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32권, 고종31년 1894년 9월
9월 1일 갑술
총어사(總禦使) 이봉의(李鳳儀)에게 경무사(警務使)의 사무를 겸찰(兼察)하라고 명하였다.
탐장 죄인(貪贓罪人) 이소영(李紹榮)을 양산군(梁山郡)에 정배(定配)하였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충신과 효자에게 품계를 올려 주는 것은 장려하기 위한 것이고, 조정 관리들에게 벼슬을 추증하는 것은 표창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시호(諡號)를 주는 규정은 곧 조정에서 공로와 덕에 보답하는 것인데, 관제를 새로 정한 후에는 미처 논의할 겨를이 없었으니, 참으로 한 가지 결함이 됩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따로 조례를 정하여 품지(稟旨)하여 시행하는 사안입니다.
1. 회의를 시작한 후로 기무처(機務處)에 상소를 올린 선비와 백성들이 십여 인 이상인데, 그 중 몇 사람은 이미 등용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따로 파견원을 정하여 하나하나 조사하여 채택할 만한 의견이 있으면 의회(議會)에 제출하여 다시 의정부(議政府)에 보내고 재능에 따라 골라 동용하는 사안입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9월 2일 을해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충청 전 감사(忠淸前監司) 이헌영(李𨯶永)이 노성(魯城)의 민란 사건을 다시 조사하여 올린 장본(狀本)에 대해 계하하신 것을 보니, ‘양여미(量餘米) 200석(石)이 전운소(轉運所)에 이관된 후 정세(正稅)를 가져다 썼다고 하였는데, 그 조세 대장을 조사하니 이미 형적이 없고 장두(狀頭) 유치복(兪致福)은 아직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도망간 박관화(朴寬和), 윤상건(尹相健), 이성오(李成五), 윤자형(尹滋馨)은 이제야 비로소 체포하여 일체 조사하였고, 백윤백(白允伯)은 수종(首從)을 따진 결과 우선 가볍게 처벌해야 합니다.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른바 가지고 가서 썼다는 쌀은 확실한 증거가 없고 주동자도 도망하였으니, 조사하는 원칙으로 논한다면 죄안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박관화 등 4명의 죄수는 통문(通文)을 돌리는 데 참가하기도 하고 집회에 참석하기도 하여 결탁한 죄가 없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경중을 구분하여 형배(刑配)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백윤백의 경우는 관청뜰에서 행패를 부리고 자신이 따라가 참석해 놓고도 오로지 장두에게 미루기만 하고 끝내 실토하지 않습니다. 더없이 교활하고 지독하니, 다시 엄형을 가하여 기어이 실토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유치복(兪致福)과 윤상집(尹相執), 윤성칠(尹成七)은 각 진영(鎭營)에 계속 신칙하여 하루 속히 체포하여 엄하게 조사한 다음 등문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3일 병자
허진(許璡)을 경무사(警務使)로 삼았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종전에 각사(各司)가 지방 각도(各道)에서 토색한 것이 그 명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백성들과 고을의 큰 폐단이 되었습니다. 이제 새 규정이 이미 반포되어 그전 잘못은 자연히 제거될 것이니, 궁내부(宮內府) 소속의 각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엄격히 준수하여야 되겠는데, 지방 각도의 감영(監營)과 고을에서는 아직도 정확한 관문(關文)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마 의혹을 가질 염려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빨리 공문으로 신칙하여야 하겠습니다. 다만 약채(藥債), 필채(筆債), 포진채(鋪陳債), 구청전(求請錢), 벌례전(罰例錢), 호장채(戶長債) 등의 명목만은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다 해당 감영(監營)과 읍(邑)에서 응당 지출할 원 항목 중에 들어가는 것으로 마련했지만, 이제 폐지한 후에는 필시 중간에서 없어질 것입니다. 각도 감영에서 특별히 조사하여 애초에 마련하지 않았는데 임시로 처리한 것은 영구히 시행하지 말도록 하고, 원래 마련한 것에 포함된 것은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받아들인다는 사안입니다.
1. 궁내부에서 따로 진공 회사(進供會社)를 만들어 종전부터 임금이 써오던 물품을 수요에 따라 바치되, 월말마다 시가(時價)로 계산하여 내주는 사안입니다.
1. 세 도(道)에서 철따라 바치던 부채와 두 군영(軍營)에서 정초에 바치던 세찬(歲饌)을 모두 폐지하며, 대궐에서 이 두 가지를 백성들에게서 거두던 것은 영영 없애고 공금에서 회감(會勘)하던 것은 모두 탁지아문으로 바친다는 사안입니다.
1. 각영(各營)과 각읍(各邑)의 관청에서 쓰는 물건값을 배정하는 규례를 전부 없애고, 소용되는 모든 물건은 일체 시가대로 사서 쓴다는 사안입니다.
1. 7월 2일의 의안 중에서 각부(各府), 각 아문(衙門), 각 군문(軍門)에서 제멋대로 체포하여 형벌을 가하지 못하도록 이미 계하(啓下)받았으니, 각궁(各宮)에서도 이 규례대로 한다는 사안입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9월 4일 정축
전교하기를,
"전 수문장(守門將) 김기홍(金基泓)이 상소에서 한 말이 대신(大臣)을 무함하고 핍박하여 인의(引義)하게까지 하였으니, 조정이 편치 않다.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에게 칙유(勅諭)하기를,
"절대로 인혐(引嫌)해서는 안 될 일을 가지고 사무를 팽개친 채 처의(處義)하는데, 지금이 어떤 때인가? 나라 형편이 위급하고 민심이 경황없어 하니, 이때야 말로 군신 상하가 분발하고 면려하여 기필코 대업을 도모하여야 할 때이다. 그런데 저런 얼토당토않고 증거도 없는 황당한 말로 버틸 근거를 삼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경의 변치 않는 충정으로 차마 오늘날에 할 일이겠는가? 공적인 의리를 앞세우고 사사로운 감정은 뒤로 미루어야 할 것이다. 이런 때에 수응(酬應)하는 것은 실로 나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다. 경은 이것을 알고 즉시 나와서 사무를 보라."
하였다.
성기운(成岐運)을 농상아문 협판(農商衙門協辦)으로 삼았다.
9월 5일 무인
일본에 대한 보빙대사(報聘大使) 이준용(李埈鎔)이 상소하여 체차시켜 줄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일본에 보빙대사로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을 특별히 보내어 우호 관계를 두터이 하라."
하였다.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이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引責)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칙유(勅諭)에서 이미 나의 뜻을 다 밝혔는데 사직 상소가 또 어찌하여 올라온단 말인가? 오늘날 나라의 형편이 어떠하며 민심이 어떠한가? 나라를 내 몸처럼 여기는 경의 큰 국량으로 볼 때, 홀(笏) 한번 움직이지 않고 어지러운 풍속을 진정시켜야 되는데 도리어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황당한 말 때문에 이렇게 지나친 행동을 하니, 나는 실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다. 경장(更張)을 하는 이때에 며칠씩이나 사무를 지체시키는 것 역시 작은 문제가 아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대답하니, 경은 즉시 나와 사무를 보아 부지런히 애쓰는 나의 고충을 헤아리라."
하였다.
9월 6일 기묘
전교하기를,
"경무사(警務使)가 올라올 동안 총어사(總禦使) 이봉의(李鳳儀)가 그대로 겸찰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농상 협판(農商協瓣) 성기운(成岐運)을 주차일본전권 대신(駐在日本全權大臣)으로 특파하여 동경(東京)에 가서 사신의 일을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아뢰기를,
"김기홍(金基泓)의 상소 내용을 조사하여 아뢰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여러 번 조사하였으나 줄곧 버티고 있으니, 형추(刑推)하여 형장(刑杖)을 치면서 신문하여 진상을 밝혀내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9월 7일 경진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에게 다시 칙유(勅諭)하기를,
"칙유와 비답으로 남김없이 다 말하였는데도 경은 계속 떠나려고만 한다. 경도 한번 생각해 보라. 오늘날 나라의 형편을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바로 임금과 신하, 위아래가 와신상담(臥薪嘗膽)할 때이다. 내가 믿고 의지하며 조정과 민간이 유지되는 것도 사실 경에게 달렸으며, 경이 평소에 자부한 것도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변함없는 마음이었으니, 편안한 때와 위험한 때를 가리지 않고 곧장 나아가 짐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마구 핍박하는 무함을 인퇴(引退)할 빌미로 간주하고 있다. 설사 아무리 일이 없는 평상시라도 경의 넓은 국량으로서는 응당 담소하면서 기세를 꺾어야 할 것이다. 이번의 지나친 행동은 내가 기대한 바가 아니다. 며칠씩이나 사무를 지체시키는 것은 백성과 나라에 크게 관계되는 일로, 생각이 이에 미치면 잠자리가 편치 않고 음식이 달지 않다. 나는 여러 말 않더라도 경은 헤아릴 것이다."
