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35권, 고종34년 1897년 5월

싸라리리 2025. 1. 2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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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양력

【음력 정유년(1897) 3월 30일】 회계원 검사 과장(會計院檢査課長) 이인우(李寅祐)를 법부 협판(法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원본】 39책 35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2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회계원 검사 과장(會計院檢査課長) 이인우(李寅祐)를 법부 협판(法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군부 대신(軍部大臣) 임시 서리(臨時署理)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심상훈(沈相薰)이 아뢰기를,
"방금 대구(大邱)에 나가 주재(駐在)하고 있는 전 사령관(前司令官) 이겸제(李謙濟)가 보고한 것을 보니, ‘본대(本隊)의 소대장(小隊長) 우남규(禹南圭)가 영덕 병참(盈德兵站)에 머물러 주둔할 때 본군(本郡)의 백성 신석구(申錫九)에게 지나치게 형벌을 가하여 목숨을 잃게 하였으며, 각처(各處)의 백성들에게 강제로 빌려주고 거둬들인 전(錢)이 그 수가 4,210냥(兩)이라는 많은 액수입니다. 그리하여 원성이 자자하니 듣기에 매우 놀랍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군인으로서 도적들을 소탕하고 양민을 편안히 해야 할 즈음에 백성들을 보호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노략질하여 마침내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위관(尉官)은 군인의 자리에 두어서는 안 되니, 우선 본관(本官)을 면직(免職)한 다음 재판소에 넘겨 법에 따라 징계 처분을 하고, 범한 장전(贓錢)은 본부(本府)의 군법국(軍法局)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거둬 내게 해서 훗날의 폐해를 징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 승지(前承旨) 이최영(李㝡榮)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예로부터 임금이 더없이 존귀한 것은 천하 사람들이 감히 뛰어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보인 것이고, 또한 신하와 백성들이 존경하고 사모하여 높이 받들기 때문입니다.
폐하의 훌륭한 덕(德)과 대단한 업적으로 오늘날 자주 독립(自主獨立)의 시대를 만나서 조서(詔書)와 칙서(勅書)로서 이미 황제(皇帝)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아직도 군주(君主)의 지위에 있습니다. 군주와 황제는 바야흐로 지금 천하에 통용되는 규례이므로 살펴보면 그 법은 한 가지입니다마는, 본국(本國)의 신하와 백성들이 좁은 소견으로 모두 원하는 것은 제(帝)라고 칭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 까닭을 말씀드리면, 대체로 황(皇)이라는 글자와 제(帝)라는 글자의 뜻은 모두 크다는 것을 일컫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 30여 년 동안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는 데서 한 가지 행실도 내버려 둔 것이 없었고 덕을 펴고 인자한 정사를 시행하는 데서 한 가지 문건도 이루어주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현(儒賢)을 예의로써 대하여 학습(學習)을 바로잡아 주었고 선비들을 많이 길러내어 문풍(文風)을 이룩하였으니 빛나고 빛나서 일월(日月)과 짝하였으니, 크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넓게 확대하는 큰 도량을 열어서 한 모퉁이도 막히지 않았고 변천하는 시운(時運)에 순응하여서 그 올바름을 잃지 않아 천지 사방 밖에까지 뻗쳐 마치 한 집안의 무리와 같이 하였으니, 크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천리 넓은 지역의 육지와 바다의 공고한 방어 시설에 의거하여 곰·범·사자와도 같은 수십 만의 병사들을 길러냈기에 그 견고함은 능히 자력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게 되었고 그 강대함은 능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크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폐하께서 지니신 큰 덕, 큰 사업, 큰 세력인데 크게 존귀하다는 칭호에만 아직도 미처 다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신들이 존경하고 사모하여 높이 받드는 정성에 비추어 볼 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또 더구나 우리 태자 전하는 예지(叡智)가 일찍이 뛰어나서 날로 달로 발전하여 성대하게 장차 나라가 억만 년토록 크게 존귀할 근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실로 폐하께서 모범을 만들고 교훈을 물려주는 데 달려 있으니, 신들이 존경하고 사모하여 높이 받드는 것이 또한 어떻겠습니까? 외람됨을 무릅쓰고 감히 이렇게 번거롭게 하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속히 판단을 내리시어 천도(天道)가 순환하는 이치를 헤아리시고 황제라는 크게 보배로운 자리에 임어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의 말은 매우 옳지 못하다."
하였다

 

5월 3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심순택(沈舜澤)을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정1품 민영상(閔泳商)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종2품 민영옥(閔泳玉)·남치원(南致源)·신택희(申宅熙)를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 민영소(閔泳韶)를 대행 왕후 묘지문 제술관(大行王后墓誌文製述官)에 임명하였다.

 

5월 5일 양력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서상우(徐相雨)를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부령(副領) 이민굉(李敏宏)을 군부 포공 국장(軍部砲工局長)에 보임(補任)하였다.

