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1권, 숙종 38년 1712년 6월

싸라리리 2025. 11. 2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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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계축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차자를 올려 정과(庭科) 때 부정(不正)을 살피고 검속(檢束)하지 못한 죄를 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6월 2일 갑인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탄(李坦)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갈 때에 조령 산성(鳥嶺山城)을 순심(巡審)하고 즉시 계문(啓聞)하라고 명하였으니, 대개 전날 대신(大臣)이 진달한 말로 인한 것이었다.

 

6월 3일 을묘

이만성(李晩成)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구만리(具萬理)를 장령(掌令)으로, 권익관(權益寬)을 지평(持平)으로, 이택(李澤)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가 치계(馳啓)하기를,
"총관(摠管)이 백두산에서 내려왔기에, 신 박권이 말하기를, ‘임강현(臨江縣) 근처에 한 물이 흘러 와서 대홍단수(大紅丹水)에 모이니, 분명히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로서 이것이 곧 진짜 두만강(豆滿江)인데, 흠차(欽差)께서 찾으신 수원(水源)은 바로 대홍단수의 상류(上流)입니다.’ 하니, 총관이 즉시 산도(山圖)를 꺼내서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내가 조선 사람과 함께 형세(形勢)를 자세히 살펴서 수원(水源)을 두루 보았는데, 이것 외에 실로 다른 물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신 박권이 말하기를, ‘여기서부터 거리가 10여 리(里)에 지나지 않으니, 흠차께서 잠시 보시면 실상(實狀)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그대 나라의 길을 아는 사람이 말하기를,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흐름이 끊긴 뒤 백여 리에 비로소 솟아난다.」고 하였는데, 지금 내가 찾은 수원이 이 말과 서로 부합된다. 임강대(臨江臺)의 상변(上邊)에서 와서 모이는 물은 반드시 두만강의 근원이 아니고, 대국(大國) 지방의 여러 물이 합류(合流)하여 여기에 와서 모이는 것인 듯하다. 또 내가 이것으로써 이미 필첩식(筆帖式)313)  을 보내어 황상(皇上)께 주문(奏聞)하였으니, 내가 과연 수원을 잘못 찾았다면, 국왕(國王)이 황상께 주달한 연후에야 다시 순심할 수 있다.’ 하였으며, 차원(差員)·군관(軍官)·역관배(譯官輩)의 말이 또한 총관의 말과 같았습니다.
총관이 또 산도(山圖)를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수원의 흐름이 끊긴 곳이 이처럼 모호하여 분명하지 않아 만약 표지(標識)를 세우지 않는다면 피차 고거(考據)하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목책(木柵)으로 한계(限界)를 정함이 어떻겠는가.’ 하기에, 신 등이 대답하기를, ‘목책은 그곳에 나무가 혹 있기도 하고 혹 없기도 하니, 차라리 그 편부(便否)에 따라서 혹은 흙을 쌓고 혹은 돌을 모으며, 혹은 목책을 설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감히 제 마음대로 하지는 못합니다. 마땅히 조정(朝廷)에 품(稟)하여서 편의(便宜)에 따라 역사(役事)를 시작해야 할 것이니, 대국 사람이 와서 간검(看檢)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대국 사람이 반드시 와서 볼 것 없이 거행 여부를 매년 절사(節使)편에 나에게 알려 다시 아뢰게 하는 근거를 삼을 것이며, 표지(標識)를 설치한 뒤에는 매년 순심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산도(山圖) 1본(本)은 돌아가 황상께 아뢰어야 하고, 1본은 마땅히 국왕 앞으로 보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두 강의 원류가 이미 작정(酌定)되고 허다한 인마(人馬)가 하나도 손상(損傷)됨이 없었으며, 총관이 비단 모든 일에 폐단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그 행자(行資)에서 소를 연달아 내어 주어 따르는 사람을 먹이고 10석(石)의 쌀을 또 길을 여는 장졸(將卒) 등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실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6월 4일 병진

일전에 지경연사(知經筵事) 조태채(趙泰采)가 연백(筵白)하여,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의 여러 왕릉(王陵) 중에서 무너진 것을 보수(補修)하기를 청하니, 해조(該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복계(覆啓)하자, 그대로 시행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이만성(李晩成)이 【이만성은 이미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나 미처 알지 못하여 호군(護軍)으로 썼다.】  시골에서 진소(陳疏)하여 명(命)을 어긴 죄를 받기를 청하고, 또 안흥 방어영(安興防禦營)의 설치는 애초 자신의 장품(狀稟)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비방하는 의논이 마구 일어나 마침내 혁파(革罷)되기에 이르렀다며 이를 끌어대어 혐의(嫌疑)의 단서(端緖)로 삼아 말하기를,
"한 번 안흥(安興)의 명호(名號)를 올리고 나서부터 수영(水營)에서 반드시 저지하고자 하였으니, 그 까닭이 있습니다. 대저 속읍(屬邑)이 나뉘어지면 수색(需索)314)  이 넓지 못하고 군졸(軍卒)이 적으면 징렴(徵斂)이 또한 줄어들게 되니, 저 수신(帥臣)이 깊이 싫어하는 바가 단지 권한(權限)이 나뉘어지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해 가을에 거만스레 치보(馳報)하였으나 비국(備局)에서 그 불편함을 논하여 채택되어 시행되지 못하였던 것인데, 그 밤낮으로 경영(經營)하던 저지의 계책을 그래도 그만두지 아니하여 오래지 않아 도로 혁파한다는 말이 이미 전파(傳播)되었습니다. 지금의 수론(首論)하는 자가 스스로 내포(內浦)를 왕래하였다고 하고, 한두 사람의 이어 진달한 경재(卿宰)가 또 일찍이 영하(營下)315)   가까운 곳에 살았으니, 이제 말하는 바가 이들이 선동(煽動)하는 말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보장하기란 어렵습니다. 적이 생각하건대, 사방(四方)에서 조정을 가볍게 여김이 오늘부터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그래도 나라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안흥의 일은 이미 좋은 계책이 아님을 알았으니, 이를 고친다 해도 손상(損傷)될 것이 없다."
하였다.

 

