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34권, 고종33년 1896년 2월
2월 1일 양력
【음력 을미년(乙未年) 12월 18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삭전(朔奠)과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왕태자(王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원본】 38책 3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7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빈전(殯殿)에 나아가 삭전(朔奠)과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왕태자(王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주일본 전권공사(駐日本全權公使) 김가진(金嘉鎭)이 상소하여 체차(遞差)하였다.
2월 3일 양력
칙령(勅令) 제13호, 〈전주부, 나주부, 남원부의 여러 섬을 나누어 완도, 돌산, 지도 3군을 두는 안건〔全州府羅州府南原府諸島分莞島突山智島三郡置件〕〉을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영암(靈巖), 강진(康津), 해남(海南), 장흥(長興) 4군에 있는 여러 섬은 완도군에서, 흥양(興陽), 낙안(樂安), 순천(順天), 광양(光陽) 4군에 있는 여러 섬은 돌산군에서, 나주(羅州), 영광(靈光), 부안(扶安), 만경(萬頃), 무안(務安) 5군에 있는 여러 섬은 지도군에서 관할하게 한다.】
【원본】 38책 3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78면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법제(法制)
칙령(勅令) 제14호, 〈전환국 관제(典圜局官制)〉를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2월 4일 양력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면(李載冕)이 아뢰기를,
"《상례보편(喪禮補編)》에는 빈전(殯殿)에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할 때 영의정(領議政)이 일을 집행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관제(官制)를 이미 개정(改正)하였으니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총리대신(總理大臣)이 일을 집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상례보편》에는 하현궁(下弦宮) 때에 옥백(玉帛)을 바치고 애책문(哀冊文)을 올리며, 현궁(玄宮)의 감봉(監封)은 영의정이 맡고, 발인(發引) 및 하현궁 때의 솔예재궁관(帥舁梓宮官)은 좌의정(左議政)이 하며, 찬궁(欑宮)을 열 때의 식재궁관(拭梓宮官)과 하현궁 뒤의 복토관(覆土官)은 우의정(右議政)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관제를 이미 개정하였으니 어떻게 마련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옥백을 바치고 애책문을 올리며, 현궁의 감봉과 솔예재궁관은 총리대신(總理大臣)으로 하며, 식재궁관과 복토관은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으로 하라."
하였다.
2월 5일 양력
재결(災結)인 안동부(安東府)의 910결(結), 나주부(羅州府)의 2만 2,275결, 공주부(公州府)의 712결에 조세를 견감(蠲減)해주라고 명하였다. 내각(內閣)에서 토의를 거쳐 상주(上奏)하였기 때문이다.
2월 8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왕태자(王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2월 10일 양력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고(故)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경직(李耕稙)은 어려운 때에 몸바쳐 죽었으니 충성과 절개가 뛰어나고, 고 춘천부 관찰사(春川府觀察使) 조인승(曺寅承)은 몸을 깨끗이 하여 의리를 지켰으니 충성과 절개가 늠름하며, 고 훈련원 연대장(訓鍊院聯隊長) 홍계훈(洪啓薰)은 나랏일을 위하여 죽었으니 충성과 의리가 가상합니다. 모두 돌보아주는 돈을 주는 일로 토의를 거쳐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이어 이경직과 조인승은 특별히 종1품으로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주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2월 11일 양력
임금과 왕태자(王太子)는 대정동(大貞洞)의 러시아 공사관〔俄國公使館〕으로 주필(駐蹕)을 이어(移御)하였고, 왕태후(王太后)와 왕태자비(王太子妃)는 경운궁(慶運宮)에 이어하였다.