 

5월 6일 양력

발인(發引)할 때 도로와 교량을 적간(摘奸)하는 것은 도감 당상(都監堂上)과 낭청(郎廳) 및 돈체사(頓遞使), 시종원(侍從院), 내부 당상(內部堂上) 각 1원(員), 영선사장(營繕司長)이 나아가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총호사(總護使)가 주청(奏請)하였기 때문이다.

 

5월 7일 양력

정2품 한규설(韓圭卨)을 법부 대신(法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호익(李鎬翼)을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안경수(安駉壽)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이채연(李采淵)을 인산(因山) 시 돈체사(頓遞使)에 임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내부(內部)가 청의(請議)한 것으로 인하여 돌산군(突山郡)의 관할 구역을 개정(改正)하는 문제에 관해 회의를 거쳐 상주(上奏)합니다.’라고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여수(麗水) 등 네 개의 면(面)은 옛 현(縣)들이다. 일찍이 좌수영(左水營)을 설치한 것으로 인하여 이어 현을 폐지하였던 것인데 지금 이미 영을 폐지한 조건에서 현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지금부터 따로 여수군(麗水郡)을 두고 위치는 전 좌수영 자리에 하며 제도(制度)와 경비 같은 것은 내부에서 조정(措定)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5월 9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 이정로(李正魯)와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조동면(趙東冕)을 서로 바꾸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유학(幼學) 권달섭(權達燮)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이 나라를 세운 초기에 왕업을 비로소 이룩하였으며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어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처럼 천명(天命)을 다지기를 크게 하고 치밀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열성조(列聖朝)의 신무(神武)한 교화가 거듭 빛나고 누대에 걸쳐 태평을 이루어 우리 성상(聖上)이 임어(臨御)한 후에는 어진 혜택과 덕 있는 교화가 자내(字內)에 차고 넘쳤습니다. 큰 덕을 밝게 입히시니 요(堯) 순(舜)의 시대가 회복되었고 교화를 크게 펴시니 탕무(湯武)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500년간의 종사(宗社)가 다행히 큰 법을 개혁하는 때를 당해서 삼천리 강토가 비로소 자주 독립의 운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하와 백성들이 경축하여 온 나라가 모두 봄을 맞이하게 되었고 억만년토록 아름다움이 무궁하여 왕업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건양(建陽)은 원래 황제의 연호인 만큼 등급이 높습니다. 대체로 신하와 백성들이 몹시 애쓰고 충심으로 간청하며 모두 바라는 것은 성상의 뜻이 바뀌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폐하의 요(堯) 순(舜)과 같은 정사와 문명한 덕에 대해서는 귀신과 사람들에게 증험할 수 있고, 지금 자주 독립의 위치에서 조서(詔書)와 칙서(勅書)로 명령하는 것과 연호를 정하는 것은 이미 황제의 제도를 시행한 것인데 아직도 군주의 자리에 계십니다. 군주와 황제는 현재 한 세대를 놓고 볼 때 그 뜻은 같지만, 본국(本國)의 신하와 백성들의 좁은 소견으로는 제(帝)라고 칭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자주(自主)의 ‘자(自)’자(字)와 독립(獨立)의 ‘독(獨)’자의 뜻은 전적으로 자기의 의사에 따라 혼자 마음대로 하는 데에 있지 여기에 물어 보고 저기에 의거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자주적인 우리나라는 마땅히 황제라고 불러야 하는데, 어째서 크게 보배로운 황제의 자리에 임어하지 않으십니까? 삼가 성상의 뜻을 알 수 없으나 혹시 나라의 체통을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하늘의 뜻과 사람들의 마음에 돌아온 큰 운수로써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심으로써 위로는 하늘과 조종(祖宗)이 주는 명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조야(朝野)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받드는 정성을 펴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의 말은 또한 매우 옳지 못하다."
하였다.

 