6월 6일 무오

평안도(平安道) 삼등현(三登縣)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지평(持平) 권익관(權益寬)이 논하기를,
"대정(大庭)의 친시(親試)는 승선(承宣)316)  이 으레 모든 일을 주관(主管)하니, 만약 사단(事端)이 있으면 책임이 돌아가게 됩니다. 올봄 정시(庭試) 때 시장(試場)이 엄하지 못하였음이 여러 신하들의 장주(章奏)에 뒤섞여 진달되어 일을 관장한 관원이 모두 이미 나추(拿推)되거나 파직되었습니다만, 만약 주장(主掌)하는 사람이 엄중히 경칙(警飭)을 더하여 일에 따라 선처(善處)하였다면, 비가 아무리 몹시 내리고 선비들이 아무리 많다 한들 그 잡란분뇨(雜亂紛鬧)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직책을 다하지 못한 죄책(罪責)이 이미 드러났으니, 문비(問備)317)  의 벌(罰)은 너무 가볍습니다. 청컨대 해당 승지(承旨)를 파직하소서. 시사(試士)하는 장소는 원래 안팎의 한계가 있는데도 혹 장외(場外)에서 글을 지어 시소(試所)로 들어가 바친 자가 있기도 하였으니, 과장(科場)을 설치한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옥서(玉署)의 장관(長官)은 정시(庭試)의 거자(擧子)중에 궐문(闕門) 밖의 공해(公廨)에 머물러 앉아 글을 지어 바친 자가 있음을 직접 듣고 많은 사람이 모인 넓은 자리에서 증언(證言)했다 하니, 진실로 이런 일이 있는데도 핵실(覈實)하여 다스리지 않는다면 장차 과장을 엄하게 하고 법강(法綱)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자의 성명(姓名)을 함문(緘問)318)  하게 하고, 법에 의해 과단(科斷)하여 후폐(後弊)를 막으소서. 정시의 거자 중에 과연 궐문 밖에서 지어 바친 자가 있다면 그 법을 업신여겨 기탄(忌憚)없음이 이보다도 심할 수가 없습니다. 부제학(副提學) 이건명(李健命)은 이미 직접 그 사람이 누군지 들었다면 진실로 당장 주달(奏達)하여 유사(有司)에 넘겨 주어야 마땅한데도 지난번 등대(登對)하였을 때에 이번 과거의 엄정(嚴正)하지 못함을 장황하게 논하되 끝내 말이 이에 미치지 않았으니, 소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부제학 이건명을 추고(推考)하소서.
기묘년319)  의 과거가 이제 비록 구차하게 그대로 보존되었으나 그 방목(榜目)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로서는 청선(淸選)에 막힘을 당한다 하여 개인적으로 그 사람을 미워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김유(金維)가 윤기경(尹基慶)의 집을 빌어 들었는데, 김유가 분관(分館)320)  하는 자리에서 이의(異議)를 제기하자 윤기경의 집의 계집종 몇 사람이 밤을 타 김유의 문으로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붓고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당장 독촉하여 나가게 하고는 잠시도 머무르지 못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1푼의 염치와 의리가 있다면 어찌 감히 사람을 보내어 자기를 의논한 사람에게 마치 시정잡배처럼 욕설을 퍼부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윤기경은 감히 ‘집에 있어서 알지 못한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기묘년의 급제(及第) 윤기경을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제4건과 제5건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튿날 또 승지를 파직하라는 계사(啓辭)의 조어(措語)를 고쳐 말하기를,
"거자의 출입과 수권(收券)의 조만(早晩)은 승선(承宣)이 맡는 것입니다. 올봄의 정시에 문한(門限)을 금하지 않았고 시권(試券)을 몰래 던져 넣은 것이 여러 신하들의 장주(章奏)에 모두 진달되었으니, 시사(試士)를 주관(主管)하는 자가 마땅히 먼저 벌을 받아야 할 것인데, 수권관(收券官)은 죄가 파직에 이르고 승지는 문비(問備)의 박책(薄責)에만 그쳤습니다. 조가(朝家)에서 벌을 씀이 이와 같이 거꾸로 되어서는 안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6월 7일 기미

홍우녕(洪禹寧)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부제학(副提學) 이건명(李健命)이 권익관(權益寬)이 함문(緘問)을 계청한 일 때문에 상소(上疏)하여 함문의 명을 정지하기를 바라며 말하기를,
"단봉문(丹鳳門)은 이미 외문(外門)인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 방한(防限)하지 아니하여 유생(儒生)들이 제 마음대로 들락거리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밖에서 글을 지어 바치는 것을 누가 금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하는 말이 시끄러울 뿐만이 아니기 때문에 신이 과연 동료들과 수작(酬酌)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전번에 영백(嶺伯) 이탄(李坦)의 집에서 마침 두 세 사람의 시임 재상(時任宰相)을 만났는데, 신이 수권관(收券官)과 금란관(禁亂官)을 죄주기를 청한 일을 그르다고 하고, 또 밖에서 글을 지어 바친 것에 대해 듣고 아는 일을 신에게 묻는 자가 있길래 신이 범연(泛然)히 응답하였더니, 간혹 신의 몸을 놀리고 농을 거는 자도 있었으나 마침내 서로 더불어 한 번 웃고 자리를 파(罷)하였습니다. 비록 소장(疏章)에다 뚜렷하게 말한 일이라 하더라도 삼사(三司)에서 나왔다면 언근(言根)의 구문(究問)은 오히려 후폐(後弊)에 관계될까 염려됩니다. 하물며 사실(社室)에서 수작한 것을 반드시 구핵(究覈)하고자 한다는 것은 일찍이 듣지 못한 바입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외람되게 경악(經幄)의 직임에 있으니, 결코 차마 저로부터 길을 열어 조정(朝廷)의 체통(體統)을 손상시키고 후세의 비방을 초래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이번 과거의 일은 거리에 떠도는 말의 단서가 하나만이 아니어서 귀가 있는 자 모두 듣고 입이 있는 자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일일이 남에게 묻고 또 모두 지적하여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 핵실(覈實)하여 법에 저촉될 만한 것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만, 이제 대신(臺臣)이 다만 밖에서 글을 지은 거자(擧子)가 법망(法網)에서 빠져 나간 데 분개하여 앞장서서 먼저 홀로 거론(擧論)했으니,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렇게 한다면 허다한 잡되고 어지러운 일을 색책(塞責)하고 미봉(彌縫)할 수 있겠는지요.
연주(筵奏)할 때 언급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옥당(玉堂)에서 논사(論思)하는 체모는 대각(臺閣)에서 규핵(糾劾)하는 논계(論啓)와 같지 않은 법입니다. 외간(外間)에서 들은 바를 어떻게 즉시 모두 지명(指名)하여 외람되게 전석(前席)에서 진달한단 말입니까. 성명(成命)이 내려졌으니, 신이 어찌 지적할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만, 지나간 날의 기록을 두루 상고하고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참작해 보건대, 일찍이 사실(私室)의 수작(酬酌)을 공가(公家)에서 발문(發問)하여 따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런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신은 위무(衛巫)의 감방(監謗)321)  과 진법(秦法)의 우어(偶語)322)  가 오늘날에 다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거듭 생각하였지만, 결코 명을 받들기 어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거자가 밖에서 글을 지어 바친 일이 과연 있었다면 과장(科場)을 엄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그대로 둘 수 없기 때문에 즉시 그 논계를 윤허한 것이다. 경(卿)의 소(疏)는 참으로 의견이 있으니, 함문의 명은 도로 정지한다."
하였다. 권익관이 이로 인하여 인피(引避)하여 말하기를,
"장외(場外)에 앉아 글을 짓고 시소(試所)에 들어가 바친다는 것은 실로 전에 듣지 못한 바입니다. 옥서(玉署)의 장관이 친히 그 사람에 대해 듣고 진신(搢紳)들이 앉은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였으니, 신은 핵실(覈實)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그 간람(奸濫)을 징계할 수 없고, 함문을 발(發)하지 않으면 그 성명(姓名)을 핵실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이 발계(發啓)하고 성지(聖旨)로 즉시 윤허하신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말인즉, 처음에는 중외(中外)의 전해지는 말로 돌렸고, 중간에는 혹 범연히 응답했다느니 혹 놀리고 농담했다느니 하였으며, 말미에는 감방·우어란 말로 후폐에 관계된다고 핑계를 대고 결론지었으나, 실제로는 가리고 막아 스스로 저지할 계책을 꾸민 것입니다. 지금 함문하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을 발고(發告)하게 하는 것으로서 애초 언근(言根)을 구핵하거나 비례(非禮)로 핍박하여 묻는 것에 비길 바가 아니니, 이것이 과연 조정의 체통을 손상시키고 후세의 비방을 초래하는 데 가깝단 말입니까. 지난날 이장휘(李長輝)가 비서(飛書)323)  를 지금의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에게 전(傳)하자, 그때 조정의 의논이 민진후를 핵문(覈問)할 것을 청하였으며, 선왕조(先王朝)의 고(故) 판서(判書) 김좌명(金佐明)이 연석(宴席)에서 농담을 하자 유신(儒臣)이 전석(前席)에 들어가 진달하고, 곧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문계(問啓)하게 하여 사실(私室)의 수작도 또한 발문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고례(故例)가 없다고 이른단 말입니까? 또 그 소(疏)에 이르기를, ‘들은 이가 있고 말한 이가 있어서 이미 이에 그치지 않으니, 핵실하여 법에 저촉될 만한 것이 어찌 한이 있으리까.’ 하였으니, 마땅히 일일이 지적하여 진달하고 명확하게 유사(有司)에 넘겨 주어서 과법(科法)을 더욱 엄격하게 하고, 사습(士習)이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꺼려 그렇게 하지 않고, 이처럼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은 모습을 한단 말입니까. 여러 신하들의 장독(章牘) 이외에 과연 다시 허다한 잡되고 어지러운 일들이 있어 몸소 듣고 분명하게 말한 것이 이건명이 전하는 바와 같다면 신도 또한 마땅히 일에 따라 논열(論列)할 것이나 홀로 듣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는데, 이튿날 장령(掌令) 구만리(具萬理)가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6월 9일 신유