방축향리 죄인(放逐鄕里罪人) 이재순(李載純), 유종신 죄인(流終身罪人) 이민굉(李敏宏), 이충구(李忠求)·전우기(全佑基)·노흥규(盧興奎), 유삼년 죄인(流三年罪人) 안경수(安駉壽)·김재풍(金在豐)·남만리(南萬里)를 모두 특별히 놓아주라고 명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면(李載冕)의 본관(本官)을 의원면직(依願免職)하였다.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 외부 대신(外部大臣) 김윤식(金允植), 내부 대신(內部大臣) 유길준(兪吉濬),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 군부 대신(軍部大臣) 조희연(趙羲淵), 법부 대신(法部大臣) 장박(張博),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정병하(鄭秉夏),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김종한(金宗漢), 경무사(警務使) 허진(許璡), 참령(參領) 이범래(李範來)·이진호(李軫鎬)에 대하여 모두 본관(本官)을 면직(免職)하고, 정2품 이재순(李載純)·안경수(安駉壽)에 대하여 특지(特旨)로 징계를 사면(赦免)하였다. 특진관(特進官) 김병시(金炳始)를 내각 총리대신에, 정2품 이재순(李載純)을 궁내부 대신에,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박정양(朴定陽)을 내부 대신에, 종2품 이완용(李完用)을 외부 대신에, 학부 대신(學部大臣) 조병직(趙秉稷)을 법부 대신에 임용하였으며, 정2품 이윤용(李允用)을 군부 대신에 임용하고 경무사(警務使)를 겸임(兼任)시켰다가 조금 뒤 겸임한 벼슬은 면직하였고, 정2품 윤용구(尹用求)를 탁지부 대신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내부 대신 박정양(朴定陽)에게는 내각 총리대신과 궁내부 대신의 사무를, 외부 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는 학부 대신과 농상공부 대신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고,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 이재정(李在正)에게는 대신(大臣)의 사무를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정2품 안경수를 경무사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이용직(李容稙)을 춘천부 관찰사(春川府觀察使)에, 궁내부 참서관(宮內府參書官) 유기환(兪箕煥)을 궁내부 협판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궁내부 협판 유기환(兪箕煥)에게 대신의 사무를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전 내각 총리대신(前內閣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 전 농상공부 대신(前農商工部大臣) 정병하(鄭秉夏)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조령을 내리기를,
"8월의 변고는 만고(萬古)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하였으며 왕후(王后)가 붕서(崩逝)하였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詔勅)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쩌다가 다행히 천벌이 내려 우두머리가 처단당한 결과 나라의 예법이 겨우 거행되고 나라의 체면이 조금 서게 되었다. 생각하면 뼈가 오싹하고 말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만약 하늘이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돕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어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역적 무리들이 물들이고 입김을 불어넣은 자들이 하나둘만이 아니니 앞에서는 받들고 뒤에서는 음흉한 짓을 할 자들이 없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사나운 돼지가 날치고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얼게 된다는 경계를 갑절 더해야 할 것이다.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이 명령 내용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을미년(1895) 8월 22일 조칙(詔勅)과 10월 10일 조칙은 모두 역적 무리들이 속여 위조한 것이니 다 취소하라."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죄가 있으면 반드시 승복시켜 나라 법에서 도피하지 못함은 상리(常理)이다. 아! 지난 8월 20일 사변이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때 은밀히 꾸민 흉악한 음모와 교활한 계책은 구문(究問)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우리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다같이 알고서 함께 분노하는 것이다. 그 우두머리 악한은 사실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 오늘 하늘의 이치가 매우 밝아서 역적의 우두머리는 처단되었다. 도망친 죄인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권영진(權濚鎭), 이두황(李斗璜), 우범선(禹範善), 이범래(李範來), 이진호(李軫鎬) 등은 기일을 정해 놓고 잡아오며, 그 나머지는 당시에 부추김과 사주를 받았던 자라도 사세(事勢)에 구애되거나 권력에 강요당했을 뿐이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일체 우리의 대소 신료(大水臣僚)와 중외(中外)의 군민(軍民)은 각기 그 전과 같이 안착하고 의심을 품지 말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번에 춘천(春川) 등지에서 백성들이 소란을 피운 것은 단발(斷髮) 때문이 아니라 대체로 8월 20일 사변 때 쌓인 울분이 가슴에 가득 차서 그것을 계기로 폭발한 것을 묻지 않고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 이미 국적(國賊) 법에 의해 처단되고 나머지 무리들도 차례로 다스릴 것이니 지난번에 교화하기 어렵던 백성들도 아마 틀림없이 알고는 옛날의 울분을 쾌히 풀 것이다. 해당 지방에 주둔하는 군대는 반드시 먼저 이 조칙(詔勅)을 춘천부(春川府)에 모여 있는 백성들에게 보여 각각 귀화하여 생업에 안착하도록 하고, 그 두목 이하에 대해서는 모두 내버려두고 묻지 않음으로써 모두 함께 유신(維新)하도록 하며 너희 군대의 대소 무관(武官)과 병졸(兵卒)들은 즉시 환군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국적을 잡아서 이미 중형에 처하였으니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시원히 풀었다. 좌우 감옥서(左右監獄署)에 현재 갇혀 있는 죄인은 모두 즉시 석방하여 널리 용서하는 은전(恩典)을 보여 주어라."
하였다.
