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61

광해군일기[정초본]130권, 광해 10년 1618년 7월

7월 1일 정해전교하였다. "비변사 당상 이경전(李慶全)이 의주로 내려갈 때 경유하는 일로에 마부와 말을 급급히 조발하여 정돈해 두고 즉각 교대하게 할 일을 삼도(三道)의 감사와 병사에게 하유하라. 또 선전관 한 사람을 같이 내려 보내서 이경전이 강을 건넌 뒤에 올라오게 할 일을 살펴 시행하라.""비변사 당상 이경전(李慶全)이 의주로 내려갈 때 경유하는 일로에 마부와 말을 급급히 조발하여 정돈해 두고 즉각 교대하게 할 일을 삼도(三道)의 감사와 병사에게 하유하라. 또 선전관 한 사람을 같이 내려 보내서 이경전이 강을 건넌 뒤에 올라오게 할 일을 살펴 시행하라." 전교하였다. "대장군전(大將軍箭)·진천뢰(震天雷)·독시(毒矢)·석류화전(石榴火箭)이 모두 전쟁에 쓰기에 합당한데 어찌하여 만들어 쓰지 않는가. ..

광해군일기[정초본]117권, 광해 9년 1617년 7월

7월 1일 계해일식이 있었다. 영의정 기자헌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개에, "신궐의 역사가 적당한 때가 아닌데 큰 역사를 일으킨 것이기는 하나, 참으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귀사(鬼邪)가 끊이지 않아서 서별궁을 또 영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금년의 영건은 갑작스러운 데에서 뜻밖에 나와 새 곡식이 익기도 전에 부득이 쌀과 포목을 납부하라고 독촉하는 차관(差官)을 보내게 되었으며, 농삿일이 바야흐로 한창인 때에 부득이 벌목하고 재목을 끌어내리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양궁(兩宮)의 역사를 한꺼번에 거행할 경우에는 한갓 때가 좋지 않은데 큰 역사를 일으키는 것일 뿐만이 아니어서 신은 삼가 걱정스럽습니다. 창경궁(昌慶宮)의 경우에는 수채를 파..

광해군일기[정초본]105권, 광해 8년 1616년 7월

7월 2일 경오왕이 친국(親鞫)하였다. 전교하였다. "반역(反逆)을 도모한 곡절, 거사(擧事) 절차, 주동자는 누구인지, 추대할 자는 누구인지, 복심 및 동지들은 누구인지를 하나하나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면 지난해에 승복한 죄인을 처리했던 전례를 따라서 별도로 처리하겠다는 뜻으로, 상세하게 최유석(崔有石)을 깨우쳐 타이르도록 하라.""반역(反逆)을 도모한 곡절, 거사(擧事) 절차, 주동자는 누구인지, 추대할 자는 누구인지, 복심 및 동지들은 누구인지를 하나하나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면 지난해에 승복한 죄인을 처리했던 전례를 따라서 별도로 처리하겠다는 뜻으로, 상세하게 최유석(崔有石)을 깨우쳐 타이르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역적 최기가 김기, 박계운 등 여러 역적들과 함께, 고변한 사람을 죽여서 서둘러 자..

광해군일기[정초본]91권, 광해 7년 1615년 7월

7월 1일 병오【상이 조직(趙溭)의 상소를 정원에 내리고 이어】 전교하였다. "‘조종조 때부터 대비께서 별궁(別宮)에 따로 거처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대비를 떠받들고 호위함이 전날과 다름이 없고 궁중에도 또한 요사스런 귀신의 변고가 없는데, 네가 운운한 것은 무슨 뜻인가? 너는 어찌 감히 조정에 사람이 없음을 다행으로 여겨 함부로 흉한 소를 올려서 임금을 모욕한단 말인가. 이것은 너 혼자서 한 일이 아니라 반드시 사주한 간흉이 있을 것이다. 하늘이 굽어보고 있으니 바른 대로 대답하라.’는 내용으로 전교하고 조직을 불러 추문하여 아뢰라." 정원이 아뢰었다. "조직에게 물으니 ‘조종조 때부터 자전께서 별궁에 지처하신 적이 비록 한두번이 아니라고 하나, 신은 후세에 태어났는데 어떻게 조..

광해군일기[정초본]80권, 광해 6년 1614년 7월

7월 2일 임자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왕이 정온(鄭蘊)을 국문하기를, "모후(母后)를 폐위한다는 말을 네가 누구한테서 들었는가? 정항(鄭沆)의 의심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누구한테서 들었는가? 이실직고하라." 하니, 권진이 아뢰기를, "정온은 앞서 이미 공초를 받았는데, 지금 두사(頭辭)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자, 왕이 다시 문초하라고 하였다. 이에 권진이 분부에 따라 자세히 캐물으니, 정온이 대답하기를, "윤인(尹訒)·정조(鄭造)의 계사 가운데 ‘모후로 대우할 수 없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신도 이 말에 따라 그렇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정항의 의심스러운 일은 그의 장계 가운데 ‘밖으로부터 밥을 주었다.’는 말이 있었고, 지난 3일 병에 걸린 뒤에 즉시 장계를 올렸더라면 성상께서 반드시 때맞추..

