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경오
홍청도 제천현(堤川縣)에 5월에 서리가 내렸고, 금강(錦江)이 흐르지 않는다고 감사가 아뢰었다.
6월 2일 신미
강원도 강릉(江陵)에 4월 22일부터 5월 27일까지 연일 서리가 내렸다고 감사가 아뢰었다.
정언 이완(李)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그저께 인대할 때에 대신이 ‘최유지(崔攸之)의 산성(山城) 일은 잘못 전해진 것인데 괴원(槐院)에서 빼버린 것은 너무 심하다.’고 하였다 합니다. 신이 이미 들은 바가 있어서 논하였으니 어찌 감히 아무 말도 안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 산성에 있을 적에 최유지가 정원(政院)에서 외치기를 ‘나는 부모와 함께 이 산성에 들어와 장차 피난할 겨를이 없으니 결코 성상을 모시고 갈 수 없다.’ 하였으니, 그때 들은 자치고 그 누가 통분해 하지 않았겠습니까. 배종(陪從)한 여러 신하와 정원의 여러 관원이 아직도 있는데, 신이 어찌 감히 잘못 전해 들은 말로 남을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지경에 빠뜨리겠습니까. 민응협(閔應協)은 당시 배종하여 간 신하로서 항상 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었다가 언관의 자리에 들어오자 이로써 논핵하였습니다. 신이 귀로 들은 것은 잘못 들은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응협이 눈으로 본 것도 잘못 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미 대신의 배척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헌납 엄정구(嚴鼎耉), 정언 임중(任重) 등도 이로써 인피하였다. 장령 변시익(卞時益)이 아뢰기를,
"최유지의 산성에 관한 일은 전한 자가 잘못 전해 사람들이 원통하고 억울하다고 하니, 사국(史局)의 천거를 삭제하는 것도 이미 너무 심한데, 하물며 1 년이나 행공(行公)한 괴원(槐院)의 선임까지 삭탈한단 말입니까. 대신이 탑전에서 분명하게 밝히기까지 하였으니, 공의가 어떠한지를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이미 대신의 배척을 당하여 형세가 그대로 직에 있기 어렵고, 발론자와 참론자 모두 차이가 없으니,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별로 잘못한 바가 없으니 체차하지 말라."
하였다.
6월 3일 임신
장령 변시익이 아뢰기를,
"최유지가 잘못을 범하였음이 과연 간원에서 아뢴 대로라면 그때 양사의 관원들이 무엇을 꺼려 탄핵하지 않고 뒤쳐져 있도록 내버려두었단 말입니까. 괴원의 선임이나 사국의 추천도 반드시 가부를 두루 의논한 다음에야 할 수 있으니, 한때 공의가 허여하였음을 이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신(相臣)과 중신 또한 탑전에서 분명하게 밝혔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사의를 가지고 최유지를 감싸주려고 하였겠습니까. 간원에서 괴원의 선임까지 삭제한 것은 과연 너무 심하였고, 또 대신의 배척을 받기까기 하여 형세상 그대로 직에 있기 어려우므로 감히 체차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별로 잘못한 바가 없으니 체차하지 말라.’고 하교하시었으니, 신의 처치가 마땅하지 않은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신을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당류(黨類)가 범하는 바는 불효와 불충을 모두 감추려 한다. 네가 말한 공의란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나라를 망치는 것은 필시 당론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니, 지평 목겸선(睦兼善)이 아뢰기를,
"최유지가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려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음은 조정의 신하가 본 바이고 성상께서 통촉하시는 바인데, 감히 언관이 논한 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사국의 천거에 이르러서는 논의가 서로 어긋났고, 마감(磨勘)함에 미쳐서는 또한 두루 의논하지도 않았으니, 이른바 가부를 두루 의논하였다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공의를 멸시하고 개인을 비호하여 방자하게 속인 정상이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장령 변시익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4일 계유
예조가 아뢰기를,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궁호(宮號)와 묘호(墓號)를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 우의정 남이웅(南以雄)은 ‘실록을 고찰해 보니 의경 대왕(懿敬大王)021) 의 상에는 궁이나 묘의 칭호를 분명히 썼으나 순회 세자(順懷世子)의 상에 이르러서는 순회궁(順懷宮), 순회묘(順懷墓)라 이르고 따로 칭호한 글이 없는데, 이것이 근대의 일이다. 그때 예를 아는 유신(儒臣)이 적지 않았으나 다른 호명이 없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순회궁, 순회묘라 이르는 것은 또한 반드시 의거한 바가 있을 것이다. 상의 재결을 바란다.’ 하였고, 영의정 김자점, 좌의정 이경석은 병으로 수의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와 같습니다."
