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9권, 현종 5년 1664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10.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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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무자

광해군의 딸이 졸하였다. 【광해는 곧 폐주(廢主)이다.】  상이 호조에 명하여 장례 물품을 넉넉히 주게 하였다.

 

이에 앞서 대사간 남구만(南九萬)이 공안(貢案)을 개정하자고 아뢰자,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전부터 의논하는 이들이 대부분 공안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지금까지 변통하지 못한 것은, 대개 사세가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간신(諫臣)이 이렇게 청원하였습니다.
호조와 예조의 판서, 선혜청 당상, 본사의 유사 당상으로 하여금 회동하여 공안의 각종 원수(元數) 및 국용(國用)으로 정해져 있는 규정에서 토산품이 아닌 것과 시절 소산이 아닌 것으로서 옮겨도 될 만한 것을 계산하여 재삼 익히 강구하여 그 편의 여부를 논한 뒤에 아뢰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밤에 혜성(彗星)이 익성(翼星) 아래에 나타났다.

 

11월 2일 기축

이에 앞서, 훈신(勳臣)이 죽게 되면 국가에서 예장하는 은전이 있었는데 천장하는 때에는 특명이 있지 않으면 당초 돌보아주는 일이 없었다. 이때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申景禛)을 천장하게 되었는데, 충훈부가 전의 특별 분부에 따라 거행할 것을 계청하였다. 이에 장령 이유(李秞)가 아뢰기를,
"전에 비록 특명이 있었지만 이는 한 때의 각별한 은혜에서 나온 일인데 지금 이것을 원용하여 마치 응당 행해야 할 옛 규례처럼 바로 청하였으니, 사체로 보더라도 이러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지금 경기와 호서의 민역이 전과 판이하니, 이런 길이 한번 열리게 되면 뒤폐단을 막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신경진의 집안에 제사가 끊어진 뒤로 괴이한 일이 많이 있어 후사를 세우지 않고 곧바로 이장하는데, 훈부가 제사 주관자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지도 않고서 규정 밖의 이 예를 끌어대어 감히 은전을 청하였으니, 참람하고 외람됨이 심합니다. 충훈부의 해당 당상을 추고하고, 특별 분부에 따라 거행하라는 이전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따르지 않고, 단지 추고하자는 청만 따랐다. 또 아뢰기를,
"아버지를 시해한 것은 곧 극악 대죄로서 일각이라도 목숨을 살려둬서는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충청도 청양현(靑陽縣)에 아버지를 시해한 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남방에서 오는 사람치고 이 얘기를 전해주지 않는 이가 없는데 본도에선 아직껏 계문한 일이 없습니다. 충청 감사 이익한(李翊漢)은 추고하고, 청양 현감 임윤석(任允錫)은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다음날 영상 정태화가 인견 때에 아뢰기를,
"외방의 옥사를 다스리는 체모는, 반드시 죄수가 승복하고 감사가 친히 심문하여 계문한 뒤에 경차관을 내려보냅니다. 옥사가 밝혀지기 전에는 치계할 수 없는 것이 법에 있어 당연하니, 분명하게 조사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조사한 뒤에 처리하라."
하였다.

 

밤에 혜성이 익성 안에 나타났다.

 

11월 3일 경인

이성징(李星徵)을 형조 참의로, 오정일(吳挺一)을 지의금으로, 유여량(柳汝𣛀)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형조의 송사 판결에 대하여 논하고 이어서 이르기를,
"《대전(大典)》에는 껄끄러운 대목이 많이 있다."
하니, 우상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대전》은 그 강령만 기록하였고 《대전속록(大典續錄)》과 《후속록(後續錄)》이 꽤 상세합니다. 그리고 여러 선대의 수교(受敎)를 오래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언하거나 정소(呈訴)하는 자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상고해 내니, 마땅히 손질하여 밝히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여러 선대의 수교를 모두 다 거두어 모아 행할 수 있는지 여부를 구분하고 부표하여 품하라."
하였다. 대사간 남구만이 아뢰기를,
"국가가 인재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천거토록 하는 일을 두었는데, 전부터 특별 추천된 사람에 대해서는 으레 서경(署經)하는 일이 있어 왔습니다. 신이 헌부에 물어보니, 지난해 천거된 사람에 대해 얼마 전에야 서경을 하였다고 하는데 또한 임용된 사람은 없습니다. 이번의 특별 추천이 또 지난해 천거한 것과 똑같은 것으로 끝나게 된다면 애당초 추천하는 일이 없었던 것보다 못합니다. 이조로 하여금 지난해와 올해에 천거된 사람 명단을 가져다가 대신에게 의논하여 등급을 나누어 뽑아내서, 육품에 승진시키든 대간·시종에 임명하든 간에 품하여 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에게 의논하고 어전에서 품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나인 선택 건에 대하여 대간이 연이어 아뢰었는데도 상께서 이토록 고집하고 계십니다. 마땅히 윤허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허한 뒤 혹시 하전(下典)이 부족한 이유로 인해 제대로 시행할 수 없게 되면 안 될 일이기 때문에 우선 허락치 않았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조종조에 양민을 뽑지 않았어도 사령이 부족한 걱정은 없었습니다. 하필 규정 밖의 일을 하여야겠습니까."
하고, 정태화가 또 구만이 아뢴 바를 들어주실 것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부제학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별[星]의 변고가 있은 뒤부터 상께서 두려워하고 성찰하시기는 해도 지금껏 별로 뚜렷이 드러난 일이 없습니다. 크고 작은 일에 대해 십분 강구하여 변통할 여지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각 아문의 둔전은 곧 백년 묵은 고질적 폐단으로서 조종조에는 없던 일입니다. 이것도 이때에 변통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묻기를,
"둔전은 모두 얼마나 있는가?"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훈련 도감 소속이 가장 많은데, 만약 둔전이 없다면 모양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경억이 아뢰기를,
"시험삼아 양지현(陽智縣) 한 고을을 가지고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이 현은 본디 4개 면인데 2개 면이나 둔전에 들어갔기 때문에 고을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밭은 공전(公田)이고 백성은 공민(公民)인데 관가에서 손도 대지 못하고, 농토에서 산출된 것은 필경 아문(衙門)에 모조리 들어가며, 또 그 둔전은 곧 도망한 자들의 소굴입니다. 이것이 고질적 폐단이 되는 까닭입니다."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떠돌이 백성들이 그곳에는 신역이 없음을 유리하게 여기고서 찾아와 의탁합니다만, 그들이 흩어져 가고 나면 반드시 농사짓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구만이 아뢰기를,
"비록 둔전을 폐지하더라도 이미 개간한 전토가 묵게 되는 폐단이 어찌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설령 둔민이 뿔뿔이 흩어져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 나라 백성임엔 변함없으니 어디 간들 농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민폐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도감이 둔전에서 1년에 거두는 것이 얼마인가, 전세(田稅)를 대동미(大同米)로 대신 지급할 때 부족한 수가 얼마인가를 안 뒤에야 바야흐로 변통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이에 의거하여 하라."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각 아문이 은화를 많이 비축하여 쌓아두고 유통시키지 않기 때문에 민간에서 그것을 수은(囚銀)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변통해야 될지는 모르겠으나, 또한 한 곳에 쌓아 두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부터 각 아문으로 하여금 은화를 모으지 말게 하라."
하였다.

