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정유
현사궁(顯思宮)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8월 2일 무술
성균관에서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이 권당(捲堂)한 소회(所懷)에 의하여 아뢰기를,
"신 등은 수선지(首善地)121) 에 있으면서 세도(世道)를 어지럽히는 일을 목격하고 모두 우려하고 탄식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충(忠)·질(質)·문(文)을 가감한 것은 바로 삼대(三代)122) 때 건국하였던 규범이었습니다. 그러나 질을 숭상하였던 정치가 문이 부족하다고 하여 변경하지 않았고, 문을 숭상하였던 정치가 질이 부족하다고 하여 고친 일이 없었던 것은 질가(質家)와 문가(文家)가 각각 정해진 바가 있어서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에 관계되고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에 관계되어 천도(天道)가 유행되고 인기(人紀)가 확립되기 때문입니다. 아! 우리 조정은 중국의 밖에 있는 문치를 숭상하는 소중화(小中華)입니다. 삼한(三韓)123) 시대와 신라·고려 사이에도 여전히 비루한 이속(夷俗)을 면치 못하다가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 태조와 태종께서 고려에서 숭불(崇佛)하던 뒤에 인륜을 밝히고 고려에서 멸유(蔑儒)하던 끝에 강상(綱常)을 펼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명분(名分)’ 두 글자와 관계된 것은 그 엄중함이 분명하고 그 차등이 현격하여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어 마치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그때에 즈음하여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께서 우리 나라에 예서(禮書)와 관상(冠常)의 제도를 내려 줌으로써 의절(儀節)의 가감과 명위(名位)의 등급이 정연히 구분이 있게 되어, 푼[分]은 치[寸]를 넘지 못하고 치는 자[尺]를 넘지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4백 년 기업(基業)을 유지해 온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김희용(金熙鏞) 등의 상소가 나왔는데 그 기세가 필시 한 세상을 바꾸어 우리 조종께서 나라를 세우신 제도를 변경하고 말겠으니, 어쩌면 이토록 외람스러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상소 가운데의 내용으로 본다면, 실로 천지간에 지극히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바란 것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는 가계(家系)를 계승하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는 사대부들과 같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므로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하늘을 하늘로 부르고 있는데, 유독 서얼만 그의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고 있으니 그 원망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비로 부르는 것은 애당초 나라에서 금지한 조항이 없었고 보면, 사대부들 집에서 적손과 서손의 구분을 엄히 한 소치로서 각기 그 아비가 아비로 부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아비가 허용하지 않았는데, 어찌 그 아비에게 간청하지 않고 임금에게 호소한단 말입니까? 자식으로서 가계(家系)를 계승하지 못한 것에 있어서는 역시 떳떳한 천리와 인정이 아니니, 그 아비의 피붙이로 할아버지와 아비의 가계를 계승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그의 말과 같이 원통하고도 원통한 일입니다. 또 적처나 첩에서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 후사를 세우게 한 조문이 과연 예전(禮典)에 실려 있으나, 이 역시 아비된 사람이 예전을 따르지 않고 후사를 세운 것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아비가 한 일을 가지고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아비가 자신이 낳은 아들에 대해 사랑하는 것이 귀천의 차이가 없는데 후사로 삼지 않은 것은 다만 막판의 폐단을 염려한 것입니다.
