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갑오
대사간(大司諫) 이인환(李寅煥)이 아뢰기를,
"병조 좌랑(兵曹佐郞) 홍수주(洪受疇)는 일찍이 지난날에 권문(權門)에 출입한 바 있어 사람들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아온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갑자기 깨끗한 벼슬길에 오르니, 물의(物議)가 시끄럽습니다. 서로 규간(規諫)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인데, 동료(同僚)의 논의가 귀일되지 아니하니, 청컨대 신의 직임을 갈아주소서."
하고, 정언(正言) 최석항(崔錫恒)도 인피(引避)하기를,
"장료(長僚)가 홍수주(洪受疇)를 갑자기 깨끗한 벼슬에 주의(注擬)407) 한 것으로써 전관(銓官)408) 을 추고(推考)하도록 청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이를 상확(商確)할 즈음에 억지로 같이 할 수 없었으니, 청컨대 갈아 주소서."
하였는데, 사간(司諫) 김두명(金斗明)이 이인환(李寅煥)을 체직하고, 최석항(崔錫恒)을 출사(出仕)하도록 할 것을 청하자, 이를 윤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홍수주(洪受疇)가 지난날 오시수(吳始壽)와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이 되어 자못 서로 친밀하였고, 또 과장(科場)에서 그 아들이 지은 글을 고친 바 있었다. 이에 비방하는 논의가 크게 일어나고 아첨하여 붙좇는다고 일컬어져 홍수주의 문벌(門閥)로써도 늦게야 비로서 통청(通淸)한 것은 대개 이 까닭이었다. 이인환(李寅煥)이 논하려는 것은 진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데, 김두명(金斗明)이 드러나게 도와서 억제(抑制)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註 407] 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 사람[三望]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註 408] 전관(銓官) : 관원의 전형(銓衡)을 맡은 이조와 병조의 관원.
사신(史臣)은 말한다. "홍수주(洪受疇)가 지난날 오시수(吳始壽)와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이 되어 자못 서로 친밀하였고, 또 과장(科場)에서 그 아들이 지은 글을 고친 바 있었다. 이에 비방하는 논의가 크게 일어나고 아첨하여 붙좇는다고 일컬어져 홍수주의 문벌(門閥)로써도 늦게야 비로서 통청(通淸)한 것은 대개 이 까닭이었다. 이인환(李寅煥)이 논하려는 것은 진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데, 김두명(金斗明)이 드러나게 도와서 억제(抑制)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가물던 나머지 장마가 지니, 영제(禜祭)409) 를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8월 2일 을미
유성(流星)이 우성(牛星) 위에서 나오고, 또 천창성(天倉星) 밑에서 나왔다.
심유(沈攸)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엄집(嚴緝)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여(李畬)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전(前) 지평(持平) 정제선(鄭濟先)이 작년 연경(燕京)에 갈 때에 관서(關西)410) 에 이르러서 반노(叛奴)를 추핵(推劾)하기 위하여 가는 곳마다 술에 취하여 혹독한 장형(杖刑)을 베풀다가, 제멋대로 운명(隕命)하게 한 자가 5명에 이르렀습니다. 사사로움으로 인하여 법을 무시하였으니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잡아다가 추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右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예로부터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에 비록 기도(祈禱)하는 일이 있었으나, 인사(人事)에 구하여 보아도 재앙을 이룰 만한 것이 없은 연후에 신도(神道)에 책(責)할 수 있으니, 만약 인사에 오히려 의논할 만한 것이 있으면서 오로지 생벽(牲璧)411) 만으로 천심(天心)을 감동해 돌이키려고 하는 것은 옳은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齊)나라에서 한재(旱災)를 만나 영산(靈山)에 제사하려고 하자, 안자(晏子)412) 가 유익함이 없다고 하였고, 송(宋)나라에 수재(水災)가 있었는데, 임금이 자신을 허물하고 백성을 구휼하자, 장문중(臧文仲)이 장차 흥성(興盛)할 것413) 을 알았으니, 수재와 한재는 오직 마땅히 덕을 닦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을 것이요, 기도하는 말절(末節)은 족히 경중(輕重)이 되지 못합니다. 하물며 겨우 한재 때문에 매달 기우(祈雨)하다가, 한 번 비가 너무 많이 내리자, 곧 기청(祈晴)하면 신리(神理)는 그윽하고도 엄숙하여 아침 저녁으로 순순(諄諄)하게 서로 말하는 것과 같지 아니한 것인데, 가물면 기우(祈雨)하고 비가 오면 기청(祈晴)하여 열흘·보름 사이에 그 거조가 착란하니, 혹시 번독(煩瀆)한 데에 손상되어 경외(敬畏)하는 실상에 부족한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을 위하는 도리로서는 오로지 마땅히 아들이 부모의 노여워하심을 만난 것과 같이 하여 감히 떠들썩하게 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되며, 스스로 공경하고 효도를 극진히 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가상(嘉尙)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전유(傳諭)하는 사관(史官)이 돌아오는데 부쳐 아뢰기를,
"이제 성상께서 재해(災害)를 당하자, 두려워하셔서 멀리 근시(近侍)를 보내어 구학(溝壑)의 신하에게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아! 사세(事勢)가 이에 이르렀으나, 진실로 성상을 위하여 꾀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오직 젊어서 주자(朱子)의 글을 읽은 바 당일에 구황(救荒)할 때의 시설(施設)과 진주(陳奏)할 말씀을 대략 들었으므로, 이제 감히 공정하게 아뢰어 재가하시고 채택하는시데 대비하고자 합니다. 이른바 득실(得實)414) ·권분(勸分)415) ·주최(住催)416) ·명상벌(明賞罰)417) 하는 것은 모두 주자(朱子)가 행하고 말한 바이며, 재해를 그치게 하는 방도를 논하는 데 있어서는 말하기를, ‘오늘을 위하는 계책은 오로지 깊이 측신(側身)하여 허물을 뉘우치는 뜻으로써 하늘에 변명[解鮮]한 후에 군신(君臣)이 스스로 반성하고 고침으로써 하늘의 은애(恩愛)하시는 마음에 부응(副應)하면, 거의 정신이 감통(感通)하여 재화(災禍)가 바뀌어 복이 된다.’고 하는 데 지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주자가 지극한 정성으로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게 한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사관(史官)을 보내여 유시(諭示)하기를,
"누누이 조목으로 진계한 것이 약석(藥石)의 지당한 논의로서 오늘의 급무(急務)가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매우 감탄한다."
하였다.
8월 3일 병신
유성(流星)이 구진성(鉤陳星) 위에서 나왔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괴원(槐院)418) 의 분관(分館)419) 은 마땅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김문하(金文夏)·박만정(朴萬鼎)·이동표(李東標) 세 사람의 과실은 모두 한때의 작은 허물이 아닌데, 출신(出身)하는 시초에 반드시 청선(淸選)에 두려고 하니, 신은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남언창(南彦昌)은 공사(供辭)에서 감히 사죄인(死罪人) 윤휴(尹鑴)를 일컬어 은연중 용납해 비호하는 뜻이 있었으니, 방사(放肆)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언창(南彦昌)의 공사(供辭)는 진실로 해괴하다."
하였다. 대저 김문하(金文夏)는 바로 김시국(金蓍國)의 손자이고, 박만정(朴萬鼎)은 바로 박근원(朴謹元)의 후예로서 모두 유명한 문벌(門閥)이었다. 김문화 등은 모두 윤휴의 문생(門生)으로서 일찍이 윤휴를 위해 상소하여 소나무 벤 일을 변명하였으므로, 온 세상이 타매(唾罵)하였고, 등제(登第)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알성(謁聖)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었다. 이동표(李東標)는 영남 사람으로 그 가운데에서는 명망이 있었지만, 또 고묘소(告廟疏)에 참여하였으므로, 분관(分館)할 때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하지 아니하였으나, 마침내 파좌(罷座)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김수항의 말이 이와 같았다.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말하기를,
"시채 첨사(恃寨僉使) 김유천(金有天)은 본래 송도(松都)의 상인(商人)인데, 바로 신설하는 관방(關防)의 땅에 3품 벼슬을 제수하였으니, 사체가 마땅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남구만(南九萬)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신이 북로(北路)의 효건(驍健)한 자를 뽑아서 말을 주어 조련(調鍊)하게 할 뜻을 진달해 아뢰어 윤허를 얻었는데, 만약 조종조(祖宗朝)의 별시위(別侍衛)와 같이 작대(作隊)하여 불우(不虞)에 대비(對備)하게 하면 완급(緩急)에 반드시 한 도움이 없지 아니할 것입니다. 북도(北道) 무사(武士)의 무리로서 이에 소속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는데, 이제 듣건대 청인(淸人)이 우리 북로를 닦고 다스리는 것을 의심한다고 하나, 이 일은 본래 성지(城池)를 파고 쌓는 것과는 다르므로, 저들이 비록 듣는다 하더라도 답변하기가 어렵지 아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품계(稟啓)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박신규(朴信圭)가 말하기를,
"과거(科擧)에서 녹명(錄名)할 때에는 거자(擧子)가 단자(單子)를 갖추어 주장관(主掌官)에게 친히 올리는 것이 상례인데, 근래에는 선비의 풍습이 점점 잘못되어 성명(姓名)을 작은 종이에 벌여 적고, 허다한 사관(四館)에서 번갈아 서로 현록(懸錄)하기 때문에, 조회(照會)를 마치지 않은 자와 응당 부거(赴擧)하지 못할 자가 모두 기록할 수 있게 되니, 수종(隨從)이 함부로 들어가는 것이 진실로 이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 뒤로는 방(榜)을 낸 뒤에 녹명 단자(錄名單子)를 법사(法司)에 보내어 방목(榜目)과 참고하되, 만일 단자가 없이 속여서 합격한 자는 모두 모아 버리게 하면 이 폐단을 개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남구만이 말하기를,
"녹명(錄名)뿐만 아니라 시지(試紙)같은 것도 좋은 물품을 쓰는 것을 금하였는데도 마침내 시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도리어 당초에 금하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자, 승지(承旨)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지품(紙品)이 규제(規制)에 지나친 것은 시관(試官)이 뽑아 버리고, 1등으로서 마땅히 어람(御覽)하실 것이라도 즉시 방(榜)에서 뽑아 버리도록 명하며, 인하여 시소(試所)의 〈관원을〉 문책하면 이 폐단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신칙하도록 명하였다. 남구만이 말하기를,
"사대(事大)·교린(交隣)의 문서를 승정원(承政院)에 간직해 두었는데, 병자년420) 이전에는 고(故) 판서(判書) 이식(李植)이 《속고사촬요(續攷事撮要)》를 초록(抄錄)하였으나, 그 뒤에는 흩어져 없어지고 거두지 아니하니, 마땅히 제조(提調) 한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구관(句管)하여 한 질(帙)을 편성(編成)하게 해서 장고(掌故)의 자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자, 김수항이 부제조(副提調) 최석정(崔錫鼎)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여 편집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가을철이 이미 이르니 상로지감(霜露之感)421) 이 더욱 간절하다. 마땅히 능(陵)에 참배(參拜)하는 예(禮)가 있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이달 20일 이후에 길일(吉日)을 가리도록 하라. 신축년422) 에 능행(陵幸)할 때에는 흉년(凶年)이 들었기 때문에, 길을 닦지 말도록 하였으니, 지금도 모든 일에 힘써 폐단을 덜도록 할 것이며, 도성(都城)에 머무는 연하(輦下)의 군병으로도 족히 추이(推移)할 수 있을 것이니, 기내(畿內)의 군사를 징집하지 않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전알(展謁)의 절목(節目)은 마땅히 때에 임하여 정탈(定奪)하겠지만, 옛 정자각(丁字閣)에서 제사를 행할 때의 복색(服色)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품정(稟定)하게 하라."
하자, 박신규가 말하기를,
"능관(陵官)이 오로지 명예를 구하는 것만을 일삼아 어지럽게 비(碑)를 세우고 있어서 듣기에 해괴하니, 일체 금단해야 하며, 비록 이미 세운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갑진년423) 수교(受敎)한 뒤에도 외방(外方)에서는 비를 세우는 폐단이 오히려 그치지 않고 있으니, 또한 마땅히 엄금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금하는 일이 시행되지 아니하니 더욱 해괴하다. 계묘년424) 이후에 세운 것은 제도(諸道)에 각별히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뒤에 임금이 능(陵)을 알현하고 돌아오다가, 능관(陵官)의 선정비(善政碑)가 아직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금단(禁斷)하게 하였다.
8월 4일 정유
충청도 은진현(恩津縣) 촌가(村家)에서 암탉을 길렀는데, 머리에 한 뿔이 나서 길이가 한 1촌(寸)쯤 되고, 둘레가 3푼(分)쯤 되었으며, 그 빛이 검고 단단하여 수탉의 발톱과 같았다.
8월 5일 무술
부호군(副護軍) 박세채(朴世采)가 응지(應旨)하여 상소하기를,
"인군(人君)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삼아 그 사이에 중립해 있으면서 받드는 바 천명(天命)이요, 있는 바 천위(天位)로서,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니, 그 책임이 매우 큽니다. 이에 하늘과 땅은 만물을 생장케 함을 마음으로 삼는 것인데, 오직 인군은 이를 법 받아서 또한 반드시 만백성을 사랑하고 기르는 것을 그 마음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미루어 보건대 하늘은 인군에 대하여 능히 그 뜻을 좇으면 기뻐하여 백 가지 상서로움을 내려 상서로운 바람과 온화한 기운이 모두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겠지만, 그 뜻을 순응하지 아니하면 노여워하여 백 가지 재앙을 내려서 요사한 별[妖星]과 흉한 기운과 같은 등류(等類)로 각각 응할 것이니, 진실로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의뢰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러므로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기르는 것은 알기 어려운 하늘의 뜻에서 구할 것이 아니고, 반드시 발견하기 쉬운 민심에서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군이 된 이는 능히 스스로 다스릴 수가 없으므로, 반드시 모두 관리에게 명하여 이를 대신하게 하나, 진실로 반드시 잘하지 못하는 자도 있는데, 더욱이 백성이란 지극히 미약하면서도 귀하고,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하니, 대저 하소연할 곳이 없는 백성을 잘하지 못하는 관리에게 위임하면, 환고(患苦)에 걸리지 아니하는 일이 적습니다. 무릇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는 정치와 탐독(貪黷)한 조목이 많아서 세기가 어려운데, 그 미치는 화환(禍患)이 불쌍한 적자(赤子)로 하여금 뒹굴며 울부짖게 하여, 마치 궁진한 짐승과 썩어 문드러진 물고기 같이 죄없이 죽는 땅에 나아가게 하기에 이르니, 이것이 또 백성이 곤고(困苦)해지는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이에 대하여 척연(惕然)히 돌이켜보시고 하늘의 뜻이 매인 바가 백성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는 것을 밝게 보셔서 〈상서와 재앙의〉 등류를 추구(推究)하여 근원을 바르게 하시고, 인하여 곧 크게 경동(警動)하고 크게 진작(振作)하는 일을 거행하시고, 거의 정사를 펴고 인(仁)을 베푸는 근본과 하늘에 빌어 나라의 운명을 길게 뻗쳐가도록 도모하지 아니하시면, 비록 재해(災害)를 그치게 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계책을 행하고자 하더라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려 가장(嘉奬)하였다.