 

밤에 혜성이 익수(翼宿) 안에 나타났다.

 

11월 5일 임진

대사간 남구만 등이 아뢰기를,
"영남 해변의 백성은 오직 고기잡기와 소금굽기로 생업을 삼고 있는데, 감영·통영·병영·수영이 해부(海夫)라는 명목의 체문(帖文)을 억지로 발급해 주고는 물선군(物膳軍)에 충정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달마다 물고기를 징수하면서 갖가지로 침해하는데 어선과 염분(塩盆)도 다 그 세금이 있습니다. 4영의 군관이 해변에 드나들면서 서로 징수하고 독촉해대며, 그 본 고을에 대해서는 또 토민(土民)으로서 내게 되는 세금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몸에 이런 이중 삼중의 신역이 있으니 어찌 몹시 원통스럽지 않겠습니까. 좌도의 병영·수영은 또 고기를 잡는 곳에다 점포를 설치하고 해부들이 바치는 어물을 거두어, 가게에 벌려 놓고 앉아 판매하면서 어민들과 이끗을 다투니 참으로 몹시 엉뚱한 일입니다. 만약 엄금하지 않으면 하소연할 데 없는 해변 백성들은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경상도의 감영·병영·통영·수영의 물선군을 모두 혁파하고, 좌도 병영·수영의 점포도 다 금단하여 조금이나마 민폐를 제거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남구만 등이 상차하기를,
"근래에 하늘이 재이로써 경계를 보이시고 조종의 신령이 묵묵히 인도하시니, 우리 전하께서 혁연히 분발하시어 장차 크게 개혁하시고자 널리 신하들을 접견하시며 몸소 폐정에 대해 자문하셨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초 장왕(楚莊王)이 음악을 철폐하고051) 제 위왕(齊威王)이 아 대부(阿大夫)를 사형시킨052)   날인 셈이었으니, 아래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눈을 비비고 관심을 가지고서 태평의 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지 절기가 마침 이즈음에 들었으니 천시와 인사가 서로 어울리는 때인 것입니다. 이에 신들은 구구한 충성심을 억누를 길이 없어 감히 《주역》 가운데 ‘칠일래복(七日來復)’의 뜻을 추론하고 동짓날 신과 버선을 바치는 고례에 비기는 바입니다."
하고, 이어서 복괘(復卦) 육효(六爻)의 뜻을 추론하여 이르기를,
"이 괘의 뜻은 모두가 지극한 가르침이지만, 육오(六五)의 ‘돈복(敦復)’은 전하께서 오늘날 부지런히 행해야 할 것이고, 육삼(六三)의 ‘빈복(頻復)’은 전하께서 오늘날 걱정하여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치고 누가 선(善)을 회복하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만, 혹은 끝내 미혹된 채 회복하지 못하거나 혹 이미 회복하였다가 도로 잃어버렸던 것은, 다만 사욕이 가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비록 선의 실마리를 회복하고 하늘의 마음을 보기는 하였으나 오히려 누적된 폐단을 일소하여 백성의 소망을 크게 위로하지 못하고 계시는 것도, 사사로움을 말끔히 극복하지 못하고 욕심을 모조리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항상 ‘임금이 천하를 먹여 살려 다스리는 것이지, 천하 사람들이 임금 한 사람을 받들어 먹여 살리지 않는다.’는 뜻을 마음에 두고 잊지 않은 뒤에야 육오의 ‘돈복무회(敦復無悔)’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우대하여 답하였다. 이 날이 동짓날이었기 때문에 차자 내용이 이러하였다.

 

개성부에 전염병이 극성하였고, 소의 전염병도 발생하였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6일 계사

동틀 무렵부터 신시(申時)까지 이상한 기운이 끼어 사방이 어두웠다.

 

의영고 직장 성운한(成雲翰)이, 자기네 선산에 조씨(趙氏) 성을 가진 사람이 암장하였는데도 감사가 즉시 처결하지 아니한 일로 인해 격쟁(擊錚)하여 재판에 나아갔다가, 이어 형벌을 받은 뒤에도 그 직책을 그대로 지녔다. 이에 간원이 아뢰기를,
"염치를 잊고 점잖은 사람을 욕되게 했으니, 벼슬하는 이의 반열에 끼워 둘 수 없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운한의 산송(山訟)에 관한 곡직은 그 원고와 피고의 말을 들어보면 즉시 분별할 수 있는데도 경기 감사 이시매(李時楳)는 세 번이나 재판관을 바꾸고 다섯 달 동안이나 질질 끌었습니다. 운한이 격쟁한 뒤에 금부가 해조로 하여금 복계하도록 품처해서 상의 윤허가 내렸는데도 또 석 달이나 지나도록 아직껏 거론치 않고 있으니, 직무를 유기한 것이 형편없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시매의 직을 파면하고 형조의 해당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이경억(李慶億) 등이 상차하기를,
"하늘의 경계가 매우 엄하여 성상께서 두렵게 여기시고 유현(儒賢)을 불러보시는 데 예우하는 뜻이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우니, 중외가 반기고 감동하였는바 누가 경모하지 않겠습니까.
전 집의 윤선거(尹宣擧)는 학술과 재식이 세상의 존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마침 도성에 왔다가 내일 돌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즉시 명지(明旨)를 내려 머물러 기다리게 하고 조용히 대면하시어 자문하신다면, 어찌 크게 도움되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여 해조로 하여금 선거에게 직책을 주고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여 머물러 있도록 하였는데, 호조가 음식물을 보냈더니 선거는 벌써 길을 떠나고 없었다.

