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33권, 고종32년 1895년 6월
6월 1일 경오
법부 훈령(法部訓令) 제2호, 〈각 부 관찰사와 【한성부 관찰사(漢城府觀察使)는 제외한다.】 참서관, 군수, 판사, 검사의 사무 집행에 관한 안건〔各府觀察使參書官郡守判檢事事務執行件〕〉을 정하였다. 【각부 재판소를 앞으로 설치하려고 하나 아직 겨를이 없으니 각 부의 관찰사들 당분간 겸임하여 집행하게 하는데, 관찰사는 재판소 판사의 직무를 집행하고 참서관은 재판소 검사의 직무를 집행하여야 한다. 다시 각 지방 재판소에 지소(支所)를 설치하기 전에 각 당해 군수에게 재판 사무를 겸임하게 하여 당해 관내의 소송을 심리하되 혹시 불복(不服)하는 등의 사실이 있으면 그 상소(上訴)를 관찰사의 비준을 받아서 심판하여야 한다.】
【원본】 37책 33권 66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69면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재판(裁判) / 사법-법제(法制)
6월 2일 신미
건청궁(乾淸宮)에 나아가 이탈리아 국왕〔伊太利國王〕의 조카인 공작(公爵) 아부리〔阿夫里〕를 접견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내가 내일 이탈리아 국왕〔伊太利國王〕의 조카인 아부리〔阿夫里〕가 거처하고 있는 여관인 종정사(宗正司)에 가왕(駕往)하여 송별하고자 하였는데 아부리〔阿夫里〕가 간절하게 만류하기 때문에 동가(動駕)하는 것은 그만두겠으나 내 마음이 매우 섭섭하여 특별히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을 파견하여 송별하게 하노라."
하였다.
6월 3일 임신
외부 협판(外部協辦) 윤치호(尹致昊)에게 이탈리아 국왕〔伊太利國王〕의 조카 아부리〔阿夫里〕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인천항(仁川港)에 나아가 전별(餞別)하라고 명하였다.
종2품 서주순(徐胄淳)을 법부 민사 국장(法部民事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칙령(勅令) 제127호, 〈부청의 경비 배정에 관한 안건〔府廳經費排定件〕〉과 칙령 제128호, 〈각 부 순검(巡檢) 정원에 관한 안건〔各府巡檢定員件〕〉과 칙령 제129호, 〈각 부 순검 봉급에 관한 안건〔各府巡檢俸給件〕〉과 칙령 제130호, 〈경무관 이하 복장 제도에 관한 안건〔警務官以下服制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6월 4일 계유
중앙과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성하였다. 내부령(內部令) 제4호와 제5호, 〈호열자 소독 규칙〔虎列刺病消毒規則〕〉과 〈호열자 예방 및 소독 집행 규정〔虎列刺病豫防及消毒執行規程〕〉을 모두 공포하였다.
6월 6일 을해
러시아〔俄國〕 공사(公使) 베베르〔韋貝 : Waeber, K.〕와 부공사(副公使) 수사 제독(水師提督)을 접견하였다.
6월 8일 정축
6품 김시제(金時濟)를 농상공부 광산 국장(農商工部鑛山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하였다.