2월 12일 양력
종2품 윤치호(尹致昊)에 대하여 특지(特旨)로 징계를 면제시키고 학부 협판(學部協辦)에 임용하였으며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는 동시에 대신(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농상공부 협판(農商工部協辦) 고영희(高永喜)에게 대신의 사무를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2월 13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사직(社稷)·영희전(永禧殿)·진전(眞殿)·경모궁(景慕宮)·빈전(殯殿)은 비서원 승(祕書院丞)으로 하여금 봉심(奉審)하게 하고, 왕태후 폐하(王太后陛下)가 계신 경운궁(慶運宮) 행재소(行在所)와 대원군 부대부인궁(大院君府大夫人宮)에는 궁내부 참서관(宮內府參書官)으로 하여금 문후(問候)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모든 백성들에게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아! 임금은 백성의 표준이니 임금이 아니면 백성들이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므로 임금은 일거 일동(一擧一動)을 백성들에게 명백히 보이는 것이 귀중하다. 그저께 일은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의 우두머리와 반역 무리들의 흉악한 음모와 교활한 계책의 진상이 숨길 수 없게 되자 막아버리고 승복시키는 방도가 혹 허술한가 걱정하여 외국에서 이미 시행한 규례대로 임시 방편을 써서 짐이 왕태자(王太子)를 데리고 대정동(大貞洞)에 있는 러시아 공사주관(公使駐館)에 잠시 가 있는 뒤에 왕태후(王太后)는 왕태자비(王太子妃)를 데리고 경운궁(慶運宮)으로 갔으며 짐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모든 범인을 잡게 하고 그들이 묶인 다음에 곧 돌아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범인을 묶을 때에 우민(愚民)들이 폭동하여 갑자기 살해하고 나머지 범인은 모두 다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쳐버리니 군중의 심리가 더욱 흉흉하여 안정되지 않고 있다. 이 때를 당하여 짐이 있는 곳을 너희들 백성들에게 명백히 알릴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대궐이 무사하고 민심이 여느 때와 같게 되었으니 짐이 경사스럽고 다행하게 여기는 바이다. 며칠 안으로 장차 대궐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명백히 알리니 너희들 백성들은 각각 의심을 풀고 생업에 안착하라."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이 조종(祖宗)들의 부탁을 받들어 우리 팔도(八道)와 만백성의 임금으로 된 지 지금 30여 년이 되었다. 즉위 이래로 밤낮으로 생각하면서 부모 된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어려움과 걱정거리가 거듭 생기고 기근이 연거푸 들어 나의 백성들이 꺼꾸러지고 쪼들려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지는 일이 곳곳에서 보고 되고 있다. 말이 여기에 미치면 비단옷에 쌀밥도 편안치 않다. 거듭하여 개국(開國) 503년 6월 이후로는 나라가 문명(文明)하고 진보한다는 명색만 있고 그 실질은 오히려 없으므로, 모든 백성들이 의심을 품는 일이 없지 않다. 아! 짐의 덕이 없어서 그런가, 정부의 믿음이 서지 못하여 그런가, 일을 하는 신하들이 게을러서 그런가? 밤낮으로 두려워함이 범의 꼬리를 밟은 것과 같으니 그 원인을 따져보면 혜택이 아래에 닿지 못해서 그렇다. 일체 중앙과 지방의 공납 장부(公納帳簿)에 올라 있는 이포(吏逋)와 백성들이 미납한 것과 각 공인(貢人)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 개국 503년 6월 이전에 기록된 것은 모두 탕감하게 함으로써 조정의 돌보아주는 뜻을 보이노라."
하였다.
대원군(大院君)을 존봉(尊奉)하는 의절(儀節)은 작년 4월에 정한 조례(條例)에 따라 경계(警戒)하고 호위하는 도리를 다하는 데 힘쓰라고 명하였다. 궁내부(宮內府)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특진관(特進官) 정범조(鄭範朝)를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특지(特旨)로 김종한(金宗漢)에 대한 징계를 사면하였다. 정2품 김종한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산릉 제거(山陵提擧)에 임명하였다.
2월 14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민영준(閔泳駿)과 민형식(閔炯植)의 범죄가 매우 엄중하지만 섬에 귀양 보내는 가벼운 처벌을 주었다. 그런데 사면하는 은전〔赦典〕을 그들에게까지 함께 주었으니 형벌을 잘못 적용한 것을 면할 수 없다. 모두 법부(法部)에게 법대로 징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5일 양력
내각(內閣)에 칙유(勅諭)하기를,
"이달 11일에 역모(逆謀)가 드러났는데 그 흉악한 무리들은 모두 내각과 군부(軍部)의 장관(長官)이다. 그중 몇 사람은 짐에 대해서 불충할 뿐만 아니라 바로 작년 8월 20일 왕후(王后) 살해 음모에 관계한 역괴(逆魁)임이 의심할 바 없으므로 즉시 엄령을 내려 그 역적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 역괴의 우두머리 중 조희연(趙羲淵), 권영진(權濚鎭), 이두황(李斗璜), 우범선(禹範善), 이범래(李範來), 이진호(李軫鎬) 등은 모두 현직 혹은 교체된 무관(武官)과 경관(警官)이므로 참수(斬首)를 명하였더니, 그 칙령이 해당 역괴들을 놀라게 하여 관할하던 마을을 떠나 도주하여 군사를 선동하거나 혹은 어긋나는 명령을 내리지는 못하였으나 또한 병사와 경관들의 짐에 대한 충성심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위에 든 엄한 명령을 그대로 적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날 저물녘에 해당 명령을 고쳐서 그 범인들을 생포〔活捉〕하는 대로 법정에 해송(解送)하라고 하였다. 이제 그 명령을 거듭 밝히니 만약 범인들이 혹 묶이면 상해를 가하지 말고 즉시 법정에 압송하고, 해당 법정에서는 공명정대한 공판(公判)으로 확증에 근거해서 적당한 형벌에 처하라. 김홍집(金弘集)과 정병하(鄭秉夏)는 모두 내각 대신(內閣大臣)이므로 잡아온 뒤에 공평한 재판을 하려고 하였는데 분격한 백성들이 그 범인들에게 손을 대어 살해하기까지 한 것은 탈옥할까 걱정한 것이고 또 쌓이고 쌓인 울분을 풀려는 것이었으니, 이것은 법에만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짐의 신민(臣民)들이 공명정대한 재판을 받게 하려던 본의와도 어긋난다. 이 사건은 조사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날 짐이 왕궁(王宮)을 떠날 때 경황없이 서둘러 내각 신하들의 반열이 잘 정돈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체 조칙과 고시(告示) 등에 말을 잘못 쓴 것이 매우 많았으니 이것도 차례로 개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듣건대 그날 맡은 직책도 없는 사람이 우둔하고 쓸데없는 방문(榜文)을 만들어 관인(官印)도 찍지 않은 채 내걸었다고 하니, 이것도 사실을 조사하여 처리하리라."
