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12월 14일
약원 도제조(藥院都提調) 김좌근(金左根)이 올린 상소에,
"외람되게 보호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당하게 되었으니, 죄가 매우 중대하여 속마음이 떨려 의금부(義禁府) 문밖에 엎드려 공손히 엄한 처벌을 기다립니다."
하니, 대왕대비(순정왕후)가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고 즉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부고 겸 주청사(訃告兼奏請事) 김흥근(金興根)은 병으로 체차하고 (관리를 다른사람으로 바꾼다는 의미) 조두순(趙斗淳)으로 대신하였다.
김병지(金炳地)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재차 계사(啓辭)를 올려 속히 청한 바를 허락해 달라고 하니(며칠 전 의관들을 심문하라고 한 일), 대왕대비가 비답하기를,
"이미 처분하였으니 다시 번독스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15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망전(望奠)을 지냈다.
빈청(賓廳)에서 〖망단자(望單子)를〗 서계(書啓)하였다.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시호 망단자(諡號望單子)를 ‘문현 무성 헌인 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로 〖서계하니〗, 【하늘과 땅을 날과 씨로 삼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중앙이나 지방에 업적이 나타난 것을 현(顯)이라 하며, 큰 것을 보전하여 공을 정한 것을 무(武)라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정사를 세운 것을 성(成)이라 하며, 총명하고 슬기로운 것을 헌(獻)이라 하고, 인(仁)을 베풀고 의(義)에 종사한 것을 인(仁)이라 한다. 영(英) 자는 시법(謚法)에 없는 글자이다. 선대의 뜻을 이어서 일을 이룩하는 것을 효(孝)라 한다.】 아뢴 대로 하라는 비지(批旨)를 내렸다. 묘호 망단자(廟號望單子)를 철종(哲宗)·선종(宣宗)·장종(章宗)으로 〖서계하니〗, 수망(首望)대로 하라고 하고, 전호 망단자(殿號望單子)를 효문(孝文)·효덕(孝德)·효휘(孝徽)로 〖서계하니〗, 수망대로 하라고 하였으며, 능호 망단자(陵號望單子)를 예릉(睿陵)·헌릉(憲陵)·희릉(熙陵)으로 〖서계하니〗, 수망대로 하라는 칙지(勅旨)를 내렸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상선(常膳)을 회복하도록 정청(庭請)하였다. 누차 아뢰니 마지 못하여 따랐다.
호조(戶曹)에서, ‘대원군궁(大院君宮)의 면세 전결(免稅田結) 1,000결(結)에 대한 토지 값으로 은 2,000냥(兩)을 실어 보내고, 궁장(宮庄)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본조(本曹)에서 콩 100석(石)과 선혜청(宣惠廳)에서 쌀 100석을 5년 동안만 실어 보내겠다.’고 아뢰었다.
부사(副使) 정헌교(鄭獻敎)는 병으로 체직하고 임긍수(林肯洙)로 대신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국휼(國恤)로 졸곡(卒哭) 전이니 식년 대소과(式年大小科)를 내년 가을로 물려서 행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2월 16일
이유응(李裕膺)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만운(李晩運)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이번 고부 청시 승습주청사(告訃請謚承襲奏請使)가 북경(北京)에서 머무는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예측할 수 없으며, 또 이렇게 더없이 중대한 일에는 응당 미리 마련한 비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관서(關西)의 영읍(營邑)에는 저축해 놓은 은(銀)이 넉넉하지 못하니 호조(戶曹)에 있는 은 가운데 6,000냥(兩)을 추이(推移)하여 들여보내되, 만일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돌아온 뒤에 회록(會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윤허하였다.
12월 17일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간산(看山)하는 일행이 지금 이미 하직하였습니다. 봉표(封標)한 곳 이외에도 만일 간심(看審)할 만한 곳이 있거든 일체 간심하여 제일 좋은 자리를 잡으라고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하에게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8일
대행대왕 행장 시장 찬집 당상(代行大王行狀諡狀纂輯堂上)으로 홍재철(洪在喆)·윤치수(尹致秀)·홍종응(洪鍾應)·김대근(金大根)·윤치정(尹致定)·이우(李㘾)·오취선(吳取善)·김병운(金炳雲)·김병덕(金炳德)·김병주(金炳㴤)를 모두 추가하여 차하(差下)하였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대원군궁(大院君宮)의 전결 등의 일은 규례대로 거행하라고 이미 명을 내렸는데 굳이 사양해 마지 않으니 부득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호조(戶曹)로 하여금 매달 쌀 10석(石)과 돈 100냥(兩)을 보내주게 하여 검소하고 소박하게 지내려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대원군이 토지등을 사양하니 매달 쌀과 돈을 보내주라고 한 것)."
