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32권, 고종31년 1894년 8월

싸라리리 2025. 1. 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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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을사

함화당(咸和堂)에 나아가 일본국 대사(日本國大使)인 후작(侯爵)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를 접견하였다. 국서(國書)를 바쳤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지금 나라 안에 일이 많아서 모든 것이 텅 비었다. 백성들을 위하여 바라는 것은 오직 농사가 잘 되는 것뿐인데, 듣자하니 경상도(慶尙道)에서는 한재(旱災)가 거의 절반이나 휩쓸어 수확도 하기 전에 흉년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한다. 네 해 동안 거듭 흉년이 든 나머지 쌀독이 텅 비었으니 불쌍한 나의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저 구학(溝壑)에 굴러 떨어지는 형편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잠자리에서 자주 일어나게 된다.
특별히 돈 5만 냥(兩)을 내려주니 선무사(宣撫使)가 감사(監司)와 충분히 상의하여 재해를 입은 각 고을에 우선 적당히 분배하고 성심으로 구제하여, 자신의 아픔처럼 관심을 돌리는 나의 지극한 뜻을 받들게 하라."
하였다.

 

의금사(義禁司)에서, ‘죄인 박영효(朴泳孝)가 원통한 일을 하소연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원정(原情)을 함부로 제출하였으나, 죄명이 매우 엄중한 만큼 감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받아들일 것이다."
하였다.

 

승선원(承宣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의금사(義禁司)의 초기(草記)에 대한 판부(判付)가 내린 것을 보고 신 등은 깜짝 놀라서 더없는 걱정과 한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 이 죄인이 지은 죄는 지극히 중하고 관계되는 바가 더욱 크건만 멀리 해외로 도망쳐서 국법이 오랫동안 적용되지 못하였으며, 대궐에서 법령을 제시하여 여러 사람들의 울분은 갈수록 더욱 씻을 길이 없었습니다. 나라에 일이 많게 되자 이때야 말로 기회라고 여겨서 갑자기 몸을 드러내고 버젓이 원통한 일을 하소연하면서 조금도 꺼려하지 않으니 더없이 놀랍고 분통한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원정(原情)을 받아들이라는 명을 빨리 중지하시고 엄한 처분을 내리시어 나라의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즉시 받아들일 것이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재차 계사(啓事)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즉시 봉입(捧入)하라."
하였다.

 

이준용(李埈鎔)을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으로 삼았다.

 

의금사(義禁司)에서, ‘박영효(朴泳孝)의 원정(原情)을 봉입(捧入)하였습니다.’라고 아뢰니,  【원정은 다음과 같다. "죽을 죄를 지은 신 박영효(朴泳孝)는 원통하고 절박한 사유에 대하여 아룁니다. 신은 대대로 녹(祿)을 타먹는 가문의 후손으로서 신의 부자형제 때에 이르러서는 특별한 총애를 받아서 모두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데 신의 부자는 특별한 은덕에 감격하였으나 보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아버지 박원양(朴元陽)은 신의 형제들을 늘 경계하기를 ‘나라의 은덕에 보답하려면 위험과 어려움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나이 어리고 식견이 얕아서 그 말을 듣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만 성은(聖恩)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할 생각을 하였으나, 사리에 맞는가 거슬리는가를 가리지는 못하였습니다. 갑신년(1884) 겨울에 이르러 시국 형편이 날로 어려워지고 나라의 정세가 점점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는 걱정스럽고 삼가는 심정을 금할 수 없어서 바로잡을 방도를 찾으려고 하였으나, 충성을 다하기도 전에 누명을 뒤집어써서 위로는 임금에게 걱정을 끼치고 아래로는 집안에 화를 미치게 하였으며 부모형제는 거의 다 죽고 이 한 몸 떠돌아다니다가 다른 나라에 도망쳤습니다. 신이 지은 죄는 한 시각이라도 하늘 땅 사이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신이 한평생 마음속에 다짐한 것은 푸른 하늘에 물을 수 있습니다. 만일 한 번 드러내지 않고 개천과 수렁 속에서 스스로 목을 맨다면 애매한 누명은 천 년 후에도 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보잘것없는 몸이 떠돌아 다닌 지도 거의 12년이라는 오랜 세월 가까이 됩니다. 삼가 듣건대, 요즘 전하의 정사와 교화가 개혁되어 허물을 벗겨준다고 하기에, 신은 기쁨을 금할 수 없고 뒤이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고국에 돌아가서 죽는 것이 바로 오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울러 신의 이번 걸음은 단지 전하의 얼굴을 다시 우러러보고 구구한 심정을 다 하소연하려는 것이 첫째였고, 부모형제의 해골이나 수습하여 장사 지내는 것이 둘째였습니다. 이 소원만 성취한다면 설사 개천과 수렁에 물러가서 죽는다 해도 한 될 것이 없겠습니다. 신이 이미 임금에게 죄를 짓고 부모에게 화를 끼쳤으니 그저 천지간에 있는 하나의 곤궁한 사람일 뿐입니다. 일본에서 나그네 살이 하는 11년 동안 잠을 자도 편치 않고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았습니다. 처자를 두지도 않았고 음악을 즐기는 데 참여하지도 않은 채 밤낮으로 근심과 황송함에 싸여 오직 우리 성상께서 해량하여 주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이번에 와서 성밖에 엎드려 있은 지가 벌써 여러 날이 지났으나 구중궁궐 속에 보잘것없는 정성이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가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려 강음(江陰)에서 대명(待命)하니 천지 같은 부모의 심정으로 신의 괴로운 마음을 하감(下鑑)하시고, 신에게 결코 딴 생각이 없음을 살피시어 법 맡은 관청으로 하여금 도망하고 명령을 어긴 죄를 의논하게 하신다면, 도끼로 찍고 끓는 가마에 집어 넣는 형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어쩔 줄을 몰라서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비답하기를,
"응당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8월 2일 병오

