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무진
홍청도 홍주(洪州)·목천(木川)·직산(稷山)·서산(瑞山)·한산(韓山)·아산(牙山)·비인(庇仁)·해미(海美)·당진(唐津)·진천(鎭川)·충원(忠原)·청풍(淸風)에 우박이 크게 내리고 연풍(延豊)에 지진이 있었는데, 감사가 아뢰었다.
10월 2일 기사
태백성이 나타났다.
전 부사 김여옥(金汝鈺)에게 가선(嘉善)의 품계를 주었다. 김여옥은 일찍이 밀양 군수로 있으면서 강도 6인을 잡았는데, 조정에서 공이 있다 하여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다.
10월 3일 경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안 감사에 합당한 사람이 어찌 없기에 굳이 정치화(鄭致和)·허적(許積) 등 현재 파산(罷散) 중에 있는 자로 의천(擬薦)하였는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김익희(金益熙)와 정유성(鄭維城)도 모두 합당한 사람이고, 홍전(洪瑑) 같은 자는 현재 해서에 있는데 이미 시험해본 효과가 있었으며, 이시방(李時昉) 또한 재주와 국량이 있으나, 모두 맡고 있는 바가 요긴하므로 의천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정치화는 지방 감사를 맡을 만한 재능이 있는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자못 재주와 국량이 있어 이 임무를 감당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풍덕 군수(豊德郡守) 권경기(權儆己)는 연로하여 일을 처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금번 사신 행차에 은으로 담뱃대를 만들어 주어 후일의 폐단을 열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묻기를,
"역사(役事) 줄이기를 경들은 서로 의논하여 정했는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근래 일이 많아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습니다."
하고, 이시방이 아뢰기를,
"공물(貢物)의 값이 팔도를 통틀어 9만여 석인데 강원도에서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기 때문에 남은 저축이 아직 많으니 금년에는 다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1년을 버틸 수 있고, 양서(兩西)는 병술년032) 에 바쳐야 할 것을 이미 다 받아들였으니 금년 공물의 값도 줄 수가 있으며, 함경도는 바쳐야 할 것이 많지 않아 변통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요리해야 하는 곳은 경기도와 하삼도인데, 공물의 값이 5만여 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울의 각사(各司) 공물주인 등이 전부터 반드시 미리 그 값을 받아 겨울이 되기 전에 여러 물건을 사들여 비축하였다가 바쳤습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조정에서 지레 민결(民結)에서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칙행(勅行)을 당해서는 지탱할 수 없어 모두 원통함을 하소연합니다. 금번에는 호조에 저축해 둔 것으로 부족한 공물의 값에 보태 보충해 주고 1만여 석의 쌀을 덜어내어 우선 급함을 구원해 준다면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실제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을 어찌 전부 감해 주려 하느냐. 만약 한 고을로 말한다면, 재해를 입은 곳과 충실한 곳을 살펴서 감해 주는 것에 대한 여부를 결정할 것이니, 반드시 그 재해당한 결수(結數)가 얼마인지를 알고 난 다음에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시방이 아뢰기를,
"밖의 의논은 모두가 ‘공물을 감해주면 처리할 때에 절목이 번다하니, 차라리 전세(田稅)를 헤아려 감해 주는 것이 편리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묵히거나 재해를 입은 곳을 감해 주었으니 실결(實結)은 감해서는 안 된다."
하니, 이시방이 아뢰기를,
"올해의 흉년은 기전(畿甸)이 더욱 심한데 어떻게 처치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묵히거나 재해를 입은 곳이라면 기전이든 외방이든 똑같이 감해 주어야 할 것이니, 어떻게 그 사이에 후하고 박함을 다르게 할 수 있겠는가. 가을에는 실결에 따라서 거둬들이고 봄에는 그 형편을 보아서 역(役)을 감해 주고 굶주리는 자를 진휼해야 한다."
하였다.
