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11권 철종10년 1859년 3월

싸라리리 2025. 5. 14. 20:37
반응형

3월 1일 신미

김대근(金大根)을 예조 판서로, 유장환(兪章煥)을 형조 판서로, 홍열모(洪說謨)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3월 2일 임신

안태사(安胎使)                     김병교(金炳喬)를 소견(召見)하였다.

 

안태사                     김병교(金炳喬)와 본도(本道)의 관찰사                     정시용(鄭始容)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김기찬(金基纘)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전 목사(牧使)                     김재경(金在敬)을 형조 참의로 삼았는데, 중비(中批)004)                                             에 의한 것이었다.

 

3월 3일 계유

효정전(孝正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반궁(泮宮)005)                                             에서 삼일제(三日製)를 행하였는데, 부(賦)에 유학(幼學) 조병옥(趙秉鈺)·박제관(朴齊寬)을 아울러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3월 4일 갑술

효정전(孝正殿)에 나아가 한식제(寒食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입격(入格)된 유생(儒生)들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 생원(生員)·진사(進士) 가운데 나이 80세 이상인 사람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오위 장(五衛將)을 더 설치하여 단부(單付)하게 하라."
하였다.

 

3월 5일 을해

하교하기를,
"방백과 수령 가운데 탐오스러움이 가장 극심한 자는 침실의 벽에다 써놓았다는 것을 이미 하교한 바 있다. 구중 궁궐 깊숙이 있으면서도 듣기에 놀라운 것이 있으니, 정신(廷臣)들이 절대로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각(臺閣)으로 말하더라도 의당 풍문으로 전하여 들은 것이 있을 터인데도 한결같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하나도 규핵 검속하는 일이 없으니, 이와 같고서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행공(行公)하는 모든 대신(臺臣)들을 아울러 파직시키라."
하였다.

 

정최조(鄭㝡朝)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한긍인(韓兢人)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6일 병자

황해 병사(黃海兵使)                     유광로(柳光魯)와 충청 병사                     염종수(廉宗秀)를 서로 바꾸었다.

 

집의                     정재영(丁載榮)이 소장을 올려 전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기만(金箕晩), 경상 감사(慶尙監司)                     심경택(沈敬澤),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휘림(趙徽林), 전 통제사(統制使)                     유상정(柳相鼎), 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일(金鎰), 남병사(南兵使)                     이형하(李亨夏), 안악 군수(安岳郡守)                     박문현(朴文鉉), 전 정주 목사(定州牧使)                     이정민(李鼎民), 전라도 경시관(全羅道京試官)                     성이호(成彛鎬), 북평사(北評事)                     한진계(韓鎭棨)를 논죄(論罪)하니, 비답하기를,
"과연 이러하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할 수 있겠으며 선비가 어떻게 부거(赴擧)할 수 있겠는가? 너무도 한심스러워 차라리 말하고 싶지가 않다. 진실로 청백(淸白)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어 미더움을 받고 있었다면, 이런 말이 어찌 하여 이르겠는가? 논열한 사람들은 우선 간삭(刊削)시키는 형전(刑典)을 시행하라."
하였다.

 

3월 7일 정축

하교하기를,
"이렇게 적요한 때를 당하여 남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했으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집의                     정재영(丁載榮)을 대사간에 제수하라."
하였다.

 

3월 8일 무인

조연흥(趙然興)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무과(武科) 일소(一所)를 파장(罷場)시키고 시관(試官)들도 아울러 파직(罷職)시켰다.

 

하교하기를,
"무과의 일소를 이미 파장시키기는 하였으나 이것이 경과(慶科)이었으니, 거자(擧子)들로 하여금 낙망하는 데 이르게 해서는 안된다. 3영(三營)의 장신(將臣)들은 이미 받아들인 단자(單子)를 가지고 원래의 규구(規矩)에 의거하여 다시 시취(試取)토록 하라."
하였다.

 

3월 9일 기묘

윤행복(尹行福)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3월 10일 경진

증광 문과(增廣文科)의 복시(覆試)에서 유학(幼學) 이응진(李應辰) 등 33인을 뽑았다.

 

하교하기를,
"무과 일소(一所)의 삭직(削職)된 시관(試官)들을 아울러 분간(分揀)하라."
하였다.

 

3월 13일 계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증광 문과(增廣文科)의 전시(殿試)를 설행하고, 훈련원(訓鍊院)에서 무과 전시(武科殿試)를 설행하였다. 문과에서는 진사(進士) 윤태건(尹泰健) 등 33인을 뽑았고, 무과(武科)에서는 한량(閑良) 박영헌(朴永憲) 등 28인을 뽑았다.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고칠 때의 종부 제조(宗簿提調)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고, 감인(監印)한 정(正)                     박돈수(朴惇壽)에게는 가자(加資)하였다.