6월 10일 기묘
3품 이재곤(李載崑)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우리 왕조에 성균관(成均館)을 둔 것은 바로 옛 3대(三代) 때의 태학(太學) 제도로서 열성(列聖)이 숭상하고 장려하며 많은 선비들의 본보기가 되는 점에서 물론 근래에 형식보다 실속이 뒤지고 명색이 실지와 맞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어찌 그 근본이야 좋지 못한 것이 있고 그 제도야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 제도에는 학부(學部)가 있어 특별히 각부(各部)의 명목과 나란히 세웠으며 그 소속으로는 여러 가지 명칭의 학교가 있어 교육하여 성과를 거둘 책임을 똑같이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성균관만은 어디에도 소속된 곳이 없습니다. 대체로 쓸데없는 관청은 없애버려야 하고 쓸데없는 관리는 추려내야 하는데, 성균관도 쓸데없는 부류에 뒤섞인 것입니까? 만약 쌓이고 쌓인 폐단을 다 없앨 수 없다고 한다면 법이 오래된 다음에 폐단이 생기는 것은 피치 못할 형편이지만 사람이 있고 정사가 잘되면 옛 관습에 기초하여 새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옛 제도에서 경서(經書) 공부만 전적으로 숭상하는 것은 온갖 재주를 다 터득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육예(六藝)의 과목이나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학문은 모두 경술(經術)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이른바 경술이란 무엇이겠습니까? 효성과 공순, 충성과 우애, 양생(養生)과 장사(葬死)는 일상적으로 서로 의거하여 뗄 수 없는 것이며, 어려서는 배우고 자라서는 실천하며 몸을 수양하고 집안을 꾸리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안히 하는 것은 종신토록 필요하며 끝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 된 도리로 경술을 버리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풍속과 기운이 날로 개명하여 옛날과 지금은 형편이 다른 만큼 정해진 법에만 굳이 매달릴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여러 나라에는 모두 이른바 종교라는 것이 있는데, 신(臣)은 어떤 종교인지는 모르지만 각기 그 교리를 가르치면서 서로 침해하거나 금지하지 않아도 자주 자강(自主自强)하는 일에 해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 유독 우리나라만이 유교(儒敎)가 기본이라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체 무용지물로 여긴 후에야 부강해지는 방도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새로 세운 학교 제도에서도 오륜 행실(五倫行實)과 역대의 사학(史學)으로부터 시작하므로 높은 관리와 선비들은 우리의 도(道)가 대뜸 땅바닥에 떨어졌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어리석은 사람과 천한 사람들이 성균관이 헛되이 닫혀 있는 것을 날마다 보면서 성균관이 폐지되어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도(道)를 더는 강론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의혹을 느끼고 선비들은 더러 눈물을 흘리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성균관에 마땅히 관리를 다시 두며 한갓 형식으로만 있는 성균관 규정도 어느 정도 정리하여 실속 있게 만든 다음 유신(儒臣)을 선발하여 스승으로 삼고 뛰어난 선비들을 골라서 공부하게 함으로써 ‘주관(周官)’에서 제도를 정하여 고치지 않던 원칙을 보존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교육하는 과목은 전적으로 경술을 기본으로 삼는다면 유교가 환히 빛나고 태평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이 글을 내각(內閣) 토의에 붙여 만일 보잘것없는 사람의 의견에도 쓸 만한 것이 있으면 시행하도록 빨리 명령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문제는 마땅히 내각에 토의를 붙여 좋은 편을 따라 아뢰어 품재(稟裁)하게 하겠다."
하였다.
6월 12일 신사
조령을 내리기를,
"짐량(斟量)할 것이 없지 않으니 교동(喬桐)의 유십년(流十年) 죄인 이준용(李埈鎔)을 특별히 방송하라."
하였다.
칙령(勅令) 제131호, 〈전 감리서에서 주관하던 사무를 각 당해 군수에게 소속시키는 안건〔前監理署管掌事務各該郡守屬件〕〉과 칙령 제132호, 〈각 부의 판임관에게 관등 봉급령 제7조와 제8조의 제2항을 적용하지 않는 안건〔各府判任官官等俸給令第七條及第八條第二項適用件〕〉과 칙령 제133호, 〈공가를 지출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상환 처분 규정 개정에 관한 안건〔貢價未下償還處分規程改正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6월 13일 임오
조령을 내리기를,
"질병(疾病)이 성행하여 치료할 생각을 해야 하는 만큼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궁내부(宮內府)에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라."
하였다.
6월 15일 갑신
법부령(法部令) 제7호, 〈법률 기초 위원회 【본 위원회는 형법(刑法), 민법(民法), 상법(商法), 치죄법(治罪法), 소송법(訴訟法) 등을 자세히 조사하고 또한 법 초안을 작성한다.】 규정〔法律起草委員會規程〕〉을 공포하였다. 【워원장은 1명인데 법부 칙임관(法部勅任官) 중에서 겸하고, 위원은 약간 명인데 그중 더러는 법부 주임관(奏任官) 중에서 겸한다.】
【원본】 37책 33권 67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69면
【분류】사법-법제(法制)
6월 18일 정해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태자(王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6월 19일 무자
법부 협판(法部協辦) 이재정(李在正)을 법률 기초 위원장에 임명하고, 서주순(徐胄淳), 장박(張博), 신재영(申載永), 한창수(韓昌洙), 피상범(皮相範), 현영운(玄暎運)을 위원에 임용하였다.