 

11월 8일 을미

해미 현감(海美縣監) 최명후(崔鳴後)를 파직하고 그에게 새로 제수한 영장(營將)의 자급을 삭제하였다.
명후는 일찍이 서북의 수령으로 있을 때 탐욕스럽고 패악한 일을 많이 저질렀으므로 간원이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해미 현감은 영장을 겸임하기 때문에 그 가자까지 거두기를 아울러 청하였는데, 네 차례 아뢴 뒤에야 상이 따른 것이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이단상(李端相)의 상소 가운데 "송시열이 더욱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김좌명 형제가 의심을 품고 있는 데서 유래한다."고 말한 것을 이유로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과 함께 상소하여 "신의 직을 삭제하여 공론에 답하고 현인의 진로를 열어 주어 나랏사람에게 사과하소서."라고 청하니, 상이 그 상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만약 유신(儒臣)이 물러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두 신하 때문이라고 한다면 두 신하가 불안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나, 그 상소 내용을 보면 본심을 다 알 수가 있으니, 어찌 이를 지나치게 인혐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속히 나와 직임을 살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9일 병신

이민서(李敏叙)를 헌납으로 삼았다.

 

처음에 장령 이유(李秞)가, 개성부 유생 조석(曺錫) 등이 차례를 돌려가며 모여서 술마신 일의 폐단을 논하고, 또 교수 석지형(石之珩)이 돈많은 상인과 결탁하여 대신 글을 지어주고 뇌물을 받은 일을 탄핵하니, 유수 오정위(吳挺緯)가 장계를 올려 사직하는 한편, 그들을 위해 변명을 하였다. 그러자 이유가 이 때문에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개성 유생이 모여 술을 마시는 폐단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으니, 본부는 일체 금단했어야 하는데도 끝내 금하지 못했고, 또 덩달아 변명까지 해주었으니 이것만도 놀랍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교수 석지형의 일은, 지난날 논계한 뒤 애당초 심문한 일이 없는데도 유수 오정위가 감히 말을 장황히 늘어놓음으로써 구원을 하려고 하니, 사리상 이렇게 해서는 부당합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밤에 혜성이 장수(張宿) 1도(度)에 있었다.

 

11월 10일 정유

제주(濟州)의 시재 어사(試才御史) 윤심(尹深)이 복명하고 유생 제술 및 무사 시재 단자를 올리니, 상이 대제학에게 명해 유생의 시권을 등급매겨 문영후(文榮後)·문징후(文徵後)·고홍진(高弘進) 등 3인을 뽑고 직부전시의 자격을 내렸다. 무재(武才) 시험에 입격한 자 44 인 중에서는 업무(業武) 문창업(文昌業) 등 4인을 뽑고 또한 직부전시의 자격을 내렸다. 그 나머지는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11일 무술

상이 희정당에서 침을 맞았다. 약방의 도제조 이하가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별의 변괴가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별꼬리가 짧아지기는 하였으나 그 형체가 넓고 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은 천하가 다 보는 것 같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천하가 모두 함께 보는 것이긴 하나, 어찌 천하가 함께 보는 것이라고 해서 그 반응이 다른 곳에 떨어지기를 바라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한성부에 좌윤 1인밖에 없는데 판윤 이완(李浣)이 출사치 않고 있습니다. 이완은 이제 나이가 늙었고 또 군병을 조련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본부의 문서 또한 매우 번다하여 겸임하기 어려울 듯하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병조 참의 이원진(李元鎭)은 노쇠하여 출사치 않은 지가 지금 이미 10년이나 되었는데, 언제까지고 그 직책을 비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또한 체차를 명하였다.

 

