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신사
성석기(成碩夔)를 장령(掌令)으로, 오명항(吳命恒)을 지평(持平)으로, 이웅징(李熊徵)을 필선(弼善)으로, 신심(申鐔)을 겸필선(兼弼善)으로 삼았다.
9월 3일 계미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평안도 평양(平壤) 등지에 지진이 일어났다.
9월 4일 갑신
윤성시(尹聖時)를 사서(司書)로, 신심(申鐔)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삼았다.
정언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건명(李健命)의 한 마디 말이 막 나오자마자 뭇 화살이 여기저기에서 집중되어 비록 한가한 관아의 산질(散秩)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검의(檢擬)하지 않으므로, 마치 죄를 얻어 영구히 금고(禁錮)된 사람과 같음이 있습니다. 또 지난날 일을 논한 신하로서 시의(時議)에 거스림을 당한 사람들을 한결같이 굳게 막고 있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니, 당동벌이(黨同伐異)411) 의 풍습이 또한 심합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형조 참판 홍만조(洪萬朝)는 억지로 인혐(引嫌)할 것이 없는 일을 끌어대어 기필코 규피(規避)하고야 말려고 하니, 마땅히 책벌(責罰)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사핵(査覈)하고 있는 일은 만일 별다른 변통을 하지 않는다면 수습될 날이 없을 것이니, 마땅히 기묘년412) 의 전례대로 구기(拘忌)에 얽매이지 말고 날마다 개좌(開坐)해야 거의 일을 끌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개 홍만조는 명관(命官) 김창집(金昌集)과 친혐(親嫌)이 있다 하여 여러차례 형관(刑官)을 사직하고 행공(行公)하지 않았으므로, 김유경이 상소하여 배척한 것이다. 임금이 답하기를,
"상소에 논한 말은 진실로 매우 합당한 말이다. 홍만조가 억지로 인혐할 것 없는 일을 끌어대어 기필코 규피하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미편(未便)한 데 관계되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그리고 승정원으로 하여금 거듭 유사(攸司)를 신칙하여 날마다 개좌(開坐)하여 되도록 빨리 수습해 갈 바탕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9월 5일 을유
이조 참의 송징은(宋徵殷)이 김유경(金有慶)의 상소로 인해 인피(引避)하고 상소 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건명(李健命)은 밖에서 글을 지은 거자(擧子)가 있었음을 듣고서도 애초 사핵(査覈)을 청하지 않았고, 성명(成命)을 내렸는데도 또한 바로 진달(陳達)하지 않았으며, 전후로 올린 상소에서 여러 차례 그 말을 바꾸었기 때문에 대관(臺官)의 탄핵이 거듭 나오고 공론이 더욱 격렬해졌던 것이니, 잠시 의망(擬望)을 정지한 것은 대개 이런 때문이었습니다. 일을 논했다가 막힘을 당했다는 사람이란 누구를 지적하는 지 알 수 없는데, 반드시 일제히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분명하고 자세히 하여 점차로 소통하려 한 것이고, 단독의 정사(政事)로 함부로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였는데, 갑자기 당동벌이(黨同伐異)라고 지목했으니 신은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건명을 오랫동안 거의(擧擬)하지 않았음은 자못 미편한 데 관계된다."
하였다. 그 이튿날 이조 참판 윤지인(尹趾仁)이 또 이 때문에 인혐(引嫌)하고, 상소 하기를,
"이건명에 관한 일은 신이 실로 의망의 정지를 주관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합계(合啓)했던 대신(臺臣)들을 본래 오래도록 지색(枳塞)함은 합당하지 않은 일인데, 자신이 의망의 정지를 주관했다니 더욱 지극히 미편하다."
하였다.
지평 이세덕(李世德)이 상소하여 이돈(李墩)의 억울함을 극력 논했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가령 이돈이 참으로 사의(私意)가 있었다면 반드시 조복(朝服) 차림으로 가옹(咖擁)하며 대낮에 두루 찾아다녔을 리가 없고, 가령 이돈이 참으로 두루 찾아다닌 일이 있었다면 큰 거리를 우회(迂回)하였으니 마땅히 많은 증인이 있을 것이고, 반드시 두 아이들만 홀로 보았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저 이빈흥(李賓興)이란 자는 평소의 행신을 천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바인데, 이번에 터무니없이 말을 조작하여 맨 먼저 사이가 좋지 않은 김진규(金鎭圭)에게 옮기고 사사로이 서로 호응하여 가면 갈수록 떠들썩하게 전파하였습니다. 언근(言根)을 구문(究問)하자 함께 살고 있는 걸객(乞客)과 아이종을 끌어대는데 지나지 않았는데, 이를 가지고 증거로 삼아 마침내 성안(成案)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돈이 비록 백번 죽게 된다 하더라도 대체 어찌 심복(心腹)하겠습니까. 이돈에 대해서는 비록 마음을 찌르는 통탄스러운 사연과 사실에 의거한 분명한 증거가 있어도 대부분 제기(提起)하지 않고 한결같이 모두 대수롭지 않게 여겨 버리고, 이빈흥에 대해서는 무릇 긴요하지도 않은 원인(援引)과 상관도 없는 어지러운 초사(招辭)도 언제나 잡아다가 심문할 것을 청하여 죄다 결사(結辭)에 넣었습니다. 또 남소동(南小洞)에서 만났던 사람을 끌어대어 이현(泥峴)에 두루 찾아다닌 것으로 증거를 대었음은 군둔(窘遁)이 막심하고 거의 말도 되지 않는 것인데, 또 어렵고 구차하게 반드시 증거로 삼으려고 하니, 어찌 그리 너무나도 심한지요.
정몽선(鄭夢先)을 형신(刑訊)할 것을 청했던 처음에 이동암(李東馣)의 의난(疑難)은 주차(周遮)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몽선이 뒤처진 것을 먼저 여러 겸종(傔從)에게 물어보는 것이 절차상 당연한 일인데, 한 번도 반문(盤問)하지 않고 곧바로 형추를 청한 것은 법례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김진규가 상소한 것을 본다면 사문(査問)해야 할 바는 단지 중로(中路)에서 물러가 밥먹은 것과 교부(轎夫)들의 성명에 관한 것뿐이었으니, 겉으로는 마치 이 두 가지 일을 물으려 한 것 같지만 그 뜻은 오로지 두루 찾아다닌 한 가지 사항에만 있는 것입니다. 대개 정몽선은 당초부터 앞질러 심문해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빙자(憑藉)하여 심문할 계제를 만든 데서 또한 그 몹시 음휼(陰譎)함을 볼 수 있는데도, 전하(殿下)께서는 깊이 그 말을 받아들이시어 반드시 죽이려는 뜻을 보이셨으니, 이는 진실로 왕언(王言)의 체례와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도리를 손상시킨 것입니다. 엄중한 위엄으로 혹독하게 형벌을 더하면, 비록 사형죄라 하더라도 오히려 무복(誣服)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욱이 이 겸종(傔從)들은 승복하면 살고 승복하지 않으면 죽으니, 어찌 한때의 관장(官長)을 위해 죽기로 견디며 승복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저 돈화문(敦化門)의 경우 굳게 닫혔던 것을 만 사람의 눈이 모두 보았고 온 나라 사람들의 말을 속일 수 없는데, 다만 일종의 시의(時議)가 혹 이 문이 열려 있지 않았다면 조명(趙銘)과 권치대(權致大)가 밖에서 글을 지었다는 말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돌아가고, 두 재신(宰臣)을 고발한 것이 ‘거짓말로 임금을 속인 율(律)’을 면할 수 없게 될까 염려하여 밖에서 글을 지은 것을 빙자(憑藉)하였으나, 국가의 과시(科試)를 괴란(壞亂)하려는 계책이 또한 장차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다시 권응(權譍)을 찾아내어 의난(疑難)을 입증(立證)할 계책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저 돈화문은 큰 거리에 높이 서 있어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나 모두 바라 보입니다. 그러니 과연 활짝 열려 있었다면 반드시 하루 동안 떠들썩하게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어찌 당초에는 막연하게 여겨 의심을 두지 않다가, 사단이 이리저리 바뀐 뒤에야 비로소 권응 한 사람을 내세워 증거를 삼는 것입니까. 더욱이 권응은 곧 맨 먼저 발론(發論)한 간신(諫臣) 권수(權𢢝)의 조카이고 경연에서 아뢴 유신(儒臣) 이건명(李健命)의 우서(友壻)이니, 공증인(公證人)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의심스럽고 사핵(査覈)해야 할 일들을 모두 그냥 둔 채 추문하지 않고 앞질러 방송(放送)할 것을 청하였고, 단지 위장(衛將) 등이 공술한 것만 가지고 실상(實狀)이 아니라 하여 마치 기화(奇貨)나 얻은 듯 다시 추문을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두세(頭勢)는 반드시 장차 다시 추문을 그만두지 아니하여 마침내 형신(刑訊)하여 자복받는 것이 정몽선(鄭夢先)처럼 되는 데 이를 것이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에서 마음을 써 만든 계책의 헤아리기 어려움은 한 꿰미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조명(趙銘)과 권치대(權致大)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간사한 실정이 낭자하여 가리울 수가 없으므로 비록 비호(庇護)하는 김진규(金鎭圭)라 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형벌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제 도리어 지대문(遲待門)에서의 일이 귀일(歸一)되었다고 말하면서 시종일관 가리고 막아 차마 한대의 장(杖)도 더하지 못했습니다. 아! 사람으로서 인군(人君)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며 사당(私黨)을 비호하고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 어찌하여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는지요. 이번의 과거가 비록 잡란(雜亂)하여 엄하지 못했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관(考官)의 지친(至親) 중의 사람이 뽑히어 지난번의 말이 많던 과거와 같지는 않았는데, 이번에 선동하는 유언 비어가 떠들썩하게 중외(中外)에 전파되자 앞에서 주창하고 뒤에서 호응하여 마침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습니다.