고(故) 부사(府使) 전상의(全尙毅)에게 특별히 정려(旌閭)425) 하고 인하여 김준(金浚)의 사묘(祠廟)에 배식(配食)하도록 명하였다. 전상의는 정묘년426) 난리에 귀성(龜城)을 지키다가, 평안 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안주 목사(安州牧使) 김준(金浚)과 같이 죽었는데, 조가(朝家)에서 아울러 포증(褒贈)을 베풀었으나, 전상의는 자손이 쇠잔하여 정려(旌閭)하는 은전(恩典)을 미처 청하지 못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전라 관찰사(全羅觀察使) 이사명(李師命)이 그 후손의 호소(呼訴)로 인하여 조정에 장청(狀請)하니, 해조(該曹)에서는 ‘해가 오래 되어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특별히 명하여 이사명의 말과 같이 하게 하였다.
8월 6일 기해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 밑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심경(心經)》 우산장(牛山章)을 강(講)하다가 영사(領事) 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불가(佛家)와 우리 유가(儒家)에서 조심(操心)하는 것은 같으나, 불가(佛家)에서는 좌선(坐禪)427) 하고 입정(入定)428) 하는 것이 고목 사회(枯木死灰)429) 와 같은 바 있고, 유가(儒家)에서는 마음이 바로 활물(活物)이어서 반드시 존양(存養)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사람이 낮에 한 바를 청조(淸朝)에서 체험하면 그 그릇됨을 많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신이 효묘조(孝廟朝) 때 부제학(副提學)으로 있으면서 마침 이 장(章)을 강(講)하였는데, 봉조하(奉朝賀)430) 송시열(宋時烈)도 입시(入侍)하여 반복해서 논란(論難)하자, 효묘께서 하교하시기를, ‘평소 지나친 일로 밤새도록 생각하면 비로소 그 잘못을 깨달을수 있었으니, 이로써 공부하면 점점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성교(聖敎)가 어제와 같습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도 이를 체인(體認)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은 하루의 만기(萬機)에 조존(操存)하기가 더욱 어려우니, 이 장(章)을 힘쓰는 것이 가장 마땅하다."
하였다. 김수항이 말하기를,
"전부터 국휼(國恤) 3년안에는 과장(科場)에서 사자(士子)의 무리가 의례 백의(白依)와 백건(白巾)을 착용하였는데, 근래에 성균관[泮庠]에서 제술(製述)할 때에 모두 흑건(黑巾)을 쓴다고 하니, 이는 자못 온당하지 못합니다. 이제 감시(監試)가 이미 임박하였으니, 사자(士子)는 백의(白衣)·백건(白巾)으로 과장(科場)에 들어오게 하는 일을 예조(禮曹)로 하여금 미리 품정(稟定)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지평(持平) 이덕성(李德成)이 아뢰기를,
"북문(北門)의 요해처[鎖鑰]는 임무가 매우 중하나, 계급을 뛰어 올려서 임명하는 것은 더욱 그 선임을 삼가야 합니다. 새로 제수한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시경(權是經)은 본래 성망(聲望)이 없고, 또한 성적(成績)이 없는데, 갑자기 이에 발탁되었으므로 물의가 만족해 하지 않으니,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김수항에게 묻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자, 김수항이 말하기를,
"권시경은 사람됨이 본래 매우 자상하고 명확합니다. 일찍이 영남(嶺南)을 안찰(按察)하여 나라 일에 마음을 다하였으니, 이제 비록 바꾼다 하더라도 바꾼 바가 반드시 권시경보다 어질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권시경은 출입하며 근시(近侍)하여 내가 본래 그 사람됨을 알고 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덕성(李德成)이 또 말하기를
"이번 칙사(勅使)의 행차가 이르는 곳마다 부채를 요구하였는데, 규격 밖의 일이라하여 모두 응하지 아니하였으나, 순안 현령(順安縣令) 이공권(李公權)은 특별히 정묘(精妙)하게 부채를 만들어 특별히 그 요구에 응하였으니, 뒷날의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士大夫)로서 스스로 삼가는 면에서 매우 염치없는 일이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우선 추고(推考)하되, 그 함사(緘辭)를 보고 처치하도록 명하였다. 뒤에 본도(本道)에서 조사하여, 이는 바로 숙천(肅川)의 일이고 순안(順安)의 일이 아니라고 아뢰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여성제(呂聖齊)가 사면(辭免)하였다. 대정(大政)이 지난 뒤에는 양전(兩銓)431) 의 장관(長官)이 정고(呈告)하는 것이 상례이므로, 여성제가 세 번 고하니, 체직하도록 허락하여 조사석(趙師錫)을 이에 대신하고, 여성제는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8월 8일 신축
신익상(申翼相)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권두기(權斗紀)를 사간(司諫)으로, 윤세희(尹世喜)를 지평(持平)으로, 이수언(李秀彦)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삼았다.
살인(殺人)한 죄인 이두진(李斗鎭)을 사형(死刑)을 감하여 철산군(鐵山郡)에 정배(定配)하였다. 처음에 전(前) 병사(兵使) 이두진이 길을 가다가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뱃사공[律人]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아니함을 노여워하여, 잘못 곁에 있는 자를 묶어서 협박하여 배에 오르게 하였는데, 새끼가 끊어져서 물에 떨어져 죽었다. 해부(該府)에서 합당한 율(律)이 없다 하여 대신(大臣)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자, 좌의정(左議政) 민정중(閔鼎重)·우의정 남구만(南九萬) 등은 모두 말하기를,
"사정(事情)이 있거나 없거나 물론하고 상명(償命)432) 하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위력(威力)으로 사람을 시켜 〈사람을 죽인〉 자는 시킨 것으로써 수범(首犯)을 삼는 것이니, 손수 범하지 않았다 하여 말감(末減)433)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 등은 말하기를,
"물에 떨어져 목숨을 잃은 것은 이미 본정(本情)이 아닌데, 율(律)에 견주어 사형으로 단정하는 것은 죄상을 자세히 살피는 본의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사형을 용서하여 멀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자, 승정원(承政院)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오살(誤殺)이든 희살(戱殺)이든 모든 상명(償命)하는 과조(科條)에 있으니, 고살(故殺)이 아니라고 핑계하여 따라서 살릴 방도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현풍(玄風)의 죄인 곽정뢰(郭廷賚)는 술이 취한 사람을 금지하기 위해 결박하였다가 치사(致死)시켰는데, 바야흐로 ‘위력주사지율(威力主使之律)434) 을 써서 사형을 결단하였습니다. 사정(事情)이 없는 오살(誤殺)인 것은 곽정뢰와 이두진이 다름이 없는데, 한 사람은 죽이고 한 사람은 살리면, 율(律)을 쓰는 것이 고르지 못합니다. 다시 엄중히 핵실(覈實)하여 율에 의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원정(原情)을 참작해 처단하였으니, 다시 논할 필요가 없다. 곽정뢰(郭廷賚)는 사정(事情)과 법을 참작하여 다시 품계(稟啓)하라."
하였다. 이에 공의(公議)가 더욱 격화(激化)하여 양사(兩司)에서 함께 명을 환수(還收)하라는 계청을 올렸다.
8월 9일 임인
예조(禮曺)에서 아뢰기를,
"국휼(國恤)의 졸곡(卒哭) 후에는 사자(士子)가 학교에 들어갈 때에 백의(白衣)·흑두건(黑頭巾)을 한다는 것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데, 선묘(宣廟)·임신년(壬申年)435) 국휼 때에는 단지 백관(百官)의 복색만 백모(白帽)·백대(白帶)로 고치고, 사자(士子)는 거론하지 아니하였으며, 기해년436) 국휼 때에는 본조(本曹)에서 태학(太學)에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졸곡(卒哭) 뒤에 선인(選人)이 조건(皁巾)과 청대(靑帶)를 하는 것은 이미 주자(朱子)의 말에 있고, 생원(生員)·진사(進士)가 학교에 들어갈 때에 흑두건(黑頭巾)을 쓰는 것 또한 시왕(時王)의 제도이니, 이에 의거하여 행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말하건대 지금 사자(士子)가 학교에 출입하는데 흑건(黑巾)을 쓰는 것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나, 다만 과정(科場)에 출입하는 데에도 흑건을 쓰는 것이 과연 도리에 합하는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선묘조(宣廟朝)의 개정한 법에 따라 이를 논하면, 조관(朝官)과 사자가 이동(異同)이 있을 수 없을 듯하나, 만약 주자(朱子)의 ‘선인(選人)은 조건(皁巾)과 청대(靑帶)를 쓴다.’는 말을 따른다면 학궁(學宮)과 과장(科場)을 물론하고 흑건(黑巾)·흑대(黑帶)를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신의 조(曹)에서 억단(臆斷)할 바가 아니니, 청컨대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판부사(判府事) 정지화(鄭知和)·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우의정(右議政) 남구만(南九萬) 등은 말하기를,
"기해년(己亥年)의 국휼(國恤) 때에는 유현(儒賢)으로서 조정에 있는 이가 많았으니, 강정(講定)한 바가 반드시 의견(意見)이 있을 것인데, 지금에 와서 이를 변개(變改)하는 것 또한 중난(重難)합니다. 감시(監試)의 과일(科日)이 모레에 있는데, 갑자기 전의 법규(法規)를 변경하는 것은 사세가 급박하므로, 천천히 의논하여 강정(講定)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이상진(李尙眞)은 말하기를,
"선인(選人)은 이미 부제(祔祭)를 지낸 뒤에 최복(衰服)을 벗고는 조건(皁巾)과 청량삼(靑凉衫)으로 상(喪)을 마치는 것이 비록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이라 하나, 지금의 유생(儒生)은 졸곡(卒哭) 후에 최복을 벗는 절차가 없고, 항상 백립(白笠)과 백대(白帶)를 착용하고 상(喪)을 마치는데, 홀로 과장(科場)에서의 건(巾)·대(帶)만 별도로 검정색을 갖추는 것은 그것이 진실로 주자의 뜻에 합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주자가 정한 군신복의(君臣服議)도 오히려 준행(遵行)하지 않으면서 단지 그 고금(古今)이 다른 유복(儒服)만을 취하여 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례의》 가운데 조신(朝臣)의 오사모(烏紗帽)의 제도를 이미 백사모로 변경하였으니, 유생의 흑건도 마땅히 변경하여 백건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선묘조(宣廟朝)에서 이미 조사(朝士)의 사모를 변경하였는데, 이제 성상께서 또 유생의 건을 변경하시면 진실로 선왕(先王)을 따르는 같은 법이 될 것이니, 진실로 결단하여 행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사세가 군색하고 급박하니, 차라리 정시(庭試)와 회시(會試)를 기다려서 미리 알려서 흰 것으로 변경하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백관(百官)의 복색을 이미 변경하였는데, 오로지 사자(士子)만 흑건으로 학교와 과장(科場)을 출입한다는 것은 진실로 미안하다. 이 뒤로는 백의와 백건으로 일체 제도를 정하여 시행하되, 이번 감시(監試)는 단지 하루밤이 남았으므로 형세가 주선하기 어려울 것이니, 아직 근일의 법에 의하여 흑건을 쓰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정언(正言) 심평(沈枰)이 아뢰기를,
"역적 유효립(柳孝立)이 승복하고 복주(伏誅)되었으니, 출가(出嫁)한 딸이 연좌를 면할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인데, 영풍군(靈豊君) 이식(李㵓)이 적모(嫡母)를 위해 상언(上言)하여 감히 봉첩(封帖)의 환수(還收)를 청하였습니다. 당초에 봉첩만 거두고, 대군(大君)과 같이 살도록 허락한 것은 진실로 성조(聖祖)의 지극하신 우애의 덕에서 나온 것인데, 이를 감격해 떠받들 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억울함을 칭탁하여 현란한 말을 늘어 놓으니, 그의 방자하고 무엄함은 추고(推考)에 그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춘당대(春塘臺)에서 보고 이미 그 어리석고 외람됨을 알았다. 대론(臺論)은 대체를 얻었다고 이를 만하니 아륀 대로 하라."
하였다. 교리(校理) 신계화(申啓華)가 말하기를
"이두진(李斗鎭)의 죄는 법에 상명(償命)하는 것이 마땅한데, 특별히 명하여 감사(減死)하였으나, 대각(臺閣)에서도 오히려 다투어 고집하는 자가 없으니, 몹시 소루(疎漏)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 문안(文案)을 보건대, 이두진이 비록 결박하게 하였으나, 본래 반드시 죽이고자 한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작하여 감사한 것이다."
하였다. 영상(領相)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신도 헌의(獻議)하여 성상(聖上)께서 재결(裁決)하실 것을 청하였었는데, 뒤에 좌상(左相) 민정중(閔鼎重)의 의논을 보니, 지극히 엄절(嚴截)하였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도(道)는 법을 늦출 수 없는 것입니다. 오살(誤殺)과 희살(戱殺)은 모두 죽이는 데에 이르므로, 사정(事情)이 있고 없는 것을 지금 논할 필요는 없으며, 또 결박하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여 물에 떨어졌겠습니까? 지금 감사한 것은 이두진(李斗鎭)에 있어서는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이 되겠지만, 죽은 자에 있어서는 홀로 억울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전부터 이같은 중한 옥사(獄事)는 여러 번 엄한 형벌을 받았고, 사유(赦宥)를 만나 풀려난 자가 간혹 있었으나, 바로 용서하여 정배(定配)하는 것은 과연 그것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이두진의 나이가 이미 70이라고 하니, 〈형을 받다가〉 곧 죽을 것이 염려스럽고, 율(律)에 적실한 증거가 없으며, 실정(實情)이 용서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하니, 심평(沈枰)이 드디어 마땅히 논할 만한 것을 논하지 않는다 하여 인혐(引嫌)하고 물러갔다. 임금이 김수항에게 이르기를,
"능(陵)에 참배하는 의주(儀註)는 경의 뜻에 어떠한가?"
