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23권, 고종23년 1886년 9월
9월 1일 신묘
우의정(右議政) 김유연(金有淵)에게 재차 하유하기를,
"몹시 기다리던 끝에 보낸 편지를 보니 평시에 기대하던 것과 몹시 어긋나서 크게 실망하였다. 경은 오직 여러 대에 걸쳐 충성을 다해온 집안으로서 대대로 훌륭한 업적을 계승하여왔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과 밝은 계책으로 보좌하는 업적은 마땅히 그 계승한 것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경의 집안 일이며 경의 집안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론을 들은 것이니 공의(公議)에 속하는 것이고 충심(衷心)으로 결정한 것이니 내가 선정한 것이다. 내가 이미 성심으로 경을 오게 한 것이니, 경이 어떻게 겉치레를 숭상하여 나를 멀리할 수 있겠는가?
또한 경은 지금이 어떠한 때라고 생각하는가? 나라의 형세는 매달아 놓은 깃발처럼 흔들려 의지할 데가 없고, 백성들의 형편은 마치 허물어져가는 집처럼 위태로워서 보수할 수가 없다. 언제 어떻게 될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것은 내가 덕이 없고 임금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만 또한 순전히 어떻게 인도하고 보좌하는 데 달려 있다.
급히 부지하려면 반드시 훌륭한 인재가 있어야 하는데, 경의 높은 덕망과 훌륭한 계책은 내가 신임하는 것이고 자랑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에만 그런 것이 아니지만 이번의 조치도 이미 늦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정승을 선정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나 한 사람만이 경을 사사롭게 해서가 아니고 바로 온 나라 사람들이 그러하도다. 그러니 경은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거나 듣지 말고 빨리 나오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경은 노숙한 사람으로서 응당 깊이 이해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니, 반드시 선뜻 마음을 돌려 곧 구구한 기대를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일 임진
단천부(端川府)의 표호(漂戶)와 퇴호(漂·頹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9월 3일 계사
우의정(右議政) 김유연(金有淵)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듣건대 왕정(王政)에서 관리를 임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관리의 도리는 정승을 임명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에 계책을 물을 사람이 부족하면 거북점을 쳐서 결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3대(三代)가 훌륭한 시대라고 하더라도 어렵게 여겨 삼가한 것이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더구나 오늘날 국가의 사세로 볼 때 어떻게 적임자를 선정하지 않고 구차하게 인원만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만약 주관(周官) 3공(三公)과 같은 사람을 오늘날 구하려 한다면 물론 쉽게 얻을 수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당면한 일을 알고 시국을 수습할 인재가 세상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전하가 보좌하여 줄 사람을 얻어서 고문에 응하게 할 것을 생각한다면 덕망과 재주와 계책을 지니고 있는 적임자가 없는 것을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명령을 내려 뽑은 이름이 바로 조정에서 하나도 취할 만한 것이 없고 전혀 적임자가 못 되는 신과 같은 미천한 자였으니, 바로 이를 통하여 현행 정사를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신이 놀라 허둥지둥하며 두려워 떠는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도움을 구하여 쓰러져가는 상황을 부지하려고 하는 전하의 계책을 놓고 볼 때 또한 매우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여기에서 전하와 국사를 위해서 한밤중에 벽에 기대어 더욱 근심하여 마지않게 됩니다.
아! 신은 집안의 후예로서 대대로 국은(國恩)을 받은 것이 하늘과 같이 끝이 없는데, 신 자신에 대해 말한다면 편벽되게 더 은혜를 많이 입어 43년간 벼슬살이를 하면서 중앙에서는 3번이나 전형(銓衡)을 맡아보고, 외람되게 재부(財賦)를 맡아보는 자리에도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두 번 함경 감사(咸鏡監司)를 지내고 안무사(安撫使)로도 임명되었습니다. 그동안 이미 임금의 명령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고 결함을 숨길 수 없게 되며 언제나 부끄러운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데 신은 지금 늙은 몸이어서 근력과 정신이 다시 예전과 같지 않고 여생도 얼마 남지 않아 은덕에 보답할 날이 얼마 없습니다. 자나 깨나 이것이 마음에 맺혀 몸을 어루만지며 한탄하면서 숨이 지기 전에 보잘 것 없는 몸이나마 대부(大夫)들의 뒤에서 때에 따라 문안이나 하는 정성을 조금 발휘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후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전혀 감당할 수 없는 임무를 천만번 근사(近似)하지 못한 신에게 맡겼으니 나라와 백성들의 우환이 끝이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당장에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비단 신의 불행일 뿐 아니라 또한 국가의 큰 불행이기도 합니다.