아! 두 중신(重臣)이 스스로 반성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외람하게 과거에 대한 조사를 담당한 것 또한 몹시 염치없는 일입니다. 이 옥사에서 전후로 증인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오직 이빈흥(李賓興)·이윤언(李胤彦)·권응(權譍)·권치대(權致大)·조명(趙銘) 등 약간 명인데, 이빈흥은 곧 김진규(金鎭圭)의 재종(再從)이고, 이윤언은 곧 이건명(李健命)의 친족이고, 권치대는 곧 이건명의 형 이관명(李觀命)의 부남(婦娚)이고, 조명은 또한 이건명의 얼속(孼屬)이고, 권응은 또한 이건명의 우서(友壻)이고, 김진규는 또한 이건명의 종매서(從妹壻)입니다. 어찌하여 이 천만 사람 중에서 이번 옥사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이 단지 이건명과 김진규의 친속에서만 나오고 공증인(公證人)은 하나도 없는지요. 하물며 김진규는 또한 편벽되고 음흉하며 각박하고 혹독하여 당동벌이(黨同伐異)에 용맹하고 배함(排陷)에 공교(工巧)한 정상을 성총(聖聰)으로 빠짐없이 살피시고 일찍이 변방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셨거니와, 온 세상이 모두 알고 곁눈질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당한 성조(聖朝)에 비록 인재가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에게 이 옥사를 안찰(按察)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조태채(趙泰采)의 편사(偏私)하고 공정하지 아니하여 사핵(査覈)하는 일을 그르친 정상은 이미 대략 진달했습니다만, 특히 위로 천권(天眷)413) 을 믿고 탐시(探試)에 뜻을 두어 대신(臺臣)의 상소·논계(論啓)에 이르기까지 힘을 쏟아 알소(訐訴)414) 하고 마음을 써 주석(註釋)을 달아, 마침내 이미 내렸던 성명(成命)을 정지하게 만들고 군부(君父)를 지나친 거조(擧措)를 하도록 인도하였으니, 그 또한 교묘하고 치밀한 것입니다. 신충(宸衷)을 격뇌(激惱)하게 하고 의노(疑怒)가 몹시 급작스럽게 되도록 만들어 대각(臺閣)·후사(喉司)·경악(經幄)의 신하들이 잇달아 엄중한 문책을 받아 서로 이어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니, 모두 조태채가 그렇게 되도록 길을 연 것입니다. 그의 죄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 다음에 또 논하기를,
"김유경(金有慶)이 간성(諫省)의 환수(還收)를 논한 계사(啓辭)를 제멋대로 정지하였음은 이미 지극히 방자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집(李㙫)의 상소에 대한 미안스러운 비답(批答)에 대하여 광구(匡救)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할 것인데, 이에 감히 처치(處置)하여 체직을 청했으니, 대각(臺閣)의 수치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여러 승지(承旨)를 인견(引見)하겠다고 명하였다. 유명웅(兪命雄)·이세최(李世最)가 입대(入對)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과옥(科獄)이 발생한 이후 대관(臺官)·형관(刑官)이 서로 이어 상소하여 주차(周遮)하고 저지한 것도 이미 지극히 해괴하였는데, 이번 이세덕(李世德)의 상소에는 조사를 맡은 여러 신하들을 ‘인군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며 단련(鍛鍊)415) 하여 죄를 얽고 있다’고 하여 그 말이 기극(紀極)이 없었다. 그리고 이돈(李墩)에 대해서는 전연 그런 일이 없다고 했는데, 처음부터 사문(査問)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사문한 뒤에는 마땅히 하나하나 자세하게 사핵(査覈)하여 결말을 내기를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효종조(孝宗朝)에는 비봉(秘封)이 떨어졌으므로 빼버린 경우도 있었다. 과거에 관한 일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분명하게 사핵한 뒤에야 인심(人心)을 복종시킬 수 있고 뒷날의 폐단도 막을 수 있는 것인데, 김시혁(金始㷜)은 저지(沮止)하려 하였고, 이세덕은 반안(反案)416) 하려 하였다. 만일 나라에 기강(紀綱)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럴 수 있겠는가. 이돈이 지난해 청대(請對)했을 때 한 ‘명분과 의리가 함정이 되고 있다.’는 말로 그의 평생을 단안(斷案)할 수 있었다만, 이제 이돈의 기염(氣焰)이 하늘까지 치솟아 기필코 위력(威力)으로 백탈(白脫)하려 하고 있으니, 이세덕의 상소에 ‘인군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다.’는 말은 바로 스스로 말한 것이다. 이세덕을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명웅(兪命雄)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을 갑자기 멀리 귀양 보냄은 과중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간(臺諫)의 이름을 빌어 위험한 논의를 하였으니, 멀리 귀양 보내도 지나치지 않다."
하였다. 유명웅이 아뢰기를,
"‘기염이 하늘까지 치솟았다.’는 분부도 신하된 사람이 들을 수 없는 바이니, 과중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위력으로 기필코 군부(君父)와 승부(勝負)를 겨루려 하니, 기세가 하늘까지 치솟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하고, 또 말하기를,
"이건명(李健命)에게 무슨 미워할 만한 것이 있길래 기필코 막으려 하는 것이냐."
하였다. 유명웅이 아뢰기를,
"이세덕이 상소에다 임오년417) 의 과거를 말했음은, 대개 그 뜻이 조태채와 김진규를 행공(行公)할 수 없게 하려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단 임오년의 과거를 말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위력으로 백탈(白脫)하려고 했다. 두루 찾아다닌 일은 원래 사죄(死罪)가 아닌데도 이처럼 주차(周遮)하니, 만일 이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어떻게 시행해 낼 수 있겠는가. 지극히 한심한 일이다."
하였다. 그 이튿날 도승지 김연(金演)이 멀리 귀양보내게 한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납(獻納) 박희진(朴熙晉)이 또 상소하여 반한(反汗)을 청하니, 답하기를,
"멀리 귀양 보내는 것도 또한 말감(末減)418) 한 것이라 하겠는데, 말을 허비하여 구해(救解)하니 진실로 해괴한 일이다."
하였다. 며칠 뒤에 박희진이 엄한 하교(下敎) 때문에 대각(臺閣)에 나아가 인피(引避)한 뒤 물러가 기다리지 않고 즉시 환수를 계청(啓請)하기를,
"이세덕(李世德)이 사핵(査覈)하는 일이 잘못되어감을 눈으로 보고 항장(抗章)하여 극력 논했으니, 그 광당(狂戇)419) 하고 우직함은 옛 쟁신(諍臣)의 기풍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꾸짖고 책망함도 부족하여 귀양 보내고야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격뇌(激惱)하시어 이런 지나친 거조가 있는 것인지요."
