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9권, 현종 5년 1664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10.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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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무오

진시(辰時)에 일식이 있었다.

 

교리 윤심(尹深) 등이 양사를 처치하여, 이유와 이정은 출사시키고 장건은 체차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복수한 죄인 이자봉(李自奉)을 곤장만 치고 석방하였다.
자봉은 강원도 평강현 사람이다. 그 부친이 이천(伊川)에 사는 사람과 싸우다가 피살되었는데 자봉이 그 소식을 듣고 10여 명을 거느리고 그 부친이 죽은 곳으로 달려가 그 원수를 결박하고, 의복을 갖추어 그 부친을 가매장하였다. 원수를 붙잡아 관가에 제소하러 가던 중에 중도에서 문득 ‘여기서 관가까지는 거리가 꽤 먼데 관가에 이르기 전에 도중에서 놓치게 되면 복수를 할 수가 없어진다.’고 생각되어 마침내 칼로 찔러 죽이고, 그 머리 가죽을 털 채로 벗겨 가지고 관가에 고하였다. 감사 이만영(李晩榮)이 치계하여 해조로 하여금 품의 처분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사안을 형조에 내리니, 복계하기를,
"자봉이, 그 부친이 남에게 피살된 것을 통분하여 붙잡아 관가에 고하려다 도주할 우려가 있을까 싶어 중도에서 찔러 죽임으로써 지극한 심정을 폈고 또 즉시 관가에 고하였으니, 복수하는 도리를 얻었습니다.
《대명률》의 ‘부조피구(父祖被歐)’ 조에 ‘조부모나 부모가 남에게 살해되었는데 그 자손이 그 살인자를 함부로 죽인 경우는, 장 육십(杖六十)에 처하되, 그 즉시에 죽인 경우는 논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자봉이 범한 이 죄는 그 즉시에 죽인 경우가 아니니, 율문 가운데 장 육십이 그에 해당하는 율입니다. 이것으로 회이(回移)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던 것이다.

 

밤에 혜성이 누수(婁宿) 도수 안 천균성(天囷星) 위에 나타났다.

 

12월 2일 기미

황해도 어사 박세당(朴世堂)이 복명하였다. 수령으로서 고을을 잘 다스린 신계 현령 김군석(金君錫)은 표리를 하사하고, 신천 군수 홍주언(洪柱彦)과 옹진 현령 권숙(權諔)은 다 승진시키고, 연안 부사 조세환(趙世煥)은 치적이 도내에서 제일인 까닭에 자급을 올려주었으며, 봉산 군수 김하량(金廈樑)은 탐욕을 부리고 여색을 밝힌 이유로, 곡산 군수 유진삼(柳晋三)은 심한 술주정을 이유로 다 죄를 입었다.

 

밤에 혜성이 구름 틈으로 보였다.

 

12월 3일 경신

정지화(鄭知和)를 호조 판서로,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이조 좌랑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우윤으로, 박장원(朴長遠)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혜성이 누수 도수에 나타났다.

 

12월 7일 갑자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장선징(張善瀓)과 정창도(丁昌燾)를 장령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이완(李浣)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밤에 혜성이 누성 아래에 나타났다.

 

12월 8일 을축

밤에 혜성이 누수 아래에 나타났다.

 

평안도 청남(淸南) 어사 오시수(吳始壽)가 복명하였다. 수령으로서 고을을 잘 다스린 숙천 부사 김흥운(金興運)은 가자하고, 맹산 현감 최양필(崔良弼)은 승서하고, 증산 현령 한석량(韓碩良)은 표리를 하사하고, 순안 현령 서정리(徐正履)와 양덕 현감 유제(柳璾)는 못 다스린 것으로 죄를 입었다. 뒤에 대관의 아룀으로 인하여 김흥운의 가자를 환수하고 숙마를 하사하였다.

 

12월 9일 병인

지평 신후재가 인피하기를,
"신이 지난번 암행 감찰의 명을 받았습니다. 전 수원 부사 이정기(李廷夔)는 못 다스린다는 소문이 몹시 자자했습니다. 접경 지역에 집을 짓는데 부민이 가서 부역한 일은 이구 동성으로 퍼졌으니 결코 범연히 듣고 가벼이 믿는 것에 비길 바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에 지난해 7월 사이에 조성했다고 하므로 신은 그 설로써 서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정기가 수원에 부임한 것은 10월에 있었다 하니, 7월에 조성했다는 것은 곧 우둔한 백성이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 말입니다. 신이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이 착오가 있었으니, 어찌 편안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퇴대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체직시켰다.