남취명(南就明)을 승지(承旨)로, 이명준(李明浚)을 집의(執義)로, 신심(申鐔)을 교리(校理)로, 한영조(韓永祚)를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행궁(行宮)의 영건 당상(營建堂上) 이하를 모두 써서 들이라고 명하고 상(賞)을 내렸는데, 차등(差等)이 있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            구만리(具萬理)이다.】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새로 아뢰기를,
"저 사람들의 백두산 행차에 사명(使命)을 맡은 신하가 진실로 마땅히 함께 가야 하는데도,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는 대신 편비(偏裨)를 보내고 모두 물러나 앉아 몸이 쇠약하고 늙었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백두산의 길이 비록 험난하다고 하지만 차원(差員) 이하가 모두 통행(通行)했으니, 접반사와 함경 감사만 유독 가지 못한단 말입니까? 경계(境界)를 정하는 막중한 일에 다만 1장(張)의 수본(手本)으로 상문(上聞)하였을 뿐, 물의 근원을 다투어 논할 즈음에는 이미 목격(目擊)하지도 않고 단지 ‘예예’하고 답하기만 하였으니, 사명을 맡긴 뜻이 어찌 제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까. 청컨대 박권과 이선부를 모두 파직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북병사(北兵使)        장한상(張漢相)은 비국(備局)에서 강의 근원을 끝까지 찾아서 지형(地形)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는데도, 이미 직접 살피지 않고 다만 장교(將校)의 거짓 보고에 빙거(憑據)하여 흐리멍덩하게 치계(馳啓)하였으니, 높은 체하여 편안함을 도모하는 버릇이 이미 지극히 해괴합니다. 심지어는 장교배(將校輩)가 그릇 전한 말로 적당히 꾸며 상문(上聞)하였으니, 부지런하지 않고 직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 이보다도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6월 10일 임술