두렵고 맥이 막혀 감히 장황하게 답답한 마음을 진술하지 못하니, 전하는 빨리 내린 명령을 취소하시어 하늘을 대신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을 중히 여기고 미천한 신의 본분을 편안케 해 주소서."
하였다. 비답하기를,
"속마음을 터놓고 모두 말했으니 거의 마음을 돌릴 것이라 믿었는데, 사양하는 글을 보게 되니 경에 대한 두터운 기대가 어긋나 놀랍고 실망하여 할 말이 없다. 고락을 함께 하며 공무와 나라만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경의 집안이 계승해 온 가훈이다. 그러니 반드시 자질구레하게 격식을 갖추어 고집스레 사양해서 안 된다는 것은 내가 두세 번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더구나 지금 수많은 우환과 발등에 떨어진 불 때문에 아주 위태롭게 된 정상에 대해서는 경이 밤낮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또한 짐작할 수 있도다.
경의 성실한 자질과 단정하고 확실한 지조는 내외의 벼슬을 두루 지내는 과정에 시험이 되었고, 공로가 오래 전에 나타나 조야(朝野)에서 명망을 얻어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의견이 모두 일치하게 되었다. 나는 경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두는 것이 아닌데 경은 어째서 나를 멀리하는 것인가?
경이 말한 사람을 알아보고 적임자에게 벼슬을 시킨다고 한 것은 참으로 들어맞는 말이다. 나는 이미 경을 살펴보고 관리로서의 적임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바로 오늘의 조치를 한 것이다. 곤란이 계속되고 서무가 복잡하게 되어 두서를 잡을 수 없는 형편이니 반드시 경이 조절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내가 애타게 기대하는 것은 하루가 급한 만큼 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나와서 나의 근심을 풀어주도록 하라. 이것이 지극한 소망이니 경은 이 점을 헤아리라. 경은 이 점을 헤아리라."
하였다.
9월 4일 갑오
우의정(右議政) 김유연(金有淵)에게 세 번째로 하유하였다.
김학수(金鶴洙)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김구현(金九鉉)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서형순(徐衡淳)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삼았다.
9월 6일 병신
우의정(右議政) 김유연(金有淵)에게 네 번째로 하유하였다.
이복희(李宓熙)를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김유연(金有淵)이 재차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터놓고 한 것이 여러 번이요, 경도 자기 말을 거듭 진술한 만큼 다시는 이 일을 가지고 누누이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또 이처럼 굳이 고집하여 손장(巽章)이 계속 오고 있으니 의리로 보아 어떻다고 하겠는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다.
경을 정승으로 선정하는 것은 진실로 여론에 부합되는 것으로서 나라와 백성들은 힘입는 바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치 오랜 가뭄에 단비를 내리게 하는 것처럼 목을 빼들고 눈을 비비며 적절한 방책을 취해나가는 것을 보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옛날에 송(宋)나라 에서 조정(趙鼎)을 정승으로 선정했을 때, 임명이 내리는 날에 조정(朝廷)의 관리들이 서로 축하했는데, 이번에 경이 나오는 것도 옛사람보다 그다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경이 계속 물러가려고 해도 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또한 공경히 믿고 보좌하면서 국가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은 원래 경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가업인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그 뒤를 이어 전에 해온 일을 법으로 삼아 나를 인도하여 백성들을 잘 다스리도록 해야 할 것이며 또한 조심하면서 그 위업을 훼손시킬까봐 두려워해야 한다.
나는 지금 이 때문에 신임하는 것이 더욱 크고 기대하는 것이 더욱 깊으니, 경의 책임이 또한 크고 많은 것이다. 경은 반드시 이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인데 어찌 다시 더 할 말이 있겠는가? 경은 재량(載量)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8일 무술
우의정(右議政) 김유연(金有淵)에게 다섯 번째로 하유하였다.
