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병인
장령 정시성(鄭始成)이 인피하여 체직되었는데, 최문식을 잡아다 추문하라는 논계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정언 조세환이 인피했는데, 처치하여 출사를 청하였다. 포구 파는 문제를 쟁론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대사헌 이경휘에게 배척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판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세자부를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고, 또 교외(郊外)에 그대로 머물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서연(書筵)에 출입하는 것은 바로 경의 평소 뜻이었는데, 어찌하여 굳이 사양하는가? 내용 끝부분의 일들은 뒷날 등대(登對)하면 직접 대면하여 말하겠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송시열이 상록(常祿) 및 월름 미육(月廩米肉)을 사양하니, 상이 다시 해관에 명하여 갖다 주게 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일곱 번째 사직장을 올리니, 상이 우대하는 내용의 답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10월 2일 정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세자가 내의원(內醫院)으로 거처를 옮겼다.
10월 3일 무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김징(金澄)이 피혐하였는데, 포구 파는 일을 쟁론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헌부의 장에게 배척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였다.
유진(柳袗)의 처(妻)의 죄를 논하여, 사형을 면제하고 강계(江界)에 정배(定配)하였다.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 유진의 죄를 바루어, 가까운 곳에 도배(徒配)하였다.
금부가 비희(非喜)의 옥사에 대해서 품지하여 의논을 수렴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의논드리기를,
"비희가 시역을 한 것도 아니고 부모에게 욕을 한 일도 없다면, 강상죄를 범한 것으로 결정하는 것은 너무 무겁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예율(禮律)에 있어서 그 죄가 쫓아내야 하는 데 해당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정리(情理)와 법률(法律)을 참작하여 중도를 얻도록 해서, 너무 무겁거나 너무 가볍지 않게 해야 할 듯합니다."
하고, 판부사 정치화가 의논드리기를,
"죄인 비희가 평소 시부모에게 불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어미가 화병이 나서 결국 죽게 되었다는 말이 남편인 유진의 공초에서 이미 나왔고 보면, 비록 삼성 추국으로 다스릴 수는 없더라도, 그 불순한 죄만을 논하고 말아서도 안 됩니다. 정리와 법률을 참작하여 사형을 면제하고 정배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좌의정 허적과 판부사 송시열은 병 때문에 의논을 수렴하지 못하였는데, 상이 다시 의논을 수렴하라고 명하면서 찬선 송준길에게도 의견을 물어서 아뢰게 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의논드리기를,
"율문을 두루 상고하고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끝내 적당한 조항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부득이하다면 정리와 법률을 참작하고 비율(比律)로 절충하여 먼 변방에 귀양을 보내어 그 악을 징계하고 풍속을 바룬다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서 중도에 맞을 듯합니다."
하고, 판부사 송시열이 의논드리기를,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시어미가 비희 때문에 죽었다면 지은 죄가 무겁거나 가볍거나 간에 범연히 불순의 율로 처리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죽음만 겨우 면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송준길이 의논드리기를,
"비희가 비록 효순(孝順)의 도리는 잃었으나, 또한 고부간의 갈등에서 일어난 일에 불과합니다. 우연히 그의 시어미가 죽은 것은 실로 그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 일은 아니었습니다. 참작하여 율을 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의논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비희는 마땅히 여러 대신들의 의논대로 사형을 면제하고 정배해야 하겠습니다만, 유진과 유회 등은 형조로 돌려보내어 상께 여쭈어 처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형조가 아뢰기를,
"유회는 석방하소서. 유진은 집안을 잘 단속하지 못하였고, 또 처를 위해서 앞뒤로 비호해준 죄가 있으니, 도년 정배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오정일(吳挺一)을 형조 판서로, 조한영(曺漢英)을 형조 참판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집의로, 오상(吳尙)을 장령으로, 민종도(閔宗道)와 최상익(崔商翼)을 지평으로, 홍주국(洪柱國)을 정언으로, 이규령(李奎齡)을 교리로, 박세당(朴世堂)·이혜(李嵆)를 이조 좌랑으로, 민희(閔熙)를 전라 감사로 삼았다.
지화는 여러 번 형관이 되었는데 혹독한 정사가 많아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정일은 일찍이 형조에 있을 때 남의 말을 많이 들어 대간의 탄핵을 입기까지 했는데, 이때부터 형관에 제수되어도 끝내 감히 숙배하지 못하였다. 이혜는 성품이 경박하여 본래 인망이 모자랐는데, 이때 이르러 민시중(閔蓍重)이 갑작스레 천거하여 전랑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10월 5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남두(南斗)로 들어갔다.
장령 이관징(李觀徵)·오상(吳尙) 등이 아뢰기를,
"지난해의 흉년은 예전에도 드문 것이어서, 올봄에 국곡(國穀)을 나누어 꾸어준 것이 그 숫자가 예년의 몇 배가 됩니다. 또 각해마다 받은 것을 가난하여 다 갚지 못한 자들도 많습니다. 올해의 농사는 비록 지난해보다 조금 낫다고는 하나 여러 해 밀린 많은 곡식을 일시에 독촉하여 받아들일 경우, 이 해가 다 가기도 전에 떠돌며 굶주리는 상황이 필시 올봄과 다름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올봄에 나누어 지급한 곡식은 절반으로 줄여서 바치게 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남은 절반을 납부하게 하면, 아무 것도 없는 백성들이 조금이나마 혜택을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품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민종도(閔宗道)가 ‘일찍이 본직에 있을 때 최문식을 진래추고하라는 명을 거두라고 청했다. 예전에 이미 망령되게 논했으니, 지금 논계를 의논하는 자리에 진실로 동참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였으며, 정언 홍주국(洪柱國)이 ‘일찍이 옥당에 있을 때 신병으로 소명에 나아가지 못하여 현재 문비(問備)019) 중에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모두 처치하여 체직시켰다.
10월 6일 신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호조의 계사로 인하여 이정영(李正英)을 추고하라 명하였다. 이때 정영이 관향 곡식을 가지고 은(銀)을 무역한 일로 인하여 바야흐로 대간의 논핵을 입고 있었는데, 호조가 조정의 명령을 잘 봉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줄 것을 또 청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상이 일렀다.
"어저께 송 판부사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조용히 만나서 이야기하겠다고 답을 했었다. 들어오라는 뜻으로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하고, 판부사가 입시할 때에 찬선도 입시하게 하라."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송시열과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상이 시열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병 때문에 인견하지 못하여 참으로 유감이었다."
하고, 준길에게 이르기를,
"중간에 뒤떨어져 내 마음이 허전했는데,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위로가 되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옛날에 주자(朱子)가 송 효종(宋孝宗)에게 봉사(封事)를 올려 아뢰기를 ‘폐하께서 동궁을 돌보는 것이 어찌 그리도 매우 소략합니까? 이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 소략함을 면치 못하여,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전하께서도 바로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닙니까?"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시열이 옛일을 이끌어 진달했는데 아주 절실한 격언(格言)입니다. 신은 감히 이어(俚語)로써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경연을 오래 폐하면 속어에서 옥당의 신하들을 책색리(冊色吏)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갓 서책만 지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근래에 이러한 기롱이 매우 심하니, 이로 본다면 뒷날 세자가 서연을 부지런히 열지 않으리라는 것을 따라서 알 수가 있습니다. 정일(精一)로 서로 전하지 않고 게으름으로 서로 전한다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깊은 궁중에 계시면서 무슨 공부를 하십니까, 서사(書史)를 가까이 하십니까, 아니면 하는 일 없이 한결같이 게으르게 지내십니까?"