하니, 순회궁의 예를 따르도록 명하였다.
6월 5일 갑술
경상도 영산(靈山)·하양(河陽) 여러 고을에 지진이 있었고 우박이 많이 떨어져 새들이 많이 죽었다.
지평 목겸선(睦兼善)이 아뢰기를,
"설서 황준구(黃儁耉)는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해서 춘방(春坊)의 보도(輔道)하는 직임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체차하소서. 병조 정랑 이후석(李後奭)은 지난번 나례(儺禮) 때 처자식의 관람을 위해 외사(外司)에서 숙직하는 군사를 빼내 교군(轎軍)으로 삼았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렇게 기근이 든 때에는 거리를 경계하고 도적을 잡는 것이 아주 중대한 일이거늘, 포도 대장이 전혀 삼가 신칙하지 않고 밤새도록 경(更)을 돈 병졸을 부역시키거나 혹 남에게 빌려 주어 휴식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일이 극히 한심스럽습니다. 이런 버릇은 통렬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좌·우 포도 대장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이후원(李厚源)을 대사헌으로, 민광훈(閔光勳)을 집의로, 김중일(金重鎰)을 수찬으로 삼았다.
6월 6일 을해
이에 앞서 대간의 논계로 인해 폐세자비(廢世子妃) 강(姜)씨의 제수 내려주는 것을 파하였는데, 호조에서 그의 자녀 및 유모의 요미(料米)를 모두 거둬들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하교하기를,
"모두 감하지는 말고 적당한 양을 헤아려서 주라."
하였다. 이에 호조에서 각각 6두의 쌀과 3두의 콩을 주기를 청하니, 상이 콩은 적은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다시 각각 콩 6두 7승씩을 주도록 하고, 또 여노(女奴) 각 3인의 요미를 주도록 하였으며, 세 딸을 향교동(鄕校洞)에 두도록 하였다.
6월 8일 정축
좌의정 이경석이 상소하여 최유지를 신구(伸救)하고 이어 면직을 빌었는데, 그 대략에,
"신이 최유지의 일로써 등대한 날에 감히 아뢴 것은, 대개 분관(分館)하는 처음에 고치자고 논하는 경우는 있으나 몇 년이 지난 다음에 추후 삭탈하는 것은 일찍이 그런 일이 없었으며, 참으로 공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모두 너무 심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재상과 대간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했으니, 이제 어찌 그 대강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신이 산성에 있으면서 직접 최유지를 보았는데, 유생으로서 늙은 어미를 데리고 성에 들어왔고, 세마(洗馬)를 제수받은 것은 성에서 내려오기 며칠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와언(訛言)이 전파되어 ‘대가(大駕)가 성에서 나가면 몽고가 곧 들어 온다.’ 하므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성중에 그대로 남아 있는 자들은 그 형세가 심히 위태로웠습니다. 아들된 정리로 차마 늙은 어미를 버려두고 혼자 나올 수 없었으니, 그의 마음이 참으로 어지러웠습니다. 익위사(翊衛司)의 관원을 무신으로 바꾸려 하면서는 시강원에서 최유지를 불러 유고의 여부를 물었는데, 최유지가 들어가 정세를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시강원에서 물어서 말한 것이니, 곧바로 정원에 들어갔다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문답할 때에 시종하는 여러 신하 및 대소의 여러 관원들이 사면에 둘러 앉아 들었는데, 이른바 이치에 어긋났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여러 사람이 아직 살아 있으니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 꺼려한 바가 있었다면 그 죄를 면할 수 없으나, 이미 배종(陪從)을 반으로 줄이라는 명이 있었고, 강문명(姜文明)이 또 세마에 임명되었으니, 최유지 및 다른 세마는 이미 저절로 관직이 없어서 다시 쓸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가 잘못한 바는 바로 목소리를 높이 지른 데에 있습니다. 