이른바 첩이란 것은 절차를 밟지 않고 만난 것입니다. 양가(良家)의 여자를 맞는 경우는 10분의 1, 2에 불과하고 공사간의 여종으로 첩을 삼은 것은 10분의 8, 9나 되는데, 만일 첩에서 난 자식으로 계속 후사를 삼는다면 후사가 된 자의 어미 쪽과 처의 쪽이 모두 척속(戚屬)이 되므로 결국에는 전부가 상천(常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첩의 아들로 적통을 계승하는 길을 터놓으면 다시 사대부 집의 모양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한 집이 적통을 계승하고 내일 또 한 집이 적통을 계승한다면, 몇 년이 안되어 구분없이 뒤죽박죽이 되어 차츰차츰 인륜이 없어지는 지경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아비가 서자를 후사로 삼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손이 벼슬길을 사대부와 같이 나가지 못한 것은, 적통을 계승하지 못한 소치인데, 그 길이 다르고 그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4백 년 이래 열성조에서 극도로 고루 감싸주고 진념해 주셨으며 여러 명신(名臣)들도 매우 불쌍히 여기고 애석하게 여겼으나 끝내 소원대로 들어주지 못한 것은 나라를 세울 때의 제도를 변동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비록 매우 사정(私情)이 원통하더라도 어찌 감히 경장(更張)이니 변통이니 하는 등의 말로 번거롭게 소를 올려 요청할 수 있단 말입니까? 준수나 경장이 각기 여건에 맞아야 하는 법인데, 준수하고 경장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일을 두고 한 말입니다. 세도가 쇠퇴하고 인심이 천박하여 윤상과 기강이 날로 퇴패해지고 있는 때에 또 이와 같은 상도에 어긋난 상소가 나왔으니, 이것이 무슨 꼴이며 이것이 무슨 도리란 말입니까? 수만 수천으로 무리를 지어 그 기세가 두려우니, 신 등은 걱정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명교상(名敎上) 단연코 빨리 상소를 올려 그들의 외람됨을 배척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전원이 입을 모아 회좌(會坐)하여 상소의 논의를 확정지으려 하였는데, 저들의 상소를 잘 알았다고 통보하기 전에 장의(掌議) 신(臣) 이재신(李在臣)이 스스로 경망하고 성급한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대로 합사(合辭)하여 그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상소를 초안할 때에 갑자기 대사성 정기선(鄭基善)이 거재 유생들이 자기에게 상의하지도 않고 임의로 장의에게 벌을 주었다고 하여 유생들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또 지금 장의 이원응(李源膺)이 재실(齋室)에 들어왔기에 상소하는 일을 결정지으려고 합사(合辭)하여 절충하였더니, 석전(釋奠)이 끝난 뒤에 확정하자고 약속하고는 정작 석전을 끝낸 뒤에는 그가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한나절을 서로 버티다가 결국 지루함에 화가 나서 동재(東齋)는 전원이 재실에서 나갔고 서재(西齋)에서는 반수(班首)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동재와 서재에 대한 벌이 풀리기는 하였으나, 신 등이 유생의 반열에 끼어 있으면서 전에는 대사성이 준 벌로 인해 뜻을 펴지 못하였고 뒤에는 장의에게 벌을 준 일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마음 가득히 부끄럽고 쑥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처지로 어떻게 태연히 당(堂)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집으로 물러나와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서류(庶類)가 하소연하는 것은 열성조에서 늘 있었던 일이었으나, 그때 권당(捲堂)하고 시끄럽게 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옛날의 유생이 어찌 지금 사람보다 못해서 그랬겠는가? 비록 소회로 말하더라도 이미 ‘천지간에 지극히 원통한 일이다.’라고 하였고, 또 ‘떳떳한 권리와 인정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유생들도 도리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생들은 윤리를 밝히고 선행을 으뜸으로 하는 자리에 있으니, 의당 ‘하소연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고 해야 하고, 또한 ‘떳떳한 천리와 인륜으로 돌이켜 보아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이 모순되는 것은 돌아보지도 않고 오직 불평만 일삼고 있으니, 옳은 일인가? 또 대사성이 벌을 준 것은 무슨 일로 그러했는지 모르겠으나 한번 벌을 주었다고 해서 거리낌없이 대사성의 잘못을 열거했으니, 어찌 사유(師儒)를 대하는 도리라 하겠는가? 유생을 위하여 깊이 개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이로써 효유하여 즉시 들어오도록 권하라."
하였다.
8월 3일 기해
현사궁에 나아가 가을 제사를 거행하였다.
