 무장 전 현감(茂長前縣監) 홍종관(洪鍾觀), 만경 전 현령(萬頃前縣令) 김기두(金箕斗), 전전 현령(前前縣令) 송재영(宋在榮) 등을 죄주었으며, 나주 목사(羅州牧使) 박규동(朴奎東)은 포상하여 가자(加資)하고, 김제 전 군수(金堤前郡守) 조필영(趙弼永)은 승서(陞敍)하였다.
조병필(趙秉弼)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9월 22일 정사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예조 당상관(禮曹堂上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김병시(金炳始),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교익(李喬翼), 참의(參議) 이택응(李宅應)이다.】 하교하기를, "무슨 일로 청대(請對)하였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우리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지금 22년이 되었습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들을 본받아 백성들을 화합하고 나라의 영원한 명운을 기원하고 있으며 지극한 치적으로 명성이 널리 퍼져서 무궁한 아름다움을 불러들이고 경사스런 조짐과 화목한 기운이 천지 사이에 가득히 넘치고 있어 온 세상을 밝게 빛나게 했습니다. 그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은 여러 왕보다 드높고 깊은 인자함과 두터운 은택은 팔방에 두루 빛나고 있어서, 이것은 국가의 정사(正史)나 야사(野史)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엄숙한 궁궐이 거듭 변란을 겪었으니 이는 실로 역사에 유래가 없는 일로서, 실로 우리 전하께서 문무(文武)에 있어 뛰어나게 영묘하심에 힘입어 능히 평정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밝아지고 종사(宗社)를 안정시킴으로써 국가의 명맥이 이로 말미암아 새로워지고 국가의 복록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견고해지게 되었으니, 영원히 세상 만대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臣)들이 그 당시에 앙청(仰請)한 것은 종묘에 고하고 아래로 백성에게 선포하자는 것에 불과하였는데, 사세가 겨를이 없어서 국가의 떳떳한 법을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신들의 성실하지 못한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궁 저하께서 타고난 효성을 지니셨으니 기뻐하고 경축하면서 빛나는 전례를 거행하고자 하는 마음에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온 나라의 만백성들이 그날 일을 돌이켜 생각하고 축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모두 옥첩에 기록하며 영원히 공렬을 드리우기를 원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하늘의 이치로 헤아려보더라도 반드시 시행해야 할 일이고 인정에 구하더라도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옛날에 우리의 열성조에서 큰 공로가 혁혁하여 찬양하고 표창할 만한 것이 있으면 여러 신하들이 존호(尊號)를 올리게 하여 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지 못했던 적이 없었던 것은 대개 하늘의 커다란 업적과 훌륭한 덕을 받들어 조종이 말없이 이끌어 도와 준 것에 대해 널리 선양하기 위해서입니다. 더구나 우리 전하의 크고 위대한 공렬은 전에 비하여 훌륭하시니 오늘 신들이 청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감히 우리 나라 《가례(家禮)》에서 일찍이 시행했던 예로써 서로 거느리고 와서 우러러 번거롭게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속히 유음(兪音)을 내려 주소서." 하고, 김홍집이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2기(紀) 동안에 공덕이 높고 커서 무엇으로 이름붙일 수가 없습니다. 지나간 수년 이래로 여러 차례 어려운 변란을 겪었지만 종사가 다시 안정되고 천명(天命)이 새로워지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지나간 역사의 기록 가운데에도 있어본 적 없는 훌륭하고 커다란 공적이었습니다. 우러러 받들고자 하는 신민들의 마음에 있어 그 누구인들 말할 수 없는 존경으로 그 만분의 일이라도 칭송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신들이 요청하는 것은 바로 온 나라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견입니다. 더구나 우리 동궁 저하께서는 훌륭한 효심을 하늘에서 타고나셨으니 드러내어 찬양하자고 하는 정성이 더욱 마땅히 배나 더하실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유음을 내리시어 굽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따르소서." 하고, 김병시가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성스러운 문무의 자질을 타고나시어, 능히 열성조의 공렬을 빛내고 하늘의 큰 명〔景命〕을 맞이하여 이으셨습니다. 그 밝음은 해와 달처럼 빛남에도 정사를 아침부터 밤늦도록 부지런히 하시고 지극한 덕의 향기가 멀리 미침에도 큰 교화가 성하여 두루 흡족하였습니다. 