목소리를 높이 지른 것은 여러 사람이 알아듣게 하고자 한 것인데, 의심과 비방이 생긴 것은 곧 여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처음 대간에 임명된 사람은 지금에 와서 비로소 논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 밖에 양사에 출입한 사람을 어찌 해가 지난 뒤에 이 추삭(追削)의 논의를 한단 말입니까. 저번날 탑전에서 마침 말씀드렸는데, 뜻은 간절하고 말이 번다하여 자신도 모르게 말이 장황하게 되었습니다. 물러가 추후에 생각하니 날씨가 춥지 않은데도 오싹해집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신의 죄를 다스려 공의에 답하고 명기(名器)를 중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살펴보고 경의 뜻을 모두 알았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6월 9일 무인
세자 익선(世子翊善) 송시열(宋時烈)이, 두 번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6월 10일 기묘
상이 한재를 만난 뒤로부터 내주방(內酒房)의 일공(日供)을 파하도록 명하였었다. 비가 내리자 약방이 저장한 소주를 적당히 공진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 11일 경진
간원이 아뢰기를,
"경영고(京營庫)의 찬물가포(饌物價布)는 쌀이 귀할 때에는 삭례(朔例) 이전에 미리 내기를 도모하여 몇몇 간악한 아전이 그 이익을 독점합니다. 그런데도 당상은 게을리 하여 그 까닭을 살피지 않고 한결같이 낭청의 손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담당 관사로 하여금 하나하나 조사해 내게 하여 당시의 선혜청 당상은 추고하고 낭청은 파직하며 색리(色吏)는 엄형으로 다스려 실정을 캐내소서. 그리고 지금부터는 삭례의 차례가 되면 낭청이 친히 당상에게 나아가 알린 다음, 예에 따라 출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3일 임오
헌부가 아뢰기를,
"평안 병사 정익(鄭榏)은 저번 칙사의 행차 때 그들에게 머리채가 휘어잡혀 들어갔으니, 이는 참으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저들이 비록 위협으로 겁을 주더라도 이치에 따라 따졌다면 어찌 함부로 욕을 가하였겠습니까. 그런데 끝내 말 한마디 하여 맞서지 못하고 몸에 밀부(密符)를 찬 사람으로서 목이 묶여 끌려 들어가면서도 태연히 부끄러워할 줄 몰랐으니, 그 사람됨이 심히 용렬하고 국가의 체통을 훼손함이 큽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함경도 문천군(文川郡)에서 양이 새끼를 낳았는데, 몸뚱이 하나에 머리가 둘이고 머리에는 각각 귀와 눈이 있었다.
전 이조 판서 이식(李植)이 죽었다. 이식의 자는 여고(汝固)이고, 호는 택당(澤堂)이다. 소탈하고 빼어나며 통명하였고, 전아하고 고상하며 검소하였다. 어려서부터 박람 강기(博覽强記)하였고, 문장이 절묘하여 한 시대에 우뚝하였다. 혼조(昏朝)에는 여강(驪江)에 물러나 살면서 임숙영(任叔英)·여이징(呂爾徵)·정백창(鄭百昌)·조문수(曺文秀)와 더불어 글짓고 술마시는 모임을 만들어 강호 사이에서 노니니,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였다. 반정하게 되자 청현(淸顯)의 직을 두루 거쳤고 세 번이나 문형을 맡았다. 병술년022) 에 시제(試題)의 일로 죄를 얻으니 모두가 원통하게 여겼다. 《선조실록》이 적신(賊臣) 기자헌(奇自獻)·이이첨(李爾瞻) 등의 손에서 나와 시비가 어그러져 믿을 수 없었다. 이에 이식이 상에게 아뢰어 실록청을 설치하고 야사(野史)나 여러 사대부의 집에 소장된 잡기(雜記)를 모아 수정하고 따로 한 질을 만들어 사고(史庫)에 보관하고자 하였는데,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6월 14일 계미
평안도 철산(鐵山)에서 돌이 저절로 옮겨졌다.