대사헌 송준길이 교지에 응하여 상소하면서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재변이 거듭되어 성상께서 두려워하고 계시나 천도는 아득하여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개 천심이 임금을 인애하사 재변을 인하여 마음을 가다듬음으로써 치안을 도모하게 하려는 것이니,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경연을 열어 강독하시는 정성이 이미 선왕만큼 열심히 힘쓰지 못하셨고, 그뒤에는 점차 폐지하여 강독하는 일이 전연 없어져 버렸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치고 누가 이것을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또한 감히 즉시 청하지 못한 이유는 성상의 옥체가 안강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건대, 지난 무술년053)   겨울 우리 효종 대왕께서 성체가 미령하여 미처 회복하지 못하신 때에도 일찍이 신들을 불러 대조전(大造殿)의 침실로 끌어들여 조용히 강론하시면서 귀양간 신하까지도 쾌히 불러들이셨습니다. 신은 그날의 일이 생각날 때마다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떨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선왕을 본받아 날마다 유신을 불러 궐내에 초치하고 전하께서는 편한 대로 앉거나 누워 계시면서 들어와 모시는 자로 하여금 경전과 역사를 얘기하게 하거나 고금의 일을 담론하게 하소서. 그러면 환관이나 궁녀들과 더불어 구중궁궐에 깊이 거처하는 것과 비교할 때 그 손익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여러 관아의 공사와 아랫사람들의 상소 등이 적체되지 않는 것이 없어 몇 주일까지 지체되기도 합니다. 약방의 문안에 대한 비답조차 아침이 다 가도록 내리지 않아, 대신으로 하여금 새벽에 들어왔다가 한낮에야 비로소 물러가게 하니, 중외에서 국조 이래 없던 일이라고 서로 수군대고 있습니다. 신은 그 까닭이 어디 있는지 몰라 삼가 민망히 여깁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미 박장원(朴長遠)을 발탁하여 이조 판서에 두었고 또한 이미 정승 후보에 올렸으면, 의당 예로써 대우해야 하는데 갑자기 하찮은 일로 옥리에게 넘기며 조금도 어려워하는 바가 없으니, 중신을 대하는 도리가 이래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리고 정사를 베푸는 데 있어 걸핏하면 사정에 끌리시므로 신이 일찍이 분개하여 탑전에서 개진하였는바, 성심이 기뻐하여 받아들이시는 것 같았는데, 신이 그 뒤에 눈여겨 보았지만 신의 말은 조금도 보람이 없었습니다. 대간이 간혹 어떤 일로 인해 조금이라도 입바른 소리를 하면 전하께서 곧장 노기를 띠시고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말씀까지 하십니다. 이런 상태로 간다면 앞으로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얼마 전에 백성이 노비 문제로 소송을 일으킨 일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갑자기 곤장을 쳐 죽이게 하였으니, 성덕에 얼마나 흠이 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근래 여러 궁가(宮家)가 마구 수탈하여 원한을 맺고 있는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전하께서 심하게 단속을 하시더라도 오히려 고치기 어려울까 두려운 일인데 때로 방조하기도 하여 그 욕심을 이루어줍니다. 전하께서 언제 일찍이 왕자와 부마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은 경우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더구나 그들의 거처와 일용품은 남들보다 훨씬 사치하고 화려하니,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준 복을 길이 누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일을 말하는 신하가 말 때문에 죄를 얻는 것은 성대한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곽제화(郭齊華)·이규령(李奎齡)·조성보(趙聖輔) 등이 모두 언관으로서 죄를 얻어 귀양갔습니다. 이 세 신하의 일은 각기 다르기는 하나 말 때문에 죄를 얻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규령 등은 아직까지 죄인 명부에 있습니다. 송시열은 이 때문에 늘 황송하고 위축된 심정을 품고 사직하는 글조차 감히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심회가 유쾌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신이 길에서 들으니, 전하께서 자책하는 교서를 내리시고 나서 금새 궁녀를 뽑아들이라는 명이 있었는데, 대간이 말씀을 올려 간언을 해도 이를 살피시지 않았다 합니다. 이러하면서도 천심이 기뻐하고 변이가 사라지기를 바라고자 한다면, 또한 뒷걸음질치면서 앞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마침 양기가 회복하는 날인데 천심은 변함이 없고 만물은 회생합니다. 신은 북으로 대궐을 바라보며 온갖 감회에 가슴이 뭉클하여 삼가 구구히 송축하는 정성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하고, 인하여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아, 하늘의 노여움이 매우 심해 변괴가 거듭 일어나는데, 역사책을 상고해봐도 오늘날처럼 심한 경우는 없었다. 이에 놀랍고 두렵기 그지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금 경의 상소를 보니, 말뜻이 간절하고 일깨움이 절실하여 내 매우 기쁘게 여긴다. 소중히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경에게 바라는 것은 단지 하루바삐 경이 태도를 바꾸는 데에 있건만 올라온 상소의 말뜻은 막연하기만 하니, 경은 어찌 이토록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가. 경이 찬성과 함께 선왕에게 인정받고 대우받은 은혜가 어찌 적은 것이겠는가. 병이 조금 낫기를 기다려서 속히 올라와 내 날마다 바라는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밤에 혜성이 외주성(外廚星) 아래 호성(弧星) 동쪽에 나타났다.

 

11월 12일 기해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13일 경자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오정일(吳挺一)을 판윤으로, 홍처후(洪處厚)를 병조 참의로, 윤심(尹深)을 부교리로 삼았다.

 

밤에 혜성이 군시성(軍市星) 동쪽에 나타났다.

 

11월 14일 신축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지난번에 시의를 헤아리지 않고 망령되이 말을 하여 풍파가 크게 일어나게 했습니다. 이에 신은 두문 불출하며 자책하면서 서둘러 죄를 자청하는 글을 올렸는데 자애로운 성상께서 용서하시면서 즉시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의당 연이어 글을 올려 허락해 주시기를 끝까지 바랐어야 하나, 다만 하늘같은 위엄을 자주 범할 수 없었고 또한 시론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감히 성명을 번번이 드러내어 듣는 이를 놀라게 할 수가 없어서, 답답한 가슴을 억누르며 침묵하면서 시일을 보냈습니다.
지금 삼가 들으니, 성명께서 재변을 만나 두려워하시면서 구언(求言)의 교서까지 내리셨다 합니다. 신이 일찍이 보니, 송 효종(宋孝宗) 순희(淳熙) 8년에 천문이 이상하고 이어 겨울 우레까지 발생하였는데, 이때 주자(朱子)가 훈계한 것이 형정(刑政)의 문제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신의 일로 말씀드리자면, 말을 망령되이 하여 조정을 그르친 죄는 끝내 용서할 수가 없는데도 아직까지 견책을 면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형벌이 중도에 맞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다시 병들어 시골에 누워 있는 천한 몸에게 늘 높은 자급과 직책을 띤 채로 한 해를 보내게 하니, 또한 어찌 정사 체모상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빨리 신의 직을 갈아치우시고 이어서 신의 죄를 다스리어 정형을 닦아 밝힘으로써 재앙을 없애는 실마리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또 이르기를,
"속히 태도를 바꾸어 내 날마다 바라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대사간 남구만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이전 도성 감옥 죄인에 대한 판결 문서를 가져다 보니, 그중 살인 죄수 맹호업(孟豪業)이 사형 감면의 은전을 입은 것이 있었는바 신들은 그 점을 삼가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 살인죄는 본디 관대히 용서하는 예가 없으니, 사형을 감면한 명은 실수인 것 같았기 때문에 그 전후 문안을 가져다 상고했습니다. 그랬더니 호업이 손으로 쳐서 정수리를 부쉈고 그로 인해 끝내 죽게 된 것이 취조 문서에 다 적혀 있어 추호도 의심할 만한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껏 목숨으로 보상하지 않은 것만 해도 이미 몹시 형벌의 도리를 잃은 것이거늘, 더구나 되도록 가볍게 논한다는 율문을 다시 적용해서야 되겠습니까.
이 일은 일찍이 대신에게 의논한 것인데, 고 정승 원두표(元斗杓)는 ‘피살자에게 이미 자녀가 없고 늙은 아내만 있는데 그 또한 지금 어디로 간 줄을 모르니, 죽은 자는 그야말로 천하의 불쌍한 귀신이다. 어진 정치를 하는 세상에서는 더욱 분명히 조사하고 죄를 바루어 무궁히 원한을 품게 하지 않아야 된다.’ 하였고, 성상의 분부도 ‘간교한 서리들이 분노로 인하여 이것을 본뜨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경솔히 용서를 의논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그 재판 문서의 글과 평결하신 상의 분부는 그야말로 바꿀 수 없는 단안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어찌 높이거나 낮추거나 하여 살리자는 의논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법조로 하여금 율에 의거 처단하게 하여 상형(常刑)을 바루소서."
하였다. 재차 아뢰자 따랐다. 또 아뢰기를,
"관가의 빚을 일족에게 징수하는 것은 백성을 가장 병들게 하는 정책입니다. 한사람이 범하면 열 집이 재산을 탕진하니 원망하여 울부짖는 정상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진 빚을 족속이 다 갚은 뒤에는 빚을 진 장본인은 편안히 죄를 면하니, 어찌 빚을 진 자는 저 혼자 행운을 누리고 일족만 일방적으로 고통을 겪는단 말입니까.
이 폐단을 개혁하지 않으면 백성은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관가의 빚을 갚지 못하는 자는 그 다과를 헤아려 죽이거나 귀양보내도록 상률(常律)로 정하고 일족에게 징수하는 것은 친부자간 외에는 일체 금단할 것을 길이 법으로 만드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법을 세우는 초기에 잘 조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묘당으로 하여금 나은 방향으로 품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18일 을사