하니, 김수항이 말하기를,
"망릉례(望陵禮)의 복색(服色)은 경인년437) 의 일을 오늘날에 예(例)로 삼을 수 없는데, 하물며 제사를 행할 때의 절차는 더욱 어렵습니다. 전에 고(故) 상신(相臣) 조익(趙翼)이 섭행(攝行)하실 것을 청하자, 이경여(李敬輿)가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조정 의논이 혹은 말하기를, ‘두 차례로 나누어 제사를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나, 또한 복색을 바꾸어 입는 데 거리낌이 있습니다. 경인년에는 최복(衰服)으로 겸하여 행하였는데, 지금은 압존(壓尊)438) 의 혐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의 억견(臆見)으로는 최복은 미안하고, 만약 시사복(視事服)으로 하면 마땅할 듯합니다. 제사를 행할 때에는 혹시 신구(新舊) 정자각(丁字閣)에 각각 베풀 수는 있겠지만, 한 곳에 합설(合設)하는 것은 크게 미안합니다. 이 두 절차는 구애됨이 많고, 또 의거할 만한 선유(先儒)의 의논이 없습니다."
하였다. 뒤에 예조(禮曹)에서 품(稟)한 바로 인하여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의 의논에 따라 소관(素冠)과 백포(白袍)로써 배례(拜禮)와 곡례(哭禮)를 겸하여 행하고, 신릉(新陵)·구릉(舊陵)에 제사를 행할 때에는 먼저 백포와 소관으로 구릉에 제사한 뒤에 최복(衰服)으로 신릉에 제사를 행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장옥(場屋)이 엄하지 못하다는 것을 과거를 치른 뒤에 문득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하여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시관(試官)에게 이를 신칙(申飭)하게 하고, 또 품질이 좋은 시지(試紙)는 엄금하게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민서(李敏敍)가 상소하기를,
"거짓이든 참말이든 간에 신이 이미 더러운 이름을 얻었으니, 사람이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말하여 깨우칠 수도 없거니와 온 세상 사람 중에 신과 서로 믿는 자가 몇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만일 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어서 남은 비방을 그대로 답습해 전한다면, 그 당세(當世)의 부끄러움과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킴이 또한 이전보다도 심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마음은 내가 이미 아는데 어찌 한때 본정 밖의 비방으로 해서 해가 지난 뒤에 그 허물을 끌어 말하는가? 빨리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0일 계묘
유성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왔다.
전 우윤(右尹) 이상(李翔)이 응지(應旨)하여 상소하기를,
"가만히 보건대, 조정(朝廷)의 청허(淸虛)한 풍습이 진(晉)나라 말기의 폐단과 같아서 자못 충독(忠篤)한 뜻이 적습니다. 논의(論議)의 준결(峻潔)함을 보면, 비록 온 조정이 모두 백이(伯夷)라고 하더라도 가하겠지만,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모순되고, 그 급인(汲引)하는 바가 나라를 위하는 것 같지만 그 뜻은 실상 붕당(朋黨)을 같이하는 데 있고, 남의 음사(陰私)를 들추어 내는 것을 곧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공도(公道)와 같음이 있지만, 그 뜻은 실상 이견을 가진 자를 공격하는 데 있으며, 공(公)을 칭탁하여 사(私)를 이루는 것은 온 세상이 모두 그러하니, 모든 공적이 허물어지고 다스리는 도(道)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대저 조정이란 사방의 표준인데, 조정이 이와 같으니 사방이 바르기를 어찌 바라겠습니까? 아아, 오늘의 선비는 바로 다른 날의 조신(朝臣)인데, 나면서부터 성장하기까지 하려고 하는 것이 과업(科業)이므로, 익히는 것이 사장(詞章)이니, 기송(記誦)이 많아질수록 신감(神鑑)은 더욱 어두워지고, 기량(伎倆)이 더욱 정밀해질수록 심술(心術)은 더욱 허물어지게 됩니다. 만약 덕망이 있는 사람을 태학(太學)의 스승으로 삼아 위기(爲己)의 학문(學問)을 가르치게 하고, 경의(敬義)의 실상을 권면하게 하며, 또 현(縣)에서 주(州)에 추천해 올리고 주에서 태학에 추천해 올리게 하여, 해마다 현능(賢能)함을 조정에서 논하여 격려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며, 과거를 거쳐서 나아가는 자도 전선(銓選)하여 청환(淸宦)에 오를 즈음에 가세(家世)를 논하지 말고 오직 행의(行義)만 취하게 하면, 인재를 얻을 뿐만 아니라, 일세(一世)로 하여금 공경하여 권장하게 할 것이니, 사풍(士風)이 어찌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치화(治化)가 어찌 이루어지지 아니하겠습니까."
하고, 또 이르기를,
"구구(區區)한 뜻은 다만 전하의 성의에 있으며, 마침내 당대 제일의 명유(名儒)를 부르는 데 있으니, 바로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입니다. 만약 좌우에 두고 고문(顧問)에 대비하시면, 그 훈도(薰陶)하고 비익(裨益)하는 효험이 어찌 신의 어리석고 어두운 소견으로 능히 헤아릴 바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어진 신하가 만약 그 가지고 있는 바를 펴지 못하고, 마침내 구원(九原)에 뜻을 품고 가게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면, 천백대(千百代) 지사(志士)의 한(恨)이 됨을 어찌 이루 다 말할수 있겠습니까? 비록 자신이 조우(遭遇)하는 융숭한 때를 만났다 하더라도 멀리 산야(山野)에 자취를 감춘 자는 반드시 크게 불안한 정세가 있는 것이니, 신은 그윽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개연(慨然)합니다. 아아, 오늘날의 조정은 어찌 조송(趙宋)과 서로 비슷합니까? 왕안석(王安石)과 채경(蔡京)의 크게 어지러운 때439) 를 당한 나머지 뽑힌 띠뿌리같이 휘정(彙征)하여440) 군자(君子)가 조정에 가득 찼었으니, 선인 태후(宣仁太后)441) 의 치화(治化)가 융성했다고 일컬을 만합니다. 그러나 뜻이 다른 논의를 겸하여 거두었다가, 점차 대화(大禍)를 부른 계제를 이루었으니, 오늘날에 이르러 이를 말해도 오히려 애통할 만합니다. 주자(朱子)가 일찍이 원우(元祐)442) 의 일을 논하기를, ‘한갓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군자가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자기와 뜻이 같은 자가 반드시 소인(小人)이 아닌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근심이 심복(心腹)사이에 생겨서 마침내 구적(仇敵)의 형세를 조성하였으니, 그 실수는 분별을 정밀하게 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로써 오늘날의 일을 보건대, 뜻이 같은 가운데에서 분당(分黨)한 것과 같으니, 스스로 구적(仇敵)의 형세를 조성한 것입니다. 사정(邪正)을 통용(通用)한다는 논의는 반드시 간사한 무리가 일방적으로 이기고 마는데, 이는 모두 송조(宋朝)에서 이미 겪은 복철(覆轍)443) 이니, 장래의 화(禍)가 어찌 반드시 없을 것을 보증하겠습니까? 이에 신이 깊이 염려하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가장(嘉奬)하였다.
8월 11일 갑진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위에서 나왔다.
주장(晝講)에 나아갔다.
최관(崔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국화(李國華)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8월 12일 을사
우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하늘이 백성을 내실 때 욕심을 갖게 하였으므로, 인주(人主)가 없으면 곧 어지러워질 것이니, 만약 인주가 공정한 도(道)로써 위에서 건극(建極)444) 하여 금령(禁令)을 정하고, 상벌(賞罰)을 베풀고, 통류(統類)445) 를 한결같게 하고, 제량(制量)을 가지런하게 하지 않으면, 각각 그 힘을 분발하여 각각 사욕(私欲)을 추구하면서 반목하여 다투고 서로 싸우며, 서로 업신여기고 쟁탈하는 것을 그 누가 능히 금지하겠습니까? 이러므로 자산(子産)446) 이 말하기를, ‘불은 맹렬하여 백성이 바라보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는 자가 적지만, 물은 나약하여 백성이 업신여기기 때문에 죽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법을 준수하여 굽히지 않는 것이 비록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 같지만, 그 상하게 하는 것이 곧 이(利)롭게 하는 것이고, 법을 굽혀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 비록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그 사랑하는 것이 곧 해롭게 하는 것이니, 오늘날의 폐단으로 나약(懦弱)하거나 압완(狎翫)하는 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두진(李斗鎭)이 살인(殺人)한 것이 본디 죽이려는 뜻은 없었지만, 불행하게도 물에 떨어져서 죽게 되었는데, 이를 상명(償命)으로 단정하면 어찌 측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선왕(先王)께서 율(律)을 제정할 때 어찌 그 실정(實情)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차마 사람을 죽이려고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이와 같이 아니하면 죽은 자가 원통함을 품을 뿐만 아니라, 후일에 서로 죽이는 것을 금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장단(長湍)의 읍거(邑居) 20여 보(步) 안에 사람의 매장(埋葬)을 허락한 것은 또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바입니다. 인가(人家) 백 보의 한도는 비록 하민(下民)의 소호(小戶)라 하더라도 그러하며, 관문(官門)에 있어서는 5리(里) 안에 비록 세가 호족(勢家豪族)이라 하더라도 일찍이 산을 점령한 자가 있지 아니하였는데, 이제 이미 매장을 허락하는 명령이 있었으니, 관문 백 보 밖은 모두 장차 무덤의 땅이 될 것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금하면 또 고르지 못하다는 분쟁의 사단이 있을 것이고, 만약 모두 허락하고자 하면 반드시 관부(官府)를 헐어서 옮겨야 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국가에서 의친(懿親)에게 진실로 우휼(優恤)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제 관청이 있는 곳을 침핍(侵逼)하여 사사(私事)로써 공사(公事)을 해치는 것이 어찌 크게 지나치지 아니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벌(罰)은 반드시 죄에 합당하게 하여 요행으로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금하는 것은 반드시 법이 있으니, 세력으로 점령하지 못하게 하셔서 만백성을 표솔(表率)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세상이 갈수록 잘못되어 풍속이 어지러워져서 사대부(士大夫)가 세력을 빙자하여 함부로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폐단이 종종 있으니, 정상(情狀)이 몹시 악하다. 십배(十倍)의 모든 사람 가운데 어찌 오로지 이두진(李斗鎭)의 옥사(獄事)만 법을 굽혀 너그럽게 용서하겠는가? 단지 옥사의 실정과 법문(法文)을 반복해서 참고하고 헤아려서 특별히 참작해서 처리하였는데, 어찌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겠는가? 두 번째 일은 읍내(邑內)의 주산(主山)이 아니고 관거(官居)와 마주 보이는 거리가 거의 수백 보(步)에 이르기 때문에, 매장하도록 허락한 것인데, 차사(箚辭)가 자상하고 극진하니, 매장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4일 정미
특별히 선전관(宣傳官) 정상주(鄭翔周)·백시구(白時耉)·김중삼(金重三) 등을 보내어 북로(北路)의 봉수(烽燧)를 살피게 하고, 인하여 각 고을에 신칙(申飭)하게 하였다. 이때에 서북(西北)에 변경(邊警)이 없으니, 병조(兵曹)에서는 으레 평안(平安)한 봉화만 보고하고, 날마다 아차산(峩嵯山)의 봉화를 후망(候望)할 수 없다고 하였다. 아차산은 서울 동쪽 수십 리(里) 밖에 있는데, 북쪽의 봉화를 전하는 것이었다. 이에 정상주 등이 적간(摘奸)하여 갖추 아뢰기를,
"연로(沿路)의 봉대(烽臺)가 대개 오래 되어 허물어지고, 기계(器械)도 갖추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신칙하여 수선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우리의 북로(北路)는 저들의 경계와 단지 한 가닥 물이 막혔을 뿐인데, 봉대(烽臺)를 수축하지 아니함이 이와 같으니, 변경의 방비가 허술함을 미루어 알 만하다. 적간한 뒤에 북로의 봉수가 이르는 것이 겨우 수일이면 되는데, 다시 전과 같이 불통하였으나, 제도의 각 고을에 경계해 신칙한 일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고, 병조(兵曹)와 비국(備局)에서도 다시 힐책(詰責)하는 일이 없었다. 안팎이 유유범범(悠悠泛泛)하게 이를 보기를 예사롭게 하니, 아! 위태하도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5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3면
【분류】군사-통신(通信)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우리의 북로(北路)는 저들의 경계와 단지 한 가닥 물이 막혔을 뿐인데, 봉대(烽臺)를 수축하지 아니함이 이와 같으니, 변경의 방비가 허술함을 미루어 알 만하다. 적간한 뒤에 북로의 봉수가 이르는 것이 겨우 수일이면 되는데, 다시 전과 같이 불통하였으나, 제도의 각 고을에 경계해 신칙한 일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고, 병조(兵曹)와 비국(備局)에서도 다시 힐책(詰責)하는 일이 없었다. 안팎이 유유범범(悠悠泛泛)하게 이를 보기를 예사롭게 하니, 아! 위태하도다."
8월 15일 무신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이번 숭릉(崇陵)447) 에 거둥하실 때에 건원릉(健元陵)448) ·현릉(顯陵)449) ·목릉(穆陵)450) 이 한 산 안에 있으므로, 마땅히 전알(展謁)의 예(禮)가 있어야 하겠지만, 주상께서 바야흐로 최질(衰絰) 중에 계셔서 복색을 바꾸어 예를 행하시는 것이 진실로 불편하니, 청컨대, 마련하지 않게 하소서."
하자, 이를 옳게 여겼다.
8월 16일 기유
이두악(李斗岳)을 지평(持平)으로, 송규렴(宋奎濂)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8월 18일 신해
전라도 영광군(靈光郡) 법성포(法聖浦)에서 조수(潮水)의 거품 빛깔이 혹은 푸르기도 하고 혹은 붉기도 하다가 마침내 누른 빛깔을 이루었는데, 비린내가 5일 동안 갯마을에 찼었다.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서 지진(地震)하였다.
