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기유
일식(日蝕)이 있었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의 추향(秋享)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8월 2일 경술
인정전에 나아가 남단제(南壇祭)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8월 4일 임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담체(痰滯)의 증세로 미령한 환후(患候)가 있어 약원(藥院)에서 윤번(輪番)으로 숙직하였다.
김좌근(金左根)·김병기(金炳冀)·김현근(金賢根)·윤의선(尹宜善)·김병주(金炳㴤)·김병지(金炳地)·김병국(金炳國)·김병필(金炳弼)에게 별도로 입직(入直)하라 명하였다.
약원(藥院)에서 사옹원(司饔院)에 아울러 숙직하였다.
하교하기를,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사직(社稷)·경모궁(景慕宮)과 여러 산천(山川)에 날을 가릴 것 없이 기도제를 설행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이 양심합(養心閤)에서 승하(昇遐)하였다.
하교하기를,
"정성과 효도가 천박(淺薄)하여 오늘 술시(戌時)에 대왕 대비전께서 양심합에서 승하하셨으니, 망극(罔極)한 슬픔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하였다.
빈전(殯殿)을 환경전(歡慶殿)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궁성(宮城)을 호위(扈衛)하라 명하였다.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하기를,
"신 등이 보호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전혀 의방(醫方)에 어두워 약효(藥効)를 거두지 못하여 이 망극한 슬픔을 당하였으니, 신 등의 죄는 만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신 등은 삼가 이에 땅에 엎드려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망극한 가운데 이 구계(口啓)를 보니, 더욱 망극하다. 경 등은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大臣)과 예조 판서를 양심합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정관(政官)을 패초(牌招)해 개정(開政)하여 삼도감(三都監)의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을 차출(差出)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초상(初喪)에서 졸곡(卒哭)까지는 대·중·소(大中小)의 제사를 모두 정지하되, 성빈(成殯)한 뒤에는 오직 사직(社稷)에 제사지낸 일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컨대 이로써 거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8월 5일 계축
인시(寅時)에 대행 대왕 대비전(大行大王大妃殿)을 목욕시키고 묘시(卯時)에 염습(殮襲)하였다.
하교하기를,
"대행 대왕 대비전께서 검소함을 숭상하고 용도를 절제하신 평일의 성덕(盛德)은 소자(小子)가 항상 우러러 체념(體念)했던 바였다. 금번 의대(衣襨)는 내수사(內需司)에서 마땅히 올려다 쓸 것이니, 외부(外部)에서 거행함은 그만두라."
하였다.
신시(申時)에 소렴(小斂)을 하였다.
혼전(魂殿)을 문정전(文定殿)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을 총호사(摠護使)로 삼고, 익평군(益平君) 이희(李曦)를 수릉관(守陵官)에 임명하였다.
8월 6일 갑인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는 8월 초10일이 사직 대제(社稷大祭)를 거행할 날인데, 비록 성빈(成殯)한 뒤에 있기는 하지만 향(香)을 받는 것은 성복(成服)하는 날에 있으며, 미리 익히는 의식도 또한 성빈 전에 있으니, 막중한 전례(典禮)가 끝내 중난(重難)하고 조심스러운 데 관계됩니다. 청컨대 시임·원임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8월 7일 을묘
신시(申時)에 대행 대왕 대비전 영상(靈床)을 환경전(歡慶殿)으로 이봉(移奉)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낭청(郞廳)을 보내어 수의(收議)하니,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은 말하기를, ‘태유(泰壝)066) 에 제사지내는 것은 그 예(禮)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성빈(成殯) 후 행사(行祀)하는 것은 오직 사직단에만 그러한데, 이는 곡식(穀食)을 소중히 여겨 지극히 삼가고 정성스럽게 하는 뜻입니다. 지금 행사(行祀)할 날짜가 이미 성빈한 뒤에 있으니, 상무일(上戊日)을 중무일(中戊日)로 물리는 것은 매우 중난하고 조심스러운 데 관계됩니다. 향관(享官) 및 여러 집사(執事)가 모두 궐외(闕外)에서 깨끗하게 재계(齋戒)하여 기일에 향을 받고 익히는 의식은 당일 향소(享所)에서 거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또한 임시 편의로 방조(傍照)한 전례가 없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대신(大臣)의 의논에 따라서 하라고 분부하였다.
8월 8일 병진
사시(巳時)에 대행 대왕 대비전에 대렴(大斂)을 행하였다.
신시(申時)에 재궁(梓宮)을 받들어 내렸는데, 잇따라 빈소(殯所)를 마련하고 아울러 제전(祭奠)을 《의례(儀禮)》대로 설행하였다.
서대순(徐戴淳)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영근(金泳根)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8월 9일 정사
진시(辰時)에 성복(成服)하였다. 복제(服制)의 의주(儀註)는 ‘전하(殿下)는 자최(齊衰) 3년, 왕대비(王大妃)·대비(大妃)·왕비(王妃)는 자최 3년, 내명부(內命婦)·빈(嬪) 이하는 자최 3년, 상궁(尙宮)·규(閨) 이하는 자최 3년,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은 자최 기년(朞年)이고, 종친 및 문무 백관의 처(妻)는 졸곡(卒哭)에 제복(除服)하며, 동성(同姓)·이성(異姓)의 시마(緦麻) 이상의 친척은 자최 기년을 백관과 더불어 같이 하고, 동성·이성의 시마 이상의 여(女)는 자최 기년, 수릉관(守陵官) 및 시릉 내시(侍陵內侍)는 자최 3년, 내시·사알(司謁)·사약(司鑰)·반감(飯監)은 자최 3년이며, 사서인(士庶人)은 기년에 제복한다.’ 하였다. 【최복(衰服)을 받지 못한 자의 처(妻)와 서인의 여(女)는 모두 흰 옷을 입다가 졸곡에 제복한다.】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615면
【분류】왕실(王室) / 의생활(衣生活)
미시(未時)에 재궁(梓宮)에 은정(銀釘)을 박고 옻칠을 하였다.