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병직(趙秉稷)에게 고등 재판소 재판장(高等裁判所裁判長)을 겸임시켰으며, 3품 윤정구(尹定求)를 춘천부 관찰사(春川府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2월 16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짐이 왕조의 500년에 한 번 변하는 때를 당하고 우내만방(宇內萬邦)의 개명하는 시운을 만나 짐이 정력을 가다듬고 정사를 도모하여 부강하게 할 대책을 강구한 지가 몇 해 되었으나 국가가 다난(多難)하여 그 효과가 없다. 이제부터 나라에 이롭고 백성들을 편하게 할 방도를 더욱더 강구하여 나의 백성들과 함께 문명(文明)한 경지에 올라 태평한 복을 누릴 것이니, 모든 나의 신료와 백성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고 짐의 사업을 도와 완성하라. 전날 며칠 안으로 대궐에 돌아갈 뜻을 선시(宣示)하였으나 경운궁(慶運宮)과 경복궁(景福宮)을 수리하도록 이미 유사(有司)에 명령하였다. 그 공사가 우선 끝나는 대로 돌아가든지 거처를 옮기든지 확정할 것이니, 너희들 백성들은 그리 알라.
오늘 백료(百僚)가 정착하지 못하고 사졸(士卒)들이 노숙(露宿)하여 거처하며 경관(警官)이 분주하니 짐이 그 수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마는 또한 어쩔 수 없다. 너희들 백성들은 나의 마음을 이해하라."
하였다.
정2품 이정로(李正魯), 정2품 민병석(閔丙奭), 정2품 김명규(金明圭)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3품 이재곤(李載崑)을 춘천부 관찰사(春川府觀察使)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궁내부 특진관 이정로를 빈전 제거(殯殿提擧)에, 궁내부 특진관 민병석을 산릉 제거(山陵提擧)에 임명하였다.
민영준(閔泳駿), 민형식(閔炯植)을 교동군(喬桐郡)에 유십년(流十年)으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법부(法部)에서 칙교(勅敎)를 받들고 징역십년(懲役十年)으로 조율(照律)하였는데 특지(特旨)로 유배(流配)로 바꾼 것이었다.
2월 17일 양력
전 탁지부 대신(前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이 귀향하다가 용인(龍仁)에 이르러 거주하는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2월 18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아! 대소 민인(民人)들은 나의 계고(誡誥)를 밝게 들으라. 이번에 너희들이 의병(義兵)을 일으킨 것은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였겠는가? 생각건대 국가를 위하여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성토하려 함이니, 이는 너희들의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또한 우리의 조종조(祖宗朝)에서 기르고 키운 은택에 의한 것이다. 제멋대로 행동한 잘못은 없지 않으나 돌아보건대 그 마음이 어찌 가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천도(天道)가 부정한 자에게 재앙을 내려 난신(亂臣)은 처단당하고 남은 수괴들은 이미 다 귀양 갔으니 이는 실로 하늘에 있는 조종(祖宗)들의 말없는 도움에 의하여 나라의 운수를 억만 년 연장한 것이다. 신인(神人)의 울분을 시원히 풀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너희들 백성들은 지방에 있어 이 기쁜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하였거나 혹은 떠도는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여 지금까지도 해산하여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내부(內部)에 칙명을 내려 관원을 따로 파견해서 너희들 백성들에게 상세히 알리게 하니, 지금의 형세를 헤아리고 짐의 고충을 살피어 즉시 서로 이끌고 물러가서 원래의 생업에 안착하라. 조정에서 인의(仁義)의 도(道)로 너희들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니 너희들 백성들은 기꺼이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너희들이 망설이고 머뭇거리면서 의병을 일으키던 초심(初心)을 바꾸어 교화(敎化)를 방해하는 그릇된 습성을 보인다면 이것은 너희들의 목숨이 끊어지는 날이다. 왕사(王師)가 향하는 곳에는 너그러운 용서가 없을 것이니, 너희들은 자기 몸이 아픈 것처럼 여기는 마음을 본받아 군부(君父)에게 근심을 끼치지 말라."
