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을축
우의정 송시열이 광주(廣州)에서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은 나라 형세가 위태위태하고 시사가 매우 어려우므로, 붙들어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을 얻어 정승의 자리에 앉히는 데 있다. 그렇다면 경처럼 훌륭한 덕과 인망을 지닌 사람이 종신토록 산직에 있어서야 되겠는가. 어제 승지의 회계로 인하여 경이 지나치게 인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온천에서 출발하던 날 짐짓 경의 뜻을 따랐던 것은 일시적인 권도(權道)였고, 오늘 황각(黃閣)에 다시 들인 것은 참으로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려는 것으로, 이는 필연적인 이치이다. 아, 경이 나라를 떠난 지 지금 십년이다. 내가 경을 생각하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나랏일에 있어서 불행이 심하다. 지난번 온천에서 돌아올 때 다행히도 서로 만나 함께 올라왔으니, 당시 나의 기쁨이 다시 어떠하였겠는가. 지금 나라를 맡기려는 뜻으로 인하여 갑자기 돌아갈 계책을 결정하게 되었으니,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삼공의 자리는 국가의 치란이 달려 있으니, 진실로 경솔하게 처리할 수 없다. 다시 깊게 생각하여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나의 볼 만한 사업도 없었다는 설에 있어서는, 경과 하등 관계가 없는 것으로 진실로 내가 불민한 소치이니 마음이 부끄럽다. 그러나 조용히 의논하여 처리한다면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몸받아 나의 마음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이어 승지를 보내 전유했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우상 송시열을 머무르게 하도록 청하면서, 허례(虛禮)로는 만류할 수 없으니, 더욱 분발하려는 의지를 가다듬어 말과 계획을 따르겠다는 뜻으로 유시하라고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내 뜻이 어찌 헛된 형식만 일삼으려는 것이겠는가. 당시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였다. 이는 옥당의 차자 중에서 선왕께서 민유중(閔維重) 등을 파견하여 여러 도를 조사할 때 내린 봉서(封書)를 꺼내 볼 것을 청하였는데, 봉서 중에는 여러 궁가의 일을 조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시열이 이전에 경연 석상에서 그것을 가져다 볼 것을 청했는데, 상이 즉시 찾지 않았다. 때문에 옥당이 거듭 청한 것이었는데, 상의 분부가 또 이와 같았다.
관학 유생 권상하(權尙夏) 등이 상소하여 우상 송시열을 머무르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부드러운 내용으로 답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등이 송시열이 있는 곳으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들이 성상의 뜻을 잘 받들어 실행하지 못하여 송시열의 행보를 되돌리지 못하였으니, 오직 부끄럽고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조정 신하 중에서는 호조 판서 민정중이 시열과 정의가 가장 두텁고, 또 함께 나랏일을 해보자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정중을 보내 성상의 유지를 하유하여 행보를 만류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정중을 명초하여 곧바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에 대한 비답을 내려보냈느냐?"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우부승지 정계주가 막 나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정중에게 이르기를,
"우상이 끝내 들어오지 않으려 하여 본디 육경을 보내 하유하고자 하였는데, 승지의 말이 또 이와 같았기 때문에 특별히 경을 부른 것이다."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온천에 거둥하셨을 때 상직(相職) 체직을 허락하신 것은 사실 올라오게 하려는 것이었고, 지금 다시 재상에 임명하신 것은 성상께서 나랏일을 위임하고자 하신 뜻입니다. 그런데 시열이 이처럼 돌아간 것은, 대체로 시열이 예전에 위험을 겪어서 다시는 벼슬길에 들어서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우형의 말을 정중에게 말하자, 정중히 아뢰기를,
"선왕께서 시열을 초치한 뜻에 대해 조정의 신하치고 누군들 모르겠습니까마는, 애초부터 이룰 가망성이 없는 위태로운 일을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고, 위아래가 힘을 합하여 나라를 함께 다스리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일 등대했을 때 선왕의 큰 뜻을 진달하면서 모든 일에 순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여러 궁가의 저택만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몸소 검약하게 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성상의 뜻은 어떻게 정해졌는지요?"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란 일시에 해낼 수 없는 것으로 차례대로 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서히 상의하려 하였는데, 옥당이 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의심한 것이다."
하고, 인하여 정중에게 이르기를,
"송 정승이 이번에 떠나간 것은 종신토록 물러나고자 하는 의도이다. 경이 가서 나의 뜻을 하유하기를 ‘경이 나라를 떠난 지 10년 만에 다행히 다시 조정에 나왔는데, 앉은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또 이처럼 결연히 돌아가니, 내 마음이 서운할 뿐만 아니라 나랏일에 있어서도 관계되는 바가 매우 크다. 지금과 같은 때에 경 말고 그 누가 있겠는가. 끝내 나랏일을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된다. 부디 멀리 가려는 마음을 다시 돌리라. 위아래가 힘을 합해 나랏일을 함께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라고 하라."
하였다. 정중이 명을 받들고 나갔다.
12월 2일 병인
민점(閔點)을 호조 참의로, 강호(姜鎬)를 형조 참의로, 신명규(申命奎)를 사간으로, 민시중(閔蓍重)을 수찬으로 삼았다.
우부승지 정계주(鄭繼胄)가 서계하였다.
"신이 어제 저녁 명을 받들고 우의정 송시열에게 가서 성비(聖批)를 전했더니, 시열이 ‘승지가 다시 와서 전한 비답을 보건대, 귀신도 울릴 수 있는 열 줄의 윤음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조그마한 정성이나마 다하고자 하지만, 해가 이미 저물어 어둡습니다. 내일 다시 소본으로 진달하여 혹 호조 판서 민정중에게 부쳐 전달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호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전유하고 돌아왔는데, 상이 인견하였다. 정중이 나아가 아뢰기를,
"송시열이 말하기를 ‘삼공(三公)의 직위에 대해서는 불안하게 여겨지는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번거롭게 저들에게 소문이 날 것이라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능력이 감당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만약 한산한 부서에 앉히시어 경연에 출입하게 해주신다면, 생각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진달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위를 띠고서는 끝내 들어오지 않을 것 같던가?"
하자, 대답하기를,
"그러할 듯했습니다."
하였다.
12월 3일 정묘
우의정 송시열이 또 상소하여 면직을 바랐는데, 상이 답하였다.
"이렇게까지 고사하니, 억지로나마 따르겠다는 뜻을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라."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좌부승지 오두인(吳斗寅)이 무과 전시 때 관 화살[官箭]로 시험해 뽑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앞서 무과 전시에서는 으레 관 화살로 시험해 뽑았는데, 법령이 점차 해이해져 과거 응시자들이 사제 화살[私箭]을 사용하게 되어 이미 잘못된 예로 굳어졌다. 그러므로 두인이 이전의 규례를 따르도록 청한 것이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근래 기후가 이상하여 돌림병에 걸린 자가 매우 많은데, 심지어는 문·무 과거 응시자도 사망한 자가 많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불쌍한 일이다. 진휼청에 신칙하여 휼전을 거행하되 누락됨이 없게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각읍에서 원곡(元穀)을 회계한 것을 보니 창고에 남아 있는 쌀과 콩이 원래 없는 곳이 있으며, 큰 길 주변에 있는 여러 고을 역시 숫자가 부족한 곳이 많습니다. 만약 급한 일이라도 있으면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각 고을로 하여금 미리미리 조처하여 갖추게 하고, 원곡의 저축이 부족한 곳은 그 석수(石數)를 정해 주어 각종 포목으로 쌀을 바꾸어 수를 채우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환곡을 출납한 후 부정을 모두 적발토록 하라."
하였다. 상이 파할 무렵에 승지 오두인(吳斗寅)에게 이르기를,
"본직을 이미 힘써 따라 면직해 주었으니, 즉시 성안으로 들어와 나의 뜻을 위로하라는 일로 송 판부사의 거처에 가서 전유하라."
