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경자
유성이 방성(房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7월 2일 신축
최혜길(崔惠吉)을 대사헌으로, 유석(柳碩)을 좌부승지로, 이시만(李時萬)을 사간으로, 목성선(睦性善)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사간 이시만이 상소하기를,
"지금 이 궁궐을 옮겨 짓는 거조는 대개 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습니다만, 영건하는 역사가 극히 큽니다. 저것을 철거하여 이것을 짓는 것이어서 공력이 조금 줄어진다 하지만, 그 칸수를 헤아려보면 1천여 칸이나 됩니다. 하늘이 노하고 백성이 원망하는 때에 이같은 토목 공사를 한다는 것은 전혀 재해를 당해 반성하고 두려워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대내에서 아주 가까운 없어서는 안 될 것을 먼저 짓게 하고, 이 밖의 아문(衙門)은 우선 짓지 말고 내외의 월랑(月廊)에 들어와 거접하게 한 다음, 앞으로 백성들의 일을 살펴보고서 다시 의논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듯합니다.
신이 또 듣건대, 길례(吉禮) 날짜가 몇 달 안 남았다고 합니다. 이 또한 그만둘 수 없는 대례(大禮)이기는 하나 토목 공사가 바야흐로 한창인데 혼례가 뒤이어 있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혼례를 물려 행할 수 없으나 모든 혼수를 등록(謄錄)에 실려 있는 바에 의거하여 적당히 줄여 되도록 간략하게 하는 것도 재앙을 만나 삼가고 절약하는 도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외부에서의 의논이 ‘민역(民役) 중에서 공물(貢物)이 가장 크다. 만약 추이(推移)해서 짐작해 정하여 한결같이 고르게 한다면 곡식을 저축하여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하는 거조가 없더라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 신 또한 지난날 탑전에서 이러한 말들을 들었는데, 그때에는 의논하여 정하는 거조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백성에게 조금의 은혜라도 베풀 수 있으면 단연코 행해야 합니다. 무엇을 꺼려 하지 않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대신에게 명하여 편의한 방도를 익히 강구하게 하여 백성을 구원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시종(侍從)의 신하를 나누어 보내 백성의 질고를 탐문하고 탐혹한 관리를 내쳐 일벌 백계하여 진작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살펴보고 심히 가상하게 여긴다. 아뢴 일은 모두 지극한 논의이니, 내가 마땅히 채택해 시행하겠다."
하였다.
7월 4일 계묘
태백성이 나타났다.
7월 5일 갑진
태백성이 나타났다.
6월에 전라도에 큰물이 져서 빠져 죽은 자가 있었는데 감사가 아뢰었다.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케 하였다.
청파역(靑坡驛)의 아전이 수리 도감(修理都監)의 공사(公事)로 마패(馬牌)를 받아 가지고 전라도 감영으로 가다가 공산도(公山道)에 이르러 도감의 부역에 나아가는 승군(僧軍)을 만났는데, 승군들이 그의 말을 빼앗고 마구 때렸으며 마패를 부숴버렸다. 그때 마침 농사꾼이 길옆에 모여 있다가 맨 먼저 주창(主倡)한 중을 붙잡아 공산(公山)에 고하여 가두었는데, 중이 몰래 달아났다. 이에 현감 권즙(權諿)이 파직되었다.
7월 6일 을사
평안도 의주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벼가 모두 손상되었다.
7월 7일 병오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위에서 나와 실성(室星) 안으로 들어갔다.
7월 8일 정미
간원이 아뢰기를,
"금번 이 수리하는 역사가 참으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으나, 도감에서 기계를 갖추는 데에만 급급하여 경강(京江)에 있는 삼남(三南)의 조선(漕船)과 사선(私船)의 돛대를 모두 거두어들여 원성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또 승군을 조발하는 것도 산릉이나 성을 쌓는 역사와는 달라서 3천이라는 숫자는 매우 번다합니다. 도감으로 하여금 편의대로 처치하여 원망을 부르고 폐단을 끼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태화(鄭太和)를 예조 판서로, 조경(趙絅)을 이조 판서로, 정세규(鄭世規)를 형조 판서로, 이행원(李行遠)을 병조 판서로, 윤강(尹絳)을 좌승지로, 원진명(元振溟)을 장령으로, 김좌명(金佐明)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7월 11일 경술
밀양(密陽) 백성의 처가 한 번에 세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감사가 아뢰었다. 상이 전례대로 쌀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신유(申濡)를 우승지로, 김식(金鉽)을 부교리로, 최후윤(崔後胤)을 정언으로 삼았다.
