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28권, 고종28년 1891년 12월
12월 1일 신묘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삭제(朔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조병식(趙秉式)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나 소자(小子)는 원통한 마음으로 추모하다가 또 이번 달을 당하니 더욱더 슬픔을 걷잡을 수 없다. 이 달 6일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생일이다.】 효모전(孝慕殿)에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행하겠다."
하였다.
12월 2일 임진
김수현(金壽鉉)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유인(李裕寅)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12월 3일 계사
정해윤(鄭海崙)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민형식(閔炯植)을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삼았다.
12월 4일 갑오
재전(齋殿)에 나아가 수릉(綏陵)의 별다례(別茶禮)와 산릉(山陵)의 별다례, 효모전(孝慕殿)의 작헌례(酌獻禮)에 쓸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다.
민응식(閔應植)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12월 5일 을미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기백(箕伯)의 임기가 머지않았습니다. 이 도신(道臣)은 부임한 이후에 성실한 마음으로 정사(政事)를 보아 위엄과 추대를 받았으며, 열군(列郡)을 진압하고 은혜를 베푼 일이 현저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안정시켰으므로 온 도(道)의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그가 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소장(訴狀)을 가지고 와서 호소하는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병석(閔丙奭)을 임기가 찬 다음에 특별히 한 임기를 더하여 잉임(仍任)시켜 끝까지 성과를 거두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6일 병신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 및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효모전(孝慕殿)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때의 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찬례(贊禮) 민응식(閔應植), 예방 승지(禮房承旨) 정이섭(丁理燮), 예모관(禮貌官) 김세기(金世基), 집례(執禮) 김병억(金秉億), 대축(大祝) 정인섭(鄭寅燮), 상례(相禮) 임선준(任善準)은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12월 7일 정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9일 기해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형조(刑曹)에서 사실을 조사하여 올린 초기(草記)와 관련하여 여러 죄수들이 범한 죄는 모두 심상하게 처리할 수 없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근래에 풍속 습관이 점점 사나와져 심지어 죄수들의 것을 제멋대로 빼앗는 일까지 있는데 만일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법의 기강을 놓고 생각할 때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수창(首倡)한 정홍식(鄭弘植)은 세 차례 엄히 형신(刑訊)한 뒤에 사형을 감하여 종신토록 원악도 정배(遠惡島定配)하되, 물간사전(勿揀赦前)하고, 김귀복(金貴福) 등 13명(名)은 추종한 죄목을 면하기 어려우니 모두 법에 따라 감처(勘處)하며, 장희완(張喜完)은 당초에 잡힌 사유는 묻지 말고 단지 추후로 옥에서 나온 사실에 대한 공술만 받되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특별히 조재순(趙在淳)을 발탁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김성근(金聲根)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심상진(沈相璡)을 정랑(正郞)으로, 이승오(李承五)를 예조 판서(禮曹判書) 겸 예문관 제학(兼藝文館提學)으로, 민응식(閔應植)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정경원(鄭敬源)을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김만수(金晩秀)를 겸사서(兼司書)로, 서정규(徐廷圭)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이병훈(李秉勳)을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12월 11일 신축
민영옥(閔泳玉)을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12월 12일 임인
시강원(侍講院)에서 아뢰기를,
"삼가 하교를 받고 왕세자(王世子)에게 계속 진강(進講)할 책을 사(師), 빈객(賓客)에게 문의하니, 사(師)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세자의 학문이 발전하여 《맹자(孟子)》에 대한 공부가 끝났는데 선유(先儒)들이 공부한 규범을 보면 《중용(中庸)》을 그 다음에 읽었습니다. 깊이 연구하는 일과 천지간의 온갖 생물을 살리고 키우는 묘리가 다 이 책에 있으니 이 책을 계속 진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좌빈객(左賓客) 심이택(沈履澤), 우빈객(右賓客) 민응식(閔應植), 좌부빈객(左副賓客) 정기회(鄭基會), 우부빈객(右副賓客) 민영준(閔泳駿)도 같은 의견을 올렸으니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의견을 수렴한 것이 이와 같으니 《중용(中庸)》을 계속하여 진강(進講)하라."
하였다.
12월 13일 계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전 주사(前主事) 윤정식(尹定植)은 외국에서 빚을 낸 돈을 사사로이 축을 내고서는 문건이 번잡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이것은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왕부(王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고 엄하게 감처(勘處)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승오(李承五)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2월 14일 갑진
옷을 얇게 입고 있는 군사들에게 휼전(恤典)을 지급하였다.
