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임오
유성(流星)이 좌기성(左旗星) 밑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부응교(副應敎) 권첨(權詹)이 상소(上疏)하기를,
"대각(臺閣)의 처치(處置)는 그 피사(避辭)에 따라 입락(立落)342) 하는 것이 고례(古例)입니다. 일전에 헌납 양성규(梁聖揆)가 자열(自列)한 계사(啓辭)에 과거의 일에 대해 혐의가 있어 가부(可否)를 말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었는데, 장령 홍우녕(洪禹寧)의 처치(處置)는 ‘연주(筵奏)와 대척(臺斥) 때문에 마땅히 인피하여야 하는데도 인피하지 않았다.’고 논하여 낙과(落科)에 두었으니, 그 주장한 말은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하니, 홍우녕이 이 때문에 인피하였다. 이 뒤에 지평(持平) 송성명(宋成明)이 처치하여 홍우녕을 체차하였다.
형조(刑曹)에서 고관(考官)의 겸종(傔從)을 추문(推問)하니, 모두 말하기를,
"시관(試官)이 전(殿)안으로 들어간 뒤에 거자의 무리가 비를 피하려고 달려들어 방 안에 가득찼으며, 간람(奸濫) 등 일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또 몰래 시권을 던져 넣은 한 가지 사실에 대해 승정원의 예속(隸屬)을 추문(推問)하니, 말하기를,
"본 바 없습니다."
하였다.
7월 3일 갑신
주인을 시해(弑害)한 죄인 선남(先男)을 삼성 추국(三省推鞫)343) 하였는데, 자복(自服)을 받아 형(刑)을 집행하였다.
형조(刑曹)에서 권상유(權尙游)의 소(疏)로 인하여 바깥에서 지은 일을 권치대(權致大)에게 추문(推問)하니, 권치대가 말하기를,
"나와서 궐문(闕門)에서 비를 피하였는데, 조금도 문을 닫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집에서 전에 얽어 둔 글을 찾아 문 밖에 나가 앉아서 직접 써서 바쳤습니다."
하자, 판서(判書) 황흠(黃欽)·참판(參判) 유집일(兪集一)·참의(參議) 김홍정(金弘禎)이 조율(照律)을 계청하였다. 다음날 김홍정이 상소하여 직책을 다하지 못한 죄를 스스로 인책하고 다시 권치대를 추문하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권치대의 변사(變辭)에 물을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가 이미 말하기를, ‘조금도 문을 닫은 일이 없었다.’고 하였는데, 닫지 않은 것이 무슨 문인지요. 또 말하기를, ‘전에 얽어 만든 글을 찾았다.’고 하였는데, 전에 얽어 만든 글이 들어 있는 책을 현납(現納)한 뒤에야 과거 글제의 유무와 글씨 흔적이 새것인지 낡은 것인지를 징험(徵驗)할 수 있습니다. 또 말하기를, ‘돈화문(敦化門) 밖에 나가 앉아서 직접 시권(試券)을 썼다.’고 하니, 그의 필적(筆迹)을 본다면 그 글자를 이루고 이루지 못함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또 다시 추문하는 중에, 거자(擧子)로서 시권을 쓰는 자가 전후 좌우에 뒤섞여 앉아 있었다고 하니, 돈화문의 금란관(禁亂官)도 또한 추문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로 하여금 그 찾았다는 글에서 약간의 긴요한 귀절을 외우게 하여 그 같고 다름을 징험한다면 허실(虛實)을 그 자리에서 분변(分辨)할 수 있습니다."
하고, 반드시 공명(公明)하게 안치(按治)한 연후에야 안옥(按獄)의 사체(事體)를 다할 수 있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답하기를,
"소사(疏辭)가 진실로 마땅함을 얻었다. 해조로 하여금 권치대에게 다시 핵문(覈問)을 더하게 하라."
하였다. 황흠과 유집일이 모두 진소(陳疏)하여 이 일 때문에 인혐하였는데, 황흠의 소에는 이르기를,
"동료(同僚)의 소에서 ‘마땅히 다시 핵실하여야 한다.’고 한 것은 모두 바깥에서 지은 일에 대한 직초(直招)344) 뒤의 별건(別件)의 일입니다. 다시 가지와 마디를 만들어내고 갈수록 더욱 반문(盤問)을 더하는 것은 실로 신의 생각으론 처음부터 미치지 못한 바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합석(合席)하여 같이 앉아서 충분히 의논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밤을 지낸 뒤 비로소 이런 말이 있으니, 신은 실로 개연(慨然)하여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 뒤에 황흠과 유집일이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어기자 모두 개차(改差)하고, 김홍정도 또한 패초(牌招)를 어겨 파직되었다.
지평(持平) 송성명(宋成明)이 아뢰기를,
"방금 형관(刑官)의 소로 인하여 권치대(權致大)를 다시 추문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핵실하여야 할 것이 한 두 가지에 그치지 않습니다. 권치대가 말하기를, ‘정초(正草)를 쓰기 위해 문 밖에 나가 않았었다.’고 하는데, 이미 잠근 문을 어떻게 마음대로 열며, 본문(本門)의 금란관(禁亂官) 및 방수(防守)하는 군졸(軍卒)은 어찌하여 눈으로 보고도 금하여 막는 일이 없었단 말입니까. 또 권치대는 입증할 만한 동접(同接)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출입이 무상(無常)하여 섞여 앉아 시권을 썼던 거자에 대해서도 권치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니, 낯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리 만무합니다. 그 은휘(隱諱)하고 실토(實吐)하지 않는 정상(情狀)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니, 청컨대 문목(問目)안에 덧붙여 넣어 엄히 추문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5일 병술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부응교(副應敎) 권첨(權詹)이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정전(正殿)을 피하시는 때에 왕세자가 정당(正堂)에 회강(會講)345) 함은 사체(事體)가 미안하니, 금후로 혹시 이와 같은 때를 당하면 다른 처소로 옮겨서 강의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보다 앞서 의금부(義禁府)의 죄인 이돈(李墩)이 공초(供招)를 바치기를,
"정시(庭試)는 감시(監試)나 별시(別試)와 다름이 있어 친림(親臨)하는 과거와 관계되는 때문에, 모든 시관은 본디 패초(牌招)의 규정이 없고 수점(受點) 뒤에 각자 그 집에 돌아갔다가 새벽에 궐하(闕下)에 나아가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 날 아침에 수패(受牌)하고 예궐(詣闕)하여 병조(兵曹)에 들어가 앉아 있었는데, ‘구례(舊例)가 이와 같다면 머물러서 낙점(落點)을 기다릴 일이 없을 듯하다.’고 생각되었고, 또 망처(亡妻)의 천장(遷葬) 때문에 이미 말미를 받아 먼저 손자와 지사(地師)를 보내게 되었는데, 연소(年少)하여 일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므로 직접 대면하여 말해 보내고자 하였습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곧 나왔는데, 이는 낙점을 내리기 전이었으니 병조의 입직 당상(入直堂上)이 아는 바입니다. 뒤에 들은즉 다른 시관이 모두 머물러 기다렸다고 하기에 다시 궐하에 이르렀더니, 날이 아직 어둡지 않았습니다. 이것 또한 함께 들어간 시관이 눈으로 본 바입니다. 그는 집에 돌아온 것이 낙점 뒤에 있었다고 하고, 다시 궐하에 이른 것은 밤이 깊은 뒤에 있었다고 하며 죄안(罪案)을 구성하였는데, 수점(受點)의 전후를 논할 것 없이 이미 집에 돌아온 일이 있었으니, 비록 이것으로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해도 실로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자의 집을 두루 찾아다녔다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너무나도 근거가 없습니다.
