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2권, 숙종 38년 1712년 11월

싸라리리 2025. 11. 2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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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경진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40차례째 정사(呈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한결같이 돈유(敦諭)하여 강박(强迫)함은 미안스러운 바가 있으므로, 지금 우선 본직(本職)만 면부(勉副)한다."
하였다.

 

날씨가 추우므로, 옷이 얇은 군사들에게 유의(襦衣)를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이윤문(李允文)을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11월 2일 신사

사헌부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새로 아뢰기를,
"죽산부(竹山府)는 액외(額外)로 모입(冒入)한 교생(校生)이 1백여 명이란 많은 수에 이르렀으므로, 순영(巡營)에서 분부하여 군보(軍保)의 자손들을 사핵(査覈)하게 하였습니다. 부사(府使) 이순곤(李順坤)이 4, 50명을 사핵해 냈는데, 10일도 못되어 전문(殿門)을 부수고 위판(位版)을 부수어버리는 변이 생겼습니다. 이는 도태(淘汰)된 교생들의 소위에서 나온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수령(守令)을 논죄(論罪)하지 않고 그대로 각별히 기찰(譏察)해 잡아내도록 했으니, 마땅히 엄중하게 사핵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석 달이 지나도록 질질 끌며 기찰하지 아니하여 기필코 잡아낼 뜻이 전혀 없습니다. 청컨대 이순곤은 파직하고, 따로 강단 있고 분명한 관원을 정하여 도태된 교생들을 잡아다가 성묘(聖廟)에서 변을 일으킨 죄를 사핵해 내어 통쾌하게 형법(刑法)대로 다스리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이돈(李墩)의 겸종(傔從) 정몽선(鄭夢先)이 형을 받은 뒤에도 여전히 저뢰(抵賴)하고 승복(承服)하지 않으므로, 함께 갔던 겸종들에게 정몽선이 뒤쳐졌던 것이 【정몽선이 뒤쳐졌다는 것에 관한 공초는 뒤에 나와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를 추문(推問)하니, 모두 말하기를,
"정몽선은 색구(色丘)인데 어찌 감히 뒤쳐질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정몽선을 여러 겸종들과 대질(對質)시키게 하니, 여러 겸종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몽선이 옥중(獄中)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부탁해 뒤쳐진 것으로 답변하도록 하며, 매번 말하기를, ‘내가 죽고 살고는 단지 너희들의 입에 달렸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정몽선이 말이 꺾이고 안색이 달라지며 단지 말하기를,
"제가 여러 겸종들을 고발했기 때문에 이를 들어 혐오(嫌惡)를 품은 것입니다."
하였다. 형조에서 다시 정몽선에게 형을 베풀자, 그제야 실토하기를,
"이 판서(李判書)가 집으로 돌아올 적에 종루(鍾樓)에서 동현(銅峴)·명례동(明禮洞)·이현(泥峴)을 거쳐 오진사(吳進士)의 집에 들렸는데, 주객(主客)간에 몇 사람이나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형조에서 또 아울러 여러 겸종들을 모두 두 차례 신문(訊問)하자, 여러 겸종들이 모두 일제히 승복했다. 이어 비로소 가두고 결말을 기다릴 것을 계청(啓請)하니, 그대로 따랐다.

 

평안도 함종(咸從)·증산(甑山) 등지에 해일(海溢)이 일어나 익사한 백성이 있었다.

 

11월 3일 임오

동지사(冬至使) 겸사은사(兼謝恩使) 김창집(金昌集)·부사(副使) 윤지인(尹趾仁) 등이 사폐(辭陛)하니, 인견(引見)을 명했다. 김창집이 아뢰기를,
"방물(方物)중에서 세폐(歲幣)와 지지(紙地)를 언제나 탈을 잡으므로 구차하게 미봉(彌縫)한다고 합니다. 이 뒤로는 각별하게 거듭 신칙하되, 만일에 퇴짜를 맞는 일이 있으면 마땅히 해당 낭관(郞官)을 논죄(論罪)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 선온(宣醞)하도록 명하고서 납약(臘藥)과 호초(胡椒) 등의 물건을 내려 위유(慰諭)하여 보냈다. 승지 김덕기(金德基)의 계달(啓達)로 인하여 이조 판서 이건명(李健命)에게 별유(別諭)를 내려 재촉하여 즉시 시급히 들어오도록 하였다.