전 용호영(前龍虎營)의 군무를 통위사(統衛使)가 관할(管轄)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본부(本府)의 도헌(都憲) 유길준(兪吉濬)이 일전에 내무협판(內務協辦)으로 전직(轉職)되었습니다. 신의 부에서는 모든 일을 처음 시작하는 것이라 전적으로 해당 관원의 능력에 의거하고 있는데 이제 만일 버리고 간다면 실로 지장이 많습니다. 청컨대 유길준을 그 자리에 도로 임명하고 새로 차임한 도헌 조한국(趙漢國)을 내무아문협판(內務衙門協辦)으로 바꾸어 제수함으로써 양쪽의 공무에 다 편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학진(金鶴鎭)의 장본(將本)을 계하한 것을 보니, 전주(全州) 토착민들이 연명(聯名)으로 신소장을 올린 여러 가지 조목 중에는 나라의 재정에 관계되는 것으로써 처분을 받아야 할 것이 일곱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엽전(葉錢) 5만 냥(兩)을 공금(公金)에서 빌려 불에 탄 집들을 지은 후에 5년을 기한으로 해마다 배분하여 바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각면(各面)에서 받지 못한 계사년(1893) 분의 세미(稅米) 5,556석(石)을 무자년(1888) 규례대로 매석당 25냥씩 거두고 부(府) 안의 4개 면에서 받지 못한 세납(稅納) 520석은 특별히 감면해 달라는 것입니다.
셋째, 여러 해 동안 바치지 못한 미태(米太) 4,235석은 상정(詳定)으로 대신 받고 군포(軍布) 35동(同) 20필(疋) 13척(尺)은 순전(純錢)으로 대봉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넷째, 보세(洑稅)와 잡세(雜稅)를 혁파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기한을 정하여 진전(陳田) 230결(結) 10부(負)에 대한 조세를 다시 감면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전운소(轉運所)의 새로 만든 잡비와 양여미(量餘米)를 바치지 말라 달라는 것입니다.
일곱째, 논과 밭 모두를 도조(賭租)로 마구 받거나 마름〔舍音〕과 하인들이 짓는 폐단을 금단(禁斷)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전주부(全州府)만은 바로 국가의 조상이 일어난 곳으로서 각별히 중요한 곳이건만, 비적(匪賊)이 창궐한 이후부터 민호(民戶)가 없어지고 사람들이 고장을 떠나 풍파와 재난을 겪은 것처럼 되었으니 생각하기에도 처참합니다. 응당 돌보아주어야 할 것이니 불탄 집을 지을 자금으로 공금 5만 냥을 빌려주고 5년을 기한하여 해마다 배분하여 바치게 하는 문제와, 거두지 못한 계사년(1893) 분의 세미 5,556석을 매석당 25냥씩 거두고 520석은 감면하는 문제 두 가지의 조목은 모두 특별히 윤허하여 주소서. 여러 해 동안 묵은 미태(米太)와 군포(軍布)는 이미 조사하여 보고하게 했으니 도내(道內)의 총대장을 만들어 보고해 오는 대로 품처(稟處)하겠습니다. 보세(洑稅)와 잡세(雜稅)에 관해서는, 이미 10년 사이에 새로 만들어낸 세는 모두 폐지하라고 한 명령이 있었으니 다시 논할 필요가 없고, 일정한 해를 기한으로 진전(陳田)에 대한 조세를 감면하는 문제는 연분 장계(年分狀啓)가 올라오는 대로 다시 품처하겠습니다. 전운소(轉運所)의 잡비와 양여미(量餘米) 등의 명목은 지난번에 염찰사(廉察使)가 논계(論啓)한 것과 관련하여 감사(監司)와 총무관(總務官)으로 하여금 충분히 상의하여 바로잡게 했으니 그대로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논과 밭을 모두 도조(賭租)로 마구 거두는 것과 각종 폐단은 또한 감사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여 일일이 금지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탁지아문 대신(度支衙門大臣) 어윤중(魚允中)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오늘날은 바로 국가의 존망(存亡)이 좌우되는 때입니다. 청(淸) 나라와 일본(日本)이 나라의 영역 안에서 서로 다투고 선비와 백성들이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에서 소동을 피우고 있으니, 군신 상하가 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바꾸어 기강을 세워서 끊어지려는 나라의 운수를 잇고 이미 흩어진 인심을 수습하여 돌려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의회(議會)를 설치하는 것은 원래 경장(更張)하는 데 있어 먼저 해야 할 일이니 마땅히 나라 안에서 선발하되, 성현(聖賢)의 뜻을 체득하고 호걸(豪傑)의 도리를 주견으로 삼은 사람을 구하여 그곳에 둠으로써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근본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의원(議員)들을 외국 형편을 대충 알고 대궐에 드나드는 사람들로 임시 충정(充定)하는 데 불과했는데, 다시 선발할 때에는 신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내력은 원래 전하께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매사에 걸핏하면 낭패하여 배척을 당한 지 이미 오래이므로, 함부로 들어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런데도 사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억지로나마 회의에 참가한 것은 사실 위급한 때에 차마 물러나겠다고 할 수 없어서였지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의안(議案)을 논하는 것만 보더라도 채택할 만한 세상일이 있건만 본말(本末)을 골라서 선후(先後)를 정하는 데 불과할 뿐인데, 그것을 뒤집어 놓으면 혼란될 것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외국 것을 본받으려 하면서 단지 형식만 답습하고 고루한 규정을 없애려고 하면서 단지 정해진 법만 허물어 버리니, 말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실속 있는 노력으로 실속 있는 일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갖 헛된 논의만 늘어놓아 한때의 쾌감이나 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신으로 말하면 한 번 의회(議會)에 들어간 이상 벼슬과 녹봉(祿俸)에 순차가 없으니 진실로 그 의견을 듣고 그 일을 처리할 수만 있다면 직위가 아무리 낮더라도 무슨 나쁠 것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지 높은 벼슬에 뛰어오르려고만 하면서 그만두지 않으니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따지고 보면, 사실 관리가 적임자가 아닌데도 함부로 작위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찌 다시 이전의 잘못을 답습할 수 있겠습니까?
탁지아문(度支衙門)의 대신(大臣)은 중요한 임무이니 신의 재능으로는 감당할 수 없고, 대신의 반열은 중요한 품계이니 사람들의 기대에 맞지 않으며, 의원(議員)은 중요한 자리이니 더구나 신이 함부로 끼일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굽어 살피시어 모두 해임시키고 덕이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다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런 때에 이 직임을 어찌 경솔히 교체할 수 있겠는가? 경은 사임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4일 무신

전교하기를,
"지난날 박영효(朴泳孝)의 문제는 그 형적(形迹)을 논한다면 누구인들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느냐마는 그의 마음을 살펴보면 사실 용서할 만한 점이 있다. 이제 원정(原情)을 보니 10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도 오히려 나라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의 죄명을 특별히 말소하여 조정의 관대한 뜻을 보일 것이다."
하였다.

 

승선원(承宣院)에서 아뢰기를,
"삼가 전교가 내린 것을 보니 박영효(朴泳孝)의 죄명을 특별히 말소하라고 하였으므로, 신 등은 깜짝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이어 걱정스럽고 통분한 생각이 간절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역적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마는, 이 죄인처럼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자가 어찌 또 있겠습니까? 나라를 배반하고 은혜를 저버린 죄는 원래 국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데, 바다를 건너 자취를 숨겼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처럼 흉악한 죄인을 해당 형률로 다스리지 않고 단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을 베풀어 관대히 용서하는 은전을 선뜻 적용한다면 나라의 법을 적용할 길이 없고 여론을 풀 길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생각하시고 이미 내린 명을 빨리 중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름대로 참작한 것이 있으니 즉시 반포하라."
하였다.