10월 4일 신미
태백성이 나타났다.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을 사은사로 삼았다. 세폐(歲幣)를 감해준 데 대해 사례하고, 겸하여 동지(冬至)와 정조(正朝)를 축하하려는 것이었다. 정치화(鄭致和)를 평안 감사로 삼고 가선(嘉善)에 승진시켰다. 정치화는 일찍이 강씨(姜氏)의 옥사 때에 승지로서 패초(牌招)에 나아가지 않아 파직되어 있었는데, 이때 와서 이 직에 등급을 건너 뛰어 배수되었다. 이는 대신이 재능이 있다 말한데다, 또 청나라 사람과 정의가 서로 통하였기 때문이다.
성시각(成是覺)을 첨지(僉知)로 삼았다. 성시각은 바로 호조의 서리(書吏) 오대흘(吳大屹)이다. 서리였을 때 농간을 부리면서 도적질을 하다가 잡혀 장형을 받았다. 풀려나자마자 이름과 성을 바꾸고는, 권력 있고 지위 높은 자에게 붙어 군관(軍官)이 되었다. 북경에 갔다 와 선래(先來)033) 로서 가자(加資)되고 서반(西班)의 정직(正職)에 제수되기까지 하였으니, 이때 기강의 허물어짐과 관방(官方)의 어지러움이 이와 같았다.
10월 5일 임신
태백성이 나타났다.
인평 대군(麟坪大君)에게 안장 갖춘 말 한 필을 특별히 내리고, 부사(副使) 박서(朴遾), 서장관 김진(金振)에게 가자하였는데, 이는 세폐를 감했기 때문이다.
정선(鄭善)을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로 삼았는데, 그는 정명수의 양자이다.
10월 6일 계유
청인이 만상(灣上)에서 개시(開市)하는 기일을 매년 2 월과 8 월로 개정하였다.
10월 7일 갑술
태백성이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금번 수령을 별도로 천거하는 일은 사목(事目)이 심히 엄하고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하거늘, 지금 여러 신하들이 천거한 자들을 보면 이미 시험했다 실패를 본 사람도 있고 명망이 본디 없는 사람도 있으니, 천거주가 잘 가리지 않고 구차하게 채웠다는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연천군(延川君) 이경엄(李景嚴), 행 호군(行護軍) 김남중(金南重), 지중추부사 민람(閔灠), 행 호군 김진행(金鎭行), 사용(司勇) 변충범(邊忠範), 동지(同知) 송립(宋岦), 장단 부사 민진익(閔震益), 행 사맹(行司猛) 김희검(金希儉)을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왕세자가 남별궁(南別宮)에서 청인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10월 8일 을해
태백성이 나타났다.
정명수가 관반(館伴) 조경에게 말하기를,
"황제께서 나로 하여금 세 아이의 생사 여부를 탐지토록 하였으므로 비밀리에 묻는다."
하니, 조경이 답하기를,
"소현(昭顯)이 병으로 서거한 뒤 갑자기 역적 강씨(姜氏)가 저주한 변이 일어났는데, 법으로는 의당 주륙(誅戮)해야 하나 주상께서는 지친인 까닭에 단지 죽음만을 내렸다. 그리고 역적을 다스리는 율(律)로는 자손에게까지 연좌해야 하지만 주상께서는 차마 법대로 다하지 못하고 육지에서 뚝 떨어진 섬으로 내쳐 두어 생명을 보존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국에서 굳이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니, 정명수가 말하기를,
"지난날 자문 중에 역적 강씨를 사사(賜死)했다는 한 조목만 있었고, 세 아이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묻는 것이니, 이로써 돌아가 고하겠다."
하였다.