하였다.
조한국(趙漢國)을 의정부 도헌(議政府都憲)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병호(趙秉鎬)가 아뢰기를,
"의흥 전 현감(義興前縣監) 채경묵(蔡慶默)은 수령으로 있은 지 한돌도 되지 않건만 포학한 정사가 한두 가지가 아니며, 합천 군수(陜川郡守) 민치순(閔致純)은 3년 간 수령으로 있으면서 순전히 탐오만 일삼았습니다. 이처럼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을 혹시라도 그대로 덮어둔다면 탐욕스러운 수령들을 징계할 수 없으며 재난을 당한 백성들을 안착시키고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니 모두 우선 파출(罷出)하고, 그들의 죄상을 해당 아문(衙門)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다.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이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9월 8일 신사
전교하기를,
"신칙하였으니 전 경무사(前警務使) 이윤용(李允用)을 분간(分揀)하라."
하였다.
홍종헌(洪鍾軒)을 법무아문 대신(法務衙門大臣)으로 삼았다.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전 수문장(前守門將) 김기홍(金基泓)을 다시 형추(刑推)하여 진상을 밝혀내도록 윤허를 받고 철저히 조사하니, 횡설수설하는 공초가 애당초 말이 되지 않습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모함하여 핍박한 결과 조정이 불안하니, 이것으로 조율(照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9일 임오
전교하기를,
"이런 때에 제수되면 응당 빨리 달려와야 하는데, 혹 서울에 있으면서 지방에 있다고도 하고 혹 탈이 없으면서도 앓는다고 핑계대기도 하니, 나라의 기강과 신하의 분수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승선원(承宣院)에서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의 전보(電報)를 보니, ‘비적(匪賊) 수백 명이 성주(星州)에 쳐들어오려는 것을 아전과 백성들이 힘을 합쳐 막고 있을 때 해당 수령이 밤을 타서 몰래 도망쳐서 결국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요즘 지방의 비적들이 약탈을 하는 것이 곳곳마다 걱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만, 고을을 마구 침범하는 전에 없던 이런 변고가 있을 줄이야 어찌 짐작하였겠습니까? 너무나 놀라운 일이므로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령의 직책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응당 자신이 솔선해야 하는데 도리어 어려운 때에 구차스럽게 몸을 피하여 민심이 흩어져 지키지 못하게 하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성주 목사 오석영(吳錫泳)을 우선 파출(罷出)하고 빨리 의금사(義禁司)에서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처벌하게 하며, 그 대임으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조익현(趙翼顯)을 차하하여 당일로 역마(驛馬)를 주어 내려 보내며, 이어 해당 도신(道臣)에게 병영(兵營)이나 수영(水營)에 특별히 신칙하여 하루속히 군사를 조발하여 토벌한 다음 두목을 먼저 목을 베고 실태를 등문(登聞)하도록 삼현령(三懸鈴)으로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아뢰기를,
"터무니없는 말로 상소를 올린 김기홍(金基泓)을 유삼천리(流三千里)로 조율(照律)하여 양덕현(陽德縣)으로 배소(配所)를 정하고 압송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유배할 필요 없이 서인(庶人)으로 삼으라."
하였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요즘 비적(匪賊)들이 창궐하여 경기(京畿)까지 침범했는데 이런 때에 지방관(地方官)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더 없이 민망한 일이니, 청컨대 묘당(廟堂)에서 모두 재촉하여 내려 보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죽산(竹山)과 안성(安城) 두 고을의 경우에는 비적들이 많이 모여 드는 곳이니 더욱 잠시도 비워둘 수 없습니다. 모두 교체시키고, 의정부(議政府)에서 특별히 재능이 있는 사람을 골라 차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힘써 토벌하도록 한다는 사안입니다.
1. 나주(羅州), 순창(淳昌), 홍주(洪州), 안의(安義) 네 고을의 수령들은 비적이 창궐하는 때에 솔선하여 떨쳐 일어나 무마하거나 토벌하기도 하였으며 법을 세워 막기도 하여, 온 경내가 오염되지 않았으며 여러 열읍(列邑)에서 크게 의지하였습니다. 부근의 각읍(各邑)에서 비적들을 토벌하거나 무마하는 방도를 이 수령들에게 전적으로 맡겨 편리한 대로 시행하라는 내용으로 묘당(廟堂)에서 품지(稟旨)하여 분부하게 한다는 사안입니다.
1. 요즘 전신(電信)으로 통보가 되지 않으니 공무아문(工務衙門)에서 특별히 방도를 강구하여 사람들을 보내어 끊어진 선로(線路)를 수리하게 하며, 전보(電報)치는 사람을 ‘사사(司事)’라고 바꿔 부르고 해당 아문에서 주임관(奏任官)이나 판임관(判任官)의 규례대로 월급을 참작하여 주는 한편, 기한을 정하여 전신국(電信局)을 열어서 통신(通信)을 보장하도록 힘쓴다는 사안입니다.
1. 전에 준천사(濬川司)에서 하던 여러 가지 일은 모두 한성부(漢城府)에서 전적으로 관할하게 한다는 사안입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9월 10일 계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전보(電報)를 연이어받아보니, 숙천 부사(肅川府使)는 인장(印章)을 버리고 도망쳤고, 영변 부사(寧邊府使), 안주 목사(安州牧使), 성천 부사(成川府使), 상원 군수(祥原郡守), 강동 현감(江東縣監) 및 병마우후(兵馬虞候)들은 모두 관부(官府)를 비웠다고 합니다. 관서(關西)에 변란이 났을 때 많은 수령들이 직임을 생각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자리를 떴으며 심지어 인장을 버리고 도망친 사람까지 있는 것은 법과 기강에 있어 더 없이 놀랍고 격분할 일입니다. 숙천 부사 신덕균(申德均), 영변 전전 부사(寧邊前前府使) 임대준(任大準), 안주 목사 김규승(金奎升), 성천 부사 심상만(沈相萬), 상원 군수 이국응(李國應), 강동 현감 민영순(閔泳純), 병마우후 김신묵(金信默)을 모두 우선 파출(罷出)하고, 제멋대로 자리에서 떠나 도망친 진상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등문(登聞)하게 하고 형률대로 감단(勘斷)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어제의 회의 안건에, ‘요즘 비적(匪賊)들이 경기(京畿)까지 침범했습니다. 죽산(竹山)과 안성(安城) 두 고을의 수령을 모두 개차하고, 특별히 재능이 있는 사람을 골라 차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소서.’라고 한 일에 대해 계하하셨습니다. 죽산 부사로는 장위영 영관(壯衛營領官) 이두황(李斗璜)을 차하하고 안성 군수로는 경리청 영관(經理廳領官) 성하영(成夏泳)을 임명하여 각각 거느리고 있는 군사를 데리고 즉시 내려 보내어 기회를 보아 토벌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용익(李容翊)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9월 11일 갑신
이용원(李容元)을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병호(趙秉鎬)의 장계(狀啓)와 관련하여 합천 군수(陜川郡守) 민치순(閔致純), 의흥 전 현감(義興前縣監) 채경묵(蔡慶默)이 뇌물로 받은 돈을 추징하는 문제를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계하하셨습니다. 탐오하는 관리를 징계하는 문제에 대해 전후로 신칙한 하교가 얼마나 준엄하였습니까? 그런데 요즘 영남(嶺南)의 수령들이 범장(犯贓)하여 연이어 논계(論啓)에 올랐습니다. 나라의 기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차라리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상 두 고을의 수령들에 대하여 감처(勘處)하기를 기다려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가동(家僮)을 잡아 가두고 모두 즉시 받아내어 해도(該道)의 감영(監營)에 내려 보낸 다음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회의 안건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의회(議會)를 의사부(議事部)로 하고, 의정부(議政府)를 행정부(行政府)로 하여 둘이 서로 대치되고 뒤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모든 나라의 공통적인 규례입니다. 군국기무처가 의정부에 소속되는 것은 사체(事體)에 맞지 않으니, 이제 마땅히 기무처의 장정(章程)을 고쳐 만들고 권한을 전일하게 하여 되도록 의정부와 서로 대등하게 하여야 한다는 사안입니다.