 

조한국(趙漢國)을 의정부 도헌(議政府都憲)으로, 조인승(曺寅承)을 내무아문 협판(內務衙門協辦)으로 삼았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지금의 형편을 보면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가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날마다 외전(外殿)에 나와서 모든 정사를 친히 결재한 다음에 나라의 정사가 잘 되고 조정이 깨끗해질 수 있다. 그래서 이전에 계품(啓稟)하여 윤허를 받은 바가 있으니 회의하는 날에는 총리대신(總理大臣)이 의원(議員)들을 거느리고 편전(便殿)에 나아가서 그날의 안건을 진주(陳奏)하고 시행한다.
1. 남쪽 세 도(道)의 난민들이 곳곳에서 교화에 맞서서 소란이 날로 심해지고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진무(鎭撫)하는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원임 대신(原任大臣) 가운데 교지를 내려 한 사람에게 도선무사(都宣撫使)의 책임을 특별히 맡긴 다음, 며칠 안으로 떠나게 하여 필요한 인원을 고르고 관청을 설치하며 수령들을 엄하게 신칙하고 백성들을 효유(曉諭)하여 귀화하게 하는 한편, 이어 적당한 관원을 파견하여 군사를 데리고 각 고을을 순행하면서 무마하게 한다.
1. 결가(結價)를 속히 정하여 바닷가 고을에서는 몇 냥(兩)이고 산골 고을에서는 몇 냥이라는 것을 빨리 행회(行會)하여 백성들의 의심을 풀어준다.
1. 근년에 각궁(各宮), 각사(各司)에서 사사로이 절목을 만들어 의정부(議政府)의 승인을 받은 다음 거두어들이는 것을 일절 시행하지 못하게 한다.
1. 지금 본국과 일본(日本)은 관계가 중하여 교제를 더욱 긴밀히 하여야 하니, 이번 보빙대사(報聘大使)를 명성과 덕망이 평소에 드러난 사람으로 신중히 선택하여 빨리 파견하되 동경주재(東京駐在) 판리공사(辦理公使)는 감하(減下)하고 교섭 사무에 익숙한 사람을 전권공사(全權公使)로 차송(差送)한다.
1. 현임 대장(大將)들에게 각부(各府), 각 아문(衙門)의 협판(協辦)을 겸임하지 않게 하여 체계가 있도록 한다.
1. 한성부(漢城府)는 서울의 백성들을 관할하고 각국 상인의 소송을 맡아 처리하는 만큼 원래 다른 지방 고을과는 달리 사무가 비교적 긴급하다. 판윤(判尹)은 감하(減下)하고 소윤(少尹)은 한성 부윤(漢城府尹)으로 개칭(改稱)한 다음 3품인 주임관(奏任官)으로 임명한다. 주사(主事) 7원(員)은 한성 판관(漢城判官), 주부(主簿), 아전과 오부(五部)의 영(令), 도사(都事) 중에서 내무아문(內務衙門)이 문관을 임명하는 규정에 의하여 품계를 나누어 차하하고, 해부(該府)의 총무국(總務局)에 소속시키며 5원이 오부를 나누어 맡는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8월 5일 기유

승선원(承宣院)에서 재차 계사(啓事)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전 비답이 있으니 속히 반포하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심순택(沈舜澤),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김병시(金炳始), 조병세(趙秉世), 정범조(鄭範朝)이다.】 "신 등은 방금 내린 전교를 보고서야 비로소 죄인 박영효(朴泳孝)의 죄명을 말소하라고 명한 것을 알았습니다. 신 등은 서로 돌아보면서 깜짝 놀라서 더없이 걱정스럽고 통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 이 죄인은 죄가 더없이 큰데도 1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도망쳐 요행히 법망을 빠져나갔으며 방자하게 한 장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감히 대궐에다 올렸으니, 기탄함이 없는 것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번에 내린 큰 성인의 특별한 처분에 대하여 비록 신 등의 얕은 소견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국법이 더없이 엄하고 여론이 더욱 비등하는 데야 어찌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생각이 복받쳐 감히 같은 목소리로 하소연하니 성명께서는 빨리 이미 내리신 명을 중지하시고, 이에 적용하지 못한 형률을 적용함으로써 나라의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 처분은 사실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일이니, 노성(老成)한 사람으로서는 응당 해량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원본】 36책 32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2책 514면
【분류】사법-탄핵(彈劾)
"신 등은 방금 내린 전교를 보고서야 비로소 죄인 박영효(朴泳孝)의 죄명을 말소하라고 명한 것을 알았습니다. 신 등은 서로 돌아보면서 깜짝 놀라서 더없이 걱정스럽고 통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 이 죄인은 죄가 더없이 큰데도 1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도망쳐 요행히 법망을 빠져나갔으며 방자하게 한 장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감히 대궐에다 올렸으니, 기탄함이 없는 것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번에 내린 큰 성인의 특별한 처분에 대하여 비록 신 등의 얕은 소견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국법이 더없이 엄하고 여론이 더욱 비등하는 데야 어찌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생각이 복받쳐 감히 같은 목소리로 하소연하니 성명께서는 빨리 이미 내리신 명을 중지하시고, 이에 적용하지 못한 형률을 적용함으로써 나라의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 처분은 사실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일이니, 노성(老成)한 사람으로서는 응당 해량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경연청 부학사(經筵廳副學士) 김춘희(金春熙) 등이 연명 차자(聯名箚子) 【대신(大臣)들의 차자와 내용이 대략 같다.】 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미 참작한 것이 있다."
하였다.

 