하고, 또 논하기를,
"이돈의 기염이 하늘까지 치솟았다고 하교하시기까지 하여, 마치 이세덕을 마치 이돈에게 빌붙어 법을 굽혀 구해(救解)하는 자처럼 여기셨으니, 이 또한 실언(失言)을 하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신구(伸救)하는 말은 거의 말도 되지 않고, 광당(狂戇)과 우직함이 옛 쟁신(諍臣)의 기풍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은 지극히 가소롭다."
하였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차사(箚辭)로 인해 또 이세덕에게 견책(譴責)을 행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기를,
"이세덕의 상소는 말을 적절히 가리지 아니하였으니, 중신(重臣)을 논할 때 참으로 과당한 말이 있었습니다. 다만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의 거조(擧措)와 의향(意向)이 완급(緩急)에 치우침이 있어 공평한 마음으로 숙문(淑問)해야 하는 체례에 어긋남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대관(臺官)의 말이 나오게 된 까닭인데, 그 말이 아울러 임오년의 과사(科事)에까지 미쳤음은 몹시 무위(無謂)한 것이고 또 과격한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각의 말을 어찌 과격하다 하여 깊이 죄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조금 뇌정(雷霆) 같은 위엄을 거두시어 견책을 행하라 하신 명을 도로 정지하시고, 혹 요량하시어 가벼운 벌을 내리시어 사방의 성문(聲聞)을 놀라지 않게 하시되, 특별히 예념(睿念)을 더하여 재처(裁處)하여 사핵하는 일이 지체되지 않고 빨리 완료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세덕의 상소는 마음을 씀이 음험하였으니, 유찬(流竄)의 율(律)은 본시 과중한 것이 아니다. 일을 맡은 신하들에 대하여 나는 완급에 치우침이 있거나 공평한 마음으로 숙문(淑問)해야 하는 체례에 어긋남이 많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과사(科事)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끝까지 기필코 분명하게 핵실하고 말 것이며, 결단코 미리 앞질러 재처(裁處)할 수 없다."
하였다. 부응교 신심(申鐔)이 상소하기를,
"박희진(朴熙晉)의 상소는 성명(聖明)께서 해괴하다고까지 비답히시어 사지(辭旨)가 지극히 엄하였으니, 인혐(引嫌)하고 물러가 기다리며 공론을 기다려야 진실로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물러가 기다리지 않고 곧 도로 환수(還收)를 청하는 논계(論啓)를 발하여, 마치 대의(大義)에 관계되는 일이라 소소한 혐의는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했으니, 빨리 척파(斥罷)의 명을 내리시어 무엄한 죄를 바로잡으소서. 또 대신의 【곧 서종태(徐宗泰)이다.】 평소 지론(持論)은 조금이나마 화평을 조본하여 연석(筵席)에서의 순문(詢問) 때에도 또한 대단히 모가 나는 논의가 없었는데, 지금 이세덕이 견책을 받은 날은 문득 경박한 의논에 동요되어 성상께서 내리신 처분을 도리어 치우치게 선입견(先入見)을 주장하는 것으로 의심하였으니, 신(臣)은 더욱 개탄스러워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박희진이 이미 엄한 비답을 받고 대각(臺閣)에 나아가 자열(自列)420) 했다면, 물러가 기다림이 참으로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도 당(黨)을 비호(庇護)하기에 급급하여 외람하게 전계(傳啓)하였으니, 내가 진실로 이미 해괴하게 여겼다. 무엄하다는 배척이 참으로 지나친 말이 아니니, 체차(遞差)하라. 대신은 평소에 지론이 관대하고 화평하여 되도록 조정하기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어제의 차사(箚辭)는 합당한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서종태가 이 때문에 잇따라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다가 드디어 정사(呈辭)하여 면직을 바랐다.
9월 6일 병술
임금이 세자(世子)와 함께 태묘(太廟)를 전알(展謁)하고 돌아와 경복당(景福堂)에 이어(移御)하였다.
경상도 합천(陜川) 땅의 도굴산(闍窟山) 북쪽 등성이 산허리 이하가 모두 갈라져 하나의 구덩이가 되고, 산밑의 인가는 50보(步) 밖으로 스스로 옮겨 갔는데, 울타리와 채전(菜田) 및 과일나무도 또한 무더기로 밀려 가 완연히 남아 있었다. 하동(河東) 등지에서는 매몰되어 죽은 사람이 2백여 명이나 되었고, 떠내려간 집이 1천 5백여 호나 되었다.
9월 7일 정해
장령 성석기(成碩夔)가 본부(本府)의 논계(論啓) 가운데서 유혁연(柳赫然)·이원정(李元禎)·이만성(李萬成)에 관한 일은 의견이 같지 않다며 인피(引避)하고, 지평 오명항(吳命恒)은 이세덕(李世德)이 견책받을 적에 환수(還收)를 청하는 논계(論啓)에 참여할 수 없었음을 들어 【오명항은 일찍이 과거 일의 사핵(査覈)에 혐의스럽고 구애되는 사단이 있음을 들어 인피하여 소장을 진달했기 때문이다.】 또한 인피하니, 사간원에서 처치(處置)하여 모두 체차시켰다.
9월 9일 기축
유성(流星)이 천원성(天苑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이때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내린 지 여러 날이었는데, 이조 판서 윤덕준(尹德駿)은 경기 감영(京畿監營)에 있어 미처 교귀(交龜)421) 하지 못하였고, 참의 송징은(宋徵殷)은 이미 체직되었으며, 참판 윤지인(尹趾仁)은 잇따라 소패(召牌)를 어겨 개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임금이 참의를 대신에게 물어 차출하도록 명하자, 이의현(李宜顯)으로 삼았다.
9월 11일 신묘
승지 조도빈(趙道彬)·부교리 홍우서(洪禹瑞)가 이세덕(李世德)이 상소에 임오년422) 의 과거를 논하여 말이 많았던 과거라고 한 것 때문에 인입(引入)하고 세 차례나 정고(呈告)하니, 【두 사람은 모두 임오년의 과거 때에 급제한 사람이다.】 임금이 특별히 그 상소를 도로 내주라고 명하고 또 홍우서의 상소에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지난해 권첨(權詹)을 척보(斥補)한 뒤 ‘이 일로 인혐하며 상소를 진달하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처분이 이미 결정된 것이다. 위험한 말에 어찌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이어 패초(牌招)하여 소임을 살피게 하도록 명하였다.