하였다.
대왕대비가 북관(北關, 함경)에서 돈을 주조하는 것은 다시 하교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가신주(假神主)를 만들고 봉안할 처소(處所)는 숭정전(崇政殿)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9일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수렴(垂簾, 수렴청정)하는 것과 관련한 공상(供上, 물품을 올리는 것)은 기유년(1849)의 규례대로 하라."
하였다.
12월 20일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이런 망극한 때를 당하여 어찌 전해오는 말이 서로 알력을 일으키고 있다는 일로 사람을 극악무도한 죄과에 빠뜨릴 수 있으며, 등극한 초기에 또한 어찌 크게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일을 벌이겠는가? 살리기 좋아하는 선왕의 덕을 본받아 신지도(薪智島)의 천극 죄인(荐棘罪人) 이세보(李世輔)와 도배 죄인(島配罪人) 채귀연(蔡龜淵)은 모두 방축향리(放逐鄕里)하고, 그밖의 각인은 모두 방송(放送)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의 계사(院議啓辭)에, 【도승지(都承旨) 유치선(兪致善), 좌승지(左承旨) 서승보(徐承輔), 우승지(右承旨) 윤치성(尹致聖), 좌부승지(左副承旨) 윤자승(尹滋承), 우부승지(右副承旨) 심의원(沈宜元), 동부승지(同副承旨) 유광목(柳光睦)이다.】 이세보(李世輔)의 일에 대하여 내린 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부제학(副提學) 김병지(金炳地), 응교(應敎) 이정로(李正魯), 부응교(副應敎) 오준영(吳俊泳), 교리(校理) 장세용(張世容)·황정연(黃正淵), 부교리(副校理) 윤성진(尹成鎭), 수찬(修撰) 이능섭(李能燮)·이후선(李後善), 부수찬(副修撰) 정현덕(鄭顯德)·조성하(趙成夏)이다.】 ‘이세보(李世輔)를 방축향리(放逐鄕里)하도록 한 명을 중지하소서.’라고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연명 차자를 올려, 【대사헌(大司憲) 이유응(李裕應), 대사간(大司諫) 이만섬(李晩暹), 집의(執義) 이기정(李基正), 사간(司諫) 김우휴(金羽休), 장령(掌令) 심동신(沈東臣)·김진휴(金震休), 지평(持平) 송희정(宋熙正)·김양연(金亮淵), 헌납(獻納) 이태익(李泰翼), 정언(正言) 홍재신(洪在臣)이다.】 이세보(李世輔)의 일에 대하여 내린 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산릉간심도감(山陵看審都監)의 당상(堂上)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별단(別單)을 보니 다섯 곳이 길하다고 했는데, 의견이 어떠한가?"
하니, 도감 당상(都監堂上) 임백경(任百經)이 아뢰기를,
"이번 간심은 먼저 동쪽 길로 향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삼가 ‘봉표(封標)해 놓은 곳 외에도 간심할 만한 곳이 있거든 일체 간심하라.’는 하교를 받들고서 이어서 서쪽 길이라고 운운하는 곳으로 향하였습니다. 수국사(守國寺)의 뒷산과 고양읍(高陽邑)의 안산(案山)도 간심하니 도합 여덟 곳이 됩니다. 상지관(相地官)들이 말하기를 서너 곳이 아주 매우 좋은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그 중에 어느 곳이 가장 길한가?"
하니, 임백경이 아뢰기를,
"신이 본래 풍수에 어둡지만 비록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도 희릉(禧陵)의 오른쪽 산등성이가 용세(龍勢)와 사격(砂格)이 지극히 귀하고 크게 길한 자리라고 생각됩니다. 창릉(昌陵)의 왼쪽 산등성이와 소녕원(昭寧園)의 오른쪽 산등성이도 모두 길지(吉地)이며 의소묘(懿昭墓)의 오른쪽 산등성이도 또한 괜찮은 땅입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여러 지관도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상지관 김석희(金錫熙)와 방외 상지관(方外相地官) 박경수(朴京壽)·양종화(梁鍾華) 등이 아뢰기를,
"희릉의 오른쪽 산등성이는 모두 갖추어져 결점이 없는 대길(大吉)한 땅이고, 창릉의 왼쪽 산등성이, 소녕원의 오른쪽 산등성이, 의소묘의 오른쪽 산등성이도 또한 대길하여 크게 쓸 만한 땅입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재차 간심하고 세 번째 간심할 때에는 지사(知事) 김병학(金炳學)과 김병국(金炳國)도 함께 나가도록 하라."