홍중보(洪重普)·김식(金鉽)을 정언으로, 한흥일(韓興一)을 이조 참판으로, 조석윤(趙錫胤)을 이조 참의로, 엄정구(嚴鼎耉)를 이조 좌랑으로, 남로성(南老星)을 응교로, 이천기(李天基)를 교리로, 하진(河溍)을 지평으로 삼았다.
6월 15일 갑신
월식이 있었다.
함경도 단천(端川)·갑산(甲山)·회령(會寧) 등 여러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
영의정 김자점이 병으로 여덟 번 정사(呈辭)하였으나, 상이 세 번 승지를 보내어 돈독히 유시하니, 이에 출사하였다.
창덕궁(昌德宮)을 수리토록 명하였다. 계해년 반정하던 날 불에 다 타고 오직 인정전(仁政殿)만 남아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창경궁(昌慶宮)에 저주(詛呪)의 변이 일어나자 상이 이어(移御)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인경궁(仁慶宮)의 재목과 기와, 섬돌을 철거하고 고쳐 지었는데, 이름은 수리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영건(營建)한 것이었다.
6월 16일 을유
지평 이성항(李性恒)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에,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굳세어 스스로 성인인 양하시어 신료들을 하찮게 보시고 아첨하는 자를 치우치게 좋아하시어 충직한 자를 멀리 배척하셨으며, 간언을 거절함이 너무 심하여 무고한 자를 귀양보내셨습니다. 이에 언로가 막히어 임금과 신하 사이가 막혔고, 부역이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의 원망이 날로 불어났으며, 수령이 탐욕스럽고 잔악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고, 사치가 날로 심해져서 국가나 사가의 재정이 탕진되었으며, 모든 관료는 기강이 풀어져서 국사가 날로 어그러져 끝내는 구원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위로 하늘이 노하여 이같이 전에 없던 재앙을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총명하시고 인애롭고 효성스러우니 필시 나라를 잃는 임금이야 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러러 천문을 살펴보고 굽어 인사를 살펴봄에 한 가지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신은 매양 이를 생각할 적마다 자신도 모르게 통곡하게 됩니다. 삼가 저보(邸報)를 보니, 이달 16일에 상께서 하교하시기를 ‘가뭄이 몹시 참혹하여 백성들이 굶어죽게 되었으니 부끄럽고 두렵기가 그지없고 근심스러운 마음이 불에 타는 것 같다. 여러 도에 명하여 삭선(朔膳)과 방물(方物)을 모두 중지토록 하라.’ 하여 옥음이 자상하고 은택이 간절하시니, 그 또한 주선왕(周宣王)이 재해를 만나 자기 자신을 반성하였던 성대한 뜻이라 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난 일들을 깊이 징계하여 옛 습관을 통렬히 고치시고,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몸을 닦으시며, 임금의 대강(大綱)을 결단하시어 큰 뜻을 분발하시고, 자신을 비우고 얼굴을 온화히 하여 신료들을 접하시며, 편벽되고 사사로운 자를 내쳐 끊으시어 충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법제를 엄하게 세워 무너진 기강을 맑게 하시며, 곧은 말을 받아들여 언로를 넓히시고, 무고한 자를 분간해 풀어주어 원통하고 억울함을 펴 주시며, 역을 감하고 세금을 박하게 하여 백성의 원통함을 위로해 주시고, 어사를 자주 보내 수령을 감찰하시며, 사치함을 통렬히 억눌러 국가의 재정이 넉넉하게 하소서. 이것이 오늘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신의 아비는 나이 83세인데 병을 얻어 이미 고질이 되었으니, 신의 직을 체직하여 병 간호에 전념토록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살펴보고 모두 알았다.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상소의 말은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으니, 그대도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
하였다.