하였다. 집의 김징(金澄)이 아뢰기를,
"해운 판관 조가석이 전에 부여현(扶餘縣)을 맡았을 적에 재물을 탐하고 이끗을 좋아하여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하였는데, 본직을 맡고서는 이전 습관이 더욱 고질화되었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이조 정랑 이혜가 가석을 정언에 의망하려 할 때 참의 이익이 어렵게 여기자 이혜가 ‘좋은 수가 있다.’고 하면서 의망에 넣자고 굳이 청하였다고 합니다. 이혜가 가석의 탐학 방자함을 안 바에는 언책의 직이 어떠한 청선(淸選)인데 감히 사사로움을 꾀하고 벗을 비호하는 밑천으로 삼는단 말입니까. 식견이 전도되었고 뜻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이같은 낭관은 전형(銓衡)의 자리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파직하소서. 이조의 해당 당상 역시 구차히 따른 잘못을 면키 어려우니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며 이르기를,
"사사로움을 좇는 이혜의 죄가 어찌 가석보다 아래이겠는가."
하였다. 김징이 적용한 법률이 적당치 않았다고 하여 인피하였는데, 다음날 옥당이 출사케 하도록 처치하였다.
가석은 성품이 곧고 남에게 자랑하지 않았으나 고집스런 병통이 있었다. 일찍이 부여(扶餘)를 맡아 다스릴 때 정령이 가혹하여 부하와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잃었는데, 드디어 비방하는 의논이 크게 일어나 탐관오리로 지목되었다. 본직에 있으면서는 또 호서의 수령들과 다투어 소문이 더욱 비등했다. 이혜가 체직시켜 불러들이고자 하여 힘껏 청해서 대각의 의망(擬望)에 주의했는데, 이익이 그 뜻을 탐지하고는 김징에게 누설하였다. 김징은 평소 가석의 집안과 원만하지 못했으므로 동료와 의논하지도 않은 채 이 논계를 했던 것이다.
지평 이규진(李奎鎭)은 김징이 간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했고, 김징도 역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그러나 가석은 이 때문에 오랫동안 청망(淸望)이 막혔고, 이혜 또한 전조(銓曹)에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고 급제(及第) 한오상(韓五相)에게 참하(參下)의 직을 증직했다. 오상은 어려서부터 장인이었던 고 정승 이경여(李敬輿)에게 배웠다. 사람됨이 단아했고 또 문재(文才)가 있었으므로 당시 무리들에게 크게 존중을 받았다. 나이 30세가 된 뒤 임진년033) 의 증광 문과에서 급제하였는데, 전시를 보기 전에 연달아 부모의 상을 만나 상복을 입는 중에 죽었다. 이때 이르러 승지 남구만이 상소하여 문관직을 추증하기를 청했는데,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기록할 만한 공은 없었지만 이런 은혜를 베푸는 날을 당해서 혹 문관직을 추증하는 것도 조그마한 위로는 될 것입니다."
하여, 상이 이 명을 했다. 뒤에 시강원 설서(說書)를 추증했다.
12월 4일 무진
상이 하교하였다.
"시골집은 거칠고 써늘하므로 노인의 질병이 쉽게 낫지 않을까 내 매우 염려된다. 어의 권유(權愉)로 하여금 약품을 가지고 우상이 있는 곳으로 가 머물면서 구호하게 하라. 그리고 돌아와서는 복명하라."
좌부승지 오두인이 우상 송시열이 있는 곳으로부터 돌아와서 아뢰었다.
"신이 성교를 송시열에게 전유하였더니, 시열이 ‘성상의 자애로운 전교를 받들건대, 하찮은 사정을 굽어살펴서 소원을 들어주셨으므로, 신은 감격한 나머지 죽을 지경입니다. 즉시 대궐 아래로 달려가 지은 죄를 사과해야 하겠습니다만, 질병이 깊게 고질이 되어 있으니 형편상 조금 지체하면서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을 판중추부사 겸영경연 세자부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좌윤으로, 이하(李夏)를 문학으로 삼았다.
수익은 바로 고 정승 유성룡(柳成龍)의 외손이다. 어려서 등제하여 청직과 화직을 두루 거쳤다. 명망이 없지는 않았으나, 당론(黨論)에 병통이 있었다. 소를 올려 조경(趙絅)과 권시(權諰) 등을 구원하다가 여론에 죄를 얻어 드디어 청반(淸班)에 막히게 되었는데, 이때 이르러 이 직책에 제수된 것이다.
좌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체직을 빌었는데, 상이 우대하는 내용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고 어의로 하여금 간병하게 했다.
12월 5일 기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고 《심경》을 강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서(恕)’ 자의 뜻을 설명하는 것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성학(聖學)에 힘쓰시어 세자에게 솔선하신다면 ‘자신의 성의를 다하는 서[盡己之恕]’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시면서 ‘내가 이미 이와 같이 했으니, 너도 역시 이와 같이 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서로 게으름을 피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미소지었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이 오랫동안 시강을 못하다가 지난번 서연에 들었더니, 세자께서 이미 장성하셨고 글을 설명할 즈음에도 문리가 환하였으므로, 매우 기쁘고 다행스러웠습니다."
하니, 예조 판서 조복양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듣자니, 세자께서 새를 길렀는데 새끼새가 죽자 묻어 주었으며,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낙죽(酪粥)을 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을 미루어 넓혀 나간다면 성인과의 차이가 멀지 않을 것이니, 누군들 기쁨이 솟지 않겠습니까. 이런 타고난 자질로 학문에 힘쓴다면 성인의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이 일단 생각이 있는 이상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 태종(唐太宗)이 삼대(三代)에 비한다면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오히려 다스려진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위징(魏徵)을 등용한 효과였습니다. 그리고 당 현종(唐玄宗)이 나중에 나라를 전복시켰으나 처음에 명군(明君)이라고 불렸던 것은 한휴(韓休)를 정승으로 임명하고 얼굴이 마른다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034) . 외간에서 말하기를 날씨가 이렇게 차가운데 전하께서 금원에서 활쏘기를 하다가 감기에 걸렸다고들 하는데, 정말로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병에 걸리겠는가. 활쏘기를 하다가 감기에 걸렸다고 말하는 것은 그른 듯하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이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활쏘기는 바로 송 효종(宋孝宗)이 했던 목마(木馬)의 뜻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정을 닦는 일이 없이 한갓 이 마음만을 가진다면 이익이 없습니다. 만약 이로 인하여 성상의 몸이 상하게 된다면 어찌 매우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삼명일(三名日)에 진상하는 방물(方物)에 대해서 양 대비전 외에는 모두 정지하고, 탄일(誕日) 방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정지하라고 명했다.
고 유신 문절공(文節公) 유희춘(柳希春)의 담양 서원(潭陽書院),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안성 서원(安城書院), 고 상신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과 문정공(文定公) 김상헌(金尙憲) 등의 정주 서원(定州書院)에 아울러 사액하라 명하고, 고 상 조익(趙翼)의 광주 사우(廣州祠宇)에도 역시 사액을 허락하였는데, 모두 좌참찬 송준길의 청 때문이었다.
고 현감 홍백순(洪百順)의 마을에 정표하라 명하고, 이어서 당상의 직을 추증하였다.