보덕 정기선(鄭基善)이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한 소회에 대해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비답하기를,
"그대는 잘못이 없는데, 인혐할 게 뭐 있겠는가? 대저 지금의 대사성[泮長]은 《주례(周禮)》에 선비를 가르치는 대사성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스승의 도리가 있다는 점에서는 한가지이다. 유생이 언론이나 소견이 차이가 있을 경우 반복해서 토론하는 것은 좋지만, 마치 송사하는 자처럼 함부로 헐뜯고 밀어붙여서야 되겠는가? 유생을 소중히 여긴 것은 성현(聖賢)을 배우고 도리를 알며 임금을 높이고 스승을 존경하며 경상적인 것은 지키고 예절을 바르게 가지기 때문이다. 의당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근래에는 그렇지 않아 왕왕 사리와 가부를 살피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대사성을 아주 우습게 보고 성묘(聖廟)를 비우는 것을 어려워 하지 않는 등 거조가 전도되어 듣고 보기에 매우 해괴해서 세파(世波)에 추종한다는 탄식만 자아내고 자중하는 의의가 전혀 없으니, 이는 정말 조정에서 잘 인도하여 육성하지 못한 탓이기는 하나, 유생들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상소의 비답에 대략 나의 걱정스러운 뜻을 보이니, 새 대사성이 나와서 명에 응하기를 기다려 비답의 뜻을 동재와 서재의 벽에 붙여 놓고 유생들로 하여금 항상 주목하여 서로 연마하고 면려하며 글을 읽고 의리를 밝혀 우리의 옛날 유풍(儒風)을 진작시키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이인부(李寅溥)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헌기(李憲琦)를 공조 판서로, 정만석(鄭晩錫)을 한성부 판윤으로, 김난순(金蘭淳)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8월 5일 신축
김정희(金正喜)를 규장각 대교로 삼았는데, 전망(前望)에 의해서이다.
양사(兩司)에서 【대사간 이인부(李寅溥)·지평 김병조(金炳朝)이다.】 합계(合啓)하여 이회상(李晦祥) 등의 일과 홍재민(洪在敏)의 일과 서형수(徐瀅修)의 일과 장석윤(張錫胤)의 일과 이회식(李晦植)의 일을 정계(停啓)하고 김일주(金日柱)의 일은 물고(物故)로 인하여 정계하였다. 구명겸(具明謙) 등의 일 중에서 역적 김우진(金宇鎭) 이하 김우진의 여러 아들까지의 일과 이영순(李永純) 등의 일 중에서 이원박(李元樸) 이하 이원박의 여러 아들까지의 일은 지워버렸다. 사헌부에서 올린 계사 중 이치훈(李致薰)의 일은 물고(物故)로 인하여 정계하고, 이학규(李學逵)와 신여권(申與權) 등의 일도 정계하였다.
8월 6일 임인
이호민(李好敏)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8월 7일 계묘
의금부에서 지도(智島)의 안치 죄인(安置罪人) 이회상(李晦祥)은 용안현(龍安縣)에, 추자도(楸子島)의 안치 죄인 홍재민(洪在敏)은 익산군(益山郡)에, 추자도의 안치 죄인 서형수(徐瀅修)는 임피현(臨陂縣)에, 고금도(古今島)의 안치 죄인 장석윤(張錫胤)은 진산군(珍山郡)에 양이(量移)하였다고 아뢰었다. 이는 대간의 계사가 이미 정계되었다고 하여 판하(判下)한 대로 거행한 것이다.
8월 10일 병오
금위영(禁衛營)에서 아뢰기를,
"본영의 석수(石手) 최영득(崔英得)이 밤을 틈타 몰래 숭례문(崇禮門) 근처의 체성(體城)을 헐다가 패장(牌將)에게 붙잡혔습니다. 그 내막을 조사해 보았더니 장료(匠料)을 타기 위해서 이러한 흉계를 꾸민 것이었습니다. 군률(軍律)로 처치해야 합당하겠으니, 오늘 진(陣)을 연습할 때에 효수(梟首)하여 대중을 경계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8월 11일 정미
함흥부(咸興府)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민가 1백 98호를 특별히 구호해 주라고 명하였다.