약원(藥院)의 제조(提調) 및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을 여차(廬次)에서 소견(召見)하였으니, 성복(成服)한 뒤 임금의 안후(安候)를 물었던 때문이었다. 영부사 정원용(鄭元容) 등이 아뢰기를,
"우리 대행 대왕 대비전(大行大王大妃殿)께서 60년 동안 국모로 군림하시면서 두 번이나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하셨습니다. 공(功)은 종사(宗社)와 국가에 있고 덕(德)은 민생(民生)에 남아 있어 안으로 조정의 경사(卿士)와 밖으로 팔로(八路)의 백성들이 누군들 자애롭게 부육(覆育)한 혜택을 입지 않았겠습니까만, 군하(群下)들이 복이 없어 하루아침에 믿을 데가 없게 되었으니, 끝없는 비통이 날짜가 갈수록 더욱 간절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큰 은혜와 지극한 덕을 성모(聖母)에게서 받으셨습니다. 9년 동안에 뜻을 잘 받들고 음식을 갖추어 아침 저녁으로 정성(定省)하여 즐겁고 기쁘게 하였기에 자애와 효도가 함께 빛나서 바다에 비견할 만한 정성이 있었고 축강(祝岡)의 송축(頌祝)을 하였는데, 어찌 오늘날에 갑자기 이 지경을 당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얼굴빛에 나타나는 근심과 소리 내어 우는 슬픔은 그것이 지극한 정리(情理)에서 나온 것인 줄 우러러 알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제도를 따라 애통함을 절제하는 것은 《예경(禮經)》에 훈계한 바로 사서인(士庶人)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성상의 몸이겠습니까? 정리(情理)에 맡겨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전일 걱정하시던 자념(慈念)을 우러러 본받는다면 더욱 어찌 예제(禮制)를 벗어나 지나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찬(素饌)을 드신 지가 지금 여러 날이 되었으니, 옥체(玉體)를 보양(保養)함에 있어 어찌 손상이 없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애타게 생각하는 것을 형언(形言)할 수가 없습니다. 상선(常膳)의 회복을 천천히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전하께서 먼저 스스로 힘쓰시고, 잇따라 각전(各殿)에 우러러 권하소서. 이것이 신 등의 구구(區區)한 소망입니다."
하였다. 약원 도제조 김흥근(金興根)이 아뢰기를,
"의관(醫官)을 대령시켜 입진(入診)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부터 이같은 때에 입진을 청하면 늘 허락하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직 겉으로 나타나는 증세가 없다. 이같이 망극한 가운데 하필 입진하려고 하는가? 말을 하려고 하면 기운이 더욱 지칠 것이다."
하였다.
이번의 〈능소(陵所)〉 간심(看審)을 인릉(仁陵)의 국내(局內)로부터 시작하되, 판돈녕(判敦寧) 김병기(金炳冀)와 병조 판서 김병국(金炳國)에게 나아가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삼도감(三都監)에 드는 물력(物力)은 마땅히 내수사(內需司)에서 내릴 것이니, 외도(外道)에 복정(卜定)067) 하는 것은 그만두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팔도(八道)의 제수전(祭需錢)을 지금 당연히 거두어 들여야 할 것이나, 아! 우리 백성을 내 몸이 손상된 것같이 보호하였음은 곧 우리 대행 대왕 대비전께서 60년 동안을 하루같이 하신 성념(聖念)이셨다. 나 소자(小子)가 지금 비록 애황(哀遑)중일지라도 진실로 일분(一分)이나마 백성의 힘을 펴게 할 일이 있다면 실로 환히 살피면서 오르내리는 혼령(魂靈)의 뜻에 따르는 도리가 될 것이니, 팔도의 제수전을 특별히 견면(蠲免)시키고 탁지(度支)068) 에서 대용(代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로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성복(成服)이 문득 지나니, 망극한 애통이 더욱 간절하다. 이때를 당해서 어찌 차마 상선(常膳)을 들 수가 있겠는가?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
하였다. 두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애통한 괴로움이 망극하여 마음을 억제하여 안정시킬 수 없으니, 다시는 이를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
하였다.
지돈녕(知敦寧) 이학수(李鶴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순조 대왕(純祖大王)께서는 중정(中正)하고 순수(純粹)한 자질로 정밀(精密)하고 전일(專一)한 법도(法度)를 이어받아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는 데에 근본을 두고,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로 도달(導達)시켰습니다. 건릉(健陵)069) 께서 병환으로 계실 때를 당하여는 보령(寶齡)이 아직 어렸었는데도 친히 약과 음식을 받들어 밤낮으로 초민(僬悶)하였으며, 승하(昇遐)하시기에 미쳐서는 소리내어 슬피 울며 애통해 하였으므로, 근신(近臣)과 위졸(衛卒)에 이르기까지도 흐느끼면서 차마 우러러보지 못하였으며, 대비전(大妃殿)에게는 융성하게 봉양함을 극진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삼가고 근신하였으므로 자애와 효도에 간격이 없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일은 어느 것이 큰일인가?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 제일 큰 일이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봄 가을의 향사(享祀)를 몸소 받들어 국가 대제(大祭)의 희생(犧牲)과 예폐(禮幣)에 대해서도 공경하고 신중히 하여 감히 혹시라도 과실이 없었습니다. 선조(先祖)의 능소(陵所)를 두루 참배하는 것은 춘추(春秋)로 애통한 감회를 펴기 위해 대략 한 해에 두 번씩 하였으며, 그 마음을 미루어 다른 세대(世代)의 능묘(陵墓)와 사묘(祠廟)에까지도 수신(守臣)을 신칙하여 시절따라 금호(禁護)하게 하였습니다.