 

12월 10일 정묘

상이 희정당에서 삼복(三覆)을 행하여 사형수 13인을 결단하였다. 김석홍(金石弘)의 일에 이르러 대신 이경석(李景奭), 정태화(鄭太和), 허적(許積) 이하는 다 사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승지 이연년(李延年)이 《춘추(春秋)》의 제양공(齊襄公)이 기(杞)를 토벌하여 복수한 일056)  을 인용하고 다시 실정을 심문하여 죄를 정할 것을 청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연년이 《춘추》의 설을 말한 것도 좋기는 하나 그 내막은 이것과 다릅니다."
하니, 상이 율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정창도(丁昌燾)가, 남구만 등을 특별히 체차시키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연이어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체차하라는 가벼운 벌조차 쟁론하는가. 한번 특별히 체차하는 게 무슨 불가한 점이 있다고 반드시 나를 이기려고 하는가. 내 어찌 이기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서로의 수령은 정축년 이후 대부분 무신으로 차임해 보냈는데 오늘날 청남(淸南) 수령은 점점 문관과 음관으로 차임해 보내니 만일 사변이라도 있으면 우려할 점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청남의 서너 고을은 육진(六鎭)의 예대로 문관과 무관을 교대로 차임하라."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서북 인재를 임용하는 문제를 인조조부터 천명했는데도 착실히 거행한 일이 없습니다. 마땅히 양전(兩銓)으로 하여금 선택해 수용하게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김귀영(金貴榮)의 관작을 추복하였다. 귀영은 선조조의 상신이다. 임진 왜변에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왕명을 받아 왕자를 호위하고 북로로 피난갔다가 모두 왜적에게 사로잡혔다. 왜적이 강화하자는 글을 만들어 귀영 편에 보냈는데, 대간이, 적에게 함락되어서도 죽지 않고 도리어 적의 서신을 갖고 왔다는 이유로 죄안을 삼아 귀영을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그와 함께 온 첩의 아들만 형문하고 귀영은 희천(熙川)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는데, 귀영이 중도에서 병사하였다. 그때 대신 윤두수(尹斗壽)는 의논드리기를,
"만약 적의 진영에 무릎을 꿇고 오직 화친을 애걸할 궁리만 하였다는 이유로 죄를 준다면 타당치 않을 듯싶습니다. 지금 나온 것은 곧 왕자의 분부이니, 또한 일신을 위한 사사로운 계획이 아닙니다. 조석간에 죽을 판인데 무엇을 바랄 것이 있다고 구차히 삶을 탐하는 이 짓을 대간의 말처럼 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사실은 《선조실록(宣祖實錄)》에 나온다.】  이에 이르러 그 후손의 상언으로 인하여 널리 자문을 구한 뒤 그 관작을 회복시켰다.

 

밤에 혜성이 누성 아래에 나타났다.

 

12월 11일 무진

목겸선(睦兼善)을 승지로, 김석주(金錫胄)를 지평으로 삼았다.

 