이조 참의 이의현(李宜顯)이 패초를 받고 개정(開政)하여, 이덕영(李德英)을 사간(司諫)으로, 한영조(韓永祚)를 헌납(獻納)으로, 정필동(鄭必東)을 장령(掌令)으로 남도규(南道揆)·김상옥(金相玉)을 지평(持平)으로, 홍우녕(洪禹寧)을 정언(正言)으로, 이건명(李健命)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교악(李喬岳)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9월 12일 임진
이조 판서 윤덕준(尹德駿)이 사직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연전(年前) 합계(合啓) 때의 대관(臺官) 중에 맨 먼저 발론(發論)한 사람이 신(臣)의 손에 비로소 방색(防塞)하였음은, 신이 전후로 인구(引咎)한 상소에 나열(羅列)한 것이 한 번만이 아니었는데, 아당(亞堂)이 【곧 이의현(李宜顯)이다.】 혼자 정사(政事)할 적에 한결같이 모두 숙견(宿趼)에 의망(擬望)하되, 수단이 쾌활하여 조금도 고려함이 없었습니다. 제가 웃자리에 있으면서 동료에게 모욕을 받아 부끄러움이 극도에 달하여 말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합계(合啓)의 시비는 그대로 두고 논하지 말라. 넓은 하늘 아래 임금의 신하 아닌 사람이 없는데, 한결같이 방색하고 소통(疏通)할 기약이 없었으니, 탕평(蕩平)의 도리에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전후의 대언(臺言)이 한 두 번에 그치지 않았고, 올봄 사헌부의 장관(長官)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에도 또한 유의(留意)하겠다는 하교가 있었는데도 끝내 움직여 듣지 않았으니, 이렇게 하고도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나는 어제의 정사에서 숙견(宿趼)에 다시 의망한 것이 정사의 체례를 손상한 것인 줄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참의 이의현이 대변(對辨)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합계한 대관들이 방색당함은 과연 무슨 죄가 있어서이겠습니까. 한 사람의 권력 잡은 정승을 【곧 최석정(崔錫鼎)이다.】 논핵(論覈)한 것이 세상에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되어, 한결같이 모두 금고(禁錮)된 것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신(臣)은 평소에 개탄해 왔습니다. 마침 이번에 외람되게도 전조(銓曹)의 소임에 있게 되었으므로, 감히 차례차례 뽑아서 서용(叙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곧 정체(政體)에 당연한 일이니, 어찌 그가 이처럼 대단하게 성을 낼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지금 한번의 주의(注擬)로 인하여 불쾌한 언성과 안색을 가하며 마치 신(臣)이 그전에는 없던 해괴한 일을 새로 만들어낸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마는, 신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건대 사은 숙배(謝恩肅拜)도 하지 않은 전조의 장관(長官)이 정사(政事)에서의 주의(注擬)가 조금 자기의 뜻에 거슬린다 하여 앞질러 소장(疏章)을 올려 배척함은 또한 전에 볼 수 없던 일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장관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갖추어 죄다 말했다. 그대는 인혐(引嫌)할 것 없으니 모름지기 너무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9월 13일 계사
판중추부사 이유(李濡)가 차자를 올려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주관할 사람의 명칭을 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9월 14일 갑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응교 신심(申鐔)이 아뢰기를,
"요사이 정관(政官)들의 상소는 모두 이건명(李健命)이 여러 차례 말을 바꾸었기에 방색(防塞)했다고 합니다. 대개 시의(時議)가, 조명(趙銘)과 권치대(權致大)가 이건명의 인족(姻族)임을 들어 곧이곧대로 사주(使嗾)한 것으로 단정한 것인데, 사주했다는 말은 너무나도 사리에 가깝지 아니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이건명을 신임하여 부려온 지 오래인데, 어찌 그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겠는가. 결코 사주할 사람이 아닌데도 기필코 사주한 사람으로 돌리려고 함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신심이 아뢰기를,
"시의(時議)가 매양 합계(合啓)한 것을 영합(迎合)한 것이라 하여 하나의 죄안(罪案)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군부(君父)의 분부를 독실하게 믿고 공의(公議)에 따라 논계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 해 동안 폐고(廢錮)된 나머지 지금에 이르러서야 소통(疏通)하여 의망(擬望)한 것인데, 비난하고 배척하는 바가 있으니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교리 홍우서(洪禹瑞)가 아뢰기를,
"이의현(李宜顯)이 혼자 정사(政事)를 할 적에 소통하여 주의(注擬)한 것이 불가한 것인 줄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윤덕준(尹德駿)은 경기 감영(京畿監營)에 있고 미처 교귀(交龜)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물을 만한 전례가 있겠습니까. 사은 숙배(謝恩肅拜)를 하지 아니한 전조(銓曹)의 장관으로 주의에 참석하려고 하였음은 사체에 타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조태구(趙泰耉)는 아뢰기를,
"당초 합계(合啓)가 실정 밖의 것으로 죄를 구성한 것이어서 공론이 모두 그르게 여겼기 때문에 맨 먼저 발론(發論)한 두어 사람이 과연 방색(防塞)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조(銓曹)에서는 관원 수를 갖추어 통색(通塞)하는 것이 본래 정사(政事)의 관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랫동안 막혀 있던 사람들을 혼자서 하는 정사에 일시에 모두 소통시켰으니, 장관(長官)이 비록 나와서 숙배(肅拜)하지는 못했지만 어찌 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장관의 상소에 이른바 ‘수단이 쾌활했다.’는 말은 소견이 없지 아니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합계한 사람들이 방색된 것은 오로지 약원(藥院)의 일 때문이었다. 당초 비망기(備忘記) 안에 있던 너무 지나친 말은 비록 정승의 차자에 따라 산개(刪改)했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지나친 줄 알지 못했고 또한 후회하는 생각도 없었으며, 지금 4년이 되었으나 내 마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신하는 자식이 부모의 병에 시약(侍藥)하듯 임금의 병에 시약해야 하는 법인데, 모든 일을 범연하게 하기만 했으니, 근신한 것이겠는가, 근신하지 않은 것이겠는가. 군상(君上)의 분부라도 받들어 거행해야 할 것이 있고 받들어 거행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어찌하여 일체 영합(迎合)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이덕영(李德英)이 사성(司成)에 의망(擬望)되자 이대성(李大成) 등이 떼 지어 배척했는데, 어찌 그러한 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참의(參議)가 혼자서 한 정사 때에 소통(疏通)하여 주의(注擬)했음에 불가함이 있음을 보지 못하겠다."
하였다. 조태구가 아뢰기를,
"인신(人臣)으로 군부의 병을 대수롭지 않게 본 자가 살 수가 있겠습니까. 최석정(崔錫鼎)과 이인엽(李寅燁)은 밖에서 서로 마주 서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다가 입시(入侍)할 때에 이르러서는 감히 근심스러움을 안색에 나타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은 그런 실정을 미처 굽어 보시지 못하신 것입니다. 40년이나 입조(立朝)하여 임금을 섬기면서 군부의 병세가 무거운 날 어찌 대수롭지 않게 여길리가 있겠습니까. 그 뒤 성상께서 개석(開釋)하시고서 군하(群下)를 거두어 서용(敍用)하셨으므로, 이미 사실을 통촉(洞燭)하신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교가 이와 같으니, 인신으로 이런 죄를 지고 어떻게 천지 사이에 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때 저촉(抵觸)하여 거스린 일은 풀리게 되었다마는, 이번 일은 저촉하여 거슬린 데서 나온 것이 아니니, 어찌 내 마음이 바뀔 리 있겠느냐."
하였다.
형조 판서 김진규(金鎭圭)가 이세덕(李世德)의 상소로 인하여 대변(對辨)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고관(考官)이 승패(承牌)하고 대궐에 나아가면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돈(李墩)처럼 입조(立朝)한 지 오래 된 사람이 어찌하여 유독 이번 과거에만 이런 법례(法例)에 어두웠다는 것입니까. 그날 승정원에서 공궐(空闕)에다 과장(科場)을 차릴 적에 고관(考官)을 패초(牌招)하는 전례에 의거하여 패초를 내보내기를 계청(啓請)하였으니, 그 자신이 패초에 따라 나오고도 패초하기 이전의 일로 알고 있다고 함에서 그 말을 꾸며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승패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미 상정(常情)을 벗어난 것인데, 이돈이 곧 그렇게 하였으니, 유독 두루 찾아다닌 것에 대해서만은 상리(常理)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이 중신(重臣)이 말한 바를 들어보건대, ‘이돈이 당초 승패한 그의 제우(儕友)에게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곧 북소(北所)로 갔었다.」고 했다.’ 합니다. 대저 집으로 돌아가고도 북소에 갔었다고 핑계대어 그의 제배들을 속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비록 두루 찾아다니지 않았다고 스스로 발명하고 있지만 어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정몽선(鄭夢先)이 물러나 밥을 먹으러 갔었다고 핑계댄 정상은 김계생(金戒生)의 공초(供招)에서 파탄이 났고, 모든 하인(下人)들의 ‘모두 아침밥을 먹었었다.’는 말은 본시 다시 다른 겸종(傔從)들에게 묻지 않아도 이미 분명한 증거가 되고도 남으니, 이를 가지고 심문하는 것이 옥체(獄體)에 당연한 것입니다. 무릇 죄수는 각각 그의 숨기는 실정과 어긋나는 단서를 가지고 심문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돈이 두루 찾아다닌 것이 이미 금오(金吾)의 사핵(査覈)에서 모두 드러났으니 진실로 마땅히 이를 가지고 모든 겸종들에게 두루 물어보아야 하고, 정몽선이 물러나 밥을 먹으로 갔다고 핑계를 대고 교부(轎夫)가 〈누구인지〉 고하지 않은 것이 이미 그가 실정을 숨기고 어긋나는 단서이니, 옥정(獄情)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심문해야 할 바입니다. 또한 어찌 그 사이에 뜻을 써서 곧 음휼(陰譎)하다고 헐뜯을 수 있겠습니까. 일이 관장(官長)에 관한 것이라 그의 도예(徒隷)들을 심문하여 핵실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만, 조종조(祖宗朝)의 융성한 시대의 고사(故事)로 서로 가까운 것이 있습니다. 남지(南智)가 사헌부의 장관이 되어 도승지 조서로(趙瑞老)에게 유박(帷薄)423) 의 비단이 있음을 듣자, 조참(朝參) 때에 조서로의 구사(丘史)들을 모조리 얽어다가 조서로가 어디로 갔고 어디서 잤는지를 국문(鞫問)하였던 것입니다. 이번에 이돈이 두루 찾아다녔을 적에는 겸종들이 실제 따라갔을 것입니다. 이돈이 이미 속이고 숨기고 있으니, 겸종들에게 묻지 않고 장차 어디에 물어본단 말입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신이 시장(試場)이 문이 열렸는지 닫혔는지에 대해 어찌 일찍이 좌지우지(左之右之)하고 낮추거나 높인 일이 있었습니까. 조명(趙銘)과 권치대(權致大)의 일이 비록 두 재신(宰臣)에게서 발단되었으나, 조명은 스스로 두 재신에게 말했다고 했으니, 그 말의 허실(虛實)은 두 재신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어찌 사곡(私曲)하게 혐오하고 지나치게 의심하여 문에 관한 일이 어긋나는 단서를 언주(讞奏)할 적에 거론하지 않고 다시 추문(推問)을 청하는지요."