난리를 평정하여 다시 견고함을 회복하였으니 그 큰 공로와 위대한 업적이 높고 많아서 백성들이 능히 무엇이라 이름붙이지 못하고, 사책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을 만들어 그 만분의 일의 존경이나마 나타내는 것은 떳떳한 법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일이고 여러 사람들의 정리에 있어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동궁 저하께서 지극한 효심과 이를 경축하자고 하는 정성으로 훌륭한 업적을 드러내어 널리 알리고 성대한 전례로 훌륭하게 장식하려고 도모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특별한 공적이 있으면 반드시 특별한 명호(名號)를 받게 마련이며 무궁한 기초를 정한 경우에는 반드시 무궁한 아름다운 명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신들이 정하는 것은 어디에 내세우더라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고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시어 속히 유음을 내려주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경들은 이일로 청대하였는가? 연전에 겪은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대개 내가 변변치 못한 덕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무슨 공덕이 있다고 문득 이것을 의논하는 것인가? 내가 경들에게 기대한 것도 전혀 아니고 또 경들이 나에게 진달할 것도 아니다. 돌아보건대 급선무는 서로 권면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며 이것만 하는 데에도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데 이런 당치 않은 일을 들어서 말하다니 내가 부끄러운 생각이 들고 이어 매우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경들은 헤아리고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큰 덕을 지닌 사람이 반드시 그에 걸맞은 이름을 얻는 것은 삼대(三代)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습니다. 임금에게 공렬이 있으며 공렬을 기록하거나 선양하고 금보와 옥책을 만들어 영원히 무궁토록 전하는 것이니, 이를 일러 나라의 큰 전례(典禮)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은 막을 수 없고 훌륭한 법은 반드시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니 신들이 여기서 비록 청하지 않으려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두터이 도와주고 조종(祖宗)이 묵묵히 도와서 성상의 신무(神武)를 널리 펴게 하고 능히 큰 공렬을 이루도록 해서 큰 천명이 새로워지고 만억의 기반이 더욱 공고해졌으니, 전하께서 비록 겸양하는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여도 사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홍집이 아뢰기를, "하교의 말씀을 이처럼 겸양의 뜻으로 하시어 스스로 거룩함으로 자처하지 않으시니 훌륭한 덕이 더욱 빛납니다. 신은 진실로 매우 우러러 공경하며 사모하여 받들고 그 하교를 순종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지만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그에 걸맞은 이름을 얻는다는 말은 옛날 성현의 교훈이며, 또한 우리 조정에서도 누누이 시행해왔던 예법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성의를 더하여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더 체념(體念)하시고 생각해서 힘써 따르십시오." 하고, 김병시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겸손한 마음으로 자처하시면서 태평한 시점에 행하는 의식을 시행하지 않으려고 하시니 거룩하신 덕이 빛납니다. 그러나 완염(琬琰)에 간직하고 간책에 기록하는 것은 선인의 일을 이어받아 후세를 가르쳐 이끌기 위한 것이며 우리 조종의 떳떳한 전범이고 모든 사람들의 큰 바람입니다. 성상께서 비록 자처하지 않는다고 해도 합당한 이름은 반드시 얻게 되는 법이므로 전하께서 사양하실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인데, 한번 허락하시는 명을 아직껏 아끼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우울해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힘써 도량과 겸손의 마음을 돌리시어 인정과 예절을 따르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렇게 아뢰는 말을 들으니 실로 경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 수 있으나 내 마음에는 더욱 부끄러운 바가 있다." 하였다. 심순택 등이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그래도 윤허하지 않자, 심순택 등이 아뢰기를, "연석(筵席)은 체모가 엄격하니 누누이 번거롭게 한다는 것도 송구스러운 일이므로 물러가서 제재(諸宰)들과 빈청(賓廳)의 계(啓)로 앙청하겠습니다." 하였다.