황해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전 집의 이단상(李端相)은 전후 상소 가운데 신을 무식하고 해괴한 일파로 기필코 몰아넣으려고 했으니, 즉시 논파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은 그 전의 설을 끝맺고자 합니다.
단상은, 조손(祖孫) 관계로 단정하고자 했다는 것을 가지고 신이 무식하다는 근거로 삼았는데, 글쎄 단상의 마음에는 어느 관계[親]로 단정하여야 바야흐로 유식하게 된다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신이 삼가 보니 주자(朱子)는 《무오당의서(戊午讜議序)》 가운데에서 복수의 의리는 5세(世)가 지나야 끝난다는 뜻을 논하고서도 유공(劉珙)의 행장을 지으면서는 그가 금나라에 사신가는 일을 회피하지 않았던 사실을 가지고 ‘죽음으로써 나라에 몸바쳤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공은 곧 유겹(劉韐)의 손자입니다. 겹은 정강(靖康)의 변057)  에 죽었으니 유공의 마음으로는 어찌 강북 땅에 한 걸음이라도 내딛고 싶었겠습니까마는, 바야흐로 사신가는 날 한마디도 사사로운 원수에 대해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천경 지위(天經地緯)의 대륜(大倫)을 신하 되는 날에 이미 정했으므로 감히 개인적인 의리로써 공무를 폐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로부터 묘도 문자(墓道文字)는 그 아름다운 점을 치켜세우고 그 나쁜 점은 드러내지 않으며, 그 잘한 점을 칭찬하고 그 못한 점은 언급치 않으니, 사실에 의거해 곧이 곧대로 써서 포폄이 저절로 드러나는 글과 같지 않은 법입니다. 만약 유공의 이 일이 의리에 해로운 것이라면 주자는 틀림없이 무시하고 쓰지 않았을 것이며 혹시 쓰더라도 폄하하는 말을 현저하게 가했을 것입니다. 어찌 단지 죽음으로써 나라에 몸바친 것을 칭찬만 하고 끝냈겠습니까.
신은 앞 상소에서 사람이 복수하는 것을 금하는 주장을 편 일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의 손자로서 이미 벼슬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에 임하여 회피하지 않기를 유공처럼 하게 하고자 하였을 따름입니다. 대체로 의리로써 은혜를 덮어버리는 것은 보통 사람의 정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고, 사사로움을 좇고 공무를 무시하는 것은 말세의 공통적인 걱정거리입니다.
지금 대각의 이름있는 인사가 이 설을 주장하여 한 세상을 몰아 동조하게 하니,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단상이 잇따라 이 논조를 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란 말입니까.
지금 단상은 겸퇴하여 스스로 즐기며 옛책을 널리 보고 당당히 선비로 자처하니, 신이 만약 침묵하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다면 단상은 반드시 ‘내 말 한마디에는 그도 군소리를 못하는구나.’고 말할 것입니다.
가령 뒷날 전부 부화 뇌동하는 환난이 있어 모든 녹 먹는 무리에게 참으로 조손간이나 형제간에 서로 보전하지 못하는 형세가 있게 될 경우 애써 임금의 일에 종사하고 싶어도 반드시 남의 말을 두려워하여 진퇴를 주저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상의 이 논조는 오늘날을 그르칠 뿐 아니라 또한 뒷날까지 그르칠 수 있으니, 어찌 거듭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사직하지 말아, 관방이 오래 비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필원이 인용한, 유공이 사명을 회피하지 않은 일은 그야말로 오늘날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 이로써 말한다면 송시열과 서필원 간의 시비의 판가름은 어둠 속에서 촛불로 비추는 것보다 더 분명해진다.

 

밤에 혜성이 누성 아래에 나타났다. 2경에 달이 필성(畢星) 가운데로 들어갔다.

 

12월 12일 기사

밤에 혜성이 누성 아래에 나타났다.

 

12월 13일 경오

평안도 청북(淸北) 어사 민유중(閔維重)이 복명하였다. 의주 부윤 강유후(姜裕後), 강계 부사 유탄연(柳坦然), 만포 첨사 홍우량(洪宇亮) 등은 모두 잘 다스린 공으로써, 유후는 승자하고 탄연 등은 다 숙마를 하사받았다. 정주 목사 정지호(鄭之虎), 태천 현감 이송로(李松老), 이산 군수 김원위(金元瑋), 위원 군수 조현(趙鉉), 철산 부사 임익하(任翊夏), 벽동 군수 이명립(李銘立), 운산 군수 남궁충(南宮忠) 등은 다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이유로 경중에 따라 죄를 입었다.