하였다.
내부 대신(內部大臣)이 훈시(訓示)하기를,
"아! 지난번의 불행한 운수에 대해서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효경(梟獍)과 같은 자들이 조정에 가득하고 귀역(鬼蜮)과 같은 자들이 독을 뿜으니 태양이 빛이 변하여 대낮이 회명(晦冥)하게 되었다. 우리 삼천 리 이 동토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치고 그 누가 머리칼을 곤두세우고 눈을 흘기면서 성토할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사방(四方)이 떠들썩하여 의거(義擧)가 구름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 하늘의 위엄이 진동함에 흉악한 역적이 소탕되었으니 역적을 치는 일에서 의거를 더는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단발(斷髮)하는 문제는 편리한 대로 하게 허락한 만큼 의병을 일으킨다고 말할 명색이 없는 것이다. 우리 폐하가 민인(民人)들의 심정을 살피어 진심으로 내린 10행의 사지(辭旨)가 지극히 간절하니, 민인들로서는 어찌 영광스럽고 다행하지 않겠으며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권하노니 칙사(勅使)가 도착하는 날에 무기를 놓고 부대를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생업에 안착하라.
만일 다른 일을 칭탁(稱託)하여 왕명을 거역하면 이것은 민인들이 스스로 죄를 재촉하는 것이다. 징계하여 처리할 방도는 폐하의 칙유에 이미 자세히 이야기된 만큼 본 대신은 덧붙여 말하지 않겠으니, 대체로 양유(良莠)의 나뉨과 화복(禍福)의 계기는 생각을 한번 돌리는 데 달려 있으므로 삼가고 또 삼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총호사(總護使) 이재면(李載冕)을 해임시키고 정1품 조병세(趙秉世)로 대신하였다.
2월 19일 양력
친위대 대대장(親衛隊大隊長) 이남희(李南熙), 중대장(中隊長) 신우균(申羽均) 등이 춘천부(春川府)의 비도(匪徒)를 격파한 후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니, 친림(親臨)하여 장졸(將卒)에게 호궤(犒饋)하고 상을 주었다.
정2품 김가진(金嘉鎭)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김재풍(金在豐)에 대해 징계를 특별히 사면하였다.
2월 20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개국(開國) 504년 10월 11일 사건은 창의 복수(倡義復讐)를 위한 것으로서 망동한 잘못은 없지 않으나 용서할 만한 것이 있다. 그런데 흉당(凶黨)의 모함을 입어 원통한 죽음까지 당하였으니 어찌 슬프고 불쌍하지 않겠는가? 유배와 징역에 처하였던 여러 죄인은 이미 석방되었으니, 임최수(林㝡洙)와 이도철(李道徹)도 모두 그 관작(官爵)을 회복하라."
하였다.
정2품 최익현(崔益鉉)을 임명하여 각 부(府)와 군(郡)의 민인 등지의 선유 대원(宣諭大員)으로 삼았다.
학부령(學部令) 제1호로 개국(開國) 504년 칙령(勅令) 제145호에 의하여 〈보조 공립 소학교 규칙(補助公立小學校規則)〉을 반포하였다.
2월 22일 양력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병직(趙秉稷)을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에, 정2품 이범진(李範晉)을 법부 대신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내각 총서(內閣總書) 권재형(權在衡)을 법부 협판(法部協辦)에, 경무사(警務使) 안경수(安駉壽)를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법부 협판 정인흥(鄭寅興)을 중추원 2등 의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민상호(閔商鎬)를 외부 교섭 국장(外部交涉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으며,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범진(李範晉)에게 경무사를 겸임(兼任)시켰다.
2월 23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지난해 8월 역변(逆變)과 10월의 무옥(誣獄)에 관한 사건은 흉악한 무리들이 짜고 농간질하여 재판이 공정하게 되지 못하였음을 짐이 명백히 알고 있다. 이에 두 옥사를 바로잡도록 명령하니 너희 형관(刑官)들은 짐의 신중한 뜻을 본받아 정성을 다하라. 짐은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겠다."
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범진(李範晉)에게 고등 재판소 재판장(高等裁判所裁判長)을 겸임(兼任)시켰다. 법부 참서관(法部參書官) 이응익(李應翼)을 법부 민사 국장(法部民事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2품 이호익(李鎬翼)을 산릉 제거(山陵提擧)에 임명하고, 한성부 관찰사(漢城府觀察使) 김경하(金經夏)의 본관(本官)을 면직(免職)하였다.