무릇 관각(館閣)의 직임에 있는 자가 반드시 고시(考試)의 반열에 참여함은 사람들이 미리 헤아려 아는 바이니, 만약 사정(私情)을 쓰고자 하였다면 반드시 미리 몰래 내통하고 은밀히 의논하여 오직 남이 들어 알까 두려워 할 것입니다. 어찌 과거를 하루 앞두고 의망(擬望)한 뒤 비로소 백주대로(白晝大路)에서 호창(呼唱)을 행하며 제멋대로 거자의 집을 두루 찾아다닐 리가 있겠습니까. 이른바 거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두루 찾아다녔다는 정상은 어떤 사람이 눈으로 보고 어떤 사람이 전하여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보고 말했다면 반드시 그 사람이 있을 것이니, 만약 한 번 빙거(憑據)하여 핵실한다면 그 사이의 허실은 저절로 당장에 판가름날 것입니다. 그 시제(試題)에 관한 일의 경우 무릇 시장(試場)의 출제하는 규식(規式)은 책자(冊子)를 여러 시관 앞에 나누어 놓고 각자 고열(考閱)하여 서로 의논한 뒤 출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날 앞에 놓인 책자는 바로 《한서(漢書)》였으며, 우연히 책을 열어 보았더니 공수전(龔遂傳)이었습니다. 공수(龔遂)가 수형 도위(水衡都尉)에 임명된 일이 제목으로 적합할 것 같기에 여러 시관에게 뽑아 보였더니, 시관 중에서 어떤이는 좋다고 하였으나,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최석항(崔錫恒)은 ‘만약 공수를 글제로 한다면 너무 평범한 데 속하며 혹 이미 동작(東作)346) 에 나온 듯하니 「왕생(王生)이 수형승(水衡丞)에 임명됨을 사례한다.」는 것을 글제로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시관 중에서는 또 ‘공수를 포현한다.[褒顯龔遂]’는 네 글자를 끝에 붙이고자 하는 이도 있었는데, 최석항이 곧 명관(命官)에게 나아가 왕생을 위주로 하여 글제를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처음에 글제로 하고자 한 것은 ‘공수가 수형 도위에 임명된 것을 사례한다.’는 것이었는데, 실지로 낸 글제는 ‘왕생이 수형승(水衡丞)에 임명된 것을 사례한다.’로 바뀌었고, 또 포현(褒顯)이란 한 귀절을 덧붙여 주객(主客)이 너무나 동떨어지고 사실이 크게 달라져 완연히 별개의 글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시험삼아 여러 시관에게 물어본다면 글제를 낼 때의 곡절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그 밑에 또 말하기를,
"분고(分考) 때에 뽑은 것이 합고(合考)에서 모두 떨어지고 다만 박사익(朴師益) 한 사람만 합격되었으며, 합고 때에 명관이 여러 번 청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아가긴 하였으나 끝내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데는 참섭(參涉)함이 없었으니, 그 이른바 두로 찾아다녔다는 말은 또 저절로 허무(虛無)한 데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핵실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간신(諫臣)의 소(疏)에 두루 찾아다녔다고 한 것은 눈으로 보고 말을 전한 것이니, 반드시 그 사람이 있을 것이나, 발론(發論)한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달리 추구(追究)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곧장 함문(緘問)을 청하는 것은 사체(事體)에 있어 미안하니, 형조(刑曹)에서 겸종(傔從)을 구핵(究覈)하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을 듯합니다. 시제(試題)에 관한 한 가지 조항은 또한 마땅히 최석항(崔錫恒)에게 빙문(憑問)하여 처리하여야 하니,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함문한 뒤에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고 또 발론한 사람에게 또한 함문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의현(李宜顯)이 함답(緘答)하지 않고 상소하여 맨 먼저 함문의 그릇됨을 말하고 또 이돈의 공사(供辭)에 대변(對辨)하여 말하기를,
"시관 중에 한 사람도 집으로 돌아간 자가 없는데, 이돈이 구례(舊例)를 빙자하여 즉시 집으로 돌아간 것은 이미 지극히 괴이합니다. 대궐에 나아가기 전에는 집에 있는 날이 아님이 없으니, 장사(葬事)를 지휘함에 어찌 도로 나가기를 기다린단 말입니까.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할 만합니다. 그때 시관으로 첫 차례에 수점(受點)한 자는 모두 궐(闕)안에 머물러 있었고, 나중 차례에 수점한 자는 궐문(闕門)이 이미 닫혔기에 궐문 밑에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이돈은 첫차례의 수점한 자입니다. 과연 그 말대로 어둡지 아니하여 다시 이르렀다면 어찌 문한(門限)에 미치지 못하여 궐문 밑에서 멈추어 유숙(留宿)했단 말입니까. 여러 번 재촉하여 밤이 깊은 뒤 돌아온 정상이 이미 승선(承宣)의 소에 모두 드러났습니다. 두루 찾아다닌 일에 이르러서는, 이돈이 대궐(大闕)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두루 거자의 집에 들어간 정상을 사인(士人) 이빈흥(李賓興)이 자세히 듣고 친지(親知)에게 언급한 것이 명백할 뿐만이 아닙니다. 신은 이빈흥과는 본디 이미 오래 되어 듣지 못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 만약 이빈흥에게 반문(盤問)하고 이돈이 거느렸던 예속(隸屬)을 엄하게 추핵(追覈)한다면, 그 허실(虛實)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른바, ‘사정(私情)을 쓰고자 한다면 반드시 미리 꾀할 것이지 어찌 반드시 의망(擬望)한 뒤에 제멋대로 두루 찾아다닌단 말입니까.’ 한 것은 저절로 사정(事情)에 아주 가깝다고 하겠으나, 여기에는 또한 말한 만한 것이 있습니다. 대개 과장(科場)의 규칙은 주문(主文)347)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명제(命題)·과권(課券)348) 을 모두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날 문형(文衡)의 신하가 패초(牌招)를 어기고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돈이 주시(主試)하리라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급급하게 도로 나가서 이와 같은 전에 없던 거조(擧措)를 하였으니, 안팎의 의혹과 비방을 어찌 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시제(試題)의 일은 부의(副擬)349) 가 이미 최석항의 손에서 나왔으니, 수망(首望)이 이돈의 손에서 나왔음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비록 혹 약간의 변환(變換)이 있었음이 한결같이 그의 말과 같다 하더라도 본디 다른 글제에 비길 바가 아닌데, 곧 동료에게 미루어 넘기고자 하였으며, 또 《한서(漢書)》가 마치 우연히 그 앞에 놓여져 있던 것처럼 하였으니, 이미 말을 군색하게 꾸며댄 것입니다. 