 

상이 희정당에서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는데, 어사 민유중도 입시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서천(舒川) 승려의 사변은 참으로 경악할 일입니다. 그런데 영장(營將) 양일한(楊逸漢)이 계문을 하지 않고 병사(兵使)에게 보고하지도 않은 채 그 관할 구역이 아닌 고을에 달려가 군병을 징발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그리고 감사 이익한(李翊漢)은 영장을 파견하면서 계문을 하지 않았고 또 그 수금한 승려에게 애당초 명백히 자백을 받아내지 아니하고 곧장 효시할 것을 청했으니 그 처사도 몹시 놀라운 일입니다."
하니, 【충청도 천방사(千房寺) 승려가 관아의 영을 따르지 않자 감사 이익한이 겸임 한산 군수 신숭구(申嵩耉)로 하여금 그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그러자 절의 승려 수백 명이 조총을 갖거나 활을 지니고서 험지에 웅거하여 저항하였다. 그 뒤 화약으로 그 절을 불사르고 또 침노한 벼슬아치의 집을 불질러 그 분을 풀었다. 이익한이 그 소문을 듣고 조정에 품신하지 않은 채 지레 공주 영장 양일한을 한산에 보내 공격하여 붙잡게 하였다. 이에 일한이 한산과 임천 등지의 군병을 징발하여 붙잡았다. 한산과 임천은 이미 우영장의 소관이 아닌데다 일한은 또 치계도 하지 않고 병사에게도 보고하지 않은 채 그 곳의 군병을 멋대로 징발하였다. 승려들을 붙잡은 뒤 익한이 모조리 수금을 해놓고, 효시하여 그 악을 징계할 것을 계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와 영장을 모두 잡아다 문초하고 죄를 정하라."
하였다. 상이 민유중에게 이르기를,
"하고픈 말이 있는가."
하니, 유중이 아뢰기를,
"서토의 강변 고을은 서울과 아주 멀어 육진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부터 과거에 응시할 수가 없었고, 또 따로 과거를 베푼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기가 진작될 기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강변에는 역사(力士)가 많았는데, 수십 년 사이에 활을 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졌습니다. 이는 대개 국가에서 권면하는 행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해마다 재주를 시험하고 그 장원을 뽑아 전시에 직부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권면되어 흥기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자,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이 말대로 서울의 관리를 파견하여 재주를 시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창성(昌城)부터 위원(渭原)까지 궁장(弓匠)이 없기 때문에 뜻이 있는 사람도 무예를 연습할 수 없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국가에서 서방에 유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서방의 활이 가장 손꼽혀 당시 ‘서궁 남전(西弓南箭)’이란 말도 있었습니다. 정축년 이후 궁장이 흩어져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니, 상이 경장(京匠)으로 하여금 가서 가르쳐 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듣건대, 최씨 성을 가진 여인이 이미 시집가기로 정혼을 하였는데 대궐에서 시녀로 뽑아 들였고 또 차비문에서 그 아비를 잡아들여다 곤장을 쳤다고 하기에, 신이 매우 놀라 물어보니 대전이 아니고 대비전이었습니다. 비록 대비전에서 한 일이기는 하나 상께서 어찌 못 들으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일마다 반드시 받들어 따르셔야 되지만 만약 상께서 모르시는 상태로 폐단을 끼치는 일이 있다면 효도를 다하는 도리가 아닐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받들어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이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민간에 폐단을 끼치는 일이 있다면 또한 어찌 받들어 따라서야 되겠는가. 궐내의 모든 일을 대전이 다 주관하지만 시녀를 선택하는 일에 대해서는 주관한 적이 없다. 대개 옛 규칙이 이러할 뿐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아무리 옛 규칙이라고는 하나 참으로 불가한 일이고 또 상께서 이미 들어 알고 계신다면 빨리 그 여인을 돌려보내 바깥 사람으로 하여금 분명히 성상의 뜻을 알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곡절이 있을 터이니,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영돈녕 김우명은 지난번 대관의 아룀으로 인하여 추고를 받았습니다. 대관의 논의가 참으로 옳았고 상께서 들어주신 것도 좋았습니다. 다만 추고하고 감정하는 즈음에, 태형·장형으로 조율했는데 국구는 체모가 남다르니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대관의 논의는 이제 이미 펴진 셈이니, 그 추고는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용서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강변 고을의 시재(試才)에 대한 일은 어떻게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재 어사(試才御史)를 파견하여 제주도의 예대로 무예만 뽑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중이 강변 교양관을 다시 두고 문신으로 차송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유중이 또 청하기를,
"강계(江界)는 곧 선정신(先正臣)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이 죽은 곳입니다. 그 땅의 인사들이 서원을 건립하여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제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명에 소외된 변방 땅에서도 오히려 경모할 줄 아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사액하여 드러나게 표창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오두인(吳斗寅)이 아뢰기를,
"전 봉산 군수 김하량(金廈樑)은, 지난번 어사가 염문할 때 그 고을에 사는 여인이 그의 벼슬살이에 관한 비루한 일을 나그네에게 전했다는 말을 듣고, 성을 내어 고을 사람의 입을 틀어 막으려고 그 여인을 마구 매질하여 끝내 죽게 했으니, 일이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밤에 혜성이 누성 아래에 나타났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전 집의 윤선거(尹宣擧)가 고향에 있으면서 상소하기를,
"신이 전후로 국명을 어긴 죄를 다스려 나랏사람을 경계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는 어찌 이처럼 냉정한가. 내 매우 서운하다. 그대는 올라와서 나의 부족한 점을 도우라."
하였다.

