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양력
【음력 갑진년(甲辰年) 1월 15일】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환(閔泳煥)을 내부 대신(內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원본】 48책 4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1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환(閔泳煥)을 내부 대신(內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원수부 군무국총장(元帥府軍務局總長) 신기선(申箕善)이 사직하며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사직시켜 줄 것을 아뢰는 소장(疏章)에다 다른 군더더기 말을 덧붙이지 말아야 하겠지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천성은 같은 것입니다. 더구나 위급존망(危急存亡)의 때에 처하여서 어찌 아픔을 절규하는 외침이 없겠습니까?
지금 이웃 나라 군사들이 들끊고 강한 외국인들은 주인을 짓누르고 있으며, 협약은 이미 체결되었고 나라의 권한은 남에게 넘어갔습니다. 500년 동안 내려온 종묘 사직(宗廟社稷)과 3천리 강토가 장차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는 밤낮 근심하며 잠들지 못하시고 묘당은 속수무책이니 신하된 자로서 어찌 눈물을 뿌리며 통곡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죽을 병에도 양의(良醫)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병이 아직 죽을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은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나라는 아직 망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아직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조속히 내정을 바로잡고 강목(綱目)을 들어 펼쳐서 조야 중외(朝野中外)가 눈을 비비며 새롭게 보게 한다면, 안전과 평안의 기틀은 우리에게 있게 될 것이며 저들의 이른바 충고와 조치라는 것을 시행하지 않더라도 독립과 자립의 권리는 흔들림 없이 튼튼해질 것입니다.
내정을 바로잡으려면 무엇보다 바로잡히지 않는 폐단의 근원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폐단이 너무 많아 사람을 바꿔가며 말하더라도 다 진술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진언하는 자들이 왕왕 하나하나 들어 누누이 아뢰었기에 폐하(陛下)께서도 이미 싫도록 들으신 만큼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날 정사의 폐단과 백성들의 도탄에 대해서 폐하께서는 모르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하시는 것뿐입니다. 아! 폐하께서 종묘와 사직을 안전하게 하시려는 것은 자손 만대를 위한 대계이니, 그 절절한 뜻과 소원을 어찌 보통의 신민(臣民)들에게 비길 수 있겠습니까? 즉위하신 후 40여 년간 말을 달리며 사냥 놀이를 즐기신 적이 없고 거룩하고 어진 덕을 베푸셨건만,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여러 번 변고를 겪으셨습니다. 아래로만 흐르는 물처럼 나라가 점점 쇠해지다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폐하께서 이치를 밝히시는 것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치를 밝히는 것이 분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사로운 뜻에 가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베풀지 못하셨고, 그릇된 정사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거하지 못하셨으며, 백성들의 곤궁함을 알면서도 구휼하지 못하셨고, 신하의 간사함을 알면서도 배척하지 못하셨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면서도 곽공(郭公)이 망한 까닭입니다.
신이 진실로 문제를 들어 논하고 폐단을 논하여 바로잡으려고 하는 일들은 성명(聖明)께서 이미 들은 것이거나 알고 있는 것들이므로, 결코 마음에 새겨 두고 여러 모로 연구해볼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겨우 터득한 세 가지 문제가 혹시 이치를 밝히는 데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될까 싶으니, 범상하고 진부한 말이지만 비루하다 여기지 마시고 잘 살펴 주소서.
그 첫째는, 옛것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저 정사가 잘 되면 나라가 흥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지난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이상 그 필연적인 사적을 볼 수는 없습니다만, 역사책에 다 씌어 있으므로 그것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당우(唐虞) 3대의 시기는 사람들이 아득히 멀다고 생각하므로 우선 논하지 않기로 하고, 진(秦) 나라와 한(漢) 나라 이후만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나라의 문제(文帝)와 송(宋) 나라의 인종(仁宗) 때 어떻게 부유해지고 인구가 불어나 태평 성세가 이룩되었습니까? 그것은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여서, 하나의 누대를 세우는 데 있어서도 열 집의 재산이 들 것을 걱정하고 한밤중에도 한 마리의 양이면 될 비용을 아꼈기 때문입니다. 정관(貞觀)과 개원(開元) 연간에는 어떻게 정사가 잘 되어 옥(獄)이 텅 비었겠습니까? 그것은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간(諫)하는 말을 잘 받아들여서, 방현령(房玄齡)과 위징(魏徵)을 등용하고 요숭(姚崇)과 송경(宋璟)을 정승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서원(西苑)에서 벼슬을 판 것은 영제(靈帝)가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초래한 까닭이고, 별궁(別宮)을 백 개나 지은 것은 양광(楊廣)이 강도(江都)의 화를 초래한 원인입니다. 시렁이나 논두렁에까지 세(稅)를 붙여 재물을 늘릴 길을 열어 놓고 재물을 크게 모으자 당(唐) 나라 덕종(德宗)은 곧 건중(建中) 연간의 난을 겪게 되었고, 광산을 열고 진주를 캐면서 세를 받는 관리를 나라 안에 가득 차게 파견한 결과 명(明) 나라 신종(神宗)은 나라가 망하는 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신도(申屠)가 관청에 앉아 등통(鄧通)의 목을 거의 베었기에 한(漢) 나라 왕업(王業)은 그에 힘입어 흥하고, 공주(公主)가 배필을 구하면서 수령(守令)들도 고려하였기에 동경(東京)은 그 때문에 태평 시대가 이룩되었습니다. 궁중과 관청이 모두 일체가 되게 함으로써 제갈량(諸葛亮)은 한 나라 운수를 붙들어 일으킬 수 있었고, 제 마음을 헤쳐 보이듯 중문을 활짝 열어 놓음으로써 송 태조(宋太祖)는 왕업을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간사한 무당의 대언(大言)이나 귀신의 술법을 따른 것은 촉(蜀) 나라 변주(卞州)가 함락된 원인이었고, 선릉(宣陵)의 효자(孝子)를 담비 꼬리에 개꼬리 이어 놓듯 세운 것은 한 나라와 진(晉) 나라가 종말을 고한 까닭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두루 고찰해 보건대, 공적인 도리를 시행하고 정사의 원칙을 세우고서 나라를 흥하게 하지 못한 경우가 없었고, 사사로운 뜻을 따르고 거둬들이기에 애쓰고서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임금이 자질구레한 일까지 직접 하고 사사로이 벼슬을 주고서 나라를 잘 다스린 경우가 없었고, 무당을 신임하고 빌기를 일삼고서 난을 바로잡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후대의 제왕으로서 어찌 이것을 귀감으로 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다른 나라의 사적이니 근세 우리나라의 사적을 고찰하는 것만 같겠습니까? 500년간 나라가 태평하고 문명을 이룩한 것이 어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선왕들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보살피며 근면하고 검소하고 조심하고 신중한 것이 전고에 뛰어났고, 그것이 결국 가법(家法)이 되어 인자한 덕과 후한 혜택이 사람들의 골수에까지 속속들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빛나는 모범들이 보감(寶鑑)에 실려 있으니 폐하께서는 물론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세종(世宗)은 김종서(金宗瑞)를 임명하고서 의심하지 않았고, 명종(明宗)은 조식(曺植)의 상소 내용을 용납하고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 세조(世祖)는 늘 무명옷 차림을 하였고, 선조(宣祖)는 밀납을 도로 내려보냈으며, 인조(仁祖)는 끝내 김공량(金公諒)에게 벼슬을 주지 않았고, 영조(英祖)는 황해도(黃海道)의 간사한 무당을 참형(斬刑)에 처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선왕들의 높은 덕이고 큰 업적이며 우리나라가 억만 년 끝없이 번영하는 기초입니다. 훌륭한 것을 잘 계승하면 영원히 왕위를 보존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반대로 됩니다. 이것은 천지(天地)에 물어도 천만 년 변치 않을 이치입니다. 옛 글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리지만 천하를 가지고 한 사람을 섬기지는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만일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 그 나라는 반드시 흥하는 법이지만, 천하를 가지고 한 사람을 섬기려고 하면 틀림없이 그 나라는 망하기 마련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유념하시고 또 유념하소서.
그 둘째는, 실속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일이란 실심(實心)으로 실사(實事)를 행해야만 실효(實效)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나 웃는 낯으로 남의 이목(耳目)이나 즐겁게 해주면서 성과를 거두려고 하면, 성과는커녕 도리어 해를 입게 됩니다. 이것 역시 세상의 변함없는 이치입니다. 천지가 열린 후 세상을 잘 다스린 훌륭한 임금들이 공덕과 업적을 이룩하고 나라를 흥하게 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직 실속 있는 일에 힘쓰면서 형식을 숭상하지 않은 덕입니다. 구미(歐美)의 각 나라들이 저처럼 부강해져 천하무적이 되고 일본이 유신(維新) 3, 40년에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며 동양의 패권을 쥔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실지 일에 힘쓰면서 빈 말, 빈 형식을 차리지 않고 무익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周) 나라, 송 나라, 명나라, 청(淸) 나라 말기에 문(文)이 승(勝)하고 질(質)을 멸시하였는데, 우리나라는 그 풍에 물들어 형식을 차리는 일이 많아졌으며 최근에는 그 폐단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무릇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과 문물제도가 모두 형식뿐입니다. 옛것을 고수하는 자들은 형식만 차릴 뿐이고 개화(開化)한다는 자들도 겉치레만 할 따름입니다. 조칙(詔勅)과 연설(筵說), 부부(府部)의 규훈(規訓)이 중앙과 지방에 반포되기는 하지만 시행되는 것을 보면 거개가 체면이나 세우고 《등록(謄錄)》이나 갖추는 데 불과하고, 그 진의를 알고 옳게 처리하는 일이란 한 가지도 없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나라의 운명을 부지하고 정사를 잘해 보려고 하는 것은 동쪽으로 간다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계책은 오직 구습에서 벗어나 겉치레를 통렬히 제거하며 상하간이 서로 맹세코 마음과 생각을 깨끗이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 가지 정사를 하거나 한 가지 명령을 수행하는 데서도 반드시 돌이켜 생각해서 이 일이 과연 나라에 이득이 되겠는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겠는가를 따져 보고, 도움이 되면 시행하고 되지 않으면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일이 과연 성심성의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그저 사람들의 이목만을 위한 것인가, 유사(有司)인 신하들이 과연 실심(實心)으로 시행하겠는가를 헤아려 보고, 성의에서 나온 것이면 힘써 시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추궁하고 고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하간의 토론과 경외(京外)간의 타이름이, 한 자 한 자 한 마디 한 마디까지도 모두 꼭 실속이 있는 것인가를 자자구구(字字句句) 따져서, 혹시라도 그 사이에 부화한 글이나 의미 없는 말이 없게 하며 옛것이나 새것이나 문물제도에서도 무익한 번거로운 형식을 없애버리고 유용하고 실속 있는 일만 있게 한다면, 하는 일마다 반드시 성공하고 하려는 것마다 반드시 성취될 것이니, 어찌 백성들이 편안해지지 않고 나라가 태평해지지 않으며 어찌 재물이 풍부해지지 않고 군사들이 정예하여지지 않겠습니까? 1년만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며 3년이면 성취될 것이니 거의 날짜를 지목하여 이룩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그 셋째는, 인재를 잘 선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저 국가의 치란(治亂)은 인재 등용에 달려 있습니다. 군자(君子)가 벼슬길에 나아가면 그 나라는 반드시 흥하고, 소인(小人)이 벼슬길에 나아가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하기 마련이니, 이것 역시 세상의 변함없는 이치입니다. 역대의 제왕들이 이 이치를 모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늘 소인을 가까이하고 군자를 멀리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어찌 잘 다스려져 태평성세가 되는 것을 미워하고 난리가 일어나는 것을 좋아해서 그랬겠습니까? 다만 사사로운 뜻에 가려 어진 것과 간사한 것을 가려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려 보는 도리는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선정(先正) 문성공(文成公) 신(臣) 이이(李珥)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선조(宣祖)께 찬진(纂進)하였는데, 그 〈용현장(用賢章)〉에서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하고 부연하기를, ‘큰 요점은, 임금을 사랑하는 사람은 군자이고 작록(爵祿)을 사랑하는 사람은 소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소인은 임금이 밝은가 어두운가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작록에만 마음을 쓰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로우면 다른 것은 돌볼 겨를이 없으며 비록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해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 때문에 작록을 주는 권한이 임금에게 있으면 임금에게 아첨하고, 권력 있는 신하에게 있으면 권력 있는 신하에게 빌붙고 외척에게 있으면 외척과 결탁하며, 심지어 적국과 몰래 내통해서 제 임금을 물어뜯기까지 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작록인데 어느 겨를에 임금을 사랑하겠습니까? 군자는 그렇지 않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위해 마음을 쓰고 백성들을 위해 마음을 쓰기 때문에, 임금을 바르게 할 수 있다면 다른 무엇에도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직책을 지키는 것이 의리라면 임금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않고, 바른 말을 다하는 것이 의리라면 임금의 위엄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바른 말을 올릴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녹봉을 먹으면서도 도움을 주는 것이 없다면 벼슬에서 물러나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임금인데 어느 겨를에 작록을 사랑하겠습니까? 아! 이 말은 참으로 임금이 사람을 가려 보기 위한 시금석이 됩니다. 오늘날의 인재들로 말하면 줄곧 줄어들어 군자를 물론 많이 얻을 수는 없지만, 충실하고 공정함이 군자 근처에 가는 사람이야 어찌 없겠습니까? 아첨하는 무리들로 말하면 대대로 줄어드는 법이 없어 언제나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 가운데 많았습니다. 그들은 임금의 뜻에 영합하며 재빠르게 아첨하고, 더러는 외부의 동정을 염탐하고 더러는 법을 만들어 마구 긁어들이기도 합니다. 얽혀 돌아가며 교묘하게 구는 꼴은 귀신처럼 간교하고 은밀하여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참으로 임금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총애를 굳히고 권세를 도둑질하려는 것입니다. 군자편에 속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의견을 주장하거나 사사로운 이익 추구의 길을 막으면 기어이 참소하며 역적으로 몹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더욱 분별해내기 어렵지 않습니다. 군자편에 속하는 사람들이 기어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고 임금의 덕을 닦기 위해 힘쓰도록 하려는 것이 어찌 자신을 위해서 꾀하는 일이겠습니까? 임금이 과오를 저지르지 않게 하고 재앙의 싹이 생겨나기 전에 잘라 버리자는 것입니다. 임금의 뜻이라고 그저 따르기만 하면 나라가 망하고, 바로잡아주고 도와주면 어지러운 판국이 바로잡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게 되니 이야말로 충성인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역적이라고 하겠습니까? 소인들은 대체(大體)를 모르고 구구하게 아녀자의 충성을 발휘하면서 임금의 사랑을 차지할 것을 꾀하다가도, 혹 하루아침에 시세가 달라지고 사태가 변화하면 임금을 배반하고 원수에게 가 붙으며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마음먹기만 하면 역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치는 명백하고 확실한 것이며 예나 지금이나 추호도 틀림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이것으로써 인재를 취사(取捨)하는 저울로 삼으신다면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시겠습니까? 원컨대 폐하께서는 유념하시고 또 힘쓰소서.