유학(幼學) 심의승(沈宜承)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정병하(鄭秉夏)·조희연(趙羲淵) 등과 같은 자들은 없었습니다. 분하고 원통함을 더할 나위 없이 품은 사람들이 간혹 있기는 하였지만 오늘날처럼 공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큰 원칙과 큰 의리로 볼 때 피차(彼此)에 다름이 없어야 하니 지금 이들이 충신인가 역적인가에 대한 분간은 자연히 만국의 공정한 논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은 오히려 역적들과 한 하늘을 이고 억지로 참아 가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무슨 낯으로 각국(各國)의 모인 자리에 참가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달에 김운락(金雲洛)의 상소에서 말한 대로, 김홍집과 정병하는 비록 주륙은 행해졌지만 국법이 시행되지 못하여 죄명도 확정되지 못하였고, 유길준과 조희연의 무리들은 잡아오지 못해서 죄안(罪案)을 작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승오(李承五)와 김윤식(金允植)의 무리들은 버젓이 집에 있는데도 형벌을 가하지 않았으며, 허진(許璡)·안환(安桓)·이승구(李承九)는 역적 무리들이 권세를 부리던 날에 한결같이 그들의 부추김을 받아 형벌에 관한 일을 전담하여 한 마음으로 일하였으니 그들이 역적과 편당한 죄는 면할 수 없으며 그 나머지 불만 품은 불순한 무리들이 안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외부와 연계를 가지고 화근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또한 염탐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월 이후로 햇무리가 서고 여우가 우는 요사스러운 변고가 종종 나타나는데 이것은 모두 음(陰)이 성하고 양(陽)이 쇠하는 것으로써 형벌에 관한 법을 잘못 적용한 소치입니다.
바라건대 전하는 마음속에서 단안을 내리시어 속히 정부(政府)에 명하여 각 공사관(公使館)의 공사(公使)들을 모아 크게 담판을 벌인 다음 곧바로 일본(日本)에 조회하여 조희연·유길준 등 여러 역적들을 붙잡아 와서 그리하여 그들의 몸을 두 동강 내는 극형에 처하게 하고, 또 법부(法部)에 명하여 김홍집과 정병하의 죄를 소급하여 다스려서 대역(大逆)에 연좌(連坐)된 형률로 단죄하게 하소서. 그리고 김윤식·이승오·허진 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전(殿)과 궁(宮)에 왕후(王后)를 폐위하였다고 고유(告由)한 관리들에 대해서도 그 죄의 경중에 따라 해당한 법을 시행하소서.
일본의  미우라〔三浦〕로 말하면 그는 공사의 임무를 맡고 있으니, 마땅히 이웃 나라와 관계를 잘 맺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데 역도들과 부화뇌동하여 이웃 나라의 왕후를 시해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일본의 죄인입니다. 또 일본을 놓고 말하더라도 이미 이웃 나라와 사귀는 의리를 중요시해야 하는 만큼 어찌 이런 하찮은 무리들의 생명을 아까워해서 두 나라 간의 맹약을 저버리겠습니까? 그들이 붙잡아 보내어 법을 바로잡을 것임은 절대로 의심을 가질 여지가 없습니다.
오형(五刑)과 오례(五禮)에 대해서는 이미 조정의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니, 폐하께서는 무엇이 무서워 처결하지 않으며 정부는 무엇이 구애되어 행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정에서 만약 이와 같은 큰 의리로 시행한다면 비록 온 나라의 귀머거리, 벙어리, 병든 자, 앉은뱅이라 하더라도 뛰쳐 일어나 두 배의 기운을 낼 것이며 온 나라가 한 마음이 될 것이니 다시 부흥할 시기는 머지않아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유념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전에 내린 비답에 다 말하였고 또한 마음속으로 이해되는 점이 있으니, 그대들은 다시 번거롭게 아뢰지 말고 즉시 물러가라."
하였다.

 

5월 10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원임 의정(原任議政)과 대신(大臣)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정범조(鄭範朝),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이다.】 예릉(睿陵)의 석물(石物)을 수개(修改)한 후에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방금 산릉도감(山陵都監)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이번에 많은 공사는 형편이 전에 비해 현저히 다른 점이 있어서 물력(物力)이 배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획급(劃給)한 수량은 이미 다 써 버리고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궁색하기가 더없이 심합니다. 현재 사세로는 기한 내에 공사가 완공될 수 없을 듯하니 몹시 두렵고 답답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왕 미지급분과 앞으로 소용될 것을 다시 마련하여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2만 원(元) 한도 내에서 탁지부(度支部)로 하여금 예산 외에 지출하여 획급하여 보내 주게 하되, 재물을 낭비하거나 절약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고 들이는 것을 잘 계산하는 데 달려 있으니, 각별히 신칙을 내서 되도록 절약하도록 할 것이며 혹 털끝만치라도 낭비하지 말라는 뜻으로 도감(都監)에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 11일 양력