백순은 젊어서부터 처사 송익필(宋翼弼)을 스승으로 섬기고 문원공 김장생을 공경으로 섬겼다. 성품이 사정에 어두웠으나 학문에 뜻을 두었고 효행이 있었다. 인조조 때 특별히 6품으로 올라가 의령 현감(宜寧縣監)에 제수되었다가 얼마되지 않아 파직되어 돌아왔는데, 집에서 늙어 죽었다. 이때 이르러 송준길이 또 건의하여 이 명이 있었다.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성을 넘던 사람을 잡아서 참수하여 조리돌리자고 청했는데, 상이 그 말을 따랐다. 장차 형을 집행하려고 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가 듣고 크게 놀라 사람을 시켜 필원에게 말하기를 "급히 계사를 올려 정지시키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차자를 올려 논하겠소." 하니, 필원이 부득이하여 계청해서 계복을 기다린 뒤에 시행하기로 하였다. 송준길이 경연에서 필원의 잘못을 지적하여 아뢰기를,
"예전 사람은 죽일 사람 가운데서도 오히려 살려줄 방도를 찾았는데, 지금 필원은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오히려 죽이려고 하니, 이 사람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살피소서."
하였다.
12월 7일 신미
이유(李秞)를 집의로, 조원기(趙遠期)를 지평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사서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글뜻을 진강한 다음 이어 아뢰기를,
"희로애락이 중도에 맞지 않음은 진실로 학자의 병통입니다만, 임금이 중도를 잃게 되면 그 병통이 더욱 큰 것입니다. 천지를 자리잡게 하고 만물을 기름은 중화(中和)의 효험입니다. 삼대 이전에는 성현의 임금이 몸소 집안에서 행하여 ‘자리잡게 하고 기르는’ 효험이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성현의 자질을 지니셨으니 ‘자리잡게 하고 기르는’ 공에 대해 어찌 바랄 수 없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스럽지 않고 현명한 임금이 원망스럽다.’ 하였는데, 현명한 임금은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자질을 지녔는데도 하지 않으므로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정초군은 이전부터 2백 명으로써 번을 서게 했습니다. 지금 만약 4, 5백 명으로 늘려 궁성 각곳을 파수하게 하려면 여러 위문의 수직군은 포(布)를 거두어 고용해서 세워야 됩니다."
하자, 영상 정태화가 행할 만하다 하고 송준길도 역시 찬성하니, 상이 계획을 세워 시행하라고 명했다. 정언 민종도가 아뢰기를,
"대관이 인혐할 경우 일시에 처치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그저께 헌부와 간원의 관원이 잇따라 인피했는데, 옥당의 관원이 한 명만 집어내어 처치하고 나머지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하루를 지나 비로소 처치하였으니, 이는 이전엔 없던 일입니다. 일반적 규례에 어긋나고 뒤폐단과 관련이 되니, 그 날의 참차관(參箚官) 김만중·민시중·이단하 등을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응교 남이성, 교리 이규령 등이 입시하고 있다가 이 논핵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는 감히 태연히 있지 못하여 먼저 물러나려 했는데, 종도가 일의 체모에 손상이 있다는 이유로 또 추고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지평 홍수하는 그의 관인(館人)이 억지로 도판(屠販)을 늘려 설치하게 했기 때문에 역시 종도에게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때 집의 김징이 가장 먼저 인피했기 때문에 옥당이 처치하여 차자를 한창 쓰고 있는 즈음이었는데, 잇따라 많은 관원이 인피하였다. 따라서 일시에 처치하려면 해가 이미 저물었으므로 형세가 밤을 지새울 판이었다. 때문에 앞서의 차자만 그대로 써서 올렸던 것인데, 여론이 규례를 위반했다고 비난했으며, 끝내 논핵을 받아 체직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12월 9일 계유
좌의정 허적(許積)이 또 상소하여 면직을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0일 갑술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사형수들을 초복(初覆)하였다. 의정부·육조·삼사·종친부·중추부·돈령부·의빈부·충훈부의 각 1명과 여섯 승지가 입시하여 한 해의 사형수를 의결하였는데 모두 25명이었다. 시체를 검사받기 위해 일족인 시체의 머리를 잘라 온 김골대(金骨大) 등의 죄에 대해서 영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 일은 매우 흉악 참담하니, 이로써 일족 보인(保人) 제도의 폐단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 본마음이겠습니까. 침해받는 폐단을 면하기 위한 데 불과합니다. 해당 보인이 이미 죽었음을 밝히고 싶은데 멀리까지 운반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으니, 무단히 시체를 자른 것에 비할 것은 아닙니다. 법이 비록 엄하다 하더라도 이는 진실로 불쌍히 여기고 놀라워해야 할 점입니다."
하니, 좌참찬 송준길이 또한 아뢰기를,
"이는 국가의 교화가 밝지 못한 소치이며 관가에서 시체를 파오게 하였으니, 이 사람의 죄는 용서해야 할 바가 있습니다. 또 이 사람은 일족의 폐해를 감당하지 못해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였으니, 이는 조정에서 자책하고 용서해 주어야 마땅할 일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도 이와 같았다. 세 번째 복주(覆奏)함에 이르러 사형을 감하고 그 수령을 파직 추고하도록 상이 명하였다.
12월 13일 정축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삼복(三覆)하였다. 입시한 제신들의 말이 처음의 심리 때와 같아 사형으로 확정된 자가 15명이었다. 남기[木只]의 처 일향(一香)을 죽인 놋쇠[者叱金]의 죄에 대해서는, 상이 투구율(鬪毆律)에 의거하여 사형으로 논죄하라 명하고, 일향이 자기 남편을 가리고 칼에 맞아 죽음으로써 남편이 죽음을 면할 수 있게 했다는 이유로 본도에 다시 조사하여 정려(旌閭)하라고 또 명했다. 호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임인년035) 양전할 때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두 고을이 가장 난잡스러웠습니다. 양주는 이미 다시 양전했는데, 장단은 아직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지금 민정이 모두 다시 양전해 주기를 원하고 있으니 그 소원을 따라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다시 양전하라."
하였다. 부제학 이민적이 아뢰기를,
"옛부터 장법(贓法)을 무겁게 한 것은 민생을 위해서였습니다. 박형의 늙은 어미가 진정하는 말을 올리자 은혜를 미루어 등급을 감해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만, 장법이 점차 무너져가니 법을 집행하는 관리는 마땅히 쟁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양사는 전혀 말 한마디 없었으니 무소(武所)에 나아가 참석한 인원 이외에는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한참 만에야 따랐다. 장차 파하여 나가려 할 때 상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양사를 체차하는 일을 비록 이미 윤허하였지만, 상·하번(上下番)이 함께 들어 왔는데 민적 혼자만 앞으로 나와, 애초에는 생각한 바를 아뢰겠다고 말머리를 꺼냈다가 끝내는 많은 관리를 모두 체직하라고 말을 맺었다. 사체로 헤아려 보건대 매우 마땅치 않다. 옥당의 경우는 양사와 달라서 혼자 아뢰는 것으로 많은 관리를 모두 체직시킬 수는 없다. 내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 양사의 많은 관리를 모두 체직하게 되면, 뒤폐단과도 관련된다. 체차하라는 전지는 받들지 말라."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민적의 일은 과연 체례에 어긋난 것입니다만, 그가 물러가기 전에 상께서 체례를 가지고 하유하여 내려진 명을 환수하셨다면 괜찮으나, 이미 물러간 후에 즉시 회수하도록 하시는 것은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좌승지 김우형(金宇亨)이 아뢰기를,
"민적은 체례에 어긋난 이유로 추고하되, 내리신 명을 환수함은 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추고할 일이겠는가. 비록 체차하라는 전지를 봉입(捧入)하기는 해도 이후로는 옥당이 절대로 이를 관례로 삼지 않아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12월 14일 무인
송준길(宋浚吉)을 세자 찬선으로, 민희(閔熙)를 호조 참판으로, 강호(姜鎬)를 호조 참의로, 권격(權格)을 집의로, 이숙(李䎘)을 보덕으로, 정재숭(鄭載嵩)을 교리로, 민시중(閔蓍重)을 부교리로, 김만중(金萬重)을 수찬으로, 정석(鄭晳)을 부수찬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이조 정랑 겸 문학으로, 이훤(李藼)을 검열로 삼았다.