무릇 이 세 가지 설은 신의 말이 아니라 옛날 성현의 유훈(遺訓)이며 온 천하의 공의(公議)이니, 폐하께서 고요히 생각하시고 깊이 새겨두시면 이치를 밝히는 것이 거울에 비치듯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를 정사에 시행하면 하는 일마다 마땅하지 않음이 없어, 위태롭던 것을 안전하게 만들고 불운을 행운으로 바꾸는 것쯤은 손쉽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바라 마지않는 것입니다. 혹 이렇게 하지 않고 여전히 전철을 밟으면서 경계할 줄 모르고, 겉치레를 없애지 않은 채 실속 없는 짓을 일삼거나 어진 사람과 간사한 자를 분별하지 않은 채 사도(邪道)가 항상 정도(正道)를 이기게 한다면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은 며칠을 못 가 끊어질 것입니다. 신이 감히 심오한 말씀을 드리지는 못하나 닥쳐오는 근심과 위험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속마음이 절박하여 말을 골라 하지 못했으니, 폐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고 말을 채택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병을 앓고 있으니 억지로 나오라고 하기는 곤란하므로 아뢴 대로 해 준다. 말미에 진술한 것은 정사의 원칙을 깊이 체득한 것으로 더욱 시정(時政)에 절실하다. 내가 곁에다 두고 보도록 하겠다."
하였다.
3월 2일 양력
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純)이 졸(卒)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종신(宗臣)은 천성이 진중하고 후덕하며 몸가짐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서 가까운 종친들 가운데서도 가장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또한 임오년(1882)과 을유년(1885) 양년에 높은 충성을 다한 수고로 말하면 역사에 기록될 만한 것이다. 한창 등용하던 도중에 갑자기 부고를 받고 보니 슬프기 그지없다.
졸한 청안군 이재순의 상사(喪事)에 장생전(長生殿)에서 관 1부를 보내 주고, 장례비는 궁내부(宮內府)로 하여금 되도록 넉넉하게 보내주도록 할 것이며, 특별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추증하고 시호(諡號)는 장사를 지내기 전에 시장문(諡狀文)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의논하도록 하라.
성복일(成服日)에는 치제(致祭)할 수 없을 것이니, 장일(葬日)에 비서원 승(祕書院丞)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제문은 직접 지어 내려보내겠다."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윤용구(尹用求)·한규설(韓圭卨)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 이유인(李裕寅)을 궁내부 특진관에, 의정부 찬정 이용태(李容泰)를 중추원 부의장에, 의정부 찬정 민종묵(閔種默)을 예식원장(禮式院長)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이근명(李根命)이 아뢰기를,
"전날 연석(筵席)에서 언로(言路)를 여는 문제에 대한 성교(聖敎)를 받았습니다. 사방에서 소란스럽게 유언비어가 돌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은 이때에 폐하(陛下)의 말씀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며 참으로 범상한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에 광무(光武) 3년 1월 4일에 신이 맡은 부(府)에서 올린 주본(奏本) 중 소장(疏章)에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조목을 일부 증삭하고 아래에 열거하였으니, 이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칙임관(勅任官)은 시임(時任)이나 원임(原任)을 막론하고 상소를 올리는 것을 막지 않는다. 1. 현임 주임관(奏任官)은 상소를 올려 문제를 말하도록 허락하되 사직시켜달라는 말만은 끼워 넣을 수 없다. 1. 일찍이 주임관(奏任官)을 지낸 사람과 판임관(判任官) 및 사서인(士庶人) 문제를 말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중추원(中樞院)에 헌의(獻議)하도록 허락하되 벼슬아치나 유생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는 때에만은 서명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1. 칙임관 이하의 관리가 상소를 올린 사람에게 대응해서 탄핵하려고 할 경우에는 증거가 확실한 후에야 상소를 올리는 것을 허락하며 전해들은 명백하지 못한 것을 근거로 삼아 상주(上奏)할 수 없다.】 하니, 윤허하였다.
【원본】 48책 44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16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하니, 윤허하였다.
3월 3일 양력
빈소(殯所)에 나아가 친히 진향(進香)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종2품(從二品) 조한국(趙漢國)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시종원 경(侍從院卿) 이근수(李根秀)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으며, 특진관(特進官) 이유인(李裕寅)을 시종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3월 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총호사(總護使)를 의정(議政) 이근명(李根命)으로 하라."
하였다.
육군 부령(陸軍副領) 권중석(權重奭)을 경위원 총판(警衛院總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육군 부령 현흥택(玄興澤)을 친위(親衛) 제1연대장(聯隊長)에, 육군 부령 이근형(李根馨)을 진위(鎭衛) 제4연대장(聯隊長)에 보임하였다.
칙령(勅令) 제1호, 〈의정부 관제 개정 안건〔議政府官制改正件〕〉, 제2호, 〈의정부 회의 규정(議政府會議規程)〉을 모두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의정부 관제 개정〉
제1조
의정부는 다음의 직원으로 구성한다.
의정(議政) 1인, 정1품(正一品)
참정(參政) 1인
찬정(贊政) 5인 전임(專任)이다.
내부 대신(內部大臣)
외부 대신(外部大臣)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군부 대신(軍部大臣)
법부 대신(法部大臣)
학부 대신(學部大臣)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은 모두 찬정을 예겸(例兼)하며, 이상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이다.
참찬(參贊) 1인은 칙임관 2등이며 3품(三品) 이상이다.
제2조
의정은 참정, 찬정 및 각부(各部)의 대신(大臣)들을 통솔하여 나라를 경영하고 다스리는 책임을 함께 맡되 온갖 정무에 대하여 아뢰고 집행하는 일은 의정이 주임 대신(主任大臣)과 함께 진행한다.
제3조
참찬은 의정, 참정 및 각 찬정들을 보좌하고 부(府)의 사무를 정리하는 책임을 진다.
제4조
의정은 참정, 찬정 및 각부의 대신과 참찬이 직무에 근면하지 못하거나 안팎의 칙임관, 주임관에게 과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우에는 의논을 거쳐 상주한 다음 처리할 수 있다.
제5조
법률과 칙명(勅命)은 의정과 주임 대신의 부서(副署)를 거쳐야 한다.
제6조
의정에게 일이 있을 때에는 참정이 사무를 서리(署理)하고, 의정과 참정에게 모두 일이 있을 경우에는 찬정 중에서 황제(皇帝)의 명령을 받아 임시 서리한다.
제7조
각 부의 서리 대신(署理大臣)에게도 찬정의 권한이 있다.
제8조
다음 사항은 회의를 거친 뒤에 상주하여 재가를 청해야 한다.
1. 법률 칙령안(勅令案)을 제정하고 폐지하거나 개정하는 건이다.
2. 세입 세출 예산 및 결산 건이다.
3. 내외 국채(國債)에 관한 건이다.
4. 국제 조약 및 중요한 국제 문제이다.
5. 칙임관과 주임관의 임명 및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문제, 다만 무관과 사법관 졸업인의 임명과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문제는 이 제한에 해당하지 않는다.
6. 관청의 폐치(廢置)와 분합(分合) 및 각부의 전속(專屬) 여부와 정리 개편하는 일체의 사항이다.
7. 각 부 간 주관 권한에 대한 쟁의이다.
8. 사대부(士大夫)의 상소를 품처(稟處)하는 일, 비답을 받드는 건이다.
9. 예산 외에 지출하는 건이다.
10. 조세(租稅)와 관련하여 신설하거나 변경 및 존폐(存廢)에 관한 문제와 관청 소속 토지, 산림, 집, 배 등의 관리와 처리 및 전선, 철도, 광업 등 개설에 관한 건이다.
11. 특지(特旨)로 회의에 내린 건이다.
12. 국내에 일이 있을 경우 무마시키는 등의 특별 방법이다.
제9조
의정부 회의에 황제 폐하(皇帝陛下)가 임어(臨御)하는 경우도 있다.
제10조
의정 이하 직원들이 의견이 있을 때에는 무슨 문제이든 막론하고 청의서(請議書)를 제출할 수 있다.
제11조
각 부의 대신이 실지로 앓거나 혹은 기타 사고가 있을 때에는 각 협판(協辦)이 의정부 회의에 대리로 참가할 수 있다.
제12조
본 칙령은 반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제13조
광무(光武) 2년의 칙령 제18호는 본 칙령이 반포되는 날로부터 폐지한다.
〈의정부 회의 규정〉
제1조
의정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어느 때든지 참정, 찬정 각부의 대신 및 참찬을 소집해 개의(開議)할 수 있다.
제2조
의정부 회의는 비밀로 한다.
제3조
의정 이하 직원이 3분의 2 이상 참석하지 못한 경우에는 개의할 수 없다.
제4조
주무 대신(主務大臣)이 없는 경우에는 당해 부(部)의 의안(議案)을 토의할 수 없다. 다만 당해 부의 대신이 회의에 재차 참석하지 못한 때에는 편의에 따라 의논할 수 있다.
제5조
한 부(部) 또는 몇 개 부에 관련된 문제는 당해 부의 대신이 참석하는 외에 당해 부의 협판(協辦) 혹은 국장(局長)이 그 문제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다. 협판 이하는 참찬과 같이 자리한다.
제6조
회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의정이 개회를 알린다.
2. 참찬이 각 의안(議案)을 가지고 일어서서 낭독한다.
3. 제의한 직원이 제출한 이유를 설명한다.
4. 참정, 찬정이 토론과 설명, 질문과 답변을 할 때에는 일어서서 의정을 향해서 한다.
5. 표제(標題)에 찬성과 반대를 표한다.
6. 의정이 참찬에게 명하여 표제를 거두어 찬성과 반대 중 다수에 따르고 자기 의견을 별도로 표제에 표한다.
7. 의정이 폐회를 알린다.
8. 원안(原案)에 대해 토론한 기록과 표제를 문서에 기재한다.
9. 의정과 주임 대신이 협의한 상주(上奏) 안건에 서명한다.
10. 협의한 안건에 대한 비지(批旨)는 의정이 다음 회의에서 낭독한다.
11. 재가(裁可)한 안건에는 수결하고 옥새를 찍는다.
12. 재가한 안건은 관보(官報)에 반포한다.
제7조
참찬이 낭독한 안건에 대하여 찬정 중에서 자세히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때에는 다시 낭독할 것을 청할 수 있다.
제8조
찬정이 회의한 사안에 대하여 의견이 합치되지 않을 때에는 심사 보고서를 일주일 안으로 수정할 수 있다.
제9조
토론한 사안이 지루하여 결정이 나지 않은 경우에는 의정이 다음 회의로 물려 정하여 계속 토론한다.
제10조
논의를 거쳐 재가를 청하는 안건은 의정 및 주임 대신이 직접 올릴 수 있다. 다만 명을 받들지 못하였을 때에는 편의에 따라 전달해서 올린다.
제11조
회의에서 결정한 의안(議案)을 재가할 성지(聖旨)가 있을 때에 가(可)라고 한 표제(標題)의 다소에 관계없이 재가할 권한을 가지며 또 혹 당해 안건에 대한 토론 내용이 성의(聖意)에 맞지 않을 경우 명령을 내려 다시 토론하게 할 수 있다.
제12조
참찬이 일이 있을 때에는 찬정 중에서 품계(品階)가 낮은 관리가 의석(議席)에서 임시로 대행한다.
3월 5일 양력
정2품(正二品) 민영기(閔泳綺)에게 특별히 징계를 사면시켜 주고 육군 부장(陸軍副將)에 임용하였다.
예식원 부장(禮式院副長) 이근상(李根湘)을 내장원 감독(內藏院監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으며, 특진관(特進官) 이건하(李乾夏)를 시종원 경(侍從院卿)에,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민영린(閔泳璘)을 예식원 부장에, 종2품(從二品) 박용화(朴鏞和)를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3월 6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처럼 어려운 때를 만나서 짐이 정사를 바로잡을 일념으로 밤낮 겨를이 없는 만큼 의정부(議政府)의 여러 신하들도 마땅히 이 뜻을 체득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귀기울인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아직 크고 훌륭한 계책을 보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오직 무사태평으로 침묵이나 지키는 것을 자기 안전을 위한 좋은 계책으로 여기고, 구구하게 책임을 회피하면서 관제(官制)나 개정하는 데 불과하다. 생각해 보건대 오늘날의 조치 역시 그저 형식적인 법이나 시행해서야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아! 임금이 밝고 신하들이 어질어야만 만사가 잘 되는 법이다. 지난날의 잘못된 정사를 따져 보건대 짐이 과오를 책임지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나, 보필하는 신하들 또한 과연 각자가 할 일을 다했다 하겠는가? 지금부터 구습을 그대로 답습하지 말고 일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분발해서 용감히 나아가고, 사실을 바탕으로 옳은 것을 탐구하며 함께 일을 성취해 나갈 것이다. 이것이 깊이 소망하는 바이니, 아! 힘쓸지어다."
내부 대신(內部大臣) 민영환(閔泳煥)을 인산(因山) 때의 돈체사(頓遞使)에 임명하였다.
3월 7일 양력
정1품(正一品) 조병식(趙秉式)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에, 육군 부장(陸軍副將) 심상훈(沈相薰)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충청남도 관찰사(忠淸南道觀察使) 이도재(李道宰)를 내부 대신(內部大臣)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법부 협판(法部協辦) 신태휴(申泰休)에게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을 겸임하게 하였다.
