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27권, 순조 24년 1824년 10월

싸라리리 2025. 7. 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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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경신

현사궁(顯思宮)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김이양(金履陽)을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로 삼았다.

 

10월 2일 신유

좌의정 이상황이 상소하여 새로 제수한 중서(中書)056)  의 직임을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에 돈면(敦勉)한 후로 목마르듯 간절한 생각을 더욱 금할 수 없어 울적함이 얽혀 있는데, 지금 온 글을 읽어 보니 경의 사양하는 아름다움이 이에 다시 속규(俗規)를 따를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아! 지금에 이르러서 노성(老成)한 전형(典型)과 성대한 공적의 빛남이 경보다 그 누가 더 나은 자가 있기에 내가 경과 함께 다스리기를 생각하지 않겠으며, 고굉(股肱)의 의탁과 경륜(經綸)의 책임을 그 누가 나에게서 받아야 하기에 경은 나를 위해서 자임(自任)하기를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이 내가 재상으로 정하여 어려움을 강제(康濟)하기를 깊이 바라는 것이다.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고 즉시 나와 명에 응해서 국사를 다행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3일 임술

이조원(李肇源)을 우빈객으로 삼았다.

 

10월 4일 계해

우박이 내렸다.

 

10월 5일 갑자

김시근(金蓍根)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우의정 이서구(李書九)가 상소하여 새로 제수한 중서(中書)의 직임을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측석(側席)하는 마음이 목이 마른 것 같을 뿐만이 아닌데, 온 글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다. 지난번 경이 당한 일은 참으로 내가 밝지 못한 데 말미암았으나 그것이 구허 날조(構虛捏造)임은 부유(婦孺)들이 모두 알고, 나 비록 밝지 못하나 역시 환히 알아서 소석(昭晰)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다시 왜 제기하여 스스로 재예(滓穢)057)  라고 이르는가? 예로부터 명신(名臣)·현보(賢輔)로서 참혹하게 무멸(誣衊)을 입음이 이따금 경보다 더 심한 경우가 있었지만, 임금이 변석(辨晰)한 후에는 일찍이 융통성 없이 고집하며 영원히 인혐한 자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경이 말한 바는 비단 억지로 끌어댄 것일 뿐만 아니라 거의 내가 변석한 것이 경에게는 있으나마나 하여 경중(輕重)을 가늠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니, 경의 생각에 어찌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경에게 바라노니, 다시는 제기하여 나로 하여금 거듭 그 밝지 못했던 허물을 뉘우치게 하지 말라. 노친을 봉양한다는 정리(情理)에 이르러서는 나 역시 알고 있는데, 예(禮)에서 말한 바가 비록 그와 같지만 고금을 두루 상고해 보아도 역시 예설(禮說)대로 다하지는 못했었다. 하물며 대관(大官)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분주한 직이 아님에랴? 어버이를 봉양하고 논도(論道)하는 두 가지 일이 서로 방해되지 않게 경제(京第)로 모시고 오면 이치에 합당할 것인데, 어찌 이렇게 하지 않고서 한갓 예만 끌어대는가? 아! 내가 반드시 경을 세우려고 하는 뜻이 어찌 부질없이 그러겠는가? 서로 느끼는 이치는 말을 많이 하는 데 있지 않으니, 경은 즉시 벌떡 일어나 나라 일을 크게 구제 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9일 무진

비국에서 평안 감사 김교근(金敎根)의 장계로 인하여 아뢰기를,
"본도의 구환(舊還)을 탕감할 때에 병영곡(兵營穀) 각년의 구환 절미(折米) 7천 9백여 석을 행회(行會)하는 원수(元數) 가운데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니, 청컨대 일체로 탕감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10일 기사

좌의정 이상황이 재소(再疏)하여 상직(相職)을 사양하니, 비답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10월 15일 갑술

