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26권, 고종26년 1889년 9월
9월 1일 갑진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상소하여 재상직과 총리(總理)의 직책에서 사직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9월 2일 을사
조병호(趙秉鎬)와 민영소(閔泳韶)를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 삼았다.
홍문관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응교(應敎) 이성렬(李聖烈), 부응교(副應敎) 윤시영(尹始榮), 교리(校理) 윤태흥(尹泰興), 부교리(副校理) 정현오(鄭顯五), 수찬(修撰) 이석종(李奭鍾), 부수찬(副修撰) 신병휴(申炳休), 정자(正字) 윤우식(尹雨植)이다.】 한용석(韓容奭) 등에게 빨리 왕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본래 참작하여 처리하였으니 다시 번거롭게 굴 필요가 없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올린 차자의 대략에,
"지금 형조(刑曹)의 계목(啓目)에 대해 판부(判付)를 내린 것을 보니, 죄인 한용석(韓容奭)은 원악도(遠惡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고 유지영(柳智永)은 도배(島配)시키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큰 성인이 옥사(獄事)를 신중히 처리하고 죄수를 불쌍히 여기는 어진 덕에 대해서는 급급하게 따라야 하겠지만, 사건에 대한 조사가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참작하여 처분하라는 명이 내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승정원(承政院) 관원들과 유신(儒臣)들이 명을 거두고 조사가 미진한 부분을 다시 조사하기를 강력히 청하는 것이니, 신이 국시(國是)와 왕법의 위상에 대해 두렵고 근심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 어찌 지난달에 차자를 올릴 때와 비교하여 논의하는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다시 더 깊이 생각하여 여러 신하들의 요청에 빨리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졸렬한 무리들의 미치광이 짓에 불과하다. 다시 조사할 단서가 없어서 여러 번 사정을 참작하여 이렇게 처분한 것이니 형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경은 이것을 이해하라."
하였다.
9월 4일 정미
양사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집의(執義) 윤시영(尹始榮), 사간(司諫) 김갑수(金甲洙)이다.】 한용석(韓容奭) 등에게 빨리 왕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처분도 타당하다고 할 수 있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9월 5일 무신
흥복전(興福殿)에 나아가 러시아 공사 베베르〔韋貝 : Waeber, K.〕를 접견하였다.
9월 6일 기유
흥복전(興福殿)에 나아가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葛林德 : Victor Collin de Plancy〕를 접견하였다.
민영환(閔泳煥)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삼았다.
9월 7일 경술
대교 권점(待敎圈點)을 행하였다. 〖권점을 받은 사람은〗 이만재(李萬宰), 윤두병(尹斗炳), 김만수(金晩秀)이다.
이순익(李淳翼)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윤정구(尹定求)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조병철(趙秉轍)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김문제(金文濟)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만재(李萬宰)를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다시 상소하여 재상직의 사임할 것을 청했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9월 9일 임자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에게 하유하기를,
"여러번 충분히 하유했으니 내 심정을 이해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식견이 없어서 정사가 생각대로 되지 않고 백성들이 지금 곤궁에 처해 있고 나라 일은 날로 글러지고 있는데 그저 밤낮 걱정만 할 뿐이니 더욱 어려운 상황만 나타날 뿐이다.
단지 예전에 경과 함께 두렵고 위태로운 심정으로 깊이 강구하였으니 어디 간들 백성이 편안하게 되고 나라가 잘 다스려짐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점점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경이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그렇지 않겠는가?
크게 어려울 때에 나라를 일으키는 것은 능히 조심하며 정사를 살피고 거행함을 말하는 것이니, 서로 힘써 성실히 다스린다면 위기를 전환시켜 편안하게 만드는 데에 어찌 방도가 없겠는가?
한가하게 쉬려는 생각은 시기로 보아도 옳지 않으며 의리에서 보아도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경의 노성함과 경의 나라에 대한 충애(忠愛)로써 물러가려고 하는 것은 실로 나의 성의와 예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반성하고 부끄러워 탄식하면서도 또다시 이렇게 거듭 강조하는 것은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이다. 특별히 이렇게 선유(宣諭)하노니 경은 반드시 잘 헤아리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0일 계축
공진(公賑)을 시행한 고을의 수령인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호겸(金好謙), 밀양 부사(密陽府使) 정병하(鄭秉夏), 성주 목사(星州牧使) 김갑수(金甲洙), 상주 목사(尙州牧使) 민종렬(閔種烈)에게는 숙마(熟馬)를 지급하고 영천 군수(永川郡守) 임시익(林時益)은 승서(陞敍)하며, 사진(私賑)을 행하고 원납(願納)해서 진자(賑資)를 보충한 사람인 청도(淸道)에 사는 전 감역(前監役) 이원갑(李源甲), 대구(大邱)에 사는 전 현감(前縣監) 한진규(韓鎭奎)를 지방 관직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이상 모두는 진정(賑政)을 끝낸 상황에 대한 감사(監司)의 장계(狀啓) 및 진휼청(賑恤廳)의 회계(回覆)로 인하여 이조(吏曹)에서 복계(覆啓)하였기 때문이다.