더욱이 그때 무릎을 맞대고 서로 의논한 것은 또 다른 시관이 참여하여 들은 것이 아니니, 그 사이의 곡절을 다른 시관이 또한 어찌 일일이 모두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이 듣건대, 합고(合考)할 때 명관(命官)이 처음에는 다만 당상(堂上) 이상의 시관만을 부르고 조금 후에 이어 당하(堂下)의 시관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평가를 담당한 사람인 이돈이 물러나 앉아 종시 참여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예조(禮曹)에 낸 거자가 자수(自首)한 단자(單子)에 크게 의아한 것이 있습니다. 이진급(李眞伋)이 【이때 예조에서 시험 시간 뒤에 시권을 바친 자로 하여금 자수하게 하였더니, 이진급이 시장(試帳)을 막 덮은 뒤 시권을 장막 속에 넣었다고 대답하였다.】 시험 시간 뒤 몰래 시권을 바치고 합격되었다고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여 그 시한을 넘긴 일을 그도 또한 스스로 숨기지 못하고 시권을 시장(試帳)속에 넣었다고 대답하였으니 시한의 전후는 헤아려 알기 어렵지 않은데, 다만 ‘바야흐로 시장을 덮음[方覆]’이란 두 글자로 약간의 장찬(粧撰)350) 을 더하니, 진실로 가소롭습니다. 듣건대 ‘그 시권 말미의 몇 구절은 두 가지 글씨로 휘갈겨 써서 또한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하였으니, 그 시한이 급박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자호(字號)351) 는 곧 ‘구식(九食)’이었는데, 안중필(安重弼)·이만휴(李萬休)는 시한 전에 시권을 바친 사람으로서 곧 ‘오뇌(五賴)’·‘구뇌(九賴)’였으니, 이는 ‘식(食)’자 뒤의 칠축(七軸)입니다. 어지럽게 마구 던져 이미 난축(亂軸)을 이루었다면 높고 낮은 글자를 메워 넣는 것이 한결같이 시권을 바친 차례와 같지 못함이 혹시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때 시권을 거둔 것이 거의 수천 장에 가까와 ‘식’자는 겨우 중간을 넘은 것이 됩니다. 이때 작축(作軸)은 결코 착란(錯亂)할 리가 없으며, 또 이만휴의 써서 바친 말에 ‘시권을 바칠 때에 한장 한장 받아 놓아 난축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한장 한장 받아 놓았다면 반드시 속속 글자를 메우고 메움에 따라 작축하였을 것입니다. ‘뇌’자의 작축이 이와 같이 조용하였다면 ‘식’자의 축은 이미 이진급이 시권을 바치기 전에 메워졌음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바야흐로 시장을 덮을 때 시권을 바친 것이 문득 시한 전에 시권을 바친 자보다 위에 올랐으니, 어찌 매우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 또한 마땅히 유사(攸司)로 하여금 자세히 핵실하여 처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즉시 이빈흥을 잡아 가두고, 이진급도 또한 이의현의 소(疏) 때문에 나포(拿捕)되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최석항(崔錫恒)이 의금부의 판부(判付) 때문에 먼저 함답(緘答)하고 또 이의현의 소에 대해 대변(對辨)하는 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 일의 전말(顚末)을 대략 함답에 진달하였으니, 아직도 왕부(王府)에 머물러 있어 예람(睿覽)을 거치지 못하였을 것이기에 다시 그 자세한 것을 밝게 아룁니다. 그날 여러 신하들이 각각 반차(班次)352) 에서 부복(俯伏)하였는데, 신이 외람되게 서벽(西壁)의 첫머리에 있었고 김우항(金宇杭)과 이언강(李彦綱)이 차례를 따라 앉았으며 이돈은 그 밑에 앉아 서로 매우 멀리서 떨어져 있었으니, 비록 무릎을 맞대고자 한들 질실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돈이 책자(冊子)를 열어 보더니 이언강에게 집어 보이고, 이언강은 신에게 보였는데, 곧 공수(龔遂)가 수형 도위(水衡都尉)에 임명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이것은 동작(東作)에서 나왔기 쉬우니, 만약 왕생(王生)이 수형승(水衡丞)에 임명된 것을 글제로 한다면 하자가 없을 듯하겠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품의(稟議)하였습니다. 그러자 명관(命官)이 참작하여 취하고, ‘포현(褒顯)’이란 말을 꼬리에 붙여 수망(首望)으로 정하였으니, 본디 이돈과 상확(商確)하고 수작한 일이 없었습니다. 자리에 모인 여러 사람들이 모두 본 일인데도, 오히려 또 억측하고 장찬(粧撰)하여 없는 것을 가리켜 있는 것으로 하니, 또 무슨 말을 한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이헌영(李獻英)과 이헌장(李獻章) 형제가 공초(供招)를 바쳤다. 이헌영의 공초의 대략에 이르기를,
"약간의 우구(雨具)353) 가 있어 겨우 반이 넘는 글을 얽었는데, 동접(同接)을 이미 잃어 달리 추이(推移)하여 시권을 쓸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우 헌장이 말하기를, ‘제가 지은 것도 거의 반을 넘겼는데, 만약 각자 써서 바친다면 모두 예백(曳白)354) 을 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저의 글씨가 비록 형에게 미치지는 못하나 또한 능히 빨리 쓸 수는 있으니, 형이 지은 것을 먼저 써서 시한 안에 바치고, 남는 시간이 있을 것 같으면 저 또한 글을 마저 써서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혹 시간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 다시 무슨 손상될 것 있겠습니까.’ 하기에, 과연 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바친 뒤에도 오히려 시한을 넘기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아우에게 서둘러 그 이미 지은 것을 쓰고 글을 마쳐 시권을 바치게 하였는데, 두 사람이 모두 합격하기에 이를 줄은 더욱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요행으로 과거에 뽑혔다고 한다면 옳겠지만, 이제 두 시권을 아울러 쓴 것을 가지고 억지로 미리 지었다고 한다면 또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미리 지은 일이 있다면 어찌 스스로 글짓는 아우로 하여금 쓰게 할 필요가 있으며, 그로 하여금 글짓기에 매우 급박하여 거의 시권을 바치지 못할 뻔하게 만든단 말입니까. 장옥(場屋)의 군색하고 급박한 정상을 이에서 알 수 있는데도, 도리어 미리 지었다고 지목하니, 이것이 과연 이치에 합당한 말입니까."