을해년070)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훙서(薨逝)했을 때는 관각(館閣)에서 널리 의논한 것을 채택하고 정(程)·주(朱)가 정한 예론에 의거하여 절충해 만들어 9개월의 복제(服制)를 결정하였으며, 신사년071) 효의 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가 승하(昇遐)했을 때는 영돈녕(領敦寧) 김조순(金祖淳)의 의논을 따라 새로 건릉(健陵)을 가려 난천(灤遷)072) 의 예(禮)를 거행하고 노부(魯祔)의 의식을 행하였으며, 임오년073)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졸서(卒逝)했을 때는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의논에 따라 시마(緦麻) 석달의 복(服)을 입었으나 한가하게 있을 때에는 흰 상복을 입고서 3년을 마쳤으니, 혐의를 분별한 의논과 천성(天性)에서 우러난 정성이 여기에서 둘 다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사년에 《황청통고(皇淸通考)》를 연경(燕京)에서 구입해 왔었는데, 본조(本朝) 경종(景宗)의 신축년074) 일을 기재한 것이 그지없이 거짓되게 꾸며졌었으므로 급히 전대(專對)의 사신(使臣)을 시켜 변정(辨正)하여 잘못 주달된 구어(句語)를 삭제하게 하였는데, 사신이 개정본(改正本)을 가지고 돌아왔으므로 이에 종묘(宗廟)에 고유(告由)하였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약·사·증·상(禴祀烝嘗)075) 의 제사를 효성으로 올린다.’ 하였고,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상사(喪事)의 예절을 정중히 하고 먼 조상을 추모 공경하면 민덕(民德)이 돈후(敦厚)한 데로 돌아간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한가하게 지낼 때에도 항상 경계하고 삼가고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상제(上帝)를 대하여, 혹 일월 성신(日月星辰)이 경계를 알림과 수한(水旱)의 재해를 당해서는 척연(惕然)히 조심하고 두렵게 여겨 자신(自身)을 인책(引責)하면서 도움을 구하는 정성이 하교에 넘쳤으며, 정신(廷臣)의 헌체(獻替)076) 를 옳게 여겨 가납(嘉納)하였으니, 천심(天心)을 족히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삼가 천도(天道)를 높이고 천명(天命)을 받든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셨고 경비를 절제하여 백성의 힘을 펴게 하였으며, 급하지 않는 징세(徵稅)를 줄이고 이미 묵은 흠포(欠逋)를 면제해 주었습니다. 무릇 진휼(賑恤)할 일이 있을 때는 미리 강구(講究)하여 내탕금(內帑金)으로 도와주고 나서 또 공세(公稅)를 정지시켰으며, 관부(官府)에서 올리는 상선(常膳)과 주현(州縣)의 정식 공물(供物)에 이르러서도 아울러 모두 절감하게 하여 넉넉하지 못함을 도와주었습니다. 항상 수령(守令)들을 신칙하고 때로는 안렴사(按廉使)를 보내어 궁벽한 지역과 멀리 떨어진 연해(沿海)에까지도 만리 밖을 섬돌 앞의 일과 같이 밝게 알아 병들어 죽게 된 자는 의약(醫藥)을 보내게 하고 죽어서 뼈가 드러난 자는 묻어 주게 하였으며, 길가에 버려진 어린아이들은 식료를 주어 기르게 하고,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거지들은 양식을 싸주어 돌려보내게 하였습니다. 모든 옥사(獄事)를 신중하게 처결한 것은 이것이 민명(民命)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인데, 매양 지독한 추위나 더위를 당해서는 그때마다 석방시키는 관전(寬典)을 행하였으므로 살리기 좋아하는 덕(德)에 백성들이 모두 열복하여 영어(囹圄)가 텅 비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경신년077) 처음 보위(寶位)에 올라서는 선왕(先王)의 유지(遺志)에 의거 맨 먼저 선두안(宣頭案)078) 을 큰 거리에서 태웠으므로, 수없이 많은 액정(掖庭)의 노비(奴婢)들을 화락한 데로 인도함으로써 상서로움을 맞이하여 대명(大命)을 계승하였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편안한 것이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하전(廈氈) 위에서 날마다 유신(儒臣)을 접견하고 온갖 정사(政事)를 처리하는 여가에도 서책(書冊)을 열람하여 천인(天人)의 성명(性命)에 대한 원리를 탐구하셨고 왕패(王霸)의 의리(義利)에 대한 구분(區分)을 밝히셨으며, 조서(詔書)의 말씀과 운한(雲漢)의 문장은 전모(典謨)079) 와 동등하였고 풍아(風雅)080) 와 짝할 수 있었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한결같이 생각을 늘 학문에 둔다면 덕(德)을 닦는 것이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바깥으로는 돌아다니며 멋대로 노는 즐거움이 없었고 안으로는 연회(宴會)하는 사사로움을 끊으셨으며, 의대(衣襨)는 여러 번 빨아 입었고 유장(帷帳)은 혹 깁고 꿰매기도 했으며, 선왕의 궁실(宮室)이 퇴락하면 개수하는 데 있어 서까래 하나와 주춧돌 하나도 더 늘려 꾸민 것이 없었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검소한 덕(德)을 삼가 지켜서 오직 먼 장래를 위한 계획을 생각하시오.’