비서승(祕書丞) 조민희(趙民熙)에게 장생전(長生殿)에 달려가서 외재궁(外梓宮)을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5월 12일 양력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김가진(金嘉鎭)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15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군제(軍制)가 아직 크게 갖추어지지 못하여 복장을 지금까지 정하지 못하였으니 군심(軍心)을 한결같이 하고 군용(軍容)을 장중하게 하는 데에 지장이 있다.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특별히 규칙(規則) 1부(部)를 내려보내니 이것으로 제도를 정하고 이어 육군 복장 규칙(陸軍服裝規則)을 반포하라."
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이 아뢰기를,
"대체로 봉심(奉審)할 때 이전에는 규장각(奎章閣)의 시임 검교(時任檢校)나 원임 검교(原任檢校) 중에서 명을 받들고 나아갔는데, 지금은 관제(官制)가 이미 개정(改正)되었으므로 시임이 거행하는 데에 매번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궁내부(宮內府)의 실직(實職)이 있는 사람 가운데서 일찍이 규장각을 거친 자가 있으면 검교의 규례대로 일체 거행하게 하고, 또 아직 수정하지 못한 《일성록(日省錄)》도 빨리 끝내지 않아서는 안 되니 또한 감동(監董)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일찍이 규장각의 관리를 지낸 사람은 일체 《규장각지(奎章閣志)》대로 하되, 모든 응당 행해야 할 공적인 일은 원임으로써 현재 실직을 맡고 있는 사람이 일체 참석하라. 또 《일성록》도 속히 완성하지 않을 수 없으니, 또한 돌아가면서 사진(仕進)하게 하되 기한을 정해 놓고 감동하고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칙령(勅令) 제21호, 〈전라남도 구역 내 전 좌수영을 여수군에 신설하는 일〔全羅南道區域內前左水營新設麗水郡事〕〉을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5월 16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기신제(忌辰祭)에 슬픔을 표시하는 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그 내용이 없다. 일찍이 인조묘(仁祖廟)부터 이미 거행하였으나 그 예식에 대해서 드러난 것이 없고, 숙묘(肅廟) 때에는 예조(禮曹)의 관리와 대신(大臣)의 의논에 차이가 있었다. 종신(終身)의 상(喪)이라는 것은 부모의 기일(忌日)을 이른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통곡하면서 제사지낸 예(禮)가 있는데, 예가 인정(人情)에서 나오면 또한 예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 예는 상하에 다 통하는 것이니 수릉(綏陵)의 기신제에는 마땅히 망곡례(望哭禮)를 행해야 할 것이다. 처소는 편전(便殿) 계단 위로 하되 시위(侍衛)가 입직(入直)하고 모든 의절(儀節)을 마련하는 것은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고 그대로 제도로 정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수릉의 기신제는 비록 몸소 행하지 못하더라도 처음으로 망곡례를 지내어 인정과 예의를 펴려고 한다. 친히 제사지내는 규례대로 마련하되, 제문(祭文)은 친히 지을 것이고 향축(香祝)도 친히 전하겠다. 헌관(獻官)은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으로 채워 차임(差任)하고 여러 집사(執事) 또한 가려 차임하라."
하였다.

 

의관(議官) 임상준(任商準)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東邦)은 기자(箕子) 이후부터 예악 문물(禮樂文物)과 전장 법도(典章法度)가 찬연히 모두 갖추어졌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삼한(三韓)을 통합하고 뛰어난 자손들이 연이어 계승하여 마침내 우리 성상(聖上)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두터운 덕과 거대한 공적은 옛 임금들과 대비해 볼 때 어찌 서로 높고 낮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 번 경사스러운 날에 대신(大臣)들이 정청(庭請)하여 존호(尊號)를 올려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이라고 일컬었으니, 이것은 모두 성상의 공덕(功德)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공덕이 있는데도 제(帝)의 칭호를 올리지 않는 것은 진실로 겸손하고 겨를이 없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천하의 우방들이 모두 우리 성상의 공덕에 탄복하여 사절과 폐백이 서로 이어지고 있으며 배로 육지로 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하의 우방들이 우리 성상을 존경하는 것이며 자주 독립을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탕(蕩)의 70리(里) 되는 나라와 문왕(文王)의 100리 되는 나라를 오늘에 와서 다시 보게 되니, 모든 우리 대소(大小) 신료들과 백성들치고 누군들 기뻐서 춤추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곧 하늘의 마음입니다. 하늘이 도와주고 사람들이 돌아오니 제왕이 되실 차례가 성상께 있음을 밝히려고 하지 않아도 절로 명백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하늘의 의사에 응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순종하여 즉시 황제의 자리에 나감으로써 하늘과 사람들의 마음에 부응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았을 터인데 이런 청을 하니 또한 매우 옳지 못하다."
하였다.

 

5월 17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수릉(綏陵)의 기신제(忌辰祭)에 드릴 제문에 친압(親押)하였다. 이어 대유재(大猷齋)에 나아가 향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수릉(綏陵)의 기신제(忌辰祭)를 지낸 후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은 그대로 능상(陵上)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8일 양력