9월 12일 을묘
민치일(閔致一)을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9월 13일 병진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세자도 따라가서 예를 행하였다. 의식이 끝난 후,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도적의 변고가 하룻밤도 일어나지 않는 때가 없는데 조정에서 누차 신칙하고 마을마다 크게 기대하는 것은 오직 두 포도청(捕盜廳)뿐인데, 두 포도청에서는 염탐하여 도적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기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두 포도대장(捕盜大將)에게 모두 월봉(越俸)의 처벌을 적용하고 기한을 정하여 모조리 소탕하게 하소서.
지방 각 도의 오늘날 사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적을 막는 책임이 단지 도적을 잡는 관리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관찰사나 절도사(節度使)들이 조정의 명령을 형식적으로 대하니 어느 수령(守令)이나 어느 영장(營將)이 직무에 성실하지 못하여 파면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약탈하고 해치는 일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만일 도적을 금하는 관리들이 각각 자기 직무에 충실했다면 어찌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각 도 수신(帥臣)을 우선 엄중히 추고(推考)하고 철저히 단속하여 도둑을 막도록 팔도(八道)와 오도(五都)에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것도 기강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니 극히 통탄할 일이다. 묘당(廟堂)에서 좌우변포도대장(左右邊捕盜大將)을 불러다가 특별히 대면하여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9월 14일 정사
경희궁(慶喜宮) 숭정문(崇政門)에 화재가 났다. 전교하기를,
"서궐(西闕)에서 일어난 화재가 숭정문(崇政門)까지 번졌으니 어찌 놀라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다시 짓는 공사는 지금의 나라 재정으로서 갑자기 의논할 수 없으나, 이것은 법전(法殿)의 정문이며 사체상 또한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니, 될수록 검소하게 수리하는 일에 대하여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묘당(廟堂)에 나아가 논의하여 사전에 강구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5일 무오
윤길구(尹吉求)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9월 17일 경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완백(完伯)의 장계(狀啓) 등보(謄報)를 보니, 광양(光陽) 사건은 의외의 일로서 참으로 일대 괴변입니다.
오늘날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무리를 모아 앞장서서 소란을 피워도 누구도 감히 따지지 못하며 인가(人家)를 부수고 관청 건물을 파괴하며 수령(守令)을 둥우리에 담아 내쫓고 나랏돈을 탈취했으니 그 광경을 상상하면 반란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해산하지 않으니 더욱 경악할 일입니다.
반드시 도신(道臣)의 차후 보고가 있겠지만 법의 기강과 사체로 고찰할 때 그저 도의 조사만으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김규식(金奎軾)을 안핵사(按覈使)로 차하(差下)하여 밤낮없이 그 고을에 달려가서 해당 현에서 소란이 일어난 자세한 곡절을 철저히 조사하고, 주도한 자는 우선 효수(梟首)한 후에 일체 등문(登聞)하도록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18일 신유
이민중(李敏中)을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9월 19일 임술
홍종헌(洪鐘軒)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한치조(韓致肇)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강윤(姜潤)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정병하(鄭秉夏)를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로 삼았다.
9월 20일 계해
의금부(義禁府)에서, ‘죄인 한용석(韓容奭)을 신지도(薪旨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9월 21일 갑자
전교하기를,
"돌이켜 보건대 지금 민사(民事)와 국계(國計)에 곤란한 일은 많고 지탱할 방법은 전혀 없는데 이것은 물론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벼슬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대체로 나의 부덕(不德)한 소치로 정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곤란을 수습하고 나의 근심을 누그러뜨릴 방책으로 나의 마음을 개발시켜 주는 말도 듣지 못했으니 이것이 또한 한탄을 자아내는 일이다.
가령 당장 긴급한 것으로 말하더라도, 요미(料米)를 주지 못한 지 오래이고 군량도 부족하여 잠시도 느긋할 수 없게 되었는데, 단지 방법이 없다는 핑계만 대면서 계속 편안히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면 절로 한심스럽다.