라고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무릇 어버이를 섬기고 선조를 받들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구휼하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검소함을 숭상한 덕(德)은 실로 열성조(列聖朝)에서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인데, 또한 우리 성고(聖考)께서는 힘쓰지 않으셔도 적중하셨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대로 되어, 백세(百世)를 경유하면서 백왕(百王)과 비교해 보아도 더 성대함이 있지 않았던 성덕(聖德)과 대업(大業)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아!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정조 대왕(正祖大王)께서 성덕(聖德)으로 나라를 다스린 지 25년 사이에 애쓴 마음과 정성스런 뜻은 일성(日星)보다 빛나고 부월(斧鉞)보다 엄하였는데, 한 종류의 엇나간 무리들이 있어 음흉하고 추악한 무리들이 마구 불어나 기필코 원수같이 보아 괴란(壞亂)시키려 할 때 우리 성고(聖考)께서 혁연(赫然)히 이에 노하시어 크게 천토(天討)를 행하였으니, 비유하건대 우정(禹鼎)이 밝게 비쳐 사악한 귀신이 도망할 수 없었던 것과 같아서 선(善)과 악(惡)이 가름되고 백성의 심지(心志)가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서양(西洋)의 사교(邪敎)가 인륜(人倫)을 더럽히고 어지럽게 하였으므로 왕법(王法)에 있어 반드시 주토(誅討)해야 할 것이었는데, 전습(傳習)이 이미 오래 되었고 유파(流播)가 또 넓어져 심지어 대대로 벼슬했던 집안과 지체 높은 학사(學士)들까지도 오염되어 기세가 장차 마치 불이 벌판에 번지고 하천(河川)이 터져 무너지는 것 같아 점점 오랑캐와 금수(禽獸)가 되어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우리 성고께서 빨리 그 뿌리를 뽑아 그들을 죽이고 서적을 불태우게 하여 기필코 남김없이 없애버리니, 이에 치교(治敎)가 청명하고 정학(正學)이 더욱 빛났습니다. 관서(關西)의 토구(土寇)들이 으슥한 곳에서 도적질하고 날뛰다가 끝내는 걷잡을 수 없이 세력이 퍼져 긴 뱀[蛇]과 큰 돼지가 점차 먹어 들어오는 것같이 군현(郡縣)을 침범하고 수령(守令)을 살해하였으므로 도성(都城) 아래에 있는 천류(賤類)들에 이르러서도 속아서 미혹되는 자가 점차 많았습니다. 우리 성고(聖考)께서 장수(將帥)에게 명하여 또 가서 주토하고 화란(禍亂)을 평정하게 했는데, 그들의 괴수는 죽이고 위협당해 복종한 자는 석방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쪽 지방이 다 평정되어 성상의 은택(恩澤)을 호산(湖山) 천리 밖에서 노래로 읊게 되었으니, 아! 우리 순고(純考)의 위대하신 공적(功績)을 거룩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아! 전왕(前王)을 잊지 못한다.’ 하였으니 거룩하다 이를 만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 대비 전하께서는 도·신(塗莘)081) 과 같은 명문(名門)으로서 태임(太任)082) ·태사(太姒)083) 와 같은 지극한 덕이 있어 뒤에서 돕는 공과 부드러운 교화로 우리 성고께서 35년 동안 왕화(王化)가 고루 미쳐 태평스러운 정치를 크게 도우셨습니다. 갑오년084) 순조(純祖)께서 승하하신 때와 기유년085) 헌종(憲宗)께서 승하한 때를 당해서는 신린(臣隣)들의 요청을 애써 따라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준행하여 두 번이나 수렴 청정(垂簾聽政)의 교화를 베풀었고, 거듭 구면(裘冕)086) 의 의식을 거행하여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을 회복하였고 국세(國勢)를 태산 반석 위에 올려놓았으니, 이는 일찍이 사승(史乘)에 기록되지 않았던 것이며 귀와 눈으로 보고 듣지 못했던 바입니다. 아! 어찌 그리도 거룩하십니까? 아! 혼례(婚禮)를 이룬 지 56년이었는데, 종사를 위해 부지런히 일했고 크나큰 걱정이 성지(聖智)를 열어 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남겨주고 후대(後代)를 개도(開導)해서 동방(東方) 억만 년의 아름다운 운회(運會)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공덕(功德)이 이미 옥책(玉冊)087) 에 새겨졌고 동관(彤管)088) 이 기록했으니, 절대로 신이 찬술(讚述)하여 선양(宣揚)할 바가 아닙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아 도와서 성스러운 여사(女士)를 내려보내어 지존(至尊)의 배필이 되게 함으로써 태평스러운 정치를 돕게 했으며, 두 번이나 수렴 청정을 하여 몹시 곤란했던 사세를 크게 구제했습니다. 현비(賢妃)로서 도와준 것이 컸고 성모(聖母)로서 성취시킨 것이 장원(長遠)하였으니, 아! 어찌 거룩하지 않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우리 순고(純考)께서는 저승의 멀고 아득한 가운데에서 말없이 돕고 영명하게 돌아보아 받은 바 휴명(休命)을 완결짓고 끝마치지 못한 뜻을 완성시키게 되었습니다. 지금 순고의 뛰어난 공적과 광대한 사업은 오로지 성모께서 남몰래 보좌하고 유순하게 도운 결과인 것이요, 성모의 훌륭하신 모범과 큰 경사도 역시 순고께서 크고 어려운 일을 끼쳐 준 이유인 것입니다. 