광해군일기[정초본]68권, 광해 5년 1613년 7월

7월 1일 정사순녕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이 상소하여 이의(李㼁)를 주벌하자고 청하고, 또 대신과 종실이 아뢰던 일을 정지한 실책에 대하여 언급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의리에 격분한 뜻을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다만 나는 임금답지 못한 자질로 죄려가 심중한 데다가 이 큰 변란을 만났으므로 가슴 아프게 여길 뿐인데 어떻게 이의를 처치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골육(骨肉)을 서로 해치는 일은 나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니, 대신이 아뢰던 일을 정지한 것은 실로 나의 뜻을 체득한 것이다. 대신은 이미 아뢰던 일을 정지하였는데 경들은 어찌 굳이 논핵하려 드는가. 경은 안심하고 직무를 담당하여 과매한 나를 멀리하여 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차자를 살펴보고 의리에 격분한 뜻을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광해군일기[정초본]55권, 광해 4년 1612년 7월

7월 1일 계사한성부가 아뢰기를, "역적 유영경(柳永慶)·김대래(金大來)·이홍로(李弘老) 등의 집을 헐어버리고 못을 파는 일로, 본부가 승전(承傳)에 따라 문기(文記) 및 장적(帳籍)을 가져다 상고하니, 영경의 평소 살던 집은 동부 숭교방(東部崇敎坊)에 있는데 빈 대지 및 행랑 10여 칸만 있고, 난리 이후에 살던 집은 남부 성명방(南部誠明坊)에 있는데 이는 곧 영경의 처조카인 전 승지 황시(黃是)가 유정량(柳廷亮)에게 별급(別給)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기가 관을 거치지 않았으며, 또 병오년 장적에는 영경의 이름으로 입적되었고, 무신년에 영경이 죄를 입은 후 기유년 장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량의 이름으로 입적되었습니다. 황시는 정량의 이성(異姓) 사촌 대부이니 별급의 문서를 만들 수 없으며, 법전 ..

광해군일기[정초본]43권, 광해 3년 1611년 7월

7월 1일 무술강원도에 충재(蟲災)가 있었는데, 평해군(平海郡)에는 벌레가 내림이 더욱 심했다. 【정족산사고본】 10책 4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1책 639면【분류】농업-농작(農作)ⓒ 한국고전번역원 7월 2일 기해경기 고양(高陽) 등 여러 고을에 가뭄이 들어 벼가 손해를 입었다. 【정족산사고본】 10책 4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1책 639면【분류】농업-농작(農作) / 과학-천기(天氣)ⓒ 한국고전번역원 7월 3일 경자예조가 아뢰기를, "자전께서 이어하실 창덕궁의 방위가 올해에는 오귀(五鬼)057) 가 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술가(術家)의 얘기를 그대로 믿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오귀라고 한 이상, 자전께서 이어(移御)하실 수는 없으니, 세말(歲末)에 다른 날짜를 다시..

광해군일기[정초본]31권, 광해 2년 1610년 7월

7월 1일 갑진전교하기를, "원접사의 장계【원접사(遠接使)의 장계(狀啓)에서 책사(冊使)가 은(銀)을 요구한 일을 말하였다.】 를 가지고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라." 하니, 영상 이덕형은 의논드리기를, "사신 유용(劉用)이 데리고 왔던 은을 계산하는 사람이 지금 다시 상공(相公)으로서 나왔으니, 그 당시 선사한 수량을 모를 까닭이 없습니다. 그가 평안도에 들어왔을 때 전보다 많이 감하여 주었으니, 부족하게 여겨 원망을 한 것은 당연합니다. 더구나 개독례(開讀禮)에서 뇌물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항으로서 사신 유용이 이것을 핑계하여 전후로 은 5천 냥, 파삼(把蔘) 4백 근을 받았습니다. 욕심이 한이 없는 자들이 이것을 그냥 지나치겠습니까. 이 상황에서는 사리로 설명하기 어려울 ..

광해군일기[정초본]18권, 광해 1년 1609년 7월

7월 1일 경진비변사가 아뢰기를, "서로(西路)와 경기 지방에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금년의 한재는 더욱 절박합니다. 노추(奴酋)는 날로 치성해지는데 서쪽 백성은 날로 곤궁해지니, 강변(江邊)의 방비 역시 그만두기 어렵습니다. 거기다가 금년에는 조사의 행차로 가난한 집의 저축이 남김없이 탕갈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염려됩니다. 이제 공사간의 비축에 믿을 만한 것이 없게 되었는데, 구황 정책 열한 가지 가운데 첫째가 시사(施舍), 그 다음이 곡식을 옮기는 것이고 별달리 새롭고 기이한 방도가 없으니, 조정에서 비록 심력을 다하고자 하더라도 손을 댈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또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으면서 구제하지 않아 죽게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되니 해조로 하여금 먼저 진휼사(賑恤使)를 차출하여 미리 ..