병조 판서 김좌명이 이단상의 상소 때문에 다시 사직소를 올렸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19일 병오

이에 앞서 통제사 김시성(金是聲)이 복어(鰒魚)를 청풍 부원군 집에 보내자 청풍이 그것을 궐내에 바쳤는데, 후임 통제사 정부현(鄭傅賢)이 또 그 일을 답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대사간 남구만 등이 아뢰기를,
"신하가 위에 진상하는 것은 본래 정도가 있으니만큼, 사사로운 길이 한번 열리게 되면 뒤폐단을 막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이 생 복어를 바쳤다는 풍설이 이미 드러난 이상, 국가 체모상 방치한 채 논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청풍 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을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변방의 장수로서 세도 가문을 통하여 물건을 진상한 것은 공법에 있어 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 일로에서 역말을 함부로 징발하여 교대로 실어 수송한 것은 사리로 따져보아 더욱 해괴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전후 통제사 김시성과 정부현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시성만을 파직하고, 부현에 대한 일은 들어주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수원 부사 이수창(李壽昌)은 전후로 부임한 곳마다 다 탐욕 때문에 낭패를 당해 탄핵하는 논의가 대관의 글에 여러번 제기되었는데도 장률(贓律)이 시행되지 않아 추천이 계속되고 있으니, 교활한 장수와 탐오한 관리를 징계시킬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경기 지방의 중진(重鎭)은 더욱 이 사람의 손에 맡길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희정당에서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근래의 상소가 대부분 군정(軍丁)을 충원하느라 어린애까지 침책(侵責)한다고 말하고 있고,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의 계본에도 이 폐단을 개진하였습니다.
신들의 뜻은 기해년에 유계(兪棨)가 품하여 정한 대로 큰 고을은 1백 명, 중간 고을은 50명, 작은 고을은 20명으로 규정을 삼았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그 3분의 1을 감하게 되면 우수리가 있으니, 차라리 큰 고을을 60명, 중간 고을은 30명, 작은 고을은 10명으로 정식을 삼고 관서의 강변 각 고을도 이에 따라 똑같게 수효를 정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라 감사 정만화(鄭萬和)가 폐단을 아뢴 계본에 산간 고을의 작목(作木)을 첫째가는 폐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좌명이 현재 사직소를 올린 상태이므로 상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좌상 홍명하가 좌명을 패초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자,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와 함께 둔전을 혁파할 일에 대해 논하였다. 이완(李浣)과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총융청 소속의 둔전에 들어가 경작하는 사람은 총융청에 노복처럼 복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혁파하게 되면 형세가 매우 불편해집니다."
하고, 이조 참의 이경휘(李慶徽)가 아뢰기를,
"둔전의 폐단은 언급한 지 오래된 일입니다. 지금 만약 혁파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혁파할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도감의 둔전을 먼저 혁파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융청 둔전을 혁파하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의논해서 정하기를 기다린 뒤 한꺼번에 명령을 낼 것이다."
하였다.

 

행 판중추부사 정유성(鄭維城)이 졸하였다. 유성은 인조조에 등제하여 청요직을 역임하고 효종 때에 여러번 승진하여 육경에 이르렀다. 금상 초기에 우상에 임명되었고 이때 와서 졸하니, 나이가 69세였다.
그의 손자 정제현(鄭齊賢)이 효종의 세째 딸 숙휘 공주(淑徽公主)에게 장가들었다. 당시 여러 공주의 저택이 극히 사치하여, 효종이 제현을 위해 저택을 지어주는 데 제도가 매우 크고 화려하였다. 이에 유성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의 손자는 한미한 가문에서 생장하여 일평생 들어가 살 집이 그저 몸을 들여놓을 정도면 족합니다. 15칸을 한도로 해주소서."
하였으나, 효종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뒤 공주를 보면 항상 크고 사치한 것을 경계하였으므로 공주가 궁중에 품하여 70칸을 줄이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속되고 옹졸하여 정승으로서의 공업은 일컬을 만한 게 없었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21일 무신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에 들어갔다.

 

11월 22일 기유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이광적(李光迪)·남이성(南二星)을 지평으로, 윤집(尹鏶)을 병조 참의로, 목겸선(睦兼善)을 참지로 삼았다.