하니, 상이 즉시 답을 못했다. 시열이 아뢰기를,
"송 효종은 삼대(三代) 이후의 어진 임금이었습니다. 일찍이 조정에 나와서 스스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여러 신하들을 대한다.’고 말하자, 장구성(張九成)이 나아가 아뢰기를 ‘폐하께서 궁중에 계시면서 궁첩들을 접견하는 것이 외신(外臣)을 인접하는 것과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였습니다. 효종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자, 구성이 아뢰기를 ‘신은 폐하께서 신료들을 대하는 것이 정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준길의 말에 답을 하지 않으시니, 구성의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시열이 아뢴 것이 옛사람의 말인데, 만약 답을 하지 않으시면, 신의 답답한 마음이 끝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찬선이 말을 끝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미처 답을 못한 것이다. 본디 서사(書史)에는 소홀히 하지 않으나, 매양 눈병 때문에 집중하여 글을 볼 수가 없다. 어찌 아주 폐하기까지야 하겠는가."
하였다. 두 신하가 시종 열심히 진달한 것은 유신(儒臣)을 자주 만나고 경연을 자주 열라는 것이었고, 또 느긋하고 게으른 것을 경계하고 떨치고 일어나 분발할 것을 권면하였으며, 끝에 가서 다시 사치스러운 것을 없애고 검약을 숭상할 것을 말하였는데, 상이 모두 귀를 기울여 들었다. 두 신하가 이어 돌아가게 해 줄 것을 매우 간절하게 청하였는데, 상은 머물기를 간절히 권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명하여 유대 대관(留待臺官) 사간 김징과 장령 오상을 부르게 하였다. 김징이 진계하여, 강화 경력(江華經歷) 신숭구(申嵩耉)가 대곡(大斛)을 개조하여 각읍에다 주어 이전(移轉)시킨 죄를 논하여 나문할 것을 청하고, 또 유수(留守) 김휘(金徽)가 검칙을 제대로 못한 잘못에 대해서 논하여 추고할 것을 청하고, 【뒤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 김징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또 경상 병·수영에서 포자(鋪子)를 창설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침탈한 폐단을 논하여, 도신으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혁파할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김징이 아뢰기를,
"신이 어가를 따라 온양(溫陽)에 갔을 때 사복시 첨정 강전(姜琠)에게 곤장을 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범한 죄가 과연 곤장을 쳐야 될 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부(士夫)에게 곤장을 치는 것은 이미 합당한 벌이 아닌 데다, 곤장을 감독하는 자가 법대로 시행할 경우, 죽을까 염려되기 때문에 반쯤 집행한 뒤에는 가볍게 치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 명령하신 것도 적당하지 않았고 아래에서 봉행한 것도 거짓에 가까웠습니다. 이 뒤로는 비록 이러한 벌을 주어야 할 일이 있더라도 곤장칠 숫자를 줄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사부를 대우함에 있어서는 염치를 지킬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근래에는 수령들에게 죄가 있으면 반드시 영문(營門)에 잡아다 곤장을 치는데, 염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자는 곤장을 맞고 난 뒤 반드시 관직에 있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장령 오상이 품은 생각을 대략 진달하였는데, 말이 말 같지가 않아 듣는 자들이 웃었다.
이조에 명하여 청백리를 뽑도록 했는데, 김징(金澄)이 청했기 때문이다. 뒤에 그럭저럭 미루다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이때 김징과 권격(權格)이 모두 남을 논박하여 이름 세우기를 좋아했는데, 김징은 청백하지 못하다고 남을 반드시 논핵했고, 권격은 검소한 행실이 없다고 남을 반드시 논핵했는데, 식자들은 그들이 남을 잘 책하는 것을 비웃으면서 아주 상대가 된다고 말했다.
10월 7일 임신
상이 심한 천식 증세가 있어서 뜸을 떴다. 이때부터 잇따라 매일 뜸을 떴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김좌명(金佐明)을 공조 판서로, 이지온(李之馧)을 우윤으로, 정계주(鄭繼胄)를 호조 참의로, 권격(權格)을 집의로, 남이성(南二星)을 부응교로, 김만중(金萬重)을 교리로, 홍주국(洪柱國)을 부수찬으로, 윤경교(尹敬敎)를 사서로 삼았다.
지온은 북관(北關) 사람이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청백했기 때문에 대헌(臺憲)의 자리에 뽑혔다가 이때 이르러 이 직임에 또 제수된 것이다. 계주는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했는데, 일찍이 장령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을 당시 재상에게 아첨한다고 무함했다. 그리하여 바로 아장(亞長)을 거쳐 청선인 은대(銀臺)에까지 올랐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겼다.
사간 김징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평안 감사의 계본을 보니, 이정영이 관향곡(管餉穀)을 목면으로 바꾼 것 가운데 수백여 동을 사적으로 장사치 모리배들에게 주었다가 값을 낮추어 은으로 환수한 정상이 분명하여 엄폐할 수가 없습니다. 내려오는 절가(折價)의 규정으로 헤아려 보건대, 은수(銀數)가 감축된 것이 거의 수천 냥에 이릅니다. 비록 사사로이 쓴 자취는 없으나, 나라에서 군향을 많이 손실하였으니, 주관한 사람이 전연 죄가 없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어찌 추고만 하고 그칠 일이겠습니까. 파직하소서. 또 해조로 하여금 낮춘 은값을 계산하여 장사치들에게 징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는 헤아려 징수하는 일만 윤허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니, 따랐다.
10월 8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명하여, 세자가 이접(移接)하고 있는 근처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것과 조사(朝士)들이 출입할 때에 가금(呵禁)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이때, 근수(跟隨)의 숫자를 정한 법이 잘 지켜지지 않아서 【대군(大君)은 4명, 대신(大臣)은 3명, 당상 이상은 2명, 이하는 1명이었다.】 조사들이 궐중에 드나들면서 법대로 봉행하는 자가 없었다. 이름있는 사대부들은 수행하는 자들이 떼를 이루었고 소관(小官)들도 수행인이 3, 4명을 밑돌지 않았는데, 길에 앞장 서서 가금을 하게 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소리가 대궐 뜨락까지 진동하였다. 그래서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북관(北關)의 재해를 입은 각읍에 명해서, 해마다 올리는 공물(貢物)의 가포(價布)와 공물의 작미(作米), 내노비·궁노비·각아문 노비·사노비의 공미(貢米) 및 전세로 내는 쌀과 콩을 반감하기도 하고 전감하기도 했는데, 도신이 재해를 입은 곳의 등급을 나누어 치계했기 때문이다.
판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선조의 산소를 성소(省掃)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여 말을 지급하라 명하고, 본도로 하여금 요전상(澆奠床)을 갖추어 주라고 하였다. 시열이 사양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였다.