이전에는 해서(海西) 장산(長山) 이북의 각 고을을 평안도 청남 방어사(平安道淸南防禦使)가 나누어 관할하였는데, 방어사 이준명(李浚明)이 해서 여러 고을을 순력(巡歷)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與否)를 치품(馳稟)하자, 묘당(廟堂)에 내리니, 복주(覆奏)하기를,
"제도(諸道)의 순시하여 조련(操練)하는 것은 흉년이 들어 모두 정지하였는데, 방어사가 해서에 나가 순시하는 것은 새로 시작하는 것이므로, 더욱 급급하게 할 필요가 없으니, 아직 앞을 보아서 다시 계품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8월 20일 계축
박세채(朴世采)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엄집(嚴緝)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청대(請對)451) 하여 말하기를,
"전부터 능행(陵行) 때에 태복(太僕)에서 길들인 말을 어거하여 평탄할 길에 나아가면 빨리 모든 것을 편하게 여기니, 군졸이 항오(行伍)를 이루지 못하였고, 종관(從官)들도 몹시 전도(顚倒)하였습니다. 또 지금은 보통때의 거둥과 다름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는 〈말고삐를〉 잡고 어거하는 자가 반드시 빨리 몰았으니, 이제 마땅히 태복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말하기를,
"불행히도 늦가뭄으로 호남(湖南)에서 더욱 재해를 입어서 연해(沿海)에는 지금 떠도는 걸인들이 사방에 흩어졌으나, 경기[畿田]의 수원[水根]이 있는 곳은 간혹 작년보다 낫기도 한데, 양서(兩西) 또한 그러합니다. 하물며 금년은 제도(諸道)의 급재(給災)452) 가 매우 넉넉하니, 수령(守令)이 만일 친히 점검하여 고르게 나누어 준다면 백성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을 위한 계책으로서는 단지 올 가을의 급재와 명년 봄에 잘 진휼(賑恤)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옛일로써 보건대, 또한 어사(御史)를 나누어 보내 여러 도(道)를 살피고 묻게 한 일이 있었으니, 이제 마땅히 발송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청남 방어사(淸南防禦使) 이준명(李浚明)을 파직하고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이준명은 한 척의 전선(戰船)을 만들기 위하여 장산(長山)·초도(椒島) 등지에서 재목을 베었는데, 거의 8백여 그루가 넘었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세백(李世白)이 장문(狀聞)하자, 이를 묘당(廟堂)에 내려 논죄(論罪)하게 한 것이다.
고부(古阜)의 무인(武人) 김남두(金南斗)가 상소하기를,
"오늘날의 민폐(民弊)는 자세하게 들 수는 없지만, 전정(田政)과 적정(糴政)과 진정(賑政)입니다. 무엇을 전정의 폐단이라고 이르는가 하면, 서원(書員)의 무리가 결부(結負) 【시속에서 곡식 10속(束)을 1부(負)라고 하고 10부를 1결(結)이라고 한다.】 를 속이는 것은 제도(諸道)의 공통된 병통인데, 호남이 더욱 심합니다. 작년에 조정에서도 이 폐단을 염려하여 사목(事目)을 거듭 밝히고 특별히 풍헌(風憲)·유사(有司)를 정하여 답험(踏驗)하게 하였기 때문에, 감히 속이거나 숨기지 못하여 거의 폐단을 없앨 만하였는데, 작부(作夫) 【시속에서 8결(結)을 1부(夫)라고 한다.】 할 때에 도리어 서원(書員)에게 위임하였으므로, 한 도의 손실이 몇 만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 한 도를 미루어 생각하면 여러 도를 알 수 있으니, 마땅히 각 고을로 하여금 서원에게 맡기지 말고 별도로 유품(儒品)에서 가려서 풍헌 및 별유사(別有司)로 삼아서 상세하게 답험하도록 하고, 상하 인민(人民)을 모아놓고 서로 의논하여 작부(作夫)하게 하되, 혹시 사사로운 정에 따르는 바가 있거든 중한 율(律)로 다스리면, 속이고 숨기는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적정(糴政)의 폐단이라고 이르는가 하면, 가만히 보건대, 근래에 백미(白米)와 정조(精租)는 아전의 무리와 호족[豪右]에게 많이 돌아가는데, 거두어 들일 때에는 오직 곤궁(困窮)한 백성들에게만 독촉하고 아전의 무리는 바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다시 받아 먹는 것이 해마다 증가하기만 하며, 간혹 바치는 바가 있다 해도 모두 겨우 쭉정이를 섞어서 바치고, 또 분급(分給)할 때에는 반드시 정한 곡식을 가립니다. 탕감(蕩減)하거나 감봉(減捧)할 때에 혜택을 받는 자는 모두 이 아전의 무리와 호족이고, 소민(小民)은 반드시 인족(隣族)에게 책임지워 전량을 거두어 받습니다. 또 혹시 각 고을에서 이전하는 일이 있으면 민결(民結)에 분급(分給)하고 정곡(精穀)으로 고쳐서 이납(移納)하게 하니, 백성들이 보존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이에 말미암는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각도(各道)에 엄하게 신칙하여 거두어들이고 나누어 주는 것을 반드시 모두 균일하게 하면 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무엇을 진정(賑政)의 폐단이라고 이르는가 하면, 죽(粥)을 먹이는 것이 보탬이 없는 것은 신해년(辛亥年)453) 에 이미 증험하였고, 건량(乾糧)을 나누어 주는 것도 작년에 시험하였습니다. 기민(飢民)의 성책(成冊)에 빈부(貧富)가 서로 섞여 있고 읍저(邑底)의 간리(奸吏)가 속여서 기록한 것이 많아서 먼 마을의 곤궁한 백성은 누락됨을 면치 못하여 떠도는 걸인이 있기에 이르는데, 임금의 백성이나 타관(他官)이라 칭탁하고 공소(控訴)를 허락하지 아니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진정(賑政)을 거듭 밝히고 여러 고을에 엄하게 신칙해서 힘써 균일(均一)하게 하여 무고(無告)한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면할 수 있게 하소서. 진곡(賑穀)은 반드시 별도로 요리(料理)하여야만 조금이나마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일찍이 전에 곡식을 바치고 찰방(察訪)·주부(主簿)의 자급(資級)을 받은 자가 도로 병영(兵營)에 소속되어 천역(賤役)과 다름이 없습니다. 작년에 곡식을 바치고 면강(免講)되기를 원하던 무리도 1년이 지나지 아니하여 문득 대오(隊伍)에 묶이니 누가 즐겨 곡식을 바치고 그 역(役)을 사겠습니까? 이번에 본도(本道)에서 중인(中人)·서얼(庶孽)을 뽑아 비국(備局)에 보낸 자가 무려 수천 명인데, 5, 6석(石)의 쌀을 바치게 하고 면강첩(免講帖)을 만들어 주어서 종신토록 침해하지 말게 한다면, 반드시 다투어 달려오는자가 많아서 수천여 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년 봄의 애통(哀痛)한 하교를 여러 고을 수령들이 전해 보이지 아니한 자가 많아서, 궁벽한 마을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들어 알지도 못하였는데, 유독 태인 현감(泰仁縣監) 조상우(趙相愚)만이 친히 성상의 유시(諭示)를 받들어 선비와 백성들에게 초유(招諭)하여 온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성상의 뜻을 소상하게 알도록 하고, 각각 곡물(穀物)을 내어 진제(賑濟)하는 것을 돕게 하였으니, 반드시 모든 고을에 엄하게 신칙하여 반포해 보이게 하고, 혹시 봉행(奉行)하는 것을 게을리하거나 즉시 전포(傳布)하지 아니하는 자는 명령에 태만한 율(律)로 다스리면 어찌 도움이 적겠습니까? 또 오늘의 곤수(閫帥)는 오직 위엄 세우는 것만을 위주로 하고, 무마(撫摩)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니, 충후(忠厚)하고 지략(智略)이 있는 자를 가려서 곤수의 임무를 주고, 절대로 자주 바꾸지 말고 무마하고 교련하게 하면, 장수는 군사의 마음을 알 것이고, 군사는 그 장수의 정사(政事)에 익숙해질 것입니다. 속오군(束伍軍)은 바로 난리에 임하여 앞장서는 병졸인데, 대개 피잔(疲殘)한 무리가 많으므로, 만약 특별히 진호(賑護)하지 않으면 반드시 장차 흩어질 것이니, 사변에 대비하는 계책이 자못 너무 허술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각도의 주장(主將)에게 특별히 유시(諭示)하여 각별히 그 소관(所管)의 속오군(束伍軍)을 진구(賑救)하여 흩어지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또 오늘날의 근심은 진실로 남쪽에 있는데 영남의 조령(鳥嶺)과 호남의 팔영치(八營峙)는 진실로 요해지(要害地)입니다. 오늘을 위하는 계책으로는 산성(山城)을 증축(增築)하는 것만한 것이 없으니, 남쪽 오랑캐의 경보가 있으면 대장(大將)을 나누어 보내어 두 성(城)에 의거해 지키게 하고, 해로(海路)의 방비는 오로지 통영(統營)과 수영(水營)에 책임지워야 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묘당(廟堂)에 널리 하문하셔서 포상(苞桑)의 계책454) 으로 삼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을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전정(田政)이 잘되고 잘못되는 것은 오직 수령(守令)의 능하거나 능하지 못한데 매어 있으나, 조적(糶糴)455) 을 균일(均一)하게 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지극히 한심합니다. 아울러 마땅히 신칙하여 드러나는 대로 중하게 다스리게 할 것이며, 기민(飢民)을 명확하게 핵실(覈實)하지 못하는 것은 그 책임이 또한 수령에게 있으니, 정밀하게 조사하여 혹시라도 혼잡(混雜)함이 없게 할 것입니다. 또 곡식을 바치고 영첩(影帖)을 받은 자를 도로 군오(軍伍)에 붙이면 조정에서 실신(失信)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각도(各道)로 하여금 다시 마구 침해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유학(儒學)을 일삼는 서얼(庶孽)의 태강(汰講)을 조사해 내는 데 이르러서는 대개 놀고 먹는 백성으로 궐액(闕額)을 채우려는 것인데, 이제 만약 또 곡식을 바치고 면강(免講)하게 하고 종신토록 침해(侵害)하지 아니하면, 국체(國體)에 자못 구간(苟簡)하는 것이니, 가볍게 허락하기 어렵습니다. 곤수(閫帥)를 자주 바꾸는 것이 비록 폐단이 있다고 하나, 관방(官方)456) 을 가볍게 변경할 필요가 없습니다. 관방(關防)의 요해지에 성(城)을 쌓아 수비(守備)하는 계책은 의견(意見)이 없지 아니하나, 이는 대단한 시설에 관계되므로, 가볍게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정지하고 행하지 아니하였다. 인하여 승정원(承政院)에 하교하기를,
"김남두(金南斗)는 먼 지방의 무인(武人)으로서 응지(應旨)하여 상소하였으니 숭상할 만하다. 또 소장에 진달한 말이 또한 의견이 없지 아니하니, 본원(本院)에서 그 사람됨을 자세히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대답하기를,
"김남두가 소 올릴 때에 원본을 읽게 하니, 통효(通曉)하여 막힘이 없었으며, 묻는 데 따라 대답하는 데 자못 소견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사람됨을 보니, 또한 근간(勤幹)한 듯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당한 벼슬을 제수하게 하였다.