8월 14일 경술
김노경(金魯敬)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8월 15일 신해
왕세자에게 명하여 현사궁의 망제(望祭)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8월 16일 임자
호조 판서 심상규(沈象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일 개성의 피폐를 구제하는 방안을 묘당에서 결정하였는데, 신이 계획을 잘못 세워 일을 해친 부분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풍덕부(豐德府)를 혁파하여 개성에 예속시키는 일에 관한 타당 여부는 신의 조(曹)에서 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당초부터 그와 같이 하려고 했다면 천천히 여론을 들어보았지 먼저 전결(田結)을 떼어서 주는 일을 계획하지 않았을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으니, 아마도 신으로 말미암아 이 일로 전환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신이 어떻게 두려운 생각으로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초에는 묘당에서 경기·황해도 고을의 전토(田土) 1천 5백 결을 떼어 주었다가 10년 후에 환납하기로 품처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조에서 정세(正稅)의 전결 이외에는 떼어 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취소하자고 간쟁하자, 풍덕부를 혁파하여 〈개성에〉 예속시키고 전세와 〈대동미〉 두 가지 세까지 싸잡아 영원히 주어버렸으니, 이는 실로 전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주군(州郡)을 나누거나 합하는 일이 더러 있기는 하였으나 국고에 예속된 민결(民結)과 상세(常稅)는 한 번도 따로 떼어서 서울의 창고에 납부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땅은 나누더라도 백성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는 다른 사례를 들 것도 없이 바로 송영(松營)에서 과거에 있었던 일입니다.
장단(長湍)의 송서(松西)와 금천(金川)의 소남(小南)·대남(大南)을 이속(移屬)할 때에 불과 면리(面里)의 조그만한 땅이었지만, 장단에서는 여러 차례 떼려다가 그만두고 80년이 지난 뒤에야 결정이 났으며, 금천에서는 금방 논의하다가 금방 중지되어 1백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시행되었으니, 판적(版籍)에 딸린 백성과 지역은 이처럼 변경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의 수신(守臣)이 시행 조건을 낱낱이 올리고는 전세와 대동미를 전례대로 상납하다가 근래 4, 5년 사이에 비로소 개성부에서 가져다가 사용하도록 허용하였는데, 이는 병진년124) 에 시행한 제도가 아닙니다. 비록 면리(面里)의 보잘것없는 부세라 하더라도 사체를 중시한 논의들이 애석히 여기었는데, 이제는 또 ‘분사(分司)의 경비를 모두 지방(地方)에서 마련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만, 지방에는 원래 정해진 수량이 있어 이리저리 융통할 길이 없습니다. 광주(廣州)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지방이고, 강화(江華)는 심도(沁都)의 지방이며, 수원(水原)은 화성(華城)의 지방이고 보면, 송도의 지방은 개성입니다. 또 같은 분사이지만 특히 더 중한데도 화성은 처음 설치할 때부터 재부(財賦)를 신중히 하여 지방의 세수(稅收)를 전부 이속시키지 않고 호조에 내던 것을 넘겨서 교환하게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송도에 개성의 원 지방 이외에 또 한 주(州)를 더 붙여 주고 두 가지 세까지 아울러 소속시켰으니, 지금과 옛날의 묘당 정책이 이토록 크게 다를 수 있느냐고 의논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신처럼 물러날 사람이 알 바가 아닙니다만, 신이 한 번 아뢴 바로 인하여 현관(縣官)이 세입에 무궁한 손실을 보게 하였습니다. 저번에 신이 말한 바 하루의 해가 쌓이면 그 해는 한시가 다르게 심해진다.’고 한 것은 신만 떠나면 해가 없지만 이번의 해는 비록 신을 죽이더라도 도움도 없이 수천 년 동안 항상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동안만 떼어 주는 것도 간쟁하여 막지 못했는데, 수천 년이나 영구히 해를 끼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관명(官名)이 사농(司農)이면서 어떻게 이토록 변변치 못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풍덕의 전결에 대한 대신의 보고는 8백여 결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계산의 착오인가 봅니다. 이제 판적(版籍)의 원장(元帳)을 살펴보니, 등재된 밭[旱田]과 논[水田] 중에서 각종 면세전(免稅田)과 묵힌 밭[舊陳]을 제외하고 조세를 낼 수 없는 실제 총 결수가 1천 5백 30결이나 되었습니다. 당년의 재해 여부를 판정하지 않았으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앞서 떼어 주자고 청했던 경기, 황해도 고을의 결수와도 실로 서로 균등한 숫자입니다. 