12월 15일 을사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망제(望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김춘희(金春熙)를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으로 삼았다.
12월 16일 병오
떠돌며 구걸하는 백성에게 휼전(恤典)을 지급하였다.
12월 17일 정미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납향 대제(臘享大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12월 18일 무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조병식(趙秉式)이 장계(狀啓)하여 아뢰기를, ‘목화농사가 몹시 흉작이 된 도내(道內)의 각읍(各邑)에서 병조(兵曹) 및 각 영문(營門)에 바치는 각 군포(軍布)를 목(木)으로 바칠 몫을 금년 10월부터 내년 9월까지 절반을 대전(代錢)하고, 서천(舒川) 등 7개 고을에서 바치는 각 군포를 저(苧)로 바치는 것도 내년 가을까지 전(錢)으로 대전하게 하며, 그 다음으로 우심(尤甚)한 다음 각 읍에서 받을 환곡(還穀)은 우선 정퇴(停退)하게 하고, 단지 모조(耗條)만 받고 내년 가을에 준봉(準捧)하도록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병조(兵曹) 및 각영(各營)에 바치는 것은 4분의 1만 대납하게 하고, 7개 읍에서 저포(苧布)로 바치는 것은 청한대로 시행할 것입니다. 환곡(還穀)이 비록 중요하기는 하지만 백성의 사정을 실로 돌보아주어야 할 것이므로 장계의 내용대로 시행하여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아뢰기를,
"세자에게 《중용(中庸)》을 이제 계속 진강(進講)하게 되는데, 삼가 열성조(列聖朝)때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혹 주(註)까지 아울러 진강한 예도 있고, 단지 장 아래의 주만 진강한 예도 있으며, 또는 주를 빼고 진강한 예도 있으니,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서문(序文) 및 대문(大文)만 진강하라."
하였다.
김영목(金永穆)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정헌시(鄭憲時)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12월 19일 기유
정기회(鄭基會)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부(賦)에서는 동몽(童蒙) 김대원(金大元), 진사(進士) 이재각(李載覺), 유학(幼學) 권익규(權益圭)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이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진하(陳賀)할 때에 교서를 반포하는 것은 곧 백관(百官)과 군사와 백성들에게 교서를 선포하는 것인데, 그때 세자가 예를 행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듯하고, 또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방방(放榜)할 때 세자가 예를 행하는 것도 근거할 만한 규례가 없다. 간혹 명(明) 나라의 전례(典禮)에서 황태자(皇太子)와 황태손(皇太孫)이 예를 행하는 조목을 상고해 보아도 모두 이런 의절(儀節)이 없었으니, 예조(禮曹)의 의주(儀注)도 이것을 모방하여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조의 당상을 와서 대령하게 하라."
하니,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명나라의 전례에 이미 이런 의절이 없으니, 주(周) 나라의 것을 따르는 뜻에서 진실로 그것을 따라 쓰는 것이 적합할 것입니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신들은 예법에 관한 책을 상고해 보지 못했지만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드니 이것을 근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정기회(鄭基會)를 앞으로 나아오라고 명하였습니다. 하교하기를,
"방금 대신에게 하문하였는데, 진하하는 의주(儀註) 중에 왕세자(王世子)와 왕세손(王世孫)이 예를 행하는 의주를 명나라의 전례를 참고하여 바로 잡을 것이며, 오늘 연석(筵席)에서 한 말을 예조의 등록(謄錄)과 세자궁의 조례에 기록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왕세자(王世子)의 《맹자(孟子)》제7권의 강(講)을 마친 후에 사(師)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12월 20일 경술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왕세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제술(製述)로써 강(講)을 대신하고,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정현재(鄭顯載), 표(表)에서는 생원(生員) 서상숙(徐相肅)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12월 21일 신해
전교하기를,
"오늘은 대원군(大院君)의 생신이니 도승지(都承旨)로 하여금 문안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임상준(任商準)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12월 23일 계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조병식(趙秉式)의 장계(狀啓)를 보니, ‘평택현(平澤縣)의 천포(川浦) 10결(結) 97부(負) 4속(束)과 직산현(稷山縣)의 진결(陳結) 234결 1부 7속에 대해서 이미 3년간 조세(租稅)를 정지하도록 윤허를 받았는데, 평택에서는 조금도 개간한 것이 없고, 직산에서는 약간의 진흙 땅에 조세를 매긴 것이 1결 60부이고 그 나머지는 아직도 포구와 항구에 있어서 끝내 윤곽조차 찾아볼 수 없으므로 다시 5년을 연장하여 조세를 정지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경작하지 않은 토지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어떻게 조세(租稅)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백성들의 숨은 고통을 불쌍히 생각해야 할 것이니 특별히 기한을 3년 연장하게 하고, 감영(監營)과 고을에서 잘 감독하고 신칙하여 점차 조세 총액을 