하교(下敎)하기를,
"황당선(荒唐船)324)  이 나오지 않는 해가 없는데, 금년에 해서(海西)가 더욱 많으니 매우 염려스럽다. 각별히 요망(瞭望)325)  ·추포(追捕)326)  등 일로 아울러 신칙(申飭)을 더하라."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저 나라에 이자(移咨)하여 금단(禁斷)을 신청(申請)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4일에 치계(馳係)하기를,
"시위(侍衛)는 배를 타고 총관(摠管)은 육로(陸路)로 오늘 경원(慶源)에 도착했고, 내일 경흥(慶興)으로 떠나려 합니다. 총관이 백두산 지도 1본(本)을 내주었기 때문에 감봉(監封)하여 올려보내며, 총관이 또 이자(移咨)라 하며 1장의 문서를 보냈기 때문에 또한 올려보냅니다. 그 이른바 ‘압록강(鴨綠江)과 토문강(土們江) 두 강이 모두 백두산의 근저(根底)로부터 발원(發源)하여 강 남쪽의 조선(朝鮮)의 경계가 된지 역년(歷年)이 이미 오래 되었다.’라는 것은 피차의 경계를 논단(論斷)함이 지극히 명백하니, 뒷날의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권이 함경(_)감사 이선부와 함께 또 봉계(封啓)하기를,
"이 달 1일에 총관이 20리 남짓되는 두리산(豆里山)으로 달려가 산마루에 올라 두만강의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바라보고 그 일행 중의 화공(畫工)에게 형상을 그리게 한 뒤 즉시 길을 되돌려서 경원부(慶源府)로 돌아왔습니다. 시위(侍衛)가 조선의 음악을 듣고자 하였기 때문에 고(鼓)·부(缶)·생(笙)·적(笛) 각 한 사람씩을 정하여 보내고 장교(將校)와 통인(通引)을 시켜 번갈아 노래부르고 춤을 추게 하였더니, 매우 즐거워하여 총관이 큰 소 두 마리를 내주어 역졸(驛卒)더러 잡아 먹게 하였으며, 전후로 내준 것이 10여 마리란 많은 수(數)에 이르렀습니다. 신 등이 가지고 온 예단(禮單) 및 문위사(問慰使)의 예단을 조사(措辭)와 함께 주었더니, 총관이 말하기를, ‘이번 길에 폐를 끼친 것이 적지 않은데 만약 예단을 받는다면 실로 황상(皇上)께서 진념(軫念)하시는 뜻에 어긋난다. 문위의 예단에 이르러서는 규례 밖에 따로 보낸 것이니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후로 찬물(饌物)을 주었더니, 저 사람이 문득 삼승(三升)327)  의 조그만 모자(帽子)·띠 등 물건으로 값을 계산하여 갚아 주었기 때문에, 이제 돌아가는 때에 미쳐 그 값으로 준 물건을 모두 돌려 보내고 역관(譯官)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대국(大國)의 사람이 황지(皇旨)를 받들어 우리 지경에 와서 약간의 찬물까지 값을 주고 사서 쓰기에 이른다면 사체(事體)가 구차(苟且)하니, 우리 나라의 도리에 있어 또 어찌 이런 일이 용납되리까.’ 하니, 통관(通官)이 말하기를, ‘황제께서 행자(行資)를 넉넉히 주시어 연로(沿路)에서 사서 쓰게 하셨으니, 이제 만약 값으로 준 물건을 도로 받는다면 총관께서 반드시 성낼 것이오. 이번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이 지극히 순조로왔는데 돌아가는 때에 미쳐 혹시라도 조그만 일 때문에 시끄러운 사단을 일으킨다면 어찌 민망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강을 건넌 뒤에 조용히 총관에게 말을 전하리다.’ 하고, 끝내 전통(傳通)하지 않았으므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총관이 전일에 보내온 자문(咨文)은 신 등이 정문(呈文)으로 발송(發送)하기로 서로 의논하였더니, 총관이 말하기를, ‘나의 자문을 정문의 상단(上端)에 등서(謄書)한 연후에야 돌아가 아뢸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대로 써 보냈습니다. 3일 식후(食後)에 그들 일행이 장차 강을 건너려 하였으므로 신 등이 함께 관소(館所)에 나아가 위문하고 이어 말하기를, ‘경계를 정해 표지(標識)를 세우는 일은 마땅히 조정(朝廷)에 돌아가 아뢰고 서서히 역사(役事)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땅은 황폐해진 지 이미 오래 되어 일찍이 간검(看檢)하지 않았으나, 이제 경계가 분명하고 도로(道路)가 이미 통하니, 공한지(空閑地)에 혹 백성을 모아 들어가 살게 하고 혹 파수(把守)를 세운다면, 허소(虛疏)한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만약 백성을 옮기고 파수를 설치하고자 한다면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니, 따로 관원(官員)을 정하고, 1년에 두 세 차례 적간(摘奸)하는 것이 착실(着實)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조정에 돌아가 진달하여 상확(商確)하여서 하겠습니다.’ 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앞으로 절사(節使)가 들어올 때에 설치의 형지(形止)328)  를 통관에게 말하여 나에게 전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총관 일행이 경원에 이른날 오랄(鳥喇)329) 장경(章京)330)   한 사람 및 그 종자(從者) 20명이 말을 타고 건너왔기에 본부(本府)의 파수하는 장수 및 군인이 막았으나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총관에게 고하였더니 총관이 장경을 불러 놓고 크게 꾸짖기를, ‘이미 국법(國法)을 범하였으니, 마땅히 돌아가 아뢰어서 처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말하기를, ‘진실로 유죄(有罪)가 되나 그가 총관을 영접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하였으니, 까닭없이 월경(越境)을 범한 것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내가 건너오지 말라는 뜻으로 분부(分付)하였는데 이번에 월경을 범하였으니 마땅히 중죄(重罪)가 있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다시 용서할 만한 정상(情狀)이 있음을 말하였더니, 총관이 말하기를, ‘장경이 만약 죄를 입는다면 본부의 관리도 또한 반드시 감죄(勘罪)의 거조(擧措)가 있을 것이니, 이 말에 의하여 돌아가 아뢰지 말 것이며, 접반사와 감사도 또한 반드시 국왕에게 진달할 것 없오.’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자리를 파(罷)하고 나올 때 총관 이하가 일어서서 공수(拱手)331)  하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비록 황제의 명을 받들고 와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지만 실로 국왕의 진념(軫念)을 힘입었습니다. 또 따로 문위사를 보내어 후하게 예단을 주시니, 권애(眷愛)하는 뜻을 알 수 있지만 황제께서 이미 폐단을 줄이라는 하교를 내리셨으므로 감히 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감사하여 받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으며, 오후에 발행(發行)하여 곧장 강변(江邊)을 향하여 건너갔습니다.
전일에 신 박권이 무산(茂山)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수역(首譯) 김지남(金指南)이 와서 말하기를, ‘시위(侍衛)가 사냥을 하러 저쪽 강변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온 뒤 은밀하게 말하기를, 「대국 경계의 수목(樹木)을 수없이 작벌(斫伐)하여 수레에 싣고 배로 운반한 흔적이 지극히 낭자하니, 그대 나라의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법금(法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이를 만하다.」고 하기에 제가 대답하기를 「강변의 무지한 백성이 이 놀랄 만한 일을 저질렀으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이 일이 한 번에 적발(摘發)되면 마땅히 죽여야 할 자가 매우 많으니, 노야(老爺)의 측은(惻隱)한 마음으로 어찌 차마 이 일을 하시겠습니까?」 하였더니, 시위가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입을 다물어서 말하지 않겠지만 다만 수행(隨行)하는 사람의 입을 가리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각별히 듣고 보아서 이미 실상(實狀)을 알아냈으나, 저 사람들이 지경 안에 있을 때에는 먼저 드러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강을 건너갔기 때문에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따로 사관(査官)으로 정해 이제 바야흐로 사핵(査覈)하고 있으니, 마땅히 추후(追後)로 계문(啓聞)하겠습니다."
하였다.

 

6월 11일 계해

밤에 달이 방(房)의 네째 별을 범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차자를 올렸다. 맨먼저 이만성(李晩成)이 안흥(安興)의 일을 상소하여 논한 것을 혐의로 삼고, 다음으로 비국 당상(備局堂上)중에 시관(試官)으로서 불안을 느끼는 자가 많고, 또 전날 연중(筵中)의 주사(籌司)의 당상이 너무 많다는 하교(下敎) 때문에 두려워한 나머지 인입(引入)하고 있으니, 마땅히 명교(明敎)를 내려 신칙하여 속히 나와 일을 보살피게 할 것을 말하였다. 또 헌사(憲司)에서 접반사와 감사의 파직을 청한 것은 집법(執法)의 의논이 비록 엄하다지만 전혀 그 사세(事勢)를 살펴 이해한 것이 아님을 말하였으며, 말미에 또 사면(辭免)의 뜻을 진달하였다. 답하기를,
"안흥 방어영(安興防禦營)의 설치와 혁파는 모두 나라를 위하는 공변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헌장(憲長)이 장황하게 침척(侵斥)하였으니, 매우 화평(和平)을 잃었다. 주사 당상이 매우 많다는 교시(敎示)는 일후(日後)에 살피고 헤아리겠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데도 모두 불안을 느낀다하니, 또한 지나치지 않은가. 과거(科擧)의 일은 시끄러운 사람이 갑자기 오늘 일어날 줄 헤아리지 못했으니, 부제학의 상소는 진실로 개연(慨然)해 할 만하다. 앞으로 보아가며 권면하여 나오게 할 생각이다. 백두산의 경계를 간심(看審)할 때 접반사와 도신의 함께 가지 못했던 것은 싫어하고 꺼리며 다른 일을 핑계로 삼은 데서 나온 것이 아니니, 파직을 청하는 의논은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고, 이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강관(講官)의 말로 인하여 별도로 제도(諸道)에 유시(諭示)하여 농민을 우휼(優恤)하여 김맬 때를 잃지 않게 하였으니, 이 해 여름에 보리가 없어 민간에서 경운(耕耘)에 힘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6월 12일 갑자