【원본】 26책 22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11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하교하기를,
"무슨 일로 청대(請對)하였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우리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지금 22년이 되었습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들을 본받아 백성들을 화합하고 나라의 영원한 명운을 기원하고 있으며 지극한 치적으로 명성이 널리 퍼져서 무궁한 아름다움을 불러들이고 경사스런 조짐과 화목한 기운이 천지 사이에 가득히 넘치고 있어 온 세상을 밝게 빛나게 했습니다. 그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은 여러 왕보다 드높고 깊은 인자함과 두터운 은택은 팔방에 두루 빛나고 있어서, 이것은 국가의 정사(正史)나 야사(野史)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엄숙한 궁궐이 거듭 변란을 겪었으니 이는 실로 역사에 유래가 없는 일로서, 실로 우리 전하께서 문무(文武)에 있어 뛰어나게 영묘하심에 힘입어 능히 평정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밝아지고 종사(宗社)를 안정시킴으로써 국가의 명맥이 이로 말미암아 새로워지고 국가의 복록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견고해지게 되었으니, 영원히 세상 만대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臣)들이 그 당시에 앙청(仰請)한 것은 종묘에 고하고 아래로 백성에게 선포하자는 것에 불과하였는데, 사세가 겨를이 없어서 국가의 떳떳한 법을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신들의 성실하지 못한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궁 저하께서 타고난 효성을 지니셨으니 기뻐하고 경축하면서 빛나는 전례를 거행하고자 하는 마음에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온 나라의 만백성들이 그날 일을 돌이켜 생각하고 축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모두 옥첩에 기록하며 영원히 공렬을 드리우기를 원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하늘의 이치로 헤아려보더라도 반드시 시행해야 할 일이고 인정에 구하더라도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옛날에 우리의 열성조에서 큰 공로가 혁혁하여 찬양하고 표창할 만한 것이 있으면 여러 신하들이 존호(尊號)를 올리게 하여 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지 못했던 적이 없었던 것은 대개 하늘의 커다란 업적과 훌륭한 덕을 받들어 조종이 말없이 이끌어 도와 준 것에 대해 널리 선양하기 위해서입니다. 더구나 우리 전하의 크고 위대한 공렬은 전에 비하여 훌륭하시니 오늘 신들이 청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감히 우리 나라 《가례(家禮)》에서 일찍이 시행했던 예로써 서로 거느리고 와서 우러러 번거롭게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속히 유음(兪音)을 내려 주소서."
하고, 김홍집이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2기(紀) 동안에 공덕이 높고 커서 무엇으로 이름붙일 수가 없습니다. 지나간 수년 이래로 여러 차례 어려운 변란을 겪었지만 종사가 다시 안정되고 천명(天命)이 새로워지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지나간 역사의 기록 가운데에도 있어본 적 없는 훌륭하고 커다란 공적이었습니다. 우러러 받들고자 하는 신민들의 마음에 있어 그 누구인들 말할 수 없는 존경으로 그 만분의 일이라도 칭송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신들이 요청하는 것은 바로 온 나라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견입니다. 더구나 우리 동궁 저하께서는 훌륭한 효심을 하늘에서 타고나셨으니 드러내어 찬양하자고 하는 정성이 더욱 마땅히 배나 더하실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유음을 내리시어 굽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따르소서."
하고, 김병시가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성스러운 문무의 자질을 타고나시어, 능히 열성조의 공렬을 빛내고 하늘의 큰 명〔景命〕을 맞이하여 이으셨습니다. 그 밝음은 해와 달처럼 빛남에도 정사를 아침부터 밤늦도록 부지런히 하시고 지극한 덕의 향기가 멀리 미침에도 큰 교화가 성하여 두루 흡족하였습니다. 난리를 평정하여 다시 견고함을 회복하였으니 그 큰 공로와 위대한 업적이 높고 많아서 백성들이 능히 무엇이라 이름붙이지 못하고, 사책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을 만들어 그 만분의 일의 존경이나마 나타내는 것은 떳떳한 법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일이고 여러 사람들의 정리에 있어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동궁 저하께서 지극한 효심과 이를 경축하자고 하는 정성으로 훌륭한 업적을 드러내어 널리 알리고 성대한 전례로 훌륭하게 장식하려고 도모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특별한 공적이 있으면 반드시 특별한 명호(名號)를 받게 마련이며 무궁한 기초를 정한 경우에는 반드시 무궁한 아름다운 명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신들이 정하는 것은 어디에 내세우더라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고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시어 속히 유음을 내려주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경들은 이일로 청대하였는가? 연전에 겪은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대개 내가 변변치 못한 덕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무슨 공덕이 있다고 문득 이것을 의논하는 것인가? 내가 경들에게 기대한 것도 전혀 아니고 또 경들이 나에게 진달할 것도 아니다. 돌아보건대 급선무는 서로 권면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며 이것만 하는 데에도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데 이런 당치 않은 일을 들어서 말하다니 내가 부끄러운 생각이 들고 이어 매우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경들은 헤아리고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큰 덕을 지닌 사람이 반드시 그에 걸맞은 이름을 얻는 것은 삼대(三代)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습니다. 임금에게 공렬이 있으며 공렬을 기록하거나 선양하고 금보와 옥책을 만들어 영원히 무궁토록 전하는 것이니, 이를 일러 나라의 큰 전례(典禮)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은 막을 수 없고 훌륭한 법은 반드시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니 신들이 여기서 비록 청하지 않으려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두터이 도와주고 조종(祖宗)이 묵묵히 도와서 성상의 신무(神武)를 널리 펴게 하고 능히 큰 공렬을 이루도록 해서 큰 천명이 새로워지고 만억의 기반이 더욱 공고해졌으니, 전하께서 비록 겸양하는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여도 사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홍집이 아뢰기를,
"하교의 말씀을 이처럼 겸양의 뜻으로 하시어 스스로 거룩함으로 자처하지 않으시니 훌륭한 덕이 더욱 빛납니다. 신은 진실로 매우 우러러 공경하며 사모하여 받들고 그 하교를 순종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지만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그에 걸맞은 이름을 얻는다는 말은 옛날 성현의 교훈이며, 또한 우리 조정에서도 누누이 시행해왔던 예법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성의를 더하여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더 체념(體念)하시고 생각해서 힘써 따르십시오."