7월 13일 임자
홍청도에 큰물이 져 금강이 크게 넘쳐 집 수십여 채가 침수되었다. 임천(林川)·충원(忠原)·청풍(淸風)·단양(丹陽)·영춘(永春) 등 고을에서는 침수된 민가가 1백 40여 채였고, 진천현(鎭川縣)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자가 4인이었으며, 평택현(平澤縣)에서는 들판의 여염집이 거의 다 침수되었다. 강원도 또한 큰물이 졌다. 두 도의 감사가 아뢰었다. 이 해에 경기의 수재가 팔도에서 가장 심하여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의 쌀을 내어 진휼토록 명하였다.
7월 14일 계축
전라도 남평현(南平縣)에 지진이 일어났다.
7월 15일 갑인
부산 왜관(倭館)의 잠상인(潛商人) 박귀남(朴貴男) 등 3인을 효시토록 명하였다.
7월 16일 을묘
평안도 안주(安州)·정주(定州)·선천(宣川) 등 고을에 큰 바람이 불고 해일이 일어났다.
7월 17일 병진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자급을 함부로 주는 폐단이 극심한데, 만약 막지 않으면 뒤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번에 본부에서 이에 대해 아뢰자 상께서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고찰하여 결정하게 하셨는데, 해조나 훈부(勳府)의 회계에서 결말을 짓지 못하여 정식으로 삼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해조로 하여금 명백히 처치하여 이제부터 영구히 준수할 법규를 만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원진(李元鎭)을 우승지로,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간으로, 이무(李袤)를 정언으로 삼았다.
순천 부사 김광현(金光炫)이 죽었다. 광현은 김상용(金尙容)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온후하고도 간중(簡重)하였다. 과거에 올라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쳐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사위가 바로 강문명(姜文明)인데, 강씨(姜氏)의 화024) 가 일어나 강문명 등이 모두 죽었다. 그런데도 상은 오히려 여러 신하들이 강씨를 비호하여 뒷날을 위한 바탕으로 삼지나 않나 의심하였다. 이에 광현이 두려워하여 순천 부사로 가기를 청하였는데, 근심으로 죽었다.
7월 18일 정사
통제사 김응해(金應海)가 표류해 온 복건(福建)의 장사치 51인을 잡았는데, 공작(孔雀) 3마리와 검창(劍槍) 8자루를 얻었다. 김응해가 역관을 시켜 물으니, 그 가운데 서승(徐勝)이라는 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배 주인으로 복건 천주부(泉州府) 진강현(晋江縣) 사람이다. 중원이 크게 어지러워져 양경(兩京)이 모두 함락되고 숭정 황제(崇禎皇帝)도 붕어하였으며 복왕(福王) 또한 을유년 5월에 패하였다. 정지룡(鄭芝龍)·정지봉(鄭芝鳳)이 당왕(唐王)을 받들어 7월 1일에 황제의 위에 나아가게 하고 도읍을 복건으로 정하고 융무(隆武)라 개원(改元)하였다. 당왕은 곧 신종(神宗)의 24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이비(李妃)이니, 숭정 황제의 숙부이다. 천하는 13성(省)인데, 오랑캐가 9성을 함락하여 융무가 거느리는 바는 단지 절강(浙江)·복건·광동(廣東)·광서(廣西) 등 4성뿐이다. 재상은 내각(內閣) 마사영(馬士英)이란 자로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었는데 지금은 이미 죽었고 하오추(何吾騶)·장덕경(蔣德璟) 등 10 여 인이 있다. 무장으로는 정지룡·정지표(鄭芝豹)·임찰(林察)이 곧 두드러진 자이다. 영월(寧粤)은 군문(軍門) 임찰이 지키고 양광(兩廣)은 군문 정괴초(丁魁楚)가 지키고 있다.
