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계속되는 세도정치와 대원군의 왕권강화

싸라리리 2024. 12. 2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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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렴청정으로 무너져내리는 정치체제

조선의 정치 제도는 본래 엘리트 제도를 기반으로 설계되었다. 성리학적 원리에 따라 능력주의를 강조하며, 과거제를 통해 실력 있는 관료를 선발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이상적인 정치 체제였다. 고려 후기에 귀족가문과 무신들이 정치와 경제를 독점하면서 국정을 혼란하게 되었고, 이런 모순을 개선하고자하여 만들어진 나라였기 때문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순조 즉위시 안동김씨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한 것 같이,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요절하고 8살이었던 헌종이 즉위한다. 효명세자의 사망에는 안동김씨에 의한 독살설이 있다.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안동김씨였던 순조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순원왕후는 김조순의 딸이다. 안동김씨의 왕비에 의해 수렴청정이 2회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뭔가 께림칙하지 않은가?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추구하던 조선에서는 여성들이 집 밖에 나가는 것 자체를 제한하였다. 궁에 들어간 왕비의 경우 친정 외의 인물들과 교류할 기회가 거의 없으므로 대신들의 능력이나 다른 나라의 사정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적었다. 당연히 국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편협한 시각에서 접근할 가능성이 높고, 인사권은 자신의 가문에 집중시키게 된다. 

 

 

정치 체제를 엘리트 제도로 선택하는 경우의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관료 선출의 목적이 희석된다는 점이다. 공동체를 위해 가장 적합한 엘리트를 뽑기 보다는 과거시험에 의해 학문적 능력을 강조하게 되면서 특정 학파에 주요 관직이 집중되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계급의식이 커지게 된다. 귀족정과 엘리트제는 다르지 않다.

 

인간관계의 폭이 제한되고, 학문적 성취가 목적이 아니었던 왕비들이 수렴청정하게 되는 경우, 국가의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어, 가족들의 평가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다. 수렴청정으로 세도정치는 강화되고 조선의 통치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본다. 


늘어나는 세도가문,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

헌종은 효명세자와 세자빈 조씨의 아들이다. 세자빈 조씨가 풍양조씨이이다. 효명세자가 잠시 섭정을 하면서 풍양조씨의 세력이 일어나다가 효명세자가 요절하면서 풍양조씨의 정치적 입지는 약해졌다. 이후 1834년 헌종이 즉위하면서 조만영과 그의 아들 조병구, 조병현이 주요관직을 차지하면서 풍양조씨의 세도가 시작되었다. 

 

조만영은 이조판서(인사행정), 예조판서(교육/외교), 호조판서(재정), 판의금부사(사법기관),  훈련대장 등의 직을 역임했다. 조병구는 이조참의, 호조참판, 부제학, 규장각 직제학,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이조판서의 직을 역임했다. 조병현은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의, 형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좌참찬의 직을 거쳤다. 풍양조씨는 권력이 약화되어 형식적으로 유지된 6조의 요직을 쥐고 있었고, 안동김씨의 경우 비변사를 기준으로 부를 가져오는 요직을 차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헌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요절한 후 순원왕후(김조순의 딸)는 철종을 순조의 양자로 입양하고, 1849년 왕으로 즉위시켰다. 1851년 철종은 안동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았다. 이후 풍양조씨의 세력이 급격히 약해지고, 안동김씨의 세력이 다시 커지게 되었다. 철종은 5남 6녀를 두었으나 대부분 어릴 때 죽었다.

 

풍양조씨가 안동김씨를 압도했던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두 가문의 피터지게 서로를 죽였다기 보다는, 왕과 그 자손들의 외척이 되기 위한 노력에 집중하면서 서로 경쟁한 것으로 본다는 것 같다. 왕들이 연속적으로 후사를 남기지 못하거나 세자들이 일찍 죽어나가는 현상이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어떤 원인이 있다고 본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왕을 갈아치우고 국가의 요직을 두고 다툼을 벌이면서 국가 체제는 흔들리고, 백성들은 점점 힘들어졌다.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사고 팔고, 전정, 군정, 환곡 제도가 무너졌다. 1862년, 임술년에는 진주 민란이 발생한다. 민란 이후 삼정이정청을 설치했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다.

 

철종 사후 후손이 없었으므로 신정왕후(세자비 조씨)는 흥선군의 차남을 효명세자의 양자로 들여 왕위를 계승(1864년) 시킨다. 그가 11세에 왕이되는 고종이다. 흥선군 43세의 일이다. 고종과 철종은 17촌으로 사실상 남이다. 1866년 고종은 여흥민씨인 민자영과 결혼하는데(고종의 어머니도 여흥민씨다), 민자영이 민비 또는 명성황후로 불리고, 흥선군의 권력을 견제하면서 여흥민씨에 의한 세도정치를 시작한다.


흥선대원군의 등장

세도 가문 배제와 비변사 폐지 

철종 사후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종을 왕으로 추대하고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내세웠다. 어린 고종이 즉위하면서 자연스럽게 흥선군은 섭정을 하게 된다. 안동 김씨는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통제 속에서 섭정을 수행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섭정에 오르자마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들을 진행하고,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철저히 배제하였다.