하고, 김병시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겸손한 마음으로 자처하시면서 태평한 시점에 행하는 의식을 시행하지 않으려고 하시니 거룩하신 덕이 빛납니다. 그러나 완염(琬琰)에 간직하고 간책에 기록하는 것은 선인의 일을 이어받아 후세를 가르쳐 이끌기 위한 것이며 우리 조종의 떳떳한 전범이고 모든 사람들의 큰 바람입니다. 성상께서 비록 자처하지 않는다고 해도 합당한 이름은 반드시 얻게 되는 법이므로 전하께서 사양하실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인데, 한번 허락하시는 명을 아직껏 아끼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우울해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힘써 도량과 겸손의 마음을 돌리시어 인정과 예절을 따르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렇게 아뢰는 말을 들으니 실로 경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 수 있으나 내 마음에는 더욱 부끄러운 바가 있다."
하였다. 심순택 등이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그래도 윤허하지 않자, 심순택 등이 아뢰기를,
"연석(筵席)은 체모가 엄격하니 누누이 번거롭게 한다는 것도 송구스러운 일이므로 물러가서 제재(諸宰)들과 빈청(賓廳)의 계(啓)로 앙청하겠습니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주역(周易)》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총명하고 예지하고 신무(神武)하며 불살(不殺)한다.’라고 하였고, 《모시(毛詩)》의 〈상송편(商頌編)〉에는 이르기를, ‘현왕(玄王)이 굳셈으로 다스린다.’ 하였으며,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하늘이 바로 왕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었다.’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의 공덕은 실로 이 세 가지에 있습니다. 연전의 역적 반란은 바로 천고 이래로 없었던 변고입니다. 종사(宗社)의 안위가 눈 깜짝할 순간에 매여 있었음에도 전하께서는 큰 말소리를 내거나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잡아 죽이고 평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더욱 공고해지고 해와 달이 더욱 빛나게 되니 나라 안의 모든 백성들이 기뻐서 춤추며 서로 고하기를, ‘「신령한 무공으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神武不殺〕」, 「굳세게 다스린다〔桓撥〕」, 「용기와 지혜가 있다〔勇智〕」라고 하는데 우리 임금께서 이것을 다 겸비하셨다.’ 하였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그 덕은 천지에 짝하여 끝이 없고 그 공은 숭산과 태산을 쌓더라도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만백성들의 마음은 막을 수 없고 백관(百官)의 말은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격식을 갖춘 의식이 종묘(宗廟)에 고하고 팔방에 교문(敎文)을 반포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던 것은 대개 경황이 없어서였으며 또한 후일을 기다리자는 것이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은 편안하고 화기가 조용해져서 온화한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며 민정은 노래하고 칭송하는 가운데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늘을 본뜨고 해를 그려서 그 덕을 형상하고, 금과 옥으로 장식하여 공로를 기념해서 성인(聖人)이 쉬지 않고 노력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루신 공렬을 선양하고 조종조에서 열어서 인도해 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 만세토록 변함없는 의리입니다. 연석(筵席)에서 신(臣)들의 어리석은 마음을 대략 아뢰고 지금 또 서로 거느리고 와서 호소하여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힘써 겸허한 마음을 돌리시고 굽어 모든 사람들의 똑같은 의논을 따르시어 속히 윤허하는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답하시기를 천만 번 축원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방금 전 연석에서 이미 대면하여 나의 마음을 다 말하였으니 나의 생각을 거의 헤아렸으리라 바랐는데 또 어찌하여 연명으로 청하여 일을 크게 벌이는 데 이른 것인가? 내가 무슨 덕으로 다스린 정치가 있어서 이런 조치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런 실상이 없는데도 그 이름을 차지하려 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일도 아닐 뿐더러 도리어 허물을 더하게 되는 것이다. 경들이 이처럼 누누이 아뢰는 것은 진실로 나를 돕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용렬하게 부끄러운 탄식을 더하게 하는 일이니 다시는 듣고 싶지 않다. 요청한 것을 윤허하지 않겠다."