황제께서는 정지룡을 태사(太師)로 삼아 평로후(平盧候)에 봉하고 병사 40만을 거느리게 해서 남경과 북경을 회복하고자 한다. 남군(南軍)은 모두 보병으로 기병이 적고 화수(火手)가 많다. 이자성(李自誠)은 청나라 병사에게 패하여 섬서(陝西)로 달아나다 죽었고, 그의 아들 이틈(李闖)은 운남(雲南)·사천(四川)의 목국공(沐國公)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의지하며 황제에게 죄를 청하니, 목국공을 조서로 불러 군사를 합쳐 중원을 도모토록 하고 틈의 죄를 용서하고 공을 세워 자속(自贖)토록 허락하였다. 정지룡은 경비가 부족하다 하여 황제에게 청한 다음 우리들로 하여금 관은(官銀)을 가지고 가서 무역하여 군량을 돕도록 하였다. 우리들은 금년 5월에 동포(東浦)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였는데, 7월 7일에 귀국으로 표류하게 되었다. 대포에 맞아 배 안의 모든 재보가 온통 불에 타고, 같은 배에 탄 60인 중에 죽은 자가 10인이고 부상한 자는 태반이다."
하였다. 김응해가 서승 등을 거제현(巨濟縣)으로 옮기고 장계하여 아뢰었다. 조정에서 역관을 보내 중원의 사정을 다시 묻고 송환토록 허락하니, 서승 등이 감사해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달 9일에 안해성(安海城) 사람 임동영(林東榮)이란 자가 또한 장사일로 복경(福京)에서 일본으로 향해 가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어, 임동영만이 부서진 배조각을 타고 3일 동안 표류하다가 경상 좌수영 용당(龍堂)에 정박하였는데, 그가 하는 말 또한 서승과 같았다. 복경은 바로 복주(福州)인데, 황제가 도읍으로 정한 곳이기 때문에 복경이라 칭한다 한다. 남경과 북경이 청나라에게 함락되면서부터 중원의 소식이 오랫동안 끊겼다가, 이때에 와서 서승 등을 통하여 비로소 듣게 되었다.
7월 19일 무오
최명길(崔鳴吉)의 집안에 3년의 녹봉을 내려 주고, 또 묘사(墓舍)를 지어 주게 하였다.
7월 21일 경신
6월에 이석철(李石鐵) 등이 배를 타고 강진현(康津縣)을 출발하였다가 풍우를 만나 이슬도(二瑟島)에 정박하였는데, 영암 군수 윤기망(尹起望), 강진 현감 장문석(張文碩)이 듣고 쾌속선으로 음식물을 보내 주었다. 감사가 아뢰었다.
7월 22일 신유
태백성이 나타났다.
상이 정청(政廳)에 하교하였다.
"근래 이른바 명관(名官)이란 자들은 나랏일은 생각하지 않고 정병(呈病)만을 일삼기 때문에 아침에 제수했다 저녁에 바꾸어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으니, 몹시 형편없다. 무릇 벼슬을 두어 직무를 나눈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지, 이런 무리들의 화려한 명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은 아니다. 이런 버릇이 고쳐지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못하니, 이제부터는 성실하지 못한 무리는 절대 의망하지 말라."
안헌징(安獻徵)을 좌부승지로, 성이성(成以性)을 교리로 삼았다.
7월 23일 임술
대신에게 명하여 고 동지중추부사 조공근(趙公瑾)의 훈봉(勳封)을 추록(追錄)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으나, 일이 결국 행해지지 못하였다.
