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49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12월

12월 1일 임오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히 사직(社稷)·종묘(宗廟)·경모궁(景慕宮)의 납향(臘享)에 향과 축문을 전하였다. 주강하였다. 이목연(李穆淵)을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 삼았다. 12월 2일 계미주강하였다. 12월 3일 갑신진전(眞殿)에 나아가 천신(薦新)을 행하였다. 12월 4일 을유주강하였다. 12월 5일 병술희정당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유기상(柳基常)을 좌변 포도 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12월 7일 무자하교하기를,"어둡고 덕이 없는 내가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염려하는 일념은 오직 백성을 돌보는 데에 있다. 여름·가을의 홍수(洪水)는 근래에 드물게 있는 것으로 양서(兩西)에서 재해을 입은 것이 비록 많고 절음이 있더라도 흉년을 면치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니, 불쌍하게도 이..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11월

11월 1일 임자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11월 2일 계축경모궁의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행하였다. 경모궁 친제(親祭)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고, 예방 승지(禮房承旨) 정기세(鄭基世), 예의사(禮儀使)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학수(李鶴秀), 당상 집례(堂上執禮) 부호군(副護軍) 이겸재(李謙在)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였다. 추국하였다. 11월 3일 갑인추국하였다. 죄인 김응도(金應道)·기덕우(奇德佑)가 복주(伏誅)되었는데 모반 대역 부도죄이었고, 최치각(崔致珏)은 정상(情狀)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였다. 11월 4일 을묘추국하였다. 11월 5일 병진주강(晝講) 하였다. 추국하였다. 11월 6일 정사주강하였다. ..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10월

10월 1일 계미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10월 2일 갑신유생 신희조(申羲朝)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송능상(宋能相)을 은일에서 삭제하고 권돈인(權敦仁)에게 해당되는 율을 시행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가령 너희들의 말과 같다면 은일에서 삭제했던 허다한 세월 동안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제 갑자기 이와 같이 하니 거의 상처를 닦아내고 흠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 묘당(廟堂)의 논의에 이론(異論)을 세우는 것은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니, 또한 해로울 것이 무엇인가? 또 이미 처분한 것이 실로 가벼운 형전(刑典)이 아니니, 너희들은 더는 의심하지 말고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하였다. 10월 3일 을유인정전에 나아가 친히 종묘(宗廟)의 동향(冬享)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9월

9월 1일 계축충청좌도(忠淸左道) 경시관(京試官) 조재응(趙在應)을 불러 보았다. 김제겸(金濟謙)에게 충민(忠敏), 김성행(金省行)에게 충정(忠正)이란 시호(諡號)를 추증하였다. 길주(吉州)·부령(富寧) 등 고을의 무너진 집에 휼전을 내렸다. 9월 3일 을묘조강(朝講)하여 《논어(論語)》 제4권, 제5권을 강하였다. 9월 4일 병진김대근(金大根)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주강(晝講)하였다. 9월 5일 정사약원(藥院)에서 희정당에 입진(入診)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경기 감사(京畿監司) 홍우철(洪祐喆)이 각 고을의 재정(財政)이 궁핍한 상황을 갖추어 진달하고 인하여 각 궁방(宮房)의 면세(免稅) 2천 6백 59결(結)을 다른 도(道)로 옮기기를 청하였는데, 면세결(免稅結)을 윤차(輪次)로 ..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윤8월

윤8월 1일 갑신주강(晝講)하였다. 가평(加平)·양근(楊根)·진위(振威)·양성(陽城) 등 고을의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집과 익사(溺死)하거나 압사한 사람에게 휼전을 내렸다. 윤8월 2일 을유주강하였다. 부안(扶安) 등 9개 고을의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집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내렸다. 윤8월 3일 병술희정당(熙政堂)에서 중궁전(中宮殿)의 초간택(初揀擇)을 거행하였다. 윤8월 4일 정해소대(召對)하였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홍우순(洪祐順)을 불러 보았는데,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영광(靈光)·나주(羅州)·창평(昌平)·무안(務安)·흥양(興陽) 등 고을의 떠내려간 집에 휼전을 내렸다. 안변(安邊)·단천(端川)·이원(利原) 등 고을의 무너진 집과 갑산부(甲山府)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8월