10월 10일 을해
우레가 치고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대두(大豆)만하였다.
이시술(李時術)을 이조 참의로, 조원기(趙遠期)를 문학으로 삼았다.
10월 11일 병자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판부사 송시열을 인견하였다. 승지와 옥당이 모두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어제 우레의 변고가 매우 참담하였는데, 상께서는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변이 거듭되었는데, 또 겨울 우레까지 있었으니, 두려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하늘의 변고가 이와 같은 때에는 전하께서 필시 경계하는 마음을 배로 가지시겠으나, 며칠만 지나면 점점 나태해지니, 전하께서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을 대하는 정성을 다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욕(私欲)을 누르고 덕을 닦고 반성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끝까지 한결같이 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만약 성인(聖人)의 경지가 아니면 이 병통을 면하기 어렵습니다만, 극기(克己)라는 두 글자는 바로 절실한 가르침입니다.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은 우(禹)임금의 덕이었습니다. 만약 마음을 다스리면서 사무를 밖으로 여기시면 반드시 청허(淸虛)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밖의 의논이 전하께서 정사에 부지런하지 않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듣고 걱정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오래도록 답을 하지 않았다. 승지 여성제(呂聖齊)가, 대신을 자주 접견하고 민역(民役)을 줄여 주어 재변을 없애는 방도로 삼기를 청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이 말이 옳습니다. 정자(程子)께서 사람들이 소를 죽이는 것을 탄식하시면서 ‘소가 젊었을 때는 그 힘을 다 부려 먹고 늙은 뒤에는 잡아 먹으니, 반드시 원한의 기운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소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오직 백성을 잘 보호하는 데에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승지 강호가 아뢰기를,
"판부사의 말을 상께서는 반드시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수찬 윤심도 이어서 매우 옳다고 말했다.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송 아무개 등이 모두 올라왔는데 마침 세자의 병환 때문에 경연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나갔다가 시일이 지체되어 겨울이 문득 지나가 버린다면 진실로 애석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시열에게 이르기를,
"경의 정성이 매우 절실했기 때문에 부득불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뜸을 뜨는 일은 오래지 않아 끝날 것이니, 반드시 급히 돌아와서 경연에 출입하여 나의 미치지 못하는 점을 도와야 한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신처럼 노둔한 사람이 경연을 가까이에서 모신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마는, 성상의 하교가 정녕하시니 감히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신이 또 아뢸 것이 있습니다. 임금 앞에서는 신하의 이름을 부르고, 아버지 앞에서는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옛 예입니다. 장선징이 세자에 대해서 반드시 존칭을 하고 있는데 옛 예에 어긋날 듯합니다. 지금부터 상의 앞에서 세자를 언급할 때에는 존칭을 다시는 쓰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이 참으로 옳다고 하였다.
고 장령 조속(趙涑)의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하사하고, 고 대사헌 유경창(柳慶昌)의 처자에게는 음식물을 하사하라고 명했다. 교리 이규령이 ‘조속은 청렴 결백하고 절조가 있었는데 몸이 죽은 뒤 가난하여 제사를 지낼 수가 없으며, 경창도 청렴 결백으로 유명했는데 죽은 뒤 자손들이 유리하면서 기한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성조에서 마땅히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했는데, 판부사 송시열이 이어서 규령의 말과 같이 진달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판부사 송시열의 말로 인하여 강효원(姜孝元)과 이사용(李士用)의 처자에게 휼전을 거행하고, 또 천역(賤役)을 면제해 주고 녹용하라 명했다.
효원은 시강원의 서리(書吏)였다. 필선 정뇌경(鄭雷卿)이 심양(瀋陽)에 있으면서 정명수(鄭命壽)를 【명수는 서관 사람이었는데 청나라에 사로잡혔다가 통역관[通官]이 되어 용사하면서 우리 나라에 횡포를 부리고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끝이 없었다.】 죽이려 했을 때 효원이 참여했다. 일이 발각되어 함께 도모했던 자들은 모두 벗어났는데, 효원 혼자만 죽었다. 사용은 성주(星州)의 포수였다. 심양에서 징병해 갔을 때 사용이 거기에 끼었는데, 싸움에 임하여 헛방을 쏘아 명나라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때 이르러 시열이 두 사람의 일을 상에게 아뢰면서, 모두 가상하므로 휼전을 거행하여 절의를 장려해야 한다고 하자, 상이 효원의 자손은 천역을 면제해 주고, 사용의 처에게는 휼전을 거행하고 아들 이선(李善)은 녹용하라고 다시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우레가 친 변고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면직을 구했는데, 상이 자책하는 내용으로 답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했다.
사은 정사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부사 민희(閔熙), 서장관 정박(鄭樸)이 청나라로부터 돌아왔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12일 정축
판부사 송시열이 차자를 올려 상록(常祿)을 사양하기를,
"음식물도 오히려 편안히 받기 어려운데 또 다시 녹을 받는다면, 이것은 높은 언덕에 올라가 이익을 그물질하는 것이고 무덤 사이에서 성묘에 남은 음식을 두리번거리며 찾는 짓입니다."
하니, 상이 타이르기를,
"경이 말한 높은 언덕 등의 말이 어찌 경에게 해당되겠는가. 이렇게까지 사양하니 억지로 따르겠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우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려 신병을 이유로 해직을 청했는데, 상이 우대하는 내용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역시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10월 13일 무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 및 약방 제조를 인견하였다. 이 당시 사은사 행차 때에 구매한, 산동(山東)·무원(撫院)·강남(江南) 등 세 성(省)에 지진 변이(地震變異)가 일어난 데 대한 문서 및 희봉구(喜峰口) 몽고 부락이 배반한 사정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내보이며 이르기를,
"담성(郯城) 한 주(州)에 지진이 일어나 깔려 죽은 자가 1천여 명이나 된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여러 곳에서 깔려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고 기타 변괴도 이전의 역사에 없던 바입니다. 이것은 모두 난망의 조짐인데 몽고 사람들이 또 반란을 일으켰으니, 청나라가 필시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헌 정지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대신의 진퇴는 시운의 흥륭과 쇠퇴에 관계가 있는 것이니, 대신의 직책을 어찌 가벼이 체직할 수가 있겠습니까. 송시열을 체임시킨 것이 비록 불러 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두 유신이 이미 일시에 왔으니, 만약에 힘써 머물게 하여 인접하시면 옛사람이 이른바 10년 동안 책을 읽은 것보다 낫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뜸뜨기가 끝나면 응당 자주 인접할 것이다."
하였다. 지화가 또 아뢰기를,
"전에 길에서 세 살난 어린 소녀를 만났는데, 다 떨어진 누더기 옷을 입고 추위에 거의 얼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진구하여 살려 놓은 백성이 지금 와서 얼어 죽는다면 너무나 불쌍한 일입니다. 들으니, 대신이 이미 옷가지를 찾아서 지급하라고 했다 하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만약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어찌 왕정의 하자가 아니겠습니까. 오부(五部)로 하여금 널리 조사하여 목숨을 구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진휼청에 명하여, 의지할 데가 없어 구걸을 하는 자에게 끼니를 잇고 몸을 덮을 것들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10월 15일 경진
평안도에 소의 전염병이 번져 9월 20일 이후에 죽은 숫자가 5백 60여 마리였다. 함경도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수는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홉 번째 사직서를 올리니, 승지를 보내어 두터이 타이르라고 명했다.