 

12월 16일 계유

남용익(南龍翼)을 경기 감사로, 박세당(朴世堂)을 수찬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응교로, 조가석(趙嘉錫)을 대교로 삼았다.

 

12월 17일 갑술

함경도 경성 등의 고을에 지진이 일어나 집채가 다 흔들렸다.

 

병조가, 어사 민유중이 서계한 대로 평안 병사 박경지(朴敬祉)를 파직 출송할 것을 복계하였다.

 

12월 18일 을해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삼가 민간의 말을 들으니, 자전께서 거처하시는 궁중에 도깨비의 변괴가 있는데 통명전(通明殿)이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궐내의 다른 곳에 옮기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래 전부터 옮기려고 하였으나 자전께서 따르지 않으신다."
하였다.

 

밤에 혜성이 규수(奎宿)의 도수 안에 나타났다.

 

12월 21일 무인

도목 대정이 있었다. 조가석(趙嘉錫)을 봉교로, 심재(沈梓)를 부수찬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이조 좌랑으로, 이인(李𡐔)을 승지로, 장선징(張善瀓)을 수찬으로, 이합(李柙)을 장령으로, 이경과(李慶果)를 지평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민주면(閔周冕)을 장령으로, 김좌명(金佐明)을 형조 판서로, 김수흥(金壽興)을 발탁하여 경기 감사로 삼았다. 수흥은 본디 작은 그릇으로 별로 재주도 없는데 일에 임하여 스스로 자랑하니 간혹 밝고 민첩하다고 일컬어졌다. 오래 근밀한 자리에 있으며 상에게 거슬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발탁되기까지 하였다. 물의는 다 불만족하게 여겼다.

 

12월 22일 기묘

연달아 대정이 있었다. 나이준(羅以俊)을 수찬으로, 남노성(南老星)을 호조 참판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우윤으로, 이홍연(李弘淵)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사간 오두인(吳斗寅), 정언 이유(李秞)·정재희(鄭載禧)가 아뢰기를,
"여러 도를 염문한 뒤에 그 치적의 고하에 따라 상전을 헤아려 베푸는 것은 참으로 격려 권면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당상에 파격적으로 승진시키는 것은 참으로 치적이 여러 도에서 첫째가 아닐 경우 상전이 전례가 되므로 함부로 베풀어선 안 됩니다. 숙천 부사 김흥운(金興運)과 마전 군수 허질(許秩)은 치적이 좋기는 하나 별로 여러 도와 비교해 특이한 실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허질은 준직(准職)을 거치지 않았으니, 전례를 어기고 승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모두 개정하고 다른 상으로 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번 아뢴 뒤에 비로소 허락하여 흥운에게는 말을 내리고 허질은 승서하였다.

 

금성(金星)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25일 임오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오시수(吳始壽)와 지평 김석주(金錫胄)가 아뢰기를,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는 지난번에 강가의 집을 지을 때 금천(衿川)과 과천(果川)의 절을 직접 두루 다니며 거주하는 승려들을 위협하여 일꾼을 징발하였으므로 승려들이 원망합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대사성 이홍연(李弘淵)은 자질과 인망이 본디 가벼워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은 결코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장령 이합(李柙)은 일찍이 헌부의 직임을 맡아 일을 하는 태도가 어지러웠습니다. 지금 내부 승진을 했는데 인망에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령 민주면(閔周冕)과 상피의 혐의가 있고 지금 추고를 받고 있는데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습니다. 새로 제수한 명을 환수하고 전직을 그대로 제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낭선군 이우는 추고만 하게 하였다.