준길이 일찍이 시강원 찬선의 직을 띠고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상에게 아뢰기를 "찬선의 직책은 궁관(宮官)인데 자급이 빈객(賓客)보다 위에 있습니다. 일의 체모에 있어 온당하지 못하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세자 찬선으로 바꾸어 비답을 내리라고 명했다. 예조 판서 조복양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판부사 송시열이 소를 올려 복수의 뜻을 은미하게 드러냈는데, 그 대략에,
"선조 대왕께서 일찍이 ‘조정에서 만약 사사로움만 없앤다면 풍신수길의 머리를 휘하에 가져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약 성조(聖祖)께서 일신의 사사로움을 없애지 않았다면 필시 이 말을 널리 고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군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한 후 반드시 후덕하고 성의있으며 강직하고 공정한 현자를 구하여 뭇 자리에 배치해야, 위로는 임금의 덕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바꿀 수 없는 천리입니다. 주자가 중흥의 사업을 당시 임금에게 바라면서도 그 말은 역시 이러한 데 불과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를 가르치는 말이 깊고도 절실하다. 내 비록 불민하나 마음에 간직하고 가슴에 새겨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은 마음을 편안히 하여 잘 조섭하고 되도록 빨리 들어와 나의 미치지 못하는 점을 도우며 함께 당면한 어려움을 헤쳐나가,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유시를 전달하였다.
12월 15일 기묘
집의 권격이 대각을 겸임하여 상피 관계가 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16일 경진
윤집(尹鏶)을 대사간으로, 박세견(朴世堅)을 사간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집의로, 이하(李夏)를 지평으로, 신정(申晸)을 정언으로, 민점(閔點)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글뜻을 강론하고 지락잠(至樂箴)을 외어 진달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정경세(鄭經世)에게 들으니, 인조 초년에 경세가 옥당에 있을 적에 상께서 강하시는 책 속에 읽는 회수를 세는 서산(書算)이 끼어 있었는데 그 종이에 보푸라기가 일었더라고 합니다. 임금이 이같이 독서하니 큰 경사라고 하며 매양 칭송해 마지않았습니다. 요즈음 밖의 사람들이 상께서 독서를 하신다고 한다는데 사실입니까? 어제는 영부사 이경석이 신에게 이르기를 ‘사형수 재심리 때 입시하니, 살리기 좋아하는 덕이 가득함을 보았다.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개강함도 근일에는 없었던 일이므로 비감에 젖어 눈물이 나왔다.’고 했으니, 이에 인심의 감동을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12월 17일 신사
무과시(武科試) 일소(一所)에 불이 나 문서와 낭청의 방 열두 칸을 태워 훼손하였다. 직숙(直宿) 관리와 군인들이 모두 죄를 받았다. 이때 무과가 남잡(濫雜)하여 낙방한 자가 변을 일으킨 것이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이어 명나라 말기의 일이 언급되어 좌참찬 송준길이 아뢰었다.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036)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037)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사십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판부사 송시열이 강 밖으로부터 들어온 후 대죄하는 소를 올리니, 상이 부드럽게 답하고 사관을 보내 유시를 전달하였다.
12월 19일 계미
상의 기후가 편치 못하여 양심합에 나아가, 의관으로 하여금 들어와 진찰하게 하였다. 도제조 이하가 입시하였는데, 판부사 송시열을 또한 인견하겠다고 명하였다. 상이 시열에게 이르기를,
"갑자기 떠나가 내 매우 서운했는데, 지금 나의 뜻을 몸받아 조리하고 들어왔으니 기쁨이 배나 된다."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신이 지레 나가는 것은 죄가 됨을 본디 알고 있었으나, 신하가 감당할 수 없는 직임을 맡아 녹을 유지하고 자리 지킬 줄만 안다면 이것은 막대한 죄이며 또 나라의 체모에 손상이 있겠기에, 공의에 죄를 얻느니보다는 차라리 신의 일신에 죄를 돌리는 것이 낫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망령되게 행동했던 것인데, 상께서 누차 만류하고자 하는 뜻을 보이셨으므로 감히 바로 떠나지 못하고 또 돌아왔습니다.
신이 비록 다시 머문다 하더라도 달리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없으며, 진달하는 바도 진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위로 제왕으로부터 아래로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닦아야 할 바는 단지 《대학(大學)》뿐입니다. 《대학》에는 삼강령 팔조목(三綱領八條目)이 있는데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도 실상 이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대학의 가르침을 힘써 행하신다면, 이는 신의 말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신을 굳이 머물게 하시더라도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머물게 하는 것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직 헤아려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을 내 모두 이해하였다. 어찌 사정에 어둡다고 여기겠는가. 오직 머물러 있으면서 나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도와야 한다. 이전 상소의 비답 내용도 역시 이 말이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이번에 입시하였으니 어찌 진달할 바가 없겠습니까마는, 옥색을 우러러 보건대 미령한 기색이 있는 듯하니, 지금은 우선 물러갔다가 다시 인대할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삼키며 아뢰기를,
"예전 사람이 군신은 부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군부가 병환을 앓고 계시니, 누가 근심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한창 나이에 어찌 그리 질병이 많으십니까. 혹시 조종께서 부탁한 막중한 책임을 생각지 아니하고 만금과 같은 몸을 가벼이 하시어 그런 것은 아닙니까."
하였다.
12월 21일 을유
정만화(鄭萬和)를 예조 참판으로, 권시(權諰)를 좌윤으로, 홍처량(洪處亮)을 개성 유수로, 박세성(朴世城)을 병조 참의로, 윤비경(尹飛卿)을 병조 참지로, 홍주국(洪柱國) 을 교리로, 최후상(崔後尙)을 지평으로, 송규렴(宋奎濂)을 정언으로, 신명규(申命圭)를 문학으로, 홍만형(洪萬衡)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권시는 상소를 올려 윤선도를 구원했다가 배척받아 오랫동안 폐기되어 있었다. 이때 이르러 송준길이 수용하기를 청했기 때문에 이 직책에 제배된 것인데, 신병을 핑계대고 오지 않았다. 처량은 청요직을 누차 사양해 오다 이 직에 제배됨에 미쳐서는 사은 숙배했다. 만형은 욕심이 적고 단아하였으며 아름다운 문장 솜씨가 있었다.
장령 이광적(李光迪)이 무과 방목(榜目)을 잘못 쓴 일을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직되었다.
판돈녕부사 윤이지(尹履之)가 죽었다. 이지는 고 정승 두수의 손자요, 윤방의 아들이다. 명가의 자손으로 일찌감치 조정의 벼슬에 올라 중외를 출입하여 지위가 높은 품계에까지 올랐으나 사람됨이 매우 경망스러웠다. 이때 이르러 죽으니, 나이가 90세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판돈녕 윤이지가 죽었으므로, 오늘과 내일 조회와 시장을 정지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내일의 정시도 물려 정해야 하는데, 이달 안에는 잇따라 사고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지방의 거자(擧子)들이 일제히 모여 있는 때에 며칠을 물리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대신들과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영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명(明)나라는 과거를 확정한 뒤에는 사고가 있어도 물리지 않고 그대로 시행한다고 하니, 그대로 시행해도 상관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판부사 송시열이 아뢰기를,
"중국의 제도가 과연 영부사가 인용한 바와 같다면 지금의 일을 대처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 권도를 취하여 마땅하게 대처하는 것도, 변화에 대처하는 통의(通義)입니다."
하자, 상이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했다.