승지(承旨)에게 전옥(典獄)의 경수(輕囚)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이세최(李世最)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6월 13일 을축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처음 정사(呈辭)하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대저 김창집은 정시(庭試)의 명관(命官)으로서 이건명(李健命)의 소(疏) 때문에 불안(不安)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부제학 이건명(李健命)이 권익관(權益寬)의 피사(避辭) 때문에 사직소를 올리기를,
"헌신(憲臣)이 들은 대로 지적하여 진달하지 아니하여 핵실(覈實)해야 할 자를 빠져나가게 하였음을 가지고 신을 허물하였으니, 그 책망이 지극합니다. 하지만 남을 책망함은 너무 밝고 자신을 용서함은 매우 너그럽다 하겠습니다. 이번 과거의 잡되고 어지러움은 원근(遠近)에서 모두 들어 여항(閭巷)에서도 진신(搢紳)의 반열(班列)에서도 공공연하게 외우고 전하는데도, 헌신은 모두 듣지 못했다는 핑계로 오로지 요사이의 장주(章奏)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르기를, ‘직방(直房)에 충만하였다.’고 하였는데, 직방은 곧 궐문(闕門)밖이니, 이른바 충만했다는 것은 과연 팔짱을 끼고 있다가 흰 종이를 그대로 바치고 돌아가는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다만 ‘지어바쳤다[製呈]’는 두 글자를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신은 이것은 비록 놀랄만한 것이나 이미 문한(門限)이 없어 제멋대로 들락거리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밖에서 글을 지어 바치는 것은 형세상 금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르기를, ‘시관(試官)의 방에 섞여 앉았다.’고 하였으니, 그 장옥(場屋)이 엄격하지 아니함과 간람(奸濫)의 쉽사리 생김은 밖에 있는 것에 비하여 경중(輕重)이 더욱 현수(懸殊)합니다. 직방은 반드시 수직(守直)하는 사람이 있고 사관은 모두 겸종(傔從)은 거느리니, 이것은 핵실할 수 있습니다. 또 이르기를, ‘등촉(燈燭)을 이미 밝힌 뒤 어두움을 타서 던져 넣었다.’고 하였는데, 시각(時刻)을 조금 넘겨 다투어 어지러히 복장(覆帳)안으로 던져 넣은 것에 비하여 사단(事端)이 자별(自別)하니, 시소(試所)의 사환(使喚)과 정원의 예속(隸屬)을 또한 핵실할 수 있습니다. 승패(承牌)한 시관이 까닭없이 퇴출(退出)하여 밤이 깊어 돌아왔으니 그때 간 곳을 또한 핵실할 수 있습니다. 해조(該曹)와 정원(政院)의 계사(啓辭)가 해방 승지(該房承旨)의 소(疏)와 서로 어긋나는데, 억지로 수점(受點) 전후를 구별하고자 하여 말이 솔직하지 않으니, 또한 핵실할 수 있습니다.
무릇 이 몇 가지 일을 모두 마땅히 핵실할 수 있는데도, 헌신은 마치 자질구레한 일로 여긴 채 모두 그대로 두고 묻지 않고 홀로 신이 사실(私室)에서 수작한 말을 기화(奇貨)로 삼아 반드시 끝까지 캐묻고자 합니다. 만약 다만 신이 들은 바 시장(試場) 밖에서 지은 사람을 적발해 내어 논죄하게 한다면, 오늘의 과거를 과연 징치(懲治)를 엄히 하여 유루(遺漏)가 없는 것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 뜻은 신의 몸을 협박하여 사어(私語)를 깨묻는 것인즉, 사람마다 모두 장차 신을 경계로 삼아 입을 꽉 다물고 비록 사실(私室)에서도 감히 다시 과거(科擧)의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고, 일은 절로 깊이 감추어져 발단(發端)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앞서의 상소에서 이른바 색책(塞責)하고 미봉한다 한 것이 오늘날 대체(臺體)에 절실히 맞는다고 이를 만한데, 헌신은 어찌 돌이켜 스스로 살피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헌신의 피사(避辭)에 어찌 변명(辨明)할 것이 없으리오만, 이것 때문에 화를 내고 다섯 가지 핵실할 단서를 발론(發論)하기에 이르렀고, 사관의 간 곳이 소어(疏語)와 계사(啓辭)에서 서로 어긋난다는 말이 또한 그 안에 있다. 이런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수습될 기약이 없을 것이니, 나는 실로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권익관이 또 이 때문에 진소(陳疏)하여 대변(對辨)하기를,
"전례(前例)의 유무(有無)는 고사하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재신(宰臣)의 말은 여항간의 의논과 다름이 있습니다. 장옥(塲屋)의 엄하지 못함은 밖에서 짓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거자(擧子)가 이미 스스로 재신에게 말하였고 재신이 또 다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외웠으니, 대각에서 핵실해 다스리기를 계청(啓請)함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처음의 소(疏)에서는 이미 ‘어찌 지적할 사람이 없겠습니까.’라고 했으면서도 끝내 명백하게 말을 꺼내지 않았고, 또 ‘직방(直房)에 충만하다.’는 말을 끌어대어 억지로 ‘제정(製呈)’이란 두 글자를 붙여 은연중에 밖에서 지은 사람을 〈직방에〉 충만했던 무리로 혼동하여 돌림으로써 질언(質言)의 흔적을 가리고자 하니, 비록 숨기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또 그 소 안에다 여러 신하들의 장주의 말을 차례로 들어 마땅히 핵실할 것이 자그마치 다섯 가지 조목이라 하고, 신이 이를 마치 자질구레한 일처럼 보고 모두 불문(不問)에 붙이고 있다고 배척했습니다.
대저 이번 장옥(塲屋)은 비록 잡란(雜亂)하다고 하지만, 명백하게 사핵(査覈)할 만한 일이 아니면 과거 뒤의 뜬말을 가지고 곧장 구핵(究覈)을 청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른바 직방에 충만하고 어두움을 타서 시권(試券)을 던져 넣었다는 것은 본디 지적한 단서가 없으니 오히려 어디로부터 구핵한단 말입니까. 하물며 승패(承牌)하고 집으로 돌아간 고관(考官)은 수점(受點) 전후를 논할 것 없이 성상께서 또한 처분을 내리셨으니, 달리 간 곳이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신의 생각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유독 이 밖에서 지었다는 한 가지 사실은 미처 등문(登聞)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대정(大庭)에서 시사(試士)하는 날 거자가 밖에서 글을 지어 바치는 것이 어떠한 간람(奸濫)인데 또한 가볍고 또 또 느슨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색책하여 미봉한다고 하다가 끝내는 깊이 감추어서 발설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였으며, 신을 경계로 삼아 감히 말이 다시 과거의 일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위무(衛巫)·진법(秦法)의 비유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신은 장황하게 변명(辨明)하고자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과거에 대해 떠들석한 말이 과연 실상이라면 누군들 추핵(推覈)하여 정법(正法)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도리어 안으로 조정(朝廷)을 흔들 마음을 품고 고의적으로 털을 불어 흠을 찾아 의혹을 일으켜 어지럽히는 계책을 세워 혹시 한 마디 말이라도 자기를 헐뜯는 자가 있으면 힘써 조절(操切)하여 감히 다시 발론(發論)하지 못하게 하니, 그 뜻을 둔 바가 아! 참으로 두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유신(儒臣)의 소(疏)가 말이 매우 어긋나지만, 어찌 혐의(嫌疑)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6월 14일 병인

강화(江華) 및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 등 고을에 우박이 쏟아졌다.