8월 21일 갑인
관학(館學)457) 의 유생(儒生) 조정만(趙正萬) 등이 상소하기를,
"송(宋)나라 말기에 형서(邢恕)458) 란 자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정자(程子)의 문하(門下)에서 나왔으나,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자, 그 스승을 배반하여 공격하니, 마침내 사설(邪說)이 횡행하여 군자(君子)의 도(道)가 사라지고 백년의 화(禍)를 이루게 하였으므로, 신 등은 이에 통한(痛恨)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오늘날 형서의 일이 성명(聖明)의 조정에 다시 나와서 장차 인심이 허물어지고 세도(世道)가 무너져서 어지럽게 되려 하니, 사림(士林)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윤증(尹拯)이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한 지 이제 30여 년에 이르므로, 윤증(尹拯)이 근실하게 복종해 섬긴 것과 송시열이 두텁게 허여(許與)한 것은 진실로 심상한 사제(師弟)에 비할 바가 아닌데, 윤증이 사감(私憾)으로 원망과 노여움을 깊이 쌓아 편지에 드러내어 꾸짖고 무망(誣妄)하기를 기탄없이 하였고, 일이 발단된 뒤에 미쳐서는 또 다시 용장(冗長)한 글과 편지를 직접 사문(師門)에 던져서 마음대로 업신여기고 짓밟는 등 더욱 이르지 아니한 바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도리로서 차마 할 바이겠습니까? 대저 윤증의 아비 증 참의(贈參議) 신(臣) 윤선거(尹宣擧)가 강도(江都)의 변란(變亂)459) 을 겪고부터 향리(鄕里)에 물러가 살면서 사우(師友)와 종유(從遊)하고 뜻을 학문에 돈독히 하니, 한때의 사류(士流)가 추중(推重)하여 허여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고, 송시열도 윤선거와 서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같은 때에 적(賊) 윤휴(尹鑴)가 유자(儒者)의 이름을 빌어 사우(士友) 사이에 두루 종유하였는데, 《중용(中庸)》의 주자(朱子)의 집주(輯註)를 고치자, 송시열이 명백하게 분변하여 통렬하게 배척하고, 인하여 서로 절교(絶交)하였습니다. 기해년(己亥年)460) 의례(議禮)의 일이 발생하자, 윤휴가 곧, ‘임금을 낮추고 종통(宗統)을 둘로 한다.’는 말을 만들어 내어 일망타진(一網打盡)할 계책을 쓰고자 하니,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과 같은 여러 사람들도 모두 그 심술(心術)의 음흉함을 알고는 또한 서로 절교하였는데, 오로지 윤선거(尹宣擧)의 뜻은 서로 어긋남이 없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송시열이 세도(世道)를 위해 깊이 근심하여 여러 번 충고(忠告)하였으나, 윤선거가 마침내 따르지 아니하므로, 송시열이 매양 그 사(邪)와 정(正)의 분변이 엄정하지 못함을 탄식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윤증이 갈문(碣文)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는데, 송시열은, 비갈(碑碣)의 글은 사실을 수집해서 기록하여 후세에 전신(傳信)해야 하고, 또 문자(文字)로써 사람에게 사사로운 정(情)을 좇아 구차하게 칭찬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 또한 성실한 도(道)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논찬(論撰)한 것이 한결같이 윤증의 바라는 바와 같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곧 윤증의 감한(感恨)을 일으킨 까닭입니다. 윤증은 오히려 속으로는 원망하고 분노하는 마음을 품고서도 겉으로는 사제(師弟)의 예(禮)를 행하면서 은밀히 쌓고 간직하고는 얼굴 빛이나 말에는 드러내지 아니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감히 때를 틈타 갑자기 발동하여 헐뜯고 배척함이 이처럼 극단에 이르고 있으니, 대저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연고가 아닙니다. 지난번 최신(崔愼)이 상소하여 비로소 그 꾸짖고 무망하는 말을 배척하고, 대신(大臣)이 이어서 전석(前席)에서 진달하자, 전하께서 그 정상을 밝게 살피시고 전후의 성교(聖敎)가 엄절(嚴截)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윤증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스스로 반성하여 척연(惕然)히 고칠 것을 생각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더욱 패만(悖慢)하여 조금도 기탄함이 없이 편사(偏邪)한 말과 변명하는 말의 사단이 많았으니, 신 등이 그 가운데 한두 가지를 간략히 분변하겠습니다.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지금에 와서 망령된 소견에는 〈선생의〉 본원(本源)의 바탕에 대해 의심스러움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기질(氣質)의 병폐를 교혁(矯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조장하는 바가 있으니, 이것이 참람하게도 망론(妄論)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불평하는 것은 사정(私情)이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公議)입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문자(文字)의 일뿐만 아니라 문하(門下)께서는 비가(鄙家)에 대해서 미세한 한 가지 일이나 의심스러운 한 마디 말이라도 진실로 선인(先人)을 해칠 만한 것이 있으면, 폭양(暴揚)하지 않는 바가 없었으니, 자식된 마음에 어찌 통각(痛刻)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저의 마음이 통박(痛迫)하여 정(情)이 전일(前日)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고 하였으면, 그 원독(怨毒)의 깊음을 따라서 알 수 있는데, 도리어 이르기를, ‘불평하는 것은 사정(私情)이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公議)이다.’ 하였습니다. 이미 원독한 마음을 속에 품었다면 대개 가는 곳마다 촉발(觸發)하여 그 말하는 바가 저절로 공정하지 못할 것인데, 비록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에서 나오는 것이다.’고 말하나 그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또 윤증이 송시열을 따른 지가 이와 같이 오래 되었는데, 평소 질의(質疑)할 때에 무엇 때문에 일찍이 일언반사(一言半辭)도 송시열의 도학(道學)에 대해 순정(醇正)한지 허물이 있는지 언급한 바가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비가 죽은 후 문자(文字)를 부탁하는 데 이르렀으면, 존상(尊尙)하고 경복(敬服)하는 바가 또한 지극하다고 이를 만한데, 오로지 갈문(碣文)이 이미 나온 뒤에 곧 본원(本源)과 언행(言行)에 의심할 바가 없지 않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송시열의 본원과 언행이 그 갈문으로 인하여 비로소 의심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대저 윤증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아래로 한 귀절 한 글자가 모두 사감(私憾)에서 나왔기 때문에, 학문을 논한다고 가탁하여 스스로 공의(公議)라고 일컬으면서 사람의 귀와 눈을 가리려는 계책으로 삼은 것입니다. 아아, 예로부터 문하의 제자가 선생과 어른에게 일로 인하여 논변(論辨)한 것은 진실로 많이 있었으나, 일찍이 그 언행(言行)의 전체를 들어서 공공연히 꾸짖고 무망하기를 윤증과 같이 한 자가 있었습니까? 송시열은 평생 동안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행동을 모두 주자(朱子)를 기준으로 삼았으니, 공부의 독실함과 문로(門路)의 정대(正大)함은 선유(先儒)의 정맥(正脈)을 이었고,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이 되었으며, 사람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모두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정직한 데에서 나왔으니, 어찌 일찍이 일호라도 기관(機關)461) 과 권모 술수(權謀術數)가 윤증의 말과 방불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윤선거(尹宣擧)는 늦게야 뜻을 세운 것이 족히 강도(江都)의 일을 덮을 만하였으나, 또 끝내 적(賊) 윤휴(尹鑴)의 악함을 깨닫지 못한 것 또한 어찌 백 번 속임을 받는다는 뜻에 손상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시열은 장차 세도(世道)의 큰 근심이 될 것을 밝게 보고, 통렬하게 배척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윤선거는 뜻[志]이 같고 의(義)가 합하는 사람이었으나, 오로지 이 일에는 의견이 달랐으니, 탄식하고 애석해 하는 마음이 어찌 때로 이야기 가운데 발설하지 아니할 수 있었겠으며, 논찬(論撰)하는 말에 어찌 약간 짐작함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그 아들이 적대시하는 바가 되어 이러한 망극한 구무(構誣)가 있었으니, 군자(君子)가 이러한 세상에 처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윤증이 네 번째 보낸 글에 적(賊) 윤휴를 논급(論及)하여 이르기를, ‘그 사람이 죄로 죽은 뒤에 무슨 다시 논할 일이 있겠는가?’고 하였는데, 이른바, ‘죄로 죽었다.’고 일컫는 것을 흉적(凶賊)의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윤휴가 동조(東朝)462) 를 무욕(誣辱)하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할 것을 꾀한 죄는 흉당(凶黨)에 있어서 우두머리가 되는데, 이제 죄로 죽었다고 지목하는 것은 오로지 무엇 때문입니까? 아아, 송시열의 성품은 본래 강의(剛毅)하여 도리(道理)를 믿어 스스로 지키면서 그 마음에 옳지 못한 것과 의리에 불가한 것은 비록 큰 이해(利害)가 있다 하더라도 일찍이 돌아보거나 꺼려한 적이 없었으니, 그 평생의 경력(經歷)을 살펴보면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오로지 세도(世道)를 자임(自任)하여 더욱 엄절함을 이룬 것이 사정(邪正)과 선악(善惡)의 분변에 있었기 때문에, 오로지 저 아첨하고 질투하며 정도(正道)를 미워하는 무리가 때때로 나와서 구훼(構毁)하고 나직(羅織)하는 등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으나, 오히려 감히 학술(學術)로써 허물을 삼지는 못하였는데, 이제 윤증이 현란(眩亂)한 말을 만들어 정대하고 순수(純粹)한 학문을 더럽히고자 하며 한때를 속이고 후세를 속일 수 있다고 이르니, 참으로 세변(世變)은 있지 아니하는 바가 없습니다. 송시열의 도덕과 학문은 진실로 이로써 증손(增損)되는 바가 있지 않을 것이나, 오로지 인심이 함닉(陷溺)하고 의리(義理)가 회색(晦塞)되어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의논이 어지럽게 아울러 일어나서 삼조(三朝)463) 에서 예우(禮遇)할 뿐만 아니라, 사림(士林)이 존경하던 이를 모두 허망한 지경으로 돌아가게 할 따름이고, 경원(慶元)464) 때의 위학(僞學)의 비방465) 이 장차 오늘날에 다시 일어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 시류(時流)가 더럽혀질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윤증이 학문을 논한 한 마디 말은 반드시 장차 후일의 재화(災禍)의 빌미가 될 것이니, 어찌 조속히 분변하여 그 싹을 끊어 없애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인심이 함닉(陷溺)하고 의리가 회색(晦塞)되어 평소의 존경하던 사람을 꾸짖고 배척함이 한결같이 이처럼 지극한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어찌 사문(斯文)의 불행일 뿐이겠는가? 진실로 국가의 불행이다. 지난날 상신(相臣)의 진달로 인하여 이미 밝게 분변하여 물리쳐 끊었는데, 너희들이 수선(首善)466) 의 땅에 있으면서 어진 스승의 무함(誣陷)받은 것을 통분하게 여겨 함께 부르짖어 변명하되, 말의 뜻이 엄정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당초에 윤증이 박세채(朴世采)에게 준 글에서 이미 발론하였는데, 송시열이 윤증에게 글을 보내기를,
"고명(高明)이 화숙(和叔)467) 에게 준 편지를 지난 달에 우연히 얻어 보니, 아아, 참으로 약석(藥石)이었네. 대개 어려서부터 망령되게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었고, 또 사문(師門)에 종유(從遊)하여 이 일을 얻어 들었으니, 반드시 글을 읽어서 이치를 밝히고 극기(克己)하여 사욕을 없애는 이 두 가지가 바로 실제의 공효(功效)일 것이네.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하는 바 아니지만, 기질(氣質)이 편협(偏俠)하고 잡박(雜駁)한데다가 실행에도 힘쓰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털끝만큼도 근사(近似)한 것이 없었네. 이치에 이미 밝지 못하여 이(利)를 의(義)로 여기고, 극기(克己)하지 못하여 물욕이 항상 행해져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온전히 인욕(人欲)에서 나온 것이 많았으니, 자신을 점검(點檢)할 때마다 부끄러움에 옷에 땀이 젖는 것을 깨닫지 못하네. 지금 고명(高明)이 지적한 바는 모두 진실로 병통이나, 의(義)와 이(利)를 함께 행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아울러 쓴다는 것은 더욱 지나치게 허여(許與)하고 크게 용서함을 보겠네. 매번 받들어 읽은 후 침으로 몸을 찌르는 것과 같아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경책(警責)하여 새로워지기를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어 많은 은혜를 받았으니, 비유하건대, 병든 사람이 고질이 되어 장차 죽게 되었는데, 갑자기 양의(良醫)가 신묘(神妙)한 약을 주어 살 길을 찾을 수 있었다면, 비록 양의의 본심이 과연 자기를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은혜가 됨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내가 과연 문자(文字)의 과실로 선장(先丈)에게 득죄(得罪)하였으니, 끝내 의혹을 풀 수가 없다면 고명의 도리에 있어서는 주자(朱子)가 말한 것과 같이 의(義)를 좇아서 절교(絶交)를 고해야 마땅할 것이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사제의〉 굴레에 매여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불평(不平)하는 뜻을 마음속에 쌓아두면, 이르는 곳마다 촉발(觸發)하여 제재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니, 군자(君子)가 의(義)를 처리하는 도리(道理)가 과연 이와 같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네. 또 문자(文字)를 초정(草定)한 이래로 고명(高明)이 개정(改正)하게 하려한 것은 받들어 따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득죄(得罪)한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 목천(木川)의 일468) 에 있어서는, 이를 고명이 깊이 노여워하는 바이나, 반복해서 생각해 보건대, 그 일의 허실(虛實)과 그 말의 유무(有無)를 물론하고, 대개 타우(打愚)469) 가 호향(互鄕)470) 의 사람과 더불어 상종(相從)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대개 선장(先丈)을 존상(尊尙)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네. 고명이 논한 바는 바로 정문 일침(頂門一針)으로서, 평생 동안 이를 사우(士友) 사이에 얻은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로써 경계하고 격려하니, 우연히 죽지 아니한다면 거의 조금이나마 상유(桑楡)의 공효가 있을 것이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신(崔愼)이라는 북방(北方)의 무지(無知)한 사람이 갑자기 소장(疏章)에 드러내어 조리가 없고 이치에도 어긋난 말로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다고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황공하고 부끄러워 거의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였네. 비록 급히 글로써 질책(叱責)하였으나, 이루어진 일이어서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 무릇 전후의 말한 바가 만약 간폐(肝肺)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하늘이 미워하고 미워할 것이네. 말하고 싶은 것이 이에 그치지 아니하나, 거의 다한 천식(喘息)이 몹시 위태하여 입으로 부르는 것도 접속하지 못하고, 그 구선(究宣)하는 것도 조리가 없으니, 오로지 고명은 가련하게 여겨 살펴 주기 바라네. 사람이 장차 죽으려고 하면 그 말이 선(善)해진다 하였고, 무릇 이에 운운(云云)한 것들은 반드시 거짓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아울러 양지(諒知)하기 바라네."