하였다. 이헌장의 공사(供辭)도 대의(大意)는 또한 같았으나, 그 대략에 이르기를,
"형제가 과연 글을 미리 지었다면 마땅히 조용하게 각각 써서 진작 시권(試券)을 바칠 것이지, 어찌 이 몸의 보잘것없는 글씨로 구차하게 써서 바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먼저 형이 지은 것을 쓰고 다시 제가 지은 것을 빨리 쓰느라고 회제(回題)355) 이하는 곧장 정초(正草)에다 써서 겨우 바쳤습니다. 비록 시권을 가지고 보더라도 하단(下端)의 글자 모양이 혹 형체(形體)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처음부터 미리 짓지 아니하고 창졸간에 군색하고 급박했던 정상이 더욱 밝게 나타납니다."
하니, 형벌을 면제하고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이 뒤에 이의현이 또 이헌영 등의 공초 및 최석항의 소(疏)에 대해 대변(對辨)하여 인피(引避)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헌영·이헌장 등의 공사(供辭)는 수식(修飾)과 저뢰(抵賴)356) 가 많습니다. 가령 그 형제가 모두 예백(曳白)에 이름을 염려하여 그 아우가 자신의 짓는 것을 팽개치고 형의 시권을 쓰기를 청하였다고 한다면, 생각건대 그 시권을 이미 바친 뒤에 해가 비록 이르다 하더라도 규정된 시한은 더욱 촉박했을 것이니, 반드시 마땅히 형은 시권을 쓰고 아우는 글짓기를 마쳐서 급하게 바쳐야 하는데도, 이제 글씨를 잘 쓰는 형은 팔짱을 낀 채 한가롭게 앉아 있고, 글씨 못쓰는 아우는 한편으로 글을 짓고 한편으로 시권을 써서 군속(窘速)을 자취(自取)한 것이 어찌 이치에 가깝단 말입니까. 그 사이의 정절(情節)을 환히 알 수 있으니, 앞으로 해부(該府)에서 되풀이하여 사험(査驗)한다면 반드시 끝내 가리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굳이 변명하고자 하지는 않으나, 최석항이 소에서 신의 소에 시제(試題)를 논한 한 가지 조항 때문에 남을 대신하여 가로맡고 나서서 노기(怒氣)를 크게 일으키니, 신은 놀랍고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비록 그 소에 이른바 ‘이돈이 낸 글제와 이언강(李彦綱)이 전하여 보였다.’는 말로 보더라도, 또한 그 상의(商議)한 실상(實狀)을 알 수 있는데도 이제 먼저 스스로 의심을 일으켜 억측하였다느니 장찬(粧撰)하였다느니 하며 터무니없이 날조하니, 그 또한 이상합니다. 설령 시제의 일이 참으로 그 말과 같다 하더라도 〈거자(擧子)의 집을〉두루 찾아다닌 실상이 드러난 뒤에 시제를 약간 고쳤다 하여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시제가 만약 허사(虛事)로 돌아간다면 죄안(罪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그 뜻한 바가 너무 무엄(無嚴)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또 이돈의 일은 이제 바야흐로 조사 중에 있으니, 비록 같은 당(黨)으로서 돕는다 하더라도, 의당 감히 경솔하게 앞질러 송변(訟辯)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투소(投疏)에 급급하여 심지어 ‘의심을 쌓아 죄를 얽는다.’느니, ‘무함하여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린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로 아직 감핵(勘覈)에 미치기도 전에 곧장 위세(威勢)로 시비를 정하고자 하여 국가의 체통(體統)은 높지 못하게 되고 조정의 기강(紀綱)은 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신은 적이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은 최석항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대각(臺閣)을 공박(攻迫)함을 오직 제뜻대로 하고자 하니, 신은 그가 높은 지위에 있어 계속해 이런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장차 하지 못하는 짓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장령(掌令) 서명우(徐命遇)가 논박하기를,
"사람을 마땅히 의심하지 않아야 할 경우 의심한다면 빙자(憑藉)하여 제함(擠陷)하는 지경으로 저절로 귀착됩니다. 출제의 한 가지 일은 이미 허투(虛套)로 돌아갔고 무릎을 맞대고 서로 의논하였다는 말은 실로 날조한 데서 나왔으며, 심지어는 ‘하지 못할 짓이 없다.’는 등의 말은 더욱 극히 도리에 어긋나니, 청컨대 체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빈홍·이진급 등의 공사(供辭)는 아래에 보인다.】
【태백산사고본】 59책 51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4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註 346] 동작(東作) : 우리 나라의 글제.[註 347] 주문(主文) : 과거를 관장함. 또는 과거 때 시험관의 우두머리인 상시(上試)를 달리 이르는 말.[註 348] 과권(課券) : 시권을 관리함.[註 349] 부의(副擬) : 두 번째로 글제를 제시(提示)함.[註 350] 장찬(粧撰) : 꾸며 댐.[註 351] 자호(字號) : 번호 번호를 붙이는 데 천자문(千字文)의 글자 순위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자호(字號)라고 함. 예를 들어 천자 1호(天子一號)라든가 지자(地字) 몇 호라든가 하는 따위.[註 352] 반차(班次) : 반열.[註 353] 우구(雨具) : 비를 막는 기구.[註 354] 예백(曳白) : 백지를 그대로 내놓음.[註 355] 회제(回題) : 과거에서 시험보이는 시(試)의 열 두째 글귀 또는 부(賦)의 열 세째와 열 네째의 두 글귀.[註 356] 저뢰(抵賴) : 거짓말로 죄를 불복(不服)함.
7월 6일 정해
심택현(沈宅賢)을 장령(掌令)으로, 이세근(李世瑾)을 정언(正言)으로, 정찬선(鄭纘先)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양성규(梁聖揆)를 보덕(輔德)으로, 오명항(吳命恒)을 부교리(副校理)로, 박희진(朴熙晉)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7월 8일 기축
처음에 형조 판서(刑曹判書) 황흠(黃欽)이 체차(遞差)된 뒤 김석연(金錫衍)으로 대신하고, 이동암(李東馣)을 참의(參議)로 삼았는데, 김석연이 여러 번 소명(召命)을 어겼으므로, 임금이 분의(分義)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사체(事體)에 미안하다며 체차를 명하였다. 이때 이조(吏曹)에 행공(行公)하는 당상(堂上)이 없어서 정사(政事)를 열어 차출(差出)하지 못하자, 임금이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궐원(闕員)의 대신을 대신(大臣)에게 물어 차출하게 하라고 명하여 송징은(宋徵殷)으로 임명하였다.