회복하도록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24일 갑인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을 소견(召見)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관리를 두고 직책을 분담한 것은 곧 그 법을 맡아 가지고 그 법을 법으로 삼아서 백성이 잘못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서울과 지방에서 도적이 갈수록 더욱 성하여 도성 안에서 대낮에 물건을 약탈하며 기전(畿甸) 안에서는 큰길이 막히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하고, 전하는 소문이 놀랍지 않은 것이 없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법이란 나라가 백성들에게 믿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니, 법이 믿을 수 없다면 누가 경외(敬畏)하려고 하겠습니까? 지금의 백성도 옛날의 백성인 것만큼 모두 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자기 몸과 생명을 아끼는 것도 그때 사람들과 같은데, 단지 법이 있어도 시행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뿐입니다. 근래에 가난한 백성들이 모여서 곳곳에서 무리를 지어 함부로 마구 행동하므로 마을이나 상점에서는 대개 그들의 얼굴을 알고 그들의 소굴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만일 그들의 자취를 따라서 진심으로 염탐하고 살핀다면 어찌 잡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고을마다 남의 일 보듯하고 매사에 두려워하면서 아직 한 명의 도적도 잡지 못하고, 한 가지 법도 적용하지 못하여 그들이 점점 불어나도록 맡겨두어 이렇게 소란을 피우게 만들었습니다. 이리하여 조령(朝令)이 시행되지 않으며 나라의 기틀이 더욱 해이되게 되어 극히 개탄할 일이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현재 백성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으니 우선 거듭 신칙한다는 내용으로 다시 팔도(八道)와 오도(五都)에 엄히 신칙하여 관하(管下) 각읍(各邑)과 각진(各鎭)을 단속하고 나서 각별히 계책을 세워 빠른 시일 간에 도적을 없애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즉시 소탕하지 않아 날마다 소란을 일으켰으니 수령이 있고 법과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각별히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옛날 순조(純祖) 임진년(1832)에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선무사(宣武祠), 정동 관군사(征東官軍祠), 평양 무열사(平壤武烈祠)에 제사를 지냈고,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절개를 지켜 숨진 곳에 제단을 만들고 그들과 같이 희생된 장사(將士)들과 함께 제사를 내렸으며, 두 충렬공(忠烈公)과 문열공(文烈公)의 집안의 봉사손(奉祀孫)을 수용(收用)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 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崑壽),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 충장공(忠莊公) 권율(權慄)은 승지(承旨)를 보내 제사를 내렸으며, 고(故)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 고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圽), 고 목사(牧使) 이종장(李宗張)은 전쟁 터인 충주(忠州) 달천(㺚川)에 같이 희생된 장사들과 함께 제사를 내렸고, 고 종사관(從事官) 박호(朴箎)·윤섬(尹暹)·이경류(李慶流)는 절개를 지켜 숨진 곳인 상주(尙州) 증연(甑淵)에 모두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내렸습니다. 오래도록 잊지 않는 뜻과 충성에 보답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훌륭한 덕에 대해 참으로 흠모하여 마지 않는데 내년은 바로 옛날의 그 해입니다. 선대 임금들의 업적을 이어받는 뜻에 있어서 마땅히 은덕을 갚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므로 모두 순조(純祖) 때에 시행한 전례대로 내년 봄에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순조 임진년(1832)에는 전교(傳敎)를 내려 제사를 지내주되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인 동묘(東廟), 남묘(南廟)와 안동(安東), 성주(星州), 남원(南原), 당진(唐津)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나누어 보내 예를 행하였다. 내년에는 북묘(北廟)와 평양(平壤)에도 예를 행할 것이니 모두 8개소가 된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옛날 순조 때에 처음으로 관례를 세워 옛날 그해에 느끼는 바가 있어 예를 행하였는데, 이것은 사체(事體)가 특이한 만큼 신은 감히 아울러 거행할 수 없다는 것을 우러러 아룁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세밑을 당하여 녹봉과 요미를 나누어 주지 못하였으니 매우 걱정이 되고 염려스럽다. 방금 두 달 분을 대내(大內)에서 획하(劃下)하였는데 정월 이후에는 계속 새로 받아들일 것이므로 아마 그전처럼 군색해질 염려는 없을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녹봉과 요미를 나누어 주는 것을 특별히 염려하시어 이렇게 대내에서 획하였으니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으며 더욱 흠모하는 마음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음이 풀려서 배가 행하여 새로 받은 조세(租稅)를 수송하여 군색한 일이 없게 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근년에 받는 조세의 실지 수량과 탁지부(度支部)의 재정사정을 보면 또 녹봉과 요미를 주는 것만이 아니니, 지출이 수입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정이므로 이것이 걱정됩니다."
