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정묘
상이 번침을 맞았다. 약방 제조 조경(趙絅)이 입시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때 아닌 우레의 변고는 필시 형벌이 중도를 잃어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듣건대, 하루 온종일 우레가 치는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저번에 강씨(姜氏)의 옥사로 인하여 네 신하를 내친 지 이제 이미 오래 되었으니, 마땅히 그들을 석방하여 하늘의 벌에 답하소서. 세 아이에 있어서도 그들은 어려서 그 어미가 한 짓을 몰랐기 때문에 뚝 떨어진 섬에 안치하여 왕법을 시행하였으니, 이제 만약 석방하신다면 자애로움을 보이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오활하도다."
하였다. 조경이 아뢰기를,
"신의 말이 죄줄 만하면 죄주시고 쓸 만하면 쓰소서. 원컨대 전하께서는 옛 제왕이 재해를 만나면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던 방도와 물 흐르듯이 간언을 따른 아름다움을 본받으소서."
하니, 상은 아무 말이 없었다.
12월 2일 무진
상이 번침을 맞았다.
12월 3일 기사
정세규(鄭世規)를 대사헌으로, 임성익(林聖翊)을 장령으로, 임중(任重)을 정언으로, 김응조(金應祖)를 집의로, 김휼(金霱)을 좌승지로, 이이존(李以存)을 이조 정랑으로, 양만용(梁曼容)을 사간으로 삼았다.
12월 4일 경오
상이 번침을 맞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수리 도감 낭청 심헌(沈櫶)·이송령(李松齡)은 5, 6품의 관원으로서 차서를 뛰어 넘어 준직(准職)에 제수되었고, 감조관(監造官) 정영한(鄭榮漢)·서현일(徐顯一)·조균(趙稛)·심약하(沈若河)·황도형(黃道亨)은 모두 참하관(參下官)으로서 또한 5품의 실직을 받았으니, 제수하는 명이나 상을 베푼 은전이 이처럼 과한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옛 건물을 철거하여 새로 영조하는 공역은 쉬운 것인데, 막중한 상전을 어찌 반드시 베풀어서는 안 될 곳에 가볍게 베풀어 전에 없던 예를 여십니까. 청컨대 모두 환수하소서."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결국 따르지 않았다.
12월 5일 신미
전 참봉 정광후(鄭光後)가 선조(宣祖)의 어필(御筆) 글씨와 그림 각 1폭씩을 올리자, 상은 해조에 명하여 6품직을 제수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정광후가 세력이 있는 자기 친척에게 벼슬을 구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선왕의 어필을 우연히 얻어 왕에게 바치고 싶지만, 벼슬을 바라는 인상이 있을까 혐의쩍습니다." 하니, 그 친척이 말하기를 "속히 바치시오. 이것이 바로 급함을 구원해 주는 밑천이오." 하였다. 바치고 나서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많이 비웃었다.
12월 7일 계유
상이 번침을 맞았다.
12월 8일 갑술
상이 번침을 맞았다.
우의정 남이웅(南以雄)이 병으로 28번이나 정사(呈辭)하니, 상이 이에 허락하였다.
12월 10일 병자
상이 영의정을 명초하여 그로 하여금 복상(卜相)하도록 하였다. 이행원(李行遠)을 우의정으로, 남이웅을 춘성 부원군(春城府院君)으로, 신속(申洬)을 지평으로, 임전을 응교(應敎)로, 구인후(具仁垕)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 목사 오빈은 대론(臺論)을 듣고는 곧 친한 자에게 간통하여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를 보니 ‘수찬 이행원(李行源)이 출직(出直)한 뒤에 글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하였는데, 전하는 자는 말하기를 ‘오빈이 행원의 집에 가서 조그마한 편지를 써서 그로 하여금 즉시 통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한 장의 글이 있었는데 바로 이조 좌랑 엄정구(嚴鼎耉)의 편지였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오빈의 소에서 말한 ‘출직한 다음에 위문하였다.’는 말은 위를 크게 속인 것이니, 관작을 삭탈하소서."
하니, 상이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엄정구는 누설한 자취가 있으니 중히 추고하소서. 전 정언 오핵은 간통을 돌린 자취를 마땅히 들어 알았을 터인데 함께 연명으로 피혐하여 망령되이 동료를 의심하였으니, 일이 극히 괴이합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전 정언 정륜은 간통이 오갈 때 사람들이 말을 하게 만들었고, 피혐한 후에도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지 않았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12월 11일 정축
상이 번침을 맞았다.
12월 12일 무인
간원이 아뢰기를,
"수찬 이행원은 물론(物論)을 받았으니 마땅히 물러나 있으면서 공의가 정해지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뻔뻔스럽게 소를 올려 시끄러운 단서를 야기시켰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부교리 민광훈(閔光勳)은 대론을 채 전계(傳啓)하기도 전에 지레 간통을 하여 누구인가를 물었으니 이미 매우 부당한데, 자기들끼리 한 말을 외람되게 소장에까지 아뢰었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당초 대론이 나오려 할 때에 민광훈과 이행원이 모두 숙직하는 장소에 있었는데, 행원은 오빈과 엄정구의 글을 얻어 보고 대론이 있을 것임을 알았다. 광훈은 대청에 글을 보내어 누구인가를 물었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간원이 인피하게 되자 두 사람이 모두 상소하여 그 자세한 사정을 아뢰었기 때문에 이 계가 있었던 것이다.
