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738

정조실록26권, 정조 12년 1788년 12월

12월 1일 무자전교하였다."북도 백성들의 일을 어찌 근일에 조정의 모양이 어지럽다 하여 잠시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한겨울을 당하여 큰 눈이 계속 내리므로 초근 목피로 연명하는 북도 백성들이 손을 써서 입에 풀칠할 방도가 없을 것인데, 세전(歲前)에 식량을 공급해 구제하는 일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가? 양정(量停)한 이외에 이미 받아들인 것이 얼마이며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얼마나 되는가? 창고에 남아 있는 곡식이 환곡·구제곡·종자곡(種子穀)을 충당할 수는 있는가? 금년조(今年條)의 세곡(稅穀)·환곡 등을 설령 다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곡식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 결실이 된 것도 충해(虫害)로 상하여 목에 넘기자마자 구역질이 난다고 하니, 이런 곡식을 강제로 나누어 주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할 수 없다. 현..

정조실록26권, 정조 12년 1788년 11월

11월 1일 기미경모궁에 전배하였다. 관서(關西)에 저장해 두었던 묵은 면포(綿布) 수백 동(同)을 가져다가 값을 낮추어 오부(五部)의 군민(軍民)들에게 산매(散賣)하고서, 그 돈을 백성들에게 대여(貸與)하였다. 이때 면포가 크게 부족한데다 돈마저 귀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널리 은혜를 베푸는 정사를 한 것이다. 11월 3일 신유사간 심협(沈埉)이 상소하기를,"과거의 폐단을 혁신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식년과(式年科)를 보일 경우, 안으로는 서울의 각사(各司)와 밖으로는 8도에서 실지로 재능있는 사람을 정선(精選)하여 다시 수정해 책으로 만들어 태학(太學)에 보고하면 예조는 그 책을 상고하여 회시(會試)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하고, 만일 글을 잘하지 못하면서 외람되이 참여한 자가 있을 경우 중벌로 엄히 다스..

정조실록26권, 정조 12년 1788년 10월

10월 1일 기축윤대하였다. 10월 2일 경인태묘(太廟)에 나아가 동향(冬享)에 쓸 희생과 그릇들을 살펴보았다. 특명으로 교리 이의봉(李義鳳)을 신천 군수(信川郡守)로 보임하였다. 인의(引義)하고서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월 3일 신묘차대하였다. 북관 위유 어사(北關慰諭御史) 정대용(鄭大容)을 불러 보았다. 대용이 아뢰기를,"민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곡물(穀物)을 미리 획급(劃給)하는 데 달려 있으니, 계묘년의 전례에 따라 남관(南關)의 곡식 2만 석을 우선 획급하여 곡식을 옮겨다가 진휼(賑恤)하는 밑천으로 삼게 하소서."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북관의 삼수군전(三手軍錢)과 삼가포(蔘價布)를 유치(留置)하였다가 진휼하는 밑천으로 삼은 예가 있었으니, 이 예에 따라 시..

정조실록26권, 정조 12년 1788년 9월

9월 2일 경신모화관(慕華館)에 가서 서총대 시사(瑞葱臺試射)를 행하였다. 돌아오다가 경희궁(慶熙宮)으로 거둥하였다. 9월 3일 신유경희궁에서 서총대 시사를 설행하여 등수를 나누어 상을 주고,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9월 4일 임술이명식(李命植)을 판의금부사로, 오재순(吳載純)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수찬 심흥영(沈興永)이 상소하기를,"선공감(繕工監) 봉사(奉事) 민치화(閔致和)는 간교하고 교활한 성품으로 일찍부터 잇구멍을 뚫었습니다. 그 지체로 말하면 흠이 있고, 그 관직으로 말하면 낮습니다. 그러나 동문(同門)의 정의(情誼)를 빙자하여 이미 절교한 친구를 팔기도 하고, 일가의 권세를 믿고서 면대해 승낙한 친척을 속이기도 하였습니다. 근거없이 떠도는 말로 허풍을 쳐서 세상 사람들을 속여 호리고, 이 ..

정조실록26권, 정조 12년 1788년 8월

8월 1일 경인상이 유사 당상 서유린(徐有隣)과 하직하는 수령을 불러 보았다. 상이 건봉사(乾鳳寺) 중의 폐단을 전주 판관(全州判官) 이최원(李最源)에게 물었다. 건봉사는 간성(杆城)에 있는데, 최원이 전직 간성 군수였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이 절은 중요함이 여느 절과 다르다. 이미 열성조(列聖朝)의 어필(御筆)을 봉안하였으니, 지금에 미쳐 소생시키고 구제하는 일을 잠시도 늦출 수 없다. 이른바 궁납(宮納)과 잡비(雜費)가 면세(免稅) 받은 전결에서 생산되는 것에 비하여 10배뿐만이 아니라 하니, 이미 그런 말을 듣고서 어찌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특별히 아울러 탕감하라. 그리고 당해(當該) 궁(宮)에서 만일 다른 방도로 수탈하는 폐단이 있거든 순영(巡營)은 그 사실을 보고하라. 궁납의 폐단이 없어..