2월 24일 양력
학부 참서관(學部參書官) 이상재(李商在)를 내각 총서(內閣總書)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이하영(李夏榮)을 한성부 관찰사(漢城府觀察使)에, 외부 협판(外部協辦) 박제순(朴齊純)을 중추원 2등 의관(中樞院二等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법부 형사 국장(法部刑事局長) 조중응(趙重應)의 본관(本官)을 면직(免職)하였으며, 법부 검사(法部檢事) 이병휘(李秉輝)를 법부 형사 국장(法部刑事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이도재(李道宰)에 대해 징계를 특별히 사면하였다.
2월 25일 양력
당년(當年)의 재결(災結)을 인천부(仁川府)에는 3,149결(結) 남짓, 개성부(開城府)에는 829결 남짓, 해주부(海州府)에는 2,645결 남짓, 남원부(南原府)에는 6,152결 남짓을 잡아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선유 대원(宣諭大員) 최익현(崔益鉉)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하늘이 돌보아주지 않아 우리 대행 왕후(大行王后)가 갑자기 흉한 변을 만났으니, 온 나라의 백성들은 높고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통곡하고 원통함을 부르짖으며 역적들과는 하늘 땅 사이에서 맹세코 함께 살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臣)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서 일찍이 다시 살려주는 하늘땅과 부모와 같은 은혜를 입고 목숨을 보전하여 오늘까지 살아오는 처지로서야 어찌 온 집안을 내버리고 큰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재주가 변변치 못하고 힘이 약하여 이미 왕망(王莽)을 친 적의(翟義)의 군사 같은 것을 일으키지 못한 데다가 또 한(韓) 나라를 위해서 원수를 갚은 장량(張良)의 방망이 같은 것도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빨리 죽어서 귀신이 되어 가지고 역적을 쓸어버림으로써 살아서 미처 풀지 못한 원통함을 풀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역적들은 한껏 흉악하게 굴면서 아래 위를 마구 협박하고 심지어 몰골을 훼손시키는 화(禍)까지 빚어내어 온 나라의 풍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하였습니다. 신은 여기서 빨리 죽지 못한 것을 더욱 한스럽게 여기며 종묘 사직(宗廟社稷)과 백성들이 거름구덩이 속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12월에 역적들에게 잡혀 달포나마 옥에 갇혀 있었는데 마침 나라에서 역적을 토벌하는 때를 만나서 비로소 석방되어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신이 비록 고향 마을에 살아 돌아와서 버젓이 지내지만, 위로는 폐하가 대궐을 떠난 데 대한 생각이 밤낮으로 잊혀지지 않으며 아래로는 백성들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같은 무리들끼리 서로 죽이는 데 대해서 걱정합니다. 신이 목석(木石)이 아닌 이상 무슨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한창 늙고 병들어 괴롭게 앓는 소리를 하고 있는 때에 이 고장 수신(守臣)이 은혜로운 윤음(綸音)을 전달하여 신으로 하여금 각군(各郡)의 의병(義兵)들에게 명령을 선포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두 손으로 받들어 절을 하고 읽어보았더니, 비록 문장의 체제에는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이 있지만 그 내용은 지극히 정성스럽고 몹시 간절하여 백성들을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큰 성인의 덕이 더없이 비상하게 뛰어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목석처럼 미련한 무리들일지라도 모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복종할 것입니다. 더구나 저들은 모두 다 충성과 의리를 내세운 백성들로서 그것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떳떳한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였음은 진실로 성상의 하교에서도 말씀하신 것이니, 또 어찌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흩어져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하된 사람으로서 임금의 명령을 받고 태평한 때에는 혹시 사양하여 벗어날 수도 있겠지만 위태롭게 간고(艱苦)한 때에야 어찌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경저(京邸)에 갇혀 있을 때에 작년 12월 28일의 사변(事變)을 목격하였습니다. 역적의 우두머리인 김홍집(金弘集)과 정병하(鄭秉夏)는 비록 이미 처단 당했지만 조희연(趙羲淵)과 유길준(兪吉濬) 이하 여러 역적들은 또 모두 도망쳐서 잡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죄는 시역죄(弑逆罪)보다 더 중대한 죄가 없고 역적은 김홍집과 정병하, 조희연과 유길준보다 더 큰 역적이 없으니, 설사 만 토막을 내고 그의 십족(十族)을 도륙하더라도 오히려 귀신과 사람들의 분노를 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처단하고도 그 죄를 분명하게 바로잡아 온 나라에 호령하지 않고, 도망쳤는데도 그 처자(妻子)를 데려다 엄하게 기찰하여 체포하지 않은 채 그저 심상한 가벼운 죄처럼 여기면서 내버려두고 따지지 않으며 되도록 가볍게 처리하려고 합니다. 