하였다.
종친부(宗親府)에서, ‘《선원보략(璿源譜略)》, 《국조어첩(國朝御牒)》, 《팔고조도(八高祖圖)》, 《왕비세보(王妃世譜)》를 이미 개장(改張)하여 진상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도당록(都堂錄)을 행하였다.〖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김병옥(金炳玉), 송종억(宋鍾億), 박돈양(朴暾陽), 신양균(申養均), 이병호(李秉昊), 신좌균(申佐均), 최창부(崔昌溥), 이용구(李容九), 이범인(李範仁), 송주현(宋胄顯), 이재건(李載乾), 송종엽(宋鍾燁), 유진찬(兪鎭贊), 홍종영(洪鍾榮), 윤두병(尹斗炳), 김덕수(金德洙)이다.
12월 25일 을묘
부정자(副正字) 박창서(朴昌緖)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삼았다.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행하였다.〖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박창서(朴昌緖), 김성규(金成圭), 이시영(李始榮), 이정직(李鼎稙), 조중엽(趙重燁), 윤두병(尹斗炳)이다. 대교 권점(待敎圈點)을 행하였다.〖권점을 받은 사람은〗 민형식(閔衡植), 오형근(吳衡根), 김교덕(金敎悳), 민영복(閔泳復), 김영기(金永冀), 박제횡(朴齊橫)이다.
민영소(閔泳韶)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서상우(徐相雨)를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박창서(朴昌緖)를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민형식(閔衡植)을 대교(待敎)로, 민영복(閔泳復)을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서상훈(徐相勛)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12월 27일 정사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감제(柑製)를 행하였다. 표에서는 유학(幼學) 인석보(印錫輔)를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영변 전 부사(寧邊前府使) 이근호(李根澔)는 탐오한 일로 도신(道臣)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잡혀 와서 의금부(義禁府)에서 이미 적용할 법조문을 토의하였는데, 마침 나라에 경사가 있었으므로 한데 섞여서 석방되었습니다. 탐오한 죄는 법률상 용서할 수 없고 탐오한 물건도 수가 대단히 많은 만큼 해부(該府)에서 다시 나수(拿囚)하고 조율(照律)하여 계하(啓下)한 다음에 즉시 거행하게 할 것이며, 도신에게 분부하여 탐오한 물건을 일일이 계산하여 등문(登聞)하게 한 후에 형조(刑曹)에서 그 가동(家僮)을 가두게 하고 규정에 따라 도로 물리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수령(守令)을 파견하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고 보호하여 편안히 살며 생업을 즐길 수 있게 하려는 것인데, 간혹 이와는 반대로 가혹하게 침해하고 학대해 살아나갈 수 없게 하니 도리어 수령이 없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근래에 탐오행위를 마음대로 하면서 전혀 꺼려하지 않는 것은 다 조정에서 기강을 세우지 않고 나라에서 법을 시행하지 않는데 원인이 있지만, 수령의 난폭한 가렴주구가 어쩌면 이렇게까지 극도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백성들의 아우성소리와 요란한 소문이 아직 이렇게까지 심한 적은 없었으니 통분하기 그지없어 차라리 말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심상하게 처리해서는 안 되니, 이근호를 한 차례 엄히 형신(刑訊)한 다음 원악도(遠惡島)에 안치(安置)하되, 종신토록 물간사전(勿揀赦前)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탐오하는 나쁜 놈들을 엄하게 징계하고 한편으로는 기강을 엄숙하게 바로 잡으라."
하였다.
12월 28일 무오
전교하기를,
"봉보 부인(奉保夫人)의 상(喪)에 쓸 관판(棺板) 1부(部)를 골라 보내고 행해야 할 여러 일은 한결같이 전례(典禮)대로 하되 전례(前例)를 참고하여 될수록 후하게 하도록 호조(戶曹)와 예조(禮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정이섭(丁理燮)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홍종헌(洪鍾軒)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삼았다.