 

3월 14일 갑신

서헌순(徐憲淳)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3월 15일 을유

효정전에 나아가 망제(望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3월 17일 정해

함경 감사                     윤치수(尹致秀)의 논계(論啓)로 인하여 북평사(北評事)                     한진계(韓鎭棨)를 죄주었다.

 

3월 18일 무자

이민(李)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유치선(兪致善)을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으로 삼았는데, 중비(中批)에 의한 것이었다.

 

3월 20일 경인

돌아온 세 사신(使臣)을 소견(召見)하였다.

 

3월 21일 신묘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신은(新恩)들의 사은(謝恩)을 받고 하교하기를,
"홍승억(洪承億)이 이제 이미 응방(應榜)하였으니, 일이 매우 기쁘다. 숙선 옹주(淑善翁主)의 사판(祠版)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의 사우(祠宇)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3월 25일 을미

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藥院)의 입진(入診)과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근래 가장 민망스러운 것은 명관(名官)들이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멀리는 월과(月課)의 제도를 모방하고 가까이는 초계(抄啓)하는 규례를 취하여 40세 이하의 문관(文官)은 문형(文衡)·각제(閣提)006)                  로 하여금 초선(抄選)하게 한 다음, 매달 한 번은 각체(各體)의 제술(製述)을 실시하고 한 번은 경서(經書)를 고강(考講)하게 하여 1년 동안의 획수(劃數)를 통계해서 논상(論賞)한다면, 이것이 실제로 문사(文事)를 숭상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문관이 과거(科擧)를 거친 뒤로 전혀 이습(肄習)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뒷날의 수용(需用)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연석(筵席)에서 물러난 뒤에 마땅히 월과(月課)와 초계(抄啓)의 규례를 참고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 입계(入啓)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한 뒤에야 준행될 수 있을 것이다. 시험을 설행하는 초기에는 내가 마땅히 임하여 시권(試券)을 고사(考査)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된 서춘보(徐春輔)는 임신년007)                  에 변란을 진압한 훈로(勳勞)가 가장 드러났으므로 숭질(崇秩)을 추증하기에 이르렀으니, 절혜(節惠)008)                  의 은전(恩典)을 베풀기에 합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관서(關西) 사람 가운데 군진(軍陣)에서 힘을 바친 사람들을 작년에 일일이 추장(追奬)하고 증직(贈職)시켰습니다. 숙천(肅川)의 차형기(車亨基)는 재물을 희사하여 군사들을 먹였고 자원(自願)하여 전진(戰陣)으로 달려갔기 때문에 그때 이미 초사(初仕)의 벼슬에 제배(除拜)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 순영(巡營)의 보첩(報牒)이 추후 도착하였으므로 특별히 병조 참의의 관직을 추증하였습니다. 의주(義州) 사람인 전 첨사(僉使)        박성묵(朴聖默)은 의분에 떨쳐 일어나 전진(戰陣)으로 달려가 적봉(敵鋒)을 무릅쓰고 앞으로 향하였는데, 서림(西林)·정주(定州)에서 매양 먼저 성첩(城堞)에 올라갔으므로 그때 오위 장(五衛將)에 특별히 제수하라는 명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80세가 넘었는데다가 너무도 가난하며 의지할 데가 없다고 하니, 특별히 상을 더하고 이어 본도(本道)로 하여금 미포(米布)를 제급(題給)하게 하소서. 또 개성 유수(開城留守)의 보사(報辭)를 보건대, 본부(本府)의 절충(折衝)        이응복(李應復)도 전진에 나아가 적을 사로잡은 공로가 있었는데 연로(年老)한 몸으로 생존해 있다고 하니, 그에게도 상을 더하는 은전을 베푸소서. 그리하여 조정에서 공로가 있으면 반드시 보답한다는 뜻을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위(金鍏)를 한성부 판윤으로, 이학수(李鶴秀)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3월 26일 병신

이경재(李景在)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3월 27일 정유

용성 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묘소(墓所)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황호민(黃浩民)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병필(金炳弼)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3월 29일 기해

남병철(南秉哲)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3월 30일 경자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원자궁(元子宮)을 안고 나와서 제신(諸臣)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하였다. 영의정                     정원용이 말하기를,
"전하의 복록은 임금으로서 드물게 있는 일입니다. 조종(祖宗)께서 쌓아 오신 덕업(德業)을 계승하고 종사(宗社)가 억만년을 이어갈 경사를 받으셨으며, 곤전(坤殿)께서는 관저(關雎)와 인지(麟趾)009)                                             의 덕이 있고 원자(元子)께서는 천일(天日)과 용봉(龍鳳)의 자태를 지니셨으니, 전하께서는 참으로 아무런 근심이 없다는 문왕(文王)010)                                             이십니다."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