전(傳)에 이른바 ‘훌륭하게 여기고 친하게 여기고 이롭게 여기고 즐겁게 여겨 잊을 수 없다.’라고 한 것이 참으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오랫동안 외방(外方)에서 고생하시다가 태모(太母)의 명을 받들어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습니다. 왕위에 올라 예(禮)를 행한 다음 밤낮으로 조선(祖先)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하늘을 공경하고 조선을 본받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백성을 애휼하는 것[敬天法祖勤學愛民]은 곧 열성조(列聖祖)의 가법(家法)입니다. 전하께서 사복(嗣服)하신 처음에 태모께서는 전하에게 친히 전수(傳受)하였고 전하께서는 태모에게서 친히 받으셨으니, 이 도(道)가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곧 우리 순고께서 35년 동안 더 숭상할 수 없는 덕화(德化)를 이루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우리 태모를 섬기심에 있어 기쁘도록 모시고 가르침을 받들었던 것이 지금 9년인데, 태모께서 제시 유도하신 하교(下敎)와 고명(誥命)이 이 네 가지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삼가 형평(衡平)함을 맞아서 우리 순고의 성대하신 덕업(德業)을 계승하는 것도 역시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어버이를 드러내시는 효도는 사해(四海)에서 표준으로 삼을 만하니, 무릇 은덕을 갚고 빛남을 이루는 의전(儀典)에 있어서 극진한 방도를 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큰 덕행(德行)이 있는 자는 대명(大命)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따라서 순조 대왕의 묘호(廟號)를 의정(議定)함에 있어 마땅히 공렬(功烈)을 찬양함이 있어야 진실로 경례(經禮)에 합당할 것입니다.
《대대례(大戴禮)》에 이르기를, ‘시호(諡號)란 것은 행동에 대한 실적(實蹟)이다.’라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그의 시호를 듣고서 그의 정치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순고의 행적을 헤아려보고 순고의 정치를 상고해 보건대 조(祖)라 일컫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논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왕업(王業)을 창시한 임금을 조(祖)라 일컫고 계통(系統)을 이은 임금을 종(宗)이라 일컬었음은 고금(古今)의 떳떳한 법식이었습니다. 전한(前漢)·후한(後漢) 4백여 년 동안에는 오직 고조(高祖)와 세조(世祖)089) 뿐이었고 송(宋)나라 3백여 년에도 오직 태조(太祖)뿐이었으며, 송 고종(宋高宗)의 묘호를 의정할 때에도 더욱 오래도록 곤란해 하였습니다. 명(明)나라에는 오직 태조(太祖)와 성조(成祖)뿐이었고 우리 나라에는 오직 태조 대왕·세조 대왕·선조 대왕·인조 대왕뿐이었으니, 시호를 내리는 의전(儀典)에 대해서는 지극히 엄중하였습니다. 한 문제(漢文帝), 당(唐)나라의 태종(太宗)·현종(玄宗), 진 원제(晉元帝), 송 고종은 비록 백세토록 불천지묘(不遷之廟)는 되었으나 모두 조(祖)라고 일컫지는 못하였습니다.’라고 하기에, 신도 역시 말하기를, ‘조(祖)는 공로(功勞)요 종(宗)은 덕화(德化)로서 두 가지가 모두 성대하고 아름다워서 조가 반드시 종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고 종이 반드시 조보다 깎이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당면(當面)한 시기에 의하여 그 칭호를 달리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세조 대왕과 인조 대왕은 계통을 이은 임금으로 조(祖)라고 일컬었으며, 선조 대왕은 종계(宗系)를 바르게 밝혔고090) 왜란(倭亂)을 평정하였기 때문에 조라고 일컬었으니, 이는 참으로 우리 선군(先君)들께서 이미 시행했던 전례(典禮)이었고 우리 나라의 예제(禮制)에도 역시 마땅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고루하고 촌스러운 말을 정신(廷臣)들에게 널리 하문하여 만일 경대부(卿大夫)들의 생각이 같다면, 이것은 일국(一國)의 동일하고 공평한 견해이며 영구히 바꾸지 못할 의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우리 순고(純考)의 성스러운 덕과 지극하신 선에 대하여 경(卿)의 말이 오늘날 나왔으니, 더욱 미치지 못할 비통함이 간절하다. 일이 막중한 전례에 관계되니, 마땅히 수의(收議)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8월 10일 무오