1. 칙임관(勅任官)을 차출할 때에 의정부에서 천망(薦望)하여 명령을 받는 것은 원래 공정하게 추천하고 신중히 처리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미 임명하는 규례를 승인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각 아문(衙門)의 대신(大臣), 협판(協辦) 및 도헌(都憲)을 차하하는 데 흔히 천망을 거치지 않으니, 빨리 전하의 총명을 넓혀 되도록 계하한 안건이 실제로 적용되는 효과가 있게 한다는 사안입니다.
1. 승선원(承宣院)은 정령(政令)을 출납하는 곳이니 궁내부(宮內府)에 소속시켜서는 안 됩니다. 응당 의정부로 이속시켜 행정 사무를 전일하게 하여야 한다는 사안입니다.
1. 7월 8일에 계하한 의안 중에는 크고 작은 죄인들을 사법관이 재판하여 결정하지 않은 이상 억지로 처벌할 수 없다는 한 조문이 실려 있고, 또 경무청(警務廳)의 직무 중에도 죄인을 조사 체포하여 경중을 나누어 법사(法司)에 넘겨서 재판한다는 등의 조문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경무청에 갇혀 있는 범죄자들을 간혹 법사의 재판을 거치지 않고 바로 처단하기도 하는데, 이는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형벌을 신중히 하는 도리에 심히 어긋납니다. 이제부터는 중죄에 대한 결안(結案)은 법사의 공판을 거치기 전에는 사람의 생명을 선뜻 해치지 못하게 하여 되도록 계하된 안건을 실시하는 효과가 있게 한다는 사안입니다.
1. 화도진(花島鎭)은 원래 경영(京營)에서 해안의 방비를 살피기 위하여 설치한 곳인데, 그곳이 이미 통상(通商) 항구에 속하여 감리관(監理官)과 경무관(警務官)을 둔 조건에서 진장(鎭將)을 그대로 두는 것은 사실 무의미합니다. 마땅히 즉시 없애고 토지와 인구는 지방관에게 도로 소속시키고, 소유하고 있는 경비인 미(米) 1,500석(石), 조(租) 80석, 은(銀) 1,200원(圓)은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장부를 자세히 조사하고 다시는 지출하지 말도록 하며, 관청 건물과 나라 물품은 장위영(壯衛營)에서 접수 관리하게 한다는 사안입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9월 12일 을유
고금도(古今島)의 도배 죄인(島配罪人) 민응식(閔應植)을 방축향리(放逐鄕里)하라고 명하였다.
일본 보빙대사(日本報聘大使)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이 사폐(辭陛)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양호 선무사(兩湖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의 장본(狀本)에 대해 계하하신 것을 보니, ‘충주 전 목사(忠州前牧使)가 내직으로 옮긴 후에 백성들이 보내지 않으려고 유임시켜 달라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수령이 아니고는 비적(匪賊)들을 회유하여 잠잠하게 할 수 없어 온 고을 백성들이 장차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의 평소의 실지 업적이 백성들의 신임을 받았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전 충주 목사 민영기(閔泳綺)를 특별히 잉임 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黃海監司) 정현석(鄭顯奭)의 장계(狀啓)를 보니, 해영(該營)의 무반(武班)이 받는 급료가 너무 박하여 무예를 장려할 수 없다고 자세히 진술하면서 용매 첨사(龍媒僉使)에 대해 전례대로 자벽(自辟)으로 시행할 수 있도록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해진(該鎭)은 교동(喬桐)과 강화(江華)의 요충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니 외적을 방어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는 점을 응당 고려하여야 합니다. 장계의 내용대로 해당 도신(道臣)에게 취재(取才)하여 단망(單望)을 군무아문(軍務衙門)에 보고하게 한 다음 계하하여, 해역(海域)의 방비를 튼튼히 하고 무예를 장려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방금 듣건대, 평안 감사(平安監司)는 부임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아직 전달받지 못하여 수계(修啓)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변방의 경보가 번다한 때에 공문을 올려 보내지 못하는 것은 사체(事體)에 어긋납니다. 평안 감사의 인신은 해당 아문에서 즉시 만들어 보내게 하고, 병부는 해당 도신에게 각별히 더 찾아보고 그 여부를 자세히 보고하게 한 후에 다시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9월 13일 병술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이 차자(箚子)를 올려 기무처 총재(機務處總裁)를 체차(遞差)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9월 15일 무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병호(趙秉鎬)가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여러 가지 조목에 대한 계본(啓本)을 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도내(道內)의 환곡(還穀) 총량 중에서 포흠(逋欠)이 쌓인 11개 고을과 역참의 것은 포흠난 것을 탕감하기로 하고, 통영(統營)의 환곡 폐단을 바로잡아 달라는 일입니다. 둘째, 진결(陳結) 1만 1,703결(結)은 영영 소출이 없는 것으로 해 달라는 일입니다. 셋째, 결가(結價)를 돈으로 바치되 태가(駄價)는 되도록 적게 정하고 잡비는 받지 말아 달라는 일입니다. 넷째, 진상 물품과 전문(箋文)을 바칠 때의 정비(情費) 역시 민호(民戶)에서 거두게 되니, 정비를 금지해 달라는 일입니다. 다섯째, 재해를 입은 50여 개 고을의 공납(公納)은 구납(舊納)이건 신납(新納)이건 할 것 없이 내년 가을까지 정퇴(停退)해 주고,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세미(稅米) 몇 만 석(石)을 우선 옮겨 달라는 일입니다. 여섯째, 각역(各驛)에 사복시(司僕寺)의 입파(入把)에 보충할 말〔馬〕의 세전(貰錢)은 수량을 줄여 정식(定式)을 삼고, 공조(工曹)에 납입하는 우비〔簑衣〕나 언치(偃赤)는 없애 달라는 일입니다. 일곱째, 전운소(轉運所)에서 받는 것을 대전(代錢)으로 거두면 운반비와 여러 가지 폐단이 변통되리라는 일입니다. 여덟째, 바닷가 각읍(各邑)의 어염세(漁鹽稅), 선세(船稅)를 사실대로 조사하여 바로잡아 달라는 일입니다. 아홉째, 남영(南營)의 군사들에게 지불하는 급료의 부족분에 대해 다른 공전(公錢)으로 획부(劃付)해 달라는 일입니다. 열째, 도내의 민란(民亂)은 오로지 규정 외에 배정하여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니, 이상의 여러 가지 폐단을 차례로 바로잡아 달라는 일입니다. 이상을 모두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영남(嶺南) 한 도(道)가 거듭 흉년을 만나서 백성들의 목숨이 위기에 처하고 온갖 폐단이 날로 늘어나서 온 도에 소요가 끊이지 않습니다. 구제하고 안착시킬 방책을 충분히 강구하여야 할 때에 도신과 선무사(宣撫使)가 연이어 이렇게 요청하니,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군정(軍政), 환정(還政), 전정(田政)은 바로 나라를 큰 정사이고 일 자체가 경장(更張)에 관계되니, 더구나 신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탁지아문(度支衙門)의 대신(大臣)과 회동해서 충분히 협의하고 삼가 별단을 갖추어 들인 다음 계하되면 행회(行會)하여, 도신과 선무사에게 협의하여 낙착 짓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발지는 이러하였다. 1. 경상도(慶尙道) 도내의 여러 가지 환곡(還穀)이 72만여 석(石)이 되니, 그것을 열읍(列邑)에 나누어 규정대로 걷어 들이고 내주고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감영(監營)과 고을에 옮겨 판다는 핑계 아래 간사한 자들이 서슴없이 농간을 부리고 있습니다. 지금 11개 읍(邑)과 역참(驛站)에는 포흠(逋欠)이 쌓여 전란이나 흉년에 대처할 수 없게 되었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현재의 실제 총량을 각별히 조사하여 사창(社倉)의 환곡(還穀)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규정대로 받아가고 바치게 하며, 전후로 감영과 고을에서 유용한 것과 아전들이 축낸 것도 하나하나 조사하여 징수하고, 가짜 총량은 모두 탕감할 것입니다. 중앙과 감영, 읍에서 받아들여야 할 모곡(耗穀)은 도내의 원결(元結)을 총 계산하여 골고루 배정하여, 통영(統營)과 우병영(右兵營)의 곡식은 모두 매 석당 값을 8냥(兩)으로 정하여 받아 가지고 이 수량대로 지불한다는 사안입니다. 1. 