월전(月前)에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을 때 임금이 전(前) 부사(府使) 유성명(柳星明)의 원사(爰辭)를 가지고 대신과 제신에게 물었다. 【유성명은 유혁연(柳赫然)의 아들로서 그 아비를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일찍이 등대(登對)하여 품처(稟處)하라고 하교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말하기를,
"유혁연(柳赫然)은 여러 조정의 숙장(宿將)으로서 반드시 역모(逆謀)에 관여해 알았을 리가 없으니, 그때 안옥(按獄)한 대신(大臣)으로서 부생(傅生)한 사람 또한 원통하다고 일컫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약 과연 원통함이 있다면 풀어 주어도 안될 것 없겠지만, 역옥(逆獄)은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밖에 있는 대신으로서 그때 조정에 있었던 사람이 있다면 널리 순의(殉議)를 더하시어 처리하심이 마땅할 듯 합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는 말하기를,
"듣건대, 그때 국청(鞫廳)의 대신이, 유혁연은 둔군(屯軍)의 작대(作隊) 이외에는 관여하여 안 자취가 없다 하여 감사 정배(減死定配)에 이르렀는데, 대계(臺啓) 때문에 다시 처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대신이 이미 역옥의 일에 관여하여 안 일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그 자손의 원통하다 하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좌참찬(左參贊) 조태채(趙泰采)·병조 판서(兵曹判書) 최석항(崔錫恒)이하 여러 신하들은 모두 널리 물어서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최석항은 말하기를,
"역견(逆堅)357) 과 통모(通謀)하였다는 것은 경신년358) 의 추안(推案)에는 없는 바이고, 갑술년359) 뒤의 대계(臺啓)에 비로소 나왔으니, 이것은 혹 신설(伸雪)할 수는 있어도 복관(復官)에 이르러서는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부제학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경신년의 대계가 처음 나왔을 때 선신(先臣)이 간장(諫長)으로서 전계(傳啓)360)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외직(外職)으로 옮겨져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다시 진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의 대계는, 이천(伊川)의 둔군(屯軍) 단속(團束)과 근종(近宗)361) 과 연혼(連婚)한 것을 그 죄안(罪案)으로 삼았습니다."
하고, 승지(承旨) 황일하(黃一夏)는 말하기를,
"유혁연의 외손(外孫)이 복녕군(福寧君)의 사위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혹시 귀종(貴宗)362) 과 체결(締結)한 것으로 의심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혁연의 죄명은 다만 ‘연혼귀종(連婚貴宗)’과 ‘둔군단속(屯軍團束)’일 뿐이니, 그때의 처분에 대하여 내가 매양 미심쩍은 마음이 있었다. 여러 대신에게 순문한 뒤 품처(稟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금이 또 이원정(李元楨)의 일에 대해 하순(下詢)하니, 서종태가 말하기를,
"역견(逆堅)의 역절(逆節)은 오로지 체부(體府)를 근거로 삼았는데, 이원정은 이미 체부를 복설(復設)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또한 마땅히 유혁연의 일에 의하여 여러 대신에게 순의(詢議)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다. 이유는 옥정(獄情)에 전혀 어두워서 감히 진달하지 못한다고 대답하고, 여러 신하들도 또한 모두 여러 대신에게 널리 물어서 처리하라고 말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경신년의 역옥은 둔군과 체부 두 가지 일이 기장 중요한 것이 되는데, 그 문안(文案)을 상고한 뒤에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한 일체(一體)로 밖에 있는 대신에게 문의(問議)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그 뒤에 서종태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유혁연의 일에 대해 그때 대신이 부생(傅生)하였다고 진달하였는데, 근래에 듣건대, 그 가을 옥사(獄事)에 여러 대신의 논열(論列)한 바가 준엄(峻嚴)할뿐만 아니라, 대체로 그 죄가 살릴 수 없다고 말하였다 하니, 깊이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사실에 의거하여 자열(自列)합니다."
하고, 이유도 또한 차자를 올려 인구(引咎)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의금부(義禁府)에서 밖에 있는 대신에게 순문(詢問)하였는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은 말하기를,
"효종조(孝宗朝)의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이 유혁연과 함께 모두 장임(將任)을 받았는데, 이완은 몸을 단속하고 법을 지켜 사람을 쓰매 반드시 가려서 신중을 기하였으나, 유혁연은 변덕스럽고 게다가 신기(新奇)함을 좋아하여 사람을 쓰매 반드시 잔재주를 취하였습니다. 신의 내구(內舅)363) 정태화(鄭太和)가 일찍이 유혁연이 이완을 표준으로 삼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뒷날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장신(將臣)으로서 한 번 역옥에 걸려들어 벗어날 수 있었던 자가 드물었으나, 해가 오랜 뒤 죽음을 애닯게 여겨 설원(雪冤)한 자도 또한 있었으니, 유혁연의 일이 마땅히 비교가 될 듯합니다. 고(故) 판서(判書) 신여철(申汝哲)도 마음속으로 그의 원통함을 슬퍼하여 한 번 진달하고자 하였고, 윤취상(尹就商)·김중기(金重器)·나홍좌(羅弘佐) 등이 모두 송원(訟冤)하고자 하였으니, 여기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이고자 했던 것과 다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또 이원정의 일에 대해서는 김석주(金錫胄)의 말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아서 말하기를,
"갑인년364) 뒤에 체부를 다시 설치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원정의 사람됨이 허소(虛疎)하여 남의 말을 가볍게 믿고 경솔하게 진달하였으니, 본디 무심(無心)한 데서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강만송(姜萬松)이 이것을 역당(逆黨)의 처지(處地)로 돌렸으니, 너무나도 원통하고 억울하다. 이원정의 죄가 있고 없음은 이미 자세히 아는 바이기 때문에 그가 귀양갈 때 글을 지어 위문하고 또 물건도 보내 주었다. 재차 국청(鞫廳)에 들어감에 이르러 형추(刑推)의 명이 있음을 듣고 청대(請對)하여 실상을 밝히고자 하였으나 미처 주선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김석주가 여러 번 사람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이 믿을 만하기에, 삼가 말씀드립니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여(李畬)는 말하기를,
"두 사람이 법에 따라 처벌받은 것은 역옥에 관계되며 왕법(王法)은 지엄하니, 반드시 그 용서할 수 있음을 밝힌 연후에 마땅히 처분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의 옥안을 다시 핵열(覈閱)한다면 마땅히 징험할 만한 단서가 있을 것이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이른바, ‘조정의 신하를 모아 의논해야 한다.’는 말이 자세히 살펴 처리하는 도리를 잃지 않은 듯합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최석정(崔錫鼎)과 윤증(尹拯)은 두 번 물었으나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영중추부사의 헌의(獻議)가 지극히 명백하다. 인신(人臣)의 죄로서 추대(推戴)보다 큰 것은 없으나, 만일 원통한 정상이 있다면 끝내 반드시 복관(復官)해야 할 것이다.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고(故) 판서(判書) 장선징(張善澂)과 이정영(李正英) 등이 그 원통한 정상을 진달하였고, 그 뒤에 외손(外孫)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가산(家産)을 내주었으며, 또 이복형(李復馨)의 상언으로 인하여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복관의 명이 있었다. 유혁연의 일도 전후의 국옥(鞫獄)에 모두 관여하여 안 자취가 없었으니, 처음에 비록 뭇사람의 의논에 몰려 처분이 이와 같았다 하더라도 이미 그 원통함을 알았다면, 이제 와서 복관해도 불가할 것이 없다. 이원정도 또한 관여하여 안 일이 없었는데도 처음에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여 마침내 형장(刑杖) 아래서 죽었으니, 이것이 일체(一體)로 하순(下詢)한 까닭이다. 이 일로 어찌 공경(公卿)을 모아 의논하기에 이른단 말인가. 전례(前例)에 의하여 관작(官爵)을 회복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우선 성명(成命)을 정지하고 등대(登對)할 때를 기다려 다시 물어서 처리할 뜻으로 복역(覆逆)하니, 답하기를,
"대신(大臣)과 제신(諸臣)에게 순문(詢問)한 뒤에 이 분부(分付)가 있는 것이니, 그것이 너무 급작스러움을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 뒤에 장령(掌令) 서명우(徐命遇)가 발계(發啓)하여 두 사람의 복관의 명을 모두 환수(還收)하기를 청하며 이르기를,
"유혁연이 관계된 바는 이미 국옥(鞫獄)이고 가을의 옥사에 이르러서는 국청(鞫廳)에서 ‘죄가 살릴 수 없다.’고 진달하여 처단하였으니, 신원(伸冤)하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역견(逆堅)의 흉모(凶謀)를 꾸밈은 오로지 체부를 빙자하였는데, 이원정은 비록 통모(通謀)한 일이 없다 하더라도 관계됨이 몹시 중대하니, 또한 가볍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송성명(宋成明)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번 과거의 사핵(査覈)에 무슨 처리하기 어려움이 있길래 처음부터 의금부의 당상과 형조의 관원이 어지럽게 위패(違牌)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미 한심한 일입니다."
