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69

순조실록3권 순조1년 1801년 12월

12월 1일 계묘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대전(大殿)께서 수두(水痘)를 앓을 때의 약방 도제조 이병모(李秉模)에게는 안구마(鞍具馬)를 직접 주고, 제조 황승원(黃昇源)에게는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가자(加資)하며, 부제조 남공철(南公轍)에게는 가의 대부(嘉義大夫)를 가자하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박준원(朴準源)은 날마다 승후(承候)하여 그 노고가 대단히 많았으니 안구마를 직접 주고, 별입직(別入直)인 좌승지 박종보(朴宗輔)에게는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며, 주서(注書)·한림(翰林)은 모두 승륙(陞六)시키고 의관(醫官) 이하에게는 시상(施賞)하도록 하라."하였다. 12월 2일 갑진실록 당상(實錄堂上) 이득신(李得臣)은 직무(職務)를 서로 방해하였고, 한용탁(韓用..

순조실록3권 순조1년 1801년 11월

11월 1일 갑술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이조 판서 김조순(金祖淳)이 상소하여 인의(引義)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삼가 공조 참판 김노충(金魯忠)의 소본(疏本)에 전 우윤(右尹) 정일환(鄭日煥)이 강석(講席)에서 주달한 바로써 끌어댄 것을 보고서 신은 그윽이 현재를 돌아보매 직무(職務)를 게을리함이 풍속이 되었고 퇴폐 타락함이 습성이 이루어, 공경 대부(公卿大夫)의 현귀한 이로부터 장보(章甫)391) ·위포(韋布)의 미천한 이에 이르기까지 옳은 말과 바른 의논을 위에 올렸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고 여겼었는데, 뜻하지 않게 이런 장주(章奏)가 이에 백수(白首) 재신(宰臣)의 입에서 나왔으니, 우리 성상(聖上)께서 한 번 개혁하는 처음의 정사(政事)를 함에 있어 언로(言路)의 개..

순조실록3권 순조1년 1801년 10월

10월 1일 갑진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윤대(輪對)하였다. 이조원(李肇源)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0월 2일 을사권강(勸講)하였다. 소대하였다. 10월 3일 병오주강(晝講)하였다. 내각(內閣)에서 관서(關西)의 빈흥록(賓興錄)361) 을 간인(刊印)하여 올렸다. 좌·우포청(左右捕廳)에서 아뢰기를,"사학(邪學)의 망명 죄인(亡命罪人) 황사영(黃嗣永)을 충청도 제천(堤川) 땅에서 포착하여 의금부로 이송하였습니다."하였다. 10월 4일 정미권강하였다. 이경일(李敬一)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10월 5일 무신권강하였다. 좌포장(左捕將) 임율(任嵂)과 우포장 신응주(申應周)가 사학 죄인(邪學罪人) 황사영(黃嗣永)의 흉서(凶書)를 가지고 합문(閤門) 밖에 나아오니,..

순조실록3권 순조1년 1801년 9월

9월 1일 을해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추국하였다. 식년 문무과(式年文武科)의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9월 2일 병자주강(晝講)하였다. 조문언(趙文彦)을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이조 판서 김조순(金祖淳)이 상소하여 병의 상황을 진달하고 본직(本職)·본겸직(本兼職)의 이름을 해면(解免)해 달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전장(銓長)은 가볍게 체차(遞差)하기가 곤란함이 있으니, 총사(摠使)만 특별히 해면을 허락하겠다."하였다. 추국하였다. 9월 3일 정축권강(勸講)하였다. 전(前) 판서(判書) 정범조(丁範祖)가 졸(卒)하였다. 이조 참의 조득영(趙得永)을 부산 첨사(釜山僉使)에 특별히 보외(補外)하였다. 하교하기를,"이 삼전(三銓)339) 은 단지 정세(..

순조실록3권 순조1년 1801년 8월

8월 1일 을사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제주(濟州)의 한라산제(漢拏山祭)와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 및 토역(討逆)한 반교문(頒敎文)을 같은 배로 들여보냈었는데, ‘사서도(射鼠島) 앞 바다에서 갑자기 풍랑(風浪)을 만나 그대로 배가 뒤집혀 가라앉아서 향·축문과 교문이 아울러 물에 흘러가 없어졌다.’고 하니, 대단히 놀랍고 송구합니다. 그런데 막중한 사전(祀典)을 그냥 빠뜨릴 수 없으므로 형편이 장차 다시 길일(吉日)을 택하여 물려서 행해야 될 것이니, 향과 축문을 해사(該司)로 하여금 다시 곧바로 마련하여 급속히 내려 보내되 이 뜻을 축문 가운데에 적당한 문구(文句)를 만들어 첨입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향·축문이 물에 흘러가 ..