8월 6일 경술

용호영(龍虎營)을 통위영(統衛營)에 합부(合附)하라고 명하였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7월 20일 이후의 논핵소(論劾疏)로서 비답을 받은 것들은 전번의 의안에 의하여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도찰원(都察院)에 넘기도록 청한 일에 대해, 비답하기를,
"이미 처분했으니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1. 각부(各府), 각 아문(衙門)의 세칙(細則)과 장정(章程)은 해당 부, 아문에서 이 달 20일 안으로 수정하여 의정부에 보내어 의회(議會)에 다시 넘겨 공인(公認)을 받아 시행하겠습니다.
1. 각부, 각 아문에서는 사무를 처음 시작하는 경우 고문(顧問)의 도움을 받아야 하므로 외국인들을 고용하는 것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외무아문(外務衙門)에서 서둘러 기한을 정하여 초빙하도록 하겠습니다.
1. 상신(相臣)이나 장신(將臣)들은 공무나 사사를 물론하고 구애됨이 없이 성 밖에 나갈 수 있으나, 다만 공무 외에는 밤을 지내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1. 지금 재정이 매우 긴박하니, 전환국(典圜局)에 따로 총판(總辦) 1원(員)을 두어 사무를 전적으로 관리하게 하되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규정을 만들고 대책을 세워 며칠 내로 돈을 주조하게 하여 유통시킬 수 있게 하겠습니다.
1. 아편(鴉片)에 대한 금령이 원래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이제부터 옛 금령을 다시 강조하되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따로 금지 조항을 정하여 민간에 공포하도록 하겠습니다.
1. 높고 낮은 관원들은 사적으로 경무청(警務廳)에 소속된 인원을 불러갈 수 없고, 각부, 각 아문이라 하더라도 공문으로 통지하지 않고서는 사적으로 불러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1. 각 항구(港口)의 경찰관을 경무관(警務官)으로 고쳐 부르고 경무청(警務廳)에 소속시키며 그 승진과 강등 등의 사무는 경무청에서 내무 대신(內務大臣)에게 신청하여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1. 관원의 품계를 올려 경무 부관(警務副管)은 경무 부사(警務副使)로 고치고 3품으로 올리며, 경무관(警務官)은 주임 경무(奏任警務)로 올리고, 서기관(書記官)은 판임 주사(判任主事)로 고치겠습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8월 7일 신해

이도재(李道宰)를 공무아문 협판(工務衙門協辦)으로, 백낙윤(白樂倫)을 군무아문 협판(軍務衙門協辦)으로, 박세환(朴世煥)을 인천 감리(仁川監理)로, 김하영(金夏英)을 원산 감리(元山監理)로, 진상언(秦尙彦)을 부산 감리(釜山監理)로 삼았다.

 

외무아문(外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세 항구의 방판(幫辦)은 원래 쓸데없는 관리로서 이번에 경장(更張)할 때에 변통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감하(減下)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마포(麻浦)에 사험(査驗)을 둔 것은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것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상업(商業)이 침체되어 낭비를 고려해야 하니 우선 혁파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8월 9일 계축

영평군(永平君) 이경응(李景應)을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병호(趙秉鎬)의 장본(將本)을 보니, ‘영천군(永川郡)에서 난민(亂民) 수천 명이 각각 창과 곤봉을 들고 관아에 뛰어들어 창문과 벽을 부수고 군사 대장을 불태웠으며 민가를 허물어 버리고 떼를 지어 행패를 부렸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영남(嶺南)에서는 민심이 안정되지 않아서 전해오는 소문이 놀랄 만한데, 이번 영천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킨 행동은 더없이 패악하여 심상하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영해부 안핵사(寧海府按覈使) 이중하(李重夏)에게 일이 끝난 다음에 빨리 해당 고을에 가서 엄하게 조사하여 등문(登聞)하게 해야 합니다.
전 군수(前郡守) 홍용관(洪用觀)에 대하여 도신(道臣)의 계사(啓事)에서 죄줄 것을 청하였는데, 정사에서 잘못이 없는 이상 어찌 이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조사 보고를 기다려 다시 품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10일 갑인

전교하기를,
"기장 현감(機張縣監) 이준필(李駿弼)은 벼슬에 제수(除授)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아직 부임하지 않았으니 거조(擧措)가 교활하고 간악하다. 우선 관리 대장에서 없애고 평민으로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관원의 징계 규례에는 견책(譴責), 벌금(罰金), 면직(免職) 세 조목이 올라 있고 관원의 공죄(公罪)에 대해서는 따로 감금(監禁) 한 조목을 더 넣었으나, 가장 엄중한 공죄는 감금에만 그칠 수 없으니 도형(徒刑)과 유형(流刑) 두 조목을 더 넣어 율례(律例)로 정한다.
1. 의안 중에서 각 아문(衙門)의 사무에 관계되는 것을 품결(稟決)하는 것은 의정부(議政府)에서 해당 아문에 통지하여 기한을 정하고서 실시하게 하고 혹시라도 지체시키지 않도록 한다.
1. 각 영읍(營邑)의 구제금이나 염초(鹽硝)의 대전(代錢)을 이미 배정한 것 외에는 일절 없애며, 그 밖에 신설한 명목 중에서 이미 없앤 것은 모두 일일이 장부를 만들어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각도(各道)에 행회(行會)한다.
1. 진휼미(賑恤米)를 빨리 형편대로 처리해야 하겠는데, 백성들이 사창(社倉)을 설립하고 쌀이나 벼를 저축하여 기한을 정하여 출납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제도이다. 의정부에서 규례를 정하여 각주(各州)와 각현(各縣)에 나누어 줌으로써 실행하기에 편리하게 한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1. 미국인 르 장드르〔李善得 : Le Gendre, Charles William〕을 해고하고 그에게 지불하지 않은 급료를 탁지부(度支部)에서 명백히 계산하여 내주도록 한다."
이에 대해, 비답하기를,
"우선 천천히 하라."
하였다.

 

기주(記注) 이희화(李喜和)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갑신년(1884) 변란에 대하여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대개 박영효(朴泳孝)와 김옥균(金玉均)은 실로 만고에 없는 흉악한 역적으로서 하늘도 노하고 귀신도 책망할 일입니다. 김옥균에게는 이미 이괄(李适)과 신치운(申致雲)에게 적용한 형률을 적용하여 이빨을 갈며 분개하는 온 나라 사람들의 소원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박영효로 말하면 하늘에 사무치는 또 하나의 흉악한 역적으로서 10여 년 간 다른 나라에 도망쳐 흉악한 음모와 비밀 계책으로 화근을 꾸며가지고, 우리나라가 피폐한 기회를 타서 저들의 군사가 크게 출동하여 무난히 도성에 들어와서는 대궐을 포위하고 임금을 위협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이것은 다 박영효가 부추기고 끌어들인 괴변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의 엄중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기세에 겁을 먹고는 심지어 등용하고 죄명을 말소하라는 명까지 내리셨습니다. 신 등은 적이 생각건대 앞으로 역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임금을 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그들을 이루 다 처단하시겠습니까? 그리고 500년 간 내려오면서 그 많은 흉악한 자들의 후손에 대하여 다 원한을 풀어주고 서용(敍用)하려 한다면 그 조상들에게는 무엇으로 갚아주시겠습니까?
더구나 경장(更張)하는 초기에 이런 자들을 서용한다면 개화하는 방도가 혼잡을 면할 수 없고 치욕이 막심할 것이며, 지금 각도(各道)에서 벌떼처럼 일어난 무리들도 이 박영효에게 힘입어서 분격하고 팔을 걷어붙이려는 마음이 더욱 성해질 것이니 소란스러운 변고는 반드시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장차 어떻게 민심을 진정시키겠습니까?
박영효의 흉악한 죄상에 대해서는 말하기도 더럽습니다. 신이 비록 미관 말직에 있지만 어찌 차마 임금을 모욕한 역적과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시어 박영효를 즉시 의금사(義禁司)에 넘기고 김옥균과 마찬가지의 형률로 다스려 조종(祖宗)이 마련한 나라의 법을 세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글을 보고 잘 알았다."
하였다.