서학순(徐鶴淳)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김유연(金有淵)이 세 번째로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힘써 나오라는 비답을 내렸다.
9월 9일 기해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세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 칠석제(七夕製)를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유연(金有淵)에게 여섯 번째로 하유하였다.
9월 10일 경자
전교하기를,
"전번에 무명 잡세(無名雜稅)를 없애도록 신칙하는 명령을 내린 것이 이만저만 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묘당(廟堂)에서 아뢴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으니 조정(朝廷)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허다한 명목이 또다시 생겨나 강제로 요구하고 빼앗아 경외(京外)가 소란하고 행상(商旅)이 다니지 못하며 뱃사람 들이 살아나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에 이와 같다면 조령(朝令)을 받들어 백성들을 돌봐주는 뜻이 과연 어디에 이단 말인가 이 역시 기강에 관계되는 일로서 놀랍기 그지없다.
중앙에서는 한성부(漢城府), 지방에서는 각도(各道)의 어느 곳에서 어떤 세금이 무슨 연고로 언제 생겨났는지 낱낱이 상사(祥査)하여 모조리 즉시 혁파하라고 묘당으로 하여금 분부하게 하라."
하였다.
김유연(金有淵)을 내무부 총리(內務府總理)로, 조석여(曺錫輿)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9월 11일 신축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정승의 직책은 참으로 어렵게 여겨 삼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명(明)의 신하 유기(劉基)가 말하기를, ‘기둥을 바꾸려면 반드시 큰 나무를 얻어야 합니다. 만약 작은 나무를 묶어서 세운다면 넘어집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참 잘한 비유입니다.
신은 자질이 미약하고 성품이 나약하여 중요한 임무를 감당할 수 없으니 오직 물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한 조각의 충성스런 마음을 말한다면 세자를 보좌하는 방도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타고난 자질이 슬기롭고 지혜와 생각이 날로 자라나니 마땅히 친압하여 노는 것을 물리치고 단정한 선비를 가까이 대하면서 덕을 닦고 학업에 힘써서 우리 종묘(宗廟)의 만대의 기초를 공고히 하도록 할 것이니, 이것은 오직 전하가 몸으로써 가르치는 데 달려있는 것으로서 신이 밤낮으로 축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전하는 훌륭한 자질로 밤낮으로 애써서 편안히 쉴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덕으로 교화하는 것이 흥기하지 않고 혜택이 더해지지 않으며, 국사(國事)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민생이 날로 쪼들려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하는 아랫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묻고 너그러운 표정을 짓지만 신하들이 올린 말은 아직까지 시행되는 실효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좋은 의견을 아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올린 말이 반드시 모두 좋지는 않겠지만 오직 전하가 그 좋은 것을 골라서 채용하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바로 대순(大舜)은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취하는 것을 착한 일로 삼았던 것입니다.
신이 죽을 죄를 짓는 것이지만 망령된 생각으로는 전하의 생각이 지나치게 너그럽고 어질기는 하나 용감하게 결단하는 것이 결단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대체로 알면서 실행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합니다. 아는 것을 실행하자면 용감해야 하는데 용감하게 하는 도리는 일에 직면하여 요량하여 마땅히 실행해야 할 것은 실행하고 그만두어야 할 것은 그만두는 것입니다.
가깝고 절실한 것을 도모하다가 원대한 방략을 잊어버리고, 조그만 이익에 빠져서 큰 계책을 버리며, 요행을 바라는 길을 열고 신기한 기술을 구하면 한 가지 일도 성취하지 못하고, 구장(舊章)이 마침내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을 신은 근심하고 통분해하는 것입니다.