 

부사직 김익렴(金益廉)이 혜성의 변고를 인하여 역대 이래 별의 변고 기록을 편집하여 별도의 책을 만들고 《역대요성록(歷代妖星錄)》이라 이름하여 상소와 함께 그 책을 올렸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삼가 역대로 혜성이 출현했을 때의 가언과 지론을 채집하고 간간이 제 생각을 붙여 합해서 한 책을 만들었습니다. 삼가 스스로 고인이 옛일을 써서 올린 규례에 비겨 첩황(貼黃)하여 올립니다. 첩황은 대개 비밀스럽지 못함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새봄의 절기가 돌아오고 묵은 해는 사라지려 하니, 우리 성상께서 묵은 것은 제거하고 새로움을 펴는 교화가 이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사람이 못났다고 하여 말까지 무시하지 마소서. 그러면 어찌 변변찮은 신 한 몸의 영광일 뿐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융숭히 비답하고 이어서 말의 장식품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12월 26일 계미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남천택(南天澤)을 장령으로, 홍만형(洪萬衡)을 봉교로, 이선(李選)을 대교로 삼았다.

 

김좌명(金佐明)을 수어사로 삼았다.

 

도승지 박세모(朴世模)가 아뢰기를,
"어제 사직 김익렴이 재이를 인하여 상소하고, 역대로 혜성의 변고가 있을 때 논의된 것을 채록한 것이라고 하면서 책 하나를 만들어서 올렸습니다. 그런데 책을 단단히 봉하고 첩황, 서명하는 등 한껏 엄중하고 비밀스럽게 하여 기필코 승지와 사관조차도 열어볼 수 없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선 먼저 받아서 들였습니다.
다만 승지는 왕명을 출납하는 관사에 있고 사관은 붓을 잡는 자리에 있으니만큼 비록 극히 비밀스런 군무나 급변이더라도 중간에서 통과시켜 알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실로 수백 년 동안의 공통된 규례입니다. 지금 이 익렴의 책자는, 근일의 재이를 인하여 고금의 일을 인용해 증명한 것이어서 수양하고 성찰하는 자료로 제공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승지와 사관조차 볼 수 없다는 것은 사리상 실로 온당치가 않습니다. 이 길이 한 번 열리어 혹시라도 정도가 아닌 것으로 이같이 하는 일이 발생하면, 뒷날의 폐해는 참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상께서 보신 뒤 곧 본원에 내리어 승지와 사관도 볼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난날의 규례 가운데 혹간 그런 경우도 있었다. 어찌 꼭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는가."
하였다. 그뒤 간원이 탄핵하기를,
"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지위에 있는데도 익렴이 올린 책자를 뜯어보지 않고 흐리멍덩하게 바쳤으니, 이미 통상 규정을 어겼고 또 뒤폐단을 열었습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27일 갑신

각능 참봉을 하옥하였다. 상이 환관을 보내 각능의 수목을 적간하게 하였는데 다 도벌한 곳이 있었다. 상이 노하여 모두 옥리에게 내릴 것을 명하였다. 제릉(齊陵) 참봉 조근(趙根) 등 30여 명이 일시에 옥에 갇혔다.

 

12월 28일 을유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29일 병술

행 부호군 이유태(李惟泰)가 상소하였다. 대략에,
"지금 요사한 별과 바람, 우레의 변고로써 성상의 마음에 동요가 있어 하늘에 응답하는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하찮은 신에게 특별히 성지를 내리시되 올라와 구원하라는 뜻으로 유시하시기까지 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신이 감히 받들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지난해 올린 상소는 신의 말이 아니라 옛사람의 말입니다. 채용한다면 국가의 무궁한 복이 실로 여기에 기인할 것이니, 일시 재앙을 소멸시키는 바탕이 되는 정도가 아닐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하늘의 노여움이 매우 심해 내 마음의 근심스럽고 곤혹스러움이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지난번 올린 상소는 의논해 조처하려고 하는데 만일 의논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면 결실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 마땅히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
하였다.
살피건대 유태는 본디 용렬한 무리로 다만 시열과 준길에게 붙었고 또한 임하(林下)의 명성을 도둑질하였으므로 일시의 부류가 모두 떠받들어 드디어 유현(儒賢)의 반열에 끼었다. 그러나 그 향리에 거하면서 그 세력과 지위를 믿고 백성의 전답을 강탈하는 등, 오직 그 욕심대로 하면서 만족할 줄 몰랐다. 이로써 말한다면 당시 이른바 유현이란 것도 알 만하다. 그 상소 가운데 조목조목 개진한 일은 또한 채용할 만한 게 없지 않으나, "채택하여 쓴다면 국가 억만년 무궁한 복이 실로 여기에 기인한다."고 한 것은 그 어리석기가 또한 대단하다.