죄인에 대하여 처자에게까지 죄를 주지 않는 것은 원래 문왕(文王)의 정사이지만, 그러나 이번의 김홍집과 정병하, 조희연과 유길준처럼 시역죄를 진 큰 변고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도망쳐버려 미처 주벌하지 못한 자를 또 어찌 내버려두고 따지지 않음으로써 역적들로 하여금 거리낌이 없도록 만들고 그 남은 종자를 길러 뒷날에 우환을 끼치겠습니까? 이것은 명색은 역적을 토벌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날뛰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가지고 신으로 하여금 구차스럽게 해설하게 하여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는 백성들을 해산시키려고 하니, 저들이 만약 이것을 꼬집어 힐책한다면 신은 말의 이치에서 이미 굽어들 것이니 어떻게 폐하의 뜻을 잘 받들어 집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첫째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역 죄인이 없는 때가 없었지만 그것은 모두 그 나라의 신하들 속에서 나왔습니다. 지금은 만국(萬國)이 서로 화친하고 온 세상이 하나로 된 만큼 응당 환난을 같이 돌보아 주고 원수를 같이 미워하면서 믿음과 의리로 서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 왜적들은 이웃 나라의 정의(精誼)를 생각하지 않고 먼저는 박영효(朴泳孝)와 서광범(徐光範)이, 뒤에는 조희연과 유길준이 모두 음모를 돕고 반역을 공모함으로써 여러 해 동안 변고를 꾸밀 때 그 소굴이 되었습니다. 신은 듣건대 각 국이 화친을 맺는 데에는 이른바 공법(公法)이라는 것이 있으며 또 약조(約條)라는 것도 있는데, 신이 모르기는 합니다만 그 약조와 법에 과연 이웃 나라의 역적을 도와 남의 나라 임금을 위협하고 남의 나라 국모(國母)를 시해한다는 조문이 있단 말입니까? 보나마나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과연 없다면 그 이른바 공정한 법과 약조를 응당 어디에 써야 하겠습니까? 법을 세우고 약조를 정하였다면 응당 왜놈들의 죄를 따지고 각 국에 공문(公文)을 띄워 군사를 일으켜 가지고 죄를 따짐으로써 함께 분해하고 미워하는 것이 대의(大義)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우리는 이미 왜적이 두려워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각 국에서도 역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 군(郡)에서 의병들이 일어나서 왜적을 치지 않고서는 원수를 갚을 수 없다고 하는데 그 명색이 이미 정당한 데다가 그 말도 타당합니다. 가령 신으로 하여금 명령을 가지고 내려가서 형편을 타이르게 하더라도 저들이 만약 대의를 들어 성패(成敗)를 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신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둘째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화(開化)를 한 이후부터 선왕(先王)들의 법제(法制)를 모두 고치고 순전히 왜적이 시키는 대로만 하여 중화(中華)로 하여금 오랑캐가 되게 하고 인류가 짐승이 되게 하니, 이것만도 개벽 이래로 있지 않았던 큰 변고이지만, 단발(斷髮)의 한 가지 문제에는 더욱더 심한 점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다행히 폐하가 마음을 선뜻 돌려 옷차림까지 포함하여 편리한 대로 하라는 칙교(勅敎)를 내렸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머리칼을 기르라는 명백한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여 한두 명의 신하들은 방금까지도 머리칼을 보존하다가 애통해하는 조칙(詔勅)이 내린 후에 도리어 머리칼을 깎아버렸습니다. 아! 폐하께서 중국을 따르고 오랑캐를 등지는 것은 잠시도 지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단지 이미 잘라버린 머리칼을 갑자기 기를 수 없기 때문에 천천히 처리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 더없이 우둔한 백성들은 망령되게 억측하기를, ‘폐하는 오랑캐를 따르기 좋아하고 백성들을 무던히 속인다.’고 여기면서 이것이 점점 퍼져 깨뜨릴 수 없는 확고한 거짓말이 되었습니다. 신이 아무리 성상의 칙유(勅諭)를 받들고 선포하여 그들이 따르지 않는 데 대하여 말하더라도 저들은 반드시 ‘어째서 명령한 것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는가?’라고 말할 것이니, 그러면 신은 또 대답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셋째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갖 도로(道路)를 분주하게 만들려고 한다면 신은 차라리 군명(君命)을 어긴 죄를 받을지언정 정말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선포함으로써 만 사람의 비웃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신은 이미 감히 명령을 받고서 길을 떠나지 않겠으며 또한 집에 버젓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길가에 나와 엎드려서 삼가 엄한 형벌을 기다리니 폐하는 재량하고 살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일에는 급하고 급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지금의 급한 일로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경(卿)은 이 임무에 대해서 의리상 사양할 수 없으니 곧 가서 선유(宣諭)하라."
하였다.
전 주사(前主事) 윤효정(尹孝定) 등이 상소를 올려 대궐로 돌아올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너희들의 진술은 진실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대궐로 돌아가겠으니 즉시 물러가서 각각 자기 일에 안착하라."