정조실록26권, 정조 12년 1788년 7월

7월 3일 계해가평군(加平郡) 축령산(祝靈山) 밑에 장용영(壯勇營)의 둔토(屯土)가 있는데, 이곳은 바로 척화신(斥和臣) 고 참판 충장공(忠壯公) 홍처후(洪處厚)가 터잡고 살던 곳으로 누대(累代)를 전해온 땅이고, 호조에서는 공세(公稅)만을 거두었다. 그러다 이 땅이 장용영에 귀속되자, 상이 듣고 전교하기를,"이곳은 충장공이 살던 곳이니, 비록 자손들이 쇠퇴하여 토지를 잃게 되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는 마땅히 당(唐)나라 임금이 정공(鄭公)의 집을 속(贖)해준 고사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대대로 지켜 내려와 제택(第宅)이 여전하니, 가령 사냥터가 움푹하게 줄어들고 세액(稅額)의 총액이 준다고 하더라도 이것과 저것에는 자연 경중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충장공의 가문에 다시 도사 홍언섭(洪彦燮)..

정조실록25권, 정조 12년 1788년 6월

6월 1일 임진윤대(輪對)하였다. 병조 판서 이갑(李𡊠)을 함사 중추(緘辭重推)하고, 포장(捕將) 조심태(趙心泰)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순청(巡廳)이 아뢰기를,"야간 순찰 때 궁성 밖 각처 군보(軍堡)의 군사들이 대답한 군호(軍號)가 한결같이 잘못되었는데, 이는 대개 군호를 반포할 때 문자를 오인(誤認)하여 다른 음으로 잘못 전했기 때문인 듯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오인이 무식에서 기인한 것이나, 잘못 반포한 것은 크게 뒷폐단에 관계된다."하고, 드디어 이 명을 내렸다. 6월 2일 계사병조 판서 이갑을 해임(解任)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군호가 잘못 전해진 일로 장령 권평(權坪) 등이 논계했기 때문이다. 정창성(鄭昌聖)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선혜청 당상 이재간(李在簡)이 상소해 사정을 진달하니, ..

정조실록25권, 정조 12년 1788년 5월

5월 1일 임술일식이 있었다. 친히 혼궁(魂宮)에 삭제(朔祭)을 지내고,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각 전궁(殿宮)에 날마다 바치는 생치(生雉)를 꿩이 떨어져 없을 때에는 산 닭을 대신 바치라고 명하고, 이어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대사헌 이도묵(李度黙), 대사간 안성빈(安聖彬)이 연명해 상차하여 조시위(趙時偉), 김우진(金宇鎭), 정집(廷楫), 유온(乳媼)에게 전형(典刑)을 시행하라고 청하니, 따르지 않았다. 관학 유생 맹현대(孟賢大) 등이 상소해 김우진과 조시위의 역절(逆節)에 대해 논하고, 이어 아뢰기를,"연루된 노비를 앞질러 죽였기 때문에 증인이 없어졌으니 조사를 맡았던 포장(捕將)은 행적이 수상하고, 힘써 약원(藥院)을 비호하여 감히 몰랐다고 핑계하였으니 진소(陳疏)한 유신(儒臣)들은 무슨 마..

정조실록25권, 정조 12년 1788년 4월

4월 1일 계사윤대(輪對)하였다. 4월 2일 갑오주강(晝講)하고서 이어 차대(次對)하였다.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사직 기곡 대제(社稷祈穀大祭)의 제물값으로 가미(價米) 41석을 더 정하였는데, 원공(元貢)에 남은 쌀을 그 쪽으로 전용(轉用)하기를 계청하니, 전교하기를,"해마다 기곡제에 품계를 높여 크게 제사하는 것은 백성을 위해 농사를 중하게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대동미(大同米)가 비록 경용(經用)에 관계된 것이나, 백성들에게 거두어 백성들의 힘을 펼 수 있게 하는 것이니, 지금 이 제사의 제수(祭需)를 정함에 있어 어찌 그 수입을 계산하겠는가. 남은 수가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모두 신공(新貢)으로 가정(加定)해서 농사를 중하게 여기는 것이 백성을 위한 뜻임을 보이라."하였다. 이도묵(李度..

정조실록25권, 정조 12년 1788년 3월

3월 1일 계해윤음을 내려 무신년의 충신과 공신을 수록(收錄)하라 하였다. 과거 영묘(英廟) 무신년에 역적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하여 적신(賊臣) 김일경(金一鏡)의 잔당인 박필현(朴弼顯)·박필몽(朴弼夢) 등과 서로 성원(聲援)하기로 언약하고서 영남·호서로부터 곧장 경기를 침범하니 서울이 술렁였는데, 영묘께서 오명항(吳命恒) 등에게 명하여 토벌해 평정시키고는 이들을 양무 공신(揚武功臣)으로 훈적에 기록하였다. 상은 금년 3월이 그 60주년이 되는 달이므로 영묘의 공덕을 추모하여 장차 공신들에게 추은(推恩)하려 하였다. 시임 판중추부사 이재협(李在恊)이 양무 공신 이보혁(李普赫)의 손자이므로 상이 재협에게 명하여 무신 군공인(戊申軍功人)을 초록(抄錄)해 아뢰게 하였다. 그리..