 

밤 1경에 혜성이 규수(奎宿) 도수 안에 나타났다.

 

12월 30일 정해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라 감사 정만화(鄭萬和)의 계문 가운데 개진한 내용의, 산간 고을의 대동미를 작목(作木)하는 문제는 모름지기 빨리 의정해야 합니다. 대동목(大同木) 1필은 일찍이 쌀 7말 반으로 환산하게 했는데 민정은 그래도 어렵게 여깁니다. 내년 을사년 봄부터 시초로 삼아 쌀 8말의 값으로 쳐서 무명 1필을 상납하게 하는 일을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그리고 이르기를,
"올해는 농사가 이미 잘못되었으니 내년 봄의 쌀 징수는 산간과 해안을 막론하고 특별히 1말을 줄이라."
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함경 감사 민정중(閔鼎重)의 계본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양전(量田)을 이미 함흥에서 먼저 시행했는데 북방의 사세는 남방과 다릅니다. 지금 새 전결(田結)은 수를 늘리는 데 힘쓰지 말고 오직 균역(均役)을 힘써서 변방 백성이 소란스러워지는 폐단을 초래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공(雇工)과 솔정(率丁)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언급한 지 이미 오래인데 또한 갑자기 고치긴 어렵습니다. 먼저 사목(事目)을 상고하여 그 정수 외의 과람히 거느린 것을 도태시키고 그 호솔(戶率)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각자 통솔하여 위급할 때 징발해 쓰는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토노비(土奴婢)의 경우, 성 지키기에 적합한 노정(奴丁)은 위급할 때 들어가 지키는 예가 나름대로 있으니, 옛 제도를 거듭 밝혀야 할 뿐이지, 다 군오에 편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환곡의 출납상의 폐단은 이미 김수항(金壽恒)의 서계로 인하여 진작에 3분의 1로 방식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고공과 솔정은 이미 노비와는 다른데 변방 백성이 이들의 인권은 법으로 보호받지 못한다고 여겨 타살하기도 하니, 매우 놀랄 일입니다. 범하는 자가 있으면 살인율로 다스려야 합니다.
북방 사람이 자식을 버리고 기르지 않는 것은 더욱 엄히 금해야 합니다. 또한 장계대로 3살 전에 거두어 기른 경우는 당대에 한하여 그 노비로 삼게 허락하되 반드시 관가에 고하여 문서를 만들어 뒷날 상고할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또 아뢰기를,
"민정중의 두 차례의 장계 가운데 개진한 바, 크고 작은 관역(官役)을 다 민결(民結)로 하게 하는 일은 장계대로 시행하되 군병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성지(城池)의 수축 및 변방 방위에 관계된 일은 다 병정을 쓰게 하소서. 보인(保人)을 사사로이 파는 문제는 비단 보인을 사사로이 팔아선 안 될 뿐 아니라 고공도 그래서는 안 되니, 본도로 하여금 엄히 금단하게 하소서.
한 집안에서 2인이 군역에 나가면 또한 1인의 신공(身貢)을 감면해야 합니다. 다만 매년의 군대 정원은 큰 고을은 1백 명, 중간 고을은 50명, 작은 고을은 20명으로 이미 한도를 정했습니다만 본도의 경우는 이미 김수항의 서계로 인하여 모두 절반을 줄였습니다.
진보(鎭堡)의 토졸(土卒)은 군오에 편입하지 말라는 문제는, 진보의 토졸은 군오에 편입하더라도 위급할 때 두 곳으로 나누어 쓸 수는 없으니, 그 본 고을의 군오를 줄이고 본보에 전속시켜야 합니다. 각보의 토졸은 도신(道臣)이 병사와 상의하되, 먼저 진보의 국방상의 비중을 살펴서 합니다. 그리고 모집해 들인 무리는 그 신역을 감면해야 하며, 각 진보의 군기 중 오래되어 쓸모없어진 물건도 폐기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함흥(咸興) 도련포(都連浦)와 홍원(洪原) 마랑도(馬郞島)의 목마장을 단천(端川), 영흥(永興), 문천(文川)의 세 목장에 이설하는 문제는 무장들이 다 불가하다고 합니다."