3월 8일 양력
빈소(殯所)에 나아가 별전(別奠)을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환(閔泳煥)을 학부 대신(學部大臣)에,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가진(金嘉鎭)을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에, 육군 참장(陸軍參將) 권중현(權重顯)을 의정부 찬정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도재(李道宰)를 인산(因山)할 때의 돈체사(頓遞使)에 임명하였다.
졸(卒)한 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純)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3월 9일 양력
육군 참장(陸軍參將) 민상호(閔商鎬)를 육군 법원장(陸軍法院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 정한조(鄭漢朝),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백성기(白性基)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조한국(趙漢國)을 충청남도 관찰사(忠淸南道觀察使)에, 외부 협판(外部協辦) 이중하(李重夏)를 평안남도 관찰사에,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기(閔泳綺)를 평안북도 관찰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철도원 회계과장(鐵道院會計課長) 현영운(玄暎運)을 철도원 감독(鐵道院監督)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으며, 내부 협판(內部協辦) 이봉래(李鳳來)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도록 명하고 이어 인산(因山) 때의 돈체사(頓遞使)에 임명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이 아뢰기를,
"평리원(平理院)의 질품서를 보니, ‘피고 김익진(金益珍)은 도주한 박영효(朴泳孝)의 염탐꾼으로서 기밀을 탐지해서 전달한 정상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피고 오성모(吳聖模)는 정부 개혁이 시급한 문제이나 돈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박영효의 말을 믿고 공모하였습니다. 이에 철산(鐵山)의 부자(富者) 오희선(吳熙善)에게서 2만 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는 이어 박영효의 수찰(手札)을 가지고 귀국해서 주선을 하였습니다. 피고 안명선(安明善)은 노상에서 오성모를 만나 그의 집에 함께 가서 몇 달 동안 유숙하였는데, 오희선에게서 돈 2만 원을 얻으려 한다는 말을 대략 듣고서 한껏 취한 김에 요란하게 칭찬하면서 자신이 교분을 맺고 무리를 모아 정부를 개혁하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현제창(玄濟昶)의 고발과 각 피고들의 공초와 자백에 의해 명백하여졌습니다. 김익진은 《대전회통(大典會通)》의 〈금제조(禁制條)〉에서 중요한 본국의 사정을 누설한 데 대한 법률을 적용하여 교형(絞刑)에 처할 것입니다. 오성모는 《대명률(大明律)》의 〈적도편(賊盜編)〉에서 반란 음모를 공모한 자는 주모자와 추종자를 가리지 않는다는 법률과 《형률명례(刑律名例)》 제6조에 의하여 참형(斬刑)에 처할 것입니다. 안명선은 《대전회통》의 〈추단조(推斷條)〉에서 불온한 말을 한 자에 대한 법률에 의하여 태형(笞刑) 100대를 쳐서 종신 징역에 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원래 상정한 법률대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각 재판소(裁判所)에서 심리한 살옥 죄인(殺獄罪人) 이창남(李昌男) 등 14명과 강도 죄인 윤흥옥(尹興玉) 등 6명, 50관(貫) 이상의 물건을 도적질한 죄인 오주백(吳周伯) 등 10명을 교형(絞刑)에 처할 것에 대한 안건을 개록하여 상주하니, 윤허하였다.
3월 10일 양력
계빈전(啓殯奠)을 행하고 나서 찬궁(欑宮)을 열었다.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일본 공사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와 미국 공사 알렌〔安連 : Allen, Horace Newton〕을 접견하였다.
정1품(正一品) 민영소(閔泳韶)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철도원 감독(鐵道院監督) 최영하(崔榮夏)를 철도원 부총재(鐵道院副總裁)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3월 11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김석진(金奭鎭),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지용(李址鎔), 육군 부장(陸軍副將) 조동윤(趙東潤), 외부 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 김석규(金錫奎), 정3품(正三品) 김영한(金榮漢)을 모두 빈전(殯殿)의 향관(享官)으로 추가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경상북도 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 이윤용(李允用)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이 아뢰기를,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신태휴(申泰休)의 질품서(質稟書)를 받고 그 내용을 보니, ‘피고 장호익(張浩翼) 등의 안건을 검사(檢事)의 공소에 의하여 심리하니, 피고 장호익의 공초(供招)에, 「저는 을미년(1895) 2월 24일 일본(日本)에 건너가서 사관 학교(士官學校)를 졸업한 후 연대(聯隊)에 들어가 견습(見習)하였습니다. 본국 정부(政府)에서는 동학(同學) 19인(人)에게 모두 위관(尉官)을 주고서 그대로 유학(留學)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주일 공사(駐日公使)가 정부에 보고를 전하여 유학 비용을 청구하자 이어 소환(召還)하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공사가 학도(學徒)들이 귀국(歸國)할 비용과 복장(服裝)에 대한 비용을 정부에 청구하였으나 몇 달 동안 질질 끌다가 끝내 지불해 주지 않기 때문에 견딜 수 없어 유학생 노백린(盧伯麟) 등 6명은 먼저 귀국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15인은 주일 공관(駐日公館)에 기숙하였는데 방이 비좁아서 생활할 수 없었으므로 방을 빌려 나누어 거처하였습니다. 할 일은 없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귀국 비용이 오기만을 고대하였으나 종내 기약이 없었습니다. 서로 걱정하며 탄식하던 차에 권호선(權浩善)이 논의를 꺼내기를, 『우리나라가 망할 날이 조석(朝夕) 간에 달려 있건만 전혀 막아낼 대책이 없으니 우리가 어찌 편안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마땅히 맹약(盟約)을 정하여 나라를 붙들어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맹약서(盟約書)를 만들었지만 그 내용이 두루뭉술하고 명확치 않아서 사실 효과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용을 고치고 제목을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라고 달았는데, 그 중의 조건은, 첫째, 대황제 폐하(大皇帝陛下)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둘째, 황태자(皇太子) 전하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셋째, 의친왕(義親王)을 그 자리에 대신 올려 앉힌다는 것이고, 넷째, 국사범(國事犯)들로 정부를 조직한다는 것이고, 다섯째, 이 일을 누설하는 경우에는 서슬 퍼런 칼날을 안긴다는 것입니다. 광무(光武) 4년(年) 월(月)과 일(日)을 밝힌 아래에 맨먼저 조택현(趙宅顯)을 쓰고 그 다음에는 장호익(張浩翼)·김홍진(金鴻鎭)·권호선(權浩善)·강용구(姜容九)·방영주(方泳柱)·장인근(張寅根)·이기옥(李基鈺)·권승록(權承祿)·김희선(金羲善)·김형섭(金亨燮)·김교선(金敎先)·김봉석(金鳳錫)·김홍남(金鴻南)·김관현(金寬鉉)을 써서 15인의 이름을 같이 열거하였으며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 후 여러 사람들은 나뉘어 귀국하였고 저는 조택현과 함께 뒤에 떨어져 같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조택현이 저에게 말하기를, 『내가 유길준(兪吉濬)을 만났더니 장차 대한(大韓) 정부를 조직하려고 한다고 하니 같이 가서 만나보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가서 만나 보고 그의 방략(方略)을 물어보니 과연 조택현이 한 말과 같았습니다. 저는 조택현과 함께 같이 돕겠다는 약속을 한 뒤 조택현이 또 유길준에게 혈약서(血約書)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유길준이 그 약서(約書)를 보고 나서 그냥 두라고 하였기에 그냥 두고 돌아왔습니다. 신축년(1901) 음력(陰曆) 9월 보름께였습니다. 저는 조택현과 함께 귀국하는 길에 마관(馬關)에 당도하여 모국(某國)의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로 말하면 일찍이 유길준과 자리를 같이 했을 때 낯을 익힌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유길준이 나에게 이번에 한국(韓國)에 건너가 상업을 경영하도록 한 것은 전날 약속한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이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도성에 들어온 후 여러 번 이현(泥峴) 길에서 만나보았는데, 어디서 사느냐고 물으니, 직조 회사(織造會社)에 머물러 있지만 찾아올 필요는 없겠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그 사람이 서상집(徐相潗)에게서 밑천을 구해 가지고 동현(銅峴)에 집을 샀다는 말을 조택현에게서 들었지만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초에 혈약서를 만들 때 권호선이 피고와 함께 같이 의논을 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권호선과 조택현의 대질 신문에서 피고가 다만 당시의 일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고만 하였으니, 말하지 않아도 분명한 일입니다.
피고 조택현의 공초에, 「저는 일찍이 일본에 가서 사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주일 공사 이하영(李夏榮)이 여러 학도를 불러 놓고 말하기를, 『내가 정부에 전품(轉稟)하여 차례로 벼슬을 주도록 하겠지만 소환(召還)한다는 명령이 있으면 또한 귀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잘 알고 우선 공관에 머물러 있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공관의 청사(廳舍)가 비좁아서 여러 학도들이 거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기 여관을 정하여 서너 명씩 나뉘어 거처하였는데, 저는 장호익, 권호선, 김교선과 한 곳에 거처하였습니다. 하루는 장호익, 권호선 두 사람이 논의를 꺼내기를, 『우리가 여기에 와 있는 몇 년 동안에 산더미같이 빚을 졌는데 정부에서 학비로 지불해 주는 금액이 있지만 언제 내줄는지 까마득하니, 이렇게 계속 나가면 어떻게 빚을 갚겠는가? 이제부터 시작하여 별도로 약조를 하여 돈과 재물을 남용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고계(告戒)해서 뒷날의 폐단을 막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학도를 청해다 모아 놓고 장호익이 먼저 말하기를, 『지금 이 약회(約會)는 우리들이 빚을 진 것 때문에 특별히 맹약을 정하여 대책을 세우려고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권호선이 맹약서를 잘 짓는다고 말하여 권호선이 그 글을 지었습니다. 장호익이 글을 보고 말하기를, 『내용이 두루뭉술하고 명백하지 않아서 실지 효과가 없겠다.』라고 하고는, 제 손으로 고치고 제목은 ‘혁명혈약서’라고 달았는데, 그 약서의 가운데 부분에 위의 사항 다섯 조건을 기재하고 다음에 권호선과 저 등 15인의 성명(姓名)을 쓰고서 모두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 후 13인은 먼저 귀국했고 저는 장호익과 함께 떨어졌습니다. 어느 날 유길준에게 가보니, 그가 말하기를, 『지금 대한 정치가 문란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책을 내서 정부를 조직해야 하겠다. 그러나 이 일은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 한국인(韓國人) 서상집(徐相潗)은 나의 친구인데 내가 이 문제를 가지고 타이르면 그가 필경 따를 것이다. 그리고 모국(某國) 사람들 중에도 돈을 내어 함께 도모하는 사람이 있는데 모국(某國)의 귀휴(歸休)한 군인으로 1,000명에 한하여 내게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대황제 폐하가 동가(動駕)하는 때를 틈타 시위(侍衛)를 막고 창덕궁(昌德宮)이나 경복궁(景福宮)에 맞아 이어(移御)한 후에 정부를 조직해야 할 것이다. 거사(擧事)를 할 때에 이진호(李軫鎬)·이범래(李範來)·이겸제(李謙濟)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갈 것이고 당신과 장호익·천장욱(天章郁)·서상집·서상규(徐相奎)는 모국의 사람들과 서로 도우며 호응하라. 등용할 사람은 김윤식(金允植)·한규설(韓圭卨)·민영환(閔泳煥)·민영준(閔泳駿)·이윤용(李允用)·김가진(金嘉鎭)·이완용(李完用)·권재형(權在衡)·한창수(韓昌洙)·박승봉(朴勝鳳)·홍재기(洪在箕)·김정식(金貞植)·유성준(兪星濬)·윤치호(尹致昊)·서상집·신해영(申海永)·박제순(朴齊純) 등 여러 사람들이라고 한다. 군(君)들이 쾌히 따르겠으면 특별히 서약문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곧 서약문을 직접 썼는데, 첫째, 황상(皇上)을 받들어 정부를 조직한다는 것이고, 둘째, 시종 일관하게 협력해서 돕는 데 대한 문제이고, 셋째, 비록 부자 형제간이라도 절대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연월일(年月日) 아래에 맨 먼저 유길준의 성명을 쓰고 그 다음에 저와 장호익의 이름을 쓰고 모두 도장을 찍은 다음 전날 만든 약서를 꺼내 보이니, 유길준이 한 번 보고 나서 말하기를, 『이런 것을 가지고는 일을 하는 근본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젊은 사람들이 불러일으킨 일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약서를 그냥 두고 돌아 왔습니다. 그 후 유길준이 뒤이어 북해도(北海島)에 갔기 때문에 더는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광무(光武) 5년 10월 귀국할 때에 길가에서 외국인을 만나 배를 같이 타고 왔는데, 그에게 한국에 가는 이유를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나는 유길준의 편지를 가지고 서상집과 천장욱에게 간다.』고 하였습니다. 편지를 하게 된 이유를 물어보니, 유길준이 장차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서상집과 천장욱 두 사람에게서 밑천을 구하자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귀국 후 그 사람을 만나러 동현 상점(銅峴商店)에 가서 천장욱을 만났습니다. 통성(通姓)을 한 후 천장욱이 저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월(正月) 간에 외국인 및 서상규와 함께 마관(馬關)에 가 보았는데, 유길준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4, 5일 후 저는 그 사람을 만나보러 다시 갔지만 그의 사환(使喚)인 김석구(金錫求)만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저는 본래 유성준(兪星濬)과 평소 친분이 있기 때문에 계동(桂洞)에 혼자 가서 그를 방문하여 이야기를 벌인 후 담모퉁이에 나가 서서 말하기를, 『영감(令監)의 중씨(仲氏)가 장차 정부를 조직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유성준이 말하기를, 『정부는 어떻게 조직하고 누구를 등용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등용할 사람은 김윤식, 민영환(閔泳煥)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유성준이 장차 말을 이으려고 하는 때에 마침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기 때문에 더 말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 김형섭(金亨燮)의 공초에, 「을미년(1895) 3월에 저는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건너가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무관학교(武官學校) 교관(敎官)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제가 일찍이 김희선(金羲善), 김홍진(金鴻鎭), 윤치성(尹致晟) 등과 함께 주일 공관에 머무르고 있을 때, 조택현, 장호익, 권호선, 김홍남, 김관현, 김교선 등은 야광사(夜光寺) 앞거리의 셋집에서 지냈는데 학도들이 늘상 그 집에 모여 놀았습니다. 광무(光武) 4년 9월 보름쯤이었습니다. 