8월 1일 을묘하교하기를,"관서(關西)의 수재(水災) 때문에 바야흐로 놀라서 번민하고 있는데 지금 비가 이처럼 극심하니 농사를 생각하면 실로 불안하다. 사문(四門)에 중신(重臣)을 보내어 날짜를 가리지 말고 영제(禜祭)를 경건(敬虔)하게 지내라."하였다. 8월 2일 병진심일영(沈日永)을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로, 홍우순(洪祐順)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다. 이경재(李景在)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8월 3일 정사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사직제(社稷祭)의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8월 6일 경신헌종 대왕(憲宗大王)과 효현 왕후(孝顯王后)의 부향 대제(祔享大祭)를 친히 행하였다. 인정전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받고 반사(頒赦)하였다. 8월 7일 신..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7월

7월 1일 을유일식(日蝕)하였다. 사간(司諫) 신좌모(申佐模)가 상소하여 청하기를,"문외 출송한 죄인 권돈인에 대한 삼사(三司)의 청을 빨리 윤허하소서."하고, 인하여 이판(吏判) 이가우(李嘉愚), 병판(兵判) 서기순(徐箕淳)이 주의(注擬)하면서 사(私)를 따른 죄를 논하니, 비답하기를,"이판의 일이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병판의 일은 마음을 쓰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일 뿐인데 한 종이에 아울러 논열(論列)했으니 매우 온당치 못하다. 개정(改正)하기를 청하기에 이르러서는 너의 말이 어찌 그리 각박한가? 아주 충후(忠厚)함이 부족해 좋지 않으니, 너를 체차(遞差)하겠다."하였다. 삼사에서 합사하여 청하기를,"문외 출송한 죄인 권돈인에게 빨리 해당되는 율(律)을 시행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경들이 쟁집한..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6월

6월 2일 정사두 번째 기우제를 행하였다. 6월 6일 신유효정전(孝定殿) 상제(祥祭)를 행하였다. 산릉(山陵)의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혼전 향관(魂殿享官) 이하 종척 집사(宗戚執事)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6월 7일 임술충주목(忠州牧) 불이 난 집에 휼전(恤典)을 내렸다. 6월 9일 갑자예조(禮曹)에서 헌종 대왕(憲宗大王)을 부묘(祔廟)한 후 진종 대왕(眞宗大王)을 조천(祧遷)하는 전례(典禮)를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 및 외방에 있는 유현(儒賢)에게 수의(收議)하라는 명에 대해 아뢰기를,"영부사(領府事) 정원용(鄭元容)은 말하기를 ‘오묘(五廟)에서는 사친(四親)036) 과 시조(始祖)를 제사하여 이소·이목(二昭二穆)037) 이상은 조천(祧遷)하는 것이 상례(常禮)입니다, 제왕..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5월

5월 1일 정해유장환(兪章煥)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소대하였다. 5월 2일 무자주강하였다. 5월 3일 기축소대하였다. 함경도 암행 어사(咸鏡道暗行御史) 최우형(崔遇亨)을 불러 보았는데, 전전(前前) 무산 부사(茂山府使) 이신영(李信泳), 전 이원 현감(利原縣監) 유상렴(柳相濂), 갑산 부사(甲山府使) 이인규(李仁奎), 명천 부사(明川府使) 정운익(鄭雲翼), 전 종성 부사(鍾城府使) 이희승(李熙承), 전 홍원 현감(洪原縣監) 권성근(權聖根), 전 거산 찰방(居山察訪) 이경원(李景源) 등에게 죄줄 것과 함흥 판관(咸興判官) 신석관(申錫寬)을 포장(褒奬)하여 승서(陞敍)할 것을 서계하였다. 5월 4일 경인소대하였다. 5월 5일 신묘효정전(孝定殿)에 나아가 단오절향(端午節享)과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4월

4월 1일 정사효정전(孝定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4월 2일 무오조강(朝講)에서 《논어(論語)》 제2권을 강하였다. 충청우도 암행 어사 김유연(金有淵)을 불러 보았는데, 전 감사 조득림(趙得林), 전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문영(李聞榮), 전 서천 군수(舒川郡守) 이희경(李熙敬), 서산 군수(瑞山郡守) 이진승(李鎭昇), 전 군수(郡守) 윤재선(尹載善), 면천 군수(沔川郡守) 이원필(李源弼), 정산 현감(定山縣監) 송병문(宋秉文), 부여 현감(扶餘縣監) 김정근(金貞根), 전 태안 군수(泰安郡守) 오택선(吳宅善), 전 대흥 군수(大興郡守) 최우형(崔遇亨), 전 비인 현감(庇仁縣監) 공헌동(孔獻東), 전 해미 현감(海美縣監) 박민환(朴民煥) 등에게 죄줄 것을 서계하였다. 정원용(鄭元容)을 실록청..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3월