정조실록25권, 정조 12년 1788년 2월

2월 1일 갑오대사헌 윤승렬, 대사간 유강 등이 아뢰기를,"오익환(吳翼煥)이 잠규(箴規)를 가탁해서, 감히 우리 전하께서 좋아하는 사람은 진짜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미워하는 사람은 진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여, 마치 우선은 허여하지만 장차는 잡아 죽이고자 하고, 속으로는 비호하면서 겉으로는 배척함이 있는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이런 참독한 말로 만화(萬化)의 근원이신 전하를 비난하여 온 세상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켜 상하의 마음이 서로 불신하고 피차의 틈이 점점 깊어지게 하여 반드시 남의 국가를 해치고야 말고자 하였습니다. 다만 뜻이 분명하지 않고 말이 모호하므로 즉시 간파하지 못하여, 옥당의 소가 먼저 일어나게 한 것은 신들의 죄입니다."하고, 드디어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출사를 명..

정조실록25권, 정조 12년 1788년 1월

1월 1일 갑자승지들을 중희당(重熙堂)에서 불러 보고, 부모가 있는 사람은 일찍 퇴근하라고 명하였다. 팔도와 사도(四都)에 윤음(綸音)을 내렸다."농사는 백성들의 생업(生業)이니 농사를 부지런히 하는 일을 권장할 필요도 없을 것 같으나, 정월 초하루에 반드시 권농(勸農)의 전교를 내리는 것은 진실로 성질이 부지런한 사람도 있고 게으른 사람도 있으며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고 게으른 자들은 권면하지 않으면 어찌 추수(秋收)의 가망이 있겠는가. 봄에 논밭을 갈고 가을에 수확하되 심고 가꾸고 김매고 북주기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은 천시(天時)를 따르는 것이고, 높은 지대의 건조한 땅과 낮은 지대의 습한 땅을 살피고 수로(水路)를 다스리며 두둑..

정조실록24권, 정조 11년 1787년 12월

12월 3일 병신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김종정(金鍾正)이 상소하기를,"신이 이번에 당한 것을 돌아보면 바로 일의 처음에 이미 대간(臺諫)의 논박을 받았고 신도 상소하여 스스로 승복(承服)한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고 무딘 자질로 문득 갑작스런 변을 당하여 놀라 두려운 생각이 먼저 일어나고 지혜로운 생각이 문득 막혀서 미처 돌리지 못하고 스스로 차질을 가져왔습니다. 자신을 반성하여 속으로 헤아려 보고 손가락을 깨물며 후회하여도 미칠 수 없습니다마는, 두렵고 놀라와서 낭패하여 나갈 바를 모른 정상은 이번에 말한 자의 말에도 전혀 이치가 없을 수 없으니, 그렇다면 도리어 때를 늦추었다느니 애써 도왔다느니 하는 것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이 어떠한지를 캐지 않고 곧바로 망측한 죄로 몰았으니, ..

정조실록24권, 정조 11년 1787년 11월

11월 2일 을축대신(大臣)과 비국 유사 당상(備局有司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을해년315) 에 공납(貢納)을 줄이고 갑오년316) 에 비공(婢貢)을 폐지한 것은 우리 선대왕(先大王)의 성덕(聖德)·지의(至意)이다. 병신년317) 에 쇄관(刷官)을 폐지한 것은 감히 뜻과 사업을 계술(繼述)한 것이라 할 수 없으나, 백성으로서는 또한 박탈(剝奪) 당하는 괴로움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조금 오래 되고 간사한 길이 점점 많아지니, 내가 바로잡으려는 것은 바로 상납하는 기한을 어기는 것 때문이 아니다. 선두안(宣頭案)318) 가운데에 1백 살·2백 살로 현록(懸錄)된 것을 볼 때마다 아닌게아니라, 눈살이 찌푸려진다. 또 내노(內奴)·시노(寺奴)로 명색이 각각 달라서 오궁..

정조실록24권, 정조 11년 1787년 10월

10월 2일 병신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통부(通符)296) 를 가지고 왕래하는 것이 얼마나 엄비(嚴秘)한 일인데 궐문(闕門)을 출입할 때에 번번이 병조(兵曹)를 거치는가? 심하면 궐문을 왕래하는 자를 집에 있는 판당(判堂)에게 치보(馳報)하기까지 한다 하니, 일이 놀랍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다. 궁금(宮禁)에서 명을 전하는 것은 본디 외신(外臣)이 감히 알 바가 아니나, 반드시 엿보는 것은 장차 무엇하려는 것인가? 시작한 사람을 반드시 뒤미처 거론할 것 없으나, 이 뒤로는 통부를 가지고 왕래하는 사람을 그 문의 수문 장졸(守門將卒)이 감히 해조(該曹)와 집에 있는 당상(堂上)에게 전고(傳告)하지 말라."하였다. 10월 3일 정유대신(大臣)과 비국 유사 당상(備局有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