조택현이 저에게 우편엽서를 보내 왔는데 그것은 모임에 참가하라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보니 권호선이 여러 학도들이 벌여 앉은 복판에다 책자 하나를 꺼내 놓고 한 편(編)을 낭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의 다섯 가지 조건이었습니다. 이어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서슬 퍼런 칼날을 안긴다는 구절이 있었으므로, 만약 반대하였다가는 필경 목숨을 보존하기가 어렵겠기에 할 수 없이 그의 말대로 도장을 찍었습니다만, 중죄(重罪)를 범한 이상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 김희선(金羲善)의 공초(供招)에, 「을미년(1895) 5월 일본에 유학(遊學)을 가서 사관학교(士官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교관(敎官)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저는 일찍이 주일 공관(駐日公館)에 거처하고 있을 때 장호익(張浩翼), 권호선(權浩善), 조택현(趙宅顯) 등이 편지로 부르기에 3인(人)이 거처하고 있는 야광사(夜光寺) 앞거리에 가보니, 15명(名)의 학도들이 모임에 모두 모여서 맹약(盟約)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조택현이 책자 하나를 꺼내면서 ‘이것이 바로 혈약서(血約書)다.’라고 하고 장호익이 나에게 도장을 찍으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도장을 찍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 김교선(金敎先)의 공초에, 「일찍이 일본(日本)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교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저는 일찍이 일본에 가 있을 때 나이가 어리므로 의탁해서 지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택현 등과 함께 야광사 앞거리에 거처하였습니다. 하루는 여러 학도들이 모여서 여비가 이미 떨어져 귀국할 수 없는 형편을 서로 이야기하다가 혈약서를 만든 뒤 저로 하여금 도장을 찍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학도들이 모두 같이 나오는 판에 겁을 낸다든지 반대할 것 같으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여 도장을 찍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 방영주(方泳柱)의 공초에,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향관(餉官)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 저에게 조택현이 와서 말하기를, 『이제 여러 학도들이 더는 학비를 남용하지 말 것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기숙하고 있는 집에 모여 있으니 군(君)도 가서 참가하라.』고 하기에 그 길로 그 여관으로 갔습니다. 조택현·장호익·권호선 3인이 대황제 폐하(大皇帝陛下)를 폐위(廢位)하고 의화군(義和君)을 추대하여 정부를 개혁하되 시임(時任)인 관리들을 일일이 축출하고 도망친 국사범(國事犯)들로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내용을 제창하고 혈약서를 만들었으며 각각 거기에 성명을 쓰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미 반역 음모에 참여하였으니, 빨리 죽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피고 김홍진(金鴻鎭)의 공초에, 「일본에 건너가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벼슬에 임용되었습니다. 일찍이 주일 공관의 행랑(行廊)에 거처 하고 있을 때 조택현이 저를 찾아와서 함께 가자고 요청하기에,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여러 사람이 지금 야광사 앞거리에 모여 빚을 얻으려고 하니 도장을 가지고 가서 참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곧 그를 따라 가보니 여러 학도들이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조택현이 각기 도장을 꺼내라고 하고 모두 거두어 쥐고 나서 좌중에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를 꺼내 보이며 도장을 찍으라고 공갈하였습니다. 그래서 화(禍)가 목전(目前)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도장을 찍었습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저의 본심은 아니었지만 흉한 자들의 협박에 못 이겨 불의(不義)의 길에 빠진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 김영소(金永韶)의 공초에, 「갑오년(1894) 전이었습니다. 저의 일가인 김영준(金永準)의 집에서 모국(某國) 사람 1인을 만났습니다. 그의 내력을 물어보니, 김영준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모국 사람이다. 이 사람과 서로 의지해서 어학 공부를 하고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저는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갑오변란 때에 알리지도 않고 갔다가 재작년 음력 2월 스무날께 갑자기 한 명의 순검(巡檢)과 함께 찾아왔었는데, 저는 그가 몇 해 전에 김영준의 집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고 순검 또한 김영준의 집 겸인(傔人)인 김석구(金錫求)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날 그 사람이 거처하고 있는 곳에 찾아가니, 그 사람은 이야기를 나눈 후 책자 하나를 꺼내 보였는데, 그 안에 하나의 서약문(誓約文)이 있었습니다. 그 대체적인 내용을 보건대, 대한(大韓)의 정치가 간사한 무리들에게 농락되어 전혀 말도 되지 않으니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간사한 무리들을 내쫓고 공정한 사람들을 등용함으로써 태평성세를 도모한다고 운운(云云)하였고, 그 아래에 맨먼저 유길준의 이름을 쓰고 그 다음에는 서상집(徐相潗), 서상규(徐相奎) 등의 이름을 썼습니다. 그가 저에게 서명(署名)할 것을 요구하므로 대답하기를, 『유길준이 역적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신하로서 그 아래에 서명을 하고 어디에 몸을 두겠는가? 서명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가 성난 눈으로 쏘아보면서 육혈포(六穴砲)로 쏘려고 하며 기색이 험상궂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겁이 나서 서명을 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의심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즉시 고발하려다가 다시 염탐해서 천천히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다시 그 사람을 찾아가 염탐을 해보니, 그가 하는 말이, 『전번 서약문 안에 있는 서상집이라는 부자〔富人〕에게 밑천을 보태라고 요구하여 헌병(憲兵) 몇백 명을 매수해 가지고 거사를 해서 대궐로 들어가야 하겠는데 문이며 길이 생소하다. 경운궁(慶運宮) 안 지도는 네가 그려 와야 하겠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비록 응낙하였지만 지도를 그리는 데 익숙하지 못하고 또 재촉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려다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듣건대, 일찍이 공주부(公州府)에서 이근호(李根澔)를 만나 반갑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털어놓았는데 김영준(金永準)의 살해 모의 문제도 말하였고 금번 서약문 안의 내용까지도 알려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서약문에 협박을 못 이겨 도장을 찍기는 하였지만 겉으로는 교제하는 체하면서 실상은 그것을 탐지해서 내막을 알아낸 후에 고발을 하자는 생각이었는데, 뜻을 이루기 전에 먼저 일이 발각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 번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 김석구(金錫求)의 공초에, 「저는 외국인과 친해 가지고 재작년 음력(陰曆) 2월 보름께 그 집에 고용인(雇傭人)으로 들어갔습니다. 서상집(徐相潗)·서상규(徐相奎)·천장욱(天章郁)·오세창(吳世昌)·김영소(金永韶)·조택현(趙宅顯) 등이 그의 집에 왕래하기 때문에 그들이 왕래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유길준(兪吉濬)이 장차 대한 정부(大韓政府)를 조직하려고 한다. 저 왕래하는 사람들은 모두 뜻을 같이해서 공모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조직하려는가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유길준이 저기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는 사관(士官)들을 주선하고 여기서 사람들과 공모하여 군사들을 매수하고 놀고 있는 백성들을 모아 가지고 그들을 거느리고 대궐에 쳐들어가 폭약을 설치하여 터뜨린다. 사관 몇 명은 대가(大駕)를 모시고 있으면서 다른 데로 못 가게 막고 모국(某國)의 공사관(公使館)에 순검(巡檢)을 파견하여 대궐을 지켜달라고 공문(公文)을 보내면 열흘이 되기 전에 민심이 자연히 안정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가 이미 범인에게서 반역적인 음모에 관한 말을 듣고도 즉시 고발하지 않았으니, 해당 형률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피고 유성준(兪星濬)의 공초에, 「재작년 음력(陰曆) 2월 보름쯤에 조택현이 저의 집에 찾아와서 저를 담장 밖으로 불러내어 하는 말이, 『내가 외국에 있을 때 너의 형 유길준의 말을 들었는데, 외국인 부랑자 5, 600명을 모집해 가지고 이진호(李軫鎬)·이범래(李範來)·이겸제(李謙濟) 등과 함께 그들을 거느리고 본 국으로 돌아와서는 우선 숨어 있다가 동가(動駕)할 때 중간에 갑자기 나타나 대가를 맞이하여 창덕궁(昌德宮)에 이어(移御)하고 정부를 개혁한 뒤에 등용할 대신(大臣)은 바로 김윤식(金允植)·민영준(閔泳駿)·민영환(閔泳煥)이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대답하기를, 『내가 듣기에는 심상훈(沈相薰)의 사람됨이 민영준보다 국사(國事)를 보는 데에 더 낫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경위원(警衛院)에서 공초할 때에는 정부를 개혁하면 심상훈·서정순(徐正淳)·민영환을 대신으로 임명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공초하였습니다. 조택현의 말을 듣고도 즉시 고발하지 않은 것이 죄라면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 조택현이 한 말은 이치에도 닿지 않아 귓전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같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늘 마음이 떨리고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 바로 물리치지는 못했습니다. 심상훈의 이름을 말한 것은 애초에 무슨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 김봉석(金鳳錫)의 공초에, 「갑오년(1894) 봄철에 저는 일본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그 길로 벼슬을 받았습니다. 여러 학도들이 여관에 나뉘어 거처하였는데 빚을 진 것 때문에 곤란해하던 때에 조택현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지금 긴요한 일이 있으니 도장을 가지고 모임에 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가서 보니 15인의 학도들이 다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조택현·권호선·장호익이 책자를 하나 가지고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맹약할 문제가 있어서 이 책을 만들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권호선이 그 글을 읽었는데 그것은 위의 다섯 가지 조건이었습니다. 연월일(年月日)의 아래에 각기 성명을 쓰고 도장을 찍으라고 하기에 제가 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권호선이 제 손으로 각자의 이름을 써넣었습니다. 그 후 방 구석에 군도(軍刀)를 일렬로 세우고 도장을 찍으라고 협박하는데 기색이 엄엄하였습니다. 제가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데 권호선이 이미 저의 도장을 찍어버렸습니다. 제가 귀국하여 재작년 음력 3월 초에 박용화(朴鏞和)를 찾아가 혈약서(血約書) 문제를 들어가 아뢰도록 요청하니, 박용화가 말하기를, 『마땅히 들어가 아뢸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에 또다시 찾아갔더니 박용화가 하는 말이, 『어제 군(君)이 한 말을 가지고 들어가 아뢰었는데, 그 중 감히 말못할 문제들은 아직 다 진달하지 않았다. 만일 일이 터질 기미가 있으면 다시 김봉석(金鳳錫)의 고발을 듣고 듣는 대로 즉시 전달하겠다는 내용으로 넌지시 아뢰었으니, 장호익·조택현을 장차 멀리 지방 부대에 넘기라는 내용으로 처분이 내릴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고 의심 없이 날마다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사진(仕進)하다가 갑자기 이처럼 붙들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는 나이가 가장 어리고 여러 사람에게 협박을 받았습니다. 당초에 해당 글에다 도장을 찍었습니다만 그것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귀국 후 박용화를 찾아가 말해서 그로 하여금 들어가 아뢰게 하였습니다. 박용화가 대질 신문에서 한 공초에서 명백해진 이상 참작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은 피고들의 공초와 자복(自服) 및 증거물, 대질 신문으로 명백하여졌습니다.
권호선은 옥중에서 병사(病死)하였고 유길준(兪吉濬)·김홍남(金鴻南)·김관현(金寬鉉)·장인근(張寅根)·강용구(姜容九)·권승록(權承祿)·이기옥(李基鈺)·천장욱(千章郁)·오세창(吳世昌) 등은 아직 체포하지 못하였습니다.
피고 장호익(張浩翼)·조택현(趙宅顯)·김형섭(金亨燮)·김희선(金羲善)·김교선(金敎先)·방영주(方泳柱)·김홍진(金鴻鎭)·김영소(金永韶)는 《대명률(大明律)》 〈적도편(賊盜編)〉의 반역을 음모한 자와 공모한 자는 주모자와 추종자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율문(律文)에 따라 참형(斬刑)에 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피고 김석구(金錫求)는 같은 율문과, 반역 음모 및 큰 역적을 알고서도 고발하지 않았지만 그 주모자는 아닌 자에 대한 율문에 따라 태(笞) 100대를 쳐서 종신 유형(流刑)에 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피고 유성준(兪星濬)은 《대전회통(大典會通)》 〈추단조(推斷條)〉의 불온한 말을 한 자에 대한 율문에 따라 태 100대를 쳐서 3년 유형에 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피고 김봉석(金鳳錫)은 같은 율문과, 무릇 반역 음모 및 큰 역적과 공모한 자는 주모자와 추종자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율문과, 동률 명례(名例)의 범죄자수조(犯罪者首條)의 그런 사람을 알고서 고발하려고 했거나 자수한 자는 2등급 감해 준다는 율문에 따라 태 100대를 쳐서 3년 유형에 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범인 등을 각각 원래의 의율(擬律)대로 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되, 김형섭(金亨燮)·김희선(金羲善)은 혹 용서해 주어야 할 만한 점이 있으니 1등을 감하고, 김교선(金敎先)·방영주(方泳柱)는 어리석고 지각이 없었기 때문이니만큼 1등을 감할 것이며, 김영소(金永韶)·유성준(兪星濬) 또한 1등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3월 12일 양력
정2품(正二品) 이재극(李載克)을 경상북도 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에, 육군 부장(陸軍副將) 이종진(李鍾晉)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종2품(從二品) 홍만식(洪萬植)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무안 감리(務安監理) 윤치호(尹致昊)를 외부 협판(外部協辦)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의관(議官) 한영원(韓永元)을 무안 감리(務安監理)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조병식(趙秉式)에게 외부 대신(外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도록 하고,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도재(李道宰)를 인산(因山) 때 돈체사(頓遞使)에 임명하였다.