왕세자에게 명하여 현사궁의 망제를 섭행하게 하였다.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다. 전교하기를,
"근년 이래로 재변이 없는 때가 없었는데, 동절(冬節)에 천둥의 이변이 있는 것은 거의 해마다의 일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러서 또 다시 경계를 알리고 있다. 이는 참으로 내가 부덕하여 위로는 하늘의 마음을 선양(宣揚)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한 소치이니, 두렵고 황송한 마음이 연곡(淵谷)058)  에 떨어진 것과 같다. 오늘부터 감선(減膳)하고, 3일 동안 정전(正殿)을 피하겠다. 중외의 진언(進言)하는 자로 하여금 각기 임금의 허물과 시정(時政)의 잘못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에서 의계(議啓)하여 진면(陳勉)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옥당(玉堂) 【응교 박회수(朴晦壽)·부응교 윤명규(尹命圭)·부교리 홍희조(洪羲祖)·부수찬 박노수(朴潞守)이다.】 에서 연차(聯箚)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건대 지금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민생이 시달리고 있어 일마다 경척(警惕)하지 않을 수 없고 날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시조(施措)하는 즈음에 동칙(董飭)하는 한마디 말씀도 듣지 못하겠고, 사륜(絲綸)하는 즈음에 분발하는 마음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매양 겨울철에 천둥의 이변(異變)을 당해서야 비로소 자책(自責)하고 도움을 구하는 말씀이 계시니, 거의 형식적인 것만 갖추는 일과 같아서 일이 막 지나가면 전대로 유유 범범(悠悠泛泛)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이는 바로 신들이 가만히 우려하고 탄식하는 바입니다. 인군(人君)이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지성(至誠)으로 하여 거짓이 없음이 밥 먹고 쉬는 동안에도 간단(間斷)이 없어야 하며 창황(蒼黃)한 즈음에도 태만함이 없어야 합니다. 참으로 혹 유행(流行)하는 천재(天災)를 당하면 마땅히 실제의 마음으로서 실정(實政)을 행해야 할 뿐인데, 전하께서는 한갓 사령(辭令)만 아름답게 하시어 족히 신민들의 구경거리만 삼으니,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천재를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동하는 이치는 오로지 한 ‘성(誠)’자에 있습니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성(誠)은 기(幾)이다.’고 하였으니, 오늘 구언(求言)하는 전교는 바로 전하의 성(誠)의 기(幾)인 것입니다. 이 말을 미루어 마음에서 구하여 지금부터 마음속에 경계하고 깨달아 무릇 한 정사를 내고 한 가지 일을 행할 때에 반드시 실심(實心)으로 해나가면 백관(百官)으로서 게으른 자가 이로 말미암아서 떨치게 되고, 만민(萬民)으로서 곤란을 겪는 자들이 이로 말미암아서 소복(蘇復)될 것이며, 하늘을 감동시켜서 재변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이니, 다시 더 무엇을 힘쓰겠습니까? 성심(誠心)·성신(誠身)과 지행(知行)은 서로 따라다니는 것인데, 지행의 용공(用工)은 강학(講學)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전(厦氈)059)  에서의 삼강(三講)이 오랫동안 폐지되었고, 궁중(宮中)의 심수(深邃)한 가운데서 십한 일폭(十寒一曝)을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오늘부터 신하들을 접견하시고 자주 강대(講對)를 내리시면 비단 성상의 공부가 빛나는 공효(功効)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가모(嘉謨)가 날로 진달되고 모든 치적(治績)이 이룩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성(誠)에 힘써서 재변을 그치게 하는 하나의 큰 기회(機會)가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대사간 이광문(李光文) 등이 상소하여 진면하니, 아울러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해에 구언(求言)하는 기회를 만나서 대략 부설(膚說)060)  을 진달하였는데, 전학(典學)에 부지런하라는 한 가지 일이었습니다. 전에는 삼주(三晝)에 소접(召接)하였으니 부지런히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나, 모두가 형식으로 응하였고, 이제는 그 형식적인 것마저도 없습니다. 