 

11월 4일 계미

약방(藥房)에 명하여 문안도 하지 말고 입진(入診)도 말도록 하였다.

 

유태명(柳泰明)을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11월 5일 갑신

밤에 화성(火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했다. 영의정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김석연(金錫衍)이 금오(金吾)의 직을 겸임하고 있으면서도 행공(行公)하지 않아 어제 이미 체직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탑전(榻前)으로 불러 면유(面諭)하신다면 이 뒤로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김석연이 글을 하지 못한다며 사직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과옥(科獄)은 지극히 중요하니, 이런 때에는 행공해도 무방하다."
하였다. 임금이 홍숙(洪璛)의 눈병의 경중을 묻자, 이유가 사실대로 대답하니, 임금이 개차(改差)하도록 명하였다. 이유가 또 대정(大政)이 천취되고 있다며 다시 이조 판서를 재촉하여 올라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추고(推考)하고 다시 신칙하도록 명하였다. 이유가 또 종성 부사(鍾城府使) 조식(趙湜)은 나이가 이미 65세라고 하여 개차(改差)를 청하고, 이어 문무관(文武官)을 막론하고 나이 60을 넘은 사람을 육진(六鎭) 등지의 변장(邊將)이나 수령(守令)으로 차출하지 말 것을 품달(稟達)하여 정식(定式)으로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태로(趙泰老)가 아뢰기를,
"통진(通津)은 강도(江都)와 실로 순치보거(脣齒輔車)477)  의 형세가 있는데, 문수 산성(文殊山城)이 통진으로 가는 요해지(要害地)에 있어 그 위에 올라가면 강도의 형세가 환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같이 지키면서 기세를 합친 다음에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총융사(摠戎使)에 소속되었으니 강도에 대해서는 실로 서로 의지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또한 군정(軍情)을 들어 보건대, 모두 강도에 소속되기를 바란다고 하니, 하문(下問)하여 처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이유도 또한, 이속(移屬)시키는 것이 편리할 것이라고 하니, 임금이 이속시키도록 명하였다. 또 통진에 있는 읍(邑)을 문수 산성으로 옮기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하문하자, 조태로가 아뢰기를,
"성안이 아주 험하고 또 우물이 적으니, 고을을 옮김은 불편합니다."
하고, 이유는 고을을 옮기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임금이 고을을 옮기기로 확정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어유귀(魚有龜)가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새 죽산 부사(竹山府使) 강세보(姜世輔)는 성품이 본시 용렬하고, 새 중화 부사(中和府使) 조유춘(趙囿春)은 사람됨이 거칠고 못나니, 모두 개차(改差)하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강계(江界)의 교생(校生) 오징(吳徵) 등이 정장(呈狀)하기를, ‘종포(從浦)의 진졸(鎭卒)로 도고(逃故)한 경우가 50명이란 많은 수에 이르는데, 저희들은 그 족속(族屬)으로 혹독한 침징(侵徵)을 받고 있습니다. 만호(萬戶) 박홍보(朴弘輔)는 인족(隣族)을 교유(敎誘)하되 대정(代定)할 때 소용되는 것이라며 한 사람에 은(銀) 1냥(兩) 씩을 거두어 도합 50냥을 전부 자기가 차지하고, 도고는 그대로 대정하지 않은 채 그전대로 포(布)를 거두고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이는 토민(土民)들이 고소(告訴)한 것과는 다름이 있으니, 자세하게 사핵(査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박홍보를 잡아다 추문(推問)하여 핵실해 처결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9일 무자

이조 판서 이건명(李健命)이 서울로 들어와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또 재차 소명(召命)을 어기므로, 임금이 특별히 하교하여 추고(推考)하도록 하자, 이건명이 비로소 출사(出仕)하였다.