10월 17일 임오
이상진(李尙眞)을 이조 참판으로, 이익(李翊)·민주면(閔周冕)을 승지로, 여성제(呂聖齊)를 전라 감사로 삼았다.
이때 이조 참판 윤문거(尹文擧)가 질병으로 사양하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상진을 대신 임명하였다. 처음에 민희(閔熙)가 중국에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그를 전라 감사로 제배했다. 이조 판서 이경억이 경연에서 ‘여론이, 민희가 아직 복명하지도 않았는데 한 지역을 다스리는 직임에 제수하고 또 형제가 교대로 맡게 되니, 모두 옳지 않다고 합니다.’ 하고 아뢰자, 대사헌 정치화가 ‘가정 을사년020) 에 전곡(錢穀)을 담당하는 관원은 교대할 때에 상피하라는 수교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감사가 감찰하고 다스리기만 했는데 지금은 전곡을 관장하고 있으니, 상피하는 법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형제끼리 교대로 승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물며 조종조의 수교가 있는 데이겠습니까. 민희를 개차하고, 이 뒤로 감사를 교대시킬 때에는 상피하는 한 조항을 법으로 정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따라 성제로 대신한 것이다.
10월 18일 계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상이 찬선 송준길로 하여금 글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는데, 준길이 명석하게 진달하였다. 무릇 군도(君道)에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반복하여 상세히 말씀을 드렸다. 곤괘(坤卦)와 복괘(復卦)의 뜻을 논하면서 아뢰기를,
"이것은 학자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임금에게도 가장 요긴한 것입니다. 음 가운데 양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있는데, 음은 소인에 속하고 양은 군자에 속합니다. 임금이 된 자는 마땅히 잘 살펴야 됩니다."
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아가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대인(大人)은 임금의 마음을 바룬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여러 신하들 가운데 비록 대인은 없으나, 미치광이의 말도 성인(聖人)은 가려서 썼으니, 여러 신하들이 올린 말 중에 어찌 가려서 쓸 만한 말이 없겠습니까. 경연은 바로 임금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여러 해 동안 경연을 폐하여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외롭게 했습니다. 오늘 소대(召對)의 명을 내리시어 막힌 둑을 트듯이 하시니,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오늘부터 경연을 잇따라 열어서 신료들을 자주 만나신다면 가까이에서 멀리까지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화기(和氣)를 불러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였다. 물러날 무렵에 준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올라와서 나라에 도움은 되지 못하고 늠록만 허비하여 마음에 늘 부끄러웠는데, 또 은혜를 내리시니 매우 두렵고 부끄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심으로 내린 것인데 어찌 사양을 하는가?"
하였다. 이때에 상이 초모(貂帽)를 하사했기 때문이었다. 상이 경연을 폐지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이제 소대의 명을 내리니 아랫사람들이 모두 기쁜 기색이 만면하였고, 옥당에 비로소 글 읽는 소리가 있게 되었다.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학정(學正) 김정태(金鼎台)가 과거를 개장하는 날에 사사로운 혐의로 두 유생을 정거(停擧)시켰는데, 사관(四館)에 알리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정거시킨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로써 매우 놀랍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라 명하였다.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유준창(柳俊昌)을 승지로 삼았다. 유준창은 술에 병통이 있기 때문에 한직에 있던 사람인데, 승지가 되어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집의 권격(權格)에게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좌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우대하는 내용의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9일 갑신
이때 세자 책례(冊禮)로 인한 별시(別試)로 문무과 초시(初試)를 이미 설행했었다. 병조가 아뢰기를,
"육량전(六兩箭) 세 발을 쏘아서 모두 15보가 되면021) 이것이 30분(分)인데, 편전(片箭)을 두 발 맞힌 자와 분수(分數)가 서로 같아서 취사(取舍)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아직 정해진 의논이 없는데, 대개 전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한 조항을 마땅히 의논해 정해야 합니다. 지금 일소(一所)에서 시사(試射)한 사람의 숫자가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세 발이 모두 1백 보를 간 자가 이미 수천여 명이고, 모두 1백 15보 이상인 사람도 또한 3백 명을 넘었습니다. 앞으로 멀리 쏠 자도 또한 얼마나 될지 알 수가 없으니, 세 발이 모두 15보인 자는 필시 참방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편전을 두 발 맞힌 자도 또한 참방하기 어렵습니다. 육량전으로 1백 보를 쏘는 것은 어깨 힘이 좋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아니면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나, 편전 한 발을 명중시키는 것은 비록 힘이 없고 활을 잘 쏘지 못해도 혹 요행으로 맞히는 자가 있습니다. 무재(武才)로써 논해 보자면, 먼저 육량전 쪽을 취하는 것이 마땅할 듯한데, 편전 두 발을 맞히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육량전의 분수와 그 다소를 따져서 손해를 보게 되면 또한 억울한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신 홍중보가 별도로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서울에 거자들이 모인 것이 오늘날처럼 많은 적이 없으며, 무예를 능히 규구에 맞게 다할 수 있는 자도 오늘날처럼 성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소에서 취하는 숫자가 단지 3백 명이니, 낙망하여 탄식하는 일이 있을 듯합니다.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0일 을유
비변사가 아뢰기를,
"당초에 사목(事目)을 계하할 때 육량전을 세 발 쏘아 모두 백보를 가는 것과 편전을 세 발 쏘아 두 발을 명중시키는 두 가지 기예 가운데 한 가지 기예를 취하기로 판하하셨습니다. 지금은 거자들의 녹명(錄名)이 매우 많은데, 육량전을 쏜 자들의 우수한 분수만 계산하더라도 출방할 숫자의 원수를 넘어, 편전을 쏘아 입격한 자는 참방하지 못할 형편입니다. 두 가지 기예의 분수를 합계하여 출방을 하면, 한 가지 기예만 입격했더라도 분수가 우등인 자는 참방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두 가지 기예 모두 입격한 자도 역시 억울하지 않게 될 것이니, 이와 같이 법식을 정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합니다. 사목 가운데 이렇게 부표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개장한 뒤에 액수를 추가로 정하는 것은 일의 체모에 방해가 있고 또 뒤폐단에 관계가 됩니다. 병조 판서가 시험을 관장하라는 명을 받들고 많은 사람들이 낙망할까 염려되어 이렇게 계품한 것입니다만, 특명이 있지 않으면 아래에서 감히 우러러 청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개장한 뒤에 액수를 더 정하는 것은 일의 체모로 보나 뒤폐단이 생길 것으로 보나 모두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지만 혹 권도를 써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전례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명하여 이번 과거는 양소(兩所)에서 2백명씩 더 뽑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과거는 일의 체모가 중대하여 한번 흔들리면 뒤폐단을 막을 수가 없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거자들에게 명예를 구하는 일에 힘써 전례에 없던 일을 계청하였는데, 묘당이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아니하고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상의 결정에 맡겼다. 그러다가 마침내 대간의 논계가 일어나 금방 정지시키게 하여, 나라의 체모를 떨어뜨리고 임금에게 원망이 돌아가게 하였으니, 재상들이 나랏일을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일만도 못하다 하겠다. 이때 무사 수백명이 떼를 지어 영상의 집에 모여서 한꺼번에 하소연하며 입격자를 모두 참방시키도록 입계해 달라고 청하였다. 인심이 꺼림이 없고 조정이 존귀하지 못함이 이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627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군사-병법(兵法)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과거는 일의 체모가 중대하여 한번 흔들리면 뒤폐단을 막을 수가 없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거자들에게 명예를 구하는 일에 힘써 전례에 없던 일을 계청하였는데, 묘당이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아니하고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상의 결정에 맡겼다. 그러다가 마침내 대간의 논계가 일어나 금방 정지시키게 하여, 나라의 체모를 떨어뜨리고 임금에게 원망이 돌아가게 하였으니, 재상들이 나랏일을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일만도 못하다 하겠다. 이때 무사 수백명이 떼를 지어 영상의 집에 모여서 한꺼번에 하소연하며 입격자를 모두 참방시키도록 입계해 달라고 청하였다. 인심이 꺼림이 없고 조정이 존귀하지 못함이 이러하였다.