강원 감사 유항(柳恒)이 소를 올려 체직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유항이 신부례(新婦禮)를 감영에서 치룬 것과 각 고을에 제물을 분정한 것 때문에 대간의 논평을 심하게 받았는데, 도내의 수령으로 화합하지 않은 자가 뜬말을 퍼뜨려 그렇게 된 것으로 의심하고, 드디어 원주 목사 이성연(李聖淵), 영월 군수 이유창(李有淐), 홍천 현감 신평(申怦)을 파출시켰다. 그 뒤 신상(申恦)이 장령이 되자, 드디어 "탄핵받은 것 때문에 의심하여 어진 수령을 부당하게 내쫓았다."고 탄핵하니, 상이 추고할 것을 명하였다. 그는 함사(緘辭)에서 신상의 아들 신명규(申命圭)와는 혐의가 있다 하고, 또 성연의 불법적인 일 세 건과 신평·이유창 등의 잘못한 것을 끌어대며 말하기를 "이 몇 사람이 서로 비방하는 말을 만들어 냈다." 하자, 상이 또 이성연 등을 추고토록 명하였다. 유항은 스스로 편치 못하게 여겨 병을 이유로 체직을 요청하였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이 아뢰었다.
"칙사 정명수가 신 조경(趙絅), 도청(都廳) 신 조형(趙珩)·정창주(鄭昌胄)를 보자고 하므로 신이 곧 이들과 가보았더니, 드디어 전날 말을 꺼낸 일을 다시 묻고 또 말하기를 ‘관반(館伴)이 말한, 대국이 물을 바가 아니라는 말은 마치 대국을 지휘하는 것 같아 매우 타당하지 않다.’ 하기에, 신이 천천히 그 말을 해명하기를 ‘우리 나라가 만약 사대(事大)하는 데 삼가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대국에서 마땅히 힐문해야겠지만, 이 역적 다스리는 일과 같은 것은 대국이 다시 물어서는 합당치 않은 일인 것 같다. 나의 주된 뜻은 이러한 데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 혹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 같다.’ 하였더니, 정 칙사가 확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빛이 조금 풀린 듯하였습니다."
10월 9일 병자
일본국 대마 도주 평의진(平義眞)이 글을 예조에 보내어 상의 안부를 물었는데, 매년 하는 예로, 글 끝에는 ‘정보(正保) 4년’이라고 썼다 한다.
종성 부사 김원립(金元立)과 회령 부사 서필문(徐弼文)을 잡아들이라 명하였다. 육진(六鎭)의 지방 풍속은 사냥을 일삼고, 오랑캐 땅과는 한 줄기 물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오랑캐 땅에 짐승이 많아 백성들이 금령을 무릅쓰고 많이 강을 넘어갔다. 금년 8월에도 종성과 회령의 백성 24인이 말 13필을 끌고 몰래 오랑캐 땅에 들어갔다가 오랑캐에게 붙잡혔는데, 그중 한 사람이 도망해 돌아와 그 상황을 말하여 북병사(北兵使) 황집(黃緝)이 아뢰었다. 조정에서는 김원립과 서필문을 잡아오고 그 일을 청나라 사신에게 말하니, 청사는 "우선 가두고 대국의 처리를 기다리라."고 답하였다 한다.
10월 14일 신사
한거원(韓巨源)이 그의 아들을 위해 《맹자(孟子)》 1질을 구하므로 허락하였다. 한거원은 본래 우리 나라 창성(昌城) 사람으로 그의 어미가 창성에서 죽었는데, 거원이 의주에 이르러 그 말을 듣고 단지 곡 한 번만 하고는 조정에 옥강 만호(玉江萬戶)로 하여금 장사지내 주도록 청하였다.
10월 16일 계미
청인이 금부(禁府)와 육조 당상, 양사 장관, 승지를 불러 모두 영접 도감에 이르니, 변장 경성익(景星翼)·정신경(鄭信卿)과 뱃사람 등에게 힐문하기를,
"한인(漢人)의 배 안에 있던 물건을 너희들이 도적질해 간 것이 분명하다. 우리들은 이 한인의 신원 기록만을 가져갈 것이고, 추국하고 하지 않고는 오직 황제의 처분에 달려 있다."
하였는데, 변장 등은 모두 가슴을 치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을 따름이었다. 돌아갈 적에 표류해 왔던 한인을 모두 데리고 떠났다.