하였는데, 윤증이 답하기를,
"한 번 권생(權生)이 참람한 논의를 전달(轉達)한 뒤로 항상 황송(惶悚)함이 간절하였는데, 저의 편지가 전해진 것을 듣고는 비록 황송함은 더욱 깊어도 여러 해를 머뭇거리며 감히 아뢰지 못하였던 것을 갖추 듣고 보실 수 있게 되었으니, 또 저윽이 스스로 다행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북인(北人)의 상소(上疏)가 나온 것을 듣고는 마음이 슬퍼서 도모할 바를 몰라 문하(門下)를 위하여 놀라 마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인(先人)에게 욕(辱)이 미치고 저의 마음이 몹시 아플 뿐만 아니라, 부자(父子)가 스승과 벗으로 교유한 지 50여 년 만에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망연(惘然)히 의(義)를 처리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문하께서 다시 거두어 용서하시고 이 글을 내려서 정성스럽게 설명하여 깨우쳐 주시며 말씀이 선해진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보증하시고, 〈거짓이 있으면〉 하늘이 미워한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시고, 조리가 없고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으로써 북인(北人)을 질책(叱責)하셨습니다. 아! 문하의 말씀이 이에 미친 것은 오히려 스스로 경계[畦畛]를 베풀어서 스스로 장자(長者)를 끊게 하시려는 것이니, 문하께서는 윤증(尹拯)을 저버리지 아니하셨으나, 윤증이 진실로 문하를 저버린 것입니다. 이에 하교(下敎)하신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하나 답(答)을 올려 재처(裁處)하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하교하시기를 ‘고명(高明)이 지적한 바는 모두 진실로 병통이나, 이(利)와 의(義)를 같이 행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아울러 쓴다고 한 것은 더욱 지나치게 허여(許與)하고 크게 용서하는 것이다.’ 하셨으나, 이는 단지 대강(大綱)을 말씀하신 것뿐이고, 그 자세한 것은 진실로 신유년471) 의 의서(擬書)472) 에 있는데, 이제까지 감히 올리지 못한 것은 성의(誠意)가 천박(淺薄)한 죄입니다. 선인(先人)께서는 문하께 진실로 지극한 정성이 있어서 의심할 만한 곳이 있음을 보면 모두 기질(氣質)의 병통으로 돌리시고, 본원(本源)에는 일찍이 의심하지 아니하셨으나, 오늘에 이르러 망령된 소견으로는 본원의 바탕에 의심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기질의 병폐를 교혁(矯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조장(助長)하고 계시니 이것이 참람한 망론(妄論)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문하께서 담부(擔負)하신 바가 어떠하십니까? 훗날의 과오는 호리(毫釐)에서 비롯되고, 구인(九仞)473) 의 높은 산을 쌓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면 완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훗날 논하는 자로 하여금 또한 윤증과 같이 망론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크게 통석(痛惜)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제지받아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하고, 권생(權生)474) 과 논한 것은 단지 제(齊)나라 사람의 처첩(妻妾)이 안 뜰에서 원망하는 것475) 과 같은 것이었는데, 전전하여 득죄(得罪)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모두 식견(識見)이 어두운 죄입니다. 양의(良醫)의 본심이 자기를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하교는 또한 감히 해명할 수는 없으나 이는 옛사람이 ‘믿지 아니함이 있으면 곧 자기를 비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교훈입니다. 하교하시기를, ‘내가 문자(文字)의 과실로 선장(先丈)에게 득죄(得罪)하였으니, 의혹을 풀 수가 없다면 고명은 마땅히 의(義)를 좇아서 절교(絶交)를 고해야 할 것이네.’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도리어 얽매여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불평하는 뜻을 마음속에 쌓아 둔다.’라고 하셨으나, 절교를 고하는 것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범충선(范忠宣)도 구양공(歐陽公)에게 능히 행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무상(無狀)한 자와 문하와의 사이이겠습니까? 대저 정의(情義)가 전과 같지 못한 것으로써 모두 절교해야 한다고 이른다면 세간의 교제에 절교하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문하의 말씀이 이에 미치시니, 진실로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화숙(和叔)476) 에게 준 편지를 불평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진실로 윤증(尹拯)의 본정[情]이 아닙니다. 대저 불평하는 것은 사정(私情)이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公議)이니, 이는 단지 망령된 소견이 잘못 들어간 것일 뿐입니다. 하교하시기를, ‘문자(文字)를 초청(草定)한 이래로 고명이 고치게 하려고 한 것은 받들어 따르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고 하셨는데, 대저 위의 글에 하교하신 바, ‘마침내 의혹을 풀수가 없었다.’는 것은 그 총론(總論)을 고치지 아니한 일을 지적하신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또 어찌하여 받들어 따르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는 하교가 있었습니까? 문자(文字)를 고쳐 줄 것을 청한 것이 전후에 모두 세 번 있었는데, 갑인년477) 에는 불초(不肖)가 스스로 청하였고, 병진년478) 에는 문하께서 고쳐 줄 것을 허락하셨으며, 무오년479) 에는 문하께서 다시 올리게 하셨습니다. 처음 고쳐 주실 것을 청하였을 적에는 고쳐 주시는 은혜를 입지 못하였고, 또 이 일은 급급(汲汲)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하교하신 때문에 감히 재차 고쳐 주실 것을 청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또 다소의 왕복이 있었으나, 종말에는 단지, ‘우선 화숙(和叔)이 기록한 바에 의거한다.’라고 하교하시고, 또 ‘약한 것은 강한 것을 대적하지 못한다’, ‘산악(山岳)으로 바꾸어 쓰겠다.’는 등의 희롱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희롱당하였는데, 어찌 감히 세 번 청할 뜻이 있겠습니까? 그후 약간의 글자를 고쳐 주셨으나, ‘보내 온 뜻에 의하여 찬정한다.’는 시교(示敎)가 있었기 때문에 이로써 스스로 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다시 흠결(欠缺)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문자(文字)의 일뿐만 아니라, 문하께서는 비가(鄙家)에 대하여 비록 한 마디 말씀과 한 가지 일이라도 진실로 선인(先人)을 해칠 수 있는 것은 폭양(暴揚)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으니, 또 저의 마음에 통박(痛迫)한 것이 있었습니다. 문하께서 일찍이 김 상서(金尙書)의 말을 인용하여 선인을 가리켜 잔인(殘忍)한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이와 같이 근사하지도 아니한 말을 오히려 허실(虛實)을 가리지도 않은 채 남에게 말씀하셨으니, 자식된 마음에 어찌 통각(痛刻)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교하시기를, ‘목천(木川)의 일은 고명이 깊이 노여워하는 바이나, 대개 타우(打愚)가 호향(互鄕)의 사람들과 상종(相從)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으니, 선장(先丈)을 존숭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네.’ 하였는데, 당시의 일은 선인(先人)의 전후의 상소에 하나하나를 스스로 열거하였고,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도, ‘진동(陳東)480) 이 마침내 윤곡(尹穀)481) 의 죽음을 이루게 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는 비답(批答)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득실(得失)과 시비(是非)는 자연히 후세의 정론이 있을 것입니다. 또 사람은 각각 견해가 있으니, 만약 의(義)를 처리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與否)를 논하는 데 있어서 시비(是非)를 공정하게 한다면, 비록 자손이라 하더라도 감히 사감(私憾)을 가질 수 없겠지만, 이 말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갑인년482) 에서 신유년483) 까지 8년 사이에 이곳에서나 목천(木川) 부근에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는데, 갑자기 문하로부터 전하여 나왔으니, 생각하건대 문하께 고한 자가 은밀히 선인의 자병(疵病)484) 을 드러내려는 뜻을 품고는 고의로 다른 사람을 칭탁하여 그 말을 퍼뜨리고, 어지럽게 분변하고 힐문(詰問)할 때에 한바탕 욕하고 싸움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이로써 진실로 마음이 아픔을 금하지 못하여 그 말이 나온 곳을 청하려고 글을 써 놓고는 미처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다른 사람이 이미 앙문(仰問)하였는데, 문하께서는 설파(說破)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미안함을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하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여 마침내 감히 올리지 못하였는데, 혜서(惠書)에 허황(許璜)에게 물으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문하께 의심을 두었던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습니다. 옛날 문하께서 화숙(和叔)에게 준 글에 어떤 사람의 성내어 꾸짖은 말을 인용하고, 그 곁에 강도지사(江都之事)라는 네 글자를 썼다가 도로 지웠는데, 만약 이것이 그 사람의 말이라면 이미 썼다가 도로 지운 것은 무엇 때문이며, 지우고도 볼 수 있게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뒤에 초려(草廬)485) 의 손자 이단중(李端中)이 말하기를, ‘선인(先人)이 하세(下世)하신 뒤에 문하가 초려와 회동하였는데, 문하가 묻기를, 「미촌(美村)486) 의 강도(江都)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자, 초려가 답하기를, 「설사 미진함이 있더라도 학문하기 전의 일인데, 어찌 이로써 의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문하께서 곧 옳게 여기고, 그대로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이군(李君) 희조(喜朝)가 문하의 말을 한 사우(士友)에게 전한 것이니, 문하의 물음은 초려의 물음이 되었고, 초려의 대답은 문하의 대답이 되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바깥 사람의 알 바가 아니지만, 이 일의 문답(問答)이 있었던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듣건대, 문하께 종유(從遊)하는 자가 가끔 이 일을 가지고 선인(先人)을 허물하는 구실(口實)로 삼고, 혹 제멋대로 말하며 고자(顧藉)487) 하는 바가 없으니, 이와 같으면 설사 그 말이 목천(木川) 사람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또한 문하(門下)를 승망(承望)하는 여론(餘論)일 뿐입니다. 그 뒤에 타우(打愚)가 받들어 물으니, 유수방(柳壽芳)에게서 나온 것 같이 말씀하셨다 하고, 목천 사람이 받들어 물으니 곧 조언(造言)한 것으로써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하셨다 하고, 이곳에 보내신 글에는, ‘허황(許璜)에게 들었다.’고 하셨으며, 마지막으로 태중(泰仲)이 받들어 아뢰니 초려(草廬)에게 들었다고 하셨다 하였습니다. 대저 이와 같으면 미혹(迷惑)된 마음에 비록 의심하지 않으려 하나,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송시열이 두 번째 글에 이르기를,
"보내 온 글을 스스로 볼 수가 없어서 아자(兒子)와 손자로 하여금 읽게 하여 들었는데, 아자(兒子)가 받들어 아뢰니 내가 초려에게서 들었다고 말하였다는 한 가지 절목에 이르러서는 아자가 크게 놀라며 진실로 이러한 일이 없었다고 하였네. 무릇 세간(世間)의 말에 이와 같은 것이 많은데, 비록 낱낱이 답한다 하더라도 말한 자는 한갓 무망(誣罔)한 데로 돌아갈 뿐이고, 듣는 자는 교식(矯飾)한다고 할 것이네. 이러한 까닭에 다시 고명(高明)을 위하여 이 정성스런 마음을 드러낼 뜻을 끊고 다만 이 마음을 품고 땅속에 들어가서 백세(百世)의 공의(公議)를 기다릴 뿐이네."
하였는데, 이에 윤증이 두 번째 답하기를,
"태중(泰仲)이 전하는 말에 갑인년488) 이후에는 문하께서 진실로 초려(草廬)와 회합(會合)하신 때가 없었다고 하므로, 그때에는 진실로 태중(泰仲)이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습니다. 이른바 선인(先人)의 일은 불초(不肖)의 사사로운 마음으로는 문하(門下)께 바라지 아니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속을 다하여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혼매(昏昧)한 견식(見識)에다가 민박(悶迫)한 사정(私情)에 가려져 무릇 망령되게 의혹이 생기는 것들을 어찌 모두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만약 문하께서 구의(舊義)를 미루어 생각하시고, 인정을 굽어 살피셔서 공평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헤아려서 극진하게 애린(哀憐)을 더해 주심을 입으면, 유명(幽明)이 함께 은혜를 받아서 의혹과 맺힌 것이 모두 풀어질 것입니다. 단지 문하의 한 말씀 사이에 달려 있을 뿐인데, 어찌 백세(百世)를 기다릴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송시열이 다시 회답하기를,
"요즈음 가만히 지난번의 서찰의 뜻을 자세하게 살피건대, ‘내가 앞서 한 말을 변개(變改)해서 스스로 무죄(無罪)한 지경에 이르고자 하였기 때문에 거듭 매우 엄중하게 단속하는 것 같이 하였으나, 나는 감히 이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네. 일찍이 선사(先師)에게 가르침을 받고는 안자(顔子)의 범이불교(犯而不較)489) 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마음속으로 원망과 분노를 품고서도 겉으로 겸손한 체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성심(誠心)에서 나온 것이었네. 사상채(謝上蔡)가 허물을 듣고는 부끄럽고도 두려워서 땀을 흘렸고490) 진소유(秦少游)가 경솔하여 이천(伊川)의 말을 듣고는 얼굴빛이 붉어 졌으니491) , 내가 비록 무상(無狀)하다 하나, 감히 처음에는 교식(矯飾)하였다가 마침내 또 반복(反覆)하지는 아니하네. 당초에 내가 최(崔)의 상소(上疏)를 이치에 어긋난다고 한 것은, 대개 한결같이 섬겨 죽음에 이르는 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스승과 제자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공자(孔子)와 안자(顔子) 같은 바가 있은 후에야 광(匡) 땅에서 난을 당하였을 때의 문답(問答)이 있을 것인데, 이제 추(醜)하고도 어긋난 체단(體段)으로 부자(父子)·군신(君臣)의 대륜(大倫)을 혼동해서 아울러 거론하였기 때문에, 나의 글에 말했던 것이네. 대저 그대의 지난번 글은 말의 뜻이 호건(豪健)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이제 혜서(惠書)를 받아 보니 10에 8, 9 감한 정도가 아니었네. 그러나 지난번 글의 뜻은 끝내 알지 못할 것이 있네. 이미 ‘폭양(暴揚)하지 아니함이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부형(父兄)의 원수로 본 것이네. 그런데도 하자(瑕疵)를 지적한 말을 애석(愛惜)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였는데, 이미 통박하고 통각한 마음이 있다면 애석한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오늘날 통박하고 통각하다는 논의는 비록 《춘추(春秋)》·《예경(禮經)》에 이른바, ‘반드시 보복한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나, 의(義)를 좆아서 절교(絶交)를 고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네. 구양수(歐陽脩)와 범중엄(范仲淹)492) 의 정의[契]는 지극히 깊다고 이를 만하나, 범중엄의 비문(碑文)에 구양공이 만약 없는 것을 있다고 하였다면, 주 선생(朱先生)은 말하기를, ‘충선(忠宣)493) 은 마땅히 피눈물을 흘리면서 의(義)를 좆아서 절교를 고했을 것이다.’ 하였네. 오늘날 고명(高明)의 원망하고 노여워할 일이 어찌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한 것뿐이겠는가? 또 지난번 글에 이른바 김 상서(金尙書)494) 라고 한 것은 고명이 어찌 차마 이 말을 제기(提起)하는 것인가? 당시에 김 상서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한 말은 잔인한 사람이라고 한 것뿐만이 아니었으니, 대개 그 동기(同氣)가 조용히 죽을 수 없었던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선장(先丈)이 창도(倡道)한 데에서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의 재량(裁量)할 바를 알지 못해서였던 것이네. 내가 사람들에 대하여 이를 말하였는지 일찍이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혹 내가 몹시 슬퍼하는 그의 지극한 정(情)을 불쌍히 여겨 사람들에게 말하는 즈음에 잘못 선장(先丈)에게 저촉됨을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목천(木川)의 일에 이르러서는 듣건대, 고명이 타우(打愚)에게 준 글이 귀원(貴院)에서 목천에 답한 글과는 전연 서로 다른 바가 있고, 또 전일에 그 말을 들은 사람을 보니,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머뭇거린다고 하니, 그 언근(言根)은 자연히 돌아갈 바가 있을 것이네. 그래서 곧 스스로 감당하는 외에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 들으니, 고명의 문하(門下)에서는 내가 말이 궁해졌다고 한다 하니, 나는 마음속으로 저윽이 웃었네. 김 상서와 목천의 일은 내가 이미 인복(引服)하였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고, 평일에 선장(先丈)에게 득죄(得罪)한 것은 오로지 윤휴(尹鑴)의 일에 있었는데, 대개 그 독(毒)을 맞은 것은 내가 가장 먼저이었네. 주자(朱子)를 배척하고 스스로 자기의 학설을 세워 장차 천하의 〈정론을〉 바꾸려는데 미쳐서는 외람되게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피행(詖行)을 막는다는 의(義)에 가탁하여 극력 이를 배척하였으니, 이것이 선장에게 여러 모로 미움을 사게 됨을 면하지 못한 것이네. 내가 선장에게는 비록 일찍이 내 불복(不服)한 적이 없었으나, 또한 사문(斯文)과 세도(世道)를 위하여 근심하고 탄식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네. 윤휴가 흉패(凶悖)하여 복법(伏法)된 뒤에 이르러서는 고명이 선장을 위하여 마땅히 유원규(庾元規)가 소준(蘇峻)에게 한 일495) 과 같이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후에 저윽이 듣건대, 고명이 오히려 타우(打愚)의 음양론(陰陽論)을 배척하고 그를 부호(扶護)하는 뜻이 오히려 있다고 하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한 가지 일은 비록 선장을 위하여 미움을 받으려고 하나, 할 수가 없네. 그 우미(愚迷)함을 용서해 주기 바라네. 대저 오늘날 두 집의 도리(道理)에 있어서 나는 십분(十分) 경책(警策)하여 거의 일반지규(一班之窺)에 있고, 고명에 있어서는 단지 전에 이른바 의(義)를 좆아서 절교(絶交)를 고한다[引義告絶]는 네 자가 진실로 바꿀 수 없는 일이네."