10월 21일 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고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찬선 송준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어제 아뢴 곤괘와 복괘의 음양에 관한 뜻은 아주 절실한 요체입니다. 전하께서 유의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어 음양 소장(陰陽消長)의 이치를 아뢰었다. 교리 이규령이 아뢰기를,
"판중추부사 송시열은 단지 세자부(世子傅)만 겸하고 있고, 경연의 직명이 없습니다.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임 대신은 경연관을 겸하는 규례가 있다. 내일 개정(開政)하여 하비하도록 하라."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시열은 근력이 신에게 견줄 바가 아니고 또 책 읽는 공부를 폐하지도 않았는데, 잇따라 시강을 하지 못하였으니, 올라온 뜻이 전혀 아닙니다.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이미 대면하여 하유하였다. 다시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하유하겠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경연을 열 때에는 문학(文學)을 한 선비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단상(李端相)은 학문이 해박하고 식견이 있는 사람인데 지금 먼 시골에서 지내고 있으며, 이민적(李敏迪) 형제는 모두 문학을 지닌 사람들인데 한 사람은 파직되었고 한 사람은 외방에서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모두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민적을 서용하라."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윤강(尹絳)을 소환하라는 일을 전에 신이 매번 진달했는데, 상께서 채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끝내 윤강으로 하여금 재야에서 늙어 죽게 한다면, 윤강의 진퇴에 대해서 누가 탄식하며 아름답게 여기지 않겠습니까마는, 상에게 있어서는 실덕(失德)이 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상의 뜻은 비록 이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랏일을 해나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소환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용히 물러나 있는 윤강과 같은 사람은 참으로 가상히 여길 만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권시(權諰)와 같은 사람은 끝내 버려두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비록 그 심지가 굳지 않고 식견이 확실하지는 못하나, 임금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한 생각은 끝까지 해이해지지 않을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마땅히 거두어 써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김홍욱(金弘郁)의 죄에 대해서는 선왕(先王)께서 엄한 법으로 처벌을 하셨는데, 그 뒤에 신들의 말로 인하여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그의 자손을 서용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김홍욱을 잡아온 도사(都事)는, 죄인을 잠시 지체시켰다는 이유로 아직도 죄를 받고 있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사는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가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홍욱의 죄가 이미 가볍다면, 도사의 죄가 어찌 도리어 무거울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이제(李璾)도 파직된 지가 오래입니다. 신은 전 도사 이이형(李以馨)과 이제를 모두 서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러하니 모두 서용하겠다."
하였다. 준길이 일어나 말하기를,
"옛날의 대신들은 비록 공격을 당하더라도 오히려 말한 자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송나라의 당개(唐介)가 문언박(文彦博)을 공격하였는데, 문언박이 힘을 써서 구제해 주었으니 대신의 풍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신이 듣기로는 이제가 벌을 받은 것이 영의정 정태화에 대한 일 때문이라고 하는데, 태화가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니, 옛날의 대신만 못한 것입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일을 조사할 때에 신이 목숨을 버리지 못했으니 이것이 신의 죄입니다만, 모화관에서 아뢴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신이 말하지도 않은 일을 적어 신의 죄안으로 삼은 것입니다. 만약 상께서 변석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신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비록 낯을 들고 행공하고는 있으나 실로 부끄럽기 그지없는데, 어찌 감히 진달해 아뢰어 지휘하면서 옛 대신의 일을 행하겠습니까. 지금 준길의 말을 들으니,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지난날의 일을 제기할 것은 없겠습니다만, 그 당시 신이 올린 상소는 대관이 죄를 받고 귀양간 자가 많았기 때문에 말했던 것에 불과한 것이지, 굳이 허적에게 죄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신이 서울에 들어온 뒤에 허적이 즉시 정고하였는데, 신은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으니, 신은 물러가야 하겠습니다. 신은 허적에게도 죄를 주고자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다른 대신이겠습니까."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준길의 말에 대해서 노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죄는 허적의 죄와는 다릅니다. 허적은 봉사(奉使)를 잘못한 죄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신 홍명하가 일찍이 허적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죄는 가벼우니 공죄이기 때문이고, 태화의 죄는 무거우니 사죄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물러가려 할 때에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송 판부사가 휴가를 받은 일은 이미 끝났을 듯하고 또 이미 병조리도 다 했을 터이니, 경연을 여는 이때에 속히 올라오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입시한 사관을 보내어 이런 뜻으로 전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2일 정해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을 영경연사로,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윤집(尹鏶)을 대사헌으로, 이익(李翊)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윤집은 젊어서부터 술을 즐겼고 재주와 식견은 부족했지만 성격이 질박하고 곧았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 과감하게 말을 한다는 칭찬이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발탁되어 화직과 현직을 두루 거쳤다. 이익은 김익렴(金益廉)과 서로 싸운 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샀는데 전조(銓曹)에 제수되기까지 했으므로, 공의가 비난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23일 무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사신이 돌아옴을 인하여 몽고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몽고가 비록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청나라만 그 피해를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몽고가 반란을 일으킬 경우 그들은 반드시 청나라에서 우리의 포군(砲軍)을 끌어다가 그들을 제어할까 염려할 것인데, 만약에 먼저 한 군대로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 병력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양서(兩西) 지방은 병자년 이후로 군정을 포기하여 활 한 자루 화살 한 개도 수습하지 않았고, 또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는 수령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에 일이 생기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신들이 지금 입시하였으니,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영상에게 묻자,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이 말이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서로(西路)의 수령에 남행(南行)과 무관을 섞어 써서 한 사람도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 뒤로는 해조에 신칙하여 수령을 잘 가려서 차임하도록 하고, 또 병사가 내려갈 때에도 분부하여 잘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4, 5년을 넘지 않아서 반드시 사변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말투가 매우 강개하였다. 어영 대장 유혁연도 이완의 말과 같았는데, 우후를 차출할 것을 청하고, 무신 수령을 차출할 때에는 이조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차출해 보내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뒷날 대신이 일의 체모에 어긋난다고 하여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집의 권격이 진계하기를,
"과거를 행하여 사람을 뽑는 것은 일의 체모가 지극히 중대한 것입니다. 이미 개장(開場)을 한 뒤에 액수를 더 정하는 것은 법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뒤폐단에도 크게 관계가 되니, 조정의 거조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부당하다고 하니, 무과 액수를 더 뽑으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자 따랐다. 또 병조 판서 홍중보가 법을 지키지 못하고 액수를 더 뽑을 것을 계청한 것을 논하여 중보를 중하게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전국적으로 호적에 들지 않은 자가 많았는데,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고하지를 못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자수한 자는 죄를 용서해 주도록 모두 청하자, 상이 법령을 만들어 포고하라고 명했다.