편전(便殿)의 섬돌 위에 나아가 수릉(綏陵)의 기신제(忌辰祭)에 망곡(望哭)을 행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을 소견(召見)하였다. 수릉(綏陵)의 기신제(忌辰祭)를 지낸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5월 20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인산(因山) 시 각각의 길일(吉日)을 다시 회의(會議)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가 아뢰기를,
"방금 휘릉 영(徽陵令) 이재호(李在浩)가 보고한 것을 받아 보니, ‘오늘 꼭두새벽에 본릉(本陵)의 정자각(丁字閣)에 화재가 일어나 전부 불타 버렸는데, 변고가 순식간에 일어났으므로 서까래 하나도 남은 것이 없으니 매우 아주 놀랍고 황송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더없이 중요한 곳에 이러한 천만 뜻밖의 변고가 일어났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위안제(慰安祭)는 날을 잡지 말고 음력 4월 21일에 설행하되, 전례(前例)대로 정부(政府) 이하가 나가서 봉심(奉審)한 후에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일 입번(入番)한 수복(守僕) 등은 본군(本郡)으로 하여금 엄히 가두어 구핵(究覈)하게 하고, 해당 입직(入直) 관원은 평상시에 신중히 살피지 못한 죄를 법부(法部)로 하여금 엄하게 감처(勘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더없이 중요하고 더없이 조심해야 할 곳에서 이런 뜻밖의 변고가 일어난 것은 매우 놀랍고 두려운 일이다. 당일 입직한 재관(齋官)은 법부로 하여금 조율(照律)하여 징계 처분하게 하고, 수복과 능군(陵軍)은 경무청(警務廳)으로 하여금 화재가 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 엄히 사핵(査覈)하게 하라."
하였다. 이어 조령을 내리기를,
"휘릉의 정자각이 불에 탄 변고는 몹시 놀랍고 두려운 일이다. 정 특진관(鄭特進官 : 정범조(鄭範朝)), 내부 대신(內部大臣), 장례원 경(掌禮院卿), 영선사 장(營繕司長)이 나아가서 봉심하고 오라. 비서 승(祕書丞) 조민희(趙民熙)도 함께 달려가서 봉심하되, 그 간의 상황에 대해서 먼저 재관 및 수복과 능군에게 엄히 신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기 때문이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를 소견(召見)하였다. 휘릉(徽陵) 정자각(丁字閣)의 실화(失火)로 위로하고 주대(奏對)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경복궁(景福宮)의 만화당(萬和堂)을 경운궁(慶運宮)에 이건(移建)하도록 중건소(重建所)에 분부하라."
하였다.

 

5월 21일 양력

봉심(奉審)한 대신(大臣)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정범조(鄭範朝),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이다.】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신들이 명을 받들고 휘릉(徽陵)에 달려가서 정자각(丁字閣)의 불이 난 곳을 봉심해 보니, 순식간에 각 전체가 불타 버렸는데 화염이 매우 강하여 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재목은 모두 재가 되고 기와는 모두 깨졌으며, 신어상(神御床)도 미처 꺼내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매우 황송합니다. 능상(陵上)을 봉심하니 안녕하였고 비각(碑閣)을 봉심하니 탈이 없었으며, 사초(莎草)는 이와 같은 화염 속에서도 손상됨이 없었으니 진실로 천만 다행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이 화재는 그 원인을 모르지만 또 어찌 아무런 까닭 없이 화재가 일어날 리가 있겠는가? 혹은 재관(齋官)을 미워해서 쫓아내려는 계책일 수도 있고, 혹은 제기(祭器)를 도적질하고 흔적을 덮으려는 계책일 수도 있으니, 이런 부분에 대해서 더 엄히 조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비서 승(祕書丞)이 먼저 사문(査問)하였으나 한 능 안에서 불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고 어느 때 일어났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근거를 잡고서 따져 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찌 끝까지 엄하게 따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자각을 중건(重建)하는 것은 한시가 급합니다. 삼가 영조(英祖) 병자년(1756)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창릉(昌陵)의 정자각이 불에 탄 변고가 있었는데 중건청(重建廳)을 설치하고 중건 당상(重建堂上)을 차하(差下)하여 공사를 감동(監董)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는 제릉(齊陵)의 정자각을 수개(修改)할 때의 규례에 의거해서 하였으니, 이는 오늘날에도 원용할 만합니다. 또 갑신년(1764)에 건원릉(健元陵)의 정자각을 수개할 때 초기에 중수청(重修廳)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내려 보냈다가 ‘청(廳)’이라는 글자가 온당치 못한 점이 있어 중수 도감(重修都監)이라고 개칭(改稱)하였습니다. 도제조(都提調)는 당시의 영상(領相)이었고 세 제조(提調)는 호조(戶曹)·예조(禮曹)·공조(工曹)의 수당상(首堂上)이었으며, 도청(都廳)과 낭청(郎廳)을 모두 차출(差出)하였습니다. 공사를 시작하는 날에 동가(動駕)하여 친히 감동한 사실이 본릉(本陵)의 사적(事蹟)에 실려 있습니다. 특별히 건원릉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개칭하라고 하교하셨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는 ‘청’과 ‘도감’을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니,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청을 설치하는 것은 계속 행해 온 규례가 있지만 도감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듯합니다.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전례(前例)를 자세히 상고하여서 즉시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이미 봉심(奉審)한 대신(大臣)이 아뢴 것이 있다. 휘릉(徽陵)의 정자각(丁字閣)을 중건(重建)할 때 청(廳)을 설치하고 거행하였으니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은 궁내부(宮內府)에서 차출(差出)하도록 하라. 공사를 시작하는 날짜는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택일(擇日)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이우면(李愚冕)과 조정희(趙定熙)를 휘릉의 정자각 중건청의 당상으로 삼았다.