광해군일기[정초본]6권, 광해 즉위년 1608년 7월

7월 1일 을유예조가 아뢰기를, "졸곡(卒哭) 뒤 대사(大祀)에 음악을 사용하는 일에 대하여, 대신(大臣)들의 의논은 이러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졸곡 뒤 대사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이미 선왕께서 확정한 제도가 있으니, 예관(禮官)이 역대에서 이미 거행하였던 예를 널리 고찰하여 참작해서 처리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오례의(五禮儀)》에서 말한 졸곡 뒤 대사에 음악을 사용한다는 것은, 단상(短喪)의 제도를 참작 사용하여 이미 제사가 이루어졌으면 애례(哀禮)가 이미 감쇄되었으니, 그 성대한 일에 있어서 부득불 길례(吉禮)로써 거행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미 고례(古禮)로써 상복을 입었고 보면, 인종과 명종 양묘(兩廟)의 입장에서 볼 때 중복(重服)이 아직 남아 있어 상..

인조실록49권, 인조 26년 1648년 7월

7월 1일 갑자평안 감사 정치화(鄭致和)가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시매(李時楳)를 아뢰어 파직시키게 했다. 시매가 변방의 고통스러움을 싫어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려고 도모하였으나 방법을 찾지 못했다. 6월 6일에 마침 큰비가 내려 압록강 물이 불어나 진선(津船) 10여 척이 떠내려갔는데, 시매가 치화에게 이를 인하여 파직되어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치화가 드디어 이런 내용으로 계문하여서 파직된 것이다. 7월 3일 병인전 이조 참판 김영조(金榮祖)가 졸하였다. 영조는 안동(安東) 풍산인(豊山人)이다. 형제가 모두 아홉 사람이었는데 그 가운데 다섯 사람이 문과에 급제했으니, 과제(科第)의 성대함이 근세에 없던 것이었다. 혼조 때 정치가 혼란하여지자 영조는 향리로 물러..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 1647년 7월

7월 1일 경자유성이 방성(房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7월 2일 신축최혜길(崔惠吉)을 대사헌으로, 유석(柳碩)을 좌부승지로, 이시만(李時萬)을 사간으로, 목성선(睦性善)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사간 이시만이 상소하기를,"지금 이 궁궐을 옮겨 짓는 거조는 대개 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습니다만, 영건하는 역사가 극히 큽니다. 저것을 철거하여 이것을 짓는 것이어서 공력이 조금 줄어진다 하지만, 그 칸수를 헤아려보면 1천여 칸이나 됩니다. 하늘이 노하고 백성이 원망하는 때에 이같은 토목 공사를 한다는 것은 전혀 재해를 당해 반성하고 두려워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대내에서 아주 가까운 없어서는 안 될 것을 먼저 짓게 하고, 이 밖의 아문(衙門)은 우선 짓지 말고 내외의 ..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7월

7월 1일 을사태백이 나타났다. 7월 2일 병오조경(趙絅)을 도승지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성으로, 이시만(李時萬)을 수찬으로, 홍중보(洪重普)를 검열로 삼았다. 혹서기라서 전옥서(典獄署)의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7월 3일 정미유성이 우성(牛星) 위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또 위성(胃星) 아래에서 나와 옥정성(玉井星) 위로 들어갔다. 상이 대신 및 비국 당상과 양사 장관을 인견하고 이르기를,"지난번 풍재(風災)가 참혹했는데, 또 태백이 낮에 나타나는 경계를 보이니, 앞으로 무슨 사변이 일어날지 모르겠다."하니, 영의정 김자점이 나아가 아뢰기를,"지난번의 바람은 예전에 없던 재해였습니다. 삼남의 조운선(漕運船)이 전복되어 유실된 곡식이 거의 1만여 석에 이릅니다. 게다가 태백이 연일..

인조실록46권, 인조 23년 1645년 7월

7월 2일 신해강원도 안협(安峽)·이천(伊川)에 폭우가 내렸는데, 이천 지역에는 홍수가 밀려 들어서 인가(人家)가 물에 뜨거나 잠기고, 죽은 사람이 거의 20여 인이나 되었다. 감사가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귀에 거슬리는 말을 아뢰자마자 듣기 싫어하는 기색이 대번 드러나며,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남을 이기기 좋아하는 습관을 다스리지 못한 것이 바로 전하의 병근(病根)이니, 반드시 마음을 함양하되 고요한 속에서 그 마음을 지키고, 사욕을 극복하되 행동하는 사이에서 그것을 다스리며, 강직한 논의를 듣기 좋아해서 선(善)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고, 의리를 깊이 살펴서 이기기 좋아하는 사심을 버리소서."하고, 또 말하기를,"전하께서는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