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30권, 고종30년 1893년 7월
7월 1일 신사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오는 8월 8일 문묘 석전(文廟釋奠)을 전하가 친히 행한 후에 친림(親臨)하시어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는 절차를 응당 마련하여야 하겠는데, 제사 지낸 당일 설행(設行)한 예도 있고 또 그 이튿날 설행한 예도 있으니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 감히 여쭙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 이튿날 설행하되 장소는 경무대(景武臺)로 하며 그 날로 방방(放榜)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7월 2일 임오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하기를,
"중궁전(中宮殿)께서 더위로 인한 체증 때문에 몸이 편치 않다고 하니 들어가 진찰하고 약을 의논하게 해주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3일 계미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를 올려, ‘입진(入診)하게 해주소서.’라고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재차 계사(啓辭)를 올리니, 윤허하지 않았다.
조정구(趙鼎九)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황주목(黃州牧)의 표호(漂戶)와 퇴호(頹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7월 4일 갑신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 좌의정(左議政) 조병세(趙秉世), 판중추부사 정범조(鄭範朝)이다.】 ‘종묘(宗廟)의 추향(秋享)에 전알(展謁)하고 희생과 제기를 살펴보겠다고 한 명을 정지하소서.’라고 하니, 마지못해 따른다는 비답을 내렸다.
7월 6일 병술
예조(禮曹)에서, ‘헌릉(獻陵)과 인릉(仁陵)에 행행(幸行)할 날을 가을에 가서 다시 택하여 들이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지금 가을이 되었으니 마땅히 날을 받아야 할 것이므로, 오는 9월 19일로 택일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7월 7일 정해
신정희(申正熙)를 호위부장(扈衛副將)으로 삼았다.
7월 8일 무자
김성근(金聲根)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조병직(趙秉稷)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특별히 김사철(金思轍)을 발탁하여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삼았다. 이어 주차일본판리대신(駐箚日本辦理大臣)으로 승차(陞差)하라고 명하였다.
7월 10일 경인
장석룡(張錫龍)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명철(李命喆)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한성부(漢城府)의 퇴호(頹戶)와 압호(壓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부산항(釜山港)의 어세(漁稅)를 검열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 박기종(朴淇琮)을 사검관(査檢官)에 차하(差下)하여 그 일을 전적으로 맡아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11일 신묘
호조 판서(戶曹判書) 박정양(朴定陽)을 중건소 당상(重建所堂上)에 더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7월 13일 계사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이어 경모궁(景慕宮)에 가서 전배(展拜)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가을 전알이었다.
7월 17일 정유
김정규(金定圭)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7월 18일 무술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7월 19일 기해
내무부(內務府)에서 아뢰기를,
"중국(中國)에서 이미 항구를 개방하고 상무 위원(商務委員)을 파견한다는 것이 수륙무역장정(水陸貿易章程)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곧 상해(上海)에 위원을 파견하되 찰리통상사무(察理通商事務)라는 명칭으로 좌부승지(左副承旨) 성기운(成岐運)을 차하(差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김상덕(金商悳)을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로 삼았다.
7월 22일 임인
서상조(徐相祖)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교하(李敎夏)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서상조를 곧 체차(遞差)시키고 김완수(金完秀)로, 이교하를 곧 체차시키고 김용원(金容元)으로 대신하였다.
7월 25일 을사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 각국 공사(各國公使)를 접견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빈객(賓客), 봉조하(奉朝賀), 종친(宗親), 종정경(宗正卿), 내무부(內務府)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 외아문 당상(外衙門堂上), 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장관, 2품 이상,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홍문관(弘文館),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관리들에게 사찬(賜饌)하라고 명하였다. 탄신이었기 때문이다.
7월 26일 병오
고영근(高永根)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삼고, 윤석인(尹錫仁)을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7월 28일 무신
도목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김정규(金貞圭)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신병휴(申炳休)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박제순(朴齊純)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정해륜(鄭海崙)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김병직(金炳稷)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박제관(朴齊寬)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이주영(李胄榮)을 도지 부사(冬至副使)로, 황장연(黃章淵)을 서장관(書狀官)으로, 구종서(具鍾書)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윤병선(尹秉善)을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7월 29일 기유
전교하기를,
"오는 8월 28일에 수릉(綏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히 제사를 지내며 건원릉(健元陵), 원릉(元陵)에 전알할 것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