 

 

철종 재위 기간(1849~1863)동안 세도정치 하에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비변사를 통해 국정을 독점하며 부패와 혼란이 심화되었고, 비변사는 매관매직과 권력 독점을 통해 세도 가문의 핵심 권력 기구로 전락했다.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와 국정 혼란의 원인으로 비변사를 지목하면서 권한을 축소시켰다. 1864~1865년 동안 비변사의 군사 및 외교 기능을 병조와 예조로 이관하기 시작하면서, 의정부와 6조 체제를 복원했다. 1866년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비변사의 국방기능은 완전히 병조로 흡수되었다. 1868년에는 비변사를 폐지하였다. 

 

서원 철폐

서원은 조선의 건국 이념?인 성리학을 가르치는 일종의 학원이다. 주로 지방의 양반들이 운영하면서 학문과 지방 정치 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과거시험이 매년 반복되면서, 서원은 중앙 정계 진출을 위한 발판이 되었고, 당파? 파벌? 생성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후기로 가면서 서원수가 급격히 늘어나 전국 600여곳에 달하는 서원이 생겨났다. 세금을 내지 않는 서원은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고, 제사에는 지역주민들을 동원할 수 있어 백성들의 삶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지방 유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1868년 서원 철폐령을 발표했다. 도산서원, 소수서원 등 전국의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을 모두 철폐했다. 철폐한 서원의 재산은 모두 국고로 귀속시키고 면세의 특권도 박탈했다. 

 

서원철폐로 국가 재정이 일부 증가하고, 지방 유림들의 힘은 약화되되는 등 긍정적 평가도 있으나, 당시 새로 일기 시작한 실학 등과 연계되지 않고, 전통 학문이 단절되는 등 근대화에 필요한 새로운 교육체계를 만들어내지 않아 부정적인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다. 

 

삼정 개혁 시도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부패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전국 규모로 수십년간 무너진 체계를 되살릴 수 없었다. 삼정(전정, 군정, 환곡)은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지방 관료의 부패로 인해 오랜 기간 악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단기적인 개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삼정개혁 이전부터 토지대장이 부정확했고, 대다수의 농민이 실제 소유한 땅과 세금 부과 대상이 맞지 않았다. 지방 수령들은 토지세를 과도하게 징수하거나 중간에서 횡령하는 일이 빈번했다. 흥선대원군은 토지대장(양안)을 새로 작성하려 했지만, 지방 관료들의 협조 부족과 반발로 인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군정 개혁의 목표는 가짜 군적(군역 명단)을 정리하고, 실제 군역 대상자에게만 군포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방 관료들은 기존의 가짜 군적을 없애는 대신, 더 많은 사람에게 군포를 부과하려 했고, 군역 면제를 돈으로 판매하는 관행이 지속되었다.

 

공명첩으로 관직을 사서 내려간 관리들이 많으므로 전국의 관직 체계를 고칠 수 있는 계획이 필요했지만 그런 규모의 계획이 없었고, 취약한 국가 재정의 문제로 공명첩의 발행을 근절하지 못하고,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난 후 관직의 매매 관행이 다시 살아나면서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경복궁 중건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시작하였다. 전국에서 수만 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대규모 공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액면가보다 낮은 가치를 가진 화폐(당백전)를 발행하였다.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걷는다는 명목으로 원납전을 징수하였으나, 사실상 강제 기부를 요구하였다.

 

 

당백전의 과도한 발행과 원납전 징수는 물가 상승과 화폐 가치 하락을 초래하여 민중의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무리하게 발행한 화폐는 물가상승을 가져온다. 쌀값이 당백전 발행 이후 두 배 이상 폭등한 지역이 발생했다. 시장에서 당백전의 수령을 거부하거나 당백전을 사용할 경우 물건의 값이 높아지는 등의 문제가 생겼다. 

 

 

 

 

 

 

쇄국정책

1866년 병인박해로  천주교를 탄압했다. 약 8천여명의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했다. 조선군은 정족산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군을 물리쳤지만, 강화도의 외규장각 도서와 보물들이 약탈되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으로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며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조선군은 배를 불태워 침략을 막았다. 

1871년 미국이 강화도를 침략(신미양요)하였다. 조선군은 강화도 광성보 전투에서 항전하였으나, 많은 피해를 입고 패배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단순하다. 외세에 강경 대응하여 조선의 전통 질서와 국권을 지킨다. 천주교를 근절한다. 조선의 전통을 유지하고, 민족 자긍심 어떻게 하는 부분은 잘 모르겠다. 자주적으로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라는 정도의 의사표현을 긍정적으로 본다면 그건 인정하겠지만, 이후의 발전방향 없이 스스로 고립되어버린 상황을 유지하는 것에 그쳐버린 정책이었다고 생각한다.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고 현실의 부패를 개혁하려한 것은 맞지만, 세계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해, 실질적인 대책이 없었다고 본다. 기존의 세도정치를 벗어났다고는 하나, 왕실이 자립하지 못하고, 여흥민씨의 세도정치를 다시 시작시켰다. 취약한 국력을 강화할 방법이 없어 외세에 휘둘리는 상황을 만들어내면서 전통과 단절되는 상황을 만들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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