호조(戶曹), 선혜청(宣惠廳), 양향청(糧餉廳)의 당상(堂上)과 장수들은 묘당(廟堂)에서 회의하여 알맞게 나누어주고 접제(接濟)할 방도를 마련하고 충분히 상의하고 강구하여 좋은 쪽으로 품처(稟處)하면 내가 응당 받아들여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공납(公納)이 지체되는 것이 요즘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누차 번거롭게 신칙하였지만 하나같이 대충대충 하거나 시일을 끄는 것만 일삼으니 이것이 무슨 사체인가? 한두 해만 조금 넘기면 곧바로 미수하지 못한 구곡(舊穀)이라고 구실을 삼아서 곧 대납(代納)을 허락할 것을 요청하거나 아니면 정퇴(停退)를 청하고 있다. 아무리 사정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나라의 재정이 점점 궁색해 진다는 점은 왜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더구나 그렇게 지체된 것은 꼭 민간에서 받지 못했거나 아전들이 축낸 것뿐만 아니라 관장(官長)이 포흠(逋欠)한 것임을 알겠다.
농간을 부리는 것도 부족하여 횡령까지 하니, 이런 간악한 폐단을 안찰하는 지위에서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만일 알고서도 덮어 둔다면 이것이 어떻게 횡령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지금 다시 기한을 정할 필요없이 우선 어느 고을에서 바치지 못한 까닭은 무슨 곡절인지를 모두 조사하여 즉시 소상하게 계문(啓聞)하라고 묘당에서 밤낮없이 각 해당 도의 감사(監司)들에게 관칙(關飭)하여 이전처럼 지체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토호의 무단(武斷)에 대하여 전후에 신칙하여 금지한 것이 여간 엄하지 않았으나 근래에 중앙과 지방 곳곳에서 들려오는 것마다 경악할 만한 일들뿐이다.
이름을 조적(朝籍)에 두고서 비리를 자행하고도 뻔뻔스럽게 부끄러운 줄 모르며, 사족(士族)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위세를 부리면서 버젓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자신을 통제하고 행실을 다잡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인가? 갖은 토색질과 침해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중앙에서는 법사(法司)에서, 지방에서는 수령(守令)들이 보고가 올라오는 대로 적발하여 즉시 의정부(議政府)와 순영(巡營)에 보고하여 법으로 처단하되, 혹시 사적인 인정에 끌려서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것도 백성을 위하여 폐해를 제거하는 한 가지 방도이므로 힘써 거행하라는 내용으로 묘당에서 엄하게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나라에서 금령으로 잡기(雜技)를 엄하게 막는 것은 사민(四民)으로 하여금 각각 자기 본업에 근면하여 자기 힘으로 먹게 하며, 게으르고 편안히 살면서 거짓 술수에 힘써 요행수로 이득을 노리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이런 폐단이 매우 심하여 건달과 무뢰배들이 남을 속이고 재물을 빼앗아 한순간에 남의 집을 망하게 하고 있으니, 그것이 어찌 강탈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도적이 성하는 것도 역시 여기에 연유하니 심히 통탄스럽다.
법사(法司)의 당상(堂上)과 좌우변포도대장(左右邊捕盜大將)들은 그들을 일일이 수색하여 잡되, 관대하게 용서하지 말고 법에 따라 엄격히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근년 이래로 도적을 막으라고 신칙한 것이 여러 차례인데도 막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는 일없이 세월만 보내며 악습(惡習)을 길러 제멋대로 날뛰게 만들었다.
중앙과 지방에서 비적(匪賊) 무리들이 모여 횡포를 부리는 것을 누구도 막지 못하고 있다. 마을에 소요가 일어나고 길이 막히는 경우도 많으며 심지어는 도성 안에서까지 사태가 자주 일어나는 지경에 이르니 이것이 어찌된 까닭인가?
더구나 올해에는 풍년이 들어서 백성들의 사정이 좀 나아졌다. 그런데 무뢰배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몰려서 도둑이 된 무리와도 다르고, 또 담을 뚫거나 담장을 뛰어넘는 좀도둑에 비교할 것도 아니어서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날뛰니 당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망하고 길에 나앉게 되니 어찌 해괴한 현상일 뿐이겠는가? 백성들이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것과 관련된다.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염탐하는 관리들에게 있는데 그들의 기세에 눌리거나 그 패거리들이 두려워서, 형적도 다 드러났고 소굴도 찾아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두고 문제삼지 않으니 또한 무슨 까닭인가?