칙령(勅令) 제3호, 〈표훈원 관제 개정 안건〔表勳院官制改正件〕〉 【표훈원은 의정부(議政府)에 속하며 훈위(勳位), 훈등(勳等), 연금(年金), 훈장(勳章), 기장(記章), 포장(褒章), 상의 수여 및 외국 훈장, 기장(記章), 패용(佩用)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총재(總裁) 1인, 의정관(議政官) 15인 이하이며, 모두 칙임관이다. 제장 국장(製章局長) 1인, 참서관(參書官) 1인, 기사(技師) 2인은 모두 주임관이고, 주사(主事) 2인, 기수(技手) 5인 이하는 모두 판임관이다. 광무(光武) 3년 칙령 제30호 표훈원 관제는 폐지한다.】 , 제4호, 〈전보사 관제 중 개정 안건〔電報司官制中改正件〕〉 【1등사(一等司)에 종성(鍾城), 진위(振威), 황간(黃澗)을, 2등사(二等司)에 시흥(始興), 천안(天安), 노성(魯城), 성주(星州), 밀양(密陽), 직산(稷山), 아산(牙山), 전의(全義), 연산(連山), 진산(珍山), 영동(永同), 금산(金山), 칠곡(漆谷), 청도(淸道)를 첨입한다.】 , 제5호, 〈우체사 관제 중 개정 안건〔郵遞司官制中改正件〕〉 【전보사(電報司) 관제 중 첨입한 사항과 같다.】 , 제6호, 〈군악대 설치건(軍樂隊設置件)〉 【시위 제1연대(侍衛第一聯隊) 부속 군악(軍樂) 1중대(中隊) 2소대(小隊)를 편성하는데, 1등 군악장(軍樂長) 1명은 중대장(中隊長)이며, 2등·3등 군악장 2명은 소대장(小隊長)이다.】 , 제7호, 〈법관 양성소의 관등과 봉급에 관한 령〔法官養成所官等俸給令〕〉, 제8호, 〈광무 3년 칙령 제19호 상무 회의소 규례 개정 폐지 안건〔光武三年勅令第十九號商務會議所規例改正廢止件〕〉을 모두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문천군(文川郡) 숙릉(淑陵)의 위토(位土)로 포락(浦落)되었거나 모래가 덮인 밭〔田〕 18일경(日耕)과 논〔畓〕 7두락(斗落), 군근민전(軍根民田)과 정속전(正續田) 도합 102결(結) 남짓, 개성(開城) 목청전(穆淸殿) 경계 안에 있는 전답(田畓) 40결 남짓, 운산군(雲山郡) 광산 개발처와 가옥 자리의 대전(垈田) 51부(負), 경인철도(京仁鐵道)에 추가 이용몫으로 들어간 토지로서 부평군(富平郡)의 44부, 과천군(果川郡)의 25부, 시흥군(始興郡)의 21부, 삼화항(三和港)의 각국 공동 의장지(義葬地) 전결 24부에 대하여 모두 세(稅)를 감해 주며, 해주군(海州郡) 염전(鹽田) 사방(四方)의 허결(虛結) 491결, 옥구(沃構)·부안(扶安) 두 군(郡)의 바닷물이 밴 전답 898결 남짓에 대하여 1년에 한하여 면세(免稅)해 줄 것을 허락하였다. 탁지부(度支部)의 계청(啓請)으로 인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토의를 거쳐 주청(奏請)하였기 때문이다.
3월 13일 양력
조전(祖奠)을 행하였다.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박용화(朴鏞和)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학부 대신(學部大臣) 민영환(閔泳煥)에게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도록 하였다.
3월 14일 양력
견전(遣奠)을 행하였다.
대행 태후(大行太后)의 영가(靈駕)가 출발하여 산릉(山陵)에 이르렀다.
영성문(永成門) 안에 나아가 영구와 하직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모시고 참여하였다.
3월 15일 양력
천전(遷奠)을 행하고 현궁(玄宮)에 내렸다.
행장(行狀)은 다음과 같다.
"대행 태후(大行太后)의 성(姓)은 홍씨(洪氏)이다. 고려(高麗)의 공신(功臣)인 삼중태사(三重太師) 홍은열(洪殷悅)이 처음으로 남양(南陽)에 적(籍)을 두었는데 대대로 내려가며 계속 벼슬을 지냈다. 그러다가 본조(本朝)에 이르러 홍춘경(洪春卿)이 관찰사(觀察使)를 지내니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된 남녕 부원군(南寧府院君)이다. 3대(代)가 지나서 홍명원(洪命元)이 관찰사를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찬성(贊成)이 홍처후(洪處厚)를 낳으니, 관찰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장(忠莊)이다. 모두 문장과 절의(節義)가 세상에 뛰어났다. 충장공(忠莊公)의 증손(曾孫)은 이름이 홍계적(洪啓迪)이다.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니, 충숙공(忠肅公) 이만성(李晩成), 충민공(忠愍公) 김운택(金雲澤)과 함께 임인년(1722)에 화를 입어 세상에서 3재신(三宰臣)으로 불린다. 이는 태후(太后)에게 5대 조상이 된다. 고조부(高祖父)는 이름이 홍주영(洪疇泳)이며 주부(注簿)를 지냈고 좨주(祭酒)에 추증되었다. 증조부(曾祖父)는 이름이 홍병채(洪秉寀)이며 현감(縣監)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조부(祖父)는 이름이 홍기섭(洪耆燮)이며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헌간(獻簡)이다. 아버지는 이름이 홍재룡(洪在龍)이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익풍 부원군(益豐府院君)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배필은 연창 부부인(延昌府夫人) 죽산(竹山) 안씨(安氏)이니 판서(判書) 안광직(安光直)의 딸이다.
태후는 순조(純祖) 신묘년(1831) 정월(正月) 22일 사시(巳時)에 조부 헌간공(獻簡公)의 임소(任所) 함열(咸悅)에서 탄생하였다. 이보다 앞서 헌간공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현원로군(玄元老君)이라는 신인(神人)이 집에 내려와서 말하기를, ‘이 집에 마땅히 상서(祥瑞)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더니, 얼마 후에 태후가 태어났다. 태후는 나서부터 어질고 효성스럽고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덕스러운 품성은 천성(天成)이었다. 어려서부터 예의를 스스로 차릴 줄 알았고 행동거지가 어른처럼 의젓하였다. 부모를 섬기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모두 규범에 들어맞았기 때문에 집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덕선(德選)에 응한 다음에야 《소학(小學)》을 주었는데 보자마자 단번에 외웠을 뿐 아니라 한 부(部)를 써서 깊숙이 간직해 두기까지 하고서도 전혀 모르는 체하였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태후가 평생 가슴에 새겨 넣은 것은 대체로 여기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두 자전(慈殿)을 받들어 섬기는 데 성의와 효성을 다하여서 안부를 묻고 봉양하는 일을 더없이 공경스럽게 하고서도 늘 다하지 못한 것같이 하였으며 아무리 두렵고 난처한 마당에서도 한결같이 극진한 정성을 가지고 쾌히 받들었다. 정축년(1877) 여름 신정 황후(神貞皇后)가 설사를 만나 오래 누웠을 때 시탕(侍湯)하여 올리고 음식을 맛보는 일을 반드시 직접 하면서 남을 시키지 않았으며 달포가 지나도록 옷도 벗지 않고 눈도 붙이지 않았다. 동조(東朝)께서는 그의 수고를 걱정하여 물러가라고 분부하니, 비록 할 수 없이 억지로 침소(寢所)에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감히 편안히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였고, 궁인(宮人)들을 시켜 황후(皇后)의 동정(動靜)이 어떤가를 알아보는 것이 대궐의 섬돌 위에 계속 이어졌다. 황후가 전처럼 음식을 든 다음에야 그도 원래대로 돌아갔으며 안색과 말마디에 절절한 기쁨이 차 넘치고 축원의 마음이 지극하여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정사년(1857) 순원 성모(純元聖母)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예의에 지나칠 정도로 가슴을 치며 울었다. 경인년(1890) 대상(大喪) 때 태후의 나이가 이미 만 60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상하고 원기가 상하도록 슬퍼하였으며 넉달을 하루와 같이 직접 빈전(殯殿)의 제전(祭奠)에 나오지 않은 적이 없었고 36년 동안 애도의 마음이 한결같았다. 태후를 곁에서 모시는 사람들은 처음에 거상(居喪) 기간이니까 그러려니 하였다. 하지만 거상 기간이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하였으며 종신토록 슬퍼하였기 때문에 궁중에서도 누구나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선대(先代)를 받드는 데 더더욱 지성을 다하였으며 진전(眞殿)에 올리는 음식을 3년 동안 주관하면서 반드시 직접 제물을 다루었고 언제 한 번이라도 남을 시켜 대신하게 한 적이 없었다. 경자년(1900)에 진전이 불탔을 때 태후는 몹시 놀라고 슬퍼하면서 여러 날 동안 침선(寢膳)을 잊고서도 계속 그러하였으며 황제(皇帝)가 애써 강경한 위로를 해서야 안정되었다. 태후는 기유년(1849) 대상(大喪) 후부터 근심과 걱정에 싸여 얼굴에 슬픈 기색이 돌았고 그 이후로는 말과 웃음이 없었다. 더구나 아랫사람들에게 은혜를 잘 베풀었는데 경빈(慶嬪)이 본궁(本宮)에 나가서 살 때나 혹은 대궐에 들어와 살다가 하직할 때에는 그리운 심정을 금치 못하여 눈물을 뿌리면서 보냈었고 아무리 하찮은 과일이나 음식이라도 매번 나눠 보내서 먹였다. 선왕(先王)에게서 은총을 받은 궁인은 더욱더 남달리 사랑하는 동시에 남겨 두고 보살폈으니, 대체로 전대(前代)의 후비(后妃)들에게서는 드문 것이었다. 처음 경빈이 입궁(入宮)하여 조현례(朝見禮)를 할 때 태후는 얼굴에 온화한 기운이 넘쳐 좌우 사람들에게 조용히 이르기를, ‘경빈의 자태와 거동이 그윽하고 덕스러운 얼굴에 아름다움이 차 넘치니 나라에 왕자가 많아지고 후손이 번성할 것이다. 내가 더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고 하니, 순원 성모가 듣고서 극구 칭찬하기를, ‘어질고 어진 중궁(中宮)이로다. 태사(太姒)라도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인년(1890) 이후 우리 황상(皇上)께서 의지할 곳이 없어지고 효성을 바칠 수 없게 되자 태후는 종묘 사직(宗廟社稷)과 백성들이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거듭 너그러이 비유하면서 애써 위로하였는데 그 내용이 간절하였다. 밤마다 시자(侍者)를 보내서 반드시 주상(主上)의 기후(氣候)가 어떠한가를 알아보았으며, 만일 조금이라도 성체(聖體)가 불편하다는 말을 들으면 잠 못 이루고 걱정하면서 올리는 상선(常膳)의 가짓수를 줄였다가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기뻐하였다. 황상 또한 신정 성모(神貞聖母)를 섬기던 성의를 가지고 태후를 섬겼는데 태후를 공경히 받드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여 극진히 하였으므로 태후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역대의 제왕들이 종통(宗統)을 중히 여겼지만 형수를 존대하는 데서는 황상보다 더 극진한 이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명성 황후(明成皇后)도 우리 황상이 섬기는 것처럼 섬기면서 한 마음으로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태후는 신정 성모(神貞聖母)를 모실 때마다 그의 현숙한 덕과 아름다운 범절을 찬양하면서 훌륭한 덕행을 본받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성모(聖母)는 때때로 귀를 기울이고 머리를 끄덕이곤 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뵈러 오면 그가 총명한 자질이 일찍 성취되고 행동이 예의에 맞는 것을 보고는 반드시 진심어린 말을 하곤 하였으며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어렸다. 늘 친척들이 좋은 벼슬을 지내는 것을 걱정하면서 명덕 마후(明德馬后)002) 가 본가 친척들에게 높은 벼슬을 주지 말아 달라고 한 말을 외우곤 하며 경계하기를, ‘내가 심히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오년(1882)과 갑신년(1884) 이래로 여러 번 변란을 겪으면서 위태롭고 갑작스러운 판국에 처해서도 예법을 엄격히 준수하였으며 본가(本家)의 사람이라 해도 당친(堂親)이 아닌 사람은 만나 주지 않았다.
평생 검소하게 지내는 것을 편히 여기고 늘 옷감으로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명주와 비단을 썼을 뿐이었다. 비록 써야 할 물건일지라도 반드시 절약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턱없이 낭비하여 나라의 비용에 손해를 주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흉년이 들면 백성들의 식량난을 걱정하면서 음식의 가짓수를 줄였다. 태후는 또한 너그럽고 아량이 있어 늙고 젊은 궁인들과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모시는 궁인들에게 한 번도 큰소리로 욕을 하지 않았고 성난 기색도 보이지 않았으며 오직 언제나 옳은 것만을 보여 주었다. 겨울날 위사(衛士)가 추위에 떨고 있으면 매번 죽을 먹였다. 개구리나 개미와 같은 미물이 혹 지게문을 넘어 들어와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경계하였고, 봄날이 한창일 때 혹 참새 새끼가 처마 끝에서 떨어지면 시아(侍娥)를 시켜 잘 보살피고 먹이고 길들여 깃이 다 자란 다음에야 날려보내도록 하였다. 한 포기의 풀, 한 떨기의 꽃도 함부로 꺾지 말도록 하였으며 화분의 꽃과 뜨락의 나무들은 제 마음대로 무성하게 자라도록 두었고 물을 주고 북돋아 주면서 생장하는 이치를 관찰했으니, 이것은 그의 어진 마음이 밖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건강이 나빠져 오랫동안 앓을 때에도 평소처럼 날마다 머리 단장을 하고 세수를 하였으며 속옷 바람으로 사람을 맞은 적이 없었다. 승하(昇遐)하시던 날에는 궁인에게 명하여 침상에 부축하여 앉히도록 했는데, 그 침상은 바로 황상이 올린 것이다. 다른 요 자리는 다 치우고 꼭 이 침상에서 정히 생을 마쳤으니 태후의 그윽한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예의의 발현이다. 겨울에 황상이 명년(明年)이 대행 태후가 간택(揀擇)된 구갑(舊甲)이기 때문에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존호(尊號)를 올리겠다는 것을 청하였으나 태후는 겸손하게 굳이 사양하였다. 명년 정월 초하룻날 온 나라에 선포하고 축하하려고 했는데, 태후가 월초부터 조금 앓기 시작하여 열흘이 지나 점점 심해져 11월 15일 을미일에 경운궁(慶運宮)의 수인당(壽仁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춘추(春秋)는 73세이다.