10월 17일 갑신
간원이 아뢰기를,
"수령이 별비(別備)하는 일은, 해는 백성에게 미치고 이익은 자기에게 돌아오므로 다투어 서로 본받으니, 참으로 밉살스럽습니다. 하물며 판관(判官)이 별비하는 것은 더욱 의거할 바가 없습니다. 만약 백성에게서 긁어들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마련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준직(准職)이 아니면 가자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법부(法府)에서 진계하여 결정하였으니, 전주 판관 이복길(李復吉)에게 가자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직강 정지익(鄭之益)은 사람됨이 형편없고 생김새가 괴이하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첨지 성시각(成是覺)은 호조의 서리 오대흘(吳大屹)입니다. 간악한 짓을 멋대로 하고 권한을 마음대로 하기를 몇 년 동안 계속하자, 그때 헌부의 판원이 가두어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탈출해 서로(西路)의 영문(營門)에 투속(投屬)하여 그 성명을 고치고 당상의 가자를 받기에 이르렀고, 부경(赴京)하는 사행(使行)에 빌붙어 또 실직(實職)을 제수하는 명을 입었으니, 이런 무리가 하는 짓이란 비록 입에 올릴 것도 못 되지만 그 정상을 추구해보면 매우 통탄스럽고 놀랍습니다. 유사로 하여금 사문(査問)하여 그에게 가자한 것과 새로 제수한 첨지 벼슬을 모두 삭탈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가설직(加設職)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8일 을유
정명수가 벽제(碧蹄)에 이르러 또 은산(殷山) 출신 김응립(金應立)에게 당상의 직첩을 제수토록 청하므로, 허락하였다.
지평 하진(河溍)이 진주에 있으면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소를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요청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이경여(李敬輿)·홍무적(洪茂績)·심노(沈𢋡)는 일을 말하다가 죄를 얻어 남쪽 변방으로 귀양가고, 이응시(李應蓍)는 한번 봉장(封章)을 올렸다가 멀리 북관(北關)으로 귀양갔다 하니, 성명의 세상에 이렇듯 말하는 자에게 죄주는 일이 있을 줄은 일찍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전에 전하께서는 이경여를 맑고 개결하다고 허여하셨고 무적에 대해서는 충성스럽고 곧다고 지목하시는 등 본디 두 신하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에는 아셨으면서 뒤에는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신다는 것입니까. 심로는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 직을 다하려고 생각하였고, 응시는 나랏일이 날로 어그러지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임금님의 덕이 혹 잘못될까 염려하여 꼿꼿한 태도로 소를 올렸으니, 이는 모두 전하의 병통을 적중시킨 것입니다. 아, 경여와 무적은 나이가 노경에 박두하였고 심로와 응시는 일생 동안 병이 많았는데, 만일 잘못을 씻어내는 윤음(綸音)을 아끼시어 갑자기 장기(瘴氣)가 서린 강가의 고골(枯骨)이 되게 하신다면 전하께서 뒤에 비록 후회하신들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네 신하의 죄를 특별히 용서하시어 쾌히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원하는 바에 따라 개차(改差)하라고 답하였다.
10월 21일 무자
완남군(完南君) 이후원(李厚源)이 차자를 올려 공물의 폐단을 극력 아뢰고 전세(田稅)를 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비국이 회계하여 불편하다고 하였는데, 상은 전에 정한 대로 시행하라고 답하였다.
10월 22일 기축
신유(辛曘)를 경상도 좌수사로 삼았는데, 이는 전에 가덕 첨사(加德僉使)로 있을 때에 군기를 별도로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복길(李復吉)을 통정(通政)에 승진하였는데, 이는 그가 전주 판관(全州判官)이었을 적에 관곡을 별도로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복흥(李復興)을 광평 권관(廣坪權管)으로 삼았는데, 이는 정명수의 청을 따른 것이다.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숭정(崇政)으로 올렸는데, 이는 정명수와 사귀어 주선한 공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문수(曺文秀)를 강원 감사로, 이후원(李厚源)을 함경 감사로, 변시익(卞時益)을 장령으로, 남중회(南重晦)를 지평으로 삼았다.
10월 23일 경인
달이 헌원성(軒轅星)으로 들어갔다.