고 장령 조속(趙涑)에게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집의 권격이 경연에서 조속의 기절과 청백을 갖추 진달하고, 예조 판서 조복양도 잇따라 말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2품으로 증직하자고 청하였으므로, 이에 이 명이 있었다.
10월 24일 기축
좌의정 허적이 열세 번째 정사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도타이 전유하였다.
밤에 유성이 묘성(昴星) 위에서 나와 천원성(天苑星) 아래로 들어갔는데, 색이 붉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10월 25일 경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고 《심경》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찬선 송준길이 조식잠(調息箴)을 외우고 아뢰기를,
"신이 이것을 외워서 들려 드린 것은 조양(調養)하는 데 도움이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오래도록 경연을 폐하고 있다가 잇따라 경연을 여시니, 뭇사람들이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조종조에서 하루에 세 번씩 경연을 열던 것처럼 할 수는 없더라도 혹 매일 경연을 열거나 혹 격일로라도 경연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간 남구만이 진계하기를,
"신이 삼가 강화 유수 김휘(金徽)의 상소를 보니, 계묘년 이후부터 백성들에게 곡식을 지급할 때에는 소곡(小斛)으로써 하고 거둘 때는 대곡(大斛)으로써 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비록 조정의 명령이더라도 수령이 된 자는 마땅히 다시 계품했어야 마땅한데, 본부의 전후 관원은 단지 군향이 모자라는 것만 염려하고 아래를 덜어서 위를 더해주는 것이 그르다는 것을 모른 채 6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았으니, 일의 체모에 있어서 아주 놀랄 만한 일입니다. 계묘년 이후의 강화 유수와 경력을 모두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강도(江都)에서 임인년 이전에는 곡물을 받아들일 때 이미 소곡을 썼습니다. 지금 만약 변통하지 않으면 적게 주고 많이 취하는 폐단이 필시 여전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지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강도에서 곡자(斛子)를 개조한 것은 시임 관리가 한 일이 아니니, 경력 신숭구(申嵩耉)는 죄가 없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죄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만, 원정(原情)하기 전이라 아래에서 감히 계품할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무를 띤 채로 풀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아뢰기를,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에 경학(經學)이 이단상(李端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마땅히 불러다가 시강하는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하고, 송준길이 아뢰기를,
"박세채(朴世采)는 경학을 깊이 공부한 사람입니다. 경연에 드나들게 하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신이 경연에 드나드는 것 또한 일반적 예가 아닌데, 신의 말을 인하여 세채를 입시하게 하면 신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단상은 관직(館職)에 제수하고, 세채는 경연을 열 때에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이단상의 중고(中考)를 탕척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이웃에 고 참의 송국택(宋國澤)의 아내가 있는데, 나이가 여든에 가깝습니다. 내전(內殿)에게는 외할머니가 되는데,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일의 체모로 보아서 이와 같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다른 사람과는 다릅니다. 비록 월름(月廩)이 아니더라도 봄가을로 옷과 음식물을 대주어야 마땅합니다. 나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결코 그대로 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감사에게 분부하여 늠료를 달마다 지급하게 하는 것도 참으로 해로울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 감사로 하여금 월름을 제급하게 하라."
하였다. 시독관 김만중(金萬重)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지난번에 준길이 권시를 거두어 쓸 것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권시의 사람됨은 모릅니다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랏일을 근심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한결같이 폐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또한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서리를 밟으면 곧 단단한 얼음이 얼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서리를 밟는다고 해서 반드시 단단한 얼음이 갑자기 어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은 그 기미를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신은 간사한 무리들이 혹 이것으로 인해 조정을 엿보아 헤아리고 훗날 나라를 위태롭게 할 무리들이 또한 조정을 희롱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전하처럼 밝고 훌륭하신 분을 두고 신이 오히려 이런 지나친 염려를 하고 있으니, 광망하다고 하겠습니다만, 송사(宋史)를 강하다가 원우(元祐)·소성(紹聖) 연간에 이르게 되면 몸과 마음이 송연해지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진퇴 소장의 기미에 대해서 더욱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지난 혼조(昏朝) 때 종실 귀천군(龜川君) 이수(李晬)와 금산군(錦山君) 이성윤(李誠胤) 등이 의분에 북받쳐 상소를 올려 적신 이이첨을 목베라고 청했다가 모두 유배를 당했습니다. 수는 반정 초기에 석방되어 돌아와 드디어 인조의 사랑을 받아 지위가 높은 품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만, 성윤은 그 당시 유배지에서 죽었는데 아직까지 포상하는 조처가 빠졌으니 참으로 흠전이라 하겠습니다. 특별히 시호를 내려 그 절의를 기려야 할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당초에 증직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지금 다시 시호를 내려도 온당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시호를 내리라고 명했다. 나중에 시호를 내려 충정(忠貞)이라 했는데, 성윤은 성종대왕의 후손이다.
오정일(吳挺一)을 판윤으로, 남구만(南九萬)·홍만용(洪萬容)을 승지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제학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김징(金澄)을 집의로, 박증휘(朴增輝)를 사간으로, 신명규(申命圭)를 헌납으로, 이단상(李端相)을 부교리로 삼았다.
10월 26일 신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고 《심경(心經)》을 강했다. 찬선 송준길이 ‘심(心)’ 자의 뜻을 강하여 아뢰기를,
"전(傳)에서 ‘뭇 이치를 구비하고 있으면서 온갖 일에 대응한다.[具衆理而應萬事]’고 했는데, 뭇 이치를 구비하고 있다는 것은 체(體)이고 온갖 일에 대응한다는 것은 용(用)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기설(理氣說)은 말로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두 가지로써 논하면 이가 진실로 주가 되지만, 형체가 일단 이루어지면 이는 기 속에 깃들게 됩니다. 때문에 이는 기에 구속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그 구속은 포함하여 지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일단 이목구비를 지니면 각각 그에 따른 욕(欲)이 있게 되니, 이것이 욕에 이끌리게 되는 이유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이 바로 인심(人心)인가?"