그래서 지난날에 조정에서 신칙했던 것인데 요즘 전하는 말을 듣고서 또다시 놀라게 된다. 조정의 명을 매번 형식적으로 여겨서 그런 것인가? 이는 법의 기강이 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을 두려워하는가? 도적을 두려워하는가? 법을 두려워한다면 도적이 없어질 것이고 도적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법이 무시되는 것인데 법이 무시된다면 그것을 어찌 나라라고 하겠는가?
이제부터는 포도청(捕盜廳)의 소속이나 각 군영의 병사, 각 궁, 각 사, 양반집의 하인을 물론하고 정황이 뚜렷하게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체포할 것이며, 만일 해당 관청 소속 사람들이 꼬투리를 잡고서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 있으면 함께 잡아다가 도적을 다스리는 법으로 다스리라.
지방에서는 비단 토포사(討捕使)의 직임에 있는 관원뿐만 아니라 수령된 자도 듣지 못했고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각각 자기 경내에 도적이 있어도 체포하지 않거나 숨겨두고 적발하지 않는 사람은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반드시 사실대로 거론하고 논계(論䏿)하여 감처(勘處)하도록 하라.
이러한 일은 상을 줄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벌을 줄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는 데 달려 있다. 잘 기찰하여 체포한 사람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고, 금지시키고 다스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중한 벌을 준다는 것이 법령에 밝혀져 있으니 반드시 그대로 지키고 어기지 말라. 아울러 이런 내용으로 묘당에서 좌우포도청(左右邊捕盜廳)과 각 해당 도에 엄히 조칙(操飭)하게 하라."
하였다.
이호석(李鎬奭)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9월 22일 을축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세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다섯 가지 사안에 대하여 전교했는데, 도적이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사실은 엄하게 기찰하여 체포하지 않은 것에 원인이 있다. 만일 법의 기강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하겠는가? 묘당(廟堂)에서 특별히 신칙하여야 하겠다.
대체로 도적이 준동하는 것은 절제없는 사치에 원인이 있었다.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의 의복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사치스러운데, 계속 이렇게 되면 틀림없이 항심(恒心)이 없어질 것이며 나중에는 거리낌 없이 방자하게 굴게 될 것이다.
조정에는 원래 품질(品秩)이 있으니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른 옷차림에서도 마땅히 등급이 구별되어야 하거늘, 난잡하고 분에 넘치게 차림새를 하는 폐단이 지금보다 더 심한 적이 없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이제 만일 자질구레한 절목으로 특별히 금지한다면 도리어 더 소란스러운 폐단이 생길 것 같으니 오직 《대전(大典)》에 따라 지키고 어기지 않는다면 규율이 강화되고 법이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거듭 강조하고 경계하고 신칙하여 나의 신하와 백성들이 옛 습속을 철저히 고치고 유신(維新)에 다함께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하니,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어제 내린 전교가 이미 매우 엄했는데 이제 또다시 성교(聖敎)를 직접 들으니, 이것은 모두 신이 자기 직책을 다하지 못한 죄라서 황공하기 그지없어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도적을 금지하는 근본은 과연 사치를 금지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의복의 문장(文章)에 귀천의 구별이 있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 《대전》의 규정에 의하여 금지한다면 민간에서 소란이 없을 것이며 나라의 법이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물러가서 절목으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요즘 각 고을의 아전들이 경사(京司)에 상납할 때 정비(情費)가 너무 많다. 감생절목(減省節目)에서 정한 것과 그전에 규례로 정한 것을 아울러 중첩해서 징수하며, 심한 경우에는 정해진 비용을 온전히 내지 않으면 짐을 돌려보내기까지 하는데, 이 과정에 갖은 폐단이 모두 일어난다. 고을에서 횡령하는 액수도 이 때문에 많아지며 나라의 재정도 이 때문에 궁색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수령(守令)을 자주 교체하는 데에 허물을 돌리는데, 이것이 어찌 수령을 자주 교체하기 때문만이겠는가?
비록 정목(政目)으로 말하더라도 설사 특교(特敎)가 혹시 인사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전신(銓臣)들이 어째서 반대 의견을 내지 않는가? 내가 언제 말하지 못하게 했던가? 묘당에서도 반드시 이러한 뜻을 알고 특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니, 영의정 심순택이 아뢰기를,
"궁궐에서 먼 고을의 사소한 일까지도 훤히 꿰뚫고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누군들 감복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담당하는 신하들이 오늘의 칙교(飭敎)를 듣는다면 각각 삼가고 힘써서 실효를 나타낼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평소에 잘 감독하고 이끌지 못하여 전하께서 염려까지 하게 되었으니 더욱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각 고을의 상납분의 미수액을 이미 도신(道臣)에게 실태를 조사하여 장계로 보고하게 하였는데, 미수의 원인을 기어이 밝혀내어 각자에게 해당되는 벌을 주고 결코 조금도 용서하지 않은 다음에야 한 사람을 징계하여 백 사람을 독려할 수 있을 것이다.