하였다.
전라좌도 암행어사(全羅左道暗行御史) 이만교(李萬敎)를 소견(召見)하였다.
서계(書啓)와 관련하여 전 능주 목사(前綾州牧使) 김익성(金益成)은 죄주고 전 광주 목사(前光州牧使) 송기로(宋綺老), 옥과 현감(玉果縣監) 이만익(李萬翼), 전 현감(前縣監) 민영숙(閔泳肅)에게 승서(陞敍)를 시행하였다.
9월 23일 무오
빈청(賓廳)에서 다시 아뢰니, 비답하기를,
"이미 그런 사실이 없고 또 그럴 때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날마다 번거롭게 구는 것인가? 나는 듣고 싶지 않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세 번째로 아뢰니, 비답하기를,
"어찌 이다지도 헤아리지 못하는가? 임금과 신하 사이에 귀중한 것은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소중하다. 내가 마음속으로 불가하다고 여기면 경들도 마땅히 그 불가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공연히 수응(醻應)하는 번거로움에 이르렀으니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빈청(賓廳)의 여러 대신들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요즘 경 등은 걸핏하면 여러 사람들의 심정이니 떳떳한 법이니 하는데, 이 조치는 어찌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편안하여 어진 업적과 공렬이 있은 다음에야 생각하며 의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식견도 부족하고 사리에 어두운데 외람되게 어렵고도 중대한 자리를 계승하였으니, 능히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여 날마다 여러 가지 일이 좀스럽고 자질구레해지며 이로 인해 백성들이 곤궁하고 피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고 있으며 바야흐로 또한 백성들을 진작시키고 구제할 방책에 대하여 급급해 하고 있으니, 무릇 가까이에서 나를 받드는 신하들은 마땅히 보좌하여 돕고 바로잡아 구제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근심하며 애쓰는 나의 마음을 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에 시급하지도 않고 실속도 없는 일을 가지고 태평한 시대처럼 분식(賁飾)하고자 하니, 그러면 나라와 백성들이 이미 잘 다스려지고 이미 편안해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 무슨 이름할 만한 덕이 있고 기록할 만한 공적이 있다는 것인가? 나는 여러 사람들의 심정이 반드시 영원한 도모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고, 떳떳한 법은 현실에 기초해서 유용한 이치를 찾는 것을 귀중히 여긴다고 말하는 바이다. 또한 이에 널리 알리는 것이니 경 등은 모름지기 헤아리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행 판중추부사(行中樞府判事) 김홍집(金弘集), 행 판중추부사 김병시(金炳始)가 부주(附奏)하기를,
"신(臣)들이 아뢰기도 하고 계문(啓聞)도 하면서 여러 날 동안 번거롭게 한 것이 어찌 감히 예법에도 없는 예를 가지고 이에 청해서는 안 되는 청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넘길 수 없는 것은 떳떳한 법이고 막을 수 없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모든 임금들이 바꾸지 못한 규례이고, 온 나라 사람들이 한결같이 원하는 것을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시니, 신들이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이에 서로 이끌고 와서 연명으로 하소연하고 윤허를 기다리는 즈음에 사관(史官)이 와서 성상의 유시를 전하였는데, 신들은 백배 절하고 받들어 읽고는 서로 더욱 공경하며 우러러 사모하였습니다. 겸양으로 길러주는 덕과 근심하여 애쓰시는 뜻이 말씀 밖에 흘러 넘쳤으니, 스스로 성인으로 자처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크고 융성하며 성대한 조치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복하여 간곡하게 타이르시고 정중하게 말씀하시면서 이미 편안한 것을 가지고 편안함을 도모하시니, 큰 덕이 더욱 빛나서 바르게 천추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들은 드러내어 선양하고자 하는 소원이 더욱 간절하기 때문에, 비록 삼가 물러가라는 명을 받았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면 감히 물러나지 못하겠습니다. 몹시 답답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감히 명을 어기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도 잊게 되었으니 오직 땅에 엎드려 죽을 죄를 지을 뿐입니다."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예조(禮曹)의 당상(堂上官)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경들을 입시하게 한 것은 경들이 연일 간청하는 바가 있어서 직접 면전에 하유하기 위해서이다. 연전에 있었던 일은 실로 황천과 우리 조종의 영령들께서 말없이 안정시켜주고 묵묵히 도와준 덕분이니 나에게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신들이 청대를 구하여 연석(筵席)에서 간청하기도 하고, 서로 이끌고 와서 빈계(賓啓)를 하기도 하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똑같이 원하는 바를 가지고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만두지 않으려 하였는데, 전후에 내리신 비교(批敎)에는 겸양의 뜻만 나타내시고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특별히 별유(別諭)를 내려 거듭 그 입장을 반복하시었고, 또 앞자리에 나오도록 명하시고는 매우 친절하게 대면하여 타이르시기를 이처럼 간곡하고 진지하게 하셨습니다. 깊이 우려하시고 겸양하시는 성상의 마음을 신(臣)들이 흠송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우리 전하의 거룩하신 덕과 우뚝한 공적은 천고에 경쟁할 사람이 없습니다. 신들이 기어코 드러내어서 표장(表章)하자고 하는 것은 바로 천리(天理)이며 나라의 법입니다. 더구나 우리 예성(睿聖)께서 대내(大內)에서 아뢰고 청하였다는 말을 듣고 우리 동방에 사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귀가 솔깃해가지고 서로 경하하였습니다.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자애로운 전하께서는 어찌 기뻐하며 극진히 따르지 않습니까?"