하고, 이어 황흠(黃欽)과 김석연(金錫衍)의 반드시 체차(遞差)되고야 만 것이 한 마음으로 봉공(奉公)하는 의리가 아님을 논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말하기를,
"과거 뒤에 말이 많고 이것이 번져 큰 옥사를 이루었습니다. 상신(相臣)과 경사(卿士)가 모두 두려워하며 죄를 기다리고 있으니, 옥사를 질질 끌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의금부와 형조의 당상을 책려(策勵)하여 속히 조사하는 일을 마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마땅히 유의하겠다고 비답하였다.
7월 12일 계사
형조 판서(刑曹判書)의 망단자(望單子)를 대신(大臣)에게 물어 종2품(從二品) 중에서 가망(加望)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김진규(金鎭圭)와 윤지인(尹趾仁)을 가의(加擬)하자, 김진규를 임명하였다. 이집(李㙫)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노세하(盧世夏)를 장령(掌令)으로, 조익명(趙翼命)을 문학(文學)으로, 남치훈(南致熏)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홍우녕(洪禹寧)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강원도(江原道) 횡성(橫城) 땅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한 몸뚱이에 머리가 둘이었다.
7월 13일 갑오
평안도(平安道) 안주(安州)에 큰 홍수(洪水)가 나서 인가(人家) 4백 여호가 침몰(沈沒)하고, 개천(价川)과 영변(寧邊)에서는 떠내려 간 인가가 2천여 호를 넘었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7월 14일 을미
사헌부(司憲府)에서 논계(論啓)하기를.
"전(前) 부사(府使) 남택하(南宅夏) 등이 연명(聯名)으로 정장(呈狀)하여 말하기를, ‘그 시조(始祖)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愍)은 신라(新羅) 때의 명신(名臣)으로서 조두(俎豆)를 갖추어 숭봉(崇奉)하고 있으며 사당(祠堂)이 영양(英陽) 땅에 있는데, 본현(本縣)의 현감(縣監) 박필문(朴弼文)이 예손(裔孫) 남진명(南晋明)의 정장(呈狀)에 노여움을 품고 아전을 보내어 사당 문을 봉쇄(封鎖)했다.’고 하였습니다. 토민(土民)이 관장(官長)을 욕되게 한 경우 본래 해당되는 율(律)이 있으나, 선현(先賢)의 사당을 봉쇄함은 일찍이 없었던 놀라운 일입니다.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엄중하게 사핵(査覈)하고 계문(啓聞)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집의(執義) 한영조(韓永祚)가 상소하여 유혁연(柳赫然)과 이원정(李元楨)의 복관(復官)할 수 없음을 논하여 말하기를,
"산군(山郡)의 군병을 단속(團束)함과 체부(體府)의 복설(復設)은 곧 경신년365) 역절(逆節)의 큰 관려(關捩)366) 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혹은 조정(朝廷)의 명을 받지 않고 함부로 작대(作隊)하고 혹은 졸지에 앞서의 의견을 바꾸어 반드시 복설(復設)할 것을 힘써 청하였으니, 부범(負犯)의 지중함이 어떠합니까. 유혁연은 또한 완전히 은휘하지 못하고 그 책임을 허적(許積)의 지휘(指揮)로 떠넘긴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군(新軍)의 창설(創設)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그 품지(稟旨)를 살피지도 않고 오직 허적의 말대로 행한단 말입니까. 강만철(姜萬鐵)은 말하기를, ‘기고(旗鼓)·공장(工匠)·절목(節目) 등의 일을 유혁연이 극력 돌보았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허견이 「유공(柳公)은 의지하여 믿을 만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정원로(鄭元老)는 말하기를, ‘허견이 단속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써 유혁연에게 글을 보냈는데, 유혁연은 「당연히 절목에 의하여 시행한다.」는 말로 답하였다.’고 하면서, 심지어 직접 그 글월을 보았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호복(胡服)으로 둔군(屯軍)을 장속(粧束)367) 하여 불의에 오랑캐가 이르렀다고 크게 외치며 체부의 장사(壯士)로 안에서 동병(動兵)한다면 유혁연이 반드시 딴 뜻이 없을 것이니, 일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써 본다면 또 다만 둔군을 단속할 뿐만 아니라, 조가(朝家)에서 유혁연을 숙장(宿將)이라 하여 중병(重兵)을 준 것이 도리어 역견(逆堅)이 의지하고 힘입은 바가 되었습니다. 여러 역적의 공초(供招)가 이와 같이 낭자한데, 어찌 관여하여 안 자취가 없다고 핑계하며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이원정의 체부 복설은 그 전후로 반복(反覆)한 것이 판연히 두 사람 같았고, 정원로의 공사(供辭)에 ‘체부의 복설은 장차 남(楠)368) 을 위한 것이었다.’고 했으며, 오정창(吳挺昌)의 공사에는 ‘남(楠)이 더불어 서로 친한 자는 사대부(士大夫) 중에서 이원정이 매우 친신(親信)하는 바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원정이 스스로 변명한 바는 곧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의 반중(泮中)에서 수작한 말을 끌어대어 증거하려 한 것입니다. 대개 김석주의 이 말은 비록 한때의 권사(權辭)에서 나왔으나 이원정이 재차 전석(前席)에서 청했을 적에 김석주는 끝내 참섭(參涉)하지 않았고, 또 이원정이 내방(來訪)했을 적에는 복설이 부당(不當)하다고 대답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이원정의 무인(誣引)369) 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정원로가 처음 상변(上變)한 것에는 숨긴 것이 많았기 때문에 체문(逮問)370) 하여 구핵(究覈)하지 못하여 우선 말감(末減)에 따랐으니, 가을의 옥사에 미쳐서는 근저(根抵)가 실지대로 탄로되어 모두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유혁연은 그 정상(情狀)을 안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여 작처(酌處)하여 사사(賜死)하였고, 이원정은 체문과 엄형(嚴刑)이 모두 특교(特敎)에서 나왔는데 다만 굳게 참으며 실토하지 아니하여 형장 아래서 죽었으니, 털끝만큼이라도 풀어줄 만한 원통함이 있단 말입니까. 밖에 있는 대신의 신구(伸救)함은 그 자손의 공사(供辭) 안의 말을 참작함이 많은데, 김석주가 만약 참으로 그 원통함을 알았다면 나라의 친신(親臣)이 되어 어찌 끝내 조정에서 한 마디 말도 없었겠습니까. 설령 김석주가 처음에 글월을 보낸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정절(情節)이 모두 드러나기 전에 있었으니, 어찌 이것으로써 가을 옥사의 증거로 삼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한 대신의 뜻으로 바로 이런 처분이 있었으니, 어찌 심히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두 사람의 일은 이미 그 원통함을 알았으니, 이번의 복관은 조금도 옳지 않음이 없다."