하였는데, 윤증이 또 다시 회답하기를,
"이른바, ‘거듭 매우 엄중하게 단속한다.’는 것은 또 본정(本情) 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전일 하서(下書)에 북인(北人)을 배척하여 조리가 없고 이치에 어긋난다고 하셨으므로, 저의 마음이 감복(感服)하였는데, 이제 도리어 다시 패(悖)자의 뜻을 풀이하시기를 북인을 위해 해명하는 것 같이 하시니, 윤증(尹拯)의 실망뿐 아니라, 듣고 보는 자 또한 문하께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말의 뜻이 호건(豪健)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고 하신 말씀은 더욱 지극히 황공합니다. 지난번의 글은 정(情)이 절박하고 말이 과격(過激)함으로 말미암아 이에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만약 위노(威怒)를 거두시고 굽어 용서하신다면 혹은 가긍하게 여기시고 밉게 여기지는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른바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고 한 것은 단지 저의 마음이 지극히 위축되고 절박함을 말한 것일 뿐인데, 원수로 여기는 뜻이 있다고 생각하시고 《춘추(春秋)》·《예경(禮經)》까지 끌어서 하교하시니, 몹시 놀랍습니다. ‘통박하고 통각한 마음이 이와 같다면, 애석한 마음이 어디에서 생기겠느냐?’고 하신 하교는 또 문하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신 것인 듯합니다. 평생 동안 스승을 존경해야 하는 처지에 이러한 망령된 의심이 있게 되면, 어찌 개석(慨惜)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목천(木川)의 일은 또 힘써 시교(示敎)하심을 입었으나, 당초 목원(木院)에서 이곳에 통문(通文)할 적에는 무슨 일 무슨 말이라도 말하지 아니하였고, 그때에는 도처에서 향전(鄕戰)으로 벌삭(罰削)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곧, ‘추가로 적발(摘發)하여 처벌(處罰)하는 일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답하였습니다. 그 뒤에 타우(打愚)가 방백(方伯)에게 준 글로 인하여 그 어구(語句)를 들었고, 또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 문하께서 전한 바에서 나온 것임을 비로소 알았는데, 그 자세함을 알고자 하여 타우에게 거듭 물었습니다. 그 뒤에 듣건대, 문하께서 통문(通文)에 답한 글을 찾아 가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곳에서 그 말이 나온 것을 부끄러워하여 덮어 두고 답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곳 사우(士友)들은 이 하교가 뜻밖에 나왔으므로, 모두 당초에 목천에 답한 글이 생각이 부족하여, 그것이 무슨 말과 무슨 일이 어떤 사람에게 나온 것을 묻지 아니하고, 적발하여 처벌하는 것이 타당하지 못함을 가볍게 말하여 드디어 문하의 의심하시는 바가 되었음을 한하였습니다. 윤휴(尹鑴)의 일에 이르러서는 문하께서 또 이를 제기(提起)하시리라고는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문하께서 병진년496) 에 불초(不肖)에게 답하신 글에, ‘이미 의혹을 풀었다’고 하지 아니하셨습니까? 하물며 그 사람이 죄로 죽은 뒤에 무엇을 다시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유양(庾亮)497) 과 〈같이 하지 못한 죄가〉 과연 선인(先人)에게 해당되는지 마침내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부호(扶護)한다’고 하신 데 이르러서는 역시 ‘귀신을 실은 수레498) [載鬼之車]’입니다. 타우(打愚)의 음양론(陰陽論)은 진실로 살피고 기억하지 못하나, 그 사람의 일은 일찍이 입에 올리지도 아니하였음을 스스로 알고 있는데, 타우의 와전(訛傳)과 문하의 지나친 의심으로써 또한 장차 죄인을 부호(扶護)한 율(律)을 면하지 못하겠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김 상서(金尙書) 운운(云云)한 것은 어찌 차마 이를 제기하느냐의 문책에 극도로 위축되어 용납할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에 송이석(宋彝錫)으로 인하여 이미 문하께서 이 말씀이 있었음을 들었는데, 요즈음 듣건대, 영계(令季) 서산(瑞山)과 문하의 여러 사람들이 도처에서 입에 올려 사설이 망극(罔極)하니, 어찌 한결같이 침묵하고만 있겠습니까? 김장(金丈)의 지극한 정(情)과 통박(痛迫)한 말은 그 누가 이를 비난하겠습니까마는, 김장이 일찍이 계사년(癸巳年)499) 에 한 번 선인(先人)을 찾아 와서 또한 당시의 일을 언급하고, 인책(引責)하여 벼슬살이하지 않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고, 그 동기(同氣)의 불행함을 슬퍼하였으니, 지극한 정(情)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 살신성인(殺身成人)하여 한 집안의 의열(義烈)이 밝게 빛났으니, 죽은 자는 진실로 원망과 후회가 없을 것이고, 살아 있는 사람인들 어찌 진실로 남을 허물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김장이 선인에게 참으로, ‘잔인한 사람[忍人]일 뿐이 아니다.’라고 하는 뜻이 있었다면, 이를 원망하여 매우 깊이 배척할 것인데, 또 어찌하여 손수 추천하는 글을 올려서 우리 임금을 속이고, 때로 존신(存訊)을 더하여 그 마음을 속였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불초(不肖)는 선비(先妣)께서 자결(自決)하셨을 때 선인께서 집 안에 계시지 아니하였던 것을 오히려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어제같이 역력합니다. 선인의 자의(諮議)를 사양하고 진정(陳情)하실 때에 신재 선생(愼齋先生)500) 께 답하는 편지의 한 절목에 이르기를, ‘그때에 모(某)가 여러 사우(士友)와 모여서 처신(處身)할 바를 꾀하였는데, 망처(亡妻)가 일의 급박함을 알고 여종[婢]을 보내어 모를 맞아 오게 하였습니다. 모가 이르자, 말하기를, 「적(賊)에게 죽는 것보다는 자결하는 것만 못하니, 한 번 보고 영결(永訣)하기를 원했다.」고 하므로, 모가 차마 볼 수 없어서 사우(士友)들의 처소로 돌아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선인이 집에 있지 아니한 곡절은 진실로 불초가 기억하는 바와 부합하니 이는 그 실적(實跡)입니다. 비록 김장(金丈)께서 살아 계시다고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이미 눈으로 보지 아니한 일을 가지고 전해 들은 말을 스스로 대답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김장이 이미 죽은 지 몇 해가 되었는데, 무단히 그 말을 끌어 전파하여 선인을 헐뜯고 비방하는 구실로 삼는다면 불초의 지극히 원통한 일이 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문하의 거룩한 덕에도 손상됨이 작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송시열이 또 답하기를,
"당초에 이 일이 발생할 때 내가 듣고도 듣지 못한 것처럼 하고 말았으면 도무지 일이 없었을 것인데, 감히 망령되게 한 글을 지어서 점점 갈등이 생기게 하여 마침내 수습하지 못하는 데 이르렀으니, 내가 일을 알지 못한 소치이네. 비록 뉘우친들 어찌 미치겠는가? 그러나 보내는 글에 이미 많은 허물하여 책망하는 바가 있고, 말뜻의 호건함이 전과 다름이 없으니, 마땅히 감수해야겠지만, 그 가운데에 지극히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간략하게 다시 받들어 질문하는 바이네. 주자(朱子)의 마음을 논한 바가 상세할 뿐만 아니라, 《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에 이르기를, ‘얼굴을 들어 새를 보다가 머리를 돌리니, 사람 응대 잘못되네[仰面貧看鳥 回頭錯應人]’라고 하였는데, 이제 온 글에 이른바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는 것과 이른바, ‘애석(愛惜)하다’고 한 것이 모두 한 마음속에 있는 물건이라고 하면, 주자의 말과 어찌하여 서로 어긋나는가? 비록 그대의 설봉(舌鋒)과 필세(筆勢)로써도 사람을 굴복시킬 수는 없을 듯하네. 대저 전후에 그대가 말 가운데 나의 본원(本源)과 언행(言行)을 배척한 것은 진실로 반성할 만하나, 그 나머지는 구차스럽고도 모순(矛盾)되어 억제하여 변환(變幻)하려는 것이 아님이 없으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가? 잔인한 사람이란 말에 이르러서는 그대가 무단히 제기하였으므로, 마음속으로 그윽이 괴이하게 여겨 당초에 김 상서(金尙書)의 심사를 대략 진술한 것뿐인데, 이것이 과연 이 사람의 죄인가? 김 상서의 앞뒤의 견해가 다른 것은 또한 어리석은 나로서는 감히 알 바가 아니니, 물가[水濱]에 가서 물어보는 것이 좋겠네. 어찌 또한 오하아몽(吳下阿蒙)501) 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부호(扶護) 두 글자는 그대가 몹시 꺼리고 싫어하는 바이나, 또한 사실이 있네. 기억하건대, 옛날 동학사(東鶴寺)의 모임에서 선장(先丈)께서 분명히 음양(陰陽)·흑백(黑白)의 논설이 있었는데, 그 뒤에 한 가지 일만 지적한 것이지 전체를 지적한 것은 아니라고 하여 나로 하여금 이(李)에게 사과하는 일까지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부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저 윤휴(尹鑴)는 감히 주자(朱子)를 헐뜯고 업신여겼으니, 이는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여 대인(大人)을 경멸하고 성인(聖人)의 말을 모독한 자로서, 흉악한 죄를 저지를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일모일발(一毛一髮)이라도 죄역(罪逆)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매우 우견(愚見)을 선장에게 드렸다가 득죄(得罪)한 것이 몹시 깊었네. 그러나 이를 전혀 한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네. 보내 온 글에 이른바 의혹을 품었다고 한 것은 그 어떠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경신년502) 후로 타우(打愚)의 음양설(陰陽說)을 배척한 것으로 보면 비록 의혹을 풀었다고 하나, 오해(誤解)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네. 타우가 일찍이 나에게 분명히 말하였으니, 나로 하여금 좌우(左右)를 믿고 타우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바가 있네. 온 글 가운데 사(師)라는 한 글자는 지극히 사람으로 하여금 곧 땅을 뚫고 들어가려고 하여도 할 수 없는 것이었네. 나로 하여금 이를 감수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북소(北疏)503) 때문이니, 내가 이를 아낌없이 배척하였던 것이네. 만약 그에게 준 글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람을 의심하고 의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 둘 뿐이네. 오로지 보내온 말에 이른바 죄인을 부호(扶護)한 율(律)이라고 운운한 것은 바로 화숙(和叔)에게 준 글에 이른바 ‘화복(禍福)’이라 한 두 글자와 서로 부합하는데, 이로써 사람을 협박하는 자료로 삼으려고 하니, 나는 본래 남에게 화(禍)를 입힐 마음이 없으나, 이른바 그 사람[其人]504) 에게 복습(服習)하여 사람마다 모두 이와 같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썼다가 다시 지웠지만 오히려 사람이 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한 것에 대하여 지난번의 글에 이를 잊고 답하지 아니하였는데, 이 일은 어느 때의 일인지 기억하지 못하나, 문간 선생(文簡先生)505) 께서 일찍이 《석담일기(石潭日記)》 가운데에 휴암(休菴)506) 에 관한 한 절목[款]을 손수 지우셨으나, 글자마다 오히려 분명하게 보였으니, 이것도 마음을 둠이 있다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선비(先妣)에 대해 운운한 것은 그 성효(誠孝)하는 마음에 있어 어찌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요즈음 김사보(金士輔)로 인하여 듣건대, 그대가 어머니의 죽음이 분명하지 못한 것을 주손(疇孫)507) 의 탓이라고 한다 하니, 그대가 남을 미루어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저윽이 한탄스럽네. 내가 비록 무상(無狀)할지라도 어찌 차마 허물하여 이를 본받겠는가? 대저 보내온 글에 원망과 노여움이 한층 더하여졌으니, 의(義)를 좇아 절교(絶交)를 고하는 것은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되는데, 오히려 운운하고 있으니, 우매한 나로서는 감히 알지 못할 바이네."