뭇 신하들이 효정(孝定)이라는 시호를 올렸으니, 5종(五宗)을 편안하게 하였다는 뜻에서 효(孝)라 하고 순수한 덕행을 잃지 않았다는 뜻에서 정(定)이라고 하였다. 휘호(徽號)는 ‘자온 공안(慈溫恭安)’이며 전호(殿號)는 ‘효혜(孝惠)’이다. 명년 갑진년(1904) 정월 29일 무신일에 경릉(景陵)에 합장(合葬)하여 한 능에 따로 안치한다.
우리 황상 폐하께서 이에 직접 지은 행록(行錄)을 내려 보내면서 신에게 행장(行狀)을 지으라고 명하시니, 신은 황공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행록의 순차에 따라 위와 같이 지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비(妃)의 도리 또한 한 마디로 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니, 곤괘(坤卦)의 육이(六二)에, ‘곧고 방정하다.’라고 하였고, 문언(文言)에는, ‘곧은 것은 바른 것이고 방정한 것은 의로운 것이다. 군자(君子)는 공경으로써 안을 바르게 하고 의로움으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는 것이니 공경과 의로움이 이루어져야 덕이 원만하여진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태후의 순결한 덕을 형상하면 아마 알 것입니다. 두 자전(慈殿)이 지극히 자애롭게 보살핀 것은 태후의 천성에 뿌리를 둔 것인 만큼 신은 이것을 가지고 태후가 성의와 공경을 다하였다는 것을 삼가 알았습니다. 신이 또 순원 성모가 태후를 태사(太姒)에 비겨 극구 찬양한 것을 미루어 태후가 만물을 아낀 것도 의로움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을 새와 벌레와 초목과 꽃에까지 널리 베풀었고 명령과 경계가 대궐 안뜰을 넘어서지 않았으며 사가(私家)에 은혜를 베풀지 않았으니 이른바 덕이 성대하여 근본이 있었습니다. 아! 아름답습니다."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김학진(金鶴鎭)이 지었다.】
【원본】 48책 44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320면
【분류】인물(人物) / 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註 002] 명덕 마후(明德馬后) :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황후. 명덕은 시호. 덕이 궁중에서 으뜸이었고, 친정(親庭) 일을 조정에 바라는 법이 없었다. 《후한서(後漢書)》 권10.
지문(誌文)은 다음과 같다.
"체건 계극 중정 광대 지성 광덕 홍운 장화 경문 위무 명인 철효 대왕(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의 계비(繼妃)가 병에 걸려 계묘년(1903) 11월 15일 진시(辰時)에 경운궁(慶運宮) 수인당(壽仁堂)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춘추(春秋)는 73세이다.
신이 삼가 지문(誌文)을 제술(製述)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어 어찬 행록(御撰行錄)이 내렸다.
대행 명헌 태후(大行明憲太后)는 성(姓)이 홍씨(洪氏)이고 계통(系統)은 남양(南陽)이다. 고려(高麗)의 공신(功臣)인 삼중태사(三重太師) 홍은열(洪殷悅)이 비조(鼻祖)이니, 대대로 벼슬을 지냈고 빛나는 업적을 세웠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된 남녕 부원군(南寧府院君) 홍춘경(洪春卿)이 있었다. 3대(代)가 흘러 관찰사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홍명원(洪命元)이 있었고, 찬성(贊成)은 관찰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諡號)가 충장(忠莊)인 홍처후(洪處厚)를 낳았으니, 양 대가 모두 문장과 절의로 세상에 뛰어났다. 충장의 증손(曾孫)은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충간(忠簡)인 홍계적(洪啓迪)이니, 신축년(1721)과 임인년(1722)의 참화(慘禍)를 당하였다. 의리와 충실한 절개가 역사책에 기록되어 부조(不祧)의 은전(恩典)을 입었는데 그가 태후(太后)에게 5대 조상이 된다. 고조부(高祖父)는 음직 주부(蔭職注簿)를 지내고 좨주(祭酒)에 추증된 홍주영(洪疇泳)이다. 증조부(曾祖父)는 현감(縣監)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홍병채(洪秉寀)이다. 조부(祖父)는 음직(蔭職) 겸 공조판서(兼工曹判書)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헌간(獻簡)인 홍기섭(洪耆燮)이다. 아버지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를 지낸 익풍 부원군(益豐府院君)이며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가 익헌(翼憲)인 홍재룡(洪在龍)이다. 어머니는 연창 부부인(延昌府夫人)인 안씨(安氏)이니, 판서(判書) 안광직(安光直)의 딸이다. 순조(純祖) 신묘년(1831) 정월 22일 사시(巳時)에 함열현(咸悅縣)의 관사(官舍)에서 태후를 낳았다. 헌간공(獻簡公)의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현원로군(玄元老君)이다. 군의 집에 상서(祥瑞)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태후가 과연 이날에 탄생하셨다.
태후는 천성이 어질고 너그럽고 총명하였다. 어릴 적부터 행동이 단정하고 말이 간결하였으며 예의로 자신을 단속하여 한 번도 장난을 하는 일이 없었다. 어른처럼 의젓하여 시중드는 여인들이 어려워하여서, 비록 손목을 잡아 곁에 두고 함께 지내면서도 감히 허물없이 굴지 못하였다. 태후는 효성이 매우 지극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에 온화한 기색을 가득히 담았고 뜻에 앞서 마음을 맞추어 주었다.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에는 약을 달이고 미음을 끓이는 것을 반드시 앉아서 보았고, 불을 때고 약을 거르며 음식을 봉양하는 일은 반드시 지켜 서서 살폈으며, 좋아하는 음식을 살펴 제때에 반찬을 바꾸면서 여러 번씩 맛보아 입에 달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대해 주는 것이 언제나 화기롭고 경건하였으며 먼 인척들과도 한 집 식구처럼 화목하게 지냈다. 덕선(德選)에 응하여 별궁(別宮)에 들어온 다음에야 《소학(小學)》을 받았는데 몇 번 읽어보고 대뜸 외웠으며 그 후에는 더는 그 책을 보지 않았다. 순원 왕후(純元王后)와 신정 왕후(神貞王后)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다. 안부를 묻고 봉양을 하는 데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설사 두렵고 난처한 때일지라도 지극한 정성과 곡진한 성의로 한결같이 받들었다. 정사년(1857)에 순원 성후(純元聖后)가 승하하셨을 때에는 더없이 슬퍼하였으며 거상(擧喪) 기간이 지난 뒤에도 얼굴에는 늘 슬픈 기색이 어려 있었다. 정축년(1877) 여름 신정 성모(神貞聖母)가 설사병에 걸려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있을 때 태후는 수심에 잠겨 옷을 입은 채로 새벽을 맞았으며 한 달이 넘도록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동조(東朝)께서 그의 고생하고 수척한 모양을 걱정하며 물러가 쉬라고 분부하자 감히 어길 수가 없어서 억지로 침소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차마 대뜸 돌아서지 못했다. 돌아와서는 대궐 섬돌에 꼬리를 물 정도로 궁인(宮人)들을 보내어 몸이 어떤가를 몰래 알아보았으며, 건강이 회복된 다음에야 평소처럼 음식을 들면서 기쁨을 누를 길 없어 하였기 때문에 온 대궐이 모두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경인년(1890)에 성모(聖母)께서 붕어(崩御)하시자 가슴을 치며 통곡하던 끝에 정신을 잃기까지 하여 좌우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였다. 효모전(孝慕殿)의 거상(居喪)이 끝난 다음에도 늘 비통해 하며 옷소매에 눈물이 마른 적이 없었으니 대개 종신토록 그리워하였기 때문이다. 조상과 선대를 추모하고 받드는 예절이 더욱 극진하여 제사를 지내는 데 반드시 공경과 성의를 다하였다. 진전(眞殿)에 다례(茶禮)를 지낼 때마다 각종 제물들을 반드시 직접 살펴 정결하게 하면서 남을 시켜 대신하게 하지 않았으니 3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경자년(1900)에 진전(眞殿)이 불탔을 때 태후가 크게 놀라고 슬퍼하면서 여러 날이 지나서야 비로소 음식을 들었다. 태후는 늘 인척들이 좋은 벼슬을 지내는 것을 걱정하면서 멀고 가까운 친척 가운데 은전을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대뜸 마후(馬后)가 친척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아달라고 한 고사(故事)를 들어 경계하였고, 벼슬자리에 임명되는 경우마다 태후가 이르기를, ‘극진히 돌봐주는 은혜는 물론 감격스러운 것이지만 저들이 외람되게 사적인 은혜를 입어 턱없는 영화를 누리는 것은 실로 좋은 것이 못되니, 도리어 내 마음에는 두렵다.’라고 하였다. 또한 검소한 것을 숭상하여 평소의 옷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명주나 모시로 지었고 한 번도 화려한 비단 천을 몸에 걸친 적이 없었으며 일체 사치한 노리개들은 앞에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상적으로 써야 할 것도 반드시 절약하는 데 힘쓰도록 했으며, 옷이 더러우면 빨면서 말하기를, ‘천 짜는 여인들의 수고가 한 올 한 올 쌓이고 맺힌 것이니 낭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미년(1847)에 경빈(慶嬪)이 입궁(入宮)하여 조현례(朝見禮)를 할 때 태후는 더욱 화색이 넘쳐 근시(近侍)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경빈의 자태에 아름다움이 넘치고 덕스러운 얼굴에 그윽한 빛이 도니 나라에 왕자가 많아지는 경사가 생기고 후손들이 백 대에 이르도록 번창해질 것이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내가 더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순원 성모(純元聖母)가 듣고서 칭찬하기를, ‘왕후(王后)가 이처럼 어지니 태임(太任), 태사(太姒)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근간에 경빈(慶嬪)이 본궁(本宮)에 나가서 살며 명절을 축하하는 이외에 혹 이따금 대궐에 들어와 살 때면 태후는 기뻐하며 옛일을 이야기하느라 저녁이 되어도 싫증을 몰랐으며 막상 그가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하면 그리운 심정을 금치 못해 눈물을 뿌리며 보냈다. 색다른 음식이나 맛난 과일이 생기면 아무리 적더라도 반드시 나눠주어 먹였다. 선왕(先王)에게서 은총을 받은 궁인(宮人)에 대해서는 백발이 되도록 사랑하고 보살펴 주었는데 그 사랑은 갈수록 지극하였다. 이것은 모두 태후의 성대한 덕이며 역대 왕후나 왕비들에게서는 드문 것이었다. 임오년(1882)부터 여러 번 위태로운 환난을 겪으면서 옆 사람들이 모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할 때에도 태후의 온화한 용모에는 당황하는 기색이란 없었고 예법에 더욱 엄격했으며 본가(本家)의 당친(堂親)이 아닌 사람에게는 입대(入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을 따뜻이 대하여 궁인에게 과오가 있을 경우에는 네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차근차근 깨우쳐 주고는 그쳤기 때문에 궁인들이 모두 감화되어 서로 조심하였으며 감히 속이는 것이 없었다. 혹시 그릇이나 물건을 깨뜨리고 잘못을 스스로 실토하는 경우에는 그냥 덮어두고 따지지 않았으며 바로 새것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개미나 개구리와 같은 벌레가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경우에는 죽이지 못하게 하고 성질에 맞게 유도하여 밖으로 나가도록 하였으며, 봄철에 참새 새끼가 섬돌 위에 떨어지면 시아(侍娥)에게 명하여 처마에 날아오를 수 있을 때까지 길러서야 놓아 주었다. 혹시 꽃이나 나무를 꺾으며 노는 궁인들이 있으면,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생을 아끼는 천지의 인자한 혜택을 받고 생장하기는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어찌 함부로 꺾어서 천명(天命)을 못 다 살게 하겠는가?’라고 경계하였다. 몹시 추운 겨울철에 위사(衛士)들이 바람 불고 눈 오는 가운데 서 있으면 그 고통을 불쌍히 여겨 뜨끈한 죽을 주었으며, 흉년을 만나면 매번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진귀한 음식을 많이 차리지 못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가난한 집에서 굶주리며 땔나무와 쌀이 떨어져 고생하고 있다. 온 마을이 부황이 들어 신음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맛난 음식을 들기가 내 마음에 편안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기유년(1849) 대상(大喪) 이후부터 크게 웃어 본 적이 없었으며 한가하게 있을 때에는 혹 종일 그리워하면서 말없이 지내는 적도 있었고 한밤중 잠잘 때가 아니면 한 번도 궤(几)에 비스듬히 기댄 적이 없었다. 병이 심해져 세상을 떠나게 된 날까지도 오히려 머리를 빗고 세수하는 일을 제 손으로 하였으며 속옷 바람으로 남을 대하지 않았다. 궁인(宮人)을 시켜 요와 자리를 치우게 하고 부축을 받아 평상에 앉아 말하기를, ‘이것은 당저(當宁)가 올린 것이다. 나는 이 평상에서 눈을 감아 지성껏 서로 아끼던 덕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태후의 덕이 어질기로 말하면 천지와 더불어 만물을 키울 만한 것이었다. 부모를 섬기는 데 효성과 공경을 다했고 선대를 받드는 데 성의와 예의가 두터웠다. 표준을 바로 세워 아래에 미치게 했기 때문에 대궐 안이 잘 다스려졌고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꼈기 때문에 태후로서 도운 공로가 널리 퍼졌으니, 아! 훌륭하시다. 사저(私邸)에서 기록해 놓은 언행과 궁중에서 들었거나 본 것을 취해서 위와 같이 엮었으니 어찌 내용을 만 분의 일이나마 담았겠는가?
아! 태후는 갑진년(1844)에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철종(哲宗) 즉위년(1849)에 대비 칭호를 올렸고, 2년 신해년(1851)에 명헌(明憲)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으며, 4년 계축년(1853)에 ‘숙경(淑敬)’이란 존호를 가상(加上)하였고, 8년 정사년(1857)에 왕대비(王大妃) 칭호를 올렸다. 10년 기미년(1859)에 ‘예인(睿仁)’이라는 존호를 가상하고, 14년 계해년(1863)에 ‘정목(正穆)’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금황제(今皇帝) 3년 병인년(1866)에 ‘홍성(弘聖)’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고, 같은 해에 ‘장순(章純)’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으며, 10년 계유년(1873)에 ‘정휘(貞徽)’라는 존호를 가상하였고, 25년 무자년(1888)에 ‘장소(莊昭)’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27년 경인년(1890)에 ‘단희(端禧)’라는 존호를 가상하였고 같은 해에 ‘수현(粹顯)’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으며, 29년 임진년(1892)에 ‘의헌(懿獻)’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광무(光武) 원년 정유년(1897)에 태후 칭호를 올렸고, 4년 경자년(1900)에 ‘강수(康綏)’라는 존호를 가상하였으며, 6년 임인년(1902)에 ‘유녕(裕寧)’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효정(孝定)’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휘호(徽號)는 ‘자온 공안(慈溫恭安)’이며 전호(殿號)는 ‘효혜(孝惠)’이다. 산릉(山陵) 자리는 경릉(景陵)과 동원(同原)에 왼쪽으로 합부(合祔)하였으며 갑진년(1904) 정월 29일 무신일(戊申日)에 장례(葬禮)한다.