10월 24일 신묘
헌부가 아뢰기를,
"면천 군수(沔川郡守) 오달천(吳達天)은 혹 관가에서 쓸 것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 대동미(大同米)를 거두는 것이라고 핑계대기도 하며 풍흉 여부를 마감하기도 전에 먼저 옛 결(結)에서 쌀을 거두었는데, 1결에서 거둔 것이 2두까지 된다 하니,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감사의 듣고 보는 것은, 암행 어사가 여염집에 드나들며 민간의 질고를 상세히 알고 탐오한 수령을 탄핵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이러한 것을 행하지 않아 탐관 오리가 멋대로 백성을 괴롭히게 하였으니, 청하건대 속히 암행 어사를 보내시되 갈 곳을 한정하지 말고 무작위로 추첨하여 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잘 살펴 수령 가운데 탐욕한 자를 조사해 내어 율에 의해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리고 오달천은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5일 임진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천변성(天弁星) 위로 들어갔고, 달은 태미 동원(太微東垣)으로 들어갔다.
행 호군(行護軍) 허휘(許徽)가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을 보고자 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경이 오늘 입대하니, 매우 기쁘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하니, 허휘가 아뢰기를,
"나라에서 비록 진휼하는 거조가 있긴 하지만 매양 고르지 못할까 두려운데, 그 일이 오로지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반드시 수령을 신중히 가려야 합니다. 옛날에는 십고 십상(十考十上)의 규정034) 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그만두고 행하지 않으니 권면하는 뜻이 매우 없어졌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십고 십상의 법을 근래에는 어째서 행하지 않는가? 해조에 물으라."
하였다. 허휘가 아뢰기를,
"산성(山城)의 공로에 대해 다 보답할 수는 없지만 녹에 부쳐줄 때 병조의 서리(書吏)가 으레 대부분 농간을 부려 공이 있는 사람도 혹 거론되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사뭇 불평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째서 균일하게 녹에 부쳐주지 않는가? 해조에 물으라."
하였다. 허휘가 아뢰기를,
"근래 각사에서는 인정(人情)035) 을 지나치게 거두어 들이는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주 철저히 금하라."
하였다. 허휘가 아뢰기를,
"지난날 강씨(姜氏)의 옥사 때에 상께서 실덕한 것은 조금도 없었고, 이경여와 같은 자가 죄를 입은 것은 또한 스스로 취한 바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승지 강백년(姜栢年)이 아뢰기를,
"요즈음 교화가 밝지 않고 학교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인심이 바르지 못하고 습속이 야박해져 역절(逆節)과 강상(綱常)의 변고가 있기까지 하니, 학교를 일으키고 교화를 밝히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매우 옳다. 해조에 말하여 착실히 거행하라."
하였다.
반송사(伴送使)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기를,
"대통관(大通官) 한보룡(韓甫龍)이 당상의 직을 얻기를 요청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0월 26일 계사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유철(兪㯙)을 경기 감사로, 조형(趙珩)을 집의로, 이일상(李一相)을 사간으로, 민광훈(閔光勳)을 부교리로 삼았다.
10월 27일 갑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어사를 파견하자는 것은 대론(臺論)에서 나왔으니, 아래에서 알아서 차송하라."
하니, 정원이 회계하기를,
"전부터 순안 어사(巡按御史)는 비국에서 계청하여 차출했지만 암행 어사는 반드시 상께서 간택하였으니, 아래에서 차송하는 것은 일찍이 그런 규례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가려 보내게 하라."
하였다. 이에 장령 신열도(申悅道), 지평 이완(李)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생각하건대, 민생의 곤궁함은 나라의 안위에 관계되는데 무마하는 자는 적고 침탈하는 자는 많으니, 만약 백성의 질고를 조사하여 재물을 탐한 자들을 규핵하지 않는다면 백성은 살 수가 없고 나라는 따라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어사를 보내기를 청한 것은 그들을 징계하고 격려하려는 것이었는데, 아래에서 차송하라는 하교가 뜻밖에 갑자기 나오니, 신들은 두렵고 떨려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은 경솔히 청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비국에서 전의 규정이 없다 하여 감히 보낼 자를 의망하지 못하니, 일이 결국 중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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