학문은 바로 제왕이 정사를 하는 근본인데, 전하께서 일찍이 마음 쓰지 않으심이 이와 같으시니, 인애(仁愛)의 하늘이 어찌 경고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영묘(英廟)의 만절(晩節)을 보기에 미쳐서는 덕량(德量)이 넉넉하시고 지교(智巧)를 쓰지 않으시어 사대부들로서 큰 자는 본디 광명(光明)·준위(俊偉)하였지만 작은 자들도 명절(名節)을 돈독히 숭상하여 몸가짐이 방정(方正)한 자가 많았었는데, 지금에는 전배(前輩)의 장자(長者)다운 풍도를 다시는 어슴푸레하여 볼 수가 없습니다. 위로는 달관(達官)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료(庶僚)에 이르기까지 사치(奢侈)만을 능사로 여기고 분경(奔競)061)  을 가계(家計)로 삼아서 지위가 낮으면 부끄럽게 여기고, 구마(裘馬)062)  와 전택(田宅)이 남보다 많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기어,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사풍(士風)이 이러하니 어떻게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외방 주군(州郡)의 관리로 법을 받들지 않음이 많아서 무고한 백성들이 치우치게 그 해를 받고 있습니다. 신이 선조(先朝)를 섬긴 지 여러 해였는데, 종리(綜理)063)  의 정사에 정신을 가다듬어 백관들이 직사를 잘보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고 순량(循良)064)  이 잘 다스려서 세상에 인재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탐관 오리(貪官汚吏)가 있기는 하였지만 항상 우레 같은 위엄이 위에 있고 어사(御史)가 경내에 임한 것 같이 두려워해서 감히 방자한 짓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크게 탐학(貪虐)하고 불법을 저지르는 관리가 지금은 없다.’고 하였는데, 신이 보기에는 사람들마다 모식(蟊食)065)  하고 무리하게 청구하여 군병들은 근심하고 백성들은 원망합니다. 아! 민심이 이러한데 어떻게 나라를 공고히 하겠습니까? 거룩하신 두 성왕(聖王)께서 배양(培養)한 덕과, 백성들에게 어질게 하고 관리들을 거느리는 법을 본받아서 계술(繼述)할 만한데, 지금 보기에 옛날을 따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비록 근일의 일로서 말하더라도 과시(科試)는 인재를 뽑으려는 것인데, 주사(主司)에서 잘 대양(對揚)하지 못하고 사자(士子)들은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서 난잡을 부려 일을 그르쳐 원근에 부끄러움을 끼치니, 유식한 자들의 논의가 도리어 ‘과거가 있는 것이 과거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각(臺閣)을 설치함은 바른 말을 듣기 위해서인데, 굶주린 까마귀처럼 입을 다물고 조용히 말을 하지 않으면 혹시 있다 하더라도 협잡(挾雜)하여 없는 일을 시끄럽게 부추켜 일으키고, 임금의 잘못과 국계(國計)와 민막(民瘼)에 관계된 것은 잊어버리는 지경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등류가 매우 많은데, 단지 한두 가지만 들어도 여러 폐단을 그로 인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전하께서 실심(實心)으로 받아들이신다면 하늘을 공경하고 수성(修省)하는 도리와 조종(祖宗)을 본받아서 계술하는 방도에 마땅히 조금은 보탬이 될 것이니, 오직 전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무상(無狀)한 천신(賤臣)이 오랫동안 있지 못할 자리에 있으면서 등연(登筵)하여 간절한 말을 하였으나 매양 한바탕 형식이 되고 말았었는데, 근래에 정석(鼎席)066)  이 구비되어 쌓인 조정의 일을 정돈할 기약이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처럼 혼미하고 병이 든 몸으로 머뭇거리며 스스로 그칠 줄을 모르면, 사람이 직업을 잃는 것은 육책(六責)067)   중의 하나인데, 재이(災異)를 부른 것이 어찌 이로 말미암아서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척출(斥黜)을 내리시어 하늘의 견책에 우러러 답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계한 말에 경의 우국애민(憂國愛民)함이 이러한데,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인(自引)하는데 이르러서는 비록 재이가 없더라도 곧바로 경같은 노성(老成)한 덕망이 있는 자의 마음을 다해 보좌함을 의지해야 하는데, 더군다나 이런 때이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 것이며, 더욱 한 몸의 이해를 돌보지 않는 정성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6일 을해