신은 학문이 없고 식견이 좁기 때문에 글과 관련되는 문제라면 비록 범상하고 하찮은 글일지라도 누구와 논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태후(太后)의 덕스러움과 인자함이 옛날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거늘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환한 규범과 슬기로운 지략, 훌륭한 계책과 아름다운 덕행으로 말하면 역사책에 기록하고 구슬에 새겨 넣어 후세에 전함으로써 규중 여인들이 모범으로 삼게 해야 할 것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고루한 신이 그 만 분의 일이나마 기록하여 비슷하게나마 형상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지문(誌文)이 더없이 신중하기가 과연 어떠합니까? 지문을 짓는 일에 날짜가 이미 박두해서 신이 사양할 겨를이 없었는데 막상 황제(皇帝)가 지은 글을 공경히 받아 읽어보니 은하수처럼 빛나고 성인의 가르침마냥 엄숙하였습니다. 신은 한 마디도 보탤 수 없거니와 또 어찌 감히 한 글자라도 고치거나 손을 대겠습니까? 아아!" 【의정(議政) 이근명(李根命)이 지었다.】
【원본】 48책 44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320면
【분류】인물(人物) / 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애책문(哀冊文)은 다음과 같다.
"광무(光武) 7년 계묘년(1903) 11월 신사월(辛巳月) 15일 을미일(乙未日)에 황수(皇嫂)인 명헌 숙경 예인 정목 홍성 장순 정휘 장소 단희 수현 의헌 강수 유녕 자온 공안 효정 왕후(明憲淑敬睿仁正穆弘聖章純貞徽莊昭端禧粹顯懿獻康綏裕寧慈溫恭安孝定王后)는 경운궁(慶運宮)의 수인당(壽仁堂)에서 승하(昇遐)하셨습니다. 흥덕전(興德殿)에 빈소(殯所)를 옮기고 명년 갑진년(1904) 경진일(庚辰日)이 초하룻날인 정월 29일 무신일(戊申日)에 경릉(景陵)의 왼쪽에 합장(合葬)하여 장례를 지내게 됩니다. 상여에 이미 말을 메웠으니 빈전(殯殿)을 열게 될 것입니다. 울긋불긋한 의장(儀仗)이 문가에 닿았고 운삽과 불삽이 섬돌에 벌여 섰습니다. 만백성이 비오듯 눈물을 흘리고 온갖 신령들이 별처럼 여기저기서 모여 오는데 정숙한 대궐과 영원히 이별하고 머나먼 교외로 떠나갑니다. 우리 황상 폐하(皇上陛下)는 태후(太后)의 궁(宮)이 영영 닫히게 되었음을 슬퍼하고 어두컴컴한 저승을 구슬피 생각하면서 이에 신에게 명을 내리시어 공경히 애책문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그 글은 이러합니다.
사록(沙麓)에 경사가 쌓이더니 함열(咸悅)의 관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충간공(忠簡公)의 문벌에 익헌공(翼獻公)의 이름난 가문이었는데, 길몽을 꾸어 현원로군(玄元老君)이 상서로움을 알려 주었습니다. 천성이 곧고 깨끗하였으며 성품이 자애롭고 어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거동이 예법에 어긋나지 않았고,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았어도 스스로 여자의 규범에 맞았습니다. 비(妃)를 고르는 데 뽑히어 왕비(王妃)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훌륭한 덕행을 본받을 것을 생각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니, 순원 성모(純元聖母)가 말하기를, ‘덕행이 옛날 어진 왕비처럼 아름답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정 황후(神貞皇后)가 앓자 한밤중에도 옷을 벗지 않았고 회복되자 더없이 기뻐했으며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물었습니다. 경자년(1900)에 화재를 당했을 때에는 슬픔이 북받쳐 음식을 들지 않았고, 진전(眞殿)의 혼을 진정시키는 제사를 지낼 때마다 직접 깨끗한 제물을 올렸고 36년 동안 잘 받들었습니다. 전에 우리 명성 황후(明成皇后)와 서로 예의로 공경하면서 절친하게 지냈는데 동서 간에 온화한 기운이 넘쳤습니다. 우리 황제도 지성을 쏟아 어머니를 섬기듯이 정이 넘치는 말로 대했고 서로 몹시 아껴 주었습니다. 경빈(慶嬪)이 들어와 뵈면 기쁜 얼굴로 대해 주었고, 늙은이가 될 때까지 잊지 않고 보살펴 주면서 그리워했습니다.
인척들이 높은 벼슬을 지내는 것을 경계하시어 사적인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목소리가 안방에서 울려 나가게 말한 적이 없으며, 교화는 이미 널리 펼쳤습니다. 나라의 재물에 손해를 줄까 싶어 옷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천으로만 지어 입었고, 백성들의 굶주림을 염려하여 음식을 줄였습니다. 미물(微物)들에게도 골고루 은혜를 베풀어, 화초는 북돋아 키우고 처마 밑에 떨어진 참새 새끼도 날 수 있을 때까지 키워 주었습니다. 근면하고 검소했기 때문에 칭찬들이 많았으니, 아! 그 아름다운 내력을 사책(史冊)에 어찌 다 기록하겠습니까?
하늘은 덕 있는 분에게 보답하는 것이니, 오래오래 편히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100으로 세는 산가지가 방에 가득 찰 만큼 빛나는 별만큼 말로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는 바다인양 오래 오래 살았습니다. 산같이 길이 장수한 것을 무슨 말로 칭송하겠습니까? 빛나는 칭호로 받들어 크나큰 복을 입은 데 대하여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찮은 성의를 조금 바친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덕 없이 도움을 받은 것이 많습니다. 참으로 극진히 도운 것은 덕화를 편 것만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 혼인 60돌 축하 의식 때에는 표리(表裏)를 올려야 하겠기에 정월(正月)에 날짜를 정해 놓고 나라에 빛을 내고 하늘이 준 복을 누리도록 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궁인(宮人)들이 상복(喪服) 차림을 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머리에 비녀를 꽂겠습니까? 문득 흰 구름 피는 저 하늘로 가버렸으니 우리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이 실로 모친상(母親喪)을 당한 듯합니다. 다가오는 장례 날은 멈출 수 없고 떠나는 상여는 붙들어 세울 수 없습니다. 초목도 슬픔에 겨워 흐느끼고 눈바람도 처참하여 서러움을 몰아옵니다. 아! 슬픕니다. 하늘의 도리는 알 수가 없고 신의 이치는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약을 쓴 보람이 있다고 약원(藥院)이 아뢰기만을 기다렸건만,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난간을 우러러 본들 어디서 그 모습을 뵙겠습니까? 찬양할 아름다운 덕행만이 끝이 없습니다. 세상을 떠난 것이 더없이 놀랍고 안에서 도움이 없어진 것이 한스럽습니다. 아! 슬픕니다. 난간은 적막하고 방안은 쓸쓸합니다. 걷어올린 휘장들에는 바람이 소슬하고 흔들리는 상여줄에는 달빛만이 처량합니다. 어디론가 새벽 수레 떠나게 되니 평시와 다른 의식이 벌어집니다. 만가(輓歌)를 일제히 부르니 그 소리가 오열에 떨고 아무리 떠나려도 떠나지 못해 망설이기만 합니다. 아, 슬픕니다.
산릉(山陵)은 경릉(景陵)의 곁에다 좋은 자리를 잡았습니다. 봉황새가 춤을 추고 용이 날아드니 신령이 아껴두고 귀신이 숨겨둔 곳입니다. 아름다운 기운이 차 넘치고 선왕의 능침(陵寢)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냇가의 풀은 향기가 그윽하고 사시사철의 제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선군(先君)을 생각하며 힘썼는데 더구나 명당자리에다 같이 모신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부부간의 화목한 정이 완연하고 근엄한 의관(衣冠)으로 함께 노니는 모습이 어찌 저승과 이승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영혼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저승길이 아득하니 영구가 갈 길도 아득합니다. 애도의 글을 쓰자니 마음속에 감회가 솟구칩니다. 아! 슬픕니다.
세월이 흘러 대가 바뀌기는 성인에게나 보통 사람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떠나는 이를 멈춰 세울 수는 없지만 남겨 놓은 덕은 빛을 뿌립니다. 다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삼가 애책문(哀冊文)에 썼습니다. 어찌 정리와 예의를 대략 펼 따름이겠습니까? 천추만대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심순택(沈舜澤)이 지었다.】
【원본】 48책 44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3책 320면
【분류】인물(人物) / 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효혜전(孝惠殿)에 나아가 현궁(玄宮)을 내릴 때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태의원(太醫院)에서 구주(口奏)를 올려, ‘반우(返虞)와 지영(祗迎) 및 초우제(初虞祭)를 직접 행하겠다고 한 명을 취소하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지영하는 절차는 인정으로 보나 예의로 보나 결단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들의 요청이 이렇듯 간절하니 초우제는 섭행(攝行)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반우(返虞)하니, 영성문(永成門) 안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모시고 참가하였다.
효혜전(孝惠殿)에서 초우제(初虞祭)를 행하였다.
학부 대신(學部大臣) 민영환(閔泳煥)을 일본 특파 대사 영접 위원장(特派大使迎接委員長)으로,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권중현(權重顯), 외부 협판(外部協辦) 윤치호(尹致昊), 철도원 감독(鐵道院監督) 현영운(玄暎運), 경위원 총관(警衛院總管) 권중석(權重奭)을 영접 위원(迎接委員)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이 아뢰기를,
"겸임 평리원 재판장(兼任平理院裁判長) 신태휴(申泰休)의 질품서(質稟書)를 받고 그 내용을 보니, ‘피고 유동근(柳東根)의 안건을 검사(檢事)의 공소(公訴)에 의하여 심리(審理)하니, 피고의 공초(供招)에, 「제가 재작년 음력 2월 10일에 대궐에 나아가 봉시(奉侍) 강석호(姜錫鎬)를 만나보니, 그가 말하기를, 『망명 중에 있는 유길준(兪吉濬)이 이제 귀국하여 정부를 전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자금이 없기 때문에 서상집(徐相潗)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금을 요구하였다. 하상기(河相驥)가 이것을 이용해서 유길준을 유인하여 체포하자는 내용을 폐하(陛下)에게 상주(上奏)하자 서상규(徐相奎)를 시켜 유길준에게 가서 만나보고 유길준이 만든 명부책을 가져오게 함으로써 유인하려는 계획이다. 너는 하상기·서상집·서상규 세 사람에게 가서 그들의 말을 듣되 비밀리에 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여러 번 하상기·서상집·서상규가 있는 곳에 가보고 내막을 자세히 탐지해 보니, 사실 꾀를 내서 체포할 사람이 못 되고 유길준의 책자와 편지라는 것도 반드시 믿을 것이 못될 뿐 아니라 유길준을 만나보았다는 사람 역시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성사할 가망이 없는 만큼 일찌감치 그만둠으로써 폐하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편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어이 누설까지 하였으니 죄를 잘 알겠습니다. 을미년(1895) 8월 사변(事變)이 일어난 날 현흥택(玄興澤)이 황망히 대궐에 들어가기 때문에 저도 뒤따라 같이 들어가서 동정을 탐지하여 보고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경무사(警務使) 이윤용(李允用)에게 가서 만나보고 도로 전(殿) 앞으로 나아가니 많은 사람들이 전각(殿閣) 앞에 잔뜩 모여 있으므로 보고할 수 없었습니다. 이어 문 앞길에 나갔다가 유혁로(柳赫魯)를 만났는데, 저의 손을 잡고 판자로 된 벽의 문 있는 곳을 가리키며 묻기를, 『여기가 시어소(時御所)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황급한 가운데 대답하기를, 『어재소(御在所)라고들 한다.』라고 하였는데, 들어가보니 곤녕합(坤寧閤)이었습니다. 유혁로가 흉악한 역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시어소를 가르쳐 주었으니, 이야말로 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유혁로가 모국(某國)의 군사들과 함께 대궐에 들어간 만큼 그가 흉악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은 말을 안해도 알 수 있는 것인데, 피고가 시어소를 알려 주어 큰 변이 초래되었으니, 아무리 변명하려 해도 그 자취를 가리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변 당일 밤에 명성 황후(明成皇后)와 폐하(陛下)가 처소를 옮겨 피신하려고 하자, 피고가 절대로 다른 일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재삼 막아 나서며 모국의 군사들이 들어오게 되면 목을 베서 바치겠다고 아뢰었다는 내용은 고발한 사람 김태정(金泰貞)과 증사인(證査人) 김태붕(金泰鵬)·김봉현(金鳳鉉)이 증명하고 공술한 것으로부터 여지없이 명확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피고가 진술한 공술과 여러 사람들이 증명한 공술에 의해 명백해졌습니다.
피고 유동근(柳東根)을 《대명률(大明律)》 〈직제편(職制編)〉의 교결근시관원조(交結近侍官員條)에서 근시 관원(近侍官員)과 서로 연계를 맺고 사정(事情)을 누설하여 그 인연을 따라 폐단을 빚어낸 자에게 적용하는 율문(律文)과 《대명률》〈적도편(賊盜編)〉의 모반급대역조(謀反及大逆條)에서 무릇 반역 음모자 및 큰 역적과 공모(共謀)만 한 자는 주모자와 추종자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율문으로 조율(照律)하여, 참형(斬刑)에 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원래의 의율(擬律)대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각 재판소(裁判所)에서 심리한 강도 죄인(强盜罪人) 이부산(李富山) 등 27명(名)을 교형(絞刑)에 처할 안건을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3월 16일 양력
효혜전(孝惠殿)에서 두 번째 우제(虞祭)를 행하였다.