하였다.
선전관(宣傳官) 정운귀(鄭雲龜)가 올린 서계(書啓)에,
"신이 11월 12일에 공손히 전교를 받들어 무예별감(武藝別監) 양유풍(梁有豐)·장한익(張漢翼), 좌변포도청 군관(左邊捕盜廳軍官) 이은식(李殷植) 등을 거느리고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 등지에서 동학(東學)의 괴수를 자세히 탐문하여 잡아 올릴 목적으로 바삐 성밖으로 나가 신분을 감추고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조령(鳥嶺)에서 경주까지는 400여 리가 되고 주군(州郡)이 모두 10여 개나 되는데 거의 어느 하루도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주막집 여인과 산골 아이들까지 그 글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천주(爲天主)’라고 명명하고 또 ‘시천주(侍天主)’라고 명명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한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오염되고 번성한지를 이를 통해서 알 만합니다. 그것을 전파시킨 자를 염탐해 보니, 모두 말하기를 ‘최 선생(崔先生)이 혼자서 깨달은 것이며 그의 집은 경주에 있다.’고 하였는데, 만 사람이 떠드는 것이 한 입으로 지껄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은 경주에 도착하는 날부터 장시(場市)와 사찰(寺刹) 사이에 출몰하면서 나무꾼과 장사치들과 왕래하니, 혹은 묻지도 않는 말을 먼저 꺼내기도 하고 혹은 대답도 하기 전에 상세하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최 선생이라고 부르는 자는 아명(兒名)이 복술(福述)이고 관명(冠名)이 제우(濟愚)로서, 집은 본주(本州)의 견곡면(見谷面) 용담리(龍潭里)에 있었는데 5, 6년 전에 울산(蔚山)으로 이사 가서는 무명을 사고팔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근년에 다시 본토(本土)로 돌아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혹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는 정성을 다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공중에서 책 한 권이 떨어지는 것을 얻어서 공부를 하였다.’라고 한답니다. 사람들은 본래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가 홀로 ‘선도(善道)’라고 한답니다. 대체로 그 도(道)를 배우기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몸과 입을 깨끗이 하고서야 열세 글자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를 전수해 주고, 또 그 다음에 여덟 글자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를 전수해 준다고 합니다. 그것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화를 면하고 병이 제거되며 신명을 접하게 된다는 등의 말로 속이고 홀리면서 권유하는 바람에 그 말에 빠져들어 가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글자를 모르는 아녀자와 아이들도 미쳐 현혹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약을 먹는 법이 있는데 한 번 그 약을 먹으면 이 학설에 전심하여 다시 깨달으려는 생각이 없으며 혹 약을 먹는 중에 금기하는 일을 조심하지 않다가는 크게 광증(狂症)이 나서 남의 눈을 빼먹고 그 자신도 스스로 죽고 만다고 합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돼지를 잡고 과일을 사서 궁벽한 산 속으로 들어가 제단을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글을 외워 귀신이 내려오게 하는데, 지금 이 괴수 최가의 집에서 금년만 해도 여러 차례 모여서 강설(講說)하였다고 합니다.