결정(結政)은 대전(代錢)으로 받는다는 사안에 대해 계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전에 배로 실어다 바치던 고을에서도 모두 쌀로 값을 정하여 받고, 경사(京司)에 바치는 전세(田稅), 대동미(大同米)와 삼수미(三手米)와 콩, 그리고 아래에 내려주는 쌀들에 대하여 명목을 정하지 말고 석(石)수를 합쳐서 잡비까지 포함하여 탁지아문(度支衙門)에 상납해야 할 것입니다. 포량(砲糧)은 이전대로 강화 진무영(江華鎭撫營)에 옮겨 바치고, 감영(監營), 진영(鎭營), 읍(邑)에서 쓰는 쌀은 중앙에 바치는 쌀값대로 바치고, 산골 고을에서는 목(木)이나 포(布)로 바치지 말고 대전(代錢)으로 바치되 원래 쌀로 값을 정하여 바치며, 태가(駄價)는 모두 그 안에서 제하고 더 거두지 말라는 사안입니다. 1. 진결(陳結)에 대해서는 재해 상황을 조사한 다음 따로 조사하여 등문(登聞)하게 한다는 사안입니다. 1. 진상 물품은 모두 중앙에 바치는 공물로 처리하고 정비(情費)는 영영 감하며, 바닷가 민호(民戶)에는 2년 동안 세금을 면제하여 주고, 감영(監營)이나 고을에서 더 이상 거두지 말도록 해 재해 입은 백성들이 그 덕으로 살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전문(箋文)은 도신(道臣)이 신의 부(府)에 올려 보내어 바치게 하고, 정비는 영영 감하며, 병사(兵使), 수사(水使) 이하는 물품을 봉진(封進)하지 말도록 한다는 사안입니다. 1. 재해를 입은 고을의 공납(公納)은 일률적으로 정퇴(停退)할 수는 없으니, 감영과 고을에서 위급한 정도를 알아보고 가난한 백성들까지 뒤섞어 침해하지 말도록 하며,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에서 곡식을 옮겨오자는 요청은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법을 만들어 배로 운반하여 팔게 한다는 사안입니다. 1. 사복시(司僕寺)에 보충해 주는 파발말과 북경(北京)으로 가는 사신에게 내주는 말은 오래 동안 각 역참(驛站)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두 시행하지 말도록 하고, 이전에 공조(工曹)에서 만들어 주던 우비〔簑衣〕와 언치〔偃赤〕 등의 조목은 일률적으로 영구히 없앤다는 사안입니다. 1. 바닷가의 어세(漁稅)와 염세(鹽稅)를 각각 해당 고을에서 조사하여 감면해 주고, 근래에 불법적으로 받던 것은 모두 영구히 혁파한다는 사안입니다. 1. 남영(南營)의 병료전(兵料錢)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실지 수량을 조사하여 도내(道內) 민호에 골고루 배분하게 하고, 일반적으로 병료(兵料)라는 명목으로 불법적으로 거두는 조목은 모두 견감하며, 각읍에서 재해 면적으로 설정한 토지를 조사하여 모두 총면적으로 올리게 하며, 그 밖에 염세를 받는 것은 일일이 탁지아문에 보고하게 한다는 사안입니다.】 또 아뢰기를,
"방금 영남 선무사(嶺南宣撫使) 이중하(李重夏)의 장본(狀本)을 보니, 고을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을 열거하고 묘당(廟堂)에서 품처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큰물에 허물어지고 모래에 묻혀 진폐된 토지에서 조세를 억울하게 받는 것이고, 둘째, 장부에 허위로 올라 있는 환곡(還穀)에 대해 터무니없이 모곡(耗穀)을 물리는 것이고, 셋째, 결역전(結役錢)과 호포전(戶布錢)이 해마다 증가하는 것이고, 넷째, 전운소(轉運所)에서 허다히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다섯째, 경상 감영(慶尙監營)에서 병료전(兵料錢)을 배분하여 거두는 것입니다.
이제 해당 도신이 장계에 대하여 품처한 것이 있으니, 계하되기를 기다려 다같이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방금 영남 선무사(嶺南宣撫使) 이중하(李重夏)의 장본(狀本)을 보니, ‘동학(東學)의 무리 4, 5천 명이 예천군(醴泉郡)으로 쳐들어 온 것을 그 고을의 관리와 백성들이 힘을 합하여 격퇴하고 머리를 많이 베고 사로잡았으며, 나머지는 다 흩어져 도망쳤는데 그대로 여세를 몰아 쫓아가 체포하고 그 경내의 소굴을 불사르고 허물어 버렸습니다.’ 하였습니다.
비적(匪賊)들이 날이 갈수록 창궐하지만 수령들이 통제하지 못하여 평민들이 살아갈 수 없었는데 그 고을 관리와 백성들이 합심하여 진압했으니,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그 중에 반드시 먼저 계책을 내고 자신이 분발하여 이끈 사람이 있을 것이니, 해도(該道) 도신(道臣)에게 자세히 조사 기록하여 보고하게 함으로써 등용하고 격려하는 방도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이 총재(總裁)의 직임을 사양하여 또 차자(箚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어제 내린 비답에서 이미 나의 뜻을 다 말하였다.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삼공(三公)의 직무가 아닌가? 도를 논한다는 것은 곧 일을 의논하는 것이고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은 곧 정사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주례(周禮)》의 옛 제도인데 경은 어찌하여 유독 혐의쩍게 생각하는가? 지금 경의 고결한 덕망에 의거하여 난잡한 풍속을 진정시키려고 하는 만큼 경은 마땅히 힘을 다하여 담당하고 현재의 난국을 크게 수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사직 상소가 거듭 올라오는 것은 실로 내가 평소에 경에게 기대하던 바가 아니다. 경은 나를 괴롭히지 말고 즉시 의회(議會)에 나와 나를 안심시키고 국사를 다행스럽게 하라."
하였다.
9월 16일 기축
임상준(任商準)을 춘천부 유수(春川府留守)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각도(各道)의 모든 상납(上納)은 모두 대전(代錢)으로 마련하되, 우선 경기(京畿)에서부터 결가(結價)를 정하고,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를 제외한 5개 도에서 바쳐야 할 미(米), 태(太), 목(木), 포(布)는 모두 석(石) 수와 필(匹) 수에 준하여 대전으로 받아들이도록 올린 의안(議案)을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어제 영남(嶺南)의 조세와 관련하여 별단에 계하하신 것이 있으니, 호서(湖西), 호남(湖南), 해서(海西), 강원도(江原道) 4개 도(道)의 미, 태, 목, 포도 영남의 규례대로 산골 고을과 바닷가 고을을 나누어 매 석, 매 필에 대해 값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문(關文)을 보내 통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친군통위영(親軍統衛營)에서 아뢰기를,
"용호영(龍虎營)이 이미 본영에 통합되었으니, 금군 별장(禁軍別將)의 직무는 따로 병방(兵房)을 두어 처리하게 하고, 별부료 병방(別付料兵房)의 직무는 정령관(正領官)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9월 17일 경인
전교하기를,
"‘영남(嶺南) 한 도(道)는 연이어 흉년이 들었는데 올해에는 가뭄이 더욱 혹심하여 바닷가 각 고을의 정상이 특히 참혹하며, 전라 좌도(全羅左道)의 바닷가도 기근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불쌍하고도 고단한 처지에 놓인 이 백성들이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이는 사실 내가 덕이 없어 화기(和氣)를 불러오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효성스러운 아들과 사랑하는 손자가 자기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가 서로 뿔뿔이 흩어져 울부짖으면서 구렁에 나뒹굴게 하였으니, 한밤중에도 이를 생각하면 벽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마치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부황이 든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어린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있는데도 구제하지 않는다면, 백성의 부모 된 도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모든 구제할 방도에 대해서는 도신(道臣)의 계사와 의정부(議政府)의 논의에서 어련히 알아서 최선을 다했겠지만, 자신의 상처처럼 여기는 나의 생각에는 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다. 전날 영남을 진휼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이미 획하(劃下)하였지만 한때의 급한 형편을 구제하기에도 부족할 듯하다. 호남(湖南)의 재해 입은 백성들에 대하여서도 도리로 보아 똑같이 간주해야 할 것이니, 특별히 내탕전(內帑錢) 3만 냥(兩)을 내려 보내어 도신으로 하여금 적당히 나누어 구제하게 하여 실효가 있게 하라.