 

8월 12일 병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친위영(親衛營)을 설치하는 것이 가장 급선문이다. 영솔 장관(領率將官) 친위영 도총관(親衛營都總管)으로 부르고 대오(隊伍)를 편성하게 한다.
이에 대해, 비답하기를,
"나중에 처분하겠다."
하였다.
1. 실직(實職)이 없는 의원(議員)에게는 각 아문(衙門)의 품계대로 월급을 정한다.
1. 한성부 판임관(漢城府判任官)은 해당 부윤(府尹)이 자체로 선발하고 주임관(奏任官)은 내무 대신(內務大臣)이 아뢰어 차임하며, 세 항구(港口)에 파견하는 판임관(判任官)은 해당 항구의 감리(監理)가 자체로 선발하고 주임관은 외무 대신(外務大臣)이 아뢰어 차임한다. 파견하는 주임관과 판임관의 월급은 모두 중앙 각 아문(衙門)의 규례대로 하고 지방 제도를 개정(改正)하기 전에 감리의 체제는 따로 새 규례를 정한다.
1. 국구방(國舅房)의 제수(祭需) 값으로 주는 쌀은 이미 탁지부(度支部)에서 규례대로 지출하고 있으니 종전에 태상시(太常寺)에서 제물을 보내주던 절차는 영원히 중지하도록 한다.
1. 각도(各道) 환곡(還穀) 중에서 이무(移貿), 가작(加作) 등의 명목을 이제부터 영원히 혁파한다.
1. 의복 제도를 이미 변통하였으니 중앙과 지방에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된다. 빨리 행회(行會)하여 일률적으로 하되,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공무로 좌기(坐起)할 때에는 모두 장복(章服)을 입고 하관(下官)이 상관(上官)을 만나는 경우 공식으로 만날 때에는 정복을 입고 사적으로 만날 때에는 답호(褡護)를 입으며 지방 영읍(營邑)의 잡색 군졸(雜色軍卒)의 복색(服色)은 경군(京軍)의 제도대로 따른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8월 13일 정사

이재면(李載冕)은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로, 이교영(李敎榮)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삼았다.

 

장위사(壯衛使) 조희연(趙羲淵)에게 군무 대신(軍務大臣)을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종백부(宗伯府)에서 아뢰기를,
"수릉(綏陵)의 잔디를 고쳐 입힐 날짜와 시간을 이달 8월 16일 손시(巽時)로 추택(推擇)하여 계하(啓下)받았습니다. 그 전에는 능에 잔디를 고쳐 입힐 때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거행한 규례가 있었으며, 또 특교(特敎)에 의하여 의정부(議政府) 이하의 관리들이 가서 감독한 전례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관제가 고쳐졌으니 신의 부(府)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원임 대신(原任大臣)과 소종백(小宗伯)이 하직인사를 그만두고 떠나라."
하였다.

 

8월 14일 무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무릇 중앙과 지방의 대소 관원(大小官員)을 선발 등용할 때에는 비록 친족이라도 구애됨이 없이 공정하게 추천하도록 한다. 의정부(議政府) 전고국(銓考局)에서는 추천한 사람의 성명을 일일이 장부에 기록하였다가 혹시 벼슬을 받은 사람이 직접 사죄(私罪)를 범하였을 경우에는, 재판 결과를 보아서 죄의 경중에 따라 해당 추천한 사람에게 1개월 이상부터 3개월까지를 기한으로 월급을 벌금으로 받아 【추천한 사람에게 현직이 없을 때에는 3개월부터 12개월까지 후보자로 추천될 자격을 중지한다.】  추천하는 법을 엄하게 밝힘으로써 공기(公器)를 중히 한다.
1. 각 지방에서 공금을 바칠 기한을 어겼다가 위 관청에서 공문으로 독촉하면 그때그때 민간에서 빌려 구차스럽게 메우고는, 나중에 다시 갚는 것은 열에 한둘도 안 된다. 백성에게 끼치는 폐해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빨리 엄단하여 훗날의 폐단을 막도록 한다.
1. 장리(贓吏)를 엄하게 처리하고 탐오한 물건은 관청에서 몰수하며, 상납(上納)하는 것 중에서 수령이 축내거나 아전이 축내는 것을 감사(監司)가 조사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리게 한다는 내용은 지난번 의안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다시 각도(各道) 감사(監司)에게 신칙하여 엄격히 조사하여 도로 징수하고 민간에서 다시 거두는 것을 일절 금지한다.
1. 전 광무 감리(前鑛務監理) 이용익(李容翊)을 도로 감리로 차하(差下)하여 함경 광무소(咸鏡鑛務所)를 감독하게 하며 세금은 3개월에 한 번씩 공무국(工務局)에 바쳐서 다시 탁지 아문(度支衙門)에 넘기도록 한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학진(金鶴鎭)의 장계(狀啓)를 보니, ‘무안 현감(務安縣監) 이중익(李重益)이 이번 동학란(東學亂) 때 고립된 성(城)을 굳게 지킨 결과 온 경내가 그 덕으로 편안하였는데, 임기도 차기 전에 갑자기 체차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잉임시키도록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해당 수령의 실적이 이와 같으니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여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해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15일 기미

선무사(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이 아뢰기를,
"윤음(綸音)을 반포하여 알리고 덕의(德意)를 선포하여 백성들을 무마하였으나, 흩어졌던 난민들이 다시 모이고 해산하였던 무리들이 다시 집결한 것은 사실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입니다. 황송함을 금할 수 없어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겠으니,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8월 16일 경신