 

이민영(李敏英)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남원부(南原府)의 교룡 산성(蛟龍山城)을 중수(重修)하고 부사(府使)를 수성장(守城將)으로 삼으라 명하였다.

 

6월 15일 정묘

지하 월식(地下月食)이 있었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두 번째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리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림이 세 번에 이르렀다.

 

6월 16일 무진

한영조(韓永祚)를 집의(執義)로, 유봉징(柳鳳徵)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논계(論啓)하기를,
"외방(外方)의 옥송(獄訟)이 소홀하고 늦추어지는 폐단이 많이 있습니다. 전(前) 현감(縣監) 박경여(朴慶餘)의 선산(先山)에 무덤을 파서 관(棺)을 불태운 일이 있었으니, 지주(地主)332)  된 자는 마땅히 즉시 적간(摘奸)하고 법에 의거하여 안치(按治)해야 하는데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일부러 질질 끌어 마침내 양쪽이 싸워 심지어 살상(殺傷)하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청컨대 성주 목사(星州牧使) 김상직(金相稷)을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구만리(具萬理)가 논계(論啓)하기를,
"부제학(副提學) 이건명(李健命)은 대궐 밖에서 글을 지어 바쳤단 말을, 거자(擧子)의 스스로 하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여러 사람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외었습니다. 그러니 대계(臺啓)를 이미 윤허(允許)하신 뒤 함문(緘問) 1절(節)은 비록 사체(事體)로 핑계를 댄다 하더라도 이건명의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곧장 스스로 변백(辨白)하는 소(疏)를 진달(陳達)하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소에서는 말하기를, ‘어찌 지적할 만한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고, 두 번째 소에서는, 도리어 비국(備局)에서 범연히 들은 것으로 돌렸으며, 또 밖에서 글을 지어 바침이 사세(事勢)에 있어 금하기 어려움을 말하여 그 당초 질언(質言)의 흔적을 가리고자 하였습니다. 임금에게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아 저절로 속이고 가리는 죄과(罪科)로 돌아갔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이번 정시(庭試)에 거자(擧子)로서 밖에서 글을 지은 자의 성명이 지금 채 드러나지 않았으나, 핵실하여 다스리는 일은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여 핵출(覈出)해 달리 중구(重究)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0일 임신

송정명(宋正明)을 승지(承旨)로, 황흠(黃欽)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홍우녕(洪禹寧)을 장령(掌令)으로, 정해(鄭楷)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대사간(大司諫)        이의현(李宜顯)이 사직소(辭職疏)로 인하여 정시 과거의 일을 극론(極論)하기를,
"올봄 과장(科場)의 엄격하지 못함은 전고(前古)에 없던 바입니다. 공평(公平)하게 시험을 관장(管掌)해야 할 신하가 명패(命牌)를 받고도 도로 나가 거자의 집을 두루 찾아다녔고, 과장(科場)을 설치한 뒤 글제가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그 사이의 정형(情形)을 누군들 의혹하지 않겠습니까. 시각이 이미 지나 등촉(燈燭)을 이미 밝힌 뒤 혹 어둠 속에서 시권을 던져 합격한 자가 있었으니, 사람의 말의 떠들석함은 진실로 마땅한 것입니다. 비바람이 갑자기 휘몰아치는 때에 형제의 시권을 같은 필적(筆迹)으로 써낸 것이 모두 뽑히는 속에 들었으니, 미리 지은 의혹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따위의 교묘하게 농간을 부린 정상을 신처럼 멀리 영남(嶺南)에 있는 사람도 오히려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그런즉 전후로 대각(臺閣)에 있는 자가 어찌 모두 들은 바가 없겠습니까만,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간신(諫臣)의 소(疏)가 나와 끝내 막기 어렵게 되자, 다시 유신(儒臣)이 사실(私室)에서 한 말을 끌어대어 마치 하나의 큰 기관(機關)이나 되는 양 몰아붙이고 조절(操切)하여 뒤섞어 두리뭉실하게 미봉(彌縫)하여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호도(糊塗)할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대저 사어(私語)를 캐묻는 것은 본디 융성(隆盛)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고 장차 말류(末流)의 폐단을 열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 이번에 정침(停寢)하심은 실로 성덕(聖德)에 빛남이 있는데도 대신(臺臣)이 가면 갈수록 한층 압박을 더하여 탄핵해 파직시키고야 말려고 하니, 대체 무슨 뜻인지요. 그 뜻의 과장(科場)을 엄격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다만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겸제(箝制)333)                  하여 감히 다시 과거의 일을 논하지 못하게 하고자 함인 것을 폐간(肺肝)을 보듯 알 수 있습니다. 장주(章奏)에 올려 분명하게 지적하여 진달한 것을 일례(一例)로 엄호(掩護)하고 반드시 ‘부효(浮囂)334)                  ’니, ‘취멱(吹覔)’이니, ‘의란(疑亂)’이니 하여 오로지 실상이 혹시라도 드러남을 두려워하고, 단지 밖에서 글을 지은 한 가지 일을 기화(奇貨)로 삼아 끝까지 캐묻기를 그만두지 않고 있습니다. 밖에서 글을 지은 거자도 진실로 마땅히 엄하게 핵실하고 중구(重究)하여야겠지만, 허다한 핵실하여야 할 단서를 어찌 종시 가리고 숨겨 적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이런 일들은 아직 사핵(査覈)을 거치지 않았으니, 대신(臺臣)이 어떻게 그것이 부효·취멱인 줄 미리 알아 제멋대로 인군(人君)에게 고하는 글에 써서 이처럼 곧장 단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상(聖上)께서 ‘수습할 기약이 없다.’고 하교하시고 도리어 ‘불문(不問)’에 붙이고자 하시니, 저으기 사람의 심정이 갈수록 더욱 불울(咈鬱)335)                  하고 과거의 일이 점점 뒤죽박죽이 되어 장차 수습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를까 두렵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마땅히 유사(有司)에 명하시어 일일이 구핵(究覈)하여 통렬하게 징치(懲治)를 더하여 중외(中外)의 의혹을 풀고 많은 선비의 마음을 위로하며 조정(朝廷)의 수치를 씻어야 하는 일을 참으로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정언(正言)        홍계적(洪啓迪)이 또한 상소하였으니,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시관이 수패(受牌)하고 집으로 돌아감은 전에 없던 변괴(變怪)라고 이를 만하고, 전하는 말은 모두 그가 집으로 돌아간 데만 그치지 않을 것으로 의심하니, 유신(儒臣)의 소(疏)에 이른바 간 곳을 핵실하여야 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 일은 곧 나라 사람이 함께 의혹하고 분개하고 탄식하는 것이니, 비록 그대로 두고 묻지 않고자 하여도 비유하건대 내를 막는 것과 같아 마침내는 반드시 터지고야 말 것입니다. 속히 유사에 명하시어 기어코 밝게 핵실하여 사방 사람의 의혹을 풀어 주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이돈(李墩)이 지레 돌아간 것을 어느 사람인들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승선(承宣)의 계사(啓辭)는 곧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로 대답하였으니, 들은 대로 계달(啓達)하는 것이 사호(私好)에 무슨 손상될 것이 있기에 이처럼 기망(欺罔)한단 말입니까. 승선의 죄에 또한 마땅히 견벌(譴罰)이 있어야 합니다."
하고, 그 밑에 또 대계(臺啓)에 이건명을 논한 것은 잘못되었다며 말하기를,
"끝까지 구핵(究覈)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발론(發論)한 사람을 논하였으니, 어찌 그다지도 거리낌이 없습니까."
하고, 말미에 말하기를,
"지난번에 왕자궁(王子宮)의 종이 금리(禁吏)를 구타했는데도 사헌부(司憲府)에서 숨을 죽이고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였으니, 신은 헌신(憲臣)을 위하여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근래 정과(庭科)의 일로 시끄러운 사단이 거듭 일어나고 있는데, 오늘 대간(大諫)의 소(疏)는 전에 비해 갑절이나 더하다. 이제 만약 그대로 둔다면 논의(論議)가 갈수록 격화되어 끝날 날이 없을 것이니, 한 번의 사핵(査覈)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다."
하니,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말하기를,
"이건명(李健命)의 소에 있는 핵실해야 한다는 다섯 가지는 마땅히 그대로 덮어 두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이의현(李宜顯)의 소는 대강 듣건대, 말이 갈수록 길어졌고, 그 소가 반드시 근거가 있어 초야(草野)의 사람의 말에 비길 것이 아니니, 일일이 밝게 핵실함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제학 및 대사간의 소에 논한 바 여러 조목은 모두 사핵하게 하되, 다섯 가지 핵실하여야 한다는 것 중에서 소사와 논계가 서로 어긋난다는 한 가지 조항은 크게 긴요한 관계가 없으니, 반드시 핵실할 것은 없다."
하고, 이어 형조 판서(刑曹判書) 및 참의(參議)        윤세수(尹世綏)에게 명하여 그때 고관(考官)은 인입(引入)하였으니, 개차(改差)하고 사고(事故)없는 사람으로 차출(差出)해 대신하게 하였다. 서종태가 말하기를,
"두 소(疏)에 논한 바를 이제 모두 핵실한다면, 밖에서 글을 지어 바쳤다는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 되니, 일체(一體)로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윤지인(尹趾仁)은 말하기를,
"애초 거론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지만 이제 이미 대계(臺啓)에 나왔고, 이건명이 또한 말하기를, ‘어찌 지적할 사람이 없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결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일체로 사문(査問)하라 명하였다. 이어 이의현에게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근래 과거의 일로 인하여 논의가 갈수록 격화되어 한 번의 명확한 핵실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방금 연중(筵中)에서 전후의 조건을 일일이 구문(究問)하여 핵실하라는 교시(敎示)가 있었다."
하고, 또 홍계적(洪啓迪)에게 답하기를,
"윗 조항의 일은 이미 처분이 있었다. 승선(承宣)의 계사를 기망(欺罔)으로 돌려 견벌(譴罰)을 청한 것이 마땅한지 알지 못하겠다. 소 끝에 진달한 것은 곡절(曲折)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지만 면려(勉勵)하고 경계하는 말은 좋으니, 어찌 마음에 두지 않으랴."
하였다. 이날 연중(筵中)에서 서종태가 세공 이준(歲貢移准)336)                  의 일로 전례(前例)에 의하여 성절사(聖節使) 겸 사은사(兼謝恩使)를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작년에 월경(越境)을 범한 사람을 이수(移囚)할 때 방포(放砲)하여 겁탈(劫奪)하려한 족속 네 사람 중에서 체포(逮捕)된 세 사람은 부대시 처참(不待時處斬)337)                  하고, 체포되지 않은 한 사람은 널리 기찰(譏察)하여 체포할 일을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6월 21일 계유