애초에 임진년 4월 왜구가 서울을 핍박하였을 때 공근은 사직서 참봉으로 있었다. 정원에서 조공근과 예조 판서 권극지(權克智)를 불러 귀에 대고 말하기를 "승여(乘輿)가 장차 서쪽으로 행할 터이니 종묘서와 사직서의 관원은 신주(神主)를 받들고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다음날 거가(車駕)가 성을 빠져나왔는데, 마침 종묘서 관원이 다른 직으로 옮겨 조공근이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먼저 사현(沙峴)에 도착하였다. 이때 마침 큰비가 내리자 신주를 모신 가마꾼이 대부분 도중에서 도망하였다. 이에 조공근이 그 종에게 대신 지게 하고서 연서역(延曙驛)에 이르니, 태묘관(太廟官) 두 사람이 뒤따라 이르렀다. 거가가 개성부에 이르러 묘사의 신주를 목청전(穆淸殿)에 임시로 안치토록 명하였다. 그뒤 얼마 안 되어 받들어 모시어 오라는 명이 있었는데, 그 때 적이 몹시 급하게 몰아쳐 온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도 공근은 혼자 목청전에 달려가서 묘사의 신주를 모시고 거가가 평양에 있을 때 돌아왔다. 왜적이 평정되어 공훈을 정할 적에 분조(分朝)의 종신(從臣)도 모두 녹공되었으나, 조공근은 일찍이 양덕(陽德)에 있을 적에 이틀 간을 병으로 고가(告暇)하였다가 뒤미쳐 이천(伊川)에 이르렀는데, 공훈을 정하는 자가 이것을 이유로 저지하였다. 광해조에 이르러 비로소 위성공(衛聖功)에 녹공되고 한흥군(漢興君)에 봉해졌는데, 계해년 반정(反正)에 이르러 광해 때의 위훈(僞勳)을 모두 삭탈하자 조공근도 마찬가지로 삭탈당하였다. 상이 그의 자급과 상으로 내려준 것을 예전대로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그의 아들 조빈(趙贇)이 소를 올려 그의 원통함을 따지자 상이 소를 내려주며 다시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나 김류가 불가하다 하여 그 일은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7월 25일 갑자
간원이 아뢰기를,
"중전의 이어소(移御所)에 공상(供上)하는 여러 물건은 사옹원 제조가 이른 아침에 수령해 올려야 하는데, 날이 늦어서야 느릿느릿 나아갔으니 일이 몹시 태만스럽습니다. 해당 제조를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중전이 이어한 별궁은 의위(儀衛)가 거칠고 간략하였으며 모든 하리들이 게으르고 함부로 하였으므로 보는 자가 모두 상심하고 탄식하였다. 이에 간원이 드디어 이를 논한 것이다. 또 아뢰기를,
"신들이 듣건대, 양서(兩西)의 감영과 병영에서 끌어 모은 쌀과 배가 항상 여유가 있다 하니,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영에 저축한 것을 각 참(站)에 나누어 주어 칙사의 행차를 접대하는 비용으로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6일 을축
헌부가 아뢰기를,
"이처럼 재이가 참혹한 때 칙사의 행차가 또 뜻밖에 나와 서로(西路)의 쇠잔한 백성은 죽음을 구하기에도 겨를이 없습니다. 이번 원접사 이하 크고 작은 각 행차의 지공은 찬품(饌品)을 정하여 간략하게 하도록 힘쓰고, 또 수행하는 자를 줄이고 가교(駕轎)에 일산을 펴지 못하도록 하되, 법을 준수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적발하여 죄를 주어 일로에 있는 각 고을이나 역의 조그마한 폐해라도 줄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상도에 황충이 들끓고 큰물이 졌다.
7월 27일 병인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는데, 목릉(穆陵)의 홍살문이 무너졌다.
강도와 남한 산성의 쌀 1천 석을 내어 경기 고을을 진대(賑貸)하고 각 참의 지용(支用)에 제공했는데, 간원의 아룀을 따른 것이다.
7월 28일 정묘
태백성이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수령은 방백을 십분 삼가서 섬겨야 하고, 방백은 수령에 대해서 마땅히 사정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강원 감사 유항(柳恒)은 탄핵을 받고 의심하여 선량한 목민관을 부당하게 내쳤고, 황해 감사 홍전(洪瑑)은 어떤 일로 인하여 노여움을 옮겨 형장을 쓰기에 이르렀으니, 사체로써 헤아려 볼 때 모두 거꾸로 되었습니다. 유항은 체차하고 홍전은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추국할 때의 재신(宰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 1647년 9월 (0) | 2026.01.06 |
|---|---|
|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 1647년 8월 (0) | 2026.01.06 |
|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 1647년 6월 (1) | 2026.01.06 |
|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 1647년 5월 (1) | 2026.01.06 |
|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 1647년 4월 (1) | 2026.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