빈청(賓廳)에서 수의하였는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순종(純宗)091) 의 묘호(廟號)를 조(祖)로 일컫는 일에 있어 상경(上卿)의 장주(章奏)로 인하여 조정의 신료들에게 순문(詢問)하는 일이 있었는데, 예전(禮典)이 매우 중대하니 어렵게 여기고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덕화(德化)가 있으면 종(宗)이라 일컫고 공로(功勞)가 있으면 조(祖)라고 일컫는 것은 곧 당연히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요 공통(共通)된 분의(分義)입니다. 〈조·종〉 두 가지가 모두 성대하고 아름다워서 처음부터 차등이 없는 것이지만 후왕(後王)이 〈공·덕을〉 드날려 찬양하는 정성에 있어서는 특별히 뚜렷하게 드러난 것을 표현하여 칭호를 더하는 것입니다. 우리 순고(純考)께서는 하늘에서 낸 자질(資質)로 전성(前聖)의 계통을 이어 인(仁)에는 정미롭고 의(義)에는 익숙하시어 도(道)를 오래 행하여 덕화를 이루었습니다. 문·무(文武)를 모두 갖추었음은 제요(帝堯)의 덕(德)이고 부지런하며 검소함은 대우(大禹)의 덕이니, 깊으신 인자함과 두터우신 은택은 백성의 마음에 협흡(浹洽)하였습니다.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올바른 도의를 호위하였고 서란(西亂)092) 을 평정하여 큰 기반을 공고하게 한 것에 이르러서는 성대하신 공렬(功烈)이 옛날의 제왕보다도 월등하게 뛰어났으니, 나라 사람들이 백세(百世)토록 잊지 못하여 항상 칭찬하며 은덕 갚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주(周)나라 백성들이 문왕(文王)의 덕(德)의 순수함을 노래하며 하늘과 짝지우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성배(聖配)께서 승하(昇遐)하신 때를 당하여 지난날의 슬픔과 새로운 서러움에 있어 온 나라 백성이 동일한 심정으로 세대가 점차 멀어짐을 슬퍼하고 빛나는 공렬(功烈)을 잊기 어려움을 한탄하였으니, 이것이 중신(重臣)들이 소장(疏章)을 껴안고 궐문(闕門)에서 부르짖게 된 이유인 것인데, 신(臣)은 덕화(德化)를 직접 본 가장 오래 된 사람으로서 더욱 찬송(贊頌)하는 정성이 간절합니다. 막중한 예전(禮典)은 진실로 근거(根據)를 끌어댐이 귀중한 것인데, 역대(歷代)에서 상고하고 모방할 데가 드물으나, 우리 조정에는 본디 전해오는 가례(家禮)가 있어 전후 성왕(聖王)의 제도를 계승할 만하니, 오직 널리 의견을 묻고 의논을 채택하여 제도(制度)·문물(文物)과 의식·절차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의 의논도 대략 동일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대행 대왕 대비전(大行大王大妃殿)의 시호(諡號)를 순원(純元)이라 천망(薦望)하고, 【중정 정수(中正精粹)를 순(純)이라 하고 체인 장민(體仁長民)을 원(元)이라 한다.】 휘호(徽號)를 예성(睿成)·홍정(弘定)이라 천망하며, 전호(殿號)를 효정(孝正)·효휘(孝徽)·효강(孝康)이라 천망하고, 능호(陵號)를 문릉(文陵)·예릉(睿陵)·철릉(哲陵)이라 천망합니다."
하니, 모두 수망(首望)을 삼가 따랐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왕대비전을 당연히 존숭(尊崇)하여 대왕 대비전으로 삼고, 대비전을 당연히 존숭하여 왕대비전으로 삼아서, 존호(尊號)를 올리고 진하(陳賀)하는 행사가 있어야 하는데, 삼가 등록(謄錄)을 상고하여 보니, 존숭하는 예(禮)에 있어 종전에 국휼(國恤)이 있을 때는 3년을 기다린 뒤에 길(吉)한 날을 가려서 거행하였습니다. 지금도 역시 이에 의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로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연달아서 권도(權道)를 따를 것을 청하니, 차마 듣지 못할 바이다. 이런 등등의 말로 다시는 번거롭히고 중복되게 하지 말라.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하였다.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누차의 비지(批旨)에서 이미 심중에 있는 사정을 다 말하였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연계(聯啓)로 복선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런 때에 복선하라는 말을 들으니, 더욱 망극하다. 돌아보건대 내가 어리석어 사리에 어둡지만 스스로 지탱하여 보존할 것이니, 경 등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망극한 가운데에 잇따라 이런 말을 들으니 몹시 박절하다. 양전(兩殿)에 대한 상선(常膳)은 마땅히 우러러 권할 것이다."
하였다. 세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듣고 싶지 않는 말을 지금 또 이와 같이 하니 매우 망극하다."
하였다.
원의계(院議啓)093) 로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런 때에 이런 말은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매우 망극할 뿐이다."
하였다.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이미 앞에서 내린 비답에 유시(諭示)하였으니, 다시는 이로써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
하였다. 세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이미 앞서 내린 비답에서 다 말하였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양전(兩殿)에 대한 상선(常膳)은 마땅히 우러러 권할 것이다."
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연차(聯箚)로 복선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이와 같은 정리(情理) 밖의 말을 하는가?"