 

대사간 남구만, 사간 이정(李程), 헌납 이민서(李敏叙), 정언 이섬(李暹)이 청대하니,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구만이, 관가에 빚을 진 경우 친부자간 외에 일족에게 침책(侵責)하는 것을 금지시킬 일을 연이어 아뢰니, 상이 따랐다. 구만이 또 아뢰기를,
"저번에 전 집의 이단상(李端相)의 상소에서 유신(儒臣)이 오지 않는 것은 김좌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좌명이 송시열과 좋게 지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나 좌명에게는 별로 시열을 오지 못하게 한 일이 없고, 시열도 좌명 때문에 오지 않을 일이 없으니, 유신이 오지 않는 것이 오로지 좌명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단상의 상소 가운데 이른바 ‘국구(國舅)054)  의 뜻도 반드시 다름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억지로 정한 듯한 감이 있어 글의 표현이 온당치 않습니다. 또 좌명의 상소 가운데 이른바 ‘미루어갈 때 어느 곳에 이르겠는가?’고 한 것은 더욱 놀라운 말입니다. 이른바 ‘어느 곳’이란 것은 지적하는 데가 어느 곳입니까. 이러한 말은 다른 사람에게서 나와도 안 될 일인데 하물며 좌명이 어찌 이 말을 낼 수가 있습니까. 요사이 이 일로 인해 논의가 분분하니 만약 이때에 곡절을 분명하게 진술하지 않는다면 끝내 진정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조정의 시비는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좌명을 파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상평청(常平廳)의 감영·병영·통영·수영에 대한 분조(分糶)에 있어, 일체 국곡(國穀)을 거두어 들이는 예에 따라 그 모곡(耗穀)을 가록(加錄)하는 일과 원곡(元穀)의 이자를 상평청에 이관하는 규정을 모두 혁파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국가에서 서로와 북로를 대하는 태도에 본디 경중이 없습니다. 그런데 함경도는 이미 중신을 보내 과거를 베푼 일이 있고 이어 폐정을 물어보도록 하여 은혜가 백성에게 미친 것도 많습니다. 평안도에도 마찬가지로 중신을 보내 과거를 베풀고 겸하여 민폐를 물어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에 물어 처리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 고을의 세초(歲抄) 때에 한정(閑丁)을 얻지 못해 매양 어린애로 충정하며, 죽었거나 늙어 역을 면제한 경우에도 대신 충정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대개 양민이 각처에 투속하여 그 신역을 모면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은 삼의사(三醫司)의 생도, 교서관의 창준(唱准), 각 아문의 군관, 외방은 감사의 아병(牙兵) 및 병사·수사·영장(營將)·방어사의 군관 등으로 명목이 매우 많습니다.
경외의 양민이 소속된 곳 가운데에서 원래 정원이 있는 곳은 그 정원 이외를 태거하고 원래 정원이 없는 곳은 그 정원을 정하여 투속하는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민서가 아뢰기를,
"무관이 벼슬하는 것은 다 뇌물을 돌리는 짓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탄핵한 글의 먹이 마르기도 전에 비국에서 다시 추천합니다. 수원 부사 이수창(李壽昌)은 사람들이 다 ‘큰 탐욕꾼 큰 도적’이라고 말하는데 상께서 대관(臺官)의 아룀을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은 성상의 의중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무관들만 탐욕스럽다고 말한다면 이는 통하지 않는 논의이다. 근래 대간은 남무(南武)055)  만을 거론하지만, 문관에도 탐욕스러운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인데 이것은 전혀 거론함이 없다. 참으로 그 탐욕한 죄가 실제 있는 걸 안다면 사형을 내려야 될 것인데 대관이 말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하자, 민서가 아뢰기를,
"황헌(黃瀗)처럼 몹시 탐욕스런 자도 사형은 면하였고 박형(朴泂)의 일은 또한 아직까지 결말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23일 경술

상이 희정당에서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사관 이선(李選)의 서계 가운데 강도(江都) 소장의 열성조 실록 중 권질이 미비한 것을 보완하는 일에 대해 예조가 본관으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기를 청했습니다. 인조조부터 이미 이런 의논이 있었는데 그 일을 가벼이 거행하기 어려운데다 흉년이 잇따라서 아직까지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우상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국가의 역사서는 매우 중요하니 다른 폐단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외방에 소장된 실록을 즉시 봉행해 가져와서 베껴쓰고 빠진 데를 보충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년 정월에 적상산(赤裳山)에 소장된 것을 받들어 가져와 베껴쓰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들이, 총융청의 둔전을 혁파하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총융사 구인기(具仁墍)에게 물었더니 매우 불편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혁파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훈련 도감의 둔전 가운데 민전을 제멋대로 소속시켜 조세를 징수하는 것도 많습니다. 이러한 곳부터 먼저 혁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좌상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도감의 둔전 가운데 영광(靈光), 덕산(德山), 용인(龍仁), 음죽(陰竹) 등지는 다 민전으로 세를 거두고 있으니 혁파해야 할 것이고, 기타 각 아문의 둔전 가운데 민전을 제멋대로 소속시킨 곳도 각 아문에서 구별하여 똑같게 혁파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명하가 아뢰기를,
"김좌명은 신에게 상피할 혐의가 있는 사람입니다만, 이미 품은 생각이 있으니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진정시키는 것을 중시해야 하는데 계속 문제삼아 파직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좌명이 관장한 것은 다 긴요한 임무로서, 상평청의 경우에는 좌명이 그 일을 전담하였는데, 그가 파직된 뒤로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파직할 죄가 아닌데 대간이 청대하여 논계까지 하였고 그 말뜻을 보니 또 중요한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내 들어준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상께서 간원이 청대하여 논계까지 하였으므로 따라주었다고 하교하시는데 신은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좌명의 본직은 체차하더라도 어찌 파직까지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명은 체차하고 추고하는 게 좋겠다."
하였다. 상이 서관(西關)에 과거를 설행하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물으니, 태화와 명하 등이 다 불편하다고 하여, 그 일이 드디어 중지되고 시행되지 않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호패법은 별로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 없는데 조정이 중대하게 여겨 끝내 과감히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에게 전임시킨다면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이 어떠한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국가가 전부터 일을 일으켜 제대로 이룩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반드시 기강이 있은 뒤에야 모든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조종조로부터 제대로 행하지 못한 것은 인심이 선하지 못하고 나라에 기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호패를 시행할 수 없으니 상호간에 존중하여 협력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무라고 여깁니다."
하였다. 동지 유혁연(柳赫然)도 호패는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니, 상이, 서서히 의논하겠다고 하였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24일 신해