 

11월 10일 기축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병조 판서 조태채(趙泰采)가 아뢰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행궁(行宮) 자리는 중흥사(重興寺)의 옛터만 못하니, 행궁을 다시 이 곳에 옮기어 세우도록 명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고, 영의정 이유(李濡)는 아뢰기를,
"당초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간심(看審)하게 하고 여러 대신이 함께 의논하여 품정(稟定)한 것이니, 조용하게 상확(商確)하여 처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간심한 다음에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지평 어유귀(魚有龜)가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고, 권설(權卨)의 일에 대해서는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이유(李濡)는 피혐(避嫌)하여 주대(奏對)하지 않았고, 조태채(趙泰采) 및 지사(知事) 이기하(李基夏)와 형조 판서 박권(朴權)은 모두 말하기를,
"권설이 도둑을 다스리는 데 능한지의 여부는 비록 잘 알지 못하지만, 김부차(金夫差)에 관한 말은 혼란을 요행으로 여겨 능력을 자랑하는 계책이었으니, 쟁집(爭執)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하고, 헌납 한영조(韓永祚)도 또한 대계(臺啓)를 옳게 여기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어유귀가 또 논하기를,
"어버이의 나이가 70인 사람은 3백리 밖에 서용(敍用)하지 않는데,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사목(李思牧)은 어미의 나이가 70인데다가 독자(獨子)로서 멀리 천리의 땅에 있으면서 한 번 사장(辭狀)을 내고는 지금까지 여전히 그대로 눌러 앉아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교리 신심(申鐔)이 관료(館僚)의 구간(苟簡)478)  함을 들어 마땅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함을 진달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택(李澤)이 도배(徒配)된 일은, 그 자신이 남기(濫騎)하는 짓을 한 것과 차이가 있는 것인데,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이택의 일은 아랫사람을 검찰(檢察)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고, 그 자신이 남기한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벌을 이미 집행했으니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임금이 연은문(延恩門)에다 괘서(掛書)479)  한 사람을 아직도 체포하지 못하였다 하여 포도 대장을 모두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이희조(李喜朝)를 승진시켜 승지(承旨)로, 김진규(金鎭圭)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교악(李喬岳)을 수찬(修撰)으로, 홍중휴(洪重休)를 교리(校理)로, 권상유(權尙游)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이만견(李晩堅)을 집의(執義)로, 홍호인(洪好人)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지평 김상옥(金相玉)이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근년(近年) 이래로는 공도(公道)가 날로 없어지고 요행을 노리는 길이 크게 열려 하나의 초사(初仕) 자리나 하나의 읍재(邑宰) 자리가 비면, 부정한 연줄과 옆길로 청탁이 몰려들며 제목(除目)480)  이 나오기도 전에 물색(物色)이 먼저 정해집니다. 