형조 참의(刑曹參議) 홍중하(洪重夏)는 정시(庭試)의 고관(考官)으로서 과거(科擧)의 일을 안치(按治)할 수 없기 때문에 체차(遞差)하고 정내상(鄭來祥)으로 대신하였으나, 또 소명(召命)을 어겨 파직(罷職)되고 이진수(李震壽)를 이에 대신하였다.

 

영창군(瀛昌君) 이침(李沈)이 졸(卒)하였다. 침은 여러 종친(宗親) 중에서 가장 근신(謹愼)하다고 알려졌다. 임금이 특별히 놀랍고 슬프다는 전교(傳敎)를 내리고 이어 상장(喪葬) 및 제수(祭需)·담군(擔軍) 등을 낭원군(郞原君)의 전례(前例)에 의하여 제급(題給)하라고 명하였다.

 

6월 22일 갑술

집의(執義) 한영조(韓永祚)가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본부(本府)의 전계(前啓)인 정시 때의 승지(承旨) 및 이건명(李健命)의 파직의 논계(論啓)에 대하여 의견이 같이 않다 하여 이의(異議)를 내세워 인피(引避)하니, 장령(掌令) 구만리(具萬理)  【즉 발론(發論)한 사람이다.】 가 한영조의 피사(避辭)및 이의현(李宜顯)·홍계적(洪啓迪)의 소척(疏斥)을 이유로 또한 인피하고 말미에 또 홍계적의 소 안의 ‘금리(禁吏)가 궁노(宮奴)에게 구타당하였으나 사헌부에서는 숨을 죽였다.’는 말에 대해 변명(辯明)하였다. 장령(掌令) 홍우녕(洪禹寧)이 처치(處置)하여 한영조는 출사(出仕)하게 하고 구만리는 체차하였다.

 

6월 23일 을해

송성명(宋成明)을 지평(持平)으로, 노세하(盧世夏)를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장령 홍우녕(洪禹寧)이 논계하기를,
"이번 정시(庭試)의 엄격하지 못한 정상은 이미 여러 신하들의 장소(章疏)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사핵(査覈)을 행한 뒤 시관과 승선은 그 사단(事端)에 따라 스스로 마땅히 법규(法規)에 의해 경계하겠지만, 시관이 수패(受牌)하고 지레 돌아감은 이미 전에 없던 거조(擧措)이니 승정원(承政院)에서 마땅히 죄주기를 청하여야 하는데도 흐리멍덩하게 그대로 보아 넘겼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該當承旨)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해당 승지 및 이건명의 파직에 대한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승지 송정명(宋正明)이 북도(北道)의 백성이 청(淸)나라 차사(差使)의 공돈(供頓)338)  에 피폐(疲弊)하였다며 작년의 서로(西路)의 전례에 의하여 따로 요역(徭役)을 견면(蠲免)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뒤에 묘당에서 사섬시(司贍寺)외 노비 공포(奴婢貢布) 및 본부(本府)에 응당 봉납(捧納)해야 할 수요(需要)를 참작하여 감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본도(本道)에 명하여 조목별로 나열하여 계문(啓聞)한 뒤에 거행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7월 초7일 칠석절(七夕節) 뒤에 정전(正殿)으로 환어(還御)하고 상선(常膳)으로 회복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튿날 약방(藥房)에서 또 아뢰기를,
"입추(立秋)가 아직도 10여 일이 남았는데, 연석(筵席)을 열어 인접(引接)하심을 계속하여 전무(殿廡)339)  에 임어(臨御)하신다면, 짧은 처마와 따가운 볕에 더위가 반드시 심할 것이오니, 청컨대 선조(宣祖) 임금께서 비현각(丕顯閣)  【선조 임금께서 피전(避殿) 할 때에 임어하던 처소다.】 에서 개강(開講)하신 전례에 의하여 앞으로 마땅히 다른 당이나 각(閣)중에서 서늘한 곳을 가리시어 인접의 처소로 삼으소서."
하니, 또한 그대로 따랐다.