당 태종(唐太宗)이 말하기를, ‘임금은 오직 한마음이어야 하니, 공격하는 자들이 많아서이다. 어떤 사람은 아첨하고, 어떤 사람은 간사하며 어떤 사람은 탐욕하고 어떤 사람은 말재간으로 하는데, 임금이 만약에 그중에서 한 가지라도 받아들이게 되면 멸망이 뒤따르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만 대에 걸쳐 임금들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하는 지당한 논의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크게 결단을 내려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명백히 보여 반석 위에서 나라의 계책을 크게 도모하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술한 것이 어느 것이나 약석(藥石)이 아님이 없다. 세자를 보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경도 함께 힘써야 하리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유연(金有淵)이 아뢰기를,
"신이 천만 번 당치않은 벼슬에 임명되어 어떻게 감히 뻔뻔스럽게 사은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성교(聖敎)가 날로 더욱 엄격하고 신하의 본분이 갈수록 더욱 훼손되며 형편이 궁하고 딱하여 몸둘 바를 모르다가 감히 진심을 빌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간곡한 마음을 다 털어놓는 바입니다.
생각건대 신의 가문은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할 의리를 지키는데 그 임무는 여느 사람보다 곱절이나 더 하지만 저는 늙고 병들어 힘을 다 쏟아 붓기가 오히려 어렵습니다. 더구나 도를 강론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아침 저녁으로 충고를 하고 음양을 고르게 하여 만기(萬機)를 도와서 모든 임금들의 모범이 되게 하는 일은 애당초 신에게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찍이 정승을 선정하는 대상 속에 든 것만도 이미 보고듣기에 놀라운 일인데, 마침내 밝은 명령을 내려 이처럼 정승으로 임명되었으니, 신은 생각하면 할수록 놀랍고 의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내무부 총리(內務府總理)로 임명한 명령은 미천한 신에게 더욱 타당치 않아서 단 하루도 마음 놓지 못하고 온 마음이 황송할 따름입니다. 아울러 이 문제를 가지고 면전에서 간곡히 진술하니 삼가 두루 다 헤아려서 빨리 물러가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을 정승으로 임명한 후로 기뻐서 잠을 못 이루니, 또한 조야(朝野)의 기대에 부응하리라고 본다. 더구나 경의 집안은 문정공(文貞公)과 문충공(文忠公)이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어 지금까지도 그 분들은 칭송하고 있다. 경은 응당 선대의 미덕을 이어받아 보좌하는 책임을 다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뒤이어 하교하기를,
"요즘 들리는 소문이 하찮은 것이기는 하지만 간사한 무리들이 문득 전교(傳敎)라 칭하고 불법(不法)을 제멋대로 행하고 있다 하니 듣기에 매우 놀랍다. 묘당에서 엄하게 신칙하여 금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요즘 간혹 이런 일들이 있는데 사체(事體)에 크게 관계됩니다.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어떻게 내린 명령이 승정원(承政院)을 경유하지 않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교(下敎)를 받들었다고 예사로 공문에 쓰곤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물러가서 각 관청에 엄히 신칙하겠습니다."
하였다.
9월 12일 임인
홍재희(洪在羲)를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9월 13일 계묘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근래에 연석(筵席)에서 여러 차례 간곡하게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았지만, 지금 어려운 일이 허다하고 형편이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런 때에 정승의 자리를 잠시라도 비워놓아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힘써 격려한 것이다. 그러나 또 이렇게 누누이 진술하는 것은 바로 실지 속마음에서 나온 것으로서 겸손하게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병도 이러하니 형편상 억지로 나오게 하기가 곤란하다. 반드시 편안히 몸조리를 하게 해야 병이 낫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그 고심하는 것이 오직 기어코 체직되려는 데 있기는 하지만, 한결같이 성실하고 독실하게 돕는 의리는 벼슬자리에 있건 물러가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가 신임하는 데는 원래 버리지 않으려는 데 뜻이 있는 것이나 그냥 망설인다는 것도 도리어 예로써 공경하는 도리가 아닌 만큼 좌의정(左議政)에 대해 이제 우선 사직을 허락한다."
하였다.
김병시(金炳始)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삼았다.
9월 15일 을사
정범조(鄭範朝)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9월 17일 정미
전교하기를,
"지금부터 일체 동가(動駕)할 때와 동여(動輿)할 때는 친군 해방영(親軍海防營)의 병정들이 각영(各營)의 전례대로 시위하고 배위(陪衛)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9월 18일 무신
전교하기를,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의 당상(堂上官)은 으레 내무부 독판(內務府督辦)을 겸하게 되어있는 만큼 품계에 따라 단부(單付)하라."