3월 1일 무자효정전(孝定殿)에 나아가 삭제(朔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3월 2일 기축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춘도기(春到記)를 행하였다. 강경(講經)에 합격한 유학(幼學) 이형회(李亨會)와 표(表)에 합격한 진사(進士) 김긍연(金肯淵)을 아울러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3월 3일 경인이행교(李行敎)를 평안도 병마 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3월 4일 신묘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흥근(金興根)이 아뢰기를,"경학(經學)을 주(主)로 삼고 사서(史書)로 보좌(輔佐)를 삼아 도술(道術)을 밝히고 사리(事理)를 살필 것이며, 날마다 장사(莊士)020) 를 가까이 하여 강마(講磨)하고 토론(討論)하며 과정(課程)을 엄히 세워 혹시라도 중단함이 없어야 ..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2월

2월 1일 무오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소대하였다. 2월 2일 기미전라 감사(全羅監司) 이유원(李裕元)을 불러 보았으니,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김흥근(金興根)을 좌상(左相)으로, 박영원(朴永元)을 우상(右相)으로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이헌구(李憲球)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서기순(徐箕淳)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2월 4일 신유소대하였다. 2월 5일 임술소대하였다. 2월 6일 계해이가우(李嘉愚)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소대하였다. 윤정현(尹定鉉)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전교하기를,"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이방(李房) 섭사손(攝祀孫)은 전(前) 현감(縣監) 이시학(李時學)으로 하라."하고, 구전(口傳)015) 으로 군직(軍職)을 주어 섭사하게 하였다. 2월 ..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1월

1월 1일 무자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히 표리(表裏)001) 를 올리고, 인하여 하례(賀禮)를 받은 후 반사(頒赦)하였다. 1월 2일 기축친히 표리를 올리고 진하(陳賀)할 때 각 차비관(差備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고, 예방 승지(禮房承旨) 서영순(徐英淳), 대거 승지(對擧承旨) 성원묵(成原默), 선교관(宣敎官) 병조 정랑(兵曹正郞) 이인기(李寅夔)에게 가자(加資)하였다. 서영순(徐英淳)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김수근(金洙根)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홍학연(洪學淵)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1월 3일 경인하교하기를,"홍 좨주(洪祭酒)의 회근례(回巹禮)002) 가 가깝다고 하는데 매우 희귀한 일이다. 나라에서 예우(禮遇)하는 처지이고, 또 종전에 이미 시행한 전례(..

순종실록부록3권, 순종5년 1912년 12월

12월 2일 양력【음력 임자년(壬子年) 10월 23일】  선정전(宣政殿)에서 군사령관(軍司令官) 안도 사다미〔安東貞美〕와 부관(副官) 나카무라 고이치〔中村幸一〕를 접견하였다. 덕수궁(德壽宮)에서도 덕홍전(德弘殿)에서 접견하였다. 귀임(歸任)하였기 때문이다.【원본】 6책 3권 9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74면【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일본(日本)선정전(宣政殿)에서 군사령관(軍司令官) 안도 사다미〔安東貞美〕와 부관(副官) 나카무라 고이치〔中村幸一〕를 접견하였다. 덕수궁(德壽宮)에서도 덕홍전(德弘殿)에서 접견하였다. 귀임(歸任)하였기 때문이다. 12월 7일 양력선정전(宣政殿)에서 총독(總督) 백작(伯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군사령관(軍司令官) 안도 사다미〔安東貞美〕, 육군 중장(陸軍中將)..

순종실록부록3권, 순종5년 1912년 11월

11월 2일 양력【음력 임자년(壬子年) 9월 24일】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정무총감(政務總監)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육군 중장(陸軍中將) 무라타 아쓰시〔村田惇〕, 이하 무관(武官) 2인(人) 및 비서관(祕書官) 구와바라 하치시〔桑原八司〕, 통역관(通譯官) 후지나미 요시쓰라〔藤波義貫〕를 돈덕전(惇德殿)에서 접견하였다. 11월 3일 양력홍릉(洪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돌아오다가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도 따라 나아갔다.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이어 왕비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11월 6일 양력조선 총독(朝鮮總督) 백작(伯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양궁(兩宮)에 알현하였다. 토쿄〔東京〕로 떠나려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