그리고 양도(兩道)의 재해가 우심(尤甚)한 고을에는 삭선(朔膳) 및 절일(節日)에 바치는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내년 가을까지 봉진(封進)하지 말고, 각전(各殿)과 각궁(各宮)에 매달 바치는 삭선과 물선 또한 일체 정봉(停捧)하고 절선(節扇)의 진상 또한 면제하거나 중지함으로써 진휼하는 물자에 보태게 하라.
아! 이런 대단치 않은 몇 가지 일로야 어찌 은택을 두루 미치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나의 마음을 다하여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나의 힘을 다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해서일 뿐이다. 너희들 도신과 수신(帥臣)은 나의 뜻을 깊이 헤아려 실질적인 혜택으로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라면 널리 방도를 강구하고 황정(荒政)을 깊이 연구하여, 조세를 감면하고 포흠(逋欠)을 탕감하며 진상하는 것을 덜어 주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 말아서 우리 조상이 물려준 백성을 돌보도록 하라.’는 뜻으로 묘당(廟堂)은 양도의 도신에게 행회(行會)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산부(礪山府)의 표호(漂戶)·퇴호(頹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학진(金鶴鎭)의 장본(狀本)에 대해 계하하신 것을 보니, ‘비적(匪賊)들이 남원부(南原府)에 모여 군기를 탈취하고 부중(府中)을 점거했는데 해당 부사(府使) 윤병관(尹秉觀)은 말미를 받고 집에 돌아갔다가 지금 막 재촉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하였습니다.
저 무리들은 지난번에 귀순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내 또 배반하여 큰 고을을 점거하는 이런 변고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이라도 막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없이 놀라운 일입니다.
해당 부사 윤병관은 이런 때에 고을을 비워 지키지 못했으니 단지 나문(拿問)만 하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우선 파출(罷出)하고 그 대신 군무아문 참의(軍務衙門參議) 이용헌(李龍憲)을 차하하여 당일로 역마를 주어 내려 보내어 비적들을 토벌하고 진압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도신(道臣)으로 말하더라도 이미 사전에 신칙하지 못한 데다가 더없이 급한 이 보고를 이처럼 지체시켜 올렸으니 경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엄하게 추고(推考)하는 형전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학진(金鶴鎭)의 장본(狀本)에 대해 계하하신 것을 보니, ‘전 도신(道臣) 김문현(金文鉉)은 재임 시절 무남영(武南營) 군사의 요미(料米)를 각 고을 아전들의 은결(隱結)을 조사한다는 핑계로 총 5,000석(石)으로 마련하였습니다. 먼 고을에서는 대전(代錢)으로 마련하여 가까운 고을의 곡식을 바꾸어 받아들인 것이 전주(全州), 김제(金堤) 두 고을의 세미(稅米)로 도합 2,664석인데, 대전 1만 8,548냥(兩)과 함께 이미 요미(料米)로 내주었습니다. 또 대전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하여 나라의 재물과 군용 물자를 새로 마련할 돈에서 추이(推移)하여 쓴 것이 도합 1만 3,065냥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은결(隱結)이라는 것은 이미 염찰사(廉察使)에 의하여 혁파되었으므로 이제 와서 보상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두 고을의 세미 도합 2,664석은 해당 고을의 세곡(稅穀)에서 회감(會減)해 주고, 이미 받아들인 대전 1만 8,548냥과 받아들이지 못하여 추이한 돈 1만 3,065냥은 본영(本營)의 상납전(上納錢)에서 획하(劃下)해 주도록 묘당(廟堂)에서 품처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전 도신이 은결을 조사한다는 핑계로 세미(稅米)를 제멋대로 바꾸어 쓴 것은 법과 기강으로 볼 때 응당 엄하게 처벌하여야 하겠지만, 지금 도치(島置)의 처분을 받은 상태에 있으니 다시 논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보충할 수 없는 나라의 돈과 곡식은 부득이 견감하거나 탕감해야 하겠으니, 장보의 내용대로 두 고을에서 바꾸어 받아 사용한 세미 2,664석은 그 고을의 세곡에서 회감(會減)해 주고, 이미 받아들인 대전 및 추이한 돈 도합 3만 1,613냥은 해당 감영(監營)의 상납전(上納錢)에서 획하해 주도록 탁지아문(度支衙門)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호남의 균전(均田)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세금을 징수한 곡절을 조사하여 등문(登聞)한 일과 관련하여 해도(該道)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경위를 물었습니다. 장계(狀啓)를 보니, ‘전주(全州), 김제(金堤), 금구(金溝), 태인(泰仁) 등 4개 고을에서는 원래 백징(白徵)한 적이 없고, 임피(臨陂)의 진답(陳畓)에서 도조(賭租)를 거둔 것이 1,196석(石), 부안(扶安)의 진답에서 도조를 거둔 것이 305석, 옥구(沃溝)의 진답에서 도조를 거둔 것이 76석이었습니다. 그래서 균전 사무를 보는 아전에게 물었더니, 7개 고을에 소먹이를 주고 무자년(1888)의 진토(陳土)를 기경(起耕)하도록 권하고 양안(量案)을 만들었는데, 가을에 도조를 정한 후에 기경하지 못한 병자년(1876)의 진토까지 균전 대장에 함부로 끼워 넣고 도조를 받은 것이 있기에 그대로 둘 것과 뺄 것을 구별하여 양안을 개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별도로 알아본 결과 전 균전사(均田使) 김창석(金昌錫)이 장계로 보고하여 진결(陳結) 3,901결(結) 89부(負) 2속(束)에 대해 기한을 정하여 세금을 정퇴(停退)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균전의 도조가 고을의 조세보다 가벼워지기 때문에 함부로 끼워 넣은 것이 많아지게 되었고, 결국 병자년과 무자년이 서로 혼동되고 묵거나 버려진 전답이 뒤섞이게 된 것입니다. 개간한 논밭은 따로 과세한 총량을 조사하여 도로 수조안(收租案)에 넣는 것이 아마 사리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균전은 나라의 큰 정사인데, 이미 공정한 마음으로 세밀하게 살피고 성심으로 기경하도록 권하지 못해 이처럼 결세(結稅)를 피해 도조를 내는 일이 생겼고, 묵거나 버려진 전답을 뒤섞어 넣는 과정에서 농간을 부려 잇속을 챙겼으니, 신임을 저버린 것이 더없이 심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내버려두고 따지지 않을 수 없으니, 전 균전사 김창석에게 정배(定配)의 형전을 시행하고, 이상 7개 고을에서 개간한 논밭은 올해부터 원래의 총면적에 도로 넣도록 탁지아문(度支衙門)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호남(湖南)에서는 비적(匪賊)들이 곳곳에서 행패를 부리는 통에 군기를 잃어버린 수령과 진장(鎭將)에 대해 도신(道臣)의 계사에서 처벌을 청한 것이 많습니다. 평소에 엄격히 단속하고 방비하였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응당 하나하나 법대로 나감(拿勘)해야 하겠지만, 온 도(道)가 소란스러운 이때에 직무가 방치되는 것은 더없이 걱정스러운 일이므로 임실 현감(任實縣監) 민충식(閔忠植) 등 29개 고을의 수령과 진장에게 특별히 죄명을 지닌 채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학진(金鶴鎭)의 장계(狀啓)를 보니, ‘전 보성 군수(寶城郡守) 유원규(柳遠奎)는 성실한 마음으로 정사를 하면서 자기 녹봉(祿俸)을 덜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비적(匪賊)들을 막아 온 경내가 편안해져 체차되어 떠난 뒤 백성들이 모두 유임시켜 주기를 원합니다. 나주 영장(羅州營將) 이원우(李源佑)는 비적들이 약탈할 때에 고립된 성(城)을 굳게 지켰기 때문에 군사와 백성들이 그가 가는 것을 애석해 합니다. 이들을 모두 특별히 잉임시키도록 의정부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그 두 사람의 실적이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는 것이니, 모두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7월 18일 회의 안건 중 각 대신(大臣)과 장신(將臣), 경무사(警務使)는 기무처(機務處) 회의원(會議員)을 겸임하라는 것에 대해 이미 윤허를 받았는데 그 후에 방관하면서 대체로 규정대로 하지 않으니, 다시 칙지(勅旨)를 내려 회의에 와서 참석하게 하여 문제를 토의하는 길을 넓힐 것입니다.