하였다.
박제관(朴齊寬)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김영수(金永壽)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9월 19일 기유
특별히 발탁하여 김영수(金永壽)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고 이명재(李命宰)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9월 20일 경술
심상목(沈相穆)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정범조(鄭範朝)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김영수(金永壽)를 내무부 독판(內務府督辦)으로 삼았다.
9월 21일 신해
전교하기를,
"지금부터 상소를 올려 휴가를 청하고 나갔다가 들어오는 것을 일체 정사(呈辭)의 규례대로 하며, 만약에 기한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곧바로 찬배(竄配)하는 것에 대해 전지(傳旨)를 받으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9월 22일 임자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행 호군(行護軍) 민치장(閔致長), 행 대호군(行大護軍) 민치서(閔致序)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의 종고조(從高祖)인 문충공(文忠公) 신(臣) 민진원(閔鎭遠)은 왕실의 가까운 친척으로 재상의 벼슬에 있으면서, 자신이 의리에 성실하고 나라에 공로를 세웠으므로 부조(不祧)의 큰 은전을 받았습니다.
종손인 고 목사(故牧使) 신(臣) 민원용(閔元鏞)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민한주(閔漢胄)이고 둘째는 민한준(閔漢俊)이며 셋째는 민영위(閔泳緯)입니다. 민한주는 일찍 죽어 아들이 없었는데 집안에 불행한 일이 있어서 입후(立後)하지 못했으며, 민한준 역시 일찍 죽어 아들이 없었는데 미처 입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故) 민원용의 숙부(叔父)인 고 판서 신 민치성(閔致成)이 집안의 어른으로서 그 일을 주관하여 민영위에게 임시 제사를 대리로 받들게 했는데 이것은 한때의 임시 조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철종(哲宗) 임자년(1852)에 와서 민한준의 아내 심씨(沈氏)가 지금 판서 신 민응식(閔應植)을 데려다 아들을 삼고, 민한준의 뒤를 잇게 했는데, 이것은 실상 민영위가 주장한 것으로서 그가 큰 뒤에 종가(宗家)의 계통을 계숭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럭저럭 지내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뜻밖에 지난 달 민영위가 죽는 통에 종사(宗祀)를 받드는 한 가지 문제가 미처 올바로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종법(宗法)이 엄한 것은 《예기(禮記)》에 실려있는 것이므로 백 대를 두고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민응식이 응당 종사를 받들어야 할 것인데, 이것은 비단 사문(私門)의 중대한 문제일 뿐 아니라, 윤리 관계를 밝히고 명분을 바로잡는 나라의 정사에 관계되는 일인 만큼 진실로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살펴서 빨리 올바르게 해결하도록 명하여 충현의 종사를 《예기》의 규칙에 어긋나지 않게 지내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을 예조(禮曹)에서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문의해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9월 26일 병진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윤영신(尹榮信)과 우수사(右水使) 허진(許璡)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영광(靈光) 임자도(荏子島)에 표류하여 온 3명의 사람들이 우리나라 배로 일본(日本)배가 내왕하는 항구에 실어 보내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는데, 묘당(廟堂)의 처분을 공손히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표류된 뒤끝에 또 추운 계절까지 만난 만큼 빨리 돌아가게 하여줄 것을 청원하는 것은 그 사정으로 보아 당연할 것입니다. 양식과 반찬을 준비해 주고 의복을 만들어 주는 등의 일을 모두 잘 살펴서 신칙하며, 견고한 배를 골라 차원(差員)을 정하여 일본배가 다니는 항구에 실어 보내되, 혹 지체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며, 내버려둔 배의 재목은 전례대로 불태워버리고 실태를 함께 등문(登聞)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7일 정사
전교하기를,
"미국인(美國人) 의사 알렌〔安連 : Allen, Horace Newton〕은 수고가 이미 많으니 매우 가상하다. 특별히 2품의 품계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윤성진(尹成鎭)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만유(李晩由)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김상규(金商圭)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9월 28일 무오
민영환(閔泳煥)을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으로 삼았다.
9월 29일 기미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알하였다. 이어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가을 전알이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병시(金炳始)를 좌의정(左議政)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