12월 22일 병술
정언 김세정(金世鼎)이 박형에게 죄 등급을 낮추어 준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자 따랐다. 새로 급제한 현령 이당규(李堂揆) 등을 논하여 그의 직을 파하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 새로 급제한 민암(閔黯)은 선현을 모욕하였다는 죄로 유벌(儒罰)을 무겁게 받은 적이 있었는데, 계속하여 자기 변명을 하였기 때문에 벌이 풀리어 과거에 응시하였다. 급제하여 문묘에 참배하는 날 성균관에 기숙하는 한두 유생이 의론을 제기해 거명하여 배척하고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장원(壯元) 민홍도(閔弘道)는 민암의 형의 아들인데, 인혐하여 방하(榜下)에 참여하지 않았고, 서문상(徐文尙) 등만 문묘에 참배하였으며, 당규 등은 민암을 위해 예를 행하지 않고 몰려가 상소를 진달하여 그 상황을 고하였다. 이에 공의가 모두들 유생들이 망령되어 그른 짓을 한 것을 탓하였는데 당규 등이 파당에 치우쳐 예를 폐하고 소장을 올려 고소한 것에 대해서도 좋지 않게 여겼다. 간원이 그 죄를 논핵하였는데, 상이 당규 등만을 죄주는 것을 그르다 여겨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 제도 감사로 하여금 열읍에 분부하여, 역에 불응하는 완악한 토호 부민(土豪富民) 외에 감당해 낼 수 없는 빈민과 도망하여 절호(絶戶)된 집 대신으로 침징(侵徵)당하는 인족(隣族)을 일일이 조사해 내고, 각종 적곡(糴穀) 및 제반 신역(身役)을 다 납부하지 못한 것은 모두 똑같이 봉입하지 말도록 하였다가 풍년을 기다려 추후 징수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실로 합당한 일이지만, 만약 잘 구별하지 않으면 필시 허실이 뒤섞이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분부토록 하라."
하였다. 또 나주 목사 박지(朴贄)를 탄핵하기를,
"일찍이 공산(公山) 고을을 맡았을 적에 세미를 창고에 들일 때 근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정은 결국 실상과 틀리게 논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문무과를 베풀어 문과에 정수준(鄭壽俊) 등 9명을 뽑았다.
12월 24일 무자
달이 저성(氐星)의 성좌로 들어갔다.
12월 25일 기축
왕대비 탄일을 진하하고 표리(表裏)를 올렸는데, 권정례(權停禮)로 행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효자가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도에 입각하여 부모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왕대비께서는 성덕이 순수하시어 오로지 예를 따라 하셨으니, 사방의 백성들이 누가 교화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또한 선조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반드시 미망인으로 자처하시어 즐기고 기뻐하신 적이 없으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섬기시는 도리 역시 뜻을 받들어야 하는 것이지 반드시 이목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일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자식이 병날까봐 걱정하는 심려를 위로 끼쳐드리지 않으면서, 덕을 닦고 정사에 힘쓰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보살펴서 선왕의 업을 계술(繼述)함이 바로 자전의 뜻을 크게 위로하는 것이니, 전하의 효도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때로 외간의 기생과 음악을 앞에 불러들여 즐기시면서 밤을 새우신다니, 이는 말단의 행동이며 용잡한 뜻일 뿐만 아니라, 임(任) 사(姒)의 덕과 무(武) 주(周)의 효038) 에 도리어 해가 됩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엄숙하고 깨끗한 곳에다 잡된 기예를 다시 벌려 놓으신다면 《주역》의 풍뇌익(風雷益)괘에 이른바 천선 개과하는 도리039) 가 전혀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를 가르치는 뜻이 여기에까지 이르니, 내 마음에 슬픈 감회가 들어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에 두고 성찰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차하여 광주(廣州)로 돌아가서 성묘하게 해 달라 청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세자께서 어린 나이에 있으니 서연에 나와 강학하는 것이 하루가 급합니다. 모든 관례에 따른 탈품 가운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잠시 정지시킨 바를 모두 권도로 시행하시고, 기신(忌辰)이라 하더라도 그날 외에는 모두 소대를 허락하시어 나날이 새로워지는 집희(緝熙)의 공부가 있도록 하소서. 그리고 사부의 상견례는 시민당(時敏堂)에서 꼭 거행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 지금 머무는 곳에서도 예를 행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빨리 여러 노신들로 하여금 번갈아 들어가 시강하게 하시고, 또 지방에 있는 훌륭한 선비들을 널리 초치하여 경연과 서연을 모시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간절한 정성이 이와 같으므로 내 마땅히 힘써 허락하겠다. 빨리 갔다가 돌아오도록 하라. 동궁의 서연을 여는 법식은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일기가 아직도 차갑고 병의 뿌리가 아직 제거되지 않았으니, 우선 봄날씨가 화창해지길 기다려 차자의 내용대로 변통하겠다. 상견례는 저절로 그 장소가 있는 것이니, 어찌 시민당을 고집하겠는가. 말단의 일은 정원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겠다."
하고, 인하여 해도로 하여금 말을 제공하고 또 제수를 갖추어 제공하라고 명했다.
이조 판서 박장원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장원이, 이정영이 연좌된 것은 잘못 적용된 바로 범한 죄가 없다고 여겨, 서용하라는 은전이 내린 뒤 예조 참판의 말망(末望)에 정영을 의망했는데, 시의(時議)가 즉시 청직에 의망한 것은 그르다고 했다. 그래서 이 사직을 한 것이었다.
12월 26일 경인
도목 대정(都目大政)을 하였다. 이때 판서 박장원과 참의 이익이, 이정영의 일로 스스로 불안하게 여겨 모두 나아오지 않았는데, 상이 추고를 명하고 패초하여 정사를 열었다.
김만균(金萬均)을 집의로, 김만중(金萬重)을 헌납으로, 윤진(尹搢)을 정언으로, 소두산(蘇斗山)을 장령으로, 민시중(閔蓍重)을 교리로, 이선(李選)을 수찬으로 삼았다.
두산은 당시 장성(長城)의 근무지에 있었는데, 대신이 ‘맞이하고 보내는 데 폐단이 있다.’는 이유로 아뢰어서 체차하고 잉임시켰다.
12월 27일 신묘
홍처대(洪處大)를 호조 참의로, 김만균(金萬均)을 부교리로, 김징(金澄)을 집의로, 정재숭(鄭載嵩)을 수찬으로 삼았다.
진선 박세채(朴世采)가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의 비천한 계책은, 오직 은인 자중하면서 스스로의 분수를 지켜야만, 거의 본분을 잃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나라의 체면을 높이고 특이한 대우에 보답하는 길이 된다고 여기는 바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고 빨리 올라와 직임을 살피라고 명했다.
원양 부사 이석(李晳)이 상소하여 본부의 폐단을 진달했는데, 비국에 내려 의논해서 처리하라고 명했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소를 진달하여 죄를 청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복양이 대제학으로서 정시(庭試)를 관장하였는데, 태학의 과시(課試) 제목으로 출제했던 것을 다시 출제하여 물의가 비등하자 스스로 허물을 인책한 것이다. 후에 결국 논핵을 당하였다.