이조원(李肇源)을 형조 판서로, 이헌위(李憲瑋)를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한치응(韓致應)이 임소(任所)에서 졸(卒)하였다.

 

좌의정 이상황(李相璜)이 삼소(三疏)하여 상직(相職)을 사양하니, 비답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우의정 이서구(李書九)가 재소하여 상직을 사양하니, 비답을 내려 돈면하였다.

 

10월 17일 병자

심능악(沈能岳)을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10월 18일 정축

종백(宗伯)068)  을 보내어 좌의정 이상황에게 유시하기를,
"어제 비답한 후에 중서(中書)의 고사(故事) 역시 예(例)가 갖추어졌다. 측석(側席)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간절한데, 경은 어찌하여 즉일로 조정에 나오지 않고 지체하는가? 어찌 나의 성례(誠禮)가 미진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바라는 마음이 지극하여 이에 정경(正卿)을 보내어 내 뜻을 가서 선유하니, 경은 즉시 함께 들어오라."
하였다.

 

10월 19일 무인

윤풍렬(尹豐烈)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시망(諡望)에 대해 하비(下批)하였는데, 영부사 서용보(徐龍輔)는 익헌(翼獻)으로, 증 영의정 홍세공(洪世恭)은 충헌(忠憲)으로, 공조 판서 이충원(李忠元)은 충헌(忠憲)으로, 증 이조 판서 김부필(金富弼)은 문순(文純)으로, 증 이조 판서 이돈서(李敦敍)는 충민(忠愍)으로, 증 이조 판서 권도(權濤)는 충강(忠康)으로, 예조 판서 조환(趙瑍)은 효정(孝貞)으로, 예조 판서 오재소(吳載紹)는 정헌(定獻)으로, 이조 판서 김희순(金羲淳)은 문간(文簡)으로 하였다. 서용보는 특교(特敎)로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았다.

 

첨지(僉知) 한철제(韓喆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탄강하신 옛터가 안변부(安邊府) 익위사(翊衛社) 익실방(翼室坊) 금구(琴龜) 땅에 있는데, 산천(山川)이 육령(毓靈)하고 사록(沙麓)069)  이 정상(呈祥)하여 상광(祥光) 서애(瑞靄)가 울울 총총(鬱鬱蔥蔥)해 5백 년이 된 지금까지 은연중 바야흐로 흥왕하여 다하지 않은 기상이 있습니다. 이 터 남쪽 몇 리 남짓되는 곳에 또 풍류산(風流山)이 있으니, 바로 국구(國舅) 이상 3대의 세장지(世葬地)입니다. 신의 왕후가 탄강할 때에 풍류의 소리가 3년 동안 이곳에서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본명이 청학산(靑鶴山)이었는데, 인하여 풍류산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천명(天命)이 돌아갈 곳이 있어서 지기(地基)가 먼저 흥왕(興旺)한 것이니 그곳의 조짐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일찍이 영묘조(英廟朝)을해년070)  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에 비석을 세웠는데, 이는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탄강하신 옛터이고, 선조(先朝) 정미년071)  에 함흥(咸興) 경흥전(慶興殿)에 비석을 세웠으니, 이는 정종 대왕(定宗大王)과 태종 대왕(太宗大王) 두 성인께서 탄강하신 옛터이며, 기미년072)  에 곡산(谷山) 하남면(下南面)에 비석을 세웠는데, 이는 신덕 왕후(神德王后)께서 탄강하신 옛터입니다. 비석을 세우는 전례(典禮)가 유독 우리 신의 왕후께서 탄강하신 옛터에만 빠진 것은 크게 나라의 흠전(欠典)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두 성조(聖朝)에서 이미 행한 예를 우러러 본받아서 빨리 여러 백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한 전례를 거행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리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신의 성후가 탄강하신 옛터에 대한 말이 이처럼 정녕한데, 만약 그렇다면 곡산(谷山)에도 역시 선조에서 비석을 세운 일이 있었으니, 어찌 다를 수가 있겠는가? 새 도백(道佰)이 내려 갈 때에 본쉬(本倅)와 함께 안동(眼同)하여 형지(形地)를 봉심한 후에 장문(狀聞)하라는 일을 분부하라."
하였다.