피폐를 구제하기 위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먼저는 1천 5백 결로 지용(支用)에 충당하고 10년 내에 도로 되돌려 주게 하였다가 이제는 어찌하여 한 주(州)를 영구히 떼어 주고 먼저 떼어 주려고 한 숫자와 대등한 조세(租稅)의 전결까지 아울러 영구히 주려고 한단 말입니까?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물을 것도 없이 신이 전에 난점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역시 뒤에도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니, 이는 신으로 말미암아 현관의 세입이 무궁한 손실을 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묘당의 처치(處置)가 전후로 대중이 없어 분수(分數)가 없는 것처럼 된 것도 신으로 말미암은 소치입니다. 이를 일러 해독이 사람에게까지 미친다고 하는 것이니, 아!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호조를 맡고 있는 자가 땅과 곡식의 잘잘못에 대하여 한마디 말도 없다면, 이 역시 너무 적막하고 태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지금 반드시 떠나게 된 이유는 비록 이 일이 아니더라도 서로 캥기어 관련되고 번거로운 일이 많으니, 실로 죄송스럽고 외람됩니다. 바라건대, 신의 죄를 논하여 물리침으로써 관리들을 독려하여 바르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본직은 체차를 허락한다."
하였다.
8월 17일 계축
이조원(李肇源)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8월 18일 갑인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호조 판서 심상규의 상소에 풍덕을 〈개성에〉 합친 뒤에 전결의 수세(收稅)까지 송영(松營)의 군향(軍餉)에 보태 주었다고 말하였는데, 말할 때에 묘당을 비난하고 배척한 구절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풍덕을 개성에 합한 것이 어찌 신이 하고 싶어서 한 일이겠습니까? 한 고을은 혁파할 수 있어도 옛 도읍의 중요한 곳이 여지없이 피폐된 것을 좌시한 채 구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경중을 헤아리고 또 과거의 사례를 상고하여 합병한 것이니, 이는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책임을 맡은 신하가 어렵다고 논의한 것을 신은 그르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이 이미 내려 일이 곧 성취될 때이므로 일을 같이해 나간다는 의의로 보아 다시는 논란을 제기하지 않을 줄로 알았는데, 지금 또다시 그치지 않고 누누이 말하고 있으니, 신의 본의를 중신(重臣)이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조정에 일이 있을 때 가부를 토론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지난 숙종조 때에 문청공(文淸公) 김진규(金鎭圭)가 의사에 맞지 않은 일을 당할 경우 몇 차례고 상소를 올려 반드시 간쟁하고야 말았습니다. 하루는 충문공(忠文公) 민진후(閔鎭厚)와 성상의 앞에서 일을 논하였는데, 김진규가 끊임없이 극력 논란하다가 더러 핍박하는 말을 하였으나 민진후가 맞서 쟁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물러나오자 어떤 사람이 민진후에게 말하기를, ‘공이 하고 있는 일이 불가한 줄을 모르겠는데 김공(金公)이 그토록 말하는 것은 아마도 기가 격동되어 논의를 집요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니, 민진후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내가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서 본심을 잘 안다. 관직에 당해 자기의 책임을 다하려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지, 어찌 이기려는 기 때문에 자기 의견이 채택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어 그랬겠는가? 내가 만일 지나치게 쟁론을 할 경우 필시 인혐하고 들어갔을 터이니, 그러면 나는 다시 나의 허물을 듣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자, 당시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두 사람을 다 훌륭하게 여겼다고 하는데, 신도 이 중신에 대하여 또한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이 하는 일이 참으로 모두 잘못되었다면 일을 그르친 죄를 실로 회피할 수 없을 것이고, 신이 하는 일이 과연 옳았는데도 이토록 많이 구애를 받았다면, 신이 어떻게 태연히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이는 모두가 신의 명망이 얕은데다가 병마저 깊어 일을 일답게 하지 못함으로써 신이 남에게 신망을 얻지 못하고 남들도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신을 물리치고 어진 덕이 있는 사람에게 돌려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 호조 판서의 상소에 대하여 경이 김진규와 민진후 두 사람의 일을 끌어다가 비유한 것은 매우 화평하였으므로 노성(老成)에 감탄하는 바이다. 경의 마음이 이미 그러하다면 사양하는 것은 지나칠 뿐만 아니라, 이는 경이 한 말을 스스로 실천하지 않은 것이니, 경의 말이 잘못되었다. 경은 이 점을 이해하여 안심하고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0일 병진