박정양(朴定陽)을 일본 보빙 대사(日本報聘大使)로, 이완용(李完用)을 전권공사(全權公使)로 삼았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죄인 본인 외에 연좌(緣坐)시키는 형률을 일체 시행하지 말도록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전후 죄인들 중에서 범한 죄가 매우 엄중한 경우는 죄명을 벗겨주자고 선뜻 논의하기가 어렵겠지만, 범인의 아들이나 손자 및 세월이 오래되어 친족 간의 정리가 끊어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리이건 일반 사람이건 구애됨이 없이 〖연좌시키는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는〗규정을 통용하여 관대한 은전을 보이고, 겸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길을 넓힐 것입니다.
이에 대해, 비답하기를,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니, 경솔히 의논하기 어렵다."
하였다.
1. 이제부터 대소 관원들을 제수한 뒤 출사(出仕)하는 날짜를 서울에서는 5일로 하고 지방에서는 각부(各府), 각 아문(衙門)에서 해영(該營)에 관문(關文)을 보내 본인에게 전달한 다음, 명령이 도착한 날부터 경기(京畿)에서는 10일, 충청도(忠淸道), 강원도(江原道), 황해도(黃海道)에서는 15일, 전라도(全羅道), 경상도(慶尙道), 평안도(平安道), 함경 남도(咸鏡南道)에서는 20일, 함경 북도(咸鏡北道), 제주(濟州)에서는 30일로 하도록 정식(定式)을 만들고, 만일 기한이 지나면 칙임관(勅任官)과 주임관(奏任官)은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지(稟旨)하여 견책하고 판임관(判任官)은 해당 아문에서 먼저 감하(減下)한 뒤 보고하며, 일단 출사한 사람의 사진(仕進)한 일수를 계산하여 1개월 안에 사정으로 인해 휴가를 지급받은 경우 외에 사진하지 않는 자에게는 날수를 계산하여 봉급을 줄이고 15일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사진하지 않은 관원의 규례에 준하여 면직하는 사안입니다.
1. 각도(各道)에서 도시(都試)와 취재(取才) 규정을 일체 혁파하도록 우선 행회(行會)하고, 다시 군무아문(軍務衙門)에서 따로 군인을 선발하는 규례를 정하는 사안입니다.
1. 각 지방관은 공무로 인하여 근무지를 떠나는 경우 이외에 사적인 사정으로 말미를 받는 것과 신구(新舊) 관리가 교체하는 동안의 녹봉(祿俸)에 대한 날짜 계산은 겸관(兼官)의 경우에 속하게 하는 사안입니다.
이상에 대해 의정부(議政府)에서 행회하게 하소서.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8월 17일 신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전 교리(前校理) 윤시영(尹始永)과 전 참봉(前參奉) 이재량(李載亮)을 모두 양호 선무사(兩湖宣撫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차하(差下)하여 분담해서 일을 돕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선무사(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의 장계(狀啓)와 관련하여 묘당(廟堂)에서 품처하게 하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열읍(列邑)에 모여든 비적(匪賊)들이 선유문(宣諭文)을 받고는 모두 감격하고 뉘우치면서도 곳곳에서 미쳐 날뛰는 버릇은 계속 여전하였습니다. 또 공주(公州)에 모여서 해당 도신(道臣)과 해당 판관(判官)을 유임시켜 달라고 하는 자들이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미 유임시켜 주기 바란다고 하면서 창을 들고 총을 쏘며 벌려 서서 길을 막는 것은 그 의도가 실로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해괴하고 고약한 행동은 이전에 들어 보지 못한 것인데도 ‘유임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는 등의 말을 임금에게 아뢰는 글에 올렸으니 더없이 외람된 행동입니다. 선무사에게 추고(推考)하는 형전을 시행하소서. 그리고 해당 비적들은 줄곧 은혜로 무마할 수는 없는 만큼 마땅히 위엄을 보여 겁을 먹고 수그러들게 해야겠지만, 해산할 기미가 조금 있다고 하니 또한 순전히 위엄으로만 복종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해당 선무사와 해당 도신에게 별도로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시 각별히 효유(曉諭)하여 일일이 귀순하게 한 뒤 즉시 등문(登聞)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수령이 체차되어 돌아 올 때에 공적인 빚이나 사적인 빚을 져서는 안 된다고 전후로 조정에서 신칙한 것이 참으로 어떠하였습니까? 지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병호(趙秉鎬)의 장본(狀本)을 보니, ‘인동 전 부사(仁同前府使) 이소영(李紹榮)은 관직에 있은 지 4달도 못 되는 기간에 새로 받은 결전(結錢)을 유용한 것이 1,313냥(兩) 3분(分)입니다. 그 죄상을 묘당(廟堂)에서 품처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는데, 이에 대해 계하하셨습니다.
나라의 법이 더없이 엄한데도 이렇게 위반하는 죄를 지었으니 몹시 놀라운 일입니다. 인동 전 부사 이소영을 해사(該司)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그의 집이 해도(該道)에 있다고 하니, 장본에서 말한 대로 지방관을 엄히 신칙하여 그 가동(家僮)을 잡아 가두어 며칠 안으로 도로 받아내도록 분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학진(金鶴鎭)의 장본(狀本)을 보니, ‘나주 전 목사(羅州前牧使) 민종렬(閔種烈)을 특별히 잉임 시키도록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 수령은 비적(匪賊)들이 소란을 일으킨 이후로 성첩(城堞)을 수리하고 장정을 모집하여 4개월 동안이나 성을 지키면서 우뚝이 홀로 보전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백성을 무마하는 일과 적을 막는 책임을 생소한 사람에게 맡기기는 어려우니, 장본에서 청한 대로 특별히 잉임시키고, 이어 해당 진영(鎭營)의 장수(將帥)에게 관할하는 각 고을에서 협동하여 비적(匪賊)을 토벌하고 백성을 무마하는 방도를 형편에 따라 마련하게 하여 시종일관 성과가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홍순형(洪淳馨)을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 이항의(李恒儀)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아뢰기를,
"전환국(典圜局)을 이번에 본 아문에 소속시키고 은행국(銀行局)에서 그 일을 겸하도록 한 데 대해 계하하셨습니다. 해국(該局)에서 돈을 주조하는 일이 막 시작된 만큼 따로 총판(總辦)을 차임하여 먼 곳에서 사무를 처리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해국의 주사(主事) 이호성(李鎬成)은 오랫동안 사무를 주관하여 숙련된 것이 이미 드러났으니, 따로 다른 사람에게 맡길 필요 없이 종전대로 해국의 사무를 총괄하게 하여 전적으로 성과를 올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18일 임술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병호(趙秉鎬)가 올린 장계(狀啓)에,
"대구 판관(大邱判官) 신학휴(申學休)는 3년 간 벼슬살이를 하면서 순전히 탐오만 일삼으면서 감영(監營)이 지척에 있는데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렇게 탐욕스럽고 용렬한 사람을 하루라도 그냥 둔다면 탐욕스런 수령들을 징계할 수 없고 가난한 백성들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니 우선 파출(罷出)하고, 그 죄상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해 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처럼 불법 행위를 하는 자들을 심상하게 처리해서는 안 되니, 의금사(義禁司)에서 즉시 잡아오게 하라."
하였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지방에서 진공(進供)하는 규정은 일체 혁파하고, 각 지방에서 바쳐야 할 물건 값을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타산하여 받아들인 다음 궁내부(宮內府)에 이동하면, 궁내부에서 사서 진배(進排)하게 하는 사안입니다.
1. 외도(外道)와 각 고을의 경저리(京邸吏)와 영저리(營邸吏)들이 빚을 함부로 받는 것과 이자 위에 이자를 더 받는 버릇을 일체 엄격히 금지하고, 만일 찾아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모두 관청에서 규정한 변리대로 시행하는 사안입니다.
1. 지난달 14일의 의안에서, 특별히 재신(宰臣)을 선택하여 황해(黃海), 평안(平安), 강원(江原), 함경(咸鏡) 4개 도(道)에 파견하여 조령(朝令)을 선포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며 도신(道臣) 이하 관리들의 선하고 악한 것을 엄격히 조사하게 하는 사안에 대해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지금 관서(關西)가 난리를 겪어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것이 더욱 염려되니, 선유사(宣諭使)를 차출하여 해당 지방에 가서 해도(該道) 도신(道臣)과 함께 타산하여 잘 처리하게 함으로써 각각 안착하게 하며, 돌아올 때에 거쳐 오는 해서(海西) 지방에도 마찬가지로 위유(慰諭)하게 한 뒤 두 도(道) 백성들의 고통과 관리의 정사에 대하여 조목별로 등문(登聞)하게 하는 사안입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8월 19일 계해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어제 의안(議案) 중 관서 선유사(關西宣諭使)를 차출하는 사안에 대해 계하하셨습니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희일(趙熙一)을 관서 선유사로 차하하여 즉시 떠나서 해도(該道) 도신(道臣)과 함께 타산하여 잘 처리해서 각각 안착하게 하며, 거쳐 오는 해서(海西) 지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위유(慰諭)하게 하며, 타이르며 두 도(道)의 관리들의 정사와 백성들의 고통을 조목별로 등문(登聞)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신헌구(申獻求)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8월 20일 갑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관서 선유사(關西宣諭使)가 방금 출발하였는데 해도(該道)에서는 외국 군대의 난리를 막 겪었기 때문에 선유(宣諭)하는 사무가 복잡합니다. 기무처 회의원(機務處會議員) 권형진(權瀅鎭)과 외무아문 참의(外務衙門參議) 이학규(李鶴圭)를 모두 파견하여 선유사와 열읍(列邑)을 분담하여 다니면서 효유(曉諭)하는 방도를 한껏 다하게 하는 동시에 하직인사를 그만두고 떠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외무아문(外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이처럼 사무가 복잡한 때에 외국과 교제하는 관리들은 일반 규례에 구애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권공사(全權公使) 이완용(李完用)을 기복(起復)시켜 명령을 받들게 하며, 학무 참의(學務參議) 이상재(李商在)도 기복시켜 보빙사(報聘使)의 수행원으로 충원하여 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2일 병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았다.
1. 이달 18일의 의안 중에 전후 죄인들의 아들과 손자 및 세월이 오래되어 친족 간의 정리가 끊어진 사람에 대해서는 관리이건 일반 사람이건 구애됨이 없이 〖연좌시키는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는〗 규정을 통용하도록 아뢰었는데,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라서 선뜻 논의하기 어렵다는 비지(批旨)를 받았으니, 참으로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정사를 경장(更張)하고 모든 제도를 새롭게 하는 만큼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진실로 재능만 있으면 다 등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대대로 누(累)가 있는 사람만 큰 은혜를 골고루 입지 못한다면 인재를 뽑는 길이 넓어지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인정(仁政)을 펴는 정사를 시행하는 데 결함으로 될 것입니다. 다시금 천폐(天陛)께 아뢰니 빨리 마음을 돌려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로 하여금 성상의 은택을 골고루 입도록 하는 사안입니다.
1. 각부(各府), 아문(衙門)에서 초빙할 인원수를 즉시 토의하여 결정하고, 외무아문(外務衙門)에서 이달 6일에 계하된 의안대로 초빙하게 하는 사안입니다.
1. 의원(議員) 이태용(李泰容)은 병으로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고, 이원긍(李源兢)과 김하영(金夏英)은 현재 외직(外職)에 임명되었으니 모두 감하(減下)하고, 공무 협판(工務協辦) 이도재(李道宰),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신기선(申箕善), 장위영 영관(壯衛營領官) 우범선(禹範善)을 모두 군국기무처 의원(議員)으로 차하하되 이도재와 신기선은 의정부(議政府)에서 엄하게 신칙하여 즉시 회의에 참가하게 하는 사안입니다.
1. 각도(各道)의 부세(賦稅)와 군보(軍保)들이 한결같이 상납하는 대미(大米), 소미(小米), 태(太), 목(木), 포(布)를 모두 대전(代錢)으로 마련하도록 한 사안에 대해 지난번에 의안을 계하하셨습니다. 우선 경기(京畿)부터 결가(結價)를 정하여 마련하고,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를 제외한 5개 도에서는 미, 태 목, 포를 모두 석(石) 수와 필(疋) 수에 준하여 대전으로 받으며, 공상(供上)하거나 지출하는 것도 석 수와 필 수에 준하여 시행하는 사안입니다.
1. 광주(廣州)에서는 환정(還政)이 오랫동안 백성들의 폐단이 되고 있으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의정부(議政府)에서 규례를 정하여 주게 하는 사안입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8월 23일 정묘