하고, 그 다음에는 또한 인척(姻戚)이란 말에 관하여 대변하기를,
"이의현(李宜顯)은 실로 사간원의 장관(長官)으로서 이번 일을 논하여 사핵(査覈)하는 일이 있게 만들었는데, 이의현은 신(臣)과 이건명(李健命)에 있어서는 모두 인친(姻親)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집(李㙫)은 실로 이건명의 우서(右壻)이고 또한 신의 모당(母黨)인데, 이돈의 비호(庇護)에 매우 힘을 썼습니다. 권응(權譍)은 비록 이건명의 우서이기는 하지만, 그는 공술할 적에 시휘(時諱)에 저촉될까 근거없는 말을 많이 늘어놓았으니, 이 어찌 이건명을 견제한 사람이겠습니까."
하고, 말단에는 또 임오년424) 의 과거에 관한 일과 대신의 차사(箚辭)에 대해 변명했는데, 답하기를,
"이세덕(李世德)의 상소는 전편에 나타난 정신이 오로지 여러 신하들을 강박하여 몰아내 다시는 그 일을 안핵(按覈)할 수 없게 하려는 데 있어 제멋대로 반안(反案)하여 백탈(白脫)할 계획을 꾸민 것이니, 군부(君父)를 잊고 편당을 위해 죽으려 한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경(卿)의 안사(按査)는 본시 털끝만큼도 단련(鍛鍊)에 가까운 일이 없으니, 마음 먹고 구함(構陷)하는 짓을 어찌 입에 걸 것이 있으랴."
하였다. 판의금부사 조태채(趙泰采)가 또한 이세덕의 상소로 인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윤팽수(尹彭叟)와 갑술(甲戌)이 이미 목격(目擊)했다고 공술했으니, 비록 핵실하지 않으려 한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성흥(李聖興)과 이윤언(李胤彦)이 또한 그들의 공술에 나왔으니, 허실의 빙문(憑問)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언근(言根)의 내력 모두 근거가 있으니, 틈을 막고 말을 조작해도 마침내는 억지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이돈이 전후로 스스로 해명한 말은 단지 사정(私情)을 쓰지 않았다는 데 있고, 두루 찾아다닌 일에 대해서는 하나도 관계가 없었으니, 증거로 든 일들을 비록 모두 제기(提起)한다 하더라도 두루 찾아다니지 않았다는 증거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공궐(空闕)의 열고 닫음을 과거날 승선(承宣)이 으레 주관한다는 것도 또한 말이 되지 아니합니다. 신(臣)이 과거를 베풀 때의 절목(節目)을 가져다 보았더니, ‘돈화(敦化)·금호(金虎)·단봉(丹鳳) 세 문을 모두 궁궐을 수직하는 내관(內官) 및 위장(衛將)·차지(次知)로 하여금 여닫게 한다.’고 계하(啓下)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억지로 승선에게 돌리면서 금오(金吾)에서 잡아다 추문(推問)하기를 계청(啓請)하지 않은 것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알기 쉬운 일도 또한 오히려 을러대기를 그만두지 않는데,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김시혁(金始㷜)은 갑술(甲戌)을 19세의 종으로 담장에 걸터앉아 인가(人家)를 내려다보았다고 했지만, 이럴 리는 전혀 없고, 이세덕은 뭇아이들이 법석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빙신(憑信)할 수 없는 하나의 갑술이가 언제는 장정이 되었다가 언제는 아이가 되어 사람에 따라 변환(變幻)하니, 절로 서로 모순(矛盾)됨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영구(營救)하고 비호(庇護)하기만 급급하고 파탄(破綻)이 일어나는 데에는 어두운 것인지요."
하니, 답하기를,
"대관(臺官)이 번갈아 상소하여 제멋대로 주차(周遮)하였음도 진실로 이미 해괴한 일이거니와 쓴 말과 그 뜻의 음험함이 어찌 이세덕의 상소와 같은 것이 있겠는가. 안사(按事)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죄를 씌움이 한이 없으니, 실로 세변(世變)이라 하겠다. 통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으랴. 안옥(按獄)한 전말을 내가 자세히 알고 있고, 편사(偏私)나 단련(鍛鍊)과는 털끝만큼도 가까움이 없으니, 구무(構誣)하는 말을 어찌 입에 걸 것이 있으랴. 대신의 차사(箚辭)는 실로 뜻밖의 것이니,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즉시 나와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9월 15일 을미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부응교 신심(申鐔)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정사 공신(靖社功臣)425) 들의 적장손(嫡長孫)으로서 입사(入仕)하지 못한 사람을 녹용(錄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교리 홍우서(洪禹瑞)가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봉사손(奉祀孫)을 혹은 경직(京職)에 거두어 녹용하고 혹은 상당한 곳의 수령(守令)을 제수하여 봉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6일 병신
영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첫번째로 정사(呈辭)를 하였으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림이 세 번에 이르렀다.
9월 18일 무술
원성유(元聖兪)를 승지(承旨)로, 김진규(金鎭圭)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민진원(閔鎭遠)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오명항(吳命恒)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전라도 능주(綾州) 등의 고을 사람들이 홍수로 익사(溺死)했는데,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했다.
9월 19일 기해
이조 참의 이의현(李宜顯)이, 판서 윤덕준(尹德駿)이 상소하여 배척한 일 때문에 또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체직을 윤허하고, 참판을 대신할 사람을 대신(大臣)들에게 물어 차출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와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모두 천망(薦望)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전에 의망(擬望)한 것을 들여오라고 명하여 이만성(李晩成)을 참판으로 삼았다.
9월 20일 경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과옥(科獄)의 사핵(査覈)이 지체됨을 염려하여 판의금부사 조태채(趙泰采)를 체직하도록 명하고 형조 판서 김진규(金鎭圭)와 형조 참판 홍만조(洪萬朝)는 억지로 부당하게 인혐(引嫌)하여 날마다 일을 질질 끌고 있다 하여 특별히 파직을 명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경리청(經理廳)을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명호(名號)로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이천(利川)의 양녀(良女) 영례(英禮)가 나이 서른도 안되어 과부가 되었는데, 시어머니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섬겼습니다. 망부(亡夫)의 제수(祭需)를 장만하러 저자에 나갔다가 저물녘에 돌아오다 한 취한(醉漢)을 만났습니다. 그 자가 겁탈하려 하자 완강히 항거하고 따르지 않으니, 그 자가 칼로 귀를 자르고 또 배를 찔러 거의 죽게 되었는데, 마침 지나가는 이웃 사람을 만나 이런 연유를 호소하고 이어 운명했다고 합니다. 하천(下賤)으로 변함없이 수절(守節)했으니, 마땅히 정표(旌表)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포양(褒揚)하여 아름답게 여기며 특별히 정표하는 일을 하도록 명하였다.
경상도 성주(星州)에 지진이 일어났다.
9월 21일 신축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전(前) 부총관(副摠管) 전백록(全百祿)이 졸(卒)했음을 듣고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몹시 슬퍼하노라. 해조(該曹)로 하여금 치부(致賻)를 각별히 마련해 제급(題給)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조가(朝家)에서 서북(西北) 사람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했는데, 전백록은 북로(北路)의 무사(武士)들 중에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가 이와 같았던 것이라고 한다.
9월 23일 계묘
이조 참판 이만성(李晩成)이 고양(高陽)에 있으면서 재촉해도 오지않아 정조(政曹)가 한결같이 비어 있으므로, 임금이 이만성을 체직하도록 명하고, 특별히 신임(申銋)을 이조 참판으로 제수하였다.