 

5월 25일 양력

경상남도 관찰사(慶尙南道觀察使) 이항의(李恒儀)를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권응선(權膺善)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고령 군수(高靈郡守) 조시영(曺始永)을 경상남도 관찰사에, 왕태자궁 시강원 첨사(王太子宮侍講院詹事) 이은용(李垠鎔)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 송도순(宋道淳)을 왕태자궁 시강원 첨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26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언로(言路)를 열어놓는 것이 비록 나라의 급선무에 관계되지만 근래에 말썽거리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왕왕 중앙과 지방 사람들을 선동하고 군중을 유혹시켜 재물을 모으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을 말하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실로 폐단을 커지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특별히 금지시키지 않아서는 안 되니, 우선 비서원(祕書院)에서 잘 타일러 물리쳐 보내도록 하고, 그래도 또 듣지 않을 경우에는 내부 경무청(內部警務廳)에서 모두 금단(禁斷)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유학(幼學) 채광묵(蔡光默)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저 김홍집(金弘集)과 어윤중(魚允中)의 죄에 대하여 추가로 법조문을 적용하는 것에 대한 것과 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조희연(趙羲淵)·이두황(李斗璜)·미우라〔三浦〕 등을 잡아오는 것에 대한 것과 김윤식(金允植)·이승오(李承五) 및 종묘 사직(宗廟社稷)·전궁(殿宮)에 왕후(王后)의 폐위를 고유(告由)한 제관(祭官)들과 10월의 무옥(誣獄)을 맡은 형관(刑官)에 대한 죄를 바로잡는 등의 문제는 이미 앞서 올린 상소에 열거하였습니다.
오늘날 조정에서 세우는 계책은 불과 한 마디의 말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적이 외부에 있으면 조회(照會)를 하고 담판을 해야 하며, 적이 내부에 있으면 한 명의 형리(刑吏)라도 처리하기에 충분합니다. 역적들의 처자식과 족속들이 태연하게 살고 있으니 외적(外賊)과 호응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마땅히 법대로 판결한 다음 그 집을 적몰(籍沒)하여, 안을 엿보고 외부와 통하는 길을 끊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나라에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화가 어느 정도 늦추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책임은 법부(法部)와 외부(外部)에서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외부 대신(外部大臣) 이완용(李完用)은 이미 교섭할 책임을 진 지 한 해가 지났는데 어찌하여 일본에 조회하여 도망간 역적들을 잡아오지 않고 앉아서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을 뻔히 보면서도 화가 저 아득한 속에 있음을 돌아다보지 않는단 말입니까?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은 법부의 관원이 된 것이 지금까지 세 번인데도 이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나라 안의 역적들이 태연하게 살고 있으니 더없이 중요한 나라의 법을 적용하여 땅을 쓴 듯이 없애야 하는데, 오늘날 복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두 사람이 덮어 주고 있는 탓입니다. 이것은 폐하(陛下)의 신하가 된 도리가 아니며 또한 어찌 선왕(先王)의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원수에 대해서 참아 주고 나라를 잊어버린 죄는 또한 보통 정도로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정부(政府)에 명을 내려 여러 역적들을 잡아다가 해당 형률을 시행하소서. 그런 후에야 윤리가 밝아질 수 있고 기강이 설 수 있으며, 천하 후세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로 하여금 또한 두려움을 알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관(各館)의 대사(大使)들에게 조회를 하고 담판을 벌여 맹약을 정한 후에야 나라의 원수를 갚을 수 있고 나라가 스스로 강대해지는 권한도 전관할 수 있으며 우뚝이 백 대의 중흥한 군주가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이 어찌 그대들의 말을 기다릴 문제인가? 스스로 마음속으로 헤아린 것이 있다. 여러 차례 신칙하였는데도 어찌 이와 같이 번거롭게 아뢰는가? 즉시 물러가라."
하였다.