1. 7월 22일 회의 안건 중 높고 낮은 관원들의 상소(上疏)는 사직하거나 대책을 올리거나 언사(言事)를 제외하고 무릇 논핵(論劾)하는 것 등에 관한 문제는 의정부(議政府)에 계하(啓下)하여 도찰원(都察院)에 넘긴 다음 다시 해원(該員)에게 전문(傳問)하여 실지 정상과 실지 증거를 조사한 뒤에 품처(稟處)하도록 하는 일에 대해 이미 계하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나랏일이 어려운 때에 크고 작은 사무를 하루도 잠시 동안 보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번번이 명백하지 않은 말로 인하여 마침내 죄인임을 자처하면서 사무를 덮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이제부터는 실지 정상을 조사하고서 의정부에서 품지(稟旨)한 뒤에야 비로소 죄인임을 자처하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9월 18일 신묘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박제순(朴齊純)이 올린 장계(狀啓)의 등보(謄報)를 보니, ‘노성 현감(魯城縣監) 김정규(金靖圭)의 첩정(牒呈)을 일일이 들면서 호남 비적(匪賊)의 경보(警報)가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경보에서 변란의 형상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도신(道臣)과 수령들이 토벌할 대책을 생각하지 않고 고을에서 올린 보고는 등한시하고 도신의 계사(啓辭)는 애당초 논감(論勘)하지 않은 채 보고 내용을 베껴서 그저 규례대로 등문(登聞)하였을 뿐이니, 나라의 기강으로 볼 때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단지 놀랍다고 말하기만 해서는 안 되니 해당 도신과 수령을 응당 파직하고서 잡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체차하는 것은 역시 소홀히 하는 것이니, 모두 우선 죄명을 지닌 채 거행하게 하고 각읍(各邑)과 각진(各鎭)에 각별히 신칙하여 엄하게 단속하고 군사를 모아 방비하게 할 것입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말하더라도 변란의 싹이 이미 해도(該道)에 있었건만 애당초 장문(狀聞)하지 않았습니다. 크게 사체에 관계된 일이니, 우선 감봉(減俸)하는 법을 시행하고, 역시 병사(兵使)와 수사(水使), 열읍(列邑)에 신칙하여 방도를 세워 토벌한 다음 거행한 상황에 대해 속속 치문(馳聞)하도록 삼현령(三懸鈴)으로 양도의 도신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19일 임진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만식(金晩植)의 장보(狀報)를 보니, ‘전 감사 민병석(閔丙奭)은 소재를 모르겠습니다. 인신(印信)과 병부(兵符), 도내(道內) 각읍(各邑)과 각진(各鎭)의 변장(邊將)의 병부의 좌척(左隻) 조각 72척(隻)이 모두 없어졌으니 빨리 만들어 내려 보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인신은 방금 주조하여 보냈으니, 병부를 승선원(承宣院)에서 빨리 만들어 내려 보내게 하고, 소관 읍과 각진의 병부 우척(右隻)은 새로 만들어 내려 보낸 다음에 옛날 것은 올려 보내어 태워버리도록 하라고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규원(李奎遠)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주(本州)의 전 오위장(前五衛將) 김응표(金膺杓)와 이시영(李時英), 전 현감(前縣監) 송두옥(宋斗玉)은 의로운 곡식을 내어 자원하여 바치고, 본주의 판관(判官) 채귀석(蔡龜錫)은 자기 봉급을 바쳐 진휼 밑천으로 보탰으므로 실속 있는 혜택과 큰 업적이 되기에 일체 논열(論列)하였습니다. 작년 여름과 가을에 정퇴(停退)한 환곡(還穀)은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받아낼 길이 없습니다. 모곡(耗穀)은 고사하고 원래의 환곡까지도 자연히 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804석(石) 남짓은 무슨 방법으로든 조치를 취하고, 그 나머지는 탕감하거나 견감해 주지 않을 수 없는데 더없이 중요한 나라의 곡식을 감히 멋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섬 백성들이 이처럼 거듭되는 흉년을 당하여 살 곳을 잃고 흩어져 심지어 뭍에 나가서 살 길을 찾으려는 사람까지 있으니, 다 같이 돌봐주는 도리로 보아 혜택을 베푸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환곡 3,977석 12두(斗) 7승(升) 5합(合)은 5년 동안 기한을 정퇴할 것입니다. 이런 때에 곡식을 자원하여 바쳐 진휼에 보태며 의로운 마음으로 녹봉(祿俸)을 덜어낸 것은 더욱 가상한 일이니, 전 오위장 김응표와 이시영은 모두 관내의 수령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차송(差送)하고, 전 현감 송두옥은 가자(加資)하며, 본주의 판관 채귀석은 승서(陞敍)하는 은전(恩典)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7월 24일 회의 안건 중 각도(各道)에서 상납(上納)하는 것을 모두 순돈〔純錢〕으로 바치도록 허락하고, 미상회사(米商會社)를 빨리 설치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도하(都下)의 미전(米廛)의 대행수(大行首)와 오강(五江)의 강주인(江主人)들, 쌀을 사서 장사하는 좌고(坐賈)들에게 모두 합동하여 회사를 차리도록 허락하되 농상아문(農商衙門)에서 증명서를 발급하고 규정을 정하여 공납(公納)에 편리하게 하고 겸하여 상업(商業)을 발전시키도록 계하(啓下)하셨습니다. 지금 가을걷이가 끝났으니 미상회사를 빨리 설립해야 하겠으니 탁지아문(度支衙門)과 농상아문에서 협의하여 결정해 실제 시행하는 데 힘쓰게 할 것입니다.
1. 나주(羅州), 순창(淳昌), 홍주(洪州), 안의(安義) 네 읍의 수령들이 비적(匪賊)들이 창궐할 때에 분발하여 토벌하기도 하고 방도를 세워 막기도 하여 열읍(列邑)이 크게 의지하고 있으니, 부근의 각읍(各邑)에서 비적을 섬멸하고 무마할 방도를 전적으로 해당 수령에게 맡겨서 편리한 대로 일을 행하게 하고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는 데 대하여 계하한 것이 이미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떻게 품지(稟旨)했는지 듣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의아합니다. 예천(醴泉)에서 아전과 백성들이 힘을 내어 토벌한 것도 가상히 여길 일입니다. 나주, 순창, 홍주, 안의 네 고을의 수령과 예천군(醴泉郡)에서 먼저 나서서 비적을 토벌한 사람들에게 모두 묘당에서 여쭈어 책임을 맡기고 며칠 안으로 토벌하여 요사스러운 기운을 깨끗이 제거해 버리게 할 것입니다.
1. 문관 임명 규정 제2조에서 ‘칙임관(勅任官)은 모두 임금이 선발한다. 총리대신(總理大臣)이 각 아문(衙門)의 대신(大臣)과 찬성(贊成), 도헌(都憲)과 함께 모여 협의하고 공정하게 추천하여 삼망(三望)을 갖추어 주문(奏聞)한다.’는 데 대하여 계하(啓下)하였는데 ‘모두 임금이 선발한다.’는 말 아래에 ‘혹은 임명하기도 한다.’라는 말을 첨가해 넣어 규정을 정하며 이달 11일 회의 안건 중의 칙임관을 차출(差出)한다는 한 가지 조항은 안건에서 취소할 것입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김창석(金昌錫)을 홍주목(洪州牧)에 정배(定配)하였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정현석(鄭顯奭)이, ‘봉산(鳳山) 동선령(洞仙嶺)의 전선을 단절한 장원석(張元石)을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9월 20일 계사
탐장 죄인(貪贓罪人) 심능필(沈能弼)을 여산부(礪山府)에 정배(定配)하였다.
9월 21일 갑오
귀양갔다가 방송된 죄인 민영달(閔泳達)을 탕척(蕩滌)하고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렸다. 의안은 다음과 같다.
1. 회의(會議)를 설치한 지가 이제 3개월이 되었고 이미 계하(啓下) 받은 사항도 매우 많지만 말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실행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각 아문(衙門)에 신칙하여 실제 실행하기에 힘쓰게 하고, 그 근태 정형을 살펴보아 출척(黜陟)을 공정하게 행할 것이며 이제부터는 의회(議會)를 5일에 한 번씩 설행할 것입니다.