 

6월 24일 병자

대사간(大司諫) 이의현(李宜顯)과 정언(正言) 홍계적(洪啓迪)이 구만리(具萬理)의 피사(避辭) 때문에 모두 인피(引避)하였는데, 헌납(獻納) 양성규(梁聖揆)가 그 아들이 정시(庭試)에 합격하였으므로 동료(同僚) 대신(臺臣)을 처치(處置)할 수 없다며 인피하니, 장령(掌令) 홍우녕(洪禹寧)이 처치하여 이의현과 홍계적은 출사(出仕)하게 하고 양성규는 체차하였다. 【양성규가 혐의(嫌疑) 때문에 처치하기 어려움은 형세(形勢)가 비록 그러하나, 연주(筵奏)와 대척(臺斥)을 입었으니 마땅히 인피하여야 하는데도 인피하지 않았다는 말로 체차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9책 51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4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6월 25일 정축

형조 참판(刑曹參判) 홍만조(洪萬朝)가 정시(庭試)의 명관(命官)으로 상피(相避)가 있어 과거의 일을 안치(按治)할 수 없음을 가지고 인혐(引嫌)하자, 체차(遞差)하고 유집일(兪集一)로 대신하였다.

 

남지훈(南至熏)을 승지(承旨)로, 서명우(徐命遇)를 장령(掌令), 조석명(趙錫命)을 문학(文學)으로, 김상규(金尙奎)를 사서(司書)로, 이만견(李晩堅)을 보덕(輔德)으로, 이언강(李彦綱)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황흠(黃欽)이 과거(科擧) 사건을 사핵(査覈)하는 일 때문에 청대(請對)하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시관(試官)의 겸종(傔從)을 이제 추문(推問)하려 하는데, 대신(大臣)의 겸종은 일체(一體)로 추문하는 것이 미안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앞으로 빙핵(憑覈)할 단서가 있다면 또한 마땅히 물어야 할 것이나, 현재로서는 추문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황흠이 말하기를,
"밖에서 글을 지었다는 말은 듣지 못한 자가 없는데, 대신(臺臣)이 사실(私室)의 수작(酬酌)으로 여겨 함문(緘問)을 청하기에 이른 것은 지극히 부당합니다. 이건명의 소(疏)에 ‘어찌 지적할 사람이 없겠는가.’라고 말한 것은 그 뜻이 지적하여 고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집하여 지키는 바가 사체(事體)였던 것입니다. 이제 과거의 일의 여러 조목(條目)을 이미 구핵(究覈)하도록 명하셨는데, 이 일은 이건명에게 묻지 않으면 사실을 조사해 낼 길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끝내 만약 밖에서 지은 사실을 사핵하지 않는다면 실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니, 전례에 의하여 승정원에서 불러서 묻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날 형조에서, 시관으로 수패(受牌)하고 도로 나가 거자(擧子)의 집을 두루 찾아다닌 자 및 등촉(燈燭)을 이미 밝힌 뒤 몰래 시권을 던져 넣고 합격된 자와 형제의 시권으로 동일한 필적인데 모두 뽑힘 속에 든 자를 모두 법례(法例)에 의하여 의금부(義禁府)로 옮기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튿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조태채(趙泰采)가 청대하고 말하기를,
"시관으로 거자의 집을 두루 찾아다닌 자를 이미 의금부로 옮기게 하였으니, 이돈(李墩)은 마땅히 본부(本府)에서 나문(拿問)하여야 할 것이고, 또 형조에서 이돈의 겸종을 추핵(推覈)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형제로서 필적이 같은 자는 비록 이름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또한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만, 몰래 시권을 던져 넣어 합격된 자는 예조에 분부하여 방목(榜目)안의 사람으로 하여금 자수(自首)하게 한 연후에야 드러날 수 있습니다. 또한 형조로 하여금 시관의 겸종 및 승정원의 예속(隸屬)을 반문(盤問)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돈 및 신급제(新及第) 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 형제 【곧 형제로서 필적이 같은 자이다.】 가 모두 나포(拿捕)되었다. 승정원에서 상교(上敎)로 행 사직(行司直) 이건명을 불러 궐문 밖에서 글을 지은 거자의 성명(姓名)을 물었는데, 이건명이 대궐 밖에 이르러 들은 바를 글로 써서 올리기를,
"서로 아는 사람인 조명(趙銘)이라는 자가 어느 날 찾아왔는데, 말하는 사이에 이르기를, ‘제가 새 문 밖의 유씨(柳氏) 성을 가진 사람을 따라 정시에 갔는데, 하루종일 큰 비가 쏟아져 몸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깥문이 닫혀 있지 않아 거자의 무리가 마음대로 드나들었기 때문에 저도 또한 그 동접(同接)과 함께 여염집에 나가 앉아 있었고,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 지은 것을 저를 시켜 바치게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런 말로 진신(搢紳) 사이에서 수작(酬酌)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6월 26일 무인

유성(流星)이 하늘 한가운데의 엷은 구름 사이로 나왔다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판의금부사 조태채(趙泰采)가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을 때 임금이 괘서(掛書)한 사람을 아직도 체포하지 못한 일 때문에 좌포도 대장(左捕盜大將)과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을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고, 박경여(朴慶餘)의 산송(山訟)을 각별히 신칙하여 털끝만큼도 사정(私情)을 용납함이 없이 엄정(嚴正)하고 밝게 사출(査出)하여 계문(啓聞)할 일로 본도(本道)에 분부(分付)하게 하였다.

 

6월 29일 신사

오명항(吳命恒)을 헌납(獻納)으로, 이만견(李晩堅)을 교리(校理)로, 윤성시(尹聖時)를 지평(持平)으로, 홍정필(洪廷弼)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형조 참판(刑曹參判) 권상유(權尙游)가 시골에서 진소(陳疏)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은 이건명의 소(疏)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신은 봄에 권치대(權致大)가 대궐 밖에서 시권(試券)을 써서 바쳤다는 말을 들었는데, 권치대는 반무(反武)340)  한 사람으로서 관광(觀光)341)  하려고 문과(文科)에 갔다가 대궐문이 닫혀 있지 않아 출입(出入)을 금하지 아니함을 보고 글제를 베껴와서 자기 집에 있는 사고(私稿)중에서 같은 글제로 전에 얽어 놓은 것을 써서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문한(門限)이 엄격하지 못한 소치에서 말미암았으니, 신은 이를 듣고 개연(慨然)히 여겨 과연 말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제 이 일 때문에 이건명(李健命)이 바야흐로 공격을 받고 신이 또한 장독(章牘)에 들어있으니, 어찌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권치대도 해조(該曹)로 하여금 일체(一體)로 구핵(究覈)하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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