수재(守宰)가 된 사람들은 오로지 헛된 명성만을 바라고 당로(當路)에 아첨하여 겨우 한 고을 원을 지내자마자 갑자기 주부(州府)로 승진합니다. 파주 목사(坡州牧使) 홍우정(洪禹鼎)은 일찍이 남쪽의 고을을 맡았을 때 치적(治績)이 두드러지지도 않았는데, 특별히 승진시켜 서용(敍用)함 따라 갑자기 주(州)의 목사를 제수했습니다. 정사(政事)하는 준례에 어긋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개정(改正)하는 거조(擧措)가 없을 수 없습니다. 전 목사 이세항(李世恒)은 섬기기를 잘하여 발신(發身)하였고, 또 수단이 교활(狡猾)하여 여러 차례 큰 고을을 맡으며 오로지 자기를 살찌우는 것만을 일삼았습니다. 이러한 탐오(貪汚)하고 불법(不法)한 사람은 또한 정조(政曹)로 하여금 다시는 검거(檢擧)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본병(本兵)에 있는 몸으로 천금(千金)의 집을 사들이고도 태연히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방백(方伯)의 자리에 있는 관원으로 제멋대로 제택(第宅)을 짓고 있기도 하며, 정관(政官)이 된 사람은 수령(守令)을 차출(差出)하여 보낼 적에 으레 징색(徵索)하는 일이 있으므로 관차(官次)에 나아가자마자 걸태질이 따르는데, 무식한 무변(武弁)들은 감히 어기거나 거스르지 못하여 비리(非理)로 징수하여 그들의 요구를 채워 주고 있습니다.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는 사송(詞訟)을 맡는 자리인데도 공공연하게 뇌물이 오가고 있고, 기성(騎省)의 군색(軍色)을 맡은 낭관(郞官)은 비쇄(鄙鎖)하다는 비방이 있으며, 법사(法司)는 속물(贖物)을 받을 적에 염지(染指)481)  의 혐의를 돌보지 않습니다. 경사(京司)가 이러하니 외방(外方)도 알 만합니다."
하고, 그 다음에 또 논하기를,
"이제(李濟)는 자신이 먼 변방에 있으면서 옥사(獄事)의 실정을 억측(臆測)하고 손발을 허둥지둥 놀려 급급하게 상소하였으되, 감히 전하(殿下)의 처분을 판연히 두 사람이 한 것과 같다고 했으니, 조정 신하들을 얽고 모함한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대성(李大成)은 과사(科事)에 관해 발론(發論)한 대관(臺官)에게 감정을 가지고 분을 내며 욕설을 했고, 또 이만휴(李萬休)가 자수(自首)한 바 시권(試券)에 자호(字號)를 써 넣은 것이 제 아들 이진급(李眞伋)에게 떼미는 발단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원한과 감정을 견디지 못하여 많은 사람이 있는 넓은 좌중(座中)에서 갖은 말로 책망하고 욕을 했으니, 신(臣)은 그윽이 해괴하게 생각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본병(本兵)에 있는 몸이 천금으로 집을 사들였다는 말은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 알수는 없지만, 대단히 사리에 가깝지 않다. 이세항의 일은 자세히 살펴서 처결하겠다. 이대성의 일이 과연 상소의 말과 같다면 진실로 해괴하다만, 전해지는 말을 어찌 모두 믿을 수 있겠는가. 홍우정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1월 11일 경인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11월 12일 신묘