 

유학(幼學) 강무형(姜懋馨)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금 서양의 각국(各國)에서는 황제(皇帝)나 대군주(大君主)나 대백리(大伯理)라고는 호칭으로 부르는데, 그 사이에는 등급이 없다고 하지만 아세아(亞細亞)의 동양의 판도 내에서는 역대 제왕(帝王)에 대한 구별에 높고 낮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옛날에 제왕(諸王)의 아들은 작위(爵位)를 군(君)으로 봉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적자(適子)에 대하여 작위를 대군(大君)이라고 봉하였으니, 대군의 칭호는 왕과 비교해 볼 때 한 등급 낮은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主) 한 글자를 첨가한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비교하지 못할 지위에다 비교하겠습니까? 또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황제의 칭호에서 ‘주’로 일컫는 경우는 모두 그 속에 폄하하는 뜻이 있는데 더욱이 어찌 감히 신하가 군부(君父)에게 칭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강토가 넓지 못하지만 복희씨(伏羲氏)와 황제 헌원씨(皇帝軒轅氏) 이후로 5,000여 년간 정통(正統)으로 서로 전해왔기 때문에 예악문물(禮樂文物)이 진실로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신들이 지극히 어리석고 보잘 것 없지만 감히 아첨하는 말로 군부 앞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호위하는 정성은 맹세코 다른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여러 나라 사람들은 자기 임금의 칭호를 높이고 있는데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만 임금을 높이는 도리를 다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또 지금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장례가 가까워지니, 더할 나위 없는 슬픔이 온 나라에 차고 넘칩니다. 이처럼 큰 예가 아직 끝나지 못한 때에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는 것은 또한 신민(臣民)들이 늘 원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특별히 만민의 바람에 부응하여 속히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어 나라의 운명을 틀어잡고 뭇 백성들의 뜻을 진정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차례 신칙하였는데도 이처럼 번거롭게 청하는 것은 또한 도리가 아니니, 즉시 물러가라."
하였다.

 

5월 27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조종필(趙鍾弼)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봉상사 제조 이우면(李愚冕)과 조정희(趙定熙)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5월 28일 양력

외부 대신(外部大臣) 이완용(李完用)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병으로 집에서 앓고 있는 중에 방금 유학(幼學) 채광묵(蔡光默)의 글을 보았습니다. 본래 징계하고 성토하는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신을 책망하면서 어째서 조회(照會)를 하지 않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위태로움을 좌시하느냐고 하였으며 신이 비호하여 준 탓으로 원수를 인정하고 나라를 잊은 죄를 졌다고 논하였으니 신은 이 때문에 아주 두려우며 지극히 억울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대체로 적을 치고 원수를 갚는 데는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 설사 어린아이라도 피거품을 물고 이를 갈며 모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더구나 신이 두터운 은혜를 크게 입어 우리 폐하(陛下)를 부모처럼 섬긴 지가 지금까지 근 수십 년이 되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이 작년 5월에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공사(公使) 이하영(李夏榮)에게 단단히 일러주어 그로 하여금 일본 외무 대신(外務大臣)에게 조회(照會)를 하고 여러 차례 담판을 하도록 하였는데 그 담화 초고에 대한 보고가 본부(本部)에 온 것은 바로 의정부(議政府)에서도 함께 보고들은 것입니다. 오늘 채광묵이 말하는 조회나, 담판은 이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채광묵의 글이 충성과 의분에서 나온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폐하에게 올리는 문건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하는데 조회의 여부는 알지도 못하고 비호하였다는 정확한 근거도 없이 허무하게 헤아릴 수 없는 처지로 모함하여 대뜸 임금에게 보고하였으니 무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가 무고한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반좌율(反坐律)이 있겠지만 신은 통분하고 억울함을 억제할 수 없어 이렇게 짧은 글로써 숭엄한 성상께 번거롭게 아룁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굽어 살피시고 빨리 처분을 내려 채광묵이 무고한 죄를 다스림으로써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게 하고 신이 무고당한 것을 밝혀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 차마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경은 이미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하였으니 경의 마음에 대해서는 짐이 실로 다 알고 있으니 사람들의 말에 대하여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경은 사임하지 말라."
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사임하는 글을 여러 번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엄한 명령을 받고 할 수 없어 태연하게 일을 본 지가 지금 10여 일 되는데 근심과 두려움으로 더욱더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채광묵(蔡光默)의 상소가 올라오자 신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역적을 죽이고 나라의 원수를 갚는 것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상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혈기를 타고난 사람치고 누군들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법을 담당한 신하가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여론이 극렬해지고 성토가 지극히 엄하니 신이 어떻게 감히 그것에 대해서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유생(儒生)의 상소 가운데서 국내외에서 다스려야 할 적을 비호해서 다스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격식과 권한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혹시 여러 유생들이 알면서도 신을 규탄하는 것입니까? 죄에 걸린 것이 이에 이른 만큼 어찌 위축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벼슬에 있으면서 신망이 있었더라면 이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반드시 없었을 것입니다. 신이 임금을 섬기는 데에 충성을 다했더라면 이런 말이 있었겠습니까? 반드시 없었을 것입니다.
신이 반성하고 자책해야 할 일이 아님이 없으니 지극히 두려워서 간단한 글로 자책합니다.
바라건대 전하는 신에게 빨리 해당되는 법조문을 적용함으로써 사람들의 말에 사죄하며 조정의 기강을 엄숙히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 차마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떳떳한 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밝게 처리하려는 뜻이 없겠는가마는 이렇게 늦어지게 된 것은 형세가 그러해서이다. 실없는 말에 대해서 많은 말로 해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경은 사임하지 말라."
하였다.