 

10월 22일 신사

승지를 보내어 우의정 이서구(李書九)에게 유시하기를,
"재비(再批)에서 내 마음을 다 유시하였으니, 생각건대 경은 반드시 마음속에 감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내가 경을 반드시 임용하고자 한 것은 대개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요 익숙히 상량(商量)하여 그런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경에게 바라는 것이 예사로 위로하여 면려하는 데 비할 바가 아니라, 바로 일단의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다. 군신(君臣) 사이의 의리는 천지 사이에서 도피할 수 없는 것이니, 설사 경의 정세가 참으로 움직이기 어려우며 정리상 참으로 억지로 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고인(古人)으로 하여금 경의 처지에 당하게 하고, 그 임금의 사의(辭意)가 내가 경에게 하는 것과 같다면 반드시 억제하고 마음을 돌렸을 것인데, 경은 어찌하여 그처럼 돌아보지 않는가? 내가 보기에 경은 단지 나올 의리만 있고 나오지 못할 의리가 없는데도 경은 오히려 막연하니, 어찌 내 성의가 부족하고 내 말이 오히려 범연하여 경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좌의정은 출사해 응할 기약이 있으니, 이때에 목마르듯이 경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심하다. 이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가서 지극한 뜻을 선유하는데, 경은 어찌하여 예(例)대로 한 후에 나와야 하겠는가?"모름지기 즉시 길을 떠나 며칠 안으로 숙배하기 바란다."
하였다.

 

10월 24일 계미

동지 정사(冬至正史) 권상신(權常愼)과 부사(副使) 이광헌(李光憲), 서장관(書狀官) 이진화(李鎭華)를 소견하였는데,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10월 25일 갑신

우의정 이서구가 삼소(三疏)를 올려 사직하니, 비답을 내려 돈면하였다.

 

병조 판서 김이교(金履喬)가 아뢰기를,
"고 충신(忠臣) 홍임(洪霖)이 무신년073) 청주(淸州)의 적변(賊變) 때 편비(偏裨)로서 난리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홍한귀(洪漢龜)에게 영묘조(英廟朝)에서 특교(特敎)로 부장(部將)을 가설(加設)하여 제수하였고, 그의 손자 홍경(洪儆)과 증손 홍주구(洪疇九) 역시 상신과 장신의 진달로 인해 조용(調用)하여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홍주구의 아들 홍석붕(洪錫鵬)의 나이가 이미 40이 넘었는데, 떠돌아 다니며 의탁할 곳이 없습니다. 비록 남행(南行)의 천거가 없지만 그 부·조(父祖)의 이미 있었던 예에 의하여 수용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26일 을유

차대(次對)하였다. 내관(萊館)074)  의 공작미(公作米)를 이미 있었던 예에 의하여 5년을 한정해서 기한을 물리라고 명하였는데, 대신이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장계로 인하여 청한 때문이었다. 좌의정 이상황(李相璜)이 진달하여 성학(聖學)에 힘쓰고 궁료(宮僚)를 가려뽑으며, 수령을 가리고 고과(考課)를 엄히 해야 한다고 아뢰니, 모두 가납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 조가(朝家)의 법이 매우 엄정하여 환첩(宦妾)과 복례(僕隸)로 대우하는자는 단지 쇄소(灑掃)와 사령(使令)에 이바지할 뿐이었고, 선조(先朝)에 이르러서는 단속함이 더욱 엄하여 한번 죄를 지으면 반드시 배가(倍加)하는 법을 썼습니다. 근래에 환시(宦侍)가 궐안에서 부액(扶掖)하고 거리에서 호창(呼唱)하며, 액속(掖屬)들이 궁첩(宮妾)에게 빌붙어 의지하여 임역(任役)을 도모해서 차지한 것은 전혀 법과 기강에 어두우며, 연탑(筵榻)에서의 주선에 경외(敬畏)함이 아주 부족하고, 계정(階庭)에서의 공급(供給)이 혹 만홀(慢忽)한데, 이런 부류는 밖으로 모습이 나타난 것이지만 궁첩은 반드시 그런 폐단이 없으리라고는 실로 감히 보장하지 못합니다. 신이 감히 선왕(先王)께서 이런 무리들을 억제한 것으로써 전하에게 바라오니, 청컨대 이런 거조(擧條)를 내반원(內斑院)에 반포하여 벽에 걸어 항상 보도록 하여 경외하며 조심할 줄을 알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29일 무자

제도(諸道)와 제도(諸都)에 당년의 재결(災結) 4만 3천 1백 69결(結)을 급재(給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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