순조실록3권 순조1년 1801년 7월

7월 2일 병자상호군(上護軍) 변득양(邊得讓)이 졸(卒)하였다. 7월 3일 정축사간 김선(金銑)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윤행희(尹行熙)는 곧 윤행임(尹行恁)의 서족으로 환시(宦寺)와 가까운 이웃에 살면서 주무한 자취가 환하게 드러나 가리울 수 없으니, 청컨대 해부(該府)로 하여금 법을 참조하여 멀리 귀양보내도록 하소서. 또 환시로 말하건대, 권간(權奸)의 이웃에 살면서 권간의 친속과 체결(締結)하여 왔다갔다 하면서 동정을 살피며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였으니, 여기에 그 죄가 되는 것이 윤행희보다 지나침이 있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해당 환시를 누구라고 지명하여 현고(現告)하고 이어서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중히 조사하게 하여 중률(重律)로 다스려야 한다고 여깁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순조실록3권 순조1년 1801년 6월

6월 1일 병오대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문형(文衡)의 직임은 곧 공의(公議)이니, 사직하지 말고 행공(行公)하도록 하라."하였다. 6월 2일 정미권유(權𥙿)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오태현(吳泰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익모(李翊模)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6월 3일 무신대왕 대비가 경연(經筵)과 권강(勸講)을 서늘한 기운이 생길 동안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신(大臣)이 대계(臺啓)에서 청한 이상겸(李象謙)의 일로써 잡아다가 신문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상겸이 대신(臺臣)과 대변(對卞)할 것을 청하니,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6월 4일 기유경연관(經筵官) 김일주(金日柱)를 희정당(熙政堂)에서 소견(召見)하였다. 김일주에게 찬선(饌膳)을 내리라고 명하였는데, ..

카테고리 없음 2025.06.04

순조실록2권 순조1년 1801년 5월

5월 1일 병자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주강(晝講)하였다. 윤대(輪對)하였다. 5월 2일 정축정종 대왕(正宗大王)의 크고 작은 영정(影幀) 2본(本)을 화령전(華寧殿)에 봉안(奉安)하였는데, 큰 것은 펴서 봉안하였고 작은 것은 궤짝에 봉안하였다. 헌관(獻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권강(勸講)하였다. 5월 3일 무인권강하였다. 5월 4일 기묘권강하였다. 서미수(徐美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5일 경진효원전에 나아가 단오제(端午祭)를 행하였다. 5월 6일 신사권강하였다. 소대하였다. 이경일(李敬一)을 형조 판서로, 서정수(徐鼎修)를 판의금부사로, 신사운(申思運)을 한성부 판윤으로, 조진관(趙鎭寬)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5월 7일 임오권강하였다. 5월 ..

카테고리 없음 2025.06.04

헌종실록3권 헌종2년 1836년 12월

12월 1일 경술임금이 친히 혼전(魂殿)에서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희정당(熙政堂)에서 권강(勸講)하였다. 평해군(平海郡)의 소실(燒失)된 가호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옷이 얇은 군병(軍兵)과 걸인(乞人)들에게 휼전을 베풀었다. 12월 2일 신해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2월 3일 임자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2월 4일 계축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2월 5일 갑인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12월 6일 을묘영해읍(寧海邑) 등의 소실(燒失)된 가호에 휼전을 베풀었다. 12월 12일 신유기설제(祈雪祭)를 행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하고 죄인 남응중(南膺中)의 실정을 구핵(究覈)하였다. 12월 14일 계해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금년의 영남 농사는 전황(全荒)을 면치 못하여 공진(公..

헌종실록3권 헌종2년 1836년 11월

11월 1일 경진임금이 친히 혼전(魂殿)에서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11월 7일 병술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북도에 흉년(凶年)이 든 모양이 근년 가운데 가장 심한 듯하니, 겨울철과 춘궁기에 백성들의 황급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본도에서 바치는 삼포(蔘布)를 돈으로 대납케 하되, 그 가운데 절반은 진자(賑資)에 쓰도록 하라. 단천(端川)의 당년조 공은(貢銀)도 일체 획급(劃給)하고, 진상할 녹용(鹿茸)도 절반은 봉납을 정지하되, 아울러 진자에 보태도록 하라."하였다. 11월 8일 정해김정희(金正喜)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한응호(韓應浩)를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1월 10일 기축임금이 친히 혼전에서 조상식(朝上食)을 행하였다. 11월 11일 경인임금이 친히 혼전에서 조상식과 주다례를 ..