하자, 준길이 성상의 말씀이 옳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경(敬)’ 자의 뜻을 논하여 아뢰기를,
"그 내포하고 있는 뜻이 큽니다. 시종(始終)을 꿰뚫고 상하(上下)로 통하며, 동정(動靜)을 갖추고 내외(內外)를 합하고 있으니, ‘경’ 자의 뜻이 큰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동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발동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하니, 이는 배우는 사람의 공부에 절실한 것일 뿐만 아니고 임금에게 있어서 더욱 긴밀하게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인의 희로도 절도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그 폐해가 있는데, 하물며 임금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사단(四端) 가운데 노여움이 가장 제어하기 어려우니, 이것을 유념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거처하던 곳의 이름을 ‘경의(敬義)’라고 했는데, 신이 지금 동편 건물의 편액을 보니 ‘경의재(敬義齋)’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선조(先朝)께서 이름 붙인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께서 이름붙인 것이다. 이 집도 역시 그렇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이 집이 선조께서 창건하신 것이라 하니 서글픈 마음 누를 길이 없습니다. 선조께서 항상 이 집에서 주무셨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렇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덕궁에도 이런 집이 있는데 선조께서 평상시 거처하셨으며 잠자는 곳은 따로 있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어제 ‘집희(緝熙)’의 뜻을 진술하였는데 잇따라 경연을 여시니, 뭇 신하들치고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성명께서는 이 마음을 게을리하지 마소서."
하였다. 이조 판서 이경억이 아뢰기를,
"내일 표문(表文)을 가지고 떠날 예정이오니, 신이 다시 등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의 사정을 혹 들을 기회가 있겠는가? 우리 나라의 일은 작은 일까지 저들이 모르는 것이 없는데, 저들의 사정은 한 가지도 알 수가 없으니, 안타깝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사명을 받든 신하가 성실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억은 반드시 마음과 힘을 다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행 중 저들의 사정을 탐지해서 알아낸 자에게 상을 주면, 뒤에 가는 사람들이 필시 계속해서 알아낼 것이다."
하고, 이어 전일 사행 때 문서를 구한 사람에 대해서 비국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양주(楊州)로부터 성 밖에 이르러 질병을 이유로 즉시 복명하지 않고 이어 상소를 올려 영경연의 직을 사양했는데, 상이 위로하는 내용으로 전유하여 허락하지 않고, 어의를 보내어 병을 살피게 하라고 명했다.
10월 27일 임진
새벽부터 오시까지 안개가 짙게 끼었다.
동지 정사 이경억, 부사 정륜, 서장관 박세당이 청나라에 갔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산동(山東)·무원(撫院) 및 남방의 세 성(省)에 지진이 일어난 것에 대한 문서는, 하나는 역관 조동립(趙東立)이 구한 것이고, 하나는 만상(灣上)의 군관(軍官) 유상기(劉尙基)가 구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서 모두 가자하였다. 이것은 얻기 어려운 문서가 아닌데 가자까지 하였으므로 논자들이 지나치다고 하였다.
10월 28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용강(龍岡)의 진사 김계지(金啓址) 등이 상소하여, 고 찬성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과 고 참판 김정국(金正國)의 서원에 사액할 것을 청하였다. 예조에 계하하니, 예조가 방계하였는데, 상이 특명으로 ‘오산(鰲山)’이라고 사액하였다. 용강은 안국 등의 조상 산소가 있는 땅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안국 등이 왕래한 적이 있다 하여 서로 더불어 사우(祠宇)를 세우고는 이 청을 했던 것이다.
10월 29일 갑오
판중추 송시열이 영경연의 직을 재차 사양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대면하고 유시할 것이니, 신병이 조금 차도가 있거든 경은 들어와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어 전유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고 《심경》을 강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이 아뢰기를,
"맹자(孟子)가 ‘우신(友臣)’을 말했는데, 이른바 벗이란 그저 함께 어울리는 무리를 말한 것이 아니고 서로 인격과 학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찬선 송준길이 아뢰기를,
"고 상신 이항복(李恒福)이 ‘선묘(宣廟)와의 관계는, 의리는 군신간이고 도리는 붕우간이다.’ 했는데, 이것은 정성을 미루고 마음을 비워서 한 말입니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익(益)이 순(舜)임금에게 경계하면서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순임금처럼 덕있는 사람이 어찌 단주와 같이 할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이렇게 경계한 것은 이른바 ‘성인이라 하더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된다.’는 뜻입니다.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만약 잠깐 사이라도 방심하면 잘못이 있는 사람이 됨을 반드시 면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임금에게는 순임금에게 경계했던 익과 같이, 벗으로 사귀는 신하가 반드시 있은 뒤에야, 덕성을 훈도 성취하여 지극히 다스려진 정치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의리는 군신간이고 도리는 붕우간이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시독관 김만중이 아뢰기를,
"제 선왕(齊宣王)이 칭찬할 만한 점은 없었지만 맹자가 주(晝) 땅에서 세 밤이나 묵은 뒤 떠났던 것은, 선왕이 용맹을 좋아하고 재물을 좋아하는 병통을 숨기지 않아 타고난 자질이 순박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인정(仁政)을 바랄 수 있어서였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의 병통은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성상께서 미진한 공부가 있다면 대신과 유신이 모두 입시하고 있으니 더불어 논란하시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하의 도는 위에서 행해지고, 임금의 도는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만중이 이와 같은 말을 감히 진달하니, 이것은 전하께서 마음을 비우고 아랫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신이 전하의 병통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릅니다만, 바깥의 의논들은 안일에 있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렇습니까?"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는 병을 살펴 약을 쓰시는 것이 옳습니다. 신하들이 감히 마음대로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
하고, 또 양생(養生)의 뜻을 강하였는데,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 때에 신선의 일에 대해 말을 하게 되었는데, 이준민(李俊民)이 대답하기를 ‘신이 요즘 세상에서 신선을 보았습니다.’ 하자, 선조께서 이상히 여겨 물으니, 답하기를 ‘재상 원혼(元混)이 나이가 아흔에 가까운데 기력이 젊은 사람과 같으니, 이 사람이 신선입니다.’ 하였습니다. 선조께서 듣고 이상하게 여기며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이처럼 장수를 누릴 수 있을까?’ 하자, 대답하기를 ‘원혼은 평상시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선조께서 ‘이것은 바로 나를 경계시키는 뜻이로구나.’ 하셨습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준민의 말이 진실로 좋았습니다만, 선조의 분부도 또한 좋았습니다. 태화가 이 일을 이끌어 아뢴 것은 경계시키는 뜻입니다. 전하께서는 이 말을 유념하소서."