홍중보(洪重普)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경기우도 암행 어사 여성제(呂聖齊)가 복명하였다. 그 서계 가운데 수령으로서 잘 다스린 이는 김포 군수 유호연(柳浩然), 고양 군수 김중일(金重鎰), 양천 현령 윤게(尹垍), 마전 군수 허질(許秩), 인천 전 부사 이단상(李端相)이었다. 상이 허질은 가자하고 유호연·김중일·윤게·이단상은 모두 숙마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25일 임자

상이 희정당에서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승지로 하여금 추안을 읽게 하였는데, 죄인 김석홍(金石弘)의 일에 이르러 【석홍의 외삼촌 장후량(張後良)은 석홍의 부친 김진탁(金振鐸)이 자기 아내를 간음했다고 여기어 관청에 제소하였고 진탁은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고 말았다. 그뒤 석홍이 후량을 총 쏴 죽이고 그 자리에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하고는 달아났다. 얼마 안 되어 관리에게 붙잡혔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었을 때 내 나이는 겨우 13살이었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일이 통분스러워서 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고, 10년 동안 총술을 익혀 마침내 후량을 죽였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자는 대개 사나운 사람이다."
하니,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나이 열세 살 때부터 이미 복수할 마음을 가져 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으니, 용렬한 무리는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묻기를,
"이 죄가 어떠한가?"
하니, 영중추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석홍이 만약 자수하여 관청에 출두했으면 혹 용서할 만한 길이 있겠지만 여러 해를 도망다녔습니다. 자수하지 않고 체포되었으니 용납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고,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 길이 한번 열리게 되면 사사로운 원수로 서로 죽이는 폐단을 금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령 후량의 아들이 또 석홍을 죽이고 석홍의 아들이 또 후량의 아들을 죽인다면 나라에서는 어떻게 조처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탁이 형벌을 받아 관청에서 죽었으니 후량이 사사로이 죽인 게 아니다. 석홍이 복수할 수 없는 일일 듯하다."
하였다. 명하가 다시 석홍을 변호하니, 대사간 남구만이 아뢰기를,
"석홍이 후량을 몰래 죽였고 또 자수하지도 않았으니, 공법으로 결단컨대 복수가 될 수 없습니다. 조부가 갇힌 것도 개의치 않고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니 어찌 효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정해진 율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여 북로의 일을 조목조목 개진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들으니 북로에서 근래 문관 출신 북병사로서 꼭 우수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북로 사람이 선정을 칭송하고 추모하기까지 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앞뒤 무관으로 이 직임을 맡은 자가 어떠하였는지를 알 만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북로의 일을 변통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변통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 방책이 있습니다.
북도 관찰사를 나누어 배치하고 인하여 북병사를 겸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혹은 문신을 북병사 겸 순변사(巡邊使)로 삼고 군정과 민정을 맡기며 출척의 권한을 주든가, 아니면 순변사의 행영(行營)을 성진(城津)에다가 설치하고 북병사가 겨울철에 종성(鍾城)에 들어가 주재하는 예처럼 하면, 민정이 막히는 상태에 이르지 않고 군읍도 기탄하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북로의 첫째가는 급무는 이보다 시급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자주 어사를 보내 변방을 순찰하고 여러 고을을 살피는 것도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앞으로 변장(邊將)에 취재(取才)된 사람을 남도의 경우는 전의 규정대로 변장에 임용하고, 북도의 경우는 조정에서 조례를 반포하여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함께 모여 시취하고 해마다 계문하게 한 뒤 그 우등인 자는 특별히 과거 급제를 허락한다면, 별도로 과거를 설치하지 않더라도 무관 인재를 계속적으로 얻을 수 있고 또한 원방 사람을 위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가 정배(全家定配)된 사람은 다 북로에 이주시켜 변방을 채우는 뜻을 보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북방 인심은 우둔하고 질박하여 북쪽 오랑캐의 유풍이 있으니 도덕을 가르치어 교화하기도 어렵고 또 엄한 형벌과 준엄한 법으로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옷과 음식의 원천을 넉넉하게 하고 가렴주구의 길을 봉쇄하며, 부역을 가볍게 해주며 폐단을 제거하고 혜택을 베풀어, 은혜와 신용이 두루 미치고 교화가 점점 스며들면 은덕을 입은 줄을 인정이 스스로 느낄 것이니, 또한 어찌 윗사람을 위해 죽음을 바치려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특이한 절행이 있는 자는 특별히 표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영흥(永興)의 사노 만금(萬金)이 주인을 위해 손가락을 끊은 일이라든가, 정평(定平)의 교생 이식(李湜)이 계모를 잘 섬긴 일이라든가 단천(端川)의 관비 일선(一善)이 지아비를 위해 수절한 일 등은 다 고금에 뛰어난 행실이니, 해조로 하여금 우선적으로 정표하는 은전을 베풀게 해야 합니다. 이밖에도 도신으로 하여금 더욱 널리 방문하여 포상토록 계문하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어 흥기하게 한다면, 어찌 풍화에 도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융숭히 답하고 그 상소를 비국에 내렸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26일 계축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27일 갑인