9월 24일 갑진
영의정 서종태(徐宗泰)가 7차례나 정사(呈辭)하므로,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승지가 돈유하는 글을 지어 올리니, 하교하기를,
"천하의 일이란 그 시비(是非)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유신(儒臣)의 소어(疏語)를 내가 옳지 않다고 여기지 않았는데, 돈유하는 글의 내용에 ‘나 또한 마땅함을 잃은 줄로 안다.’고 말을 했으니, 왕언(王言)을 대신 지으며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지극히 무엄(無嚴)하다. 다시 지어 들이라."
하였다.
이조 판서 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영상(領相)과 좌상(左相)이 모두 천망(薦望)하지 않으므로 전에 의망(擬望)한 것을 들이라고 명하여 송상기(宋相琦)로 대신하였다. 참판 신임(申銋)이 승패(承牌)하여 정사(政事)를 열어, 이의현(李宜顯)을 승지(承旨)로, 이덕영(李德英)을 승배(陞拜)하여 승지로, 권상하(權尙夏)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윤덕준(尹德駿)을 우참찬(右參贊)으로, 민진후(閔鎭厚)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고, 특별히 박권(朴權)을 승진시켜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전(前) 대사간(大司諫) 이집(李㙫)을 흡곡 현령(歙谷縣令)으로 제수하여 내일 안으로 사조(辭朝)하도록 하고, 시임(時任) 현령인 이집(李㙫)은 경직(京職)으로 체부(遞付)하였다.
9월 26일 병오
복상(卜相)을 명하였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모두 명초(命招)해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전에 의망(擬望)한 단자(單子)를 들이라고 명하여 이유(李濡)를 영의정으로 삼고, 서종태와 김창집을 차례로 낮추어 좌상과 우상으로 삼았다.
이만견(李晩堅)을 사간(司諫)으로, 홍호인(洪好人)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며칠 전에 정언 조원명(趙遠命)이 서쪽 고을에서 올라와 상소하여 과옥의 조사에 관하여 논하되, 돈화문(敦化門)이 열렸는지 닫혔는지의 한 가지 사실을 극력 말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당초 간신(諫臣)의 상소에는 ‘돈화문’이란 세 글자가 끝까지 형체도 보이지 않다가, 최후에 와서 밖에서 글을 지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조명(趙銘)과 권치대(權致大)가 어딘가에서 나타나자 돈화문이 비로소 열리게 되었고 드디어 하나의 큰 안건(案件)이 되었습니다. 조명이란 사람은 더욱 순식간에 뒤바뀌어 헤아릴 수가 없어 처음 문초할 때의 공초(供招)에서 받은 어리석게 반은 약게 굴며 고의로 현란(眩亂)시켰습니다. 재차의 공초에서는 갑자기 그 말을 바꾸어 마침내 재신(宰臣)을 문계(問啓)한 말과 같은 데로 귀착되었고, 드디어 권치대가 공술한 돈화문에 관한 말과 부합(傅合)하되, 금방 안이라 하다가 금방 바깥이라 하며 말이 들쭉날쭉하니, 엄형(嚴刑)이 아니면 뒤바꾸는 작태(作態)를 추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권치대의 끝까지 동접(同接)을 은휘(隱諱)함과 허다한 사람들과 서로 안 적이 없다는 말은 반드시 숨기는 사정이 있을 것이니, 이미 지극히 의심스럽습니다
또 비국(備局)에 앉았던 재신(宰臣)이 전한 바에는 분명히 바깥인 대루청(待漏廳)에서 글을 지었다고 했는데도, 그는 돈화문에서라고 말을 바꾸었으니, 그 장소를 뒤바꿈은 조명과 꼭 같습니다. 지금 이 두 죄수의 정절(情節)은 모두가 즉시 형신(刑訊)을 청해야 하는 것인데도, 안사(按査)하는 신하들이 밖으로 공론을 두려워하여 또한 감히 형벌하는 것이 부당하다 하지 못하고 우선 문에 관한 일이 귀일(歸一)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핑계로 고의로 형신의 청을 늦추었으니, 시일을 질질 끌면서 기필코 지체하려고 함은 과연 무슨 뜻이겠습니까. 대개 형벌 아래서는 죄수들의 말을 보장하기 어려움과 혹 사단이 드러남을 염려했던 것이고, 또한 위장(衛將)에게 억지로라도 돈화문의 일로 과장(科場)에 나갔음을 승복(承服)받게 되면 두 죄수를 다시 심문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자연스럽게 빠져 나가도록 만들려 했기 때문입니다. 무상(無狀)한 조명의 무리가 그다지 경중(輕重)을 가지지 못하자, 다시 하나의 권응(權譍)을 들이밀어 사대부(士大夫)로 증인을 갖추었던 것인데, 권응이 나갈 적에 소동(小童)이 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능히 보았다면, 권치대가 이른바 문의 행랑 안에 있던 수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밖에서 글을 지은 거자(擧子)들이 보지 못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니 또한 마땅히 일체로 반힐(盤詰)해야 할 것인데도 금오(金吾)의 신하는 대소(臺疏)에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묻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니, 그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 것이겠습니까.
또 듣건대, 권응이 갇히기 전에는 갖은 말로 스스로 변명하여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말을 했고, 이어 두서너 친구에게는 글발을 보내어 오직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런즉 이는 얽히고 설킨 사찰(私札)과는 다름이 있어 낭자하게 전파되었으므로,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보았던 것입니다. 당초에는 이미 그처럼 거부하고 배척하다가 끝에는 곧 앞장서서 증인이 되고 있으니, 어떤 연유로 중간에 변신(變身)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이른바 사주(使嗾)란 것은 반드시 지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과연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전후로 변환(變幻)한 연유와 중간에서 사주한 사람 및 밖에서 글을 지은 거자(擧子)의 목격(目擊)여부에 대해 다시 가두고 엄중하게 사핵(査覈)하여 하나하나 그 실상을 캐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전날 시장(試塲)을 관장했던 승선(承宣)의 상소에 ‘단봉문(丹鳳門)은 돈화(敦化)·금호(金虎) 두 문처럼 굳게 닫혀 있지 않았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금오(金吾)의 신하들이 끝내 추문(推問)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신이 상소 끝에다 바야흐로 제청(提請)하고자 합니다.
지금 그의 자변(自辨)하는 상소를 삼가 보건대, 그가 한 말은 미루고 핑계대며 스스로 벗어나려는 뜻이 아님이 없었으며, ‘위장(衛將)이 그의 직소(職所)를 떠나지 않고 능히 그의 직책을 수행했는지는 또한 보장하기 어려운 바라.’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아! 애초 이미 굳게 닫혔음을 분명하게 말해 놓고 이제와서 문득 앞서 한 말들을 일체 뒤집어 마치 열고 닫음을 한결같이 위장에게 맡기고 자신은 관여한 바 없는 것처럼 하되, 끝에 가서는 곧 ‘직책을 수행했는지 보장하기 어렵다.’는 등의 말로 열렸는지 닫혔는지를 불분명한 가운데 두려고 하였습니다. 임금께 고하는 말을 어찌 이처럼 수시로 번복하여 전후로 차이가 남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하고, 【승선은 곧 송상기(宋相琦)이다. 돈화문에 관한 일을 가지고 전적으로 승선에게 죄를 돌렸는데, 송상기가 상소하여 그렇지 않은 사실을 변명했기 때문에, 조원명이 상소하여 배척한 것이다.】 그 다음에 또 논하기를,
"이돈(李墩)의 원통함은 이집(李㙫)과 이세덕(李世德)의 상소에 논한 말이 명백하고 절실합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이건명(李健命)이 지색(枳塞)당함은 본시 그 까닭이 있는 것인데도, 좌전(佐銓)인 사람이 【곧 이의현(李宜顯)이다.】 조금도 통의(通議)하지 않고 곧장 예전의 자리에 의망(擬望)했습니다. 그러니 우석(右席)을 기만하고 누리며 전혀 돌아보거나 꺼리지 않는 풍습을 키울 수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장(疏章) 가득히 장황하게 이세덕의 논의를 조술(祖述)하여 기필코 옥사(獄事)를 막고 망쳐 여러 신하들을 제함(擠陷)하고 조정을 괴란(壞亂)시키고야 말려 하니, 마음을 씀과 계책을 꾸밈이 너무나도 음험하다. 임금을 잊고 사당(私黨)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한 죄상은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없는 정도이다. 혼자서 정사(政事)를 열어 통의(通擬)한 데서 정례(政例)에 어긋난 것이 있음을 보지 못했는데도 제멋대로 침척(侵斥)하였으니, 또한 놀랍다."
