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임오
금오(金吾)와 시임·원임 대신들과 양사(兩司)와 옥당(玉堂)이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김필(金) 등을 도배(島配)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렸다. 집의 이유원(李裕元)이 상소하여 김필(金) 등을 다시 국문(鞫問)하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렸다.
판의금(判義禁) 박기수(朴岐壽)의 벼슬을 파면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친국(親鞫) 때에 금오(金吾)의 거행에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많았고, 이번 배소(配所)를 마련한 것 가운데에서 거제(巨濟)·남해(南海)는 또한 너무 헐한 데 관계된다. 특별히 하교하여 짐작해서 처치하게 하였더라도 왕부(王府)에서 이렇게 함은 마땅하지 못하다. 고쳐 정하여 들이게 하고, 해당 금부 당상(禁府堂上)에게는 파직(罷職)하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여 김필(金) 등을 다시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국청 죄인(鞫廳罪人) 김필(金)은 고금도(古今島)에 감사(減死)하여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고, 유안(柳晏)은 임자도(荏子島)에, 이승규(李承圭)는 녹도(鹿島)에, 이노규(李魯圭)는 진도군(珍島郡)에, 성용묵(成容默)은 여도(呂島)에, 유태동(柳泰東)은 지도(智島)에, 나채규(羅采奎)는 신지도(薪智島)에 배소(配所)를 정하여 압송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5일 병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과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소견(召見)하고, 하교하기를,
"내년에는 우리 자전(慈殿)께서 보령(寶齡)이 마흔에 차시니, 소자(小子)가 세월이 가는 것을 아깝게 여기는 효성으로서 경축을 어찌 그만두겠는가? 삼가 무자년057) 의 전례에 따라 진작(進爵)하는 예(禮)를 거행함이 마땅하다. 그래서 대내(大內)에서 여러 번 앙청하였으나, 자전께서 의절(儀節)을 크게 벌이게 되고 사정(私情)이 비통하시다 하여 애써 따르시겠다는 말씀을 내리시지 않으니, 아랫사람의 심정이 어찌 서운함을 금하겠는가? 이미 오늘 같은 경우의 근거를 댈 전례가 있으므로, 경사를 닦는 데에는 얽매일 것이 없겠으나, 겸양하시는 자심(慈心)을 우러러 몸받아야 하니, 또한 감히 누누이 힘써 청할 수 없다. 진작하는 일은 정성을 펼 때가 절로 있을 것이니, 정월 초하룻날에 표리(表裏)·치사(致詞)·전문(箋文)을 친히 올리고 백성에게 알리는 등의 절차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마련하여 들이게 하라."
하였다.
서기순(徐箕淳)을 형조 판서로, 홍재철(洪在喆)을 한성부 판윤으로, 정태동(鄭泰東)을 함경 남도 병마 절도사로, 채학영(蔡學永)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11월 6일 정해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문신 이문 제술(文臣吏文製述)을 행하였다.
11월 7일 무자
하교하기를,
"제향(祭享)의 소중함이 어떠한데 원릉(元陵)·수릉(綏陵)·경릉(景陵)의 제사에 쓰고 남은 약과(藥果)가 아주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는가? 어찌 이러할 도리가 있겠는가? 해당 전사관(典祀官)은 나문(拿問)하여 엄히 감죄(勘罪)하고, 봉상시(奉常寺)의 원역(員役)과 숙수(熟手) 등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법에 비추어 엄히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11월 11일 임진
이가우(李嘉愚)를 한성부 판윤으로, 이정신(李鼎臣)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11월 14일 을미
이가우(李嘉愚)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정현(尹定鉉)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1월 20일 신축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소대(召對)하였다.
박기수(朴岐壽)를 한성부 판윤으로, 이희장(李熙章)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11월 22일 계묘
희정당(熙政堂)에서 소대(召對)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독(講讀)하였다.
서희순(徐憙淳)을 병조 판서로, 김난순(金蘭淳)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11월 23일 갑진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지금 경상 감사 이계조(李啓朝)의 장계(狀啓)를 보니, 문경현(聞慶縣)의 전답을 낱낱이 다 개량(改量)하여 총계를 잡고, 면세할 것과 묵은 전답을 덜면 현재 경작하는 실총(實摠)은 1천 9백 22결(結) 25부(負) 영(零)이 되는데, 을사년058) 에 비하여 밭은 3백 10결 3부 영이 줄고 논은 3백 99결 73부 영이 늘었다 합니다. 올해부터 새 양안(量案)으로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5일 병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약원(藥院)의 입진(入診)을 행하였다.
11월 26일 정미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승지(承旨)들에게 명하여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11월 28일 기유
윤정현(尹定鉉)을 이조 참의로, 남병철(南秉哲)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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