6월 20일 기축
군부 대신(軍部大臣) 신기선(申箕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臣)이 예법을 허물고 정리를 끊어버리며 기복(起復)의 칙령(勅令)에 무턱대고 응한 것은 어떻게 단지 엄한 명령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사실은 임금을 사모하고 나라를 우려해서 조금이나마 기울어진 형편을 수습할 수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명령을 받은 이후로 오랜 타산이 다 그릇되어지고 한 가지 계책도 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심이 깨닫지 못하여 조정의 명령이 시행되지 못하니, 마땅히 중추원 의회(中樞院議會)를 실시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널리 받아들이고 광범위하게 물으며 한편으로는 미련한 백성들을 깨우쳐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공평하고 개화된 정사를 하는 것이 지금의 급한 일이기는 하지만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교화는 조금도 변경시킬 수 없고 의관(衣冠)과 예악(禮樂)의 풍속은 모두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복 제도를 너무 지나치게 고친 결과 위아래의 구분을 뒤섞어 놓고 온 나라의 민심을 거슬러 세상 도리를 위하여 한심할 뿐만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근심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응당 의복 제도를 그전대로 복구하되 단지 지난해 6월의 칙령대로 하면 충분하리라고 여겼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아래위를 시끄럽게 군 것이 반복하는 정도만이 아니었건만 폐하는 그르다고 하지는 않으면서도 종내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내각(內閣)의 동료들은 대부분 반박하면서 완고하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대강(大綱)을 펴지 않고 세목(細目)만 벌여 놓으며 제도가 다 변하자 문자(文字)도 달라졌습니다. 그 본의를 따져보면 비록 이웃 나라에서 대신 계책을 세워주는 후한 뜻과 내각의 신하들이 입헌 제도를 세우려는 원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잘못을 바로잡으려다가 지나쳐서 명분과 교화를 해치기도 하고 있을 수 있는 부족한 점을 탓하여 근본까지 모두 버리면서 사정을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무턱대고 남의 형식과 행동을 따르면서 줄곧 외국만을 모방하여 마치 격에 맞지 않는 짓을 하다가 원래의 좋은 점마저 놓치는 격이 되었으니 모두 통곡을 하고 한숨을 쉬며 가슴을 쥐어뜯을 걱정거리입니다.
이런 생각을 올리는 의견에 여러 번 비쳤건만 끝내 아래 위에서 채택되지 못하였으니 백성들이 장차 흩어지고 나라가 앞으로 위태로워져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무슨 낯으로 상(喪) 중에 평상시의 옷을 입고 공무를 보면서 가만히 앉아서 많은 녹봉(祿俸)을 타먹겠습니까?
그리고 본 부의 사무로 말한다면 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썩은 선비로서 군사 관계의 일을 억지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삼척 동자(三尺童子)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여러 군영(軍營)을 그대로 두거나 없애거나 합친 뒤이고 각 부대를 새로 두거나 분설(分設)하는 때를 당하여 온갖 제도가 초창기이고 여러 가지 일이 뒤엉켰으니 설사 도사행(陶士行)이나 유목지(劉穆之)라도 오히려 갈피를 잡기 어렵겠는데 하물며 신처럼 우둔한 사람이야 어떻게 처리해 내겠습니까? 게다가 공병대(工兵隊) 편제(編制)로 군영에 들어온 뒤에 윤달의 월급을 아직 내주지 못한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원망 소리는 길에 차고 남습니다. 또한 신은 관청 규정에 익숙하지 못하고 새 규정을 전혀 모르다 보니 의견을 처리할 때 매번 외부 사람들의 조소와 비난을 받으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모욕을 받은 것도 한두 가지로 셀 수 없으니 견벌(譴罰)을 면한 것만도 역시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미련을 가지고 그대로 눌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감히 외람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존엄을 모독하는 것이니 폐하는 신의 현직(現職)을 빨리 벗겨줌으로써 여막(廬幕)에 돌아가 상제 노릇을 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장(更張)하는 때에 논의가 혹 차이날 수 있는 만큼 의혹스럽게 여길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경(卿)의 사정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군부 대신(軍部大臣)의 직책을 사양한 데 대해서는 지금 당분간 마지 못해 들어준다."
하였다.