하였다. 지평 남도규(南道揆)가 조원명(趙遠命)을 논계하여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 것을 청했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조원명이 한 장의 상소를 올려 제멋대로 떠벌이며 음험한 여론(餘論)을 주워모아 곧장 조정을 괴란시키고 거의 완료되어 가는 사안(査案)을 저지하여 망치려 했으니, 그 계책을 꾸밈을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조원명은 이건명(李健命)의 집과 평소에 혐원(嫌怨)이 있었는데, 과옥의 조사를 빙자하여 앙갚음하고 한풀이를 한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돌아보거나 꺼리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공사(供辭)의 글의 뜻이 전후로 크게 틀리고 말뜻이 어지러우니, 일이 매우 해괴합니다. 청컨대 권응(權譍)을 잡아다가 심문해서 핵실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튿날 남도규가 조원명에 대한 의율(擬律)이 너무 가벼워 물의(物議)가 비난하고 배척한다 하며 인피(引避)한 뒤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 않고 또 조원명을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시킬 것을 발계(發啓)하니, 임금이 또한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 송상기(宋相琦)가 조원명의 상소로 인해 대변(對辨)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대개 신이 당초에 상소할 때에는 돈화(敦化)·금호(金虎) 두 문에 관하여 이미 발론(發論)한 말도 없었고, 또한 의심을 둘 곳도 아니었으며, 두 문을 모두 닫는 것은 곧 그때 시소(試所)에서 신칙한 바였으니, 신(臣)이 비록 목격(目擊)하지 못했더라도 닫은 것으로 알고 단봉문(丹鳳門)은 두 문과는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사세가 진실로 그랬던 것입니다. 그 뒤 여러 죄수들의 공술에서 비로소 문이 열려 있었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날 시험장 안이 몹시 혼란하여 전정(殿庭)도 또한 단속하여 정돈할 수 없었으니, 하물며 안과 밖이 완전히 막혀 견문(見聞)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항차 한 번의 분부는 검칙(檢飭)하는 뜻에서 나왔고, 두 문의 수직(守直)은 본래부터 주관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신(臣)이 며칠 전에 올린 상소의 말은 자연히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질언(質言)하고 추측만으로 결단하여 마치 직접 보고서 입증(立證)하는 것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위장(衛將)이 직책을 수행했는지 보장하기 어렵다.’는 말도 또한 그날의 사세로 보아 이처럼 의심을 둘 만한 단서가 있었습니다. 신은 스스로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곡진하고 자세하게 하는 것이 해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이것을 가지고 문이 열렸던 증거로 삼고 하나의 죄안(罪案)을 첨가할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대저 그 문이 열렸는지 닫혔는지가 오늘날의 큰 논쟁거리가 되는데, 이 문을 경유해서 드나든 유생(儒生)이나 위장(衛將)으로서 시종 전수(典守)426) 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적실하게 보고 분명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만일 신(臣)이 오간 것이 글제를 내걸고 시권(試券)을 맨 먼저 바친 다음에 있었다면, 신(臣)을 증인으로 삼더라도 혹은 가능할 것입니다마는, 지금 처음의 상소에 범범하게 논한 말을 가지고 좌권(左券)427) 으로 고집하고, 깊은 전내(殿內)에 있는 사람을 공증인(公證人)으로 삼고자 하여 만약 장차 권응(權譍)과 서로 대질(對質)한다면 또한 너무나도 가소롭고 씁쓸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卿)의 소사(疏辭)는 사실을 갖추어 진달한 것에 불과하였는데, 모함과 욕설이 이에 이르니 진실로 놀랍다."
하였다. 병조 판서 조태채(趙泰采)가 조원명(趙遠命)의 상소로 인해 또한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태채는 판의금부사로 일찍이 이 옥사를 안핵(按覈)했기 때문이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당초에 과장(科塲)을 설치할 적에 숙장(肅章)·진선(進善) 두 문으로 한정하였으니, 돈화문은 처음부터 시장(試塲)의 한계 안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병조(兵曹)의 절목(節目)에도 ‘파루(罷漏) 뒤에는 표신(標信)이 없어도 문을 열고, 거자(擧子)들을 내보낸 뒤에 즉시 도로 닫는다.’고 계하(啓下)했던 것입니다. 또 명관(命官)의 상소로 보더라도 ‘금천(禁川)을 한계로 포장을 친다는 뜻으로 계품(啓稟)하였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사세가 이에 이르렀는지라 각문을 엄중하게 수직하는 것 이외에는 다시 좋은 계책이 없어 이를 다시 진품(陳稟)하였고, 금란관(禁亂官)을 더 배정하여 한층 더 방한(防閑)하였습니다.’고 하였으니, 시소(試所)를 변통하기 전에는 굳게 닫지 않았음을 이를 미루어 알 수 있고, 강필문(姜弼文)이 ‘이른 새벽에 도로 닫았었다.’는 것은 이미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오만원(吳萬元)의 공초(供招)에 ‘포장(布帳)을 치기 위해 궐하(闕下)로 달려 갔을 적에는 날이 이미 저물려 하였고 거자(擧子)들이 몰려나왔다.’ 하였고, 원택(元澤)이 나아간 것도 또한 저녁이 되어가는 때였으니, 날이 저문 다음에야 비로소 열었다는 말은 또한 거짓입니다. 권응(權譍)의 이른바 ‘소동(小童)이 왼쪽 문으로 해서 들어갔다.’는 말은 비록 종일토록 문을 열어 놓은 증거가 되지는 않지만, 원택과 강필문의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열었다.’는 것과 서로 어긋날 뿐만이 아니니, 이를 가지고 위장(衛將)들에게 추문(推問)하는 일은 옥체(獄體)에 있어서 그만둘 수 없는 바입니다. 그의 이른바 ‘공안(公案)으로 만들어 꼭 쥐고 억지로 저뢰(抵賴)로 돌린다.’는 말은 곧 무슨 말을 찾으려다가 되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밖에서 글을 지은 거자(擧子)들에, 대하여 대소(臺疏)에 언급하지 않은 것이므로 묻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었다.’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신(臣)이 앞서 올린 상소에 없는 말입니다.
대개 밖에서 글을 지은 것은 곧 추조(秋曹)에서 사핵(査覈)하는 바이고 본래 금오(金吾)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금오에서 명을 받들고 안문(按問)하는 것도 오히려 또 일마다 허물하고 책망하는데 하물며 관계가 없는 밖에서 글을 지은 일을 대신 떠맡아 반문(盤問)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신(臣)이 밖에서 글을 지은 것까지 아울러 구문(究問)하기를 대신(臺臣)이 말한 것처럼 했다면, 그는 반드시 단련(鍛鍊)의 죄목으로 신(臣)을 더욱 힘써 협지(脅持)했을 것이고, 신은 또한 능히 스스로 해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습(黨習)이 사람들의 심술(心術)을 파괴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마는, 참으로 이처럼 심할 줄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하였다. 행 호군(行護軍) 김진규(金鎭圭)가 또한 자신을 변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조원명(趙遠命)의 말은 진실로 이세덕(李世德)의 말을 조술(祖述)한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의 마음 씀의 교묘하고 참혹함은 거의 이세덕보다 더합니다. 아! 신은 이번 일을 안치(按治)함에 있어서 진실로 일찍이 돈화문(敦化門)은 반드시 닫혀 있지 않았다고 하지도 않았고, 또한 조명(趙銘)과 권치대(權致大)에게 일분의 고자(顧藉)428) 도 두지 않았습니다. 대개 위장(衛將)과 금란관(禁亂官)에게 소속된 여러 사람들의 공초가 만약 실상이라면 조명과 권치대의 앞서 공초는 허위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여러 사람들의 공술한 바가 이미 서로 어긋났던 것입니다. 또 위장과 금란관이 공술한 말이 그의 소속들과 다르지 않을 것도 또한 보장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복해서 자세히 사핵(査覈)하여 옥체(獄體)를 준행하려고 했고, 이른바 밖에서 글을 지었다는 것도 문이 과연 열리지 않았다면 스스로 마땅히 무망(麽罔)했음을 자복할 것이었기 때문에, 이래서 문에 관한 일이 귀일(歸一)되기를 기다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 조명이 말을 바꾼 것과 권치대의 의심스러운 단서는 문이 비록 닫혀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침내 마땅히 심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신(臣)이 이미 전번에 말을 하였으니, 어찌 형신(刑訊)을 늦추고 있다고 신에게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신이 조명과 권치대를 믿을 수 있다고 여겼다면, 이것을 가지고 신(臣)을 협지(脅持)해도 오히려 혹 괜찮을 것입니다만, 신은 이미 그말을 바꾼 것과 의심스러운 단서를 모아 심문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니, 또 어찌 보장하기 어려움과 혹 탄로날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더욱이 위장(衛將) 등은 신이 안치(按治)하는 바가 아니니, 억지로 승복(承服)받거나 안받거나가 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것을 가지고 신에게 죄를 씌우니, 어찌 시배(時輩)들의 두려워하는 바가 위장 등을 다시 문초하는 데 있어 혹 그 뜻과 같이 되지 않을까 하여 미리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그 다음에 또 말하기를,
"이돈이 승패(承牌)한 뒤 집으로 돌아가고도 그의 제우(儕友)들을 속인 것은 이미 선한 사람이거나 악한 사람이거나 간에 반드시 하지 않을 일입니다. 그런데 이돈은 능히 그렇게 하였으니, 그가 두루 찾아다니지 않은 것을 조원명(趙遠命)은 과연 능히 직접 따라가 분명히 보고서 이처럼 입증(立證)하는 것인지요."