6월 19일 무자
이래(李䅘)를 우승지로, 심지한(沈之漢)을 교리로, 임전(林)을 부응교로, 김일(金逸)을 평안 병사로, 이경안(李景顔)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6월 20일 기축
헌부가 아뢰기를,
"작상(爵賞)이란 바로 임금이 세상을 다스리는 도구이므로 옛날의 명철한 임금은 이를 중히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병자년 이후로 나라에 일이 많아서 공로에 보답할 즈음에 점차 상을 남발하게 되어 명기(名器)가 날이 갈수록 가벼워졌으니, 관방(官方)이 점차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예전의 관례에는 당하관에서 당상관으로 승진할 적에는 자궁(資窮) 준직(准職)이 된 뒤에야 비로소 당상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승서(陞敍)니, 초서(超敍)니, 준직(准職)이니 하는 차별을 두어 상이 한결같지 않았지, 단지 자궁(資窮)이라는 이유로 본직의 고하는 따지지 않고 갑자기 당상의 품계에 올린 경우는 전혀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일로 중첩하여 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히 고례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구오(具鏊)는 역적을 토벌한 공으로 이미 가선(嘉善)에 승진되었는데 또 신공신(新功臣)으로 자식을 임용하는 은자(恩資)를 가하여 주었으니, 어찌 한 가지 일에 중첩하여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흔(李忻)의 일은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그의 아비가 아직 살아 있어 이미 승자(陞資)의 은전을 내렸으니 적장(嫡長)의 음자(蔭資)를 어찌 또 승습하기 전에 더할 수 있겠습니까. 적장자에게 가자하는 것은 공을 세운 할아버지나 혹은 아버지가 이미 작고하여 친히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황헌(黃瀗)의 아비 황득중(黃得中)은 그 아들의 공훈으로 가선에 승진되었는데, 이중로(李重老)의 아비 이인기(李麟奇)를 그 예로 원용하였습니다. 대개 이인기는 군기시 정(軍器寺正)으로 당상에 승진되었다가 무진년023) 에 나이 80으로 가선에 승진되었습니다. 이중로와 황헌은 모두 2등 공신인데, 이인기는 준직(准職)으로 당상에 승진되고 황득중은 현감으로 가선에 승진되었으니, 그 원용한 예가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과람하게 준 가자는 몇 년이 지난 뒤에 일일이 소급해 고칠 수는 없지만, 만약 통렬히 막지 않는다면 말류의 폐단이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후로는 영영 예로 삼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예를 고찰하여 결정하게 하라."
하였다.
6월 22일 신묘
홍청도에 큰물이 졌는데, 청풍군(淸風郡)의 죄수 가운데 칼과 수갑을 찬 채 표류한 자가 있었다.
6월 23일 임진
심한 더위로 가벼운 죄수 16인을 석방하였다.
남문을 열고 북문을 닫았다. 철시(撤市)하고 옛 시전(市廛)으로 돌아갔다. 고사에 날씨가 가물면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고, 저자를 동현(銅峴)으로 옮기고 비가 내리더라도 가을이 되어서야 평상시대로 돌아갔다. 이때에 이르러 열흘 동안 장마가 지자, 예조에서 전례를 끌어대어 시행하기를 청하자, 상이 따른 것이다.
6월 24일 계사
조수익(趙壽益)을 동부승지로, 오정일(吳挺一)을 집의로, 권령(權坽)을 헌납으로, 김응조(金應祖)를 부수찬으로, 이해창(李海昌)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조 소의(趙昭儀)의 장녀를 효명 옹주(孝明翁主)로 삼았다.
침을 맞을 당시의 약방 도제조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6월 25일 갑오
의금부가 아뢰기를,
"이굉(李轟)·김성(金誠)·정원(鄭源) 등이 공초한 바를 참고해 보니, 말이 모호하여 끝내 밝힐 수가 없고, 그들이 끌어들인 이경회(李慶會)·한진영(韓震英) 등의 일은 모두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단지 추측해 말한 것이었습니다. 한진영은 최계훈(崔繼勳)과는 은혜는 있어도 원한은 없었으며 이경회는 별로 관가에 죄를 진 일이 없으니, 수령을 모함하는 것은 이치상 맞지 않는 듯한 바 의사(疑似)한 것으로 논죄해서는 안 됩니다. 이굉·김성·정원 등에 이르러서는 관가에 빚진 것이 모두 60∼70여 석에 이르러 범한 바가 작지 않은데, 감히 죄를 면할 모의를 하여 끌여들여서는 안 될 사람을 끌어들였으니,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유를 받았으니, 감히 가벼이 논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 분간(分揀)하라. 이경휘(李慶徽)는 파직하라."
하였다.