1. 회의를 하는 날에는 각 아문의 대신(大臣), 각 군영(軍營)의 장신, 경무사(警務使)들이 각각 소관 하는 직무 안의 일에 대하여 따로 안건을 만들어서 회의에 제출할 것입니다.
1. 이달 11일 회의 안건 중 의사부(議事部)와 행정부(行政府)를 대등하게 둘 것과 승선원(承宣院)을 의정부에 옮겨 소속시킬 것에 대해서는 누런 종이쪽지를 붙여서 안건에서 취소할 것입니다.
이상에 대해, 모두 윤허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박제순(朴齊純)이, ‘데리고 있는 군관(軍官)인 전 주사(主事) 박세강(朴世綱)은 변란의 싹을 키워 흉악한 죄상이 이미 드러났고, 전 주사 박동진(朴東鎭)은 민심을 속이고 현혹하여 잠시도 용서하기 어려우므로 모두 군사와 백성을 많이 모아놓고 효수(梟首)하여 많은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9월 22일 을미
이태용(李泰容)을 의정부 도헌(議政府都憲)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에 이렇게 비적(匪賊)들이 날뛰고 있어 걱정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申正熙)를 양호 도순무사(兩湖都巡撫使)로 차하(差下)하여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지휘하게 하여 형편에 따라 토벌하거나 무마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학진(金鶴鎭)의 장계(狀啓)에 계하한 것을 보니, ‘남원부(南原府)에 모인 비적이 5, 6만 명이나 되는데 각각 무기를 가지고서 날뛰고 있고, 전주(全州)와 금구(金溝)에 모인 도당들은 일단 귀순하였다가 이내 다시 배반하였습니다.’ 하면서도 적을 토벌할 방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감사의 책임이 원래 이렇단 말입니까? 사체로 헤아려 볼 때 매우 놀랍고 개탄스러운 일이니, 도신에게 우선 견파(譴罷)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9월 23일 병신
귀양갔다가 방송된 죄인 조병식(趙秉式)을 탕척(蕩滌)하고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이승우(李勝宇)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 아뢰기를,
"호남(湖南)의 새로 차하된 수령들 중에서 남원 부사(南原府使) 이용헌(李龍憲)과 흥양 현감(興陽縣監) 박시순(朴始淳)을 모두 소모사(召募使)로 차하하여 내려가는 길에 한편으로 군사를 모집하게 하여 협력해서 비적을 토벌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4일 정유
함화당(咸和堂)에 나아가 미국 대리공사(美國代理公使) 실〔施逸 : Sill, John M.B.〕을 접견하였다.
홍남주(洪南周)를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허진(許璡)을 순무 중군(巡撫中軍)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비적(匪賊)들이 요즘은 다시 영남(嶺南), 관동(關東), 경기(京畿), 해서(海西) 등지에 널리 퍼진다고 하니, 각처에서 토벌하고 무마하는 일을 모두 순무사(巡撫使)가 일체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5일 무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병훈(李秉勳)을 소모사(召募使)로 차하(差下)하여 내려가는 길에 군사를 모집하여 힘을 모아 토벌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의 전보(電報)를 보니, 대구 판관(大邱判官)은 비적(匪賊)을 토벌하는 일로 하동(河東), 진주(晉州) 등지에 파견되었고, 안의 현감(安義縣監)은 함양 군수(咸陽郡守)를 겸임시켜 지금 방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판관(判官) 지석영(池錫永)을 토포사(討捕使)로 차하하고, 안의 현감 조원식(趙元植)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차하하여 방어에 전심하도록 전보를 쳐서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양호도순무사(兩湖都巡撫使)가 이제 이미 관부(官府)를 설치하였으니, 병부(兵符)를 받는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를 승선원(承宣院)에서 만들어 어보(御寶)를 찍은 다음 일체 전해 주어 순찰(巡察) 이하의 업무를 전제(專制)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9월 26일 기해
전교하기를,
"민란(民亂)이 일어난 것은 관리들이 탐욕을 부리고 포악하게 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정상이 불쌍하므로 나라에서는 차마 토벌하지 못하고 오로지 무마하는 데만 힘썼다. 지금 듣건대, 이 무리들이 도처에서 변란을 주동하면서 요사스러운 말로 대중을 부추기고 현혹시키며 무기를 훔쳐내어 성(城)을 공격하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다고 한다. 지난번에 선무사(宣撫使)를 나누어 보내고 계속해서 포고하였으나 미련하고 완고한 것들이 허물을 고치지 않고 고약한 반역 행위가 날로 심해지니, 이것은 양민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이제 장수에게 출사(出師)를 명하여 요사스러운 기운을 깨끗이 없애버리려 한다. 만일 해당 비적들이 무기를 버리고 귀순하여 각각 자기 생업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그 두목을 잡아서 바치는 자는 죽이지 않고 논상(論賞)하겠지만, 만일 여전히 무리가 많다는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고 감히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혹은 겉으로는 고치는 체하고 속으로는 고치지 않으면서 대중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자는 모두 사정없이 처단하겠다. 묘당(廟堂)에서는 이런 뜻을 각도(各道)의 도신(道臣)과 선무사(宣撫使)에게 알려서 비적(匪賊)들에게 선포하게 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요즘 비적들이 더욱 소란을 피우는 것은 전에 없던 변고이다.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면서도 의로운 군사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런 짓을 차마 한다면 무슨 짓을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민심이 안정되지 않은 때에 또 협잡질하는 어떤 간사한 무리들이 있어서 문서를 위조하고 비적들과 내통한다는 말이 종종 들려오니, 더없이 통탄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만일 이런 수상한 무리들이 혹은 밀지(密旨)라고 하거나 혹은 분부라고 일컬으면서 백성들을 선동하고 수령들을 위협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체포하여 먼저 목을 베고 뒤에 보고하라. 만일 혹 망설이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덮어둔 채 보고하지 않았다가 발각되는 날에는 마음대로 놓아준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묘당(廟堂)에서 신속히 각도의 도신과 수신(帥臣)에게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요즘 듣건대, 비적(匪賊)들이 마구 횡행하고 있는데 열읍(列邑)의 수령들이 붙잡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끔 후하게 대하는 자도 있다고 하니, 과연 나라의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매우 놀랍고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해당 수령에 대해서는 발각되는 대로 적발하여 엄하게 논감(論勘)하라고 삼남(三南)의 도신에게 관문(關文)으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신헌구(申獻求)가 올린 장계(狀啓)의 등보(謄報)를 보니, ‘지평현(砥平縣)의 비적(匪賊) 수백 명이 홍천(洪川)에 소굴을 만들어 놓고 들락날락하면서 재물을 약탈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본현에 사는 감역(監役) 맹영재(孟英在)가 부약장(副約長)으로서 관청과 사포군(私砲軍) 1백여 명을 거느리고 홍천에 이르러 그 괴수 고석주(高錫柱), 이희일(李熙一), 신창희(申昌熙)를 사로잡고, 혹은 목을 베고 혹은 쓰러뜨려 그 무리 5명을 죽이자 나머지는 다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버리고 간 창(槍) 58병(柄)은 거두어 군고(軍庫)에 바쳤고, 포군 김백선(金伯先)은 적들에게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맹영재가 의리를 내세워 비적들을 목 베고 사로잡은 것과 포군들이 힘을 다해 싸움에 달려 나간 것에 대해서는 응당 표창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경기(京畿)와 호서(湖西)에서 비적들이 한 번 소요를 일으킨 후부터 관리와 백성들이 거의 다 두려워 피해 이처럼 불어나 수습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보고를 보니, 맹영재는 향신(鄕紳)으로서 의로운 마음을 내어 지경을 넘어가 비적들을 섬멸하였으니 그 공로가 가상합니다. 듣건대, 방금 순무영(巡撫營)에서 소모관(召募官)으로 계차(啓差)한다고 하니, 더욱 더 격려하여 비적을 추격하여 체포하는 데 전심할수 있도록 수령(守令)의 자리가 나면 차송(差送)할 것이며, 부상당한 포군은 감영(監營)과 읍(邑)에서 물자를 주어 치료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듣건대, 강릉(江陵)에 현재 비적의 소요가 있는데 해당 부사(府使)가 전임 자성 군수(慈城郡守)로서 교대하기를 기다리느라 부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변란이 있는 곳에 수령을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는데, 자산(慈山)에 마침 결원이 났으니 강릉 부사 김영진(金永鎭)은 옮겨 차임하고 그 대신 전 승지(承旨) 이회원(李會源)을 차하하여 하직인사를 그만두고 부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지평 전 감역(砥平前監役) 맹영재(孟英在)는 포수(砲手) 100여 명을 거느리고 홍천(洪川)에 이르러 비적(匪賊)의 괴수 3명을 의리를 내세워 목을 베거나 사로잡았으니 힘을 다하여 어려움에 달려간 것이며, 전 주사(主事) 정기봉(鄭基鳳)은 안성(安城), 죽산(竹山) 등지에서 비적들을 효유(曉諭)하였으니 공로가 많습니다. 금산(錦山)의 유학(幼學) 정두섭(丁斗燮)은 해당 군(郡)에서 비적들이 마구 창궐하자 의리를 제창하고 힘을 다하여 포(砲)를 설치하고 방어하였으니, 더없이 가상합니다. 모두 소모관(召募官)으로 차하(差下)하여 안성에 후원병(後援兵)으로 방금 떠나보냈습니다. 전 현감(縣監) 이상덕(李相德), 전 부사과(副司果) 이윤철(李潤徹), 전 군사마(軍司馬) 신효식(申孝湜)은 자원하여 군사를 따라 나섰으니 모두 참모관(參謀官)으로 차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영흥부(永興府)의 퇴호(頹戶)·압호(壓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9월 28일 신축