주강에 나아갔다. 응교 신심(申鐔)이 초야(草野)에 은거(隱居)하는 사람들을 널리 찾아 경연(經筵)에 출입하게 할 것을 청하고, 이어 교리 홍우서(洪禹瑞)가 일찍이 자의(諮議)를 거친 사람 중에서 더욱 나은 사람을 가려 임용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착실하게 거행하도록 하였다.

 

11월 13일 임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유집일(兪集一)을 인견(引見)하였다. 유집일이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신완(申琓)이 올린 책자(冊子)에 서로(西路)의 관방(關防)에 관한 일을 논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아직도 복품(覆稟)하지 않았다고 하니, 청컨대 다시 분부하시어 빨리 회계(回啓)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충청도 관찰사 한배주(韓配周)가 신병을 핑계하며 상소하고, 도사(都事)로 하여금 대신 장계(狀啓)하도록 한 것은 지극히 미안한 것이라며 특별히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5일 갑오

일전에 포도 대장(捕盜大將) 이우항(李宇恒)이 청대(請對)하여, 상변(上變)한 사람 서종철(徐宗哲)·윤매(尹梅)가 바친 봉서(封書)를 수진(袖進)하였는데, 대개 연은문(延恩門)에 괘서(掛書)한 사람을 고발한 일이었다. 임금이 즉시 대신과 의금부 당상(堂上) 및 양사(兩司)의 장관(長官)을 명소(命召)하여 그 봉서를 내리고, 이어 정국(庭鞫)을 차리라고 명하였다. 서종철 등이 공초(供招)하기를,
"사인(士人) 유언임(兪彦任)이 말하기를, ‘권설(權卨)이 괘서(掛書)가 나오기 며칠 전에 「3, 4일이 되지 않아서 괴이한 글이 나라에 나올 것인데 나라의 근심이 반드시 클 것이다.」라고 했었는데, 며칠 뒤에 과연 그 말이 증험되었다.’고 했습니다. 만일 지금 권설을 추문(推問)한다면 역적의 괴수를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므로, 국청(鞫廳)에서 이 말을 가지고 유언임(兪彦任)을 추문하니, 유언임이 공술하기를,
"권설과는 본래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이고, 이른바 ‘3, 4일이 되지 않아 반드시 괴이한 글이 있을 것이다.’는 말도 본시 발언(發言)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서종철을 다시 추문하자, 이르기를,
"포도 부장(捕盜部將) 정무혁(丁武赫)과 함께 분주하게 기포(譏捕)했지만 끝내 단서(端緖)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유언임에게서 들은 대로 부장에게 말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윤매를 다시 추문하니, 이르기를,
"서종철이 ‘이번의 밀고(密告)는 나와 자네가 일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하였기에 과연 그의 말대로 한 것인데, 서종철 자신이 주장이 되었고, 저는 한결같이 서종철의 지휘에 따라서 했습니다."
하였다. 정무혁을 추문하자, 이르기를,
"서종철이 두 장의 문서를 옷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하나는 윤매가 만든 것이고, 하나는 유언임이 만든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윤매를 불러다 자세히 추문하자, 윤매가 말하기를,
"유언임이 말했다는 ‘3, 4일이 되지 못하여 괴이한 글이 있을 것이다.’는 말은 제가 과연 듣거나 안 일이 없으며, 밀서(密書)도 저와 유언임이 모두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서종철에게 협박을 받아 스스로 쓴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므로, 즉시 서종철을 윤매가 앉아 있는 곳으로 오라고 청하여 꾸짖으니, 서종철이 과연 그가 공갈(恐喝)한 실상을 자복하였다. 여러 군관(軍官)에게 다시 들은 바를 추문하자, 윤매가 말하기를,
"밀서는 비록 제가 쓴 것이 아니지만, ‘3, 4일이 못되어 괴이한 글이 있을 것이라.’는 말은 과연 유언임에게서 들은 것이기에, 바로 여럿이 모인 곳에서 제가 다시 스스로 써서 주었고, 이를 대장(大將)에게 바치면서 일의 정상을 갖추어 고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서종철이 ‘이봉천(李奉天)의 일과 통진(通津) 공가(孔哥)의 일은 그 뒤에 모두들 허망한 것임을 자복했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곧 서종철을 형추(刑推)했는데, 서종철은 12도(度)에 비로소 실토했고, 윤매는 위차(威次)를 베풀자 곧 자복했다. 국청의 대신 이하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종철은 마땅히 율(律)대로 처단하라. 윤매는 서종철에게 유혹과 위협을 받은데다 또 2대 독자(獨子)이니, 또한 불쌍히 여길 만하다. 내 뜻으로는 생의(生議)482)  에 붙이고자 한다."
하였다. 영의정 이유(李濡)·판의금부사 민진후(閔鎭厚)·지의금부사 김석연(金錫衍)·동지 의금부사 이만성(李晩成)과 유명웅(兪命雄)이 모두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마땅합니다."
하고, 지평 김상옥(金相玉)·헌납 한영조(韓永祚)는 아뢰기를,
"윤매는 이미 제 손으로 밀서를 썼으니,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형을 감하여 정배(定配)하고 서종철은 법대로 처단하도록 명하였다. 이 뒤에 정언 홍우녕(洪禹寧)이 발계(發啓)하여 윤매를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도록 한 명을 환수(還收)하고 율(律)대로 처단할 것을 청하고, 또 논하기를,
"이우항이 경연(經筵)에서 진달한 일은 사체가 중대하였는데, 구핵(究覈)해 보니 마침내 사실이 아닌 것으로 귀착되었습니다. 정무혁이 공술한 것으로 보건대, 서종철의 허망한 정상이 한 두 가지에 그치지 않았으니, 말의 부실함을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초 어찌하여 일에 단서가 있다며 중신(重臣)에게 말했다가 【이우항이 일찍이 일에 단서 있다고 조태채(趙泰采)에게 말했는데 조태채가 경연에서 그 말을 꺼냈기 때문에 이우항이 드디어 할 수 없이 말을 꺼냈던 것이다.】  또한 어찌하여 앞질러 청대(請對)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6일 을미