권재형(權在衡)을 한성 부윤(漢城府尹)으로 삼았다.

 

8월 24일 무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회의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따로 설치한 친군영(親軍營)을 제외하고는 각 군영을 통합하고 대장(大將) 1명을 두어 지휘 체계를 단일화하도록 거듭 아뢰었는데, 종당에 처분하겠다는 비지(批旨)를 받았으니, 참으로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현재의 군정(軍政)은 조금도 미룰 수 없으니, 특별히 각 해영(該營)에서 5일마다 한 번씩 군무아문(軍務衙門)에 모여 군무 대신(軍務大臣)과 함께 각영(各營)에서 해야 할 일을 서로 참고하고, 제반 군영의 규례, 군사 규율, 군량, 편제 등에 속하는 문제를 빨리 협의하여 되도록 단일하게 하는 사안입니다.
1. 주임관(奏任官)이 사임을 청하는 경우 상소를 올리는 것을 승인하지 말고, 사직서를 각기 해당 부(府)와 아문(衙門)의 대신(大臣)에게 제출하면 다시 총리대신(總理大臣)에게 전달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비지(批旨)를 받아서 시행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만들고, 혹시 규정을 위반하고 상소를 올리면 승선원(承宣院)에서 기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사(言事)에 관한 상소는 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사안입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8월 25일 기사

서상우(徐相雨)를 내무아문 대신(內務衙門大臣)으로 삼았다.