하였다.
2월 26일 양력
이천 군수(伊川郡守) 성기운(成岐運)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2월 27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짐이 생각건대 어찌 사랑해야 할 것이 짐의 백성이 아니며 불쌍해 할 것도 또한 짐의 백성이 아니겠는가? 역괴 난당(逆魁亂黨)이 서로 배짱이 맞아서 국모(國母)를 시해하고 군부(君父)를 협박하며 법령(法令)을 혼란시켜 억지로 머리를 깎게 한 결과 온 나라에 짐의 백성들이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 충의(忠義)를 떨쳐 곳곳에서 창기(倡起)함이 어찌 명분 없는 일이라고 하겠는가? 지금은 난적을 소탕하여 나라의 원수를 시원히 갚고 삭발을 편한 대로 하게 하였으니 끼었던 구름이 활짝 걷히고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졌다. 온 나라 안에 짐의 백성들이 어찌 기뻐서 춤추지 않겠는가? 이에 짐이 여러 차례 조칙을 내려 속마음을 펼쳐 타일렀더니 충의로 일어나서 도리를 알고 이미 흩어져 돌아가서 각각 생업에 안착한 사람이 있다. 이는 짐이 사랑해야 할 백성이다. 그러나 우둔하고 미혹하여 아직도 흩어지지 않고 이따금 임명된 관리를 죽이며 마을을 침략하는 자가 있으니, 이것은 짐의 명을 거역하며 짐에게 근심을 끼쳐 스스로 죄를 재촉하는 것이다. 짐은 부득이 왕사(王師)들에게 명하여 가서 쳐부수게 하니, 전날에 충의로 들고 일어났던 짐의 백성들이 오늘은 미혹함으로 창검의 상처를 받게 함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아! 다시 깨우치지 않고 엄한 벌을 가하는 것은 짐의 마음에 매우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짐이 종1품 신기선(申箕善)에게 명하여 남로 선유사(南路宣諭使)로 특파하고 종2품 이도재(李道宰)에게 명하여 동로 선유사(東路宣諭使)로 특파하니, 경(卿)들은 짐이 상처받은 듯이 여기고 자식을 보호하듯이 하는 뜻을 본받아 왕사가 도착하기 전에 연도의 각군(各郡)과 당해 지방에 먼저 가서 성심으로 칙유하여 짐의 사랑스럽고 불쌍한 백성들이 창칼에 맞는 화(禍)와 죽어 구렁텅이에 뒹구는 환란을 면하게 하여 백성의 부모 된 짐의 마음을 위로하라."
하였다.
내부(內部)에서, ‘충주부 관찰사(忠州府觀察使) 김규식(金奎軾), 청풍 군수(淸風郡守) 서상기(徐相耆), 단양 군수(丹陽郡守) 권숙(權潚)이, 난민(亂民)들이 소동을 일으켰을 때 해(害)를 입었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였다.
2월 28일 양력
5품 이호성(李鎬成)을 탁지부 전원 국장(度支部典園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민영기(閔泳綺)를 충주부 관찰사(忠州府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종1품 이규원(李奎遠)을 경성부 관찰사(鏡城府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3품 김상덕(金商悳)을 홍주부 관찰사(洪州府觀察使)에 임용하고 주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2월 29일 양력
전 사과(前司果) 심상희(沈相禧) 등이 올린 상소(上疏)의 대략에,
"신들이 나라가 변고를 당하던 날에 죽지 못하고 초야에서 처분을 기다리면서 한 가닥 목숨이 아직까지 붙어 있는 것은 위로는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며 만 번 죽을 계책을 감히 내어 나라의 은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삼가 칙교(勅敎)를 읽건대 경군(京軍)과 의병(義兵)은 각각 자기 처소로 돌아가라고 하였으니 폐하의 말씀이 대단합니다. 은혜롭게 생각해주는 것이 하늘과 같으므로 신은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즉시 흩어져 돌아가지 않는 것은 왜놈들이 나라 안에 가득 차고 역신(逆臣)들이 말을 못하게 하면서 도덕이 있는 당당한 나라를 재물과 권세로 여기기 때문에 신들의 이 거사(擧事)는 다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주(周) 나라에서는 흉노(匈奴)를 친 후에야 선왕(宣王)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한(漢) 나라에서는 역적 왕망(王莽)을 처단한 후에야 광무제(光武帝)가 다시 번창하였으니 적을 토죄하고 역적을 주륙하는 데에 신들이 이 일을 담당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의병이란 핑계 아래 소동을 피우니 그 죄를 자초하는 데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떳떳한 마음을 근원하면 참작하여 용서할 만한 점이 없지 않으니 즉시 서로 타일러 가지고 흩어져 돌아가 생업에 길이 안착함으로써 왕사(王師)를 수고롭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