계성묘(啓聖廟)040) 를 건립하라고 명하였다. 관학 유생 신응징(申應澄) 등이 상소하여, 중국 가정(嘉靖)041) 때 이미 행한 제도에 의거해 계성묘를 별도로 세워 숙량흘(叔梁紇)을 모시되, 안무유(顔無繇)·증점(曾點)·공리(孔鯉)·맹손씨(孟孫氏)를 배향하고, 정향(程珦)·주송(朱松)·채원정(蔡元定) 및 주렴계(周濂溪)의 아버지 보성(輔成), 장횡거(張橫渠)의 아버지 적(迪)을 종사하고, 또 귀산(龜山) 양시(楊時),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 연평(延平) 이동(李侗)을 양무(兩廡)에 종사하도록 청하여, 사안을 예조에 내렸었다. 이때 이르러 판서 조복양이 복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나름대로 생각건대, 학교를 설치한 까닭은 모두 인륜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안자·증자·자사의 부자는 위차(位次)가 뒤바뀌어 있으니, 의리로 헤아려 볼 때 크게 온당하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孔)·맹(孟)·주(周)·정(程)·장(張)·주(朱)의 아버지들이 모두 배향되지 않은 일은, 성현을 높이 받들되 근본을 미루어 공에 보답하는 뜻이 더욱 아닙니다. 중국에서 이미 시행했으니, 지금 유생들의 소에 의거하여 별도로 계성묘를 설립하신다면 진실로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채원정(蔡元定)의 학문으로는, 단지 훌륭한 자식 때문에 계성묘에 향사된다는 것이 온당하지 않으니, 원정과 침(沈) 부자가 각각 동·서무(東西廡)에 거하게 한다면 위차가 곤란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양시(楊時) 이하 세 현인의 도덕은 유생들의 상소에서 갖추어 진달했는데, 양시의 경우는 홍치(弘治) 연간에 이미 문묘에 배향되었으므로 진실로 의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나종언과 이동의 경우는 웅거비(熊去非)의 논에서 함께 종사하지 않은 것을 한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동은 주자가 이미 창주(滄洲)의 사우에 모셨으니, 마땅히 종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들은 유생들이 상소에서 아뢴 내용 이외에 또 설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사전(祀典)은 바로 중국의 제도를 따라 모방한 것인데, 가정(嘉靖) 연간에 태학사(太學士) 장부경(張孚敬)이 유신 요수(姚燧)·오침(吳沈)·하인(夏寅)·구준(丘濬) 등이 논한 바를 취하여, 공자를 지성선사(至聖先師)라고 바꾸어 칭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배(四陪)[사배(四配)]를 복성(復聖), 종성(宗聖), 술성(述聖), 아성(亞聖)이라 칭하고, 십철(十哲) 및 문제자를 모두 선현(先賢)이라 칭하고, 좌구명(左丘明) 이하는 모두 선유(先儒)라 칭하고, 대성전(大聖殿)을 선사묘(先師廟)라고 칭하였습니다. 오침의 설에 말하기를 ‘부자는 신하였다. 살아 계실 때 왕의 작위가 없었는데, 죽어서 왕으로 시호를 붙이는 것이 옳겠는가. 부자께서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을 것이다.」고 했는데, 신하로서 왕이라고 하니 바른 이름이겠는가. 부자께서 병이 들었을 때 자로가 문인을 시켜 가신이 되게 하였는데, 부자가 꾸짖었다. 대저 가신이 없는데 있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거늘, 왕이 아닌데 왕이라고 칭해서야 되겠는가. 부자의 덕택은 당시에는 베풀어지지 않았으나 그 가르침은 참으로 만세에 드리워졌으니, 왕이라는 귀한 칭호로 기리는 것보다는 스승이라는 존호로 섬기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준은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난 이래로 부자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었으니, 어찌 한 가지 말이나 한 가지 행실의 선함으로써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내려 시호를 정할 수 있겠는가. 오직 「선사공자(先師孔子)」라고 하는 것이, 성인께서 만세토록 존숭을 받는 이유는 도(道) 때문이지 작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의논들은 모두 근거가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선정신 조헌(趙憲)도 역시 말하기를 ‘가정(嘉靖) 연간에 천년 동안 잘못되어 오던 것을 한 번 바로잡았으나, 우리 나라는 비루한 습속을 오래도록 지켜오고 있다. 아마도 의논하여 고쳐야 할 듯하다.’고 했습니다. 다만 선정신 이황(李滉)은 말하기를 ‘성인의 덕은 비록 봉작으로 덜고 보탤 수 없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정·주와 같은 대현도 이론이 없었으니, 지금 경솔하게 바꾸는 것은 온당하지 못할 듯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상의 두 가지 설에서 절충해야 될 듯합니다.
신들이 또 선유의 논을 가지고 전기를 참고해 보니, 공백료(公伯寮)는 자로를 참소하여 공자를 저해했고, 순황(筍況)은 성악설을 주장하여 자사와 맹자를 헐뜯었습니다. 그리고 마융(馬融)은 탐욕을 부리다 관직에서 면직되었는데 송(頌)을 지어 양기(梁冀)를 찬미했고, 양기를 위하여 주문(奏文)을 기초해 충신 이고(李固)를 죽게 했습니다. 가규(賈逵)는 송을 지어 올려 낭관이 되었는데 도참설을 억지로 끌어다 대어 현귀해졌으며, 왕필(王弼)은 청담(淸談)을 제창하여 진(晋)나라 왕실을 어지럽혔고, 주석을 낸 《역(易)》도 노(老) 장(莊)을 위주로 기술한 것이었습니다. 하휴(何休)의 《춘추해고(春秋解詁)》는 주(周)나라를 내치고 노(魯)나라를 왕으로 한 것이었으며, 또 《풍각(風角)》 따위의 책을 주석내 《효경(孝經)》과 《논어(論語)》의 반열에 두었습니다. 대성(戴聖)에 대해서는 선유가 ‘애비인 그 자신은 장리(贓吏)가 되었고 그 자식은 도적의 무리가 되었으니, 세상의 귀감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왕숙(王肅)은 진(晋)나라의 세신(世臣)이었는데 사마가(司馬家)의 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예(杜預)는 단지 《좌씨집해(左氏集解)》만 있을 뿐 칭할 만한 큰 절개는 없는데, 혹을 떼버리겠다는 말로 인하여 강릉(江陵)의 사람들을 모두 죽였습니다042) . 그리고 오징(吳澄)은 출처가 바르지 않았으며 그 학문은 또 불교의 학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하자를 면할 수 없으니 묘정에 배향하여 후세의 취향을 의혹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후창(后蒼)은 한(漢)나라 초기에 《곡대례(曲臺禮)》 수만 언을 지었으니, 《예기》가 후세에 전해진 것은 대체로 그의 공로입니다. 그리고 왕통(王通)은 정자가 평하기를 ‘덕을 숨기고 있던 군자였다.’고 했는데, 그 학문의 정수한 곳을 논할 경우 순자나 양웅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속경(續經)》과 같은 유는 모두 그의 작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자도 평하기를 ‘그 학문의 정도간측(精到懇惻)한 곳은 한유도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호원(胡瑗)은 체용(體用)의 학문을 창도하고 학교의 법제를 크게 밝혀, 경의(經義)가 어두워지지 않게 하고 사도(師道)가 전해지게 했습니다. 설선(薛瑄)은 학문이 성을 회복하는 데에 근본을 두어 행실이 이미 정대했으며, 호거인(胡居仁)은 정자와 주자를 따라 지키면서 침잠하고 독실하여 홍무(洪武) 이후의 선비들 가운데 그 학문이 가장 순정하다고 일컬어집니다. 그러니 이들을 묘정에 추가로 배향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중국의 올리고 내치는 제도를 한결같이 따라 거행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제도 가운데에도 또한 모두 따르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정현(鄭玄)·정중(鄭衆)·복건(服虔)·노식(盧植)·범녕(范甯)은, 정민정이 의논에서 말하기를 ‘비록 잘못이 없기는 하지만 그들의 논저는 아직 충분히 성인의 학문을 발명하지 못하였다. 거원(蘧瑗)과 임방(任放)은 부자에게 비록 칭찬을 받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공자 문하의 제자가 아니었으니, 이들은 모두 묘정에서 내치고 그들의 마을에서 제사지내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름대로 생각건대, 정현 등 5명은 학문의 정심이 비록 송유(宋儒)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진(秦)의 분서(焚書)를 거친 나머지에서 애써 주워모아 전문적으로 강습하여 세상에 전했으니, 그 공이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또 제사지낼 수 있는 고향도 없으니, 지금 갑자기 의논하여 종사를 폐지하기는 어렵겠습니다. 거원과 임방은 만력(萬曆) 연간에 다시 성묘에 종사되었으며, 게다가 임방의 근본을 탐색하려는 질문은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았고043) , 거원의 허물을 적게 하려고 하고 있다는 대답은 성인에게서 칭찬을 받았으니044) , 더욱이 종사를 폐지할 수 없겠습니다.