하자, 상이 미소를 지었다. 준길이 아뢰기를,
"《여씨가훈(呂氏家訓)》에 ‘관원이 된 자는 갑작스런 노여움을 먼저 경계해야 하니,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자세히 살펴 대처해야 한다.’ 했습니다. 이 말은, 마음에 부합되지 않는 일이 있을 경우, 자세히 살펴 처리하면 이치에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만약 갑작스럽게 노여움을 내면 자신에게 해가 될 뿐이지 어떻게 남에게 해가 되겠습니까.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상께서도 여기에 대해서 유념하고 계십니까. 노여움이라는 것은 남에게 해를 입히려는 것인데 단지 자신에게만 해가 되고 맙니다. 배우는 사람도 갑작스런 노여움을 경계해야 하는데 하물며 관원이 된 자이겠으며, 관원이 된 자도 경계해야 하는데 하물며 임금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노여움은 양에 속하고 욕(慾)은 음에 속하는데, 욕은 깊숙하게 가라앉아 있어 제어하기가 노여움보다 더 어렵습니다. 만약 성상께서 일신상의 일을 가지고 스스로 살펴보신다면, 노여움과 욕에 있어서 반드시 반성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시경(詩經)》에서 ‘내가 징계를 당했으므로 뒷일을 삼가노라.’ 했는데, 이른바 앞일에서 교훈을 얻어 뒷일을 삼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노여움과 욕은 모두 교훈으로 삼아 삼가야 하는 뜻이 있습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소신의 스승 김장생이, 인조조 때 입시하여 아뢰기를 ‘신하들이 일을 아뢸 때 매번 부복하기 때문에 군신간에 얼굴을 서로 알지 못합니다. 신이 입시한 적이 많지만 아직도 천안을 알지 못합니다. 일어나 앉아서 천안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자, 인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장생은 신의 스승이기도 하기 때문에 저 역시 이 말을 장생에게서 일찍이 들었습니다. 그 뒤 정경세가 입시해서 인묘에게 역시 이와 같이 고하자, 인묘께서 장생의 말을 얘기하면서 역시 허락했습니다. 이 두 신하의 말은 진실로 범연히 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릇 일을 아뢸 때나 진강할 즈음에 일어나 앉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종묘에 고하는 문제를 가지고 품지하자, 상이 대신 및 유신들에게 물었다. 모두 해조의 계사가 타당하다고 하자, 상이 일렀다.
"대신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아뢴 대로 거행하라. 경과(慶科)는 정시로 설행하라."
문무과의 전시에 직부할 사람들에게 별시의 전시에 모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전시에 직부하는 사람들은 으레 식년시의 전시에 응시하는 법인데, 별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49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629면
【분류】인사-선발(選拔)
좌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우대하는 내용의 비답으로 답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10월 30일 을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고 《심경》을 강했다. 강이 끝나자 판부사 송시열이 아뢰기를,
"요즈음 잇따라 매일 소대하시므로 밖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기뻐 날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치지 않고 해나가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자께서 ‘하루라도 손님을 만나지 않으면 큰 병을 앓는 것 같다. 붕우와 담화를 하다 보면 신병이 저절로 사라지는데, 어찌하여 문을 닫아 걸고 날을 보내겠는가.’ 했습니다. 전하께서 이번 거조를 시종 변함없이 유지하신다면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내는 것보다 반드시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집의 김징이 아뢰기를,
"홍석기(洪錫箕)와 김진표(金震標) 등은 문벌과 명망이 흡족하지 않은데도 해조가 구차스럽게 시관에 갖추어 의망했습니다. 물정이 모두 부당하게 여기니, 해당 예조 당상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이 금번 과거 감시관(監試官)으로 장옥(場屋)에 들어가서 거자들이 제술하는 것을 보았는데, 선유(先儒)의 말을 공공연하게 위조하고, 심지어는 경전(經傳)의 말을 위조하기도 하고, 혹은 고금에 있지도 않았던 선유의 성명을 위조하기도 하니, 풍습이 매우 놀랍습니다. 이 뒤로 다시 이러한 폐단이 있어서 혹 발각되면 그 유생을 중하게 추고할 일을, 해조로 하여금 경외에 두루 유시하게 해서 금지시킬 터전으로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아뢰기를 마치고, 송시열을 성안에 들어와 있게 할 것을 또 청하니, 상이 들어와 있으라고 시열에게 유시하였는데, 시열은 여러 차례 사양했고, 김징은 여러 차례 말을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성밖에 있는 것은 병을 조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는데, 비록 성안에 있더라도 편하고 조용한 곳을 가려서 지내면 성밖에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경을 들어오게 하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만나고자 해서이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지난날 상께서 신을 인접하셨을 때에는 신이 경황이 없어서 생각을 남김없이 모두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신을 아침저녁으로 만나고자 하신다는 분부를 받들고 보니 감격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청컨대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공자가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의 효를 칭찬한 것은 뜻을 계승하고 사업을 잇기를 잘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선왕께서는 대성인(大聖人)으로서 때를 잘못 만나셨으나, 천하에 대의를 밝히고자 하신 것이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았습니다. 고 정승 이경여(李敬輿)가 ‘국력은 미약한데 상의 존심(存心)이 너무 지나치니,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도리어 화를 자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선왕께서 ‘마음이 매우 통분스러운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어 탄식만 난다.’고 답하셨습니다. 대개 선왕의 뜻은 비록 화를 부르더라도 그만둘 수가 없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고 하는 것은 나의 일은 큰데 나이가 이미 늙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선왕의 춘추가 바야흐로 강성하셨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탄식을 무엇 때문에 하셨겠습니까. 신은 매양 이 분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매우 비통스럽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반드시 선왕의 뜻을 잘 이어야 효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나랏일을 생각할 때 어떠한 때라고 여기십니까?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은 나라의 큰 근본인데 강상이 이미 무너졌고, 천하의 일이 또 우려해야 할 만한 점이 있는데, 우리 나라는 한 가지 일도 믿을 만한 것이 없이 그저 게으름만 피우니, 성상께서는 계획을 정한 바가 있습니까? 만약에 변란이라도 일어나면 장차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 위 아래가 계획이 먼저 정해진 뒤에야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의 뜻은 언어로 형용할 수 없다. 내가 비록 보잘것없지만 선왕의 뜻을 잘 이으려는 생각이 없지 않은데 병을 얻은 뒤로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다만 그때그때에 따라 처리하여 변란이 없게 할 따름이다."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아픔을 돌보아 나라 안에 난리가 없도록 하는 것은 오직 성상께서 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만, 천하의 일이란 나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아무 것도 모르고 날만 보내다가 나라가 망하게 된다면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이것을 유념하고 계십니까?"
하였는데, 상이 또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지위가 낮은 자는 나라를 도모할 수가 없으니, 그 형세가 본래 뜻대로 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분부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임금이 되어서 만약 뜻대로 하지 못한다면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생각이 있는데도 아뢰지 않으면 도리에 있어서 온당치 않을 것이고, 또 마음이 매우 답답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진달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때와 역량을 헤아리시어 이 시대에 쓸 만하지 못한 사람은 버리시고 이 시대에 쓸 만한 사람은 등용하시면 또한 한 시대의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시독관 이규령과 김징이 또, 송시열이 성안에 들어오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자꾸 되풀이하였는데, 시열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큰 일은 소홀히 하면서 작은 일은 잘 살핍니다. 신이 등용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면 성상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게 하더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성상 앞에서 이와 같이 힘껏 간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시강관 김만중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정의 계책은 매우 비밀스러운 것이라서 사람마다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백성을 기르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등의 몇 가지 건 이외에는 다른 일이 없으니 송시열이 아뢴 바도 필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성상의 뜻이 먼저 정해진 뒤에야 조처하여 차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송시열의 거취는 성상의 뜻이 정해지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따름이니, 비록 으리으리한 큰 집에 거처하게 하더라도 끝내 반드시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성안이냐 성밖이냐 하는 것은 논할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예조가, 왕세자의 병환이 회복된 경사로 인하여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여 진하하자고 청했으며, 정시를 설행하여 경사를 함께하는 뜻을 보이자고 또 청했는데, 상이 모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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