효혜전(孝惠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갔다. 황태자(皇太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일본 공사(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를 접견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병석(閔丙奭)에게 태극장(太極章)으로 바꾸어 하사하라."
하였다.
법부 협판(法部協辦) 신태휴(申泰休)를 경무사(警務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육군 참장(陸軍參將) 구영조(具永祖)를 원수부 검사국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에 임용하였다.
3월 17일 양력
일식(日食)이 있었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이근명(李根命)이 상소하여 직책을 사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었다.
정1품(正一品) 이근명(李根命)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외부 교섭 국장(外部交涉局長) 김석규(金錫奎)를 법부 협판(法部協辦)에, 전라북도 관찰사(全羅北道觀察使) 김명수(金命洙)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종2품(從二品) 김학수(金學洙)를 경상남도 관찰사(慶尙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을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에 겸임시키고, 육군 법원장(陸軍法院長) 민상호(閔商鎬)를 일본 특파 대사 영접 위원(日本特派大使迎接委員)에 임명하였다.
3월 18일 양력
효혜전(孝惠殿)에서 세 번째 우제(虞祭)를 행하였다.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일본 특파 대사(日本特派大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접견하였다. 국서(國書)를 봉정하였기 때문이다.
정3품(正三品) 김익승(金益承)을 외부 교섭 국장(外部交涉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공사관 참서관(公使館參書官) 이위종(李瑋鍾)을 러시아주재 공사관 3등참서관에 임용하고 주임관 6등에 서임하였으며, 공사관 참서관 민상현(閔象鉉)을 독일주재 공사관 3등참서관에 임용하고 주임관 5등에 서임하였다.
3월 19일 양력
정2품(正二品) 이용직(李容稙)을 전라북도 관찰사(全羅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이번의 이 장호익(張浩翼)·조택현(趙宅顯)·김형섭(金亨燮)·김희선(金羲善)·김교선(金敎先)·방영주(方泳柱)·김홍진(金鴻鎭)·김영소(金永韶) 등 여덟 역적들로 말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던 적 없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입니다. 옥에서 한 공술 내용을 통하여 스스로 흉악한 정상이 여지없이 드러났기 때문에 율(律)에 따라 상주(上奏)하고 윤허해 줄 것을 기다렸었는데, 뜻밖에도 폐하(陛下)가 내린 명령을 받아 보니, 세 역적만 법대로 처분하고 나머지는 모두 등급을 감하여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숨을 아끼는 큰 성인의 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더없이 엄한 것이 나라의 법이고, 더없이 중한 것이 범죄를 다스리는 원칙입니다. 나라를 어지럽힌 역적들이 요행수로 법에서 벗어나 법의 기강이 한번 문란해지는 날이면, 임금과 신하의 기강과 명분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세상의 도리와 인심이 의지할 데가 없어져 불평을 품은 도깨비와 불여우 같은 무리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날까봐 걱정됩니다.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비록 변변치 못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벼슬이 법을 맡아보는 것이니, 엄한 처벌을 받을지언정 절대로 관례대로 명령을 거행할 수는 없습니다.
아! 오늘날 나라의 기강이 떨치지 못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정해지지 않는 것은 모두 역적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며, 기강을 붙들어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은 오직 법을 명백히 세우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저 흉악한 다섯 역적을 하늘 땅 사이에다 오랫동안 살려둔 것만도 이미 떳떳한 법을 그르친 것인데, 게다가 등급을 가볍게 감해 주기까지 하였으니, 이른바 형정(刑政)을 장차 어디에 시행하겠습니까? 신은 밤새 생각하다가 근심과 의분이 끓어올라 이처럼 감히 외람되게 법을 바로 시행하는 데 대한 의리를 진술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陛下)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용단을 내려 빨리 명령을 취소하고 나라의 법을 시원히 펴는 동시에 명령을 받들지 않은 신의 오만한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법을 흥정할 수 있겠는가마는 때에 따라 경중을 두는 것도 법을 위한 것이니 다시 번거롭게 굴지 말고 속히 거행하라."
하였다.
3월 20일 양력
효혜전(孝惠殿)에서 네 번째 우제(虞祭)를 행하였다.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일본 특파 대사(日本特派大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접견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독일 헨리〔亨利〕 친왕(親王)을 특별히 대훈위(大勳位)에 서훈(敍勳)하고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미국 공사 알렌〔安連 : Allen, Horace Newton〕을 특별히 훈(勳)1등에 서훈(敍勳)하고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서울에 주재하는 일본 공사관(公使館)의 서기관(書記官) 이하 공사관에 소속된 무관들과 일본 영사관(領事館)의 전체 성원들을 서훈하여 특별히 친목의 뜻을 보이되, 일본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는 훈1등(勳一等)에, 서기관(書記官) 하키하라 슈이치〔萩原守一〕는 훈3등(勳三等)에, 통역관(通譯官) 시오가와 이치타로〔鹽川一太郞〕는 훈4등(勳四等)에, 통역관(通譯官)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 외교관보(外交官補) 오카베 사부로〔岡部三郞〕·후루야 시게쓰나〔古谷重綱〕는 모두 훈5등(勳五等)에, 공사관(公使館)에 소속된 무관(武官) 육군 소좌(陸軍少佐) 이지치 유키스케〔伊地知幸介〕는 훈2등에, 육군 소좌 노즈 쓰네다케〔野津鎭武〕, 해군 소좌(海軍少佐) 요시다 마스지로〔吉田增次郞〕, 해군 군의 소감(海軍軍醫少監) 와다 와다 야치호〔和田八千穗〕는 모두 훈3등에, 영사(領事) 미마스 구메기치〔三增久米吉〕는 훈4등에, 영사관보(領事官補) 데부치 마사쓰구〔出淵勝次〕는 훈5등에 서훈하고 각각 태극장을 하사하며, 육군 대위(陸軍大尉) 이노우에 가즈쓰구〔井上一次〕는 훈4등에 서훈하고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법부 협판(法部協辦) 김석규(金錫奎)를 평리원 판사(平理院判事)에 겸임시켰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안종덕(安鍾悳)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법부(法部)에 비준되어 내려온 평리원(平理院)의 선고서를 보니, ‘모반(謀反)한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罪人) 장호익(張浩翼) 등 21명의 역적은 이 세상 만고에 있어본 적 없는 자들입니다. 소위 피로써 맹약한 다섯 가지 조목은 신하로서는 차마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감히 읽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 이 세상에 아직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있는 이상, 어찌 이처럼 흉악한 종자들과 악독한 요물을 하늘 땅 사이에 낳아 존엄한 임금을 원망하고 이웃 나라에 수치를 끼친단 말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듣건대 이 역적들 중 도망친 자들을 제외하고 12명이 연전에 체포되어 이미 심리를 거쳤다고 합니다. 모두 때를 기다릴 것 없이 처형해 버려야 할 자들인데, 그간 법 맡은 관리들은 무엇 때문에 오늘까지 세월을 질질 끌며 도리어 비호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한단 말입니까? 옥사(獄事)의 실정은 극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껏 알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요행히 처결한 것을 들었습니다. 이에 감히 아뢰니 황상(皇上)은 깊이 생각해서 해당 율(律)을 시행함으로써 법의 기강을 바로 세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처분을 하였으니 번거롭게 굴 필요가 없다."
하였다.
3월 21일 양력
육군 참장(陸軍參將) 이지용(李址鎔)을 육군 부장(陸軍副將)에, 육군 부령(陸軍副領) 권중석(權重奭)·신태휴(申泰休)를 육군 참장에, 비서원 경(祕書院卿) 윤덕영(尹德榮)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정3품(正三品) 정동식(鄭東植)을 표훈원 제장국장(表勳院製章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3월 22일 양력
효혜전(孝惠殿)에서 다섯 번째 우제(虞祭)를 행하였다.
정2품(正二品) 윤용식(尹容植)을 비서원 경(祕書院卿)에, 특진관(特進官) 이헌경(李軒卿)을 함경남도 관찰사(咸鏡南道觀察使)에, 전라남도 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 이근교(李根敎)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내장원 경(內藏院卿) 이성렬(李聖烈)을 전라남도 관찰사에, 종2품(從二品) 이항의(李恒儀)를 충청남도 관찰사(忠淸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3월 23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예식원 외무 과장(禮式院外務課長) 고희경(高羲敬)은 제주도(濟州道)에 가서 타이른 공적이 있으니 특별히 훈(勳)3등(勳三等)에 서훈(敍勳)하며, 표훈원 제장국장(表勳院製章局長) 정동식(鄭東植)은 처음으로 훈장을 제조한 공로가 있으니 특별히 훈4등(勳四等)에 서훈하고 각각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외부 대신(外部大臣) 임시 서리(臨時署理)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조병식(趙秉式)이 정부에서 우리나라와 외국과의 무역을 편리하게 하여 공동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평안북도(平安北道) 용천군(龍川郡) 용암포(龍巖浦)를 통상 항구로 만드는 데 대한 문제가 이미 의정부(議政府)의 토의를 거쳐주재(奏裁)하였으므로 개항 날짜를 따로 정하여 다시 성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본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에게 조회(照會)하였다.
3월 24일 양력
효혜전(孝惠殿)에서 여섯 번째 우제(虞祭)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금번 일본 특파 대사(日本特派大使)와 수원(隨員)들에게 모두 훈(勳)을 줌으로써 친애의 뜻을 보여 주어라. 일본 특파 대사(特派大使)인 추밀원 의장(樞密院議長)이며 후작(侯爵)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별히 대훈위(大勳位)에 서훈(敍勳)하고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하사하라. 수원(隨員)인 추밀원 서기관장(樞密院書記官長) 쓰즈키 게이로쿠〔都築馨六〕를 특별히 훈1등(勳一等)에, 육군 소장(陸軍小將) 우사가와 가즈마사〔宇佐川一正〕, 해군 소장(海軍小將) 사카모토 도시아쓰〔坂本俊篤〕, 궁중 고문관(宮中顧問官)인 자작(子爵) 도엥 모토아이〔東園基愛〕를 모두 특별히 훈2등(勳二等)에 서훈하고 각각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라. 공사관 서기관(公使館書記官)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를 특별히 훈2등에 서훈하고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라. 외무성 참사관(外務省參事官) 사카다 주지로〔坂田重次郞〕, 제실 제도 조사국 비서(帝室制度調査局祕書) 후루야 히사쓰나〔古谷久綱〕를 모두 훈4등(勳四等)에, 다카하시 다네노리〔高橋種紀〕를 특별히 훈5등(勳五等)에 서훈하고 각각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일본 사람 노즈 쓰네다케〔野津鎭武〕를 군부 고문(軍部顧問)에 초빙하였다.
3월 25일 양력
효혜전(孝惠殿)에서 칠우제(七虞祭)를 행하였다.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가 일본 특파 대사(特派大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접견하였다. 다음날 귀국하기 때문이었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일본국 함장 해군 대위(海軍大尉) 이노우에 도시오〔井上敏夫〕를 특별히 훈3등(勳三等)에, 대위(大尉) 시바후 사이치로〔芝生佐市郞〕를 특별히 훈5등(勳五等)에 서훈(敍勳)하고 각각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종2품(從二品) 현학표(玄學杓)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3월 26일 양력
〖청(淸) 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청국(淸國)주재 공사(公使) 박제순(朴齊純)을 소견(召見)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웃 나라와 우의를 두터이 하는 데에는 왕래가 중요하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을 일본 보빙 대사(日本報聘大使)로 특별히 파견하여 가게 하라."
하였다.
통신원 총판(通信院總辦) 이하영(李夏榮)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육군 법원장(陸軍法院長) 민상호(閔商鎬)를 통신원 총판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종2품(從二品) 이대직(李大稙)을 장례원 소경(掌隷院少卿)에, 철산 군수(鐵山郡守) 조규하(趙奎夏)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3월 27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이승재(李承載)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3월 28일 양력
의주 군수(義州郡守) 구완희(具完喜)를 북진하는 일본 군대 접대관에 임명하였다.
3월 29일 양력
종1품(從一品) 민영규(閔泳奎)를 시종원 경(侍從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從二品) 강홍대(康洪大)를 철도원 감독(鐵道院監督)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3월 30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우리나라의 훈장 제도가 갖춰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자들에게 훈장을 주는 규정을 아직 정하지 못한 것은 큰 허물이다. 이번에 서봉장(瑞鳳章) 한 가지를 더 만든 것은 대궐의 여관(女官)들을 위한 것이다. 여섯 등급으로 나누어가지고, 범절이 높고 공로가 뛰어나서 표창해야 할 사람들에게 수여할 것이니 잘 알고서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은 훌륭한 공로를 세웠으니 특별히 훈1등(勳一等)에 서훈하고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한영(李漢英)을 철도원 감독(鐵道院監督)에,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오정근(吳正根)을 장례원 소경(掌隷院少卿)에, 종2품(從二品) 조동완(趙東完)을 시강원 첨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육군 부령(陸軍副領) 장화식(張華植)을 육군 법원장(陸軍法院長)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3월 31일 양력
종2품(從二品) 현영운(玄暎運)을 군부 협판(軍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가 곧바로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 임용하여 일본에 주재하도록 하였으며, 의정부 참서관(議政府參書官) 박의병(朴義秉)을 의정부 총무국장(議政府總務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박용화(朴鏞和)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김가진(金嘉鎭)에게 임시로 외부 대신(外部大臣)의 사무를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조병식(趙秉式)이 아뢰기를,
"잡세(雜稅)를 혁파(革罷)하고 파견 관리를 쫓아 보낸 데 대한 문제를 가지고 여태껏 얼마나 거듭 엄하게 신칙(申飭)하였습니까? 그런데 요즘 듣자니 경강(京江) 부근과 경기(京畿) 바닷가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 거둬들이는 세(稅)의 명목이 더욱 많기 때문에 장삿길이 막히고 물가(物價)가 뛰어올라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이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것은 경찰관(警察官)과 관찰사(觀察使)의 책임인데도 불구하고 조정의 명령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면서 아직 단속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일의 체모입니까?
경무사(警務使) 신태휴(申泰休)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이근호(李根澔)를 우선 엄히 견책하고, 이른바 파견 관리라는 무리들을 경무청(警務廳)과 관찰사부(觀察使府)에서 모두 잡아서 평리원(平理院)에 보내게 하고, 조율(照律)하여 징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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