하였다.
7월 17일 무술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교리(校理) 이하원(李夏源)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아뢰기를,
"이석관(李碩寬)이 소결(疏決)로 인하여 석방되었으니, 반드시 추최(追罪)할 것은 없습니다만, 근래 세력이 있는 사람이 큰 마을에 모장(冒葬)371) 하는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비록 일일이 조사하여 파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이 현발(現發)되는 대로 이석관과 같은 경우는 파 옮기게 하여 뒷날을 징계(懲戒)함을 그 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람 사는 근처에 점장(占葬)372) 함을 각별히 금단(禁斷)하라고 명하였다.
7월 20일 신축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와 비국 당상(備局堂上) 조태구(趙泰耉)·윤지인(尹趾仁)이 청대(請對)하였다. 서종태가 말하기를,
"백산(白山)에 경계를 정하고 영원히 범월(犯越)의 근심을 막아 두 나라가 모두 편리하니, 이 일은 마땅히 진사(陳謝)의 거조가 있어야 하며, 사은사(謝恩使) 행중(行中)의 표피(豹皮) 5장(張)을 또 감제(減除)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겸하여 사의(謝意)를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성절사(聖節使)가 사은사를 겸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서종태가 또 말하기를,
"무산(茂山) 사람 한정필(韓廷弼)은 일찍이 수령(守令)을 지냈으니 변금(邊禁)의 지엄(至嚴)함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주장(主將)을 가탁(假托)하고 사사로운 글월을 지어 백성을 유인해 국경(國境)을 넘어 수목(樹木)을 남벌(濫伐)하게 하였으니, 그 형적(形迹)이 지극히 낭자합니다. 비록 정상을 실토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뭇사람의 증언(證言)이 모두 명백하니, 감사(監司)의 장청(狀請)에 의하여 효시(梟示)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여러 대신의 의향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하고, 조태구는 말하기를,
"죄상(罪狀)은 곧장 극률(極律)에 처함이 마땅하나, 승복(承服)하기 전에 먼저 처단함은 법례(法例)에 어긋나니, 금부(禁府)에 나치(拿致)하여 형벌을 써서 승복을 받음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윤지인은 말하기를,
"따로 경관(京官)을 보내어 엄형(嚴刑)하여 정상을 알아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부터 비록 승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곧장 처단함이 한 두 번에 그치지 않았다. 허사 첨사(許沙僉使) 장후량(張後亮)은 황당선(荒唐船)의 일로 효시하였고, 인조조(仁祖朝)의 이규(李烓)는 매국(賣國)한 죄로써 곧장 도사(都事)를 보내어 중로(中路)에서 효시하였다. 한정필도 국경에서 효시함이 옳다."
하였다. 또 한정필과 부동(符同)한 사람인 채유린(蔡有隣)과 채원혁(蔡元赫)을 일체(一體)로 효시하라고 명하였다. 또 평소에 엄하게 신칙(申飭)하지 아니한 죄로 무산 부사(茂山府使) 이찬원(李纘源)은 나문(拿問)하라 명하고, 북병사(北兵使) 장한상(張漢相)은 즉시 상문(上聞)하지 않은 죄로 파직하라 명하였다. 감사(監司) 이선부(李善溥)는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고, 감관(監官) 최익후(崔益厚) 등 11인은 형추(刑推)한 뒤 타도(他道)로 정배(定配)하게 했으며, 풍산 만호(豊山萬戶) 이유백(李裕白)은 금하지도 아니하고 즉시 보고하지도 않은 죄로 또한 나문(拿問)하라 명하였다. 서종태가 말하기를,
"무산(茂山) 사람 채진귀(蔡震龜)는 사사로이 지사(地師)를 거느리고 두만강(豆滿江) 건너편에서 길지(吉地)를 가렸으니, 일은 비록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죄는 매우 중합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의논하기를 혹은 ‘마땅히 극률(極律)을 써야 한다.’고 하고, 혹은 ‘마땅히 다음 율(律)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조태구와 윤지인이 또한 모두 말하기를,
"감사(減死)하여 먼 곳을 정배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서종태가 말하기를,
"해서(海西)에서 나포(拿捕)한 바 황당선 19척(隻)과 수백 명의 사람은 【일전에 감사(監司) 이집(李㙫)이 포착(捕捉)한 일을 계문(啓聞)하였다.】 마땅히 저 나라의 말에 의하여 입송(入送)하여야 하나, 이는 분명히 어채선(漁採船)으로서 입송하는 데 폐단이 있을 것이니, 이제 그대로 놓아 돌려보내고 이런 뜻으로 통보(通報)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조태구와 윤지인이 모두 말하기를,
"후폐(後弊)를 막기 어려우니, 입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은 입송하고 이 뒤로는 나타나는 대로 쫓아 보낼 일로 해서에 분부함이 좋겠다."
하였다. 또 서종태의 건백(建白)으로 인하여 북로(北路)의 경계를 정한 곳에다 토축(土築)과 목책(木柵)으로 표지(標識)를 설치할 일을 본도(本道)에 명하여, 농한기(農閑期)를 기다려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편의(便宜)에 따라 하게 하였다.