함화당(咸和堂)에 나아가 일본국 전권공사(日本國全權公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접견하였다. 국서(國書)를 바쳤기 때문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박제순(朴齊純)의 등보(謄報)를 접하니, 병사(兵使) 이장회(李長會)가 보고한 것을 낱낱이 들면서, ‘이달 24일에 비적(匪賊)의 무리 수만 명이 성(城) 아래를 범하는 것을 병사가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막아 싸워서 비적 수십 명을 죽이니, 비적들이 비로소 물러나 흩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남(湖南)의 비적들과 기맥(氣脈)을 통하고 있기 때문에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의 힘만으로는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금방 상당(上黨:청주(淸州)의 옛 이름)에서 무기를 잃었다는 경보(警報)를 들었는데, 이런 보고가 뒤따라 이르렀으니 양호(兩湖)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들이 평소에 미리 방비하지 못하여 매우 허술합니다. 순무영(巡撫營)에서 빨리 군사를 징발하여 달려가 구원할 방도를 강구하게 하여 이 비적을 즉시 소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아뢰기를,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비적(匪賊)들이 서로 연결되어 호서에서 지금 호남에게 원군을 청하였다고 하니, 듣기가 놀라고 의혹스럽습니다. 우선 심영(沁營)의 병정(兵丁) 200명을 해당 군영의 중군(中軍)이 거느리고 바닷길을 따라 은진(恩津), 노성(魯城) 등지에 이르게 하여 지키고 막아내는 방도로 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9일 임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비적들이 일단 귀순하였다가 이내 배반하니 줄곧 은혜로 어루만져 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한창 군사를 조발하여 토벌하고 있으니, 선무사(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은 이제 우선 감하(減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방금 삼가 영남 선무사(嶺南宣撫使) 이중하(李重夏)의 장본(狀本)에 계하(啓下)한 것을 보니, ‘의흥(義興) 민란의 장두(狀頭) 이장학(李章鶴)은 집을 불태워 버리고 수령을 끌어냈는데, 주동한 죄를 이미 자복하였습니다. 이처럼 불온한 자에 대해서는 마땅히 효수(梟首)하여 많은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겠기에 지금 대구(大邱) 진영에 옮겨 가두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민란의 두목 이장학은 해당 도신을 시켜 군사와 백성을 많이 모아 놓고 효수하여 많은 사람들을 경계한 후에 등문(登聞)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호서와 호남의 비적들을 지금 순무영(巡撫營)에서 군사를 조발하여 토벌하고 있는데, 멀고 가까운 곳의 선비와 백성들 중에 소문을 듣고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민종렬(閔種烈)과 여산 부사(礪山府使) 유제관(柳濟寬)을 호남 소모사(湖南召募使)로 차하(差下)하고, 홍주 목사(洪州牧使) 조재관(趙載觀)과 진잠 현감(鎭岑縣監) 이세경(李世卿)을 호서 소모사(湖西召募使)로 차하하여 의병을 모아 하루 속히 소탕하게 하며, 영남(嶺南)에는 창원 부사(昌原府使) 이종서(李鍾緖)와 전 승지(承旨) 정의묵(鄭宜默)을 역시 소모사로 차하하여 일체로 방비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방금 영해부 안핵사(寧海府按覈使) 이중하(李重夏)의 장본에 대해 계하한 것을 보니, 여러 범인들을 주모자와 추종자를 열거하고서 처분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영해(寧海) 백성들이 무리로 호소한 것은 오직 결가(結價)를 줄여달라고 요구하기 위한 것으로써 여러 날 서로 버티던 끝에 결국 그들이 바라는 대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쫓아가 체포하자 완악한 마음이 북받쳐 드디어 수령을 들어다 내버리는 변고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분수와 기강을 어기고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니, 그 행동을 끄집어 논한다면 법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남응복(南應福)은 본래 시골의 패악한 부류로서 고을 민란의 주동자로 선뜻 나섰고 장두(狀頭)로서 민란을 선동하였다는 것은 비록 이미 자복하였지만, 직접 완악한 짓을 하였다는 명백한 증거는 사실 없는 만큼 죄를 신중히 심리하는 원칙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죄를 가볍게 처벌한다는 법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세 차례 엄한 형신(刑訊)한 뒤에 원악도(遠惡島)에 종신토록 정배(定配)할 것입니다.
신쾌연(申快淵)은 하리(下吏)로서 오랫동안 돈과 곡식을 맡아보면서 재물을 많이 거둬들인 까닭에 비방과 원망을 사 변란이 일어날 단서를 만들었으며, 박경분(朴敬分)과 권용평(權用平)은 스스로 폐단을 바로잡겠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부추겨 소란을 일으켰으니, 논의를 주장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모두 한 차례 엄히 형신한 뒤에 원악지(遠惡地)에 정배하고, 그 나머지 죄인들은 도신으로 하여금 경중을 나누어 참작하여 처리하게 할 것입니다.
해당 부사 김헌수(金瀗秀)는 성질이 본래 사납고 형벌을 지나치게 했는데 결국 일 처리의 마땅함을 잃어 그 자리에서 격변을 초래하였으니 응당 엄중히 처벌하여야 하며 범장(犯臧)한 돈은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가동(家僮)을 가두고 일일이 받아낸 다음 해도(該道)에 내려 보내게 하여 공용에 충당할 것은 충당하고 해당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은 돌려주도록 도신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9월 30일 계묘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순무영(巡撫營)에서 지금 병정을 조발하여 나누어 보냈으니 군량을 마련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호서 감사(湖西監司)에게 지나가는 길가 부근의 고을 중에서 그 편의를 고려하여 모종(某種)의 공곡(公穀)과 공전(公錢) 중에서 계속 실어 보내게 하되, 수요량을 해당 군영(軍營)에서 알리기를 기다려 접응(接應)하게 할 것이며, 각각 그 도내(道內)의 수령 중에서 따로 운량관(運糧官)을 정하여 신속히 거행하도록 다 같이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의 장본(狀本)에 대해 계하(啓下)한 것을 보니, 진해 전 현감(鎭海前縣監) 정규찬(鄭逵贊)은 2년 동안 수령으로 있으면서 오로지 탐오만 일삼아서 범장(犯贓)한 돈이 9,600여 냥(兩)이라고 하였습니다.
해원(該員)을 감처(勘處)하기를 기다려 그가 범장한 돈을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그 가동(家僮)을 잡아다 가두고 일일이 받아내게 한 다음 본도(本道)에 내려 보내어 해당 백성들에게 돌려주게 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양호 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경리청 부령관(經理廳副領官) 겸 안성 군수(兼安城郡守) 성하영(成夏泳)의 첩보(牒報) 내에, 「본군(本郡)의 동학도(東學徒)의 두목 유구서(兪九西)와 접주(接主) 김학여(金學汝), 진천(鎭川)의 동학도 김금룡(金今龍) 등 세 놈을 기찰하여 체포해 이달 27일에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우선 처형하였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홍원현(洪原縣)의 정배 죄인(定配罪人) 민치헌(閔致憲)을 방송하라고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