헌종실록3권 헌종2년 1836년 10월

10월 3일 계축임금이 친히 효화전(孝和殿)에서 동향제(冬享祭)를 행하였다. 10월 5일 을묘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 이지연(李止淵)이 아뢰기를,"강원 감사의 연분(年分)017) 을 장계(狀啓)한 가운데 전세(田稅)와 대동 수미(大同收米)를 정지해서 물리는 일을 후록(後錄)에 올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감사의 아뢴 바는 비록 백성들의 사정이 절박한 데에서 나왔다 하나, 정세(正稅)는 그 법의(法意)가 지극히 중한 것입니다. 청컨대 해도(該道)의 감사 한익상(韓益相)을 파직하소서."하니, 윤종하였다가, 좌..

헌종실록3권 헌종2년 1836년 9월

9월 1일 신사임금이 친히 혼전(魂殿)에서 삭제(朔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소대(召對)하였다. 9월 2일 임오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9월 3일 계미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9월 4일 갑신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9월 5일 을유희정당에서 권강하였는데, 《대학(大學)》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왕 대비가 이르기를, "금년 농사가 흉참(凶慘)하여 백성들의 의식(衣食)이 앞으로 함께 어렵게 될 터이니, 참으로 몹시 민망스럽다. 농사란 백성들의 근본인데, 농사가 이미 흉년이 들었으니, 백성들이 살 수 없게 되면 나아가 나라에서 그 해를 입게 될 것이다. 조용히 그 까닭을 생각해 보건대, 이는 내가 이 자리에 있으면서 꾀한 바가 없..

헌종실록3권 헌종2년 1836년 8월

8월 1일 임자임금이 친히 혼전(魂殿)에서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희정당(熙政堂)에서 권강(勸講)하였다. 8월 2일 계축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8월 3일 갑인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관록(館錄)014) 을 행하였다. 5점(點)을 얻은 이동적(李東迪)·권대긍(權大肯)·조계승(趙啓昇)·정귀(鄭)·이은상(李殷相)·이재직(李在直)·남헌중(南獻中)·홍열모(洪說謨)·서헌순(徐憲淳)·박제헌(朴齊憲)·조운승(曹雲承)·유진오(兪鎭五)·홍익섭(洪翼燮)·조운철(趙雲澈)·김재근(金在根)·한계원(韓啓源)·이진익(李晋翼)·이시재(李時在)·이정리(李正履)·김덕희(金德喜) 20인을 뽑았다. 8월 4일 을묘희정당에서 권강하였다. 창원읍(昌原邑) 등의 물..

헌종실록3권 헌종2년 1836년 7월

7월 1일 임오임금이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효화전(孝和殿) 추향(秋享)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전했다. 임금이 친히 혼전(魂殿)에서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7월 2일 계미전 우의정 박종훈(朴宗薰)에게 본직과 겸직을 잉임(仍任)케 하였다. 박종훈은 전에 약원의 도제조로서 파산(罷散) 중에 있었다. 7월 3일 갑신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7월 4일 을유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7월 5일 병술서경보(徐耕輔)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좌참찬 박주수(朴周壽)가 졸(卒)하였다. 전라 감사 김흥근(金興根)이 능주(綾州) 등 고을의 표퇴(漂頹)한 민가(民家)가 2백 91호이고, 익사..

헌종실록3권 헌종2년 1836년 6월

6월 4일 병진이보다 앞서 어용 탕제(御用湯劑)를 생재(生材)로 초연(炒硏)하여 궐내로 들여왔는데, 이를 달일 때 은관(銀罐)의 빛깔이 변하였으므로, 형조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내각(內閣)의 하례(下隷)가 약원(藥院)의 하례에게 연기(硏器)를 빌어 유황(硫黃)과 천초(川椒)를 갈아가지고 간 일이 있었는데, 의속(醫屬)들이 이를 모르고 궐내에 들어갈 약재를 그 그릇에 갈았던 까닭이었다. 그래서 의관(醫官)·의리(醫吏)·내각의 하례를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고, 세 제조(提調)를 파직하였으며, 인하여 입직 관원(入直官員)과 액례(掖隷)가 내국(內局)에서 약재를 주구(誅求)하는 폐습을 엄금하였다. 6월 7일 기미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숙선 옹주(淑善翁主)는 정종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