하고, 판부사(判府事)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신들이 다시 잠깐의 틈을 빌려서 바야흐로 오랫동안 지성으로 바라던 바를 아뢰고 허락을 얻고자 하였으나, 겸손하게 낮추시는 하교를 받들게 되니 갈수록 황공하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 일은 바로 마땅히 시행해야 할 떳떳한 법이고 막을 수 없는 여러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거듭 깊이 생각하시고 속히 처분을 내려줄 것을 천만 번 축원합니다."
하고, 판부사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대요(大堯)와 같은 겸양의 덕을 우러러 공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끝내 윤유(允兪)를 내리지 않으시어 인정과 예절을 펼 수 없으니 신들이 어떻게 답답한 마음을 가눌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공과 덕은 나에게서 논할 것이 아니다. 내가 실상 덕이 없어서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롭게 되었는데, 이제 어찌 잠시 요행으로 얻은 안정을 가지고 도리어 공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덕을 지니시고도 그 덕이 있다고 여기지 않으시며 공이 있으면서도 그 공이 있다고 자처하지 않으시니, 이것이 ‘겸허하면 형통하게 된다〔謙亨〕’는 것입니다. 전하의 신무(神武)에 힘입어 거의 위태롭게 되었던 종사가 다시 안정되었는데, 신들이 어찌 전하께서 덕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공이 있다고 자처하지 않는다고 하여 마침내 그 신무함과 커다란 공격을 선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실상 내가 겸양하는 것이 아니며, 경 등의 지극히 간청하는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과 왕대비전(王大妃殿)께서 환궁하셨던 때의 일이 비록 이미 일 년이 되었지만 밤마다 늦도록 잠 못 이루며 나도 모르게 마음이 쓰리고 뼈가 오싹해 오는데 오히려 차마 나의 공덕을 말할 수 있겠으며, 또 어찌 나의 훌륭한 칭호에 대하여 논할 수 있겠는가? 내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우리 자성께서 깊은 사랑과 지극한 덕으로 덮어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 경 등이 연석에서 청하고 빈청에서 아뢴 것을 굳이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은 위로 자성을 받들어야 했기 때문에 지금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께서 환궁하신 한 돌을 맞이하여 의식을 갖추어 경사를 치르는 일은 더욱 인정과 예절에 있어서 합당하겠지만 만약 명호를 가지고 나를 위하여 청한다면 옳지 않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날을 돌이켜 생각하시고는 사양하며 자처하지 않으시고 성상께서 스스로 결단하시어 단지 양전께서 환궁하신 일에 대해서만 장차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고자 하시니, 이는 큰 성인의 바다와 같이 크나큰 효성입니다. 무릇 하늘 아래 사는 사람으로서 그 누구인들 공경하며 사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전하의 덕업과 공렬을 능히 드러내어 선양하지 않는다면 전례에 있어서 커다란 흠결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국가에 근심이 없고 중외(中外)가 편안하고 고요하다면 비록 일컬을 만한 공덕이 없더라도 간혹 성대한 전례를 의논하여 태평한 세상의 훌륭함을 장식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국가의 형세가 날로 쪼들려가고 외국의 모욕도 아직 물리치지 못했는데 어느 겨를에 더불어 칭호를 의논하겠는가? 단지 종묘에 고하고 팔방에 선포하는 일만 시행하여 우리 자성의 마음을 위로하여 드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누누이 계속되는 하교를 연이어받들고 보니, 성상의 뜻이 정하여진 바가 있어 겸양하는 뜻이 더욱 확고합니다. 심지어 어렵고 근심이 많은 때라고 하여 태평하고 즐거운 시절에 행하는 전례는 허락하지 않고, 단지 종묘에 고하고 팔방에 선포하는 일만 행하게 하셨으니, 거룩한 전하의 효성이 더욱 빛납니다. 신들이 여기에서 또다시 번거롭게 해드린다면 도리를 무너뜨리는 일이므로 부득이 순종함으로써 훌륭한 덕을 드러내고자 합니다만, 그러나 우리 동궁 저하께서 빌며 축원하던 끝에 서운함과 섭섭한 마음이 또한 마땅히 어떠하시겠습니까? 무릇 머리를 맞대고서 전하의 교지를 기다리고 있는 신하와 백성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답답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김홍집이 아뢰기를,
"성상의 뜻이 확고하게 정해져서 끝내 윤유(允兪)를 아끼시고 환궁하신 한 돌이 되는 기념을 단지 종묘에 고하고 팔방에 선포하는 데 그치게 하시니, 스스로 자만하고 잘난 체하지 않는 덕과 어렵고 위태로운 때를 잊지 않으시려는 뜻을 일거(一擧)에 모두 이루셨다고 하겠습니다. 도리로 헤아려 보면 감히 순종하지 않을 수 없으나 매일 연명으로 호소하여 현호(顯號)를 힘써 올리자고 하는 마음에 있어 매우 답답함을 이루 형용하여 아뢸 수가 없습니다."