12월 13일 기묘
상이 번침을 맞았다.
12월 14일 경진
연분(年分)의 복심(覆審)을 행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는 호조에서 겨울철이 이미 다하였고 기민(飢民)들이 소요한다고 아뢰었기 때문이다.
12월 15일 신사
상이 번침을 맞았다.
12월 17일 계미
부제학 채유후(蔡𥙿後), 응교 임전(林), 교리 이천기(李天基)·홍처량(洪處亮), 부수찬 이정영(李正英)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덕을 닦아 정사를 세우는 것이 해가 지날수록 더 게을러져서 여러 번 변란을 겪으셨으면서도 아직까지 고통을 감내하며 분발하고 진작하는 뜻을 두지 않고 계십니다. 경연의 강독에 있어서도 이것이 바로 진덕 수업(進德修業)의 근본이 되는데 전혀 폐하고 그만두시니 비록 옥후가 편치 않으신 때문이기는 하나 따뜻한 날 편리한 때에 때때로 인접하신다면 무슨 방해되는 바가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음과 정신을 잘 기르시고 몸을 절제하여 펴지게 하며 자주 신료를 불러 치도(治道)를 자문하신다면 다스리는 도리에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섭양(攝養)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임어하신 초기에는 간함을 거스르지 않고 따르시어 거의 한 고조(漢高祖)가 거침없이 남의 말을 따른 데에 가까웠고 ‘내가 잘못했음을 알겠다.’는 하교를 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평상적인 것을 따르기만을 탐하고 건의하는 말을 싫어하며, 부드럽고 익숙한 것만을 좋아하고 강하고 과감한 것을 미워하며, 소장을 올릴 적마다 포장하는 유시는 하시면서도 전혀 시행하는 실지가 없고, 그렇지 않으면 입계한 후 끝내 결과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도에 맞는가 찾아 보고 이치에 어그러진 것이라 할지라도 그 뜻을 용서해 준다면, 여러 아름다움이 다 나아올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내수사의 공사(公事)는 반드시 이조를 경유해야 하는데, 그 뜻은 대개 주관(周官)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총재(冢宰)로 하여금 인주의 재용을 알게 해서 궁(宮)과 부(府)가 일체인 뜻을 보인 것입니다. 이미 그로 하여금 참여하여 알게 했다면 응당 일에 따라 이의를 제기하게 해야 하지 오늘날 하는 것처럼 문서를 받들어 도장만 찍어 행회(行會)해서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관유(關由)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외방으로 내려보내는 경우도 자못 있고, 반노(叛奴)가 투속(投屬)하는 일, 민전(民田)을 함부로 침탈하는 등의 일이 점점 다시 생겨 장차 전철을 밟게 되었다고 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분명히 지휘를 내리시어 이제 이후로 이조로 하여금 문자를 자세히 조사하여 바로잡아 고치게 하소서. 그러면 오래 쌓인 폐단을 조금이나마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하루종일 치는 천둥은 없다 하더니, 이번에 증험해 보아도 하루아침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저 이경여(李敬輿) 등 네 신하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참으로 전하께서 통촉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모두 멀리 떨어진 곳이라 인명을 보전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혹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성화(聖化) 가운데 불쌍히 여겨야 할 자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하늘을 본받아 도를 행하시어 위엄을 풀기를 우레처럼 하고 은혜 베풀기를 따스한 봄날처럼 하신다면 필시 화기(和氣)를 감동시켜 부르는 데 조그마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신들이 일찍이 듣건대, 《심경(心經)》이라는 책은 권질은 비록 적지만, 예전 성현들의 말씀과 행실이 많이 기록되어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감발시킨다 하니, 만약 자리곁에 두시고 항상 유념하여 살펴보신다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서 또한 반드시 크게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여기에 뜻을 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은 마땅히 채택하여 쓰겠다."
하였다.
12월 18일 갑신
양주(楊州)에 사는 한 여자가 한꺼번에 2남 1녀를 낳았는데, 쌀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12월 19일 을유
판돈녕부사 민형남(閔馨男)이 차자를 올려, 맑은 마음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할 것과 자주 대신을 접대할 것과 재앙을 만나 몸을 닦고 반성할 것과 기민을 진휼할 것 등에 대해 청하였다. 차자의 말미에,
"요즘에는 당론이 치성하여 선비의 기개가 사라지고, 공도(公道)가 폐해져서 사의(私意)가 마구 치닫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로 아뢴 일은 지극한 논의가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마땅히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으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근래 조정 관원들이 재이가 있으면 문득 당론을 내니, 이런 태도를 볼 적마다 한심스럽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경만은 세력을 무서워하지 않고 붕당에 대해 언급하니 약석(藥石)과 같은 의논이 나라를 근심하는 뜻이라 이를 만하다."