하였다. 두 번째 차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미 앞서의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다시는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삼가 《오례의(五禮儀)》와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상고하건대 졸곡(卒哭) 뒤에는 임금의 시사복(視事服)은 베[布]로 싼 익선관(翼善冠)과 베로 싼 오서대(烏犀帶)·백피화(白皮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제(公除)094) 후와 졸곡 전의 시사복에 대해서는 의거할 문헌이 없으므로 병신년095) 에는 정축년096) 에 이미 시행했던 예(例)에 따라 궐내에서 서하(書下)한 것을 상의원(尙衣院)에서 만들어 들이게 했었는데, 경신년097) ·을축년098) ·신사년099) ·갑오년100) ·기유년101) 에도 역시 이에 의거 품지(稟旨)하여 거행하였었습니다. 청컨대 〈지금에도〉 역시 이에 의거해서 거행하도록 할 것으로 해원(該院)에 분부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순종 대왕(純宗大王)의 묘호(廟號)를 빈청(賓廳)에서 회의하여 수의(收議)한 뒤에 하교하기를,
"회의한 것이 이와 같으니, 온 나라가 일제히 같이한 의논이라고 볼 수 있다. 묘호를 올리는 데 대한 의식 절차는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도감(都監)의 칭호를 묘호 도감(廟號都監)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8월 11일 기미
사시(巳時)에 재궁(梓宮)에 은정(銀釘)을 박고 옻칠을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大臣)을 여차(廬次)에서 소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묘호(廟號)를 지금 개의(改議)하려 하는데 내가 이에 대하여 경 등에게 순문(詢問)할 것이 있다. 나 소자(小子)가 순고(純考)와 대행 자성(大行慈聖)의 은덕(恩德)을 보답하려고 한다면, 하늘과 같이 끝이 없다. 지금 대례(大禮)를 행할 시기를 당해 아름다운 칭호를 추상(追上)하여 조그마한 정성이나마 보답하려 하는 것은 곧 소자로서의 정리(情理)인데, 경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영부사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성상(聖上)의 하교를 받들어 듣고서 감창(感愴)한 나머지 자못 흠모(欽慕)하며 칭송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두 분 성인(聖人)에게서 은덕(恩德)을 받으시어 효도가 하늘에 근원하고 바다에 비준할 만함은 신 등이 항상 흠앙(欽仰)하고 감탄했던 바입니다. 바야흐로 강릉(岡陵)과 같은 수복(壽福)을 누리도록 축원을 올리려 하였는데, 갑자기 황천(皇天)이 돌보아주지 않으시어 땅을 치고 부르짖어도 미치지 못하는 가운데에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려 하시니, 정례(情禮)가 화합하여 이루 다 찬축(攢祝)할 수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은 아뢰기를,
"존호를 추상(追上)하는 도감(都監)을 마땅히 설행하여야 하겠는데, 묘호 도감과 더불어 합쳐 설행해야 합니까, 각각 설행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각기 설행할 필요가 없다. 묘호 도감으로 합쳐 설행하고 당상(堂上)·낭관(郞官)도 역시 겸하여 거행하게 하며, 칭호에 있어서는 추상 존호 도감(追上尊號都監)으로 하라."
하였다.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로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누누이 번갈아 가며 청하는가? 다시는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이것이 곧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이미 앞서의 비답에서 다 말하였는데, 또 왜 이토록 번거롭게 청하는가?"
하였다. 세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매양 이런 말을 들으니, 더욱 서럽고 원통한 마음만 간절하다. 양찰(諒察)함이 있어야 될 것이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연계(聯啓)로 복선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애통한 사정(私情)을 누차의 비답에 다 말하였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다."
하였다.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잇따라 이런 말을 들으니, 명완(冥頑)한 나에게 한(恨)만 더하게 된다. 경(卿) 등은 그것을 양찰하라."
하였다. 세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경(卿) 등은 어찌 나의 심정을 양찰(諒察)하지 아니하고 억지로 권하는 것만을 일삼는가?"
하였다.
원의계(院議啓)로 복선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할말은 이미 다하였는데, 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는가?"
하였다.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어제와 오늘의 비답에 이미 다 말하였다."
하였다. 세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이는 이와 같이 번독(煩瀆)하게 할 일이 아닌데, 또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자꾸 말하는가?"
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연차(聯箚)로 복선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왜 이같이 번거롭게 청하는가? 양전(兩殿)에 대한 상선(常膳)은 마땅히 우러러 권하겠다."
하였다. 두 번째 차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왜 이같이 번거롭게 청하는가? 다시는 이런 말을 서로 아뢰지 말게 하라."
하였다.
8월 12일 경신
산릉 도감(山陵都監)의 당상(堂上) 이하를 여차(廬次)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인릉(仁陵)의 국내(局內)를 상세히 간심(看審)하였는가?"
하니, 호조 판서 김병기(金炳冀)가 아뢰기를,
"신(臣)이 명을 받들고 먼저 인릉의 국내를 따라 간심하니, 대왕의 능(陵) 위의 좌변(左邊) 혈(穴)의 뭉친 곳이 풍만하여 여러 지사(地師)들의 말이 모두 십분(十分) 대길(大吉)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금년의 산운(山運)과 부합하니, 합봉(合封)하여도 구애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여러 지사들은 각기 보고 느낀 바를 아뢰라."
하니, 상지관(相地官) 최상관(崔相綰)·김정곤(金貞坤)·박경수(朴京壽)·양종화(梁鍾華) 등이 아뢰기를,
"인릉의 좌변이 아주 안전하여 대용(大用)할 만한 곳이니, 합봉하는 것이 더욱 길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여러 지사들이 모두 대길한 곳이라고 했으므로, 작년에 천봉(遷奉)한 예(禮)가 있었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연계(聯啓)하여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 등이 간곡하게 강박(强迫)함이 이같으니, 마땅히 힘써 따르겠다."
하였다.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로 복선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 등이 빈청과 더불어 아룀에 있어 번갈아가며 간곡하게 청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마땅히 힘써 따를 것을 생각해 보겠다."
하였다.
원의계(院議啓)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미 약원과 빈청의 아룀에 답한 바가 있었다."
하였다.
8월 13일 신유
오시(午時)에 재궁(梓宮)의 은정(銀釘)에 옻칠을 더하였다.
흥양(興陽) 등 고을의 무너지고 물에 잠긴 민가에 휼전(恤典)을 내렸다.
8월 14일 임술
유상필(柳相弼)을 배왕 대장(陪往大將)으로 삼았다.
김보근(金輔根)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순천 부사(順天府使) 이승익(李承益)을 호남 위유사(湖南慰諭使)로 임명하여 열읍(列邑)을 두루 다니면서 직접 구휼을 베풀고 그 이외에 집을 지어 접제(接濟)할 수 있는 방도를 도신(道臣)과 충분히 상의해 확정하고 사유를 갖추어 계문(啓聞)한 다음 행회(行會)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8월 15일 계해
내일부터 시작하여 재궁의 은정(銀釘)에 날마다 옻칠을 더하라고 명하였다.