12월 29일 기미
전교하기를,
"왕자(王子)인 강(堈)에게 의화군(義和君)의 작위를 봉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의화군 이강에 대한 저택, 절수전(折受田), 공상(供上) 등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규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김종근(金宗根)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우포청(右捕廳)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고성군(高城郡)에서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켰을 때 법의 그물에서 새어 나갔던 죄인 장응조(張應祚)를 잡아서 공술을 받았는데, 본읍(本邑) 향임(鄕任) 최가(崔哥) 등에게 여러 해 전에 돈을 꾸어 준 일이 있었으나 끝내 도로 갚지 않기 때문에 승려 기월(機越), 박일원(朴一源)과 공모하여 일을 짜고 빚을 독촉하던 과정에서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겁이 난 나머지 서울에 올라왔다가 잡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떤 도깨비 같은 부류이기에 서울과 지방에 드나들면서 패악한 무리들과 결탁한 다음 그들을 의지하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면서 못하는 짓이 없다가 끝내는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켜서 사람을 죽이는 변고까지 있게 하였단 말입니까? 그 범한 죄를 따진다면 어찌 주동한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기미를 알고 법망에서 새어나간 것부터가 이미 통분하기 그지없는데, 하늘의 이치가 매우 밝아 죄인을 잡았습니다. 갇혀 있는 장응조를 해도(該道) 감영(監營)에 압송하여 전후의 내막을 철저히 조사한 후에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본 읍에 압송하여 넘겨주게 하고, 율문(律文)을 적용할 여러 죄인들과 함께 효수(梟首)하여 뭇 사람들을 경계시킨 후에 실태를 등문(登聞)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30일 경신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할 때의 교정청 당상(堂上)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찬수감인 당상(纂修監印堂上) 지종정경(知宗正卿) 이규영(李珪永), 국조어첩 서사관(國朝御牒書寫官) 종정경(宗正卿) 이상응(李商應), 찬수감인 정(纂修監印正) 이해창(李海昌)은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준원전(濬源殿)을 수개(修改)할 때의 공사를 감동(監董)한 도신(道臣) 한장석(韓章錫)과 제릉(齊陵)의 무덤을 수개할 때의 감동한 수신(守臣) 조병직(趙秉稷)은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북로(北路)의 전선(電線)을 가설(架設)할 때와 제약소(製藥所)를 새로 지을 때에 감동(監董)한 총판(總辦)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병석(閔丙奭)의 장계(狀啓)를 보니, ‘근래에 과거의 폐단이 점점 많아져 실지 덕행에는 힘쓰지 않고 곁치레하는 문장만 숭상하며, 의리(義理)를 연구하지 않고 외워 익히는 것만 일삼고 있으므로, 설사 시재(詩才)한 사람이 있더라도 실지로 인재를 얻은 보람은 없습니다. 도내(道內)에 따로 「덕행과(德行科)」를 설치하고 해마다 봄가을에 시취(試取)와 세 번째 해 10월에 종합하여 계문(啓聞)하고 골라 뽑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근년에 본도(本道)에서는 문예(文藝)가 크게 발전하여 특히 장려하는 의미에서 도회(都會) 감시(監試)에서 인원을 늘리는 조치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따로 하나의 과(科)를 설치하겠다는 일은 실학(實學)을 숭상하고 겉치레하는 글을 제거하자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더구나 또 시취하는 규정이 매우 세밀하게 되었으니 모두 장계를 올려 청한 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처음 시작하는 일과 관계되는 만큼 원임 대신(原任大臣)과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에게 하문(下問)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하문할 필요가 없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경주(慶州), 창원(昌原), 진주(晉州), 청송(靑松), 고성(固城), 낙안(樂安), 강진(康津), 삼척(三陟) 등 고을의 표호(漂戶)와 퇴호(頹戶) 및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지급하였다.
김문현(金文鉉)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한성부(漢城府)에서 호구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오부(五部)와 팔도(八道) 및 제주(濟州) 등 3읍(邑)의 원호(元戶)는 도합 157만 6,672호(戶)이고 남자와 여자를 모두 합해서 663만 3,166구(口)이고 그 중에 남자는 334만 6,827구, 여자는 328만 6,339구이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각도(各道)에서 재결(災結) 2만 342결(結)을 특별히 준획(準劃)하도록 허가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태복시(太僕寺)에서 ‘각도(各道) 목장(牧場)에 있는 말의 수가 5,646필(匹)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28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