징계하고 독려한다고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실효가 없으면 규율이 더욱 해이해져서 태연하게 두려워할 줄을 모르게 되니, 이번에 묘당에서도 철저히 징계하겠다는 결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이제 막 공문을 띄웠으니 각 도에서 보고하는 대로 가볍든 무겁든 간에 처분을 받들어 논경(論警)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요즘에 백성들이 곤궁한 것은 전적으로 수령(守令)들이 탐학한 것에 원인이 있다. 그리고 법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녹봉받는 것만 우선시하고 공납(公納)은 뒷전으로 미루어 언제나 지체하니 늘 통탄스럽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조세 납부를 지체하는 폐단은 대부분 여기에서 나오지만 어찌 수령으로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겠습니까? 만일 공(公)을 우선시하고 사(私)를 뒷전으로 미룬다면 반드시 이렇게 심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앞으로 상납 지체에 대하여 조사하여 드러나는 대로 정죄(定罪)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요즘 잡기가 성행하여 마을과 시정(市井)에서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이 많을 뿐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토호들이 무단으로 침탈을 자행하면서 거리낌이 없는데 이러한 일이 날마다 들려오니 경악스럽다. 이것은 모두 나라의 법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의 법이 시행된 다음에야 조정이 존중되는데, 조정이 존중되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조정의 명령이 대궐문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겠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요즘 풍속이 투박하고 조정의 위신이 다 무너져서 조정의 명과 의정부(議政府)의 신칙을 받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심상하게 취급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이며 이것이 무슨 기강인가? 그리고 듣건대 여러 신하들은 각각 자기 집에서 한숨이나 쉬고 탄식이나 하면서, 직무가 거행되지 않으면 곧 책임을 위에 전가하고 마치 애초에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태도를 취하고 있다. 언제 자기 직무를 성실하게 거행하고 나의 마음을 열어 준 적이 있는가? 지금 여기 있는 여러 신하들은 응당 잘 알아두라.
나는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5백 년 왕업을 이어받았는데 과인에 이르러 모든 법도를 태만하게 처리함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부지중에 두렵고 송구스러운 생각이 든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전하가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신은 더욱 황송하여 아뢸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9월 23일 병인
흥복전(興福殿)에 나아가 미국 공사(美國公使)와 수사 제독(水師提督)을 접견하였다.
조병세(趙秉世)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종승(李鍾承)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남정익(南廷益)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송세헌(宋世憲)을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으로, 조동희(趙同熙)를 겸보덕(兼輔德)으로, 김학수(金鶴洙)를 설서(說書)로 삼았다.
이종건(李鍾健)을 전환국 총판(典圜局總辦)으로 삼았다.
9월 25일 무진
왕세자가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종묘(宗廟)에 지내는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섭행(攝行)하고 서계(誓戒)를 받았다.
전교하기를,
"지금 골고루 나누어줄 방책에 대하여 지난번에 묘당(廟堂)에서 회의하여 품처(稟處)하게 했는데, 지금 가장 긴급한 것은 요식과 군량을 마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늑장을 부리면서 수습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특별히 주전소(鑄錢所)의 돈 100만 냥을 내려보내 내무부(內務府)에서 호조(戶曹), 선혜청(宣惠廳), 친군영(親軍營)과 각 군영에 적당히 나누어 주어 조정에서 염려하는 지극한 뜻을 보여주도록 하라."
하였다.
만경전(萬慶殿)에 나아가 각 국의 공사(公使)와 영국 영사(英國領事)를 접견하였다.
9월 26일 기사
이호준(李鎬俊)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김영수(金永壽)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9월 28일 신미
전 주진 종사관(前駐津從事官) 성기운(成岐運)을 소견(召見)하였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내무부(內務府)에서 성교(聖敎)대로 호조(戶曹)에 28만 7,033냥(兩), 선혜청(宣惠廳)에 27만 9,478냥, 친군영(親軍營)에 12만 3,200냥, 총어영(總禦營)에 20만 6,298냥을 참작하여 나누어 주고 나머지 10만 3,980여 냥은 친군영에 이송하여 군수에 보충하겠다는 내용으로 아뢰었다.
9월 29일 임신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행하였다. 〖권점을 받은 사람은〗 민영철(閔泳轍), 이무로(李茂魯), 이성렬(李聖烈)이고, 민영철(閔泳轍)을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