 

8월 26일 경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병호(趙秉鎬)의 장본(狀本)을 보니, 영천 전 군수(永川前郡守) 홍용관(洪用觀)이 범장(犯贓)한 사안에 대하여 죄를 청하고 장전(臟錢)을 징수하는 것은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허다하게 논열한 것이 더없이 해괴한 일이지만 해당 군(郡)에 이미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조사하여 아뢰기를 기다렸다가 품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병호(趙秉鎬)의 장본(狀本)을 보니, ‘창낙 찰방(昌樂察訪) 김태욱(金泰郁)은 3년 동안 찰방으로 있으면서 오로지 백성을 침해하는 것만 일삼아서 드러난 장전(臟錢)이 7,562냥(兩) 5전(錢) 6분(分)이나 되니 우선 파출(罷出)하고, 그의 죄상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며, 징쇄(徵刷)하는 한 가지 문제는 묘당(廟堂)에서 품처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는데, 이에 대해 계하하셨습니다.
탐오한 일을 징계하기 위해 전후로 조정에서 신칙한 것이 얼마나 엄하였습니까? 그런데도 이처럼 영락한 역참(驛站)에서 이렇게 숱하게 범장(犯贓)하였다는 것은 더없이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갈취한 장전은 실지 수량대로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그 가동(家僮)을 잡아가두어 즉시 징쇄한 다음 해도(該道)에 돌려보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근래에 지방 군사 제도가 갈수록 더욱 해이해져 위급한 경우에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군무아문(軍務衙門)과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특별히 위원(委員)을 파견하여 각도(各道)의 진영(鎭營)과 보루(堡壘), 산성(山城)을 순시하고 전곡(錢穀)을 받아들여야 할 것과 내주어야 할 것 등의 문제 및 장교와 군사의 정원수를 하나하나 성책(成冊)하여 가지고 오게 하여 결재하여 처리하는 데 편리하게 하는 사안입니다.
1. 각궁(各宮) 소유의 토지에서 곡식을 수확하는 등의 문제는 그전과 같이 각궁에서 관할하게 하되, 단지 지세(地稅)는 새 규정대로 채워서 내고, 만일 각 역참(驛站)에서 종전에 세를 적게 내거나 각 둔전(屯田)에서 도조(賭租)만 내고 지세를 내지 않는 경우가 있으면 다 새 규정대로 소작인(小作人)과 마호(馬戶)에서 내게 하는 사안입니다.
1. 국내의 토지(土地), 산림(山林), 광산(鑛山)은 본국 호적(戶籍)에 들지 않은 사람에게는 점유하거나 매매하지 못하게 하는 사안입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경무청(警務廳)에서 아뢰기를,
"대궐문에 대한 경찰(警察)과 대궐 안의 여러 곳에 대한 순찰(巡察)은 이제부터 본청의 순검(巡檢)이 거행하며, 또한 오부(五部)의 분서(分署)에도 파견하여 각각 해당 관내를 돌며 경찰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7일 신미

홍종헌(洪鍾軒)을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이용원(李容元)을 법무아문 대신(法務衙門大臣)으로, 이헌영(李𨯶永)과 윤헌(尹瀗)을 의정부 도헌(議政府都憲)으로 삼았다.

 

주일전권공사(駐日全權公使) 이완용(李完用)이 상소를 올려 사정을 진술하고 사신의 직함을 체차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청한 바는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관서(關西)는 한번 난리를 겪은 이후로 아전과 백성들이 흩어져 떠돌고 있으니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한시 바삐 위유(慰諭)하고 안착시킬 방도를 강구해야 하는데, 새로 제수된 도신(道臣)이 아직도 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사체(事體)로 헤아려 볼 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엄하게 추고(推考)하여 며칠 안으로 경내에 도착하게 하고, 설사 교귀(交龜)하기 전이라도 편의대로 일을 보며 그 정황을 신속하게 등문(登聞)하도록 전보(電報)를 쳐서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8일 임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의정부(議政府) 각 아문(衙門)의 대소 관리들은 일상적으로 업무를 보기 때문에 다른 일을 겸할 수 없어 서울과 지방에 제관(祭官)으로 파견하지 말도록 정식(定式)을 만들고, 제관(祭官)을 파견하는 한 가지는 종백부(宗伯府)에서 따로 전식(典式)을 정해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도록 하는 사안입니다.
1. 모든 대소 관원들 가운데 공죄(公罪)로 의금사(義禁司)에 갇혔을 경우에는 공초를 받아 계하(啓下)하여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처분을 받은 다음에야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규례입니다. 그러나 죄의 경중이 이미 공초를 받은 데서 드러난 이상 의논하여 처리하는 데는 원래 해당 형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응당 해야 할 절차와 관련하여 여러 번 전하를 번거롭게 하는 것은 더없이 황송하며 죄수들이 오래도록 갇혀 있는 것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니, 이제부터는 받은 공초에 대한 계사(啓辭)를 그대로 의논하여 처리해서 들이는 사안입니다.
1. 외무아문(外務衙門)에서 외국과 교섭하는 조약 체결, 초빙 등과 같은 일체의 중대한 문제는 해당 아문의 대신(大臣)과 협판(協辦)이 공동으로 처리하고, 총리대신(總理大臣)의 승인을 받아서 시행하는 사안입니다.
1. 대소 관원들의 사죄(私罪)나 대소 백성들을 재판하는 권한이 다 법무아문(法務衙門)에 속하는 만큼, 이제부터는 액례(掖隷) 이하 각부(各府)와 아문(衙門) 및 각궁(各宮) 소속, 각영(各營)의 군사에 이르기까지 민사나 형사 관계의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직접 체포하고 즉시 관청에 넘기는 사안입니다.
1. 본국 군졸들은 교양(敎養)을 받지 못하여 체조와 총을 메는 것이 직분인 줄만 알고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한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기율이 이 때문에 엄하지 못하고 담력이 이 때문에 굳세지 못하니, 군무아문(軍務衙門)에서 ‘군졸 교과서’를 국문으로 편찬하여 날마다 시간을 정하여 가르쳐 주는 사안입니다.
1. 각도(各道)의 세력 있는 자들이 향곡(鄕曲)에서 마음대로 행동하고 백성들을 침학하는 경우는 각각의 해도 도신(道臣)에게 관문(關文)으로 신칙하여 일일이 엄하게 조사하게 하며, 해영(該營)에서 스스로 처결하기 어려운 경우는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여 법으로 따지고 죄를 다스려 나라의 법을 엄하게 하고 민심을 기쁘게 하는 사안입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8월 29일 계유

전교하기를,
"종정경(宗正卿) 이준용(李埈鎔)을 일본에 보빙 대사(報聘大使)로 특별히 파견하여, 두 나라 사이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오늘 대원군(大院君)이 행차할 때 문을 경비하는 순포(巡捕)가 지송(祗送)할 때 매우 무엄하였다. 평소에 잘 신칙하지 못한 경무사(警務使) 이윤용(李允用)에게 관직을 삭탈하는 형전을 시행하고, 해당 순포는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이송한 다음 조율(照律)하여 엄격히 처벌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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