장령 정필동(鄭必東)이 논사소(論事疏)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臣)은 통신사(通信使)가 왕래하는 길에 살고 있는데, 그들이 돌아올 때에 군읍(郡邑)에 끼친 폐단은 실로 전고(前古)에 없던 바입니다. 통신사는 바야흐로 나명(拿命)에 응하고 있어 비록 그 자신은 역마(驛馬)를 타지 않지만, 딸린 사람들이 타는 말은 오로지 역로(驛路)에다 책임지우고, 복물(卜物)은 각 고을로 하여금 말을 세 내어 운반하도록 하여, 상사(上使)의 것은 30여 바리나 되고 부사(副使)의 것도 또한 같습니다. 각 고을의 관리들이 사방으로 나가 마을들에서 억지로 우마(牛馬)를 가져다가 그 수를 채우고, 특히 그들이 가진 절모(節旄)483)  를 역참(驛站)에 팽개쳐 둔것을 우관(郵官)들이 습득(拾得)하여 며칠이 걸리는 길을 뒤쫓아 보내기도 합니다. 종사(從事)와 일행(一行)의 사람들이 가진 것은 모두 돌아가는 배에 싣기 때문에 복태(卜駄)의 수를 신이 잘 알 수는 없지만 대개 상사·부사의 것과 매한가지라고 합니다. 복태 이외에도 또한 져서 운반해야 할 것이 있어, 부산 첨사(釜山僉使)가 방물(方物)을 지고 갈 역군 5백명을 정비해 놓고 기다리라는 뜻으로 각 고을들에 이관(移關)484)  하고, 그 수 이외에 1천 명이나 공공연히 판출(辦出)해 놓고 대기하는 동안에 걸핏하면 한 순(旬)을 넘깁니다. 운반하는 물건은 감롱(龕櫳)·궤독(櫃櫝) 등속이 많은데 굳게 봉하거나 두텁게 싼 것이고, 그 중에 봉쇄(封鎖)하지 않아 사람들이 보았던 것들은 기화 이초(奇花異草)의 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무릇 이러한 진기한 물품들은 민간에서 모두 헌어(獻御)하는 물건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이 함부로 천 명이 넘는 백성을 징발하고 멀리 천리 밖까지 가져가 원망이 조정으로 돌아가고 의심이 성덕(聖德)에 미치게 하니, 그 죄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시(庭試)의 시권(試券) 중에 글제의 글자 모양이 이상하여 현저하게 법에 어긋난 단서가 있는 것을 재신(宰臣)으로서 목도한 사람이 많았고, 사람들의 말이 또한 매우 떠들썩하다고 합니다. 대개 글제의 글자가 점획(點劃)이 현판(懸板)에 쓴 것과 다르게 되어 있을 경우 고관(考官)이 뽑지 않음은 전례가 곧 이러한 것으로, 이는 실로 간사한 짓을 막고 근신(謹愼)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암암리에 간사한 꾀를 부린 자취는 비록 적발해 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처럼 글자에다 표를 한 것이 현저한 일을 어찌 한결같이 덮어둘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시권에 표가 있어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은 것일 경우 일체 모두 뽑아내어 과법(科法)을 엄하게 하소서. 김만채(金萬埰)가 윤덕준(尹德駿)에게 본래부터 원수와 같은 혐의가 있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그가 기백(畿伯)485)  을 제배(除拜)했을 적에도 이것을 혐의로 여겨 잠깐 들어갔다가 곧 다시 나와 승패(承牌)하여 덮어놓고 부임하였으되, 부절(符節)을 교부(交付)할 때 얼굴을 돌린 채 상대하였으니, 행동거지가 해괴 하였습니다. 더욱이 정령(政令)은 전도(顚倒)되고 청단(聽斷)은 잘못되고 있으니, 흉년의 순선(旬宣)486)  하는 책임을 아마도 이 사람에게 그대로 맡길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통신사의 일은 사리에 가깝지 않은 듯하고, 시권 중에서 글제의 글자 모양이 이상한 것은 뽑아내어 버리자는 말은 매우 과당한 데 관계된다. 