진재(奏再)와 안하(顔何)는 《가어(家語)》의 제자에 관한 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나, 《사기(史記)》에서는 이 두 사람을 많이 수록하고 있습니다. 《가어》와 《사기》는 모두 고서인데, 그 글자나 내용의 오류는 어느 것이 바르고 그른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의심스럽다고 없애기보다는 의심스러운 채 남겨두는 것이 더 온당할 것입니다.
신정(申棖)과 신당(申黨)은 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註疏)》에 이르기를, ‘신정은 공자의 제자인데, 《가어》에는 신속(申續)으로 되어 있고 《사기》에는 신정(申棖)으로 되어 있다.’고 했으니, 그 실제로는 한 사람이므로 지금은 마땅히 신당은 없애고 신정만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
유향(劉向)의 경우에 있어서는, 정민정이 그가 돈을 사사로이 주조하여 죄를 받았다고 배척했는데, 돈을 주조한 일은 그의 젊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예로부터 위대한 현인들도 초년에 도가나 불가에 빠졌던 잘못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 일이 어찌 유향의 깊은 허물이 되겠습니까. 민정이 또 유향이 지은 《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이 술수의 학에 치우쳤다고 비판했는데, 재이(災異)의 학에 치우친 것은 한대(漢代) 유학자들의 공통적 병폐였습니다. 하물며 유향은 재이의 근본을 미루어 임금의 뜻을 깨우치고자 했으니, 이것을 가지고 유향을 죄줄 수는 없을 듯합니다.
구양수(歐陽修)는 한유를 이어 일어나 문장과 학식으로 송의 명신이 되었는데, 주자가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했습니다. 장부경(張孚敬)이 기어이 구양수를 종사하고자 한 것은, 대체로 복의(濮議)가 장부경 자신들의 간사함을 부릴 수 있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구양수를 추존한 것이었습니다만045) , 진실로 사사로움을 따른 장부경으로 인하여 구양수의 허물을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양수를 종사하는 데에는 또한 후세의 논란이 없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온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진헌장(陳獻章)과 같은 사람들은 그 학문이 모두 이단에 빠졌으니, 모두 거절하여 물리쳐야 할 대상들입니다. 어떻게 종사하는 데에 함께 참여시켜 논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또 한 가지 설이 있습니다. 맹자가 돌아가신 이래로 성인의 도가 전해지지 않다가, 주(周)·정(程)·장(張) 등 여러 대현들이 전해오지 않던 통서를 얻어 지나간 성인을 계승하여 후학들을 열어주었는데, 주자가 염락(濂洛)의 바른 전수를 합치고 수사(洙泗)의 실추된 통서를 이어 집대성했으니, 좌구명 이하 여러 유자들과 비교할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몰의 선후 때문에 그들의 아랫자리에 있으니, 참으로 매우 분별이 없는 것입니다. 자사와 맹자가 무엇 때문에 칠십 제자들의 앞자리를 차지한 채 안자나 증자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입니까. 성묘의 위차는 도덕으로 정해야 하는 것이지 그 세대의 선후로 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장·정·주 등 여러 대현을 전 위에 올려 사배(四陪)[사배(四配)]의 다음에 거하게 하신다면 진실로 이치에 부합될 것입니다.
신들이 또 살펴보건대, 면재(勉齋) 황간(黃幹)은 주자의 제자 가운데 도를 가장 잘 전했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주자 행장을 갖추어 기술한 것으로 볼 때 스승의 도를 깊이 얻었음을 알 수 있고, 《의례통해(儀禮通解)》를 이어 완성한 것으로 볼 때 스승의 사업을 잘 이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성현의 전해오는 도통을 서술할 때 황간을 주자의 직전으로 삼았으며, 송나라의 유자 웅거비(熊去非)와 동승서(董承敍)도 모두 종사되지 않은 것을 한탄했으니, 이것 또한 흠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이때 가정 연간에 이미 이루어진 제도를 모방하고 성묘(聖廟)의 미진한 전례(典禮)를 아울러 거행한다면, 제사의 의식에 있어 거의 유감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다만 사체가 막중하니, 대신 및 재야의 여러 유신들과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부사 이경석이 의논 드리기를,
"지금 성균관 유생들이 성현을 높이자고 청한 소는 의도가 아름다우니 성대한 세상의 볼 만한 일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주(周)나라는 아득한 옛날이고 신은 식견이 몹시 어둡습니다. 이같이 중요한 전례는 늙은이가 감히 가볍게 의논할 바가 결코 아니니, 여러 대신과 유현들에게 하문하시어 처리하소서."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의논 드리기를,
"신은 우리 나라 문묘의 예는 중국이 정한 제도를 한결같이 따라 지금까지 준수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명나라 때에 이미 강정을 거쳤으니 시간의 거리를 막론하고 모두 모방하여 시행해야겠습니다마는, 우리 나라에서 시작하여 새로이 늘리고 줄이거나 배향하고 배향하지 않는 데에 있어서는 또한 불가한 점이 없지 않겠습니까. 오직 여러 대신과 유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판부사 정치화가 의논 드리기를,
"우리 나라의 문묘는 중국에서 정한 법식을 한결같이 따랐는데 지금에 와서 옛것을 바꾸어 배향을 새로 늘리고 위차를 개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하여야 합니다."
하고, 판부사 송시열이 의논 드리기를,
"성묘의 제도를 감하고 더하거나 답습하고 개혁하는 것을 단지 중국의 전례(典禮)와 선유들의 정론을 따른다면 허물이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위패를 올리고 내리는 일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면 원(元)나라의 허형(許衡)에 대해서도 선정(先正)의 논의가 있었는데 예관이 끝내 거론하지 않았으니, 시세상 불가한 점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송조(宋朝) 종묘의 제도는 시속을 따라서 옛스럽지 못함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자의 의도는 ‘우선 심하게 사리에 어긋나는 것을 조금 변통시키고 훗날 부흥한 뒤에 오래된 오류를 바로잡아 왕가의 법을 완성시키기를 기다린다면 또한 매우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일도 성상께서 역량과 사세가 어떠한지를 스스로 헤아리심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일에는 완급이 있으니 제례 작악(制禮作樂)하는 등의 일에는 아직 겨를이 없다고 여기신다면, 지금 임시로 멈추어 보류하여 후일을 기다려야 하고, 혹 그렇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소소하게 변통하는 이러한 일이라도 예관의 의론을 좇아 선비들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것도 역시 한 방법입니다."
하고, 찬선 송준길이 의논 드리기를,
"선비들의 상소와 예관의 계사는 모두 억설이 아니고 각기 근거가 있습니다. 조정이 예의를 닦아 밝혀 유학을 더욱 중시하는 도리에 있어 진실로 마음을 더 쓰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의견으로는, 계성묘의 제도는 바로 중국에서 이미 행한 것으로서 그 의도가 나름대로 좋고, 이연평(李延平)의 종사(從祀)는 바로 주부자(朱夫子)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어서 그 뜻이 괜한 것이 아니니, 이 두 일은 더욱 빨리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예제(禮制)는 서서히 더욱 상량하시어 십분 타당함을 구하심이 옳을 듯합니다. 다만, 중국의 계성묘에는 주렴계와 장횡거의 부친도 과연 정(程)·주(朱) 부친의 대열에 끼었는지요? 그 두 사람의 사적과 중국에서 이미 행한 의전을 다시 자세하게 상고하여 처리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비로소 여러 의논에 의거하여 계성묘 한 건을 우선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후에 시세가 여의치 않아 중지되었다.
정초청(精抄廳)을 옛 병조 자리에 설치하였다. 판서가 주관하고 다른 당상은 관여하지 못하도록 명했다.