대사간 남구만, 헌납 이민서, 정언 이섬 등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며칠 전 경연에서 대신이, 김좌명의 파직을 청한 것을 지나치다 하고, 청대한 것을 옳지 않다 하고, 상호간에 존중 협력하지 않는 것을 걱정스럽다 하고, 대관의 논의를 듣지 못하는 것을 개탄스럽다고 했습니다. 만일 맡은 임무를 중하다고 말했다면 괜찮겠지만 형률 적용이 과중하다고 한다면 이는 모를 소리입니다. 청대 문제도 그렇습니다. 신하로서 품은 생각이 있으면 다 용안을 가까이 뵙고 충심을 토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글로 하면 되지 하필 면대할 게 뭐냐고 한다면, 군신 사이에 끝내 만날 날이 없게 될 것이니, 이 어찌 말이나 되겠습니까.
삼사의 청대를 사람들은 상규로 여기는데 이번에 대신이 특이한 일이라 하니, 언로를 막고 뒤폐단을 여는 것이 그야말로 막심합니다. 근일에 묘당 또한 청대를 하였지만 어찌 크게 이롭거나 해로울 게 있었습니까.
이른바 상호간에 존중 협력한다는 것은 서로간에 스승삼아 양보하는 것이며 가부간의 의견을 통해 서로 돕는 것이지, 허물이 있어도 거론치 않고 잘못이 있어도 논하지 않으며 우물우물 눈치나 보면서 고식적인 태도만 취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신들이 김좌명을 논한 것은 전례에 따라 서로 규계한 것인데 삼공 육경 이하가 놀란 눈으로 보며 큰일이나 되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고질적 폐단입니다. 나약한 풍조가 나날이 조성되어 조금이라도 신분이 귀한 사람과 관계되면 감히 비리를 말하지 못하고 비호하는 것을 진정시키는 것으로 여기며 거론하는 것을 사단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니 국체와 언로가 앞으로 어느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또한 잘못이 있으면 서로 규계하고 일단 지나가면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신하된 자의 의리이고 상호간에 존중 협력하는 길입니다. 대신의 이른바 상호간의 존중 협력이라는 것에는 이 이상 다시 어떤 의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신은 또 대관의 논의를 들을 수 없는 것을 개탄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대관이 일을 논하는 데 반드시 재상에게 명을 받는다면 이것은 재상의 사인(私人)이지 임금의 이목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일이 재상에 관계될 경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신들은 그때 즉시 인피할 줄 모르지 않았으나 재상과 대간이 득실을 다투고 시비를 따지는 것은 마땅히 공론으로 드러내놓고 다투어야지 어지러이 인피해선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제 조방(朝房)에 일제히 모여 한 번 차자를 올려 사리상 그렇지 않다는 점을 상술하고 또 청대 때 채 못다한 심회를 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언 장건(張鍵)은 종일토록 왕복하면서도 와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다 신들이 무시당한 소치이니 그대로 눌러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다 물러가 기다렸다. 사간 이정(李程)도 이미 그 논의에 동조했고 대신에게 지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28일 을묘

집의 송시철(宋時喆) 등이 처치하여 남구만·이민서·이섬·이정은 출사시키고 장건은 체차하게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 병조 판서 김좌명에 대한 체차, 추고 전지를 고쳐 부표하여 들이라."
하고 파직으로 ‘계(啓)’자를 찍어 내리며, 또 정원에 하교하기를,
"사간 이정과 정언 장건은 출사시키라."
하였다. 또 정원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오늘날 대신을 공격하는 말이 어찌 이리도 심각한가. 23일의 경연석에 남구만이 이미 함께 있었으면서 끝내 변별하는 말이 없었고 또 대신의 말 때문에 인피하지도 않았다. 대각의 거조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대신의 말은 여러 재신의 말과는 구별이 있는 법이니, 대략 피혐하는 말을 갖추고 공론을 기다린 뒤에 차자를 올려 밝게 분변함으로써 상신과 서로 시비를 따지는 뜻을 보였어야 옳았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태연히 공무를 보면서 스스로 옳다 여기고 도리어 차자를 갖추어 대신을 공격할 계획으로 삼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참으로 알 수 없다. 또 ‘대간을 위협한다.’는 등의 말을 대신에게 뒤집어 씌워 협박할 계획으로 삼으니, 이것이 참으로 오늘날 이 무리의 공통된 폐습이다. 참으로 밉살맞기 짝이 없다.
거조가 전도되고 처사가 잘못된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게 없는데도 헌부가 처치하면서 감히 ‘조용히 차자를 올려 변별함이 차라리 마땅했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어찌 시비가 어그러지고 의견이 형편없는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대사간 남구만, 헌납 이민서, 정언 이섬, 집의 송시철, 지평 이광적(李光迪)은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승지 김수흥(金壽興)과 이준구(李俊耉)가 그 비답을 봉환하며 너그러이 용납하기를 청하니, 상이 번거롭히지 말라고 답하였다. 수흥 등이 재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상 홍명하는 사직서를 올리고 영상 정태화와 우상 허적은 다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아, 경들은 다 높은 덕으로 정승의 자리에 있으니 국가가 의지하여 힘입는 바가 얼마나 막중한가. 연소한 무리의 망령된 짓으로 인해 일시에 사퇴하여 정승 자리가 한꺼번에 비게 되니, 어찌 그리도 잘 생각해보지 않는가. 시비는 금새 판가름나게 되어 책임이 돌아가는 데가 있으니, 경들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임치 말라. 즉시 나와 공무를 집행하라."

 

영돈녕 김우명(金佑明)이 교외에 나가 상차하여 사직하기를,
"아무 죄가 없는 필부가 작은 정성을 바친 게 죄가 된다더니만, 세상의 도의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김시성(金是聲)이 이미 사사로운 헌상 때문에 파직을 당했으니, 신도 혼자만 면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빨리 신의 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상이 한시 바삐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경기우도 어사 신후재(申厚載)가 복명하였다. 수원 부사 이정기(李廷夔), 이천 부사 이휘조(李徽祚), 양성 현감 윤전(尹塼)은 다 고을을 못 다스린 일로 죄를 입었다.

 

11월 29일 병진

장령 이유(李秞)가, 남구만 등을 특별 체차하라는 분부를 환수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 대각은 이미 전도되고 황당한 거조가 있었으니, 체차시키라는 가벼운 벌이 어찌 지나친 것일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대가 방자하게 두둔하니, 스스로 임금을 속이는 처지에 빠지는 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의 이 아룀도 또한 협박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이유가, 엄한 성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퇴대하였다.

 

부응교 김만기(金萬基) 등이 상차하여 남구만 등을 변호하고 양사의 많은 관원들을 특별 체차토록 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30일 정사

정언 장건이, 이미 체직되었다가 도로 유임되었다고 인피하였다. 사간 이정은 소명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모두 퇴대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융숭히 답하며 불허하였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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