하고, 김병시가 말하기를,
"연이어 내리신 비답을 삼가 받들고 보니, 백성들과 나라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가지고 반복하여 간곡하게 타이르시고 정성스럽고 진지하게 하유하셨습니다. 이제 내린 하교를 들으니 우러러 자전(慈殿)을 위로하는 것으로 단지 축하하는 의식만을 거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성스러운 덕성과 성스러운 효성이 더욱 빛나므로 공경하고 사모함이 이루 말할 수 없으나,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바라는 마음에 있어서는 오히려 미진한 바가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종묘에 고하고 팔방에 선포하는 전례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만약 자성께서 위에 계시지 않았다면 윤허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뮐렌도르프〔穆麟德 : Möllendorf, Paul George von〕가 이미 세사(稅司)의 자리에서 체직되었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뮐렌도르프의 직책과 이름이 모두 감하(減下)되었으니 우리 나라의 일에 관해 책임이 없습니다. 이치상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것이나, 아직 그의 거취에 대해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뮐렌도르프가 종전에 공로가 있기는 하였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메릴 헨리〔墨賢理〕는 뮐렌도르프에 비해 녹봉을 더 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주는 월봉(月俸) 외에 북양(北洋)에서 별도로 보태준다고 하니 그 역시 고맙게 여길 만하다."
하였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메릴 헨리는 이미 우리를 위하여 일을 처리해 주고 있는데 중국에서 지급해 주기를 바란다면 매우 부당하며 또한 나라의 체통에 관계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서로(西路)의 전선(電線) 가설이 장차 준공을 보게 될 것인데 아직 손상되거나 파괴되는 폐단이 없다고 하니 우리 나라의 민심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순박하고 예스러움이 있는 듯 하여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이 백성들은 요(堯) 순(舜) 때의 백성들과 같습니다. 듣건대 서로에 전선을 가설하는 데서 목료(木料)를 운반해 옮기느라 백성에게 큰 폐단이 되었다고 하는데, 다행히 이미 기일에 맞추어 조달해서 모았으며 또한 다른 염려가 없다고 합니다. 일을 추진함에 있어 법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민정(民情)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일본 사람들은 이 전선이 부산(釜山)의 해저 전선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여러 번 외아문(衙門)에 힐책하며 말하기를, ‘만일 부산으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육로의 전선로를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마땅히 매년 배보(賠補)를 의논하게 될 것이니 이 일을 대신들에게 자문하여 결정해 달라.’고 하였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부산의 해저 전선에 관한 조약을 체결할 때에 일본 공사(公使)가 말하기를, ‘이후에 만일 북양(北洋)을 통하여 전선을 가설한다면 이는 이익을 다투어 대항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증빙할 만한 문건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서로 논란을 하게 된 것이니, 부산으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육로의 전선을 저들이 크게 욕심내고 있고 또 일마다 하나라도 중국에 양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협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렇다. 만일 남로(南路)의 육로 전선을 가설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저들이 차관(借款)을 주겠다고 한다."