 

5월 29일 양력

중건청(重建廳)의 당상(堂上)인 조정희(趙定熙)와 이우면(李愚冕)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휘릉(徽陵) 정자각(丁字閣)의 화재 난 곳을 봉심하고 왔는가?"
하니, 조정희가 아뢰기를,
"신 등이 급히 가서 봉심하니 정자각의 전체가 불에 타 버려 서까래 하나도 구해내지 못하였으니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석재는 혹 그대로 쓸 만한 것이 있던가?"
하니, 조정희가 아뢰기를,
"양켠과 뒷면은 다 검게 그을렸는데 앞면의 장대석(長臺石)은 갈아서 광을 내면 그대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자각의 지게문 밖에 배치된 상탁(床卓) 역시 완전히 불에 탔는가?"
하니, 조정희가 아뢰기를,
"역시 불에 완전히 타 버렸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자각을 중건하는 일은 한시가 급하니 빠른 시일 내에 공사를 끝내도록 재촉해야 하는데 목재와 석재를 혹 구할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니, 조정희가 아뢰기를,
"중건하는 공사는 과연 시급합니다. 석재는 가까운 곳에서 구할 길이 있으나 목재는 현재 가져다가 쓸 곳이 없으니 이 때문에 두렵고 답답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중건하는 일은 일체 구제(舊制)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조정희가 아뢰기를,
"전하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들어가는 재물(財物)은 얼마쯤 되겠는가?"
하니, 조정희가 아뢰기를,
"공사가 방대하기 때문에 재물은 아직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체로 보아 아주 시급한 일이니 우선 드는 물자가 얼마쯤인지 보고하고 궁내부(宮內府)로 하여금 탁지부(度支部)에 조회하여 예산 외의 지출을 하도록 하라. 그리고 쓰는 대로 차차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민영주(閔泳柱)를 학부 협판(學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31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음력 6일 수릉(綏陵)의 기신제(忌辰祭)를 행할 것이며 망곡(望哭)하는 예는 친제(親祭)의 규례대로 마련하라. 제문은 직접 짓고, 향(香)과 축문(祝文)은 직접 전할 것이다. 헌관(獻官)은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으로 채워 차임하고 모든 집사(執事)도 가려 차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2품(正二品) 안경수(安駉壽), 종2품(從二品) 이규증(李圭曾)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안경수는 칙임관(勅任官) 2등에, 이규증은 4등에 서임하였다.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가 보고하기를,
"산릉(山陵)과 관련한 각 항목의 길일(吉日)은 신들이 빈청(賓廳)에 다 같이 모여서 일관(日官)을 불러다 그들로 하여금 다시 잘 날을 택해서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이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별단(別單)
"홍릉(洪陵)은 왼쪽으로 감돌아 건해(乾亥)방향으로 산줄기가 뻗었으며 축간(丑艮)방향에서 뒤집어졌다가 자계(子癸)방향으로 구불구불 뻗어나갔고 건해방향에서 산봉우리를 이루었다가 인(寅)방위로 머리를 들이밀었는데 향좌는 간방향에서 곤(坤)방향을 향하였습니다.
공사 시작은 정월 25일 묘시(卯時)에 풀을 베고 흙을 파며 3월 4일 미시(未時)에 먼저 남쪽 방향으로부터 시작하며 후토(后土) 제사를 지내고 같은 날 먼저 옹가(甕家)를 짓습니다.
같은 달 11일 묘시에 금정틀〔金井〕을 놓고 7월 28일 미시(未時)에 구덩이를 파되 그 깊이는 4척(尺) 5촌(寸)으로 하며, 외재궁(外梓宮)을 모시고 나가는 것은 같은 달 30일 진시(辰時)에 하고, 외재궁을 내려놓는 것은 같은 날 미시(未時)에 하며, 찬궁(欑宮)을 여는 것은 8월 초하룻날 신시(申時)에 먼저 동쪽 방향으로부터 합니다.
발인(發引)은 같은 달 6일 축시(丑時)에 하며 성빈하는 것은 적당한 때에 하며, 능에서 찬궁을 여는 것은 같은 날 미시에 먼저 동쪽 방향으로부터 열며, 내가는 것은 찬궁을 연 후 적당한 때에 하며, 현궁(玄宮)을 내려놓는 것은 같은 달 7일 진시에 합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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