하고, 말단에는 또 조원명과 이세덕 등이 유감을 품고 지시를 받아 억측하고 패합(捭闔)429) 한 정상을 극력 말하기를,
"《시경》에 ‘교묘한 말을 피리 불듯 하는 자는 낯가죽이 두꺼운 것이다.’라고 하였거니와 조원명의 말은 교묘하다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기를,
"조원명의 상소의 말은 이세덕(李世德)의 여론(餘論)을 주워모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한 번 웃을거리도 못된다. 어찌 개의(介意)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성 민진원(閔鎭遠)이 또한 일찍이 금오(金吾)를 겸임했다 하여 상소하고 대변(對辨)하니, 임금이 ‘본시 잘못한 것이 없다.’고 비답을 내렸다.
9월 27일 정미
화성(火星)이 토성(土星)을 범했다.
정언 홍우녕(洪禹寧)이 일찍이 권응(權譍)을 잡아다가 추문하기를 청하였기에 조원명(趙遠命)에게 배척받았으므로 대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날 경녕전(敬寧殿) 추향(秋享) 때 권응이 참봉(參奉) 이익명(李益命)과 제관(祭官) 이구(李構)·유상기(兪相基)와 같이 앉은 자리에서 말하기를, ‘나는 정시(庭試) 때 글을 짓지 않고서 먼저 시권(試券)을 바치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즉시 나와 돈화문(敦化門) 밖에 앉아 인마(人馬)를 기다렸는데, 협문(夾門)이 활짝 열려 잡인(雜人)들이 분답(紛沓)한 것을 보았고 심지어 밥상이 또한 들어가기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권응은 또 그때의 헌관(獻官)이었던 대신 앞에서 진달하기도 했으니, 이는 사실(私室)에서 수작(酬酌)한 말과는 다른 것이기에 신(臣)이 과연 들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권응은 또 일찍이 ‘활짝 열렸고 분답하였다.’는 등의 말을 감역(監役) 이수형(李秀衡)에게 했고, 이수형은 그 들은 말을 온 집안 사람에게 했으며 이어서 중신(重臣)에게 언급했기에 신도 따라서 듣게 된 것이었으니, 이 말을 서로 전한 것이 어찌 단지 이익명(李益命)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신은, 권응은 곧 조사(朝士)로서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 그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윽이 사핵(査覈)하는 일이 오랫동안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근심하여 마침 상소 끝에 대략 진달했던 것입니다. 권응의 글 안에 ‘끝까지 수사(搜査)하고 널리 탐문하여 증거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몰래 부합(附合)시키려 하니, 그렇게 사주(使嗾)하는 것은 진실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라고 한 말은 무엇 때문에 꺼낸 말이겠습니까.
이번 과옥에 대한 조사는 본시 신의 몸과 관계가 없으니, ‘끝까지 수사하고 널리 탐문하여 증거를 찾아내려 한다.’는 것이 사리에 있어 과연 털끝만큼이라도 근사하겠습니까. 지금 조원명(趙遠命)은 이 사서(私書)를 가지고서 꼭 맞는 증거라도 얻은 듯 소장(疏章)에다 올려 사주한 사람을 사핵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아!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신의 상소가 이미 나오자, 권응이 스스로 잡힐 것을 면하지 못할 줄 알고 감히 모면할 꾀를 꾸미느라 시의(時議)에 비위를 맞추며 앞서 한 말들을 바꾸어 으르렁거린 것이 한 번만이 아니었습니다. 숙문(淑問)함에 이르러서는 감히 끝내 은휘(隱諱)하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신(臣)에게 성내고 유감을 가져, 이수형·이익명과 말한 바를 죄다 실토하지 않은 것이 많이 있었고 또한 욕설을 서로 더했으니, 진실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이제 대계(臺啓)로 인하여 권응이 장차 다시 사핵(査覈)받는다면, 그 사이의 정절(情節)이 마땅히 스스로 모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초(供招)를 바침은 사실대로 곧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고, 사서(私書)는 곧 잘못을 끌며 비방을 피하려는 계책을 쓴 것입니다. 이번에 조원명이 임금에게 고한 말은 믿지 않고 사찰(私札)을 구득하여 집요하게 공안(公案)을 만들고 기필코 옥사(獄事)를 뒤집은 뒤에야 말려고 하니, 계책을 씀이 진실로 지극히 간신(艱辛)하고 또한 가소롭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권응이 치대(置對)한 말은 감히 은휘하지 못한 것인즉, 조원명이 사서(私書)를 구득하여 장주(章奏)에다 증거삼기까지 하였으니, 그 뜻이 있는 곳을 알기 어렵지 않다."
하였다.
9월 28일 무신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승지 허윤(許玧)이 형조 참판 이만성(李晩成)을 다시 재촉해 올라오게 하여 과옥(科獄)의 사핵(査覈)을 거행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응교 신심(申鐔)이 아뢰기를,
"지나간 해에 고(故) 판서(判書) 유득일(兪得一)이 이만성의 가정 일로 인해 엄지(嚴旨)를 받은 것 때문에【 경인년(庚寅年)430) 에 이상(李翔)의 손자가 북을 쳐 이상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유득일이 형조 판서로서 신구(伸救)하는 말을 했는데, 임금이 엄하게 하교하기를, ‘권세에 추부(趨附)한다.’고 하였다. 이만성은 곧 이상의 조카이다.】 이만성이 문을 닫고 지금도 황송하게 여기고, 간혹 억지로 행공(行公)해도 끝내 스스로 편안해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 내린 분부는 이만성을 가리킨 것이 아닌데, 어찌 이 일 때문에 인혐(引嫌)하고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평안도 평양(平壤)·성천(成川) 등 네 고을에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쳤다.
9월 29일 기유
영의정 이유(李濡)가 상소하여 신명(新命)을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우의정 김창집(金昌集)과는 내외 형제(內外兄弟) 사이여서, 한때에 같이 정축(鼎軸)을 차지함은 사의(私義)에 편안한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평양(平壤) 민가에서 불이 나 60여 호가 연소되었는데, 각별히 돌보아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9월 30일 경술
사간원에서 【정언 홍호인(洪好人)이다.】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자, 김춘택(金春澤)을 석방하는 일을 환수(還收)하는 일과 이세덕(李世德)을 멀리 귀양보내는 것을 환수하는 일은 모두 정계(停啓)하였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김진규(金鎭圭)가 일찍이 대제학을 지낸 뒤 양관(兩館)의 제학을 제수한 경우에는 행공(行公)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단하(李端夏)의 일을 들어 사직하는 상소를 진달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복계(僕啓)하도록 하였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문형(文衡)을 지낸 뒤에 다시 제학을 제수한 경우, 오래 된 일은 두루 고찰하기는 어렵고 우선 드러나게 눈에 띄어 의거할 만한 것을 가지고 아뢰겠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김석주(金錫胄) 및 근래의 판중추부사 이여(李畬)·좌의정 서종태(徐宗泰)는 모두 행공하였고 혐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상소에 인용한 이단하의 일은 비록 의거할 만하기는 하지만, 전후의 그대로 직임을 그대로 가졌던 사람들이 위와 같았으니, 한때 한 사람이 체직된 것을 들어 준례를 삼아 경솔하게 체직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직임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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