기백(幾伯)의 정령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겠다만, 조신(朝臣)은 피혐(避嫌)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하교한 것이 있는데, 덮어놓고 부임했다고 하니,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정필동이 비지(批旨)를 미안하게 여겨 인피(引避)했는데, 피사(避辭)에다 통신사(通信使)의 복태(卜駄)가 외람되게도 많아 폐단을 끼침이 적지 않은 정상을 더욱 상세하게 논하고 말하기를,
"영남(嶺南)·호남(湖南)의 수령(守令)과 연로(沿路)의 사민(士民)들이 다같이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고, 신(臣)도 이목(耳目)으로 보고 듣고 기억하고 있는 것을 사실에 의거하여 논열(論列)했던 것인데, 살펴 주심을 받지 못하였으니, 신이 그윽이 개탄합니다."
하고, 그 다음에 시권(試券)의 글제에 관한 일은 논하기를,
"무릇 모든 시험장의 글제나 시권에 감히 이상한 표가 있는 글자를 쓰지 못하는 것은 대개 간사한 짓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의 정시(庭試) 때에 이헌영(李獻英) 형제의 시권 내용에 ‘공(龔)’자를 ‘’으로 쓴 것을, 금오(金吾)에서 가져다 고찰할 적에 참여했던 당상(堂上)과 낭관(郞官)이 놀라며 의아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으며 서로 의심스런 것으로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안핵(按覈)받는 것 밖의 일이었으므로 의언(議讞) 가운데 거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뒤 두 대신(臺臣)의 상소에 이른바 ‘사핵(査覈)해야 할 어긋난 단서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일을 가리킨 것인데, 미미하게 그 실마리만 꺼내고 그 말을 다하지 않았기에 아직까지 사핵을 하는 일이 없게 된 것입니다. 또 듣건대, 이 이외에도 이 시권과 같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옛날 선조(先朝) 때에도 거자(擧子) 권환(權瑍)의 정대(庭對) 시권 가운데 ‘배(拜)’자를 ‘扒’자로 써서 입격(入格)했다가, 뒤에 곧 도로 빼버렸습니다. 이번에 글제의 글자가 이상한 것은 원편(原篇) 가운데 있는 한 글자와 비교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닙니다. 또 이미 공좌(公坐)의 뭇사람이 보는 곳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인데, 한결같이 덮어 두고 아직까지 핵실하여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엄하게 하고 간사한 짓을 막는 도리에 있어서 분명하게 사핵해 처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과당하다는 하교는 실로 뜻밖입니다."
하고, 말미에 또 논하기를,
"김만채(金萬埰)는 진퇴(進退)에 있어 법도가 없어 얼굴을 돌린 채 상대했으니, 더욱 대단히 해괴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아울러 논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장령 홍호인(洪好人)이 처치(處置)하되, ‘아래 조관에서 한 말은 너무 지나친 데 관계되나, 【곧 김만채에 관한 일을 가리킨다.】  그 나머지 논열(論列)은 모두 고집하는 바가 있다.’는 말로 출사(出仕)시킬 것을 청하였다.