8월 16일 갑자
오시(午時)에 재궁(梓宮)의 은정(銀釘)에 옻칠을 더하였다.
이원하(李元夏)를 배왕 대장(陪往大將)으로 삼았다.
8월 17일 을축
사시(巳時)에 재궁(梓宮)의 은정(銀釘)에 옻칠을 더하였다.
8월 18일 병인
오시(午時)에 재궁의 은정에 옻칠을 더하였다.
시임·원임 대신(大臣)과 총호사(摠護使) 이하를 여차(廬次)에서 소견(召見)하였으니, 두 번째 간심(看審)하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영부사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새 능(陵)의 합봉(合封) 및 각봉(各封)할 곳을 간심하니, 여러 지관(地官)의 말이 ‘합봉을 하면 국세(局勢)와 혈성(穴星)이 균평하며 둥글고 반듯하여 더욱 안전하고 길한 곳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상지관(相地官) 최정열(崔廷烈)·양종화(梁鍾華)·김정곤(金貞坤)·박경수(朴京壽)·남정두(南定斗) 등을 들어오라 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처음 간심했을 때 이미 순문(詢問)한 바가 있었으나, 금번에 재차 간심하여 보니 보고 느낀 바가 전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니, 최정열 등이 아뢰기를 마치자, 임금이 이르기를,
"여러 지사(地師)의 말이 모두 합봉하는 것이 대길하다고 하니, 망극한 가운데 참으로 매우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산릉(山陵)을 인릉(仁陵)에 합봉하는 것으로 결정하라고 명하였다.
8월 19일 정묘
오시(午時)에 재궁(梓宮)의 은정(銀釘)에 옻칠을 더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문릉(文陵)의 택일 별단(擇日別單)을 아뢰었다.
국장 도감(國葬都監)에서 아뢰기를,
"삼가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상고하건대 지석(誌石)102) 을 자지(磁誌)103) 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신사년·갑오년·기유년에는 모두 오석(烏石)을 들여다 썼습니다. 금번에는 청컨대 각 연도에 행했던 선례에 의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8월 20일 무진
하교하기를,
"인릉(仁陵)의 석의(石儀)를 만약 보충할 데가 있으면 구릉(舊陵)의 석의 중에서 옮겨 쓸 만한 것은 옮겨서 쓰게 하라는 것으로 산릉 도감(山陵都監)에 분부하라."
하였다.
8월 21일 기사
남평(南平) 등 고을의 표류하고 물에 잠긴 민가에 휼전(恤典)을 내렸다.
8월 22일 경오
산릉 도감에서 산릉(山陵)을 이미 〈구릉(舊陵)에〉 합봉한다면 신릉(新陵)에 대한 망릉위(望陵位)를 각각 설치할 필요가 없다고 아뢰었다.
8월 23일 신미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금 이 순조실(純祖室)의 묘호(廟號)와 시호(諡號)에 대하여 다시 의정(議定)하여 들였습니다. 의식·절차를 당연히 마련해야 되는데, 묘호와 시호는 사체(事體)가 매우 근엄(謹嚴)하여 아마도 축문(祝文)만 들이고 행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삼가 등록을 상고하여 보니, 숙종 신유년104) 12월 정종실(定宗室)의 묘호와 시호를 추상(追上)할 때 잇따라 신주(神主)를 고쳐 쓰는 예(禮)를 행했던 일이 있었으니, 마땅히 이 선례를 원용해야 될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방가(邦家)의 아주 중대한 전례(典禮)에 관계되므로 신조(臣曹)에서 감히 마음대로 천단(擅斷)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시임·원임 대신과 외방에 있는 유현(儒賢)들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금 이 순조실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105) 를 올리는 의식·절차를 당연히 마련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늘 존호(尊號)를 올릴 때에는 으레 악장문(樂章文)106) 이 있었으나, 빈전(殯殿)에는 평상시와 달라서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배체(陪體)의 입장에 있어 악장을 한군데는 있게 하고 한군데는 없게 하는 것도 역시 중난(重難)히 여기고 삼가야 할 듯한데, 순조실의 악장문을 있게 하여야 할는지의 여부를 신조(臣曹)에서 감히 멋대로 천단(擅斷)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시임·원임 대신에게 문의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8월 24일 임신
밀양(密陽) 등 고을의 표류하고 물에 잠긴 민가에 휼전(恤典)을 내렸다.
8월 25일 계유
하교하기를,
"산릉(山陵)의 표석(表石)을 인릉(仁陵)에 배설(排設)한 것으로 들여다 쓰라."
고 하였다.
8월 29일 정축
예조에서 아뢰기를,
"낭청(郞廳)을 보내어 수의(收議)하니, 영부사 정원용(鄭元容)은 아뢰기를, ‘악장(樂章)의 찬송(贊頌)하는 말은 옥책(玉冊)을 본뜬 글과 다를 것이 없는데, 그 의식·절차는 본디 겸행(兼行)하는 데 관계되므로 빈전(殯殿)에서 임시로 중지하는 때라고 하여 태묘(太廟)에 응당 있어야 할 의식마저 마련하지 않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지금 악장을 정지하는 때를 당했더라도 여러 악기(樂器)를 진열해 달아만 놓고 사용하지 않은 의미를 헤아려 선례에 따라 지어 올리는 것이 높여야 될 바를 소중히 여기는 뜻에 합당할 듯합니다.’고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의 의논도 대략 동일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들의 의논이 이와 같다면, 이에 의거 시행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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