하였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차관을 주는 것은 저들로서는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찌 갑자기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일을 막론하고 앞으로 있을 손해와 이익을 잘 따져서 시행해야만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빈청(賓廳)의 요청이 이와 같이 견고하여 내가 굳이 거절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실이 없는데 헛된 이름만 무릅쓰고 차지하는 일을 내가 하고 싶지 않다. 더구나 지금 백성들과 나라의 근심이 한창 절박한데 어느 겨를에 성대한 전례(典禮)를 논하겠는가? 우러러 자전(慈殿)의 마음을 위로하고 굽어 여러 사람들의 심정에 따라 참작하고 절충해서 이제 막 연석(筵席)에 올라온 여러 신하들에게 직접 하유하였다. 종묘에 고하고 팔방에 선포하는 일과 축하하는 절차를 마련해서 들일 것에 대하여 예조(禮曹)에 분부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진하(陳賀)하는 날에 치사(致詞)와 전문(箋文)과 안팎 옷감〔表裏〕을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과 왕대비전(王大妃殿)에 올려서 나의 기쁜 마음을 펴고자 하니 제반 의식 절차를 예조에서 마련하여 들여오게 하라."
하였다.
전 지평(前持平) 신규성(愼奎晟)이 상소하여 휘호(徽號)를 올리게 하여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이것을 진달하는 것은 어떠한 도리에 근거한 것인가? 내가 듣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대가 응당 해야 할 것도 아니다."
하였다.
김유연(金有淵)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9월 24일 기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남일우(南一祐)의 장계를 보니, 면화 농사가 흉년든 상황을 갖추어 자세히 진달하고 나서, ‘각영(各營)과 각 아문(衙門)의 군포(軍布)·신포(身布) 및 악공(樂工)의 보포(保布)를 모두 순전히 돈으로 대봉(代捧)하게 하고, 친군영(親軍營)의 포보(布保)를 5분의 4에 한해서 대전(代錢)하게 할 것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건조한 곳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 장마를 만나서 손상당하게 되는 것은 형세가 그렇습니다. 만약 전 지역이 모두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군수(軍需)가 바닥이 났으니 과연 의논을 내는 것이 어렵겠지만 백성들의 어렵고 궁색함도 역시 구휼해야 하겠습니다. 병조(兵曹)와 각영에 대해서는 5분의 1에 한해서 대신 납부하도록 허락해주고, 각사(各司)의 것을 순전히 돈으로 바치는 것과 포보의 경우에는 사체가 더욱 각별하니 본색(本色)으로 준하여 바치도록 분부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6일 신유
전교하기를,
"어제 건춘문(建春文)의 문고원외랑(門考員外郞)·수문장(守門將)과 사약(司鑰)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하여금 엄히 신문하고 들어오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9월 27일 임술
김구현(金九鉉)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용직(李容直)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조익영(趙翼永)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홍병덕(洪秉悳)을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심상훈(沈相薰)의 장계(狀啓)를 보니, ‘도(道) 안의 각읍(各邑)에서 아직 거두어들이지 못한 미태(米太)와 목변(木邊)을 돈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청한 조항에 관해, 일체 어사(御史)가 마련한 대로 마땅히 납부해야 할 수효를 성책(成冊)하여 올려보내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별도로 어사를 파견한 것은 바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묵은 것을 말끔히 추쇄(推刷)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본색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참작하여 돈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허락해 준 뒤에야 공화(公貨)를 청산할 수 있으며 고을 형편도 마땅히 조금 펴지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도에서 성책하여 보고한 대로 납부하도록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8일 계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윤자승(尹滋承)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김영수(金永壽)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9월 29일 갑자
심이택(沈履澤)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방외 유생(方外儒生) 홍재성(洪在誠)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을 문묘(文廟)에 합사(合祠)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현인(賢人)을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하는 일을 어떻게 그대들의 말을 기다려서 하겠는가? 진달한 문제를 갑자기 윤허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체(事體)가 지극히 신중하고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잘 알고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9월 30일 을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병조(兵曹)에서, ‘건춘문(建春文)의 자물쇠를 절반 잠근 문제와 관련하여 삼가 하교대로 입직(入直) 수문장(守門將) 이기주(李起周), 문고원외랑(門考員外郞) 신백(申栢), 사약(司鑰) 박호식(朴浩植) 등을 초치하여 엄히 신문하였더니, 모두 공술하기를, 「열쇠는 승정원(承政院)에 있었습니다. 자물쇠를 채운 것이 사고가 난 것을 애초에 몰랐다가 적간(摘奸)할 때에 현탈(顯頉)되었으니 매우 황송하여 우러러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손히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금문에 자물쇠를 채우는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고 이와 같이 착오를 범했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모두 다 우선 태거(汰去)시키고 병조(兵曹)의 낭관(郞官)과 수문장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엄히 신문하게 하고 사약(司鑰)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엄중히 신문하게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