차대하였다.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아뢰기를,
"저번에 6도(道) 유생(儒生)의 상소로 인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제일 좋은 방안에 따라 여쭈어 처리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서얼의 무리[一名輩]들이 오랫동안 울분이 쌓였으니, 이렇게 호소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인륜(人倫)에서 항상 운운하는 말, 곧 아들로서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고 마치 노복이 상전에게 하듯이 한다고 하는 말은 상리에 어긋나는 말입니다. 각자가 제집에 부형이 있으니, 나라에서 불쌍히 여겨 진념하고 있는 지극한 뜻을 안다면 어찌 뜻을 받들어 빨리 고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적처나 첩에게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 후사를 세우도록 법전에 실려 있으니, 이는 오직 거듭 밝혀 시행하면 됩니다. 그리고 벼슬길에 있어서는 나라에서 사람을 쓰는 도리에 어진이를 제한 없이 구하고 오직 재능이 있는 사람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문벌이 낮다고 구애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서손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온 천하에 없는 법입니다. 선배와 명신(名臣)·석보(碩輔) 등이 매양 이 일을 말하여 상소에 많이 거론되었습니다. 그러나 4백 년간 조성된 풍속을 하루아침에 고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지금까지 하지 못한 것입니다. 비록 열성조에서도 그들을 진념하여 하교를 여러 차례 내리셨으나 끝내 길을 터서 차이 없이 쓰지 못하였는데, 이는 품계를 제한하여 수용한다는 법을 보아도 미루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일 그 품계는 그대로 두고 널리 소통시켜 문(文)·음(蔭)·무(武) 세 길마다 각각 어떤 직품의 제한을 정하고 통청(通淸)과 초사(初仕)도 한계를 두어 규식으로 정한다면, 여론도 가라앉고 성과도 책임지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풍속을 바꾸고 법전을 개정하고 관방(官方)을 경장(更張)하는 것은 신 한 사람의 의견만으로 쉽사리 논의할 수 없으니, 원임 대신과 2품 이상의 비국 당상에게 특별히 수의(收議)하도록 명하고, 절목은 이조와 병조로 하여금 다시 묘당에 나아가 의논하여 조항을 만들게 한 다음, 성상의 재가를 받게 하는 것이 실로 신중히 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남에 오래 묵은 답(畓)을 개간한 자는 3년 후에 세를 내도록 하라고 명하였는데, 도백의 상소로 인하여 대신이 복계하여 시행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또 오래 묵은 한전(旱田)을 다시 일군 자도 3년 동안 세를 면제해 주도록 청하여 특별히 시행하였다.
심상규(沈象奎)를 공조 판서 좌빈객으로, 이존수(李存秀)를 우빈객으로, 김노경(金魯敬)을 우부빈객으로, 정만석(鄭晩錫)을 형조 판서로, 김노응(金魯應)을 한성부 판윤으로, 홍석주(洪奭周)를 홍문관 제학으로, 박효진(朴孝晉)을 삼도 통어사로, 김노경(金魯敬)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8월 22일 무오
호조 판서 이조원(李肇源)이 현(縣)과 도(道)를 통해 상소하여 스스로 인혐(引嫌)하고 체직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먼저의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으니, 경의 인혐도 이제는 그만 할 만도 하다. 어찌 이 일로 인해 영구히 조정을 떠나려고 하는가? 중임(重任)을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으니, 경은 다시 올라와서 공무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원이 또 상소하여 거듭 간청하니 윤허하고, 김이양(金履陽)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8월 28일 갑자
온릉(溫陵)의 수개(修改)가 끝이 나자, 일을 감독한 정부 이하의 관원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8월 29일 을축
김이교(金履喬)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경과(慶科)의 정시(庭試)와 무과(武科)의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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