경무사(警務使)인 정2품 안경수(安駉壽)를 부장(副將)에 임용하였다. 부장 안경수를 군부 대신(軍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인 종1품 어윤중(魚允中)을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종1품 신기선(申箕善)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장례원경(掌禮院卿)인 정2품 심상훈(沈相薰)을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 1등에 서임하였다. 내각 총서(內閣總書)인 종2품 권재형(權在衡)을 군부 협판(軍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3품 이성렬(李聖烈)을 내각 총서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탁지부 사세 국장(度支部司稅局長) 이정환(李鼎煥)을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정2품 이윤용(李允用)을 경무사(警務使)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정2품 조병직(趙秉稷)을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민형식(閔亨植)을 왕후궁 대부(王后宮大夫)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군부 대신(軍部大臣) 안경수(安駉壽)에게 임시로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의 사무를 대리하라고 명(命)하였다.
6월 24일 계사
3품 이순범(李舜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바로잡아야 할 몇 가지 조항을 아래에 감히 진술합니다. 첫째는 명분을 바로하고 기강을 세우는 것이며, 둘째는 학교를 일으키고 어질고 착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며, 셋째는 문장(文章)을 표시하여 귀하고 천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며, 넷째는 순검(巡檢)을 줄이고 병정(兵丁)을 늘리는 것이며, 다섯째는 부세(賦稅)를 가볍게 지우고 까다로운 법을 없애는 것이며, 여섯째는 성문(城門)을 여닫는 규정을 엄격히 하는 것입니다. 명분을 바로하고 기강을 세우는 것으로 말하면 나라의 네 가지 기둥이 혹시라도 해이되면 그 결과가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를지 모르는데, 근래에 명분과 기강이 비로 쓸 듯이 여지없이 해이되었으니 보고 듣기에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학교를 일으키고 어질고 착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나라의 도구로서 예로부터 더없이 잘 다스려지는 정사에서는 다 이것을 하나의 큰 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상관도 없고 쓸 데도 없는 것처럼 내버려두어, 헤아리건대 한 세상의 통탄으로 되고 있습니다. 문장(文章)을 표시하여 귀하고 천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나라의 의복 제도입니다. 지금은 조정의 선비와 서민(庶民), 양반과 천한 사람이 다같이 한 가지 의복을 입어 구별이 없이 혼잡하게 되었으니 한 세상의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탄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순검을 줄이고 병정을 늘린다는 것은 나라의 군사 제도입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군액(軍額)을 줄이고 생소한 순검(巡檢)을 새로 두는 것은 사실 효과는 없고 한갓 월급만 낭비할 뿐입니다. 까다로운 법을 없애고 부세를 가볍게 지우는 것은 나라의 큰 정사입니다. 요즈음 시골에서 부세를 거두는 것은 전보다 준 것이 없고 법을 맡은 관청에 갇힌 죄수들을 오랫동안 지체시키면서 처결하지 않는 통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원망하는 소리가 도로에 차 넘치고 있습니다. 성문을 여닫는 규정을 엄격히 하자는 것은 나라의 관문을 단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닫는 데에는 원래 정해진 규정이 있어 감히 위반하지 못하는데 지금은 애당초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활짝 열어 놓은 채 밤낮없이 전혀 단속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모두 옛것을 고쳐 새롭게 만들어낸 뒤에야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규정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이 여섯 가지 조항을 지극하게 바로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은 내각(內閣)에 토의를 붙여 품재(稟裁)하게 하라."
하였다.
6월 25일 갑오
법률(法律) 제12호, 〈재판소에 판사 시보와 검사 시보를 두는 안건〔裁判所判事試補檢事試補置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칙령(勅令) 제134호, 〈판사, 검사, 판사 시보, 검사 시보관 등의 봉급령〔判事檢事判事試補檢事試補官等俸給令〕〉과 칙령 제135호, 〈육군 부대 소속 하사, 병정의 매장 규칙〔陸軍隊附下士兵丁埋葬規則〕〉을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6월 27일 병신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이 개혁하는 때를 당하여 유신(維新) 하는 정사에 참작하는 것이 없지 않으니, 개국(開國) 504년 4월 1일 이전의 범죄 중에서 모반(謀反)과 살인, 절도와 강도, 통간(通奸)과 재물에 대한 협잡죄를 범한 자 외에는 일체 석방함으로써 크게 베푸는 은전을 보이라."
하였다.
6월 28일 정유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이경직(李耕稙)을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6월 29일 무술
장안당(長安堂)에 나아가 프랑스〔法國〕 수사 제독(水師提督)을 접견하였다.
종2품 이범진(李範晉)을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궁내부 참서관(宮內府參書官) 민상호(閔商鎬)를 제용원장(濟用院長)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