6월 26일 을미
보덕 조빈(趙贇)이 상소하기를,
"오늘날 수리하는 역사는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거조이며, 또한 성상의 본의가 아니고 온 조정의 청으로 인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이 수리이지 실지는 영건하는 것이라 신은 참으로 그 불가함을 압니다. 나라에 걱정이 없다면 임금께서 임어하시는 곳을 짓는 것을 누가 감히 불가하다고 말하겠습니까마는, 오늘날 그지없는 재앙을 당하였으니 어찌 이른바 시세가 쇠퇴하는데 도리어 사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옥당에 있으면서 이어하시라는 차자를 여러 번 아뢰었으니, 이제 뒷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를 청한 뜻은 영건하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지난날 전하께서 조정 신하들에게 답하신 교서에는 ‘비가 내리기 전에는 옮겨 지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미 비가 내렸지만 비 또한 재앙이 되었으니 옮겨 지을 수 없다는 성대한 뜻은 지난날과 같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지난날의 성대한 뜻을 보전하시어 위로는 하늘의 꾸짖음을 두려워하시고 아래로는 백성의 원통함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유사에게 명하여 우선 그 역을 정지토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살펴보았다.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아뢴 일은 마땅히 대신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토록 하겠다."
하였다. 대신이 회계하기를,
"오늘 조빈의 소를 보건대, 좋은 말과 정직한 의논이 지성에서 나왔으니 임금을 장려하는 아름다운 뜻이 심히 성대합니다. 다만 궁궐을 옮겨 짓는 일이 만약 한가히 늦출 수 있는 일이라면 신들도 남이 말하기 전에 정지토록 건의하였을 것입니다만, 성상께서 이어하는 거조는 하루가 급합니다. 또 저것을 철거하여 이곳으로 옮기는 일은 나무를 베어 멀리 운반하는 것과는 다르고, 서울의 궁한 사람을 모집하여 쓰는 것은 민결(民結)의 장정을 조발하는 것과는 다르며, 공역을 마치는 것 또한 수개월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도로 그만둔다면 임시 거처하시는 곳이 단지 기둥 몇 개의 조그마한 집이므로 심한 더위와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지 못하며, 미령하신 옥후가 더치기라도 한다면 비록 후회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로써 말한다면, 재앙을 만나 몸을 닦고 반성하는 방도도 의당 지극히 하여야겠지만, 군부(君父)를 위하여 환난을 걱정하는 방도 또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역사는 본래 부득이한 것이나 마침 이러한 때를 당하였으니 십분 절약하고 줄여서 대충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침전(寢殿)과 편전(便殿), 액정(掖庭), 낭무(廊廡) 등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이외는 우선 같이 짓지 말도록 하여 빨리 완성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7일 병신
홍청도에 금강(錦江)이 넘쳐 민가가 침수되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 황해도에 큰물이 졌는데, 연안(延安)·배천(白川) 등의 고을이 더욱 혹심한 재해를 입었다.
6월 28일 정유
유성(流星)이 대릉성(大陵星) 위에서 나와 왕량성(王良星) 아래로 들어갔다.
6월 29일 무술
중외에 명하여 물에 빠져 죽은 백성들에게 휼전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 지평 이경휘(李慶徽)가 저번날 논한 바의 일은 한때의 풍문에서 나온 것이고 애초에 그 사이에 특별한 뜻이 없었으며, 일을 규명해 본 뒤에도 얽어 날조한 자취가 없는데도 특별히 파직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신들은 실로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의 경중을 막론하고 대간이 말 때문에 죄를 받는 것은 성스러운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경휘를 파직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경휘는 사사로움을 따른 자취가 현저하니 벌을 주어 부끄럽게 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다."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경상 감사 허적(許積)을 파직하였다. 상이, 허적이 평성행(平成幸)을 접대할 때에 조정의 분부를 따르지 않았다 하여 먼저 파직한 다음 추문하라고 한 것이다.
6월 30일 기해
백관의 녹봉을 감했다. 이때 나라의 저축이 죄다 없어져 종7품 이상은 쌀 1석을 감하고 콩 1 석으로 대신하였다. 7품에서 1품까지는 녹봉의 다과가 현격히 다른데도 일률적으로 감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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