하였는데, 이 뒤로는 다시 왕복하지 아니하였다. 대저 윤증이 송시열에게 감원(憾怨)을 품어 온 지 오래 되었는데, 시론(時論)이 분열함을 보자, 마침내 함부로 깃발[幟]을 세우고 박세채(朴世采)에게 글을 보내어 송시열을 욕하고 헐뜯었다. 하물며 이른바, ‘신유 의서(辛酉擬書)라는 것은 【의서(擬書)는 병신년(丙申年) 최석문(崔錫文)의 상소 가운데 자세히 있다.】 극력 죄를 얽어서 기사년508) 사람의 안률론(按律論)과 더불어 한 틀에서 나온 것과 같았으니, 윤증의 견해가 본래 이와 같았다면 수십 년 머리를 숙이고 스승으로 섬긴 것은 무슨 마음이었던가? 그의 뜻이 비록 그 아비의 묘문(墓文) 때문에 원망을 품게 되었다 하나, 그 사사로운 일로 인하여 그 사람의 과실과 죄악을 늘어 놓는 것이 과연 도리이겠는가? 송시열이 그 아비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은 오로지 윤휴의 일에 있었는데, 이를 분명히 말하고 현저하게 배척하여 그 아비의 마음을 밝히지 아니하고, 도리어 송시열의 허물을 낱낱이 들어서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내는 데 여념이 없었으니, 은밀하게 윤휴를 비호하고 송시열을 배반하는 마음을 분변하기가 어럽지 아니하다. 더욱이 송시열에게 함장(函丈)과 문인(門人)의 칭호를 오히려 폐하지 아니한 채 암암리에 박세채에게 헐뜯은 그 마음가짐이 더욱 어떠한가? 송시열의 글에 답함에 미쳐서 제(齊)나라 사람의 처첩(妻妾)을 들어서 후욕(詬辱)하기까지 하였고, 또 스스로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고 하였으니, 그 의(義)를 처리하는 것을 다시 논할 것이 없다. 그런데 송시열이 두 번째 글에서 답(答)을 갖추지 아니한 채 이를 부치면서 변명하지 아니하니, 윤증은 다시 송시열이 혹 전의 견해를 변경할 것을 생각하여 그 답서(答書)에 애긍(哀矜)하고도 걸련(乞憐)하는 말을 지어, ‘만약 문하께서 구의(舊義)를 미루어 생각하시고, 인정으로 굽어 살피셔서 애련(哀憐)을 더해 주시면, 유명(幽明)이 함께 은혜를 받아서 의혹과 맺힌 것이 함께 풀어질 것이니, 단지 문하의 한 말씀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또 송시열은 첫 번째 글부터 이미 ‘의(義)를 좇아 절교를 고하라.’고 말하였는데, 윤증은 말하기를, ‘절교를 고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입니까? 만약 정의(情義)가 전과 같지 않다 하여 절교(絶交)한다고 이른다면, 세간(世間)의 교제에 절교하지 아니하는 자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얼굴빛과 태도의 음양(陰陽)이 반복(反覆)하는 것을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바가 있다. 비록 왕복한 글을 가지고 보더라도 송시열의 말은 간혹 함축성(含蓄性)이 적은 듯하나, 또한 명백하고 직절(直截)한데, 윤증의 글은 의위(依違)하고 연곡(攣曲)하여 그 정상(情狀)을 스스로 가리울 수가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또한 볼 수 있다.
8월 22일 을묘
어영 대장(御營大將) 윤지완(尹趾完)이 여러 번 불러도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자,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능행(陵幸)이 하룻밤 사이로 다가왔으니, 어영(御營)의 군사가 마땅히 도성(都城)에 머물러야 할 것인데, 윤지완이 아직 나오지 아니하였습니다. 도성에 머무는 것은 중군(中軍)이 감당할 바가 아니므로, 반드시 상명(上命)이 있어야만 바야흐로 변통할 수 있습니다. 또 융신(戎臣)의 자처(自處)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스스로 다른 것인데, 그 지위와 성망(聲望)을 믿고 이와 같이 거만하다면 완급(緩急)에 장차 어떻게 믿겠습니까? 윤지완은 자못 장점(長點)이 있고 성적(成績)이 없지 아니하나, 성품이 본래 고집스럽고 막혀서 사체(事體)가 다시 부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동가(動駕)하는 날에 만약 끝내 나오지 아니하면 별달리 처분하실 뜻을 해영(該營)에 분부하시되, 대장의 임무는 끝내 바꿀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번이나 소명(召命)을 어겼으니, 진실로 해괴하다. 다시 패초(牌招)509) 하지 말고 도성에 머무는 임무는 도제조(都提調)가 대행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수항이 또 근래에 패초하여도 나아가지 아니하는 폐단을 극진히 말하기를,
"청컨대, 이 뒤로는 군사를 거느리는 자가 패초를 어기면 반드시 군법(軍法)으로 종사(從事)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런 뜻으로 군문(軍門)에 분부하도록 명하였다. 김수항이 또 말하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진귀(金鎭龜)는 비록 연소(年少)하나 사람됨이 감당할 만한 듯한데, 다만 결과(決科)한 지 오래 되지 아니하여 먼저 두루 시험해 보지 않고 가볍게 중임(重任)을 제수하는 것은 인재(人才)를 아끼는 도리가 아닙니다. 우선 체직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8월 23일 병진
달이 동정(東井) 왼쪽 셋째 별을 범하였다.
우의정(右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차자(箚子)를 올려 윤지완(尹趾完)의 일을 말하기를,
"직임을 띠고 한가롭게 지내게 하는 것이 비록 성군(聖君)의 큰 도량(度量)이라 하더라도 장신(將臣)을 제어하는 방술은 아니며, 불러도 오지 아니하는 것이 비록 곧은 신하의 아름다운 절개라 하더라도 군사(軍事)를 맡은 도리는 아닙니다. 달려 나아가는 것들로써 공손함을 삼지 않는 것은 또한 빈사(賓師)의 자리에 있는 자의 할 수 있는 바이고, 문무를 행하는 개주(介胄)510) 의 무사(武士)가 감히 이 의(義)를 좇아서 자처(自處)하였다 함은 일찍이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윤지완의 고집하는 바 혐의스러움이 이미 법전(法典)에 실려 있지는 않지만, 성상의 유시(諭示)가 빈번하였는데도 마침내 명을 받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바로 스스로 자신만 편하고자 도모하는 것으로서, 나라와 몸을 일체로 보는 의리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만약 체직을 허락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기신다면 엄한 말씀으로 준책(峻責)하셔서 곧 직무를 보게 하실 것이며, 만일 거만하여 명령을 업신여기는 것을 불가하다고 여기신다면, 또한 마땅히 견벌(譴罰)하여 군정(軍政)을 엄숙하게 해야 할 것인데, 이제 물러가게 하고는 상신(相臣)으로 하여금 그 임무를 대행하게 하시고, 윤지완에게는 마침내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조정의 사체(事體)가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경상도 전 감사(監司) 서문중(徐文重)은 그 치적이 자못 드러나서 물정(物情)이 모두 애석해 하니, 바라건대, 다시 묘당(廟堂)에 물어서 잉임(仍任)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어영 대장의 일은 이미 처분하였고, 잉임(仍任)하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답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융신(戎臣)이 자처(自處)하는 의(義)는 다른 사람과 스스로 다른데, 윤지완(尹趾完)이 법전(法典)에 없는 혐의를 억지로 끌어대어 병을 핑계하고 들어가서 무릇 군무에 관계된 것을 일체 포기하니, 전후에 효유(曉諭)한 바가 정녕(丁寧)할 뿐만 아니다. 산릉(山陵)의 거둥이 단지 하룻밤 사이에 격해 있는데도 네 차례나 패초(牌招)를 어기고 누워서 일어나지 아니하니, 그 뜻이 인혐(引嫌)에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체직을 도모하여 일신을 편케 하려는 계책이다. 이것이 어찌 정성을 다하여 나라와 몸을 동일시하는 뜻이겠는가? 더욱 지극히 한심스럽다. 마땅히 엄한 견벌(譴罰)을 더하여 군정(軍政)을 엄숙하게 할 것이나, 다만 그 원하는 바를 적중케 할 뿐이니, 이 뜻을 분부하여 빨리 임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니, 윤지완이 곧 군중(軍中)에 나아가 군사 일을 보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가(大駕)가 교외(郊外)에 나가면 총병(摠兵)이 도성에 머무니,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임무인데, 장부(將符)를 차고 있는 자가 인혐(引嫌)하여 네 번이나 부르는 명이 내려진 속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인가? 오늘날 조정으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기율(紀律)이 있게 하였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하였겠는가? 식자(識者)가 이를 한심스러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5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8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정론-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 역사-사학(史學)
[註 510] 개주(介胄) : 갑옷과 투구.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가(大駕)가 교외(郊外)에 나가면 총병(摠兵)이 도성에 머무니,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임무인데, 장부(將符)를 차고 있는 자가 인혐(引嫌)하여 네 번이나 부르는 명이 내려진 속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인가? 오늘날 조정으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기율(紀律)이 있게 하였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하였겠는가? 식자(識者)가 이를 한심스러워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능행(陵幸) 때에 배종(陪從)하는 여러 신하 및 좌상(左廂)·우상(右廂)의 장수로서 만일 화곡(禾穀)을 밟아 손상하는 자가 있으면, 명령을 어긴 율(律)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申飭)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4일 정사
임금이 산릉(山陵)에 거둥하여 망릉례(望陵禮)를 행하였다. 최복(衰服)으로 능에 올라가서 곡(哭)하는데, 곡성(哭聲)이 그치지 아니하다가 잠시 통곡하는 데 이르니, 승지(承旨)가 여러 번 곡을 그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장(杖)을 붙들고 신릉(新陵) 왼쪽에서 서서 슬퍼하는 눈물이 번갈아 흘러 내리니, 가까이 모신 여러 신하로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명하여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과 산릉의 일을 감독한 여러 신하 남용익(南龍翼) 등을 불러서 대장(大葬) 때에 보토(補土)한 곳을 물으니, 여러 신하가 매우 자세하게 대답하였다. 임금이 신릉(新陵)을 봉심(奉審)한 뒤에 먼저 소포대(素袍帶) 차림으로 구릉(舊陵)에 제사를 행하고, 최복(衰服)으로 고쳐 입고 신릉에 제사를 행하고, 돌아와 주정소(晝停所)511) 에 이르러 좌의정(左議政) 민정중(閔鼎重)을 인견(引見)하였다. 민정중은 이때 병으로 재고(在告)512) 하였는데, 임금의 알릉(謁陵)하는 때를 당하여 스스로 일찍이 총호(摠護)를 맡았던 사람으로서 감히 집에 있을 수 없다 하여 능소(陵所)에 나아갔는데, 임금이 먼저 여기에 와서 기다리게 하였다가 불러 보고 위유(慰諭)하였다.
8월 25일 무오
사간원(司諫院)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제도(諸道)의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입고도 전재(全災)513) 에 들지 못한 곳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호남(湖南)의 예(例)에 의하여 분재(分災)514) 를 헤아려 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이를 품처(稟處)하게 하자,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제도의 수전(水田)에 모두 분재(分災)를 주는 일은 겨우 호서(湖西)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이미 정탈(定奪)이 있었습니다."
하니, 대계(臺啓)도 그쳤다.
신계화(申啓華)를 헌납(獻納)으로, 박세준(朴世𤎱)을 지평(持平)으로, 이후정(李后定)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수릉관(守陵官) 전성군(全城君) 이준(李濬) 이하에게 각각 1자급(資級)을 더하도록 명하였는데, 3년 안의 능행(陵幸)에 특명으로 가자(加資)하는 것은 대개 구례(舊例)이다.
교리(校理) 이이명(李頤命)·사직(司直) 김창협(金昌協)·병조 좌랑(兵曹佐郞) 조상우(趙相愚)를 제도(諸道)에 보내어 암행(暗行)하면서 염찰(廉察)하게 하였는데,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유시(諭示)하기를,
"수령(守令)을 염문(廉問)하는 외에 또한 재황(災荒)의 실상을 자세히 알고자 하는데, 너희들은 민간에 드나들며 농사의 형지(形止)를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니, 혹시 교활한 관리로서 간사한 짓을 하는 자와 호우(豪右)로서 침병(侵倂)하는 자를 아울러 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도 광주(光州) 사인(士人) 최석윤(崔錫胤)·능주(綾州)의 백성 양계춘(楊戒春)·창평(昌平)의 백성 귀현(貴賢) 등은 온 들이 적지(赤地)가 된 것을 나가 보고 돌아와서 그 처노(妻孥)와 서로 마주 보고 울다가 스스로 죽었는데, 도신(道臣)이 이를 아뢰자, 임금이 듣고 몹시 놀라고 측은하게 여겨 별도로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경기(京畿) 장단(長湍) 등 일곱 고을에 우역(牛疫)으로 7백여 마리가 죽었다.
8월 26일 기미
훈련 대장(訓鍊大將) 신여철(申汝哲)이 이틀의 휴가를 얻어서 부모의 분묘에 가서 성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인하여 역마를 타고 갔다가 돌아오게 하였다. 신여철이 두 번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윤지완(尹趾完)을 특별히 제수하여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삼았다. 임금이 영백(嶺伯)에 마땅한 사람을 얻기 어려워하였고, 윤지완이 여러 번 대장의 직임을 사양하여 나라의 체통을 떨어뜨렸으나, 전에 이 도(道)를 맡아서 성적(聲績)이 없지 아니하였으므로, 진정(賑政)을 맡기면 반드시 잘 계획할 것이라고 하여 독촉해 열흘 안에 떠나게 하였다.
8월 27일 경신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 밑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들어갔다.
8월 28일 신유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김만중(金萬重)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신계화(申啓華)를 부교리(副校理)로, 이여(李畬)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8월 29일 임술
태백성(太白星)이 미방(未方) 땅에 나타났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윤지완(尹趾完)을 외번(外藩)으로 특별히 제수한 것이 비록 좌천(左遷)이라고는 하나, 조가(朝家)에서 가려서 임명하는 것은 본래 견벌(譴罰)과는 다른 것이니, 장차 어떻게 군정(軍政)을 엄숙하게 하고, 후폐(後弊)를 막겠습니까? 국체(國體)가 점점 무너지고 조강(朝綱)이 떨치지 못하여 물의(物議)가 자못 불쾌(不快)해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어영 대장[御將]은 오래 비워 둘 수가 없습니다. 전에 의망(擬望)했던 자가 이세화(李世華)와 이인하(李仁夏)인데, 이세화는 부사(副使)에 차임(差任)되었고, 이인하는 대론(臺論)을 입었으니, 모두 의망할 수 없습니다. 서문중(徐文重)·유상운(柳尙運)·이사명(李師命) 세 사람은 간국(幹局)이 있다고 칭찬받는데, 서문중은 일을 하는 것이 신밀하고, 두루 시험하여 직임에 적합하였으니, 이는 예간(睿簡)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문중이 조정에 돌아올 날이 가까와졌는데, 어찌 이 임무에 합당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서문중(徐文重)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고, 특별히 병조(兵曹)로 하여금 전례(前例)를 상고하여 재촉하게 하고, 이튿날 또 하교하여 윤지완(尹趾完)으로 하여금 당일 사조(辭朝)하게 하였는데, 대개 서문중이 교인(交印)한 뒤에야 올라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 조사석(趙師錫)이 윤지완을 외직(外職)에 보임(補任)한 것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여 여러 번 상소하여 사면하기를 빌었는데, 그 뒤에 임금이 하교하여 엄하게 꾸짖으니, 조사석이 비로소 명을 만들었다.
진산군(珍山郡)의 태조(太祖)의 태실(胎室)이 공주(公州) 경계에 있는데, 간사한 백성이 함부로 이 땅을 경작하고 나무를 베었으므로, 양호(兩湖)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이를 중하게 다스려서 금단(禁斷)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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