7월 21일 임인
유술(柳述)을 집의(執義)로, 구만리(具萬理)·윤취리(尹就履)를 장령(掌令)으로, 오명항(吳命恒)·신심(申鐔)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명준(李明浚)을 수찬(修撰)으로, 홍중휴(洪重休)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오명준(吳命峻)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김시혁(金始㷜)·정운주(鄭雲柱)를 지평(持平)으로, 이병상(李秉常)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7월 22일 계묘
평안도(平安道) 희천군(熙川郡)에 큰 홍수(洪水)가 나서 정은지(丁銀知) 등 1백90여 명이 물에 빠져 죽고 혹은 압사(壓死)하였다.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24일 을사
권익관(權益寬)을 지평(持平)으로, 황흠(黃欽)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교리(校理) 오명항(吳命恒)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안뢰기를,
"근래에 흉년의 진자(賑資) 때문에 심지어 벼슬을 파는 거조가 있었습니다. 접때 의주(義州)에서 진자를 보탠다며 공명첩(空名帖)을 얻기를 청하자 묘당(廟堂)에서 허락하였는데, 진황(賑荒)의 계책으로 어쩔 수 없이 이와 같다지만 마땅히 남잡(濫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역설(譯舌)의 무리가 북경(北京)의 보조(朝報) 1장을 얻으면 진가(眞假)를 분별하지 않고 언제나 상자(賞資)를 더하니, 더욱 경계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7월 25일 병오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진규(金鎭圭)가 상소하여 채진귀(蔡鎭龜)의 원배(遠配)가 실형(失刑)이 됨을 【채진귀의 일은 위의 인견했을 때의 설화(說話)에 보인다.】 논하여 말하기를,
"변경(邊境)의 백성의 범월(犯越)은 일찍이 그 일의 일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는 계교하지 않고 일죄(一罪)373) 로 처단(處斷)하였으니, 어찌 유독 채진귀에 대해서만은 그 미처 입장(入葬)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용서한단 말입니까. 더욱이 채진귀는 그 범월한 자취를 가리고자 하여 ‘대홍단수가 진짜 두만강이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으니, 그 뜻을 씀이 매우 해괴(駭怪)합니다. 그런데도 이제 일찍이 궁민(窮民)에게 쓰던 법을 쓰지 않으니, 어찌 실형 중에서도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채진귀의 죄는 한정필(韓廷弼)과 차이가 있으며, 감사(減死)하여 멀리 정배함은 작량(酌量)한 데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7월 26일 정미
사은사(謝恩使) 박필성(朴弼成)·민진원(閔鎭遠)·유술(柳述)이 들어오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諭)하였다. 박필성이 말하기를,
"신 등이 들어갈 때 심양(瀋陽)에 이르러 마침 목극등(穆克登)일행을 만났는데, 말하기를, ‘이번의 방물(方物)은 또한 반드시 제감(除減)될 것이다.’ 하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습니다. 통관(通官)의 무리가 모두 말하기를, ‘목극등(穆克登)이 우리 나라를 위해 주선하니, 단지 방물의 견면(蠲免)뿐만 아니라, 경계를 정하는 것도 또한 잘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목극등이 우리를 위함은 믿을 수 있을 듯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 황제(皇帝)가 재물을 탐하여 벼슬 임명을 모두 뇌물로 하는데, 장사꾼으로서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자가 있으면 곧 직급(職級)을 주며, 백성이 살기 어려워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다 합니다. 사관(使館)에 왕래하는 자로서 이와 같이 지적하고, 또 말하기를,
"황제의 장자(長子)가 깊은 곳에 갇혀 있는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그 아들이 장성하여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가 재촉하여 성혼(成婚)시킨다고 하며 명년이 곧 황제의 나이 예순이 되는 해라 마땅히 대사(大赦)가 있을 것이며, 칙사의 행차가 조선(朝鮮)으로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이 계주(薊州)에 이르렀을 때 행동거지가 다른 오랑캐의 다른 한 노인이 있기에, 신이 불러서 그 성명을 물었더니 ‘주(朱)’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성관(姓貫)을 물었더니,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不敢言]’란 세 글자를 손바닥에 써 보이며 ‘나는 황친(皇親)이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물어보았더니,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네째 아들의 이름이 의연(毅然)인데 자기의 증조(曾祖)가 되고, 의연의 아들이 사성(思誠)인데 사성의 아들 윤(倫)이 곧 자기의 아버지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뒤바뀔때 어떻게 화(禍)를 면하였느냐.’고 물었더니, ‘나의 아버지가 동쪽으로 유적(流賊)을 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여 이내 이 땅에 살면서 정함장(丁含章)으로 성명을 바꾸었다.’ 하고, 이어 신 등의 의관(衣冠)을 살펴보더니 감창(感愴)한 안색으로 눈물을 떨구며 오열하였습니다. 또 ‘남방(南方)에 경보(警報)가 있다고 하는데 믿는가.’ 하고 물었더니, ‘광동(廣東)의 해적(海賊)은 실지는 황명(皇明)의 후손이요 장비호(張飛虎)·장만종(張萬鍾)은 모두 그 장수이다. 바다에 출몰(出沒)하며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니, 청나라 장수 네 사람이 싸움에 패하여 항복하고 복건(福建) 땅을 이미 그 절반을 차지하였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호인(胡人)은 한 번 말하면 곧 그 값을 요구하는데, 이 사람은 값을 요구하지 않고 그 감창함이 성심(誠心)에서 나오는 듯하였습니다. 또 주인에게 물은즉 말하기를, ‘그 사람이 바로 정함장이다.’라고 하였으니, 성명을 고쳤다는 말도 또한 믿을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신종(神宗)의 아들은 곧 태창(泰昌)374) 으로 그 휘(諱)가 상락(常洛)인데, 의연이 신종의 아들이라면 이름이 같지 않아 이것이 의심스러웠습니다만, 미처 힐문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북경(北京)에 있을 때 서반(序班)375) 이 전하는 바를 듣건대, ‘장만종의 아들은 산동(山東)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있고, 또 정원군(鄭元軍)은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오랑캐를 평정하고 명나라를 세운다.」[定胡扶明]는 네 글자를 기(旗)에 걸어 향하는 곳에 적(敵)이 없다.’고 하였으니, 대략 주(朱)가 전한 바와 서로 같았습니다. 돌아올 때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 또 교수(敎授)로서 정씨(井氏)성을 가진 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외환(外患)은 족히 근심할 것이 없고, 황제의 장자와 태자(太子)의 원수 같은 사이가 갈수록 깊어지니 소장(蕭墻)376) 의 근심이 걱정스럽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서장관(書狀官) 유술이 바야흐로 집의(執義)의 직임을 띠고 연중(筵中)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날 유술이 유혁연(柳赫然)과 이원정(李元楨)에게 내린 명을 환수(還收)하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오명항(吳命恒)이 상소하여, ‘갑자기 등대(登對)하여 급급하게 임의로 정계(停啓)한 것은 해괴한 일이다.’고 하면서 속히 견벌(譴罰)을 행할 것을 청하니, ‘혼자 중론(重論)을 정지함은 진실로 놀랍다.’며 특별히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수찬(修撰) 홍중휴(洪重休)가 소(疏)를 올려 이를 신구(伸救)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29일 경술
유명응(兪命凝)을 집의(執義)로, 홍우녕(洪禹寧)·박만보(朴萬普)를 장령(掌令)으로, 남일명(南一明)을 지평(持平)으로, 이만견(李晩堅)을 응교(應敎)로, 김상원(金相元)·윤성시(尹聖時)를 정언(正言)으로, 허윤(許玧)·조도빈(趙道彬)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7월 30일 신해
경상도(慶尙道)에 충재(蟲災)·박재(雹災)가 있었고 홍수(洪水)가 났다. 전라도(全羅道) 진도(珍島) 등지에는 충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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