12월 28일 임진
특별 유지로 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윤원거(尹元擧)·이상(李翔)·신석번(申碩蕃)·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송기후(宋基厚) 등을 부르고, 본도의 감사들로 하여금 올라올 때 말을 제공하게 했다. 송준길의 말로 인한 것이었는데, 뒤에 모두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문거는 담박하고 겸손한 절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선거는 유림의 중망을 지니고 있었다. 윤증과 세채는 모두 학행으로 성대한 이름이 있었으며, 석번은 영남에 살면서 독서를 잘해 선을 향상시켰다. 이상은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에게서 배웠으며, 원거는 바로 선거의 종형이었다. 기후는 바로 송시열의 당질(堂姪)이었는데, 모두 천거로 인하여 임금의 소명이 항상 끊이지 않았다.
12월 29일 계사
판부사 송시열이 성덕을 닦아 하늘의 재앙에 응하도록 간청하는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오늘날도 혹 마음이 긴장되어 재앙 없애는 방법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지금의 국세가 위급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외의 신민들이 모두 전하께서 깨닫기를 바라고 있는데, 전하께서 정사에 태만함이 여전하고, 곧은 말 듣기를 싫어함이 여전하고, 천변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여전하고, 백성의 폐해를 돌보지 않음이 여전하고, 공도를 없애고 사욕을 기름이 여전하고, 무익한 일을 하여 유익함을 해침이 여전하며, 시정의 폐해가 많아도 바로잡을 의지가 없고, 조정의 기강이 매우 문란해졌어도 진작할 의도가 없으십니다. 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망하기에 충분한데 더구나 그것들이 다 있으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시골에 있을 때 외부 사람이 기생과 악대를 끼고 대궐에 출입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걱정되었기 때문에 이미 앞서 차자에서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들으니 천한 창기 선향(善香)과 요사스러운 무당 보배(保陪) 같은 무리들이 연줄을 타고 출입하는데 다시 막거나 금하지 않는다 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근본을 갉아 먹는 소지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제거하고자 한다면 오직 성학(聖學)을 힘쓰는 데 있으니 성학을 하는 요점은 독서하고 궁리하는 데 불과합니다. 그리하여 선한 것은 따르고 악한 것은 버리어 마음과 몸을 지켜 나가되, 항상 상제와 귀신이 위에서 임하고 주위에서 질정하는 듯이 여기신다면, 엄연하여 지극히 바르고 태연하여 심히 안정되어 천하의 일이 분명해지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차자를 궐 안에 두고 관서에 내리지 않은 채 답하기를,
"아, 재이가 일어나지 않는 때가 있었으리오마는 어찌 오늘날과 같이 자주 일어난 적이 있었겠는가. 이를 생각하면 절로 마음이 써늘해진다. 경의 차자를 보니 면려하고 근심하며 사랑하는 뜻을 애연히 볼 수 있다. 마음에 간직하여 가슴에 새기고 더욱 경계하여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국세가 위태로워 큰 내를 건너는데 나루가 보이지 않는 것보다도 더 급박하다. 그러니 내가 깊이 의지함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깊이 이해하여 부족하고 병통인 점을 보완해 달라.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이때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등이 기생을 끼고 궁중을 출입한다는 말이 외간에 퍼졌고, 요무(妖巫)의 일도 매우 자자하였으므로, 시열이 상차하여 이같이 진달하였다. 후에 등대할 때 또 요무의 일로 말하니, 상이 가두어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무과 전시(武科殿試) 때 대리로 활을 쏘아 준 사람 우석규(禹錫圭)를 율에 따라 죄를 정하였다. 이때 과장이 난잡하여 대리로 활을 쏘아 주거나 대리로 강(講)해 주는 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심지어는 전시에서도 대리로 활을 쏘아 주다가 적발되어 죄를 받은 것이다.
정언 윤진이 바야흐로 추감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30일 갑오
응교 남이성(南二星) 등이 차자를 올려 이조 판서 박장원을 탄핵했다. 이정영을 예조 참판에 의망하여 공의에 비난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장원과 낭청을 체직하라고 청한 것인데, 상이 따르지 않고 모두 중하게 추고하라고 명했다.
집의 김징(金澄), 지평 조원기(趙遠期)·최후상(崔後尙) 등이 정시를 파하라 청하고 또 대제학 조복양과 무과 1시험장의 시관들을 죄주라고 청했는데, 그 계사에 아뢰기를,
"이번 정시는 글 제목을 중복되게 출제하여 나라의 시험을 엄격하지 못하게 했으니, 이는 참으로 이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본정은 비록 다른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일이 매우 잘못되었으니, 복양을 파직하소서.
과거를 베풀어 선비를 뽑는 것은 그 체모가 지극히 엄한 것인데, 이번 정시는 글 제목을 중복되게 출제하여 원근이 떠들썩하고 비방하는 의논이 시끄럽습니다. 나라에서 사람을 취하는 길로는 단지 과거가 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말이 많으니, 지금 만약 그대로 놔둔다면 선비들의 놀라움과 비웃음이 갈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며, 나라의 체면에 있어서도 매우 구차스러울 것입니다. 속히 파방하소서.
지난번 정시 초시에서 무과 1시험장의 응시자들이 두 기술은 합격했는데 시강을 받지도 못한 채 무단히 낙방한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합니다. 그 곡절을 차비관에게 물었더니, 시관이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여 호명관(呼名官)으로 하여금 호명기(呼名記)를 가지고 문 밖에 나가 앉아 스스로 포기하겠느냐는[自不] 따위를 물어 기록해 가지고 들어와 시책(試冊) 안에 등서하게 했다 합니다. 강에 응하는 거자들에게 응강의 여부를 면전에서 묻는 것은 법례이나, 시관들이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여 단지 차비관으로 하여금 밖에 나가 기록하게 하여, 그 사이에서 임의로 조정할 수 있는 폐단이 있게 하였으니, 강도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떨어진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여기에 기인하지 않았다고 할수 없을 것입니다. 그 거조가 매우 놀라우니, 해당 시관들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다. 한번 아뢰자 모두 즉시 따랐다.
판부사 송시열이 상차하여, 새해 첫날 종묘에 친히 전알(展謁)하여 옛 관례를 거행함으로써 성상의 효도를 펴라고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비록 병 때문이었지만 오랫동안 전알하는 예를 폐하여 한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 경의 차자를 보니 진실로 인정과 예의에 합당하다. 다만 생각건대, 나라의 제사에는 재계하는 규례가 절로 있어 왔는데 형세상 미처 주선하지 못했다. 그래서 별도로 배알할까 하는데 아직 날짜를 택하지 못하였다.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때 상이 눈병으로 인해 종묘의 예를 오랫동안 폐하였으므로 식자들이 개탄하였다. 이때 이르러 시열이 차자로 전알하기를 청했는데, 상이 아직 재계하지 못해 삭제(朔祭)를 친히 거행하기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이같이 비답한 것이다. 뒤에 날짜를 택해 세자를 거느리고 종묘에 전알하였다.
시열이 영릉(寧陵)에 사관(祀官)을 갖추도록 윤허하여 추모하는 뜻을 펴라고 또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해가 이미 저물었다. 우선 그냥 넘어가고 한식 때는 배알하겠다."
하고, 인하여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내년 3일 사직과 종묘, 북교(北郊)에 중신을 특별히 파견하여 눈을 비는 제사를 지내라고 명했는데, 역시 판부사 송시열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감찰 조창기(趙昌期)가 만언소를 올려 17조목을 진달하였다. 소가 들어간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 이때 이르러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고 털요를 특별히 하사하여 격려하였다. 창기는 망령되게도 경제 분야에 능력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성격이 한쪽에 치우쳤으며 말도 또한 장황하기만 하고 끝내 실제적인 활용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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