하고, 며칠 뒤에 특별히 우찬성을 제수하였다. 얼마 있다가 또 이조 판서에 제수하니, 당시 사람들이 ‘삼어 이상(三語貳相)’이라 하였는데, 이는 대개 ‘당론이 성하다.[黨論盛]’는 세 글자를 가리킨 것이다.
집의 김응조(金應祖), 장령 임성익(林聖翊), 지평 신속(申洬)이 재이 때문에 차자를 올려, 공구수성하며 근본을 단정히 하고 근원을 밝히는 도리와 내수사의 노비 및 여러 궁가(宮家)의 점탈(占奪)하는 폐단을 아뢰니, 답하였다.
"차자의 말은 바른말 아닌 것이 없다. 내 마땅히 두려워하는 생각으로 채택하여 시행하겠다."
12월 20일 병술
상이 번침을 맞았다.
대사헌 정세규(鄭世規)가 두 번 상소하였으나 체직되지 않자 이에 나아가 사례하고, 일찍이 제수(弟嫂)의 상사(喪事)로 장사의 기일을 고양(高陽)에 글로 통보했는데, 이것이 비록 송희업(宋熙業)의 문보(文報) 안에는 들지 않았지만 무릅쓰고 벼슬에 있을 수 없다 하여 인혐하고 물러갔다. 이에 본부에서 처치하여 체직시켰다.
12월 21일 정해
양주(楊州)와 적성(積城)에서 지진이 났는데, 천둥치는 소리와 같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파주 목사 윤형각(尹衡覺)은 형벌을 지나치게 사용하여 사람을 죽였으므로 감사가 이미 치계하였는데, 형조에서는 범연히 추고할 것으로 입계하였습니다. 고금에 어찌 사람을 죽인 죄인을 추고만 하자고 청하는 이치가 있습니까. 청컨대 윤형각은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며, 형조의 해당 당상은 추고하고, 낭청은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형각에 대해서는 그의 함사(緘辭)를 본 뒤 법에 따라 조율하고, 형조의 당상이나 낭청은 아울러 추고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도의 산성(山城)·둔전(屯田) 및 순검영(巡檢營)의 별장(別將) 등은 나라 안에서 좀도둑이 되었습니다. 저들에게는 권속(眷屬)이 있고 사령(使令)도 있는데, 일용의 비용은 모두 공물(公物)을 도적질한 것이고, 권문(權門)에 수레로 실어 보내는 것도 이로써 하고, 자기 집에 짐바리로 실어 보내는 것도 이로써 합니다. 방군(防軍)이 원망하고 고통스럽게 여기며 둔곡(屯穀)이 축나는 것이 오로지 여기에서 비롯되는데도 스스로 한 관서가 되어 위엄과 복을 마음대로 행하므로 수령이 억제하지 못합니다. 제도의 산성·둔전 및 순검영의 별장을 일체 혁파하고 그 지방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되 수령이 친히 단속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신창(新昌) 사람 심동웅(沈東雄)이 소를 올려, 정조(正租) 5백 석을 바쳐 진휼을 분담하게 하고자 한다 하니, 호조가 회계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품지(稟旨)해서 상을 논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혹심한 추위로 전옥(典獄)에 있는 가벼운 죄수를 석방토록 명하였다.
12월 22일 무자
태백성이 나타나고, 해 가운데에 검은 점이 있었다.
남로성(南老星)을 동부승지로, 이기조(李基祚)를 대사헌으로, 심액(沈詻)을 예조 판서로, 정태화(鄭太和)를 공조 판서로, 남중회(南重晦)를 지평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23일 기축
유성이 항성(亢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색이 붉은데 빛이 땅에 비쳤다.
12월 26일 임진
민형남(閔馨男)을 우찬성으로, 이만(李曼)을 대사간으로, 유황(兪榥)을 동부승지로, 성이성(成以性)을 교리로 삼았다.
12월 28일 갑오
태백성이 나타났다.
12월 29일 을미
이날은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휘일(諱日)이다. 상이 매년 제물을 내수사를 시켜 보은현 속리산에 있는 절에 보내 중으로 하여금 재(齋)를 베풀고 부처에 공양토록 하였다. 이때에 상이 몰래 내수사 하인을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는데, 중은 전혀 재를 베풀려는 뜻이 없었다. 이에 상이 노하여 중을 내옥(內獄)에 잡아다가 죄를 주었다.
12월 30일 병신
태백성이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였다.
"의창군(義昌君) 부인의 요미(料米)는 인성군(仁城君) 부인의 예에 의하여 내려 주라."
강원도 관찰사 조문수(曺文秀)가 죽었다. 문수는 사람됨이 겸손하고 화평하며 평온하고 조용하였다. 해서(楷書)를 잘 쓰고 시도 매우 잘 지었으므로 이식(李植)이 자주 칭찬하였다. 반정(反正)한 뒤 과거에 급제하여 청현(淸顯)의 직을 두루 지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있다가 원주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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