대개 처음 배울 때에도 예물이란 명목으로 전부 선생에게 바치고, 전도를 받아 깨닫게 되면 재산을 털어 선생한테 주되 조금도 후회하거나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 명이 모여서 도를 강론하는 자리에서는 최가가 글을 외워 귀신이 내려오게 하고 나서 손에 나무칼을 쥔 채로 처음에는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일어나고 끝에는 칼춤을 추면서 공중으로 한 길 남짓 뛰어올랐다가 한참 만에야 내려오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까지 있다고 합니다. 작년에 최가가 잡혀 진영(鎭營)에 갇히게 되자 제자 수백 명이 와서 호소하기를, ‘저희들의 공부가 본래 백성을 해치고 풍속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니, 저희 선생님을 속히 풀어주소서.’라고 하였답니다. 진영에서 즉시로 놓아주니, 몰려다니면서 의심할 만한 자취를 보이지 않았고 또한 비상(非常)한 일을 꾸민다는 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근을 막론하고 공부하러 오는 자는 날마다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이 전해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는 황당한 내용이 있어 그대로 믿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달 9일에는 따로 양유풍 등을 곧바로 최복술이 살고 있는 곳으로 보내어서 자세히 염탐해 오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최복술에게 가서 만나 공부하고 싶다고 간절히 청하니, 최복술은 조금도 비밀로 하거나 숨기는 것이 없이 흔쾌히 허락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공부하겠다고 청하되, 「배우는 글을 소리 내어 읽지 않고 마음속으로 외워서 읽으면 어떻겠느냐?」하니, 최복술이 말하기를, 「만약 단지 마음속으로 읽고 소리 내어 읽지 않는다면 배우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꺼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소리 내어 읽을 수는 없다.」고 하자, 최복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배우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내 공부가 이루면 오직 하늘 이외에 다른 것은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벽에도 써 붙여 놓은 글이 많았는데 자획이 범서(梵書)와 같아서 그 글의 뜻이 무슨 일을 가리키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필시 그 자가 공부하는 내용인 것 같았습니다. 이에 글씨를 하나 써달라고 하니, 끝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이튿날 또 오겠다고 약속하면서 비록 하루 이틀 사이라도 익힐 수 있는 글을 얻었으면 매우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최복술이 말하기를, 「이런 것은 최자원(崔子元)이나 이내겸(李乃兼)에게 가서 물으면 저절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최자원과 이내겸은 바로 경주 남문(南門) 밖에 사는 자들로서 최복술의 수제자(首弟子)라고 합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따로 사람을 보내어 만나보고 문답한 조목(條目)을 앞서 전해들은 이러저러한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비록 목격하지 못한 한두 가지 일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은밀히 서로 부합하여 정녕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이 또한 많습니다. 최복술이 동학의 괴수라는 철안(鐵案)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신은 그날 밤에 비밀리에 본진(本鎭)의 장교(將校)와 나졸(羅卒) 30명을 동원하여 양유풍 등으로 하여금 한밤중에 그 소굴을 곧바로 들이쳐 최복술을 결박하여 끌어내고 또 제자들 23인도 결박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본부(本府)에 신분을 밝히고 먼저 최복술의 용모 파기(把記)를 봉초(捧招)한 뒤에 형구(刑具)를 채워 단단히 가두고, 제자 등도 본부의 옥에 엄하게 가두어 놓고서 공손히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른바 최자원과 이내겸 두 놈에 대해서는 본부에 비밀 관문(關文)을 띄워 잡아가두게 했으나, 최자원은 먼저 눈치채고 도망을 쳤기 때문에 본부에 엄히 신칙하여 기어이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이내겸은 얼마 안 되어 체포되었기 때문에 또한 용모파기를 봉초한 다음 형구를 채워 단단히 가두었다가 최복술과 함께 일체 압송해 올려 보내겠습니다. 압수한 문서와 편지 등은 하나하나 단단히 봉하고 성첩(成貼)하여 이은식(李殷植)에게 인계하였는데, 그 문서 중에 《논학(論學)》이란 한 책에는 최복술이 동학의 거괴(巨魁)가 되는 근거가 그 중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은 이제 올라가서 복명(復命)할 생각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묘당(廟堂, 의정)에서 품처(稟處, 왕에게 아뢴 뒤 결정 받는다)하게 하라."
하였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북관(北關, 함경도)에서 돈을 주조(鑄造)하던 것을 지금 이미 철파(撤罷)하였다. 노(爐)를 치우고 광(鑛)을 폐지하는 일을 만일 혹 잘 살피고 신칙하지 못하였다가는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단서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아서 주조를 철파하는 어려움이 주조를 시작하는 것보다 심할 것이다. 제반 조처를 뜻을 다하여 살펴서 각각 조리 있게 하여 약탈과 괴롭힘과 낭패하여 살 곳을 잃는 등의 허다한 잡다한 폐단이 생기지 않게 하라는 뜻으로 묘당(廟堂)에서 글을 만들어 도신(道臣, 관찰)과 수신(帥臣,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통틀어 지칭함)에게 분부하라(이틀전에 명을 기다리라 했었음)."
하였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여러 의관(醫官)의 일(철종의 죽음에 대해 수사하던 일)은 대행대왕(大行大王)의 평소 어질고 후했던 덕을 체득하여 특별히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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