 

11월 17일 병신

이만성(李晩成)을 이조 참판(吏曹參判), 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이광좌(李光佐)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신임(申銋)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이택(李澤)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1월 19일 무술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이때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두 능에 사나운 범이 횡행(橫行)하며 사람과 가축을 물었는데, 김진규(金鎭圭)의 말에 따라 군문(軍門)의 포수(砲手)를 나누어 보내 포위해 잡도록 하였다.

 

이정주(李挺周)를 지평(持平)으로, 조도빈(趙道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홍우서(洪禹瑞)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심수현(沈壽賢)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1월 20일 기해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저 나라가 태자(太子)를 폐했기 때문에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에 계전(啓箋)의 방물(方物)들을 모두 정지하도록 한 것이니, 그들의 말대로 보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자, 영의정 이유(李濡)가 방물을 의주(義州)에 머물러 두었다가 앞으로 추이(推移)하여 사용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진위(振威) 지방에 뇌성이 진동하였다.

 

11월 21일 경자

방물(方物) 중에 대전(大箭)과 황모(黃毛)를 임시 변통하여 감한 대로 정조(正朝)부터 시작하여 봉진(封進)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정필동(鄭必東)이, 홍호인(洪好人)이 처치(處置)한 말에 ‘아래 조관의 말은 너무 지나치다.’고 하고 억지로 출사(出仕)를 청한 것을 들어 인피(引避)하자, 홍호인도 또한 인피하였다. 지평 어유귀(魚有龜)가 처치하여 홍호인은 체직시키고 정필동은 출사하게 하였다.

 

11월 23일 임인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典獄)에 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11월 24일 계묘

사헌부에서 【장령 정필동(鄭必東)이다.】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새로 아뢰기를,
"과장(科場)에서 시권(試券)에 감히 표가 나는 글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함은 간사한 짓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의 정시(庭試)에서 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 형제가 시권의 글제에 ‘공(龔)’자를 ‘’자로 써서 교묘한 꾀를 쓴 자취가 이미 금오(金吾)에서 열람해 볼 때 적발되어 여러 차례 여러 신하들의 장주(章奏)에 올랐습니다. 비록 고사(古事)로 말한다 하더라도 거자(擧子)의 시권 가운데 글자의 모양이 이상한 것은 이미 합격한 것도 도로 빼버린 명백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번에 글제의 글자가 이상한 것은 원편(原篇) 가운데 글자 하나가 표 나게 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몹시 긴중(緊重)합니다. 물정(物情)이 놀라고 분개하여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고핵(考覈)하여 방목(榜目)속에서 빼버리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충주 토포사(忠州討捕使) 정문빈(鄭文彬)은 탐오(貪汚)하여 일을 내팽개친 채 백성에게 가혹한 일을 많이 했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빼버리라는 청은 끝내 합당함을 보지 못하겠으니, 모름지기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정필동이 비지(批旨)를 미안하게 여겨 인피(引避)하니, 홍문관(弘文館)에서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황일하(黃一夏)를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홍우녕(洪禹寧)을 헌납(獻納)으로, 조명봉(趙鳴鳳)을 장령(掌令)으로, 윤봉조(尹鳳朝)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1월 25일 갑진

서명균(徐命均)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11월 26일 을사

도목정(道目政)을 거행하였다. 6월의 도목정을 전조(銓曹)의 장관(長官)이 체직되어 바뀌는 바람에 비로소 이달에야 거행했으니, 이전에는 있지 않던 일이다. 권성(權𢜫)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오명항(吳命恒)을 부응교(副應敎) 겸필선(兼弼善)으로, 이의현(李宜顯)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세근(李世瑾)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11월 27일 병오

도목정을 거행하여, 윤양래(尹陽來)를 지평(持平)으로, 김유(金楺)를 사서(司書)로, 홍석보(洪錫輔)를 설서(說書)로, 박봉령(朴鳳齡)을 부교리(副校理)로, 홍우서(洪禹瑞)를 교리(校理)로, 홍치중(洪致中)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11월 30일 기유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만채(金萬埰)가 장령 정필동(鄭必東)이 상소하여 논한 것 때문에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해명하였고, 우참찬 윤덕준(尹德駿)도 또한 진소하여, ‘얼굴을 돌린 채 상대했다.’는 말은 부연(敷演)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정필동이 이 때문에 인피(引避)하며 사실과 틀리게 된 상황을 자열(自列)하니, 사간원(司諫院)에서 처치하여 체차(遞差)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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