하고,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신이 두 번 남병사를 지내 평소 좋은 말이 이 포에서 많이 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폐지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수항의 상소 가운데 북병사를 문신으로 차송할 것을 청했는데 만약 연이어 문신을 보낸다면 무비가 소홀해질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이 뒤로는 문신과 무신을 매우 정밀하게 선택하여 교대로 차송하소서. 북우후 역시 병사 수사에 합당한 인물을 차송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수항의 상소 가운데 개진한, 무사를 시험하여 급제를 하사하거나 변장에 차임하거나 하는 문제는 감사로 하여금 북변을 순찰할 때 병사와 함께 시험하여 취하게 해서 남잡한 폐단이 없게 하소서.
사변(徙邊) 죄인을 다 북로로 보내 변방을 충실히 하는 뜻을 보존하자고 한 것은 해조로 하여금 이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절의와 행실이 뚜렷이 드러난 사람은 해당 조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표창하여 권장하게 하소서. 내노(內奴)의 신공 세포(細布)는 이미 해조에서 변통하게 하였습니다. 대신이 북변을 주관하게 하자는 것은 이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또 아뢰기를,
"경기 어사가 서계 가운데 연호(烟戶)의 폐단을 극력 개진하였으니, 변통하소서."
하고,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대동법은 백성들이 원망하기도 하고 편하게 여기기도 하나, 연호의 부역만은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에 물어보고 편한 대로 변통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황해도 어사 박세당(朴世堂)이 서계 중에서 군병의 오래된 군포를 큰 폐단이라 하며 탕감시키기를 원하였습니다. 10년 이전으로 한정하여서 미납된 군포를 조사 계문하여 변통할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전라 감사 정만화가 조목조목 백성의 병폐를 개진했는데, 그 제1조는 산간 고을의 백성이 대동법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니 변통하라는 것입니다. 신의 뜻으로는 겨우 시행한 법을 곧 폐지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폐단을 없애는 길은 다만 가미(價米)를 더 지급하거나 혁파하는 것 두 가지뿐이라 여깁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대동법은 본디 백성을 편케 하려는 것인데 산간 고을 백성의 원망이 이토록 심합니다. 때문에 신의 뜻은 혁파하고자 하는 것인데 영상은 가미(價米)를 더 지급하고자 합니다. 형세를 보아 변통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더 지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대왕 대비전 궁인을 지난번 영상의 아룀으로 인하여 즉시 방출했으니 참으로 성덕의 일입니다. 다만 그 부친 최우(崔𦸲)는 수금된 지 이미 오래이고 형장을 받은 것도 두 번입니다. 삼가 들으니 최우의 딸이 미처 시집가지는 않았으나 이미 납채를 받았기 때문에 대신이 들은 대로 진달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로 인해 가두고 치죄한다면 대신의 불안감을 어찌할 것입니까. 또한 성덕의 허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하문했을 때 그 부친이 시집가지 않았다고 대답해 놓고 뒤에 허혼했다고 하였다. 앞뒤 말을 달리했기 때문에 내 엄히 다스리려는 것이다. 어찌 대신의 말 때문에 이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명하가 또 대신의 불안감을 개진하자,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대왕 대비가 궁인을 선발하였다. 역관 최우의 딸이 이미 남에게 시집가기를 허락해 놓고 미처 시집가기 전에 선발되어 궁에 들어갔다. 영상 정태화가 듣고서 아뢰니 상이 기뻐하지 않았다. 즉시 그 여인을 방출하고, 최우는 말을 달리했다 하여 수금하고 형문하도록 명하였다. 좌상과 우상이 서로 이어 진달하였으나 상은 듣지